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09:57:08

한국실업야구/역사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한국실업야구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한국실업야구/역대 참가 구단
,
,
,
,
,


1. 구한말~일제강점기2. 초창기(1946~1950년대)3. 중반기(1960년대)4. 부흥기(1970년대)
4.1. 1977년4.2. 1978년4.3. 1979년4.4. 1980년4.5. 1981년
5. 침체기(1980년대~2000년대)6. 부활 시도(2009년~)

1. 구한말~일제강점기


1904년 필립 질레트의 주도로 창설된 황성 YMCA 야구단의 탄생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야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13년, 황성 YMCA 야구단과 호각을 다투던 일본인 야구팀인 성남구락부가 해체된후, 성남구락부의 주축멤버들이 철도국에 모여 용산철도국이 창단하게 되었고 이어 오성학교 출신들과 황성 YMCA 야구단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오성구락부가 조선야구 최강자에 도전하는 팀으로 떠올랐다. 오성구락부는 홍준기(투수), 장두칠(투수), 박천병(포수), 이상호(포수), 이원용(1루수), 이운호(2루수), 이석찬(3루수), 황영일(유격수), 방한용(좌익수), 이태훈(좌익수), 박승철(중견수), 이관수(우익수)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1914년에 방문한 제3차 동경유학 야구팀을 상대로 첫날 경기는 19:12로 패배, 둘쨋날에서는 9:8로 승리를 거두며 1승 1패를 기록해 자신들의 실력을 만천하에 알렸다.
파일:external/azine.kr/201207011530189808.jpg
1919년 황성기청 야구단.[1]

이어 11월 10일 당대 최강의 야구팀으로 불리던 용산철도국과의 훈련원에서 가진 경기에서 14:13으로 1점차 승리를 거두며 당대 최강이라는 이름을 오성구락부가 가져가게 되었다.[2] 이후 용산철도국은 자존심을 되찾기위해 오성구락부에 도전장을 냈으나 또다시 9:5로 승리를 거두며 당시 나라를 잃은 한국인들에게 통쾌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 2번의 승리 이후 오성구락부는 용산철도국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3] 1915년 6월 13일, 용산철도구장에서 열린 조선공론사 주최 전조선야구대회에서 4:1로 7회 콜드게임을 당했으며 10월 31일에 철도구락부가 개최한 경룡추계야구대회에서도 아쉬운 패배를 맞이했다.

1917년 이후 오성구락부를 비롯한 실업야구팀들은 경제적인 여건이 열악해[4] 실업야구의 힘은 대폭 빠지게 되었고 중학야구팀들만이 한반도의 야구의 주축을 담당했다.

1920년대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부 총독이 청년회와 청년회구락부를 조직하라는 강령을 내리게 되고 이것이 한반도스포츠 발전으로 이어진다. 야구뿐 아니라 축구, 정구등을 중심으로 구락부가 생겨났고 이들간의 교류가 이어지며 선수들의 경기력이 향상 된 것이다. 또한 전조선체육대회에서 청년부, 전문부가 생기며 전문적인 대회 참가로 야구발전에 한발짝 더 나아갔다.
파일:external/azine.kr/201207011534369372.jpg
1920년 5월 23일 일요일에 열린 조선 최초의 야구경기 입장 티켓.

그리고 1922년 메이저리그 올스타팀 방한, 1925년 시카고대학 야구팀, 미국여자야구단이 방한하는 등 국제적인 이벤트가 열리기도 했다. 또한 1923년 5월 23일, 미국에서 유학을 다녀온 허성의 주도로 심판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인 조선야구심판협회가 창설되었다.[5] 그 후 1930년 9월 13일, 조선일보 사옥에서 야구발전의 제반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협회의 기능은 심판업무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1925년 10월에는 경성운동장이 건립되었다.

한반도에는 관청, 실업팀이 존재했었는데 이들이 모여 1927년 9월에 경성실업 연맹이 결성되었다. 가입팀은 식산은행 야구팀, 체신국 야구팀, 경성전기 야구팀, 용산 철도국 야구팀 이렇게 4팀이었고 1929년 봄에 경성부청 야구팀이 5번째 팀으로 연맹에 가입한다. 경성실업연맹은 1940년 봄철 연맹전 까지 존속하게 된다. 그러나 각종 관공서와 제조업을 독점하고 있던 일본인들을 위한 조직이었던 경성실업연맹은 한국인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한국인들의 성인야구는 간혈적으로 한국인들 팀들끼리 만나 경기를 가지는, 지금의 사회인야구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1927년 9월, 경성실업연맹이 창립되자마자 주최한 경성실업야구연맹전에서 한국 최초의 방송사인 경성방송국이 실업야구 최초의 중계를 하면서 야구장을 찾지 않아도 경기를 알 수가 있었으며[6] 3년후인 1930년에는 중계횟수가 70회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 했다.[7]

일본의 도쿄일일신문사는 "흑사자기 쟁탈 전일본 도시대항 야구우승대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일제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하에 있던 한국, 대만, 만주 등의 야구팀들이 자신들의 고장의 명예를 걸고 정상을 다투는 대회였다. 한국은 국가대표팀인 전조선대표팀이 출전했다.
그러나 1932년 4월 1일 에 조선총독부가 야구통제령을 시행하며 일본문부성의 허가를 받지 못한 대회는 모두 폐지되었고 이때문에 일부 야구명문학교와 일본 야구팀이 참가하는 야구대회를 제외한 대회가 폐지되었고 에 들어선 30년대 말 이후, 1938년에 조선체육회가 일본인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흡수, 1941년 공식야구경기전면금지, 1943년에는 야구를 포함한 모든구기경기금지 등으로 이어지며 한반도 야구는 암흑기에 들어가게 된다.[8]

1934년과 35년에 일반부에 겨우 두 팀씩 나와 단판승부로 우승팀을 가리는 초미니대회로 전락해 버렸다.

2. 초창기(1946~1950년대)

한성실업야구연맹 초대 8구단
금융조합연합회 야구단 조선운수 야구단 조흥은행 야구단 경성전기 야구단
남선전기 야구단 조선전업 야구단 삼국석탄 야구단 중앙실업 야구단



1946년 3월 25일 식산은행에서 한성실업야구 창립을 선포했다. 장회택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한 "한성실업야구 연맹"에 야구팀들이 합류했는데, 연맹의 최초의 가입 팀은 금융조합연합회 야구팀, 조선운수 야구팀, 조흥은행 야구팀, 경성전기 야구팀, 남선전기 야구팀, 조선전업 야구팀, 삼국석탄 야구팀, 중앙실업 야구팀 이렇게 8개팀으로 구성되었다.

7월 25일부터 3일간 한성실업야구연맹에서 최초로 주최한 야구대회인 "한성실업야구 창립 기념 대회"가 열렸다. 대한야구협회와 자유신문사가 후원한 이 대회에 서울구락부, 중앙실업 야구팀, 철도국 야구팀, 계림구락부 등 총 5개팀이 참가해 대결을 펼쳤다. 이 대회에서는 중앙실업 야구단이 계림구락부를 7:2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가 종료된 이후 9월 25일부터 "한성실업야구 추계 1차연맹전", "10월 10일 부터 추계 2차 연맹전"을 개최했다.

추계 1차연맹전에서는 총 10개팀이 참가했는데 다음과 같다.
연맹전은 토너먼트로 진행되었는데 1차 추계연맹전에서는 식산은행 야구단과 조선운수 야구단이 결승전에서 맞붙었지만 조선운수 야구단의 기권으로 식산은행이 실업야구 초대 우승팀으로 등극했다.

추계 2차연맹전에서는 위의 10개팀에서 재우구락부가 추가로 참가, 총 11개팀이 접전을 벌였고 초대 우승팀이었던 식산은행 야구단과 체신국야구팀의 결승전이 성사되었다. 다만 체신국 야구팀이 기권을 하면서 식산은행 야구단이 실업야구 첫 2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연맹전 사이에 쉬는 기간에는 경성전기 야구팀, 남선전기 야구팀, 조선전업 야구팀 등 전기회사끼리 "전업단 리그"를 구성해 인기를 끌었다.

