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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4-09 00:57:27

한국외국어대학교/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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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한국외국어대학(1954~1980) 학장3. 한국외국어대학교(1981~) 총장

1. 개요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을 설명하는 항목이다. 2018년 기준 김인철 행정학과 교수가 총장이며 연임에 성공하여 임기는 2022년 2월 28일까지이다.

인적· 자원에 있어 정부에 많은 부분을 의지한 대학답게, 초기에는 주로 문교부에서 파견된 교직원들이 대다수였고, 당연히 총장도 정부에서 파견된 명망 있는 교수들이 맡곤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자교 졸업생들이 많이 배출된 지금의 외대는 교수 중 자교 출신이 가장 많은 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1] 이에 따라 자연히 처장급 인사들이나 총장 역시 거의 자교 출신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2]

총장은 교수협의회 주도로 운영되는 총장후보추천위원회가 총장 후보 2인을 이사회에 추천하고, 이사회가 그 둘 가운데 한 명을 결정하는 식으로 선출된다. 이사회에 추천할 총장 후보는 교수 전원 직선제 투표를 거쳐 뽑힌다. 1차와 2차에 걸쳐 투표를 한 뒤 최종 1위와 2위를 이사회에 총장 후보로 올리는 식이다. 총장의 임기는 4년이며 연임제로 운영된다.

2. 한국외국어대학(1954~1980) 학장

생몰년도는 1902년 1973년. 함경남도 함주 출신이며, 1918년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의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세이소쿠영어학교에 입학하여 대학진학을 준비하던 중 건강을 해쳐 부득이 학업을 중단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휴양하던 중 함흥에 와 있던 캐나다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우고 1923년에 경성고등상업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했다. 그해에 춘천고등보통학교(지금의 춘천고등학교) 교유(敎諭)로 피임되어 영어를 담당, 교육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1929년 경성공립제2고등보통학교[3]로 전임되어 1945년까지 재직했다. 광복 후 경성의학전문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역임하던 중 1950년 3월 미국 국무부 초빙 교환교수로 도미하였다가 6·25 사변이 일어나자 미국 국방부 문관으로서 귀국하여 3년여 동안 미군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1954년 본교 개교와 더불어 초대학장으로 취임, 1955년까지 직을 맡았으며, 그 이후에도 1958년까지 외대에서 봉직하였다.

생몰년도는 1902년~ 1983년. 서울 출신이며, 1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 때 3·1운동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당시 외국선교사들과 접촉이 잦았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영어에 관심을 갖게 되어 연희전문학교 영문과에 다녔고 졸업 후 1924년 휘문고등보통학교(현재의 휘문고등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휘문고보 재직 중 1937년 일본문부성 영어과교원검정고시에 합격했고, 같은 학교 교장직을 퇴임한 뒤 1947년 연희대학 영문과 교수로 부임했다.
6·25전쟁 중인 195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제자였던 당시 재무부 장관 백두진의 천거로 사회부 장관(현재의 보건복지부장관)으로 발탁되어 능숙한 영어실력을 토대로 엔민사처(UNCAC)를 비롯한 해외원조기관 등에 우리 나라의 참상을 호소, 많은 원조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사회부장관 퇴임 후 1955년 본교 교수 및 학장으로 부임하여 1977년 정년퇴임 때까지 영문법 등을 강의하면서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학장직을 수행하면서도 꼭 강의를 맡아 가르쳤는데, 낱말 하나하나의 기능과 의미를 꼼꼼히 분석, 학생들이 영어문장을 완벽히 이해하도록 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 서울캠퍼스에 이 분의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학내에서는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

1905년 멕시코 유카탄 지역으로 이민을 갔으며 한인학교였던 진성국어학교를 다녔다. 그 후 메리다에서 생활하다가 1921년에는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여 신학교에서 공부하였지만, 병으로 인해 그만 두고 메리다로 돌아왔다. 1922년에는 메리다지방회 외교원을 지냈고, 그 뒤에는 교육위원을 맡아서 한인 2세들을 교육하는데 전념했다. 1941년 5월에 멕시코시티로 옮긴뒤, 묵경지방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태평양전쟁 당시에 한인의 안전 보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후 묵경지방회는 폐쇄되었으나, 오랜 시간 후 한종원은 직접 묵경지방회를 부활시키기에 이른다. 이에 더해 멕시코시티의 3대 일간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과 한국의 독립운동, 멕시코 한인들의 입장을 게재하는 등 멕시코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을 장려했다.
그 뒤 멕시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서, 베라크루스의 할라발대학과 멕시코국립대학교 등에서 역사학 교수를 지냈다. 194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인 김동성과 함께 친선사절로 활동하였으며, 1955년 12월 11일에 귀국하여 본교 서반아어과 주임교수를 맡았다. 1956년에 주미대사 양유찬의 수행원으로 남미 20여개국을 탐방한 뒤, 1960년 6월 17일부터 1961년 1월 19일에 본교 학장서리를 지냈다가 멕시코로 돌아갔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재외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장려하고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외교사에도 한 획을 그은 인물.

생몰년도는 1905년~ 2003년. 경북 안동 북후면 연곡동의 평범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구고통보등학교[4]와 일본삼고를 거쳐 1929년 일본 동경제국대학교 영문학부를 졸업했다. 부산 동래고보[5] 교사를 거쳐 1947년부터 1960년까지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1961년 1월 20일부터 1961년 12월 31일까지 본교 총장을 지냈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 제7대 서울대 총장을 지냈다. 1950년대 초반에 이양하 서울대 영문과 교수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영한사전인 '포켓 영한사전'(포켓 잉글리시 딕셔너리)을 펴냈다. 1950년대 말에 발간한 중고교용 학습교재 '모던 잉글리쉬'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63년 한국셰익스피어협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학술원 종신회원으로서 말년까지 연구활동에 전념했다. 수필집 '무위의 변'과 '낙엽'을 펴냈다.





3. 한국외국어대학교(1981~) 총장








스페인어과 교수.
총장 재임 시절에 해고무효소송이나 퇴직금청구소송, 인권위처분취소소송 등 학교가 당사자인 소송의 변호사비용 등 12여억원을 교비에서 지출해 사용한 혐의가 인정되어 2017년 1,0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박철 전 총장은 선고가 부당하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행정학과 교수.
2013년 교수협의회 2차 투표에서 64.76%의 압도적인 득표로 1위를 차지하였고 법인이사회의 결정으로 차기 총장에 공식 선임되었다.

김 총장은 선거 당시 등의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워 중장기적 과제를 해결하겠다는 발기찬 포부를 밝혔으나 4년이 지난 현재는 허울뿐인 공약이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오히려 친일파인 학교 설립자 동상의 일방적 설립, 상대평가 소급 적용 통보, 박철 전 총장 명예교수 임명 논란 등 재임 기간 내내 불통과 독선 어? 행정으로 학생들의 신뢰는 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이 와중에 김 총장이 2017년 10월 불거진 학점특혜 의혹의 당사자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학생들의 사퇴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 해 제11대 선거에 출마해 교수협의회 결선 투표에서 55.7%를 득표해 40.7%를 득표한 프랑스어과 유기환 교수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였고 12월 8일 법인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연임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의 사퇴 요구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순탄치 않은 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1] 그도 그럴 것이 특수외국어 학과 같은 경우 자교 외에는 전공자를 배출하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2] 2017년에 열린 제 11대 총장 선거에서는 8명 중 6명의 후보가 자교 출신이었다. [3] 지금의 수도여자고등학교 [4] 현재의 경북고등학교 [5] 현재의 동래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