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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ff0000> 일생 | 생애 · 쿠바 혁명 · 피그만 침공 · 쿠바 미사일 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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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델 카스트로의 평가를 서술한 문서.2. 평가
2.1. 긍정적 평가
베네수엘라에서 문맹퇴치운동을 한다고 하자 공산권에서 지원받은 싼 컬러 TV를 그 일환으로 몽땅 지원해 주기도 했다. 같은 맥락으로 전력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에 형광등을 무료 지원해 주기도 하고 주로 공산권, 특히 남미 쪽에 지원이 많은 편이다. 또 의사 등도 자주 보낸다.
제3세계에 대한 지원은 단순한 교류 협력을 넘어 군사적인 영역으로도 이어졌다. 가령,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유지되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군과 독재자 휘하의 자이르 부대들이 앙골라를 공격하자 앙골라 대통령 아고스티뉴 네투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거 군사개입하였고, 앙골라 내전 종결 후에는 대가를 빙자하여 이권을 챙기려 들지도 않았다. 또한 남서아프리카(지금의 나미비아) 독립 등도 지원하였다. 아프리카에서 쿠바군이 수행한 국제주의적 임무로 인해 실제로 아프리카의 반제국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피델의 평가는 우호적이다.
대부분의 막장 독재 국가들과는 달리 자신에 대한 우상화나 신격화 정책을 행하지 않았다. 예로 쿠바 전역을 뒤져봐도 체 게바라나 다른 혁명 인사들을 기념하는 동상이나 초상화 같은 기념물은 꽤 있지만, 피델 본인이나 그의 동생인 라울의 것은 전무하다. 쿠바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만 하고 있다. 그리고 유언으로 자신의 우상화를 금지하라고 하기까지 했다.
비록 친미적인 언론보도나 정부 전복에 대한 논의는 금기시되어 있고, 실제로 했다간 군부에 의해 잡혀갈 각오를 해야 하지만,[1] 쿠바에서는 성조기 비키니를 입은 처자를 해안에서 발견할 수도 있고, 서구 문물이 정식 수입되지는 않지만 암시장에 나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7, 80년대에 남대문 시장에서 수입품 사던 것, 세운상가에서 빨간 거 사던 것을 생각하면 되는 수준이라 한다. 사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언론에 많은 집중 사격과 왜곡되거나 편향된 사실이 퍼진 탓도 있다. 막장 오브 막장의 포스를 뽐내던 바티스타의 정권은 만주국 정도의 어용 정권이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카리브 해 연안의 국가치고 친미가 아니었던 국가가 있었을까 싶다. 되려 쿠데타로 집권해 경제 발전에 나섰던 게 바티스타 정권이다. 하지만 빈부 격차 등으로 민심이 급격히 나빠졌다. 여하간 그런 바티스타 정권을 뒤엎고 미국의 착취에서 벗어나 대부분의 사업을 국유화했으니 뒤가 근질거려 공산권을 택했다는 쪽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미국의 바로 눈 앞에서 쿠바가 살아남으려면 이념이고 자시고 일단 미국을 견제할 세력(소련)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그 당시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라면 무조건적으로 탄압했던 것은 사실이다.[2] 당연히 미국은 이러한 나라들이 소련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카스트로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심지어 미국이 이런 삽질을 벌인 나라들은 쿠바만이 아니었다. 피델의 혁명 세력들은 쿠바인이 대다수이긴 했지만 사상적으로는 남미 민족주의적인 해방 운동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그의 사상은 공산주의라기보다는 반미· 민족주의에 가까웠다. 카스트로는 애초에 쿠바 공산당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민족주의 정당인 정통주의당의 당원이었다. 멕시코 혁명과 같은 반미 민족주의적인 혁명의 성격을 친사회주의로 돌려놓은 것은 미국의 공로가 크다. 카스트로 정권이 단순한 공산 독재 정권이라면 수많은 쿠바와 남미인들이 그에 대해서 애정을 담아 까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과 달리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에게도 자식[3]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권력을 세습시키지 않았다. 동생인 라울에게 권력을 넘기긴 했다지만, 라울도 형의 후광이 아니라 피델 다음가는 쿠바 혁명의 주요 인물인 소위 말하는 개국공신이었기에 권력을 이어받은 것이었다.[4] 다시 말해, 라울은 북한처럼 권력을 세습 받은 게 아니라 내각제 국가인 쿠바에서 국가이사회 선거를 통해 "선출"된 것이다 #. 게다가 라울은 피델이 자기보다 더 급진적인 성향이라 염려했을 정도로 진성 좌파다. 쿠바 혁명 때 주로 참모 역으로 활동하느라 체 게바라에게 묻혀서 그렇지, 그래도 혁명 직후에도 이사회 부위원장으로 쿠바 권력순위 2–3 순위에 위치한 인물이 라울이었고, 게바라 사후에는 완전히 2인자 자리를 굳혔다. 만약 게바라가 남아 있었으면 체에게 권력이 승계되었을 거라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라울의 나이가 80이 넘은 것을 생각하면 쿠바는 곧 혁명 이후의 세대에게 권력이 이양될 것으로 보는 전망이 우세하다.[5] 라울의 성향을 피델과 비교해보면 북쪽의 세습에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꽤나 센세이셔널한 일일 따름이다.
