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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9:20:45

한국야구사

1. 개요2. 야구의 도입
2.1. 야구의 상륙2.2. 동경유학생 야구단
3. 학생야구
3.1. 학원야구 창단 붐3.2. 최초의 대회3.3. 대학야구의 창단
4. 한국실업야구 (1946년~ )5. 한국야구선수권대회/ KBO 리그 (1982년~ )6. 한국 야구사 연표
6.1. 구한말, 일제강점기6.2. 광복 이후
7. 관련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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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야구 역사를 정리한 문서.

2. 야구의 도입

2.1. 야구의 상륙

1904년 필립 질레트가 YMCA 선교단으로 조선 땅을 밟은후, 선교단이 캐치볼을 하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조선인들을 보고 선교에 활용하기 위해 야구장비를 도입해온 것이 한국의 야구도입의 시초로 보고 있다.[1] 필립 질레트는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단 황성 YMCA 야구단을 조직하고 야구의 규칙, 기술등을 가르치며 장비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국에 온 선교사들과 연습게임을 하면서 규칙을 익혀 나갔고 특히 하령회(夏令會, 여름철 목회자들의 수련 및 휴가 모임)를 맞아 개신교 세가 강했던 평안도 평양, 선천 등지에서 올라온 선교사들과 연습경기를 자주 가리며 실력을 키워 나갔다.

기록상 남아있는 최초의 공식 야구 경기는 1906년 3월 15일에 훈련원 공터[2]에서 덕어(德語)학교[3] 간의 경기였다. 이날 경기의 자세한 내용은 남아있지 않으나 YMCA 야구단이 3점차이로 패배를 기록했다는 것만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후 엿새 뒤에도 덕어학교와 리벤지 매치를 가졌으나 2점 차 패배를 당했다.

1906년 4월 7일에 일어학교 영어학교간의 야구경기가 독립문 앞에서 야구경기를 가지는 등 야구가 서서히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휘문의숙에서 야구부를 창단하며 본격적인 사립학교 야구부가 창설되기 시작했다. 관립중학교 야구부가 1908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4]

당시 조선의 야구단들의 경기는 꽤나 열악했는데, 도입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선수들이 야구규칙도 숙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공 자체의 탄성도 좋지 않은데다 경기시설도 매우 열악했다. 포지션도 9명이 전문적으로 훈련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내야수 3명에 외야수 2명만을 세워 게임을 가진 것도 있고 값비싼 글러브[5]가 없어 글러브를 낀 사람보다 맨손으로 수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야구 규칙의 중요성 때문에 심판 육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최초에는 질레트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심판 역할을 맡고 있다가 대한민국 최초의 심판인 김영제(金永濟)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며 조선인 심판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6]

황성 YMCA 야구단의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야구발전에 활약하기도 했고 허성, 현동순, 현홍운 등이 선수생활을 그만 둔 후 심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 사건들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로 YMCA 야구단이 있다.

2.2. 동경유학생 야구단

최초의 야구팀들이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야구를 펼칠 무렵 조선야구 발전에 큰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동경유학생들로 구성된 야구단의 방한이었다. 일본은 이미 1873년[7]에 야구가 도입되었고 조선과는 야구경력이 30년 이상 차이나던 시기였다. 이런 일본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은 야구실력이 상당히 좋았다.

박석윤( 동경제대), 서상국( 와세다대) 등은 각학교 에이스로 활약하며 출중한 야구실력을 선보였는데 대한흥학회의 주도로 1909년에 조직된 모국방문단중 일원으로 합류했다.[8] 동경유학생 야구단은 당시 조선에서 적수가 없던 황성 YMCA 야구단과의 경기에서 19:9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고 평양시, 선천시등을 돌아다니며 선교사들과 대결하거나 자체청백전을 펼치며 야구보급에 앞장섰다.

동경유학생 야구단의 활약으로 고급장비와 유니폼등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고, 압도적인 야구수준에 충격을 받은 황성 YMCA 야구단이 기량향상을 위해 노력했고 1913년 11월에 한국 스포츠사 최초로 일본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이름과는 달리 이 야구단은 '동경'( 도쿄)의 학생들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고 일본각지의 대학에 재학중인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일본하면 동경이었고 그래서 동경유학생이라고 쳐서 불렀다.