다음해인 1947년 2대 회장인 하상용 회장이 취임했고, 이해부터 춘추제로 리그를 나누어 진행했다.
청군 남선전기 야구단, 경성전기 야구단, 삼국석탄 야구단, 전업 야구단, 식산은행 야구단, 체신청 야구단
백군 중앙실업 야구단, 서울시청 야구단, 철도청 야구단, 금련 야구단, 조선운수 야구단, 조흥은행 야구단

4월 26일부터 12개팀이 참가한 춘계연맹전에서는 남선전기 야구팀과 조선운수 야구팀이 결승전에서 만났고 조선운수 야구팀이 9:2로 승리를 거두었다. 추계연맹전은 9월 15일에 개막, 춘계연맹전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10월 1일에 열린 결승전에서는 춘계연맹전 우승팀인 조선운수 야구팀이 이영민을 투수로 내세운 식산은행 야구팀을 8: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50년, 6.25가 발발, 리그가 중단되었지만 부산과 대구에서 한차례씩 연맹전을 치르기도 했다. 이때 많은 선수들이 군에 입대하였고 이때문에 1953년 3월에 육군 야구단 창단을 시작으로 공군 야구단도 창단, 뒤이어 해군과 해병대 야구단도 창단 되었다.

1953년에 종전이 되었고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 가던 1955년에 실업야구는 다시 일어섰다. 4월 24일부터 서울 운동장에서 종전후 열린 첫번째 연맹전인 춘계연맹전이 열렸다. 금융조합연합 야구단, 조선전업 야구단, 체신부 야구단, 조선방직 야구단, 조선운수 야구단등 5개팀이 참가한 이 대회는 풀리그로 진행되었고 3승 1무를 기록한 금융조합연합 야구단이 우승을 차지했다.

그뒤 경향신문사가 주최하는 백호기 실업야구 쟁패전[9]이 5월 29일부터 서울 운동장에서 열렸다. 1회 백호기에선 남선전기 야구단, 금융조합연합 야구단, 조선운수 야구단, 공군 야구단, 육군 야구단이 참가했고, 육군과 금융조합연합 야구단이 각각 3승 1패를 기록하며 공동우승을 차지했다.

추계대회는 광복절 경축을 기념해서 8월 16일부터 5일간 개최되었고, 역시 풀리그로 진행, 4전 전승을 기록한 조선운수 야구단이 우승을 차지했다.

1956년 한국일보가 주관한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이 한국을 방문 한 이후 1961년 일본 실업팀이 한국 방한 경기를 치르면서 한국 야구계에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게 된다.

1959년 8월 26일 대한야구협회 대의원대회에서 실업야구 연맹을 승인해줬고, 이를 바탕으로 금융조합연합회 박수희회장을 실업야구연맹 초대 회장으로 추대, 금융조합연합회 야구팀, 교통부 야구팀, 남선전기 야구팀, 육군 야구팀으로 구성된 실업연맹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1960년에 대한야구협회에서는 정식으로 대한야구협회에 가입된 연맹으로 정식 승인해주었다.

3. 중반기(1960년대)

파일:attachment/한국실업야구/역사/59.png
1964년 제 14회 실업야구 개최 기사

1960년에는 한국 전쟁때 해체된 팀들이 많아 10개의 팀에서 불과 3개팀만이 남았었다. 남선전기 야구단[10], 농업은행 야구단[11], 한국운수 야구단 단 세팀뿐이었다.[12] 당시 최강은 농업은행 야구단이었다고.

1959년에 전쟁으로 유명무실해졌던 실업야구연맹을 다시 발족해 농업은행, 한국운수, 교통부, 남선전기, 육군 등 5개 팀으로 재정비했다. 군사정권 수립 이후 일본과의 관계가 해빙 무드로 접어들면서 재일교포 야구팀도 한국에 방문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농업은행의 백인천은 일본에 진출했고, 반대로 재일교포팀으로 왔던 김성근은 한국에 진출했다.

1962년 3월 기업은행 창단을 시작으로 같은해에 3월 22일에 해운공사 야구단[13]이 창단되고, 미곡창고 야구단[14], 상업은행 야구단, 인천시청 야구단, 한국은행 야구단, 1963년엔 서울시청 야구단, 제일은행 야구단, 조흥은행 야구단, 1964년 크라운맥주 야구단 등이 창단하며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여준다.

1960년대 중반에는 실업야구가 호황기를 맞게 되며 거의 모든 금융회사는 야구팀을 보유해 14개팀이 있기도 했다. 규모가 커지며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실업야구 진행방식이 1964년부터는 연중 페넌트레이스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1964년 말 5개팀이 해체되는 등 위기도 있었다.
파일:attachment/한국실업야구/역사/c0.png

이 시기 지원이 굉장히 열악했다는 기사. 농협야구단이 훈련장이 없어서 학교 운동장에서 훈련한다는게 사진 내용이다.

4. 부흥기(1970년대)

그러던 중 1975년 롯데그룹에서 프로팀을 지향하는 팀인 롯데 자이언트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1976년에 12월에 한국화장품과 1977년에 국영기업인 포항제철에서도 팀을 창단했다. 또한 1975년 부터 일부 선수들이 해외에서 직접 공수해와 사용하던 알루미늄 배트를 모든 선수들이 사용할수 있도록 지원하면서 장타가 많이 터졌고 이로 인해 실업야구가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77년부터 플레이오프인 코리안시리즈 제도가 도입된다.
파일:attachment/한국실업야구/역사/e0.png

또 이때 1976년 5월 25일 실업야구 2차리그 롯데 자이언트와 공군 전에서 실업야구 최초로 외국인 심판인 엔젤 리베라[15]가 1루심으로 등장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4.1. 1977년

본래 1월자 기사에는 5개 시즌 풀리그로 진행된다고 언급 되었다. 하지만 2월에 이것이 수정되었는지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의 전후기제를 수정한 코리언 시리즈를 채택해 적용했다. 시즌을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누고 각 리그를 1차 2차로 구별했으며 연맹소속 11개팀중 금융팀과 실업팀을 갈라놓아 경기를 갖는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

기본적으로 리그는 5개팀으로 구성된 금융단리그6개팀으로 구성된 실업리그로 나누며 금융단 리그와 실업리그가 각각 별도의 리그로 진행된다. 이 중 상위 2개팀이 결승을 진행하고 우승을 차지한 팀이 전기 1차리그 우승팀이 된다. 전기 2차리그도 동일하며 1차리그 우승팀과 2차리그 우승팀이 결승 3연전(플레이오프)으로 전기종합우승을 겨루게 된다.

후기리그도 전기리그와 동일하게 진행되며 후기종합우승팀은 전기종합우승팀과 5선 3선승제의 코리언시리즈를 진행한다.
금융리그 한일은행 실업리그 롯데
기업은행 한국화장품
상업은행 한국전력
제일은행 철도청
농협 육군
성무

4.2. 1978년

1978년 기업은행 야구단이 해체되면서 금융리그에 1개팀이 줄어들어들었고 반대로 포항제철 야구단의 창단으로 실업팀이 1개팀이 늘어나면서 금융리그와 실업리그의 양대리그 체제가 폐지되고 풀리그 방식으로 전환 전기리그 1차, 2차 와 후기리그 1차, 2차로 운영되었다.

4.3. 1979년


철도청 야구팀 해체로 실업연맹 10개팀을 전년도 성적에 따라 A,B조로 나누어 편성, 1~4차리그를 진행하게 된다. 1,2차리그에는 시즌 시작때 배정된 조로 구성이 되며 3,4차리그때는 조별 편성이 바뀌어 한팀이 되도록 많은 팀과 겨룰수 있도록 한다.

또한 타이틀 시상제를 도입해 4개리그 통산 타이틀과, 개별리그 개인 시상을 진행하기로 했다. 타격부분과 투구부분도 세분화 되는데 규정타석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되어 개별리그 기준으로 5개팀으로 짜여진 A조는 12타석 이상, 6개팀이 편성된 B조는 15타석 이상으로 규정되었다. 투수의 투구횟수는 5개팀인 A조는 12이닝, B조는 15이닝으로 규정되었다.

코리언시리즈는 최대 8팀까지 참가하게 되었는데 1~4차리그 상위 1~2위팀이 출전하게 된다. 우승, 준우승팀 중복시에는 8개 팀을 맞추지 않고, 중복우승팀 포함, 우승/준우승팀만 출전한다. 이 경우 팀수가 줄어들수 있는데 3개팀 이상이 코리언 시리즈 진출시엔 토너먼트로, 3개팀이면 풀리그로, 2개팀일때는 5전 3선승제에 의한 우승이 가려진다.

4.4. 1980년

1980년에는 전기, 후기리그로 통합해서 진행하고 코리안시리즈도 다시 전후기 우승팀이 맞붙는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1979년에 1~4차리그 우승팀들이 모두 결승전에 올라가지 못하여 이와 같이 제도를 변경하였다.

4.5. 1981년

1981년에 리그의 전력이 불균형 하다는 이유로 다시 10개팀 풀리그로 돌아왔다.

5. 침체기(1980년대~2000년대)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많은 실업야구의 스타들이 프로야구로 진출해 명맥만을 유지하다[16] 1988년 서울 올림픽 참가를 위해 강기웅, 송진우, 조계현 등 스타급 아마선수들이 실업팀에 입단했던 때와 1995년 현대 피닉스의 창단 이후 잠시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전국체육대회 백호기 실업야구선수권대회 등으로 팀이 존속되었으나 결국 얕은 선수층으로 1997년 IMF 파동 이전부터 실업야구 팀이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IMF 위기 기간 동안에 해체된 팀은 한일은행 한 팀으로 이미 실업야구 상황 자체가 좋지 않아 농협과 상업은행이 1993년, 한국화장품과 제일은행이 1995년 야구단을 해단하였다.

하지만 1999년 현대전자(현대피닉스) 해체시만 해도 상무, 제일유리, 포스틸, 한국전력, 현대해상의 5개팀이 실업야구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무렵 실업야구는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야구선수들마저 실업리그를 찾지 않았다. IMF 이후로 실업선수들은 예전의 정년을 보장받는 직장인이 아니라 계약직 직원에 불과해서 월봉이 50만원 수준으로 실업야구는 선수들의 기피대상이 됐다. 결국 현대해상이 등록선수가 11명 밖에 되지 않아 2002년 초 해체 결정을 내린다. 포스틸 또한 2002년 모든 대회 종료 후 해체를 결정한다.

마지못해 리그에 참여중이던 기업들은 더 이상 팀 운영에 대한 의욕을 잃게 되고, 2003년 2월 한국전력과 제일유리가 해체되면서 실업리그도 해체되었다. 상무 야구단은 KBO의 요청으로 2001년 이미 2군 리그에 정식 합류했고, 2003년부터는 KBO 2군에만 참여하게 된다.

6. 부활 시도(2009년~)

2009년 야구계 원로 일부가 나서 부활을 주장하면서 한국실업야구연맹(KBBF)이 창설되었다. 2009년 7월 11일 신월구장에서 4개 실업팀(광명전기는 이 대회에만 참여)과 16개 사회인팀[17]이 참여하는 제1회 전국선수권대회도 개최하였고, 9월에는 한-일 실업야구 친선 교류전도 열었다. 하지만 KBBF는 신월야구장 사용권을 놓고 국민생활체육전국야구연합회와 분쟁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협회 감사를 통해 2010년 9월 등록이 취소되었다.
한국실업야구연맹 소속팀[18]
서울생주조 일구코리아 한일앤스포츠

2010년에 새로운 한국실업야구연맹(KABA)이 설립되었고 2011년 1월 대한야구협회의 승인으로 회원 단체가 되었다.

지방 야구 활성화 차원에서 과거처럼 회사 소속의 팀 뿐만 아닌, 시민야구단 형식으로도 추진하였다. 연고지가 확정된 정회원과, 지역연고가 아직 확실하지 않은 구단인 준회원으로 나누었다.

축구에서 말하는 시민구단과는 다른 개념인데, 지자체에서 직접 운영하고 월급도 지급하는 시민구단과 달리 지자체에서는 장소만 제공해주고 구단 운영은 한국실업야구연맹에서, 선수들의 월급은 각 기업에서 제공하는 형식이었다.
정회원 준회원
구미시민야구단 논산시민야구단 보은블루웨이브 부천시민야구단 청주시민야구단 원주시민야구단 울산시민야구단 군산시민야구단

2010~2013년 4년간 리그를 시범운영 후 2014년 리그를 공식 출범할 계획이었다. 충청남도가 실업야구 활성화를 위해 후원하였기에 2010년부터 시행된 시범운영 리그가 모두 "충남도청 이전 내포신도시 개발 기념 대회"다.

2012년 12월, 건강음료 생산업체인 보은제약과 스포츠마케팅 전문회사인 E&S Company가 함께 실업야구단을 운영하기로 하고 보은 블루웨이브(Boeun Blue Wave)를 창단 ##하기도 하였으나, 정작 2012년 동양강철 실업야구리그를 끝으로 대회를 열지 못해 보은 블루웨이브는 대회 참가조차 하지 못했다.

연천 미라클이 창단되면서 실업야구연맹 또한 독립리그 쪽으로 눈을 돌려 2015년 대한야구협회 이사회 승인을 받아 한국독립야구연맹(KIBA)으로 단체명을 변경하고 한국독립리그 창단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2016년부터 리그를 출범한다는 계획으로 나주시의 후원을 받아 독립구단 창단을 준비하던 김성한 전 감독 등이 합류하였으나 이마저도 불발되었다. 여기에 참여 예정이었던 연천 미라클도 이후 독립리그로 넘어간다. 이후 현황은 KIBA 드림 리그 문서에 나와 있다.

2017년 12월 13일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김응용 회장이 한국노총과 협약을 맺으며 다시 한 번 실업야구 부활을 발표하지만 2년 가까이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2019년 10월 30일 선수 선발 테스트를 실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며 12월 16일 실업야구 관련 창단 심의·등록 절차 안내문이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와 본격적으로 창단을 추진한다. 강원도민야구단, 당진현대제철, 천안 메티스가 트라이아웃을 이미 진행한 상황이고 대구 COOP드림즈가 창단 준비를 하고 있다. 관련기사 [19]

2019년 12월 16일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가 실업야구 출범 및 창단 심의/등록 절차 안내 공지를 협회 웹사이트에 올렸다. 선수 자격은 순수 아마추어로 제한되어 20세 이상의 대학생이 아닌 선수만 등록할 수 있다. 프로 출신(국군체육부대는 예외)은 선수로 등록할 수 없으나 창단 준비 중인 팀에 이미 합류한 프로 출신은 예외를 두기로 했다. 한편 프로야구에 몸 담은 적이 없는 독립리그 출신 선수들도 등록이 불가능한데 이는 독립리그가 프로를 목표로 하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선수 및 지도자 등록 규정에 프로 출신 선수들이 뛸 수 없다는 규정이 있는데 실업야구만 풀어줄 수는 없기 때문.[20]
실업야구단대표자회의
당진 현대제철 블루캅 천안 메티스 평창 반다비스 인천 웨이브스

2020년 6월 10일이 돼서야 메티스라는 팀이 등록되었고 강원도민야구단, 현대제철 블루캅 등이 추가되어 세 팀으로 출발하였고, 원래부터 참가 예정이었던 대구 COOP드림즈가 우여곡절 끝에 참여하고 울산 웨일스까지 리그 참여를 마감하였다.

2020년 실업야구 공식대회를 8년만에 개최하게 되었다. 이 해 예정된 3번의 대회 중 첫 대회인 천안대회는 서울현대직업전문학교 야구부까지 초청팀으로 참여하여 6개팀이 참여 성황리에 마쳤다. 7월 4일부터 18일까지 천안야구장에서 천안대회가 진행되어 강원도민야구단(현. 평창 반디비스)이 무패의 성적으로 우승하였다. 9월 울산대회와 10월 대구대회 또한 개최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여파로 대회가 모두 취소되었다.

2021년에는 9월에 들어서야 평창대회 개최가 예정되었으나 이렇다 할 소식은 없으며 10월이 되도록 선수 등록조차 되지 않고 있다.[21] 거기에 원래 실업야구연맹 준비위원회가 정식연맹으로 전환하지 못하여 실업야구단대표자회의라는 어정쩡한 상태로 남아있어 실업야구를 대표할 기구도 없어 어려움이 크다.

2022년 1월 12일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가 2022년도 선수 및 지도자 등록 공지를 하면서 일반부를 빼 버렸고 대회 계획조차 잡히지 않아 실업야구 부활은 다시 한 번 무산되었다. 그러던 차에 2022년 4월 가칭 한국독립야구위원회(KIBO)를 중심으로 회비 지불이 없는 실업형 독립리그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와 별개로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에서 가칭 KBSA리그를 조직할 계획을 세우고 있고 2022년 7월 부산시 등 총 8개 지자체 참여 의사를 밝혔다. 다만 이 리그는 문체부가 추진하는 스포츠클럽 승강제 리그에 야구 종목이 선정되어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의 최상위를 만드는 작업의 일환이며, 2010년에 만들어진 리그와 유사한 형태다.

이렇게 실업야구를 재추진하려는 여러 움직임이 있기는 하였으나 구체화되어 나온 계획은 2022년 12월로, 기존 실업야구단대표자회의가 중심이 된 가칭 한국실업독립야구위원회에서 리그를 부활하기로 결의했다. 3라운드로 총 60게임이 진행되며 평창(4월), 천안(7월), 대구(10월)에서 각 라운드가 개최된다. 참여팀은 기존 참여팀에 신규팀이 추가되어 총 6개팀이 참여할 예정이었다. 관련기사 2020년에 참여했던 대구 COOP드림즈와 울산 웨일스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한국실업독립야구위원회
당진 HDS 블루캅 천안 메티스 평창 반다비스 인천 웨이브스 대구 드림즈 전북 레이더스

막상 4월이 되고도 대회 개최와 관련한 소식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으며 갑자기 서울과 전북(전북 레이더스)에 실업 야구단을 만들고, 9월에 중국 세미프로팀을 초청한 대구 국제 실업야구 대회를 연다는 기사가 나왔다. 결국 4월, 7월 대회는 물론 9월에 연다고 했던 국제 실업야구 대회 역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024년 1월 평창 반다비스(강원), 강서 드리머스(서울), 인천 시민 야구단(비추온스) 등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협동조합 인가를 받은 구단들이 뭉쳐서 실업야구를 부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시범 경기를 시작으로 6월부터 10월까지 정규리그를 진행하며 8월에 올스타전을 열 계획이었다. # 그러나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정상적으로 일이 진행될 지는 회의적이다.[22] 2월에 또 계획이 변경되어 리그 진행은 5월부터 9월까지로 바뀌었고 시범경기와 올스타전 이야기는 쏙 들어가 버렸다. # 3월에 나온 기사에는 초청 팀으로 당진 블루캅과 알려지지 않은 한 팀이 참가한다고 하였고 강서 드리머스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다. # 5월이 지나고 9월이 지나고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실업야구 부활은 또 한 번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렇듯 이런 식으로 희망 섞인 기사로 언론플레이만 하는데 전에 발표했던 계획은 실현되지 않는 일이 반복되고 있으며 운영 주체와 참가 팀이 계속 바뀌는 등 실업야구 부활은 점차 현실성을 잃고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 거론된 참가 팀들의 면면을 보면 시민, 군민 구단일 뿐 정상적인 의미의 실업야구라고 할 수 없다. 거기에 야구 팬들도 희망 섞인 기사가 나오면 환호를 보내다가 정작 대회가 열렸는지 아닌지조차 아예 관심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가 2024년 화성 코리요의 창단으로 8구단 체제에 돌입한 것에 힘입어 리그 규모가 점점 커지고 프로 진출/복귀 선수들도 매년 꾸준히 배출하는 것[23]과는 매우 대조적인 상황이다.


[1] 기사에는 철도 야구단이라고 되어 있지만 1919년 9월 27일 용산 철도구장에서 황성기청 야구단이 철도청 야구팀과 맞붙은 후 찍은 사진이다. [2] 이날경기에서 패배를 예상하지 못했던 일본인들은 용산철도국의 패배로 흥분한 나머지 오성구락부 선수들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이를 본 한국관객들이 이에 맞서며 대규모 패싸움으로 이어져 경찰이 출동해서야 진정되었다. [3] 오성구락부 뿐 아니라 한국인 야구팀은 1928년에 백기주를 앞세운 동경유학생 야구단이 승리를 거두기까지 14년동안 용산철도국을 이기지 못했다. [4] 입장료가 있던 것도 아니고 오성구락부의 경우 오성학교에 손을 벌릴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야구용품은 당시 쌀 반가마니에서 쌀 2가마니 가격으로 엄청나게 비쌌고 이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여러 야구팀들이 사라져갔다. [5] 다만 초기 조선야구심판협회는 대한야구협회와는 조금 달랐다. 야구규칙 연구만 담당할 뿐 대회개최나 운영, 아마야구 지원 등의 역할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 참고로 일본의 라디오 중계는 불과 2개월 전인 7월에 이루어 졌다. [7] 해방 이후 첫 중계는 1946년 9월 15일 경성구장에서 열린 청룡기 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 준준결승 마지막 경기인 경기중학교 vs 동산중학교의 경기였다. ## [8] 한국야구사 p.23 [9] 경향신문사가 주최했던 야구대회. 1956년에 군,실업야구 쟁패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진행방식은 1958년까지 춘계대회만 열렸던 1957년대회를 제외하고 춘,추제로 나뉘어 1년에 두차례 진행했다. 1959년, 경향신문이 폐간되면서 대한야구협회에서 이 대회를 이어받았고 연 1회로 규모를 축소해 개최했다. [10] 한국전력 야구단의 전신 [11] 농협 야구단의 전신 [12] 박영길 전 감독의 인터뷰에서 언급되었다. ## [13] 2년후 해체한다. [14] 한국미곡창고로 지금은 CJ대한통운. 1962년에 우승하고 그다음해 해체한다(..) [15] 직업은 미 8군 고문관이었다. [16] 권택재, 백재우 등 프로 팀의 러브콜을 거절하고 실업야구에 남은 수준급 선수들도 있었지만. [17] 홈플러스 3개팀, 강서구청, 한국도자기, KBS, 기프트샵, (주)미사일, 필링크, 다이와증권, 코스콤, 치과연합, (주)뉴컴, 두산건설, SST, 경호자동차 [18] 참조 [19] 해당 기사의 댓글은 과도한 실업야구 찬양으로 뒤덮여 있다. 인터넷 댓글 기사가 여론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티 KBO 리그 세력이 얼마나 득세 중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 [20] 이 때문에 프로에서 일찌감치 방출된 고졸 선수들이 대학야구로 가지 못하고 있다. 실업야구의 부활을 환영하는 야구 팬덤에서도 독립리그 출신 선수들의 등록을 막은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21] 협회 사이트에 일반부 팀으로 올라 온 남서울교육문화센터와 명지대미래교육원은 평생교육기관으로 분류가 기타(일반)로 나와 있다. [22] 당장 위에 나온 2023년도 참여 예정 팀 중 평창 반다비스만 남아 있다. [23] 물론 이쪽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긴 하지만(명목상 독립 리그일 뿐 사실상 KBO와 KBSA에 종속된 존재나 마찬가지다.) 이미 삽을 뜬 상태에서 성장통을 겪는 것과 아예 삽도 제대로 못 뜬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