흔히 쿠바 혁명이라고 하면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주역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워낙 게바라의 명성이 높아서 생긴 오해다. 라울은 피델과 함께 쿠바 혁명 계획을 시작할 때부터 주도적이고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오히려 체는 그란마호 상륙 작전 당시 공산 게릴라군에 의사가 오직 체 밖에 없어서 군의관으로 탑승한 것이며, 후에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대민지원을 하며 거점을 세울 때 체의 의료 대민봉사지원이 눈부신 성과를 나타내어 주도적 위치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게바라가 유독 많이 알려진 이유는 체가 인간적인 매력과 성품, 교양을 바탕으로 서구 지식인들에게 크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쿠바 혁명 이후 요직에 앉아서 편히 살 수 있었던걸 포기하고 볼리비아에서 혁명하다 법적 절차도 무시하고[6] 젋은 나이에 요절하는 등 간단히 말해 체의 모습이 당시 서양의 좌파 지식인들이 꿈꾸던 사회주의 혁명가의 모습에 부합했기 때문에 체가 크게 알려진 것. 그리고 솔직히 한번 보면 뇌리에 박히는 미모라서 지금까지도 사회주의 혁명의 아이콘으로 남은 면도 없잖다. 즉 청춘스타.
소련이 국제 공산당의 중심으로서 서구 좌파 학생들에게 이상향으로 여겨지던 시절에는 스탈린이 존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폭로와 더불어 소련군이 무력으로 헝가리 봉기와 프라하의 봄을 진압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환상은 깨져버렸고 소련에 대한 동경도 많이 퇴색되어버렸다. 이때 68혁명으로 대표되는 신좌파의 발흥과 함께 그 공백을 채우고 부상한 것이 호찌민, 마오쩌둥, 체 게바라, 그리고 피델이었다. 호찌민은 독재자였지만 비록 살아생전 근검절약을 실천하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상징에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 운동까지 결부되어 일종의 철인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스탈린과 같은 신세로 추락하였다. 체 게바라는 상술되었듯이 여전히 혁명의 아이콘으로 기능하고 있다. 피델은 지도자로서 이제는 그 대우가 조금 미묘한 듯하다. 체 게바라가 혁명의 아이콘이라면 피델은 혁명의 화석이라고 한다. 동구권이 붕괴된 이후의 위기상황에서도 기본적인 사회복지시스템을 유지하는 한편, 농업 체계를 도시농업과 유기농 위주로 대거 개편하여 자급자족에 성공, 고난의 행군과 같은 헬게이트 개막을 막아내고 고령의 나이에 사임한 점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게다가 군비를 줄여가면서 적어도 민중들이 최소한 굶주리지 않고자 배급을 유지하게 한 것으로 군비확장에 미치다 못해 김씨 1인 독재로 국가 자체를 박살내어버린 북한과 정반대인 모습을 보였다. 다만 하나 감안해야 할 건 미국은 쿠바와 전쟁을 한 적은 없다. 경제 제재만 했을 뿐이지. 반면 북과는 한국전쟁을 했고 현재까지도 휴전 상태이므로 북미관계는 공식적으로는 전쟁 중이다.[7] 1990년대는 탈냉전으로 인해 사회주의 국가가 해체되거나 개혁개방으로 선회하고 한반도에서는 핵 위기가 있었던 시대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반면 쿠바에서는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이렇다 할 군사적 위기는 더 이상 없었다.