3. 학생야구

3.1. 학원야구 창단 붐

기록상으로 최초의 학원야구부는 휘문의숙 야구부였다. 휘문의 뒤를 이어 1911년 경신학교, 중앙학교, 배재학당, 보성학교, 오성학교등 중학야구의 창단이 줄을 이었다. 1910년대 야구부를 보유하고 있던 중등학교는 다음과 같다.
배재학당, 경신학교, 광명의숙, 개성학교, 광성의숙, 양정의숙, 계성학교, 보성학교, 오산학교, 대성학교[9], 오성학교

미국인 교장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빠른 성장을 보인 경신학교, 홍준기, 이석찬등을 앞세워 당대 최강의 중등학교 팀으로 성장한 보성학교, 동경 유학생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912년에 두번째로 방문한 동경유학생 야구단을 상대로 선전을 펼친 대성학교등이 눈에 띄는 학교였다.

3.2. 최초의 대회

1915년 8월 18일에 일본의 전국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가 개최되자 이에 자극받은 한국은 그해 11월에 중앙 YMCA[10]에서 경서시내 중등학교야구대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반도에서 열린 최초의 공식야구대회였다. 훈련원 구장에서 열린 이 대회는 배재학당, 보성학교, 희문의숙, 청년회관 이상 4개팀이 참가해 홍준기의 역투와 주장 이원용의 활약으로 청년회관이 우승하게 되었다. 청년회관팀은 이어 1916년 7월에 경성시내 최강의 중등야구팀이었던 경성중학과의 경기에서 15:2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11]

그러나 이 대회는 단발성 대회였고 학교끼리 친선전을 가지는데 그쳤고 1920년 조선체육회의 창설과 더불어 그해 11월에 창립기념으로 열린 전조선야구대회에 소학부, 중학부가 창설되며 숨통이 틔였다.

1921년부터 갑자원 대회가 조선대표의 참가를 허용하자 휘문고보가 1923년 예선에 처음으로 출전해 경성중학을 꺾고 갑자원대회 본선에 진출, 만주대표 대련상을 꺾고 8강 진출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후 한국인으로 구성된 야구팀이 고시엔 예선통과를 한적은 없으며 아쉽게 탈락한 적은 배재고보(1923년 경성중학에 패배), 동래고보(1932년 평양중학에 패배)등 두차례 뿐이었다. 갑자원의 국내 예선이 허용되자 한국의 중등학교들은 야구팀을 창단하게 되었다.

1925년에 조선일보 고시엔을 본떠 중등학교야구리그전을 신설했고 전조선야구대회를 후원하던 동아일보는 4구락부연맹전[12]을 신설했으며 1931년에는 연희전문학교에서 주최한 연희전문중학야구대회가 열리게 되는등 학생야구 대회의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2년에 일본문부성의 허가 없이는 야구대회를 열지 못한다는 야구통제령이 내려지며 학생부는 폐지가 되며 실업야구만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 1941년에 공식야구경기금지로 이어지며 학생야구는 암흑기에 접어든다.

그러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대한민국 고교 야구는 다시금 기지개를 펴는데 1946년 청룡기를 시작으로 1947년 황금사자기, 1967년 대통령배, 1971년 봉황대기등 메이저 고교야구 대회가 탄생하고 이에 고교야구 붐이 일면서 1970년대에는 고교야구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고교야구 1개 대회를 마치면 해당 신문사의 몇달치 월급이 나올 정도였다고. 그러나 1981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프로야구의 인기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이유로 야구계는 의도적으로 고교야구를 배척했고 결국 뿌리마저 뽑히게 될뻔했다[13].

2011년부터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손을 잡고 고교야구 주말리그가 진행되고 있으며 메이저 대회들도 전국대회만 제외하고 모두 폐지되는 등 여러가지 변화가 일고 있다.

3.3. 대학야구의 창단

대학야구는 1922년 송도고보 출신 최규남의 주도로 창단된 연희전문학교 야구부가 최초다. 이듬해 해체하긴 했지만 1925년에 부활해 지금까지 이어졌고 1923년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야구부가 창설되기도 했다. 연희전문학교이 경우 1927년 봄부터 유억겸 학감이 직접 스카우트에 나서 쟁쟁한 중등야구 선수들을 데려와 막강한 실력을 자랑했다.

4. 한국실업야구 (1946년~ )

한국실업야구/역사 항목 참조.

5. 한국야구선수권대회/ KBO 리그 (1982년~ )

KBO 리그 역사 항목 참조.

6. 한국 야구사 연표

6.1. 구한말, 일제강점기

6.2. 광복 이후

7. 관련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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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재판본은 붉은 표지를 가지고 있다.
한국야구위원회 대한야구협회가 1999년에 편찬한 책. 유홍락, 천일평, 이종남이 저술했다. 한국의 야구역사를 총 망라한 책으로 박동희가 "'한국야구역사의 바이블"'이라고 칭한 책이다.