물론 미국 입장에서는 쿠바나 북이나 (전쟁 여부의 차이는 있겠지만) 제재 대상인 건 마찬가지였기에,(심지어 경제 제재는 국교 재개 이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탈냉전기에 개혁개방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을지는 스스로 생각해보자.
2.2. 부정적 평가
사실상 쿠바를 공산독재정권으로 운영하고 있었으며, 쿠바에는 언론·통신·발언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고 서방권 국가들, 주로 미국이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도 카스트로는 독재자인데 그가 집권중이었던 쿠바에서 언론자유지수의 경우 2014년 기준 세계 170위로 흔히 자유가 어느정도 보장되었을거란 생각과는 달리 쿠바의 언론 실태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이에 관하여 칠레의 주간지 <케 파사(Que Pasa)>는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치인들이 단 한 번도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비판해 본 적이 없다고 보도하였다.공산 혁명 이후 그의 명령으로 반대파에 대한 즉결처형이 벌어졌으며 군중심리에 의한 인민재판도 자주 행해졌다는 주장이 있다. 카스트로는 혁명 직후 초기의 공개재판 외에는 모두 강력히 부인했다.[8] 또한 쿠바에 최초로 설치한 강제노동수용소인 라카바나 노동수용소와 유명무실한 사법기관과 철두철미한 정보기관의 존재도 문제가 된다. 특히 카스트로는 지식인들도 마구 잡아들이는 등 탄압하였고 반대파 역시 엄청나게 탄압하였다. 또한 감옥과 수용소에선 고문이 행해지고 환경이 심각할 정도로 비위생적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금지했다는 것을 들어 호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30년을 넘게 집권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전혀 보장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집권기간 동안 그를 비판하는 언론 창구라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를 들이대든 자기의 동생이 자신의 장기집권을 그대로 이어 받는다면 거의 50년에 가깝게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비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의 삶에 있어서의 치부의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은폐되는 것이다. 애초에 그에 대한 평가를 위한 자료의 확보에 있어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집권 초기에는 원래 그렇게까지 빡세지 않았지만 1980년대 말 들면서 동구 공산권에서 개혁, 개방 운동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는 카스트로가 혁명정신 이런 거 다 갖다 버리고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적들을 숙청하는 모습을 보여줬다.[9] 숙청 과정에서 혁명영웅 이런 거 없었다. 하지만 북한의 김씨 일족이 벌이는 스탈린식 죽음의 숙청이 아니라 카스트로의 숙청은 대부분 직위 해제 및 재산몰수로 끝냈다는 게 차이점이다.
경제적으로도 초기에는 복지정책을 바탕으로 쿠바 국민들에게 호평을 얻는 듯 했고 이 평가는 1980년대까지도 이어졌지만 국유화 과정에서 여러번 무리수가 있었다. 그래도 1970–80년대에는 소련이나 동구권 국가의 지원으로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결과적으로 90년대 초반의 경제붕괴로 인해 쿠바 경제는 한차례 나락으로 떨어졌다. 또한 공산권이 붕괴하자 쿠바는 석유수급이 끊기면서 한동안 전력난과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정확히 고난의 행군을 겪은 북한과 비슷한 시기가 이 시기인데 수만명의 쿠바인들이 줄줄이 배를 타고 미국을 비롯한 외국으로 망명하고 카톨릭 교회와 테크노크라트 세력들까지 개혁개방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등 쿠바의 정치적 위기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카스트로는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했으며 라울 카스트로를 비롯한 정권 수뇌부 대다수가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자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스페인 등과 합작하여 투자를 유치했다. 김일성, 김정일과는 달리 자신이 싫어하는 개혁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였고 또한 이런 내용을 강경하게 요구할 수 있는 내부 세력 자체가 존속되었다는 것 자체는 높이 평가할 점으로 사실 절친인 기브리엘 마르케스의 쓴소리를 어느정도 받아들여서 정치범 수천명을 석방시킬 정도의 배포는 있기는 했다. 게다가 개념인이 단 1명도 찾아보기 힘든 김씨 일족과는 달리 동생이 현실을 보는 개혁파라는게 백미 중에 백미.어쨌거나 관광업과 자영업 활성화로 쿠바 경제는 나아졌지만 봉급 수준이 획기적으로 올라간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직장에서 은근슬쩍 물건을 빼돌리는 일이 성행하는 등[10] 쿠바 사회의 부패도가 높아졌고 웨이터 일하는것이 일반기업에서 일하는것보다 훨씬 더 높은 봉급을 받는 부조리가 판을 치는 등 갈수록 사회주의의 이상에서 멀어져갔다.
특히 의료 부분에 있어서 쿠바가 중남미 국가치고 뛰어난 수준인 것은 맞지만 실제론 대부분의 의사들이 박봉에 시달리고 있고 투자의 부족으로 의료품이나 시설이 심하게 낙후되어 있다. 또한 의사의 수는 많지만 기술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데다가 택시기사가 교수나 의사들보다 돈을 더 잘 버는 것이 현실. 외국인 관광객을 자주 태우는 아바나 한정이긴 하지만 의사가 되기 위한 처절한 노력에 비하면 허탈할 정도의 박봉이라는 점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본국에서의 의사생활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이민을 선호하는 원인이기도 하고 쿠바의 의료수준이 갈수록 떨어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게다가 환자들의 개인 정보에 대한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고 의료 과실에 대해 의사를 신고할 수도 없다. 흔히 한국에 의료 선진국으로 알려진 쿠바지만 실상은 결국 개발도상국치고 좋은 수준에 불과하며 열악한 것이 다른 개발도상국들과는 다를 게 없다.
2014년 5월, 피델이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왕이나 다름없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으며, 여성편력도 있는 데다가 80년대에는 미국에 코카인을 밀매하는 마약사업도 했다는 전직 경호원의 폭로가 나왔다. #
2015년 10월에는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메데인 카르텔 조직원이었던 존 하이로 벨라스케스가 피델 카스트로와 마약 거래의 연관성을 또다시 주장했다. 기사
2.3. 진위여부
강제노동수용소와 고문 등은 쿠바의 인권 실태와 카스트로 정권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한 레퍼토리로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쿠바 정부와 체 게바라에 옹호적인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자료들을 교차해보면 체 게바라가 공직자들의 태업을 체벌하기 위해 건립한 라카바나의 노동 수용소가 반대파들의 주장에 의해 정치범 수용소로 왜곡되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노동 수용소의 경우 본인이 공직자 자격을 사퇴하면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방식. 자세한 내용은 헬렌 야페가 쓴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을 참고할 것.고문의 경우도 마찬가지 사안으로, 마이애미 망명 인사들이나 미국 우익들은 쿠바에서 이루어지는 인권탄압과 고문을 규탄하지만, 피델의 일관된 입장은 쿠바에서는 고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가령, 바티스타 정권 경찰 출신으로 피델 카스트로 치하에서 반체제활동을 벌이다 테러 혐의로 체포된 아르만도 비야다레스의 경우 옥중에서 이루어진 고문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고 주장하여 국제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고 국제 캠페인으로까지 번졌다. 하지만 쿠바에서 석방 조건으로 '걸어서 비행기를 타고 걸어서 비행기에서 내릴 것'을 주문하자 하체 마비환자 행세를 즉각 집어치웠다(...).
그렇다고 해서 카스트로 정권의 탄압과 국가폭력에 대한 비난 전반이 허구에 기반한 것이라는 주장 또한 전적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는 재반론도 존재한다. 서방에서 반쿠바 여론을 주도하는 마이애미 망명객 중엔 소위 '적폐'