1597페이지의 무지막지한 분량을 자랑하며 대한민국 야구도입년도인 1904년부터 1998년까지의 야구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출판 당시 정가는 50,000원으로 가격도 무지막지 하다. 그래서 찾아보고 싶다면 중고로 구매하기보다 국립중앙도서관 같은 국가대표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 규모가 큰 도서관에 웬만하면 비치되어 있으니 그곳에서 열람하거나 대출하는 것이 더 낫다.


[1] 동아시아에 격구(擊球), 타구(打球)라고 하여 땅에 놓인 둥근 물체를 긴 장대로 치며 노는 전통 놀이가 있었는데, 이는 대체로 말을 타면서 하는 경기 내지는 군사훈련의 일환이었으므로 서양의 폴로 하키 정도와 유사하지 야구와는 도입 초창기에 그 이름을 따 온 것을 빼면 별 관련이 없다. [2] 서울 을지로 종합의료원 왼편. 조선 때부터 군사 훈련을 담당하던 조정 관청인 훈련원이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폐지되면서 이후 이 자리에는 훈련원공원이 들어선다. [3] 독일어를 가르치는 학교. 덕국(德國)은 지금도 한자 문화권에서 독일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4] 창설 자체는 1905년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본격적으로 야구무대에 이름을 알리는 것은 1908년 가을부터다. [5] 당시 야구장비는 전량 미국에서 수입해왔는데 미국에서도 비싼 물건이었던 만큼 조선에서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당시 기준으로 야구배트의 가격은 1원 50전으로 쌀 한가마니의 가격인 3원의 절반에 달했고, 글러브의 경우에는 5원 50전으로 쌀 2가마니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 [6] 특이한 점은 당시선교사들이 외국인들이다 보니 판정할때 반드시 영어로 해야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이는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의 대회요강에도 명기되었다. 또한 스트라이크, 볼, 아웃 이외에도 니어(near), 로우(low), 하이(high)등의 형용사를 덧 붙였다. 예를들어 낮은 볼이면 로우 볼(low ball), 스트라이크에 가까우면서 스트라이크가 아닌 공을 니어 스트라이크(near strike)라고 불렀다. [7] 참고로 메이저리그가 1876년에 창설되었다. [8] 1909년~1937년까지 10여차례 간헐적으로 이루어진 행사. 모국방문단은 일본에 비해 떨어져있는 교육수준등을 가진 민족을 계몽하고자 학술발표회, 농촌계몽활동, 학예활동, 체육활동등을 전개했다. 그중 하나가 동경유학생 야구단인것. [9] 도산 안창호가 창립한 학교. 1909년에 방문한 동경유학생 야구단의 일원이었던 조기풍, 김현재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수들을 불러 모았고 동경우에노미술학교에 재학중이었던 김찬영과 김관호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코치를 맡으며 선수를 지도했다. [10] 1913년 황성 YMCA가 일본연맹 산하로 들어가며 이름이 바뀌었다. [11] 청년회관팀은 자신들의 전신인 황성 YMCA 야구단 처럼 일본원정을 준비하는데 바로 고시엔 참가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한반도의 야구는 과도기에 있다."며 거부했는데 당시 전적으로 봤을땐 갑자원대회에 자신들의 식민지하의 국민들의 참가를 막기위한 술수였다고 볼수밖에 없다. [12] 배재고, 휘문고, 중앙고, 경신고가 연합해서 만든 것이 4구락부연맹위원회이다. [13]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는게 바로 그 고교야구로 인해 프로야구 출범의 기초가 다져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향토대항전도 없어 확실한 지역연고를 다져놓지 못해서 한동안 애를 먹었던 축구의 예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복받은게 야구다. 더구나 이 고교야구를 통해 양질의 인재를 공급받을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야말로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 생각 못하는것'과 다름없다. [14] 이전에도 한반도에서 외국인들이 야구를 했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으나 조선에 야구를 전파한 인물은 필립 질레트이다. [15] 현재 서울특별시 을지로 공원. [16] 대한민국 최초의 방송국. [17] 이전까지는 춘계, 추계리그를 따로 개최해고 그 사이에 백호기 대회를 진행했다. [18] 엔젤 리베라라는 인물로 주한미군 8군에서 근무했던 고문관이었다. 군내에서 말 안 듣는 사람을 일컫는 그 뜻이 아니고 직책이 고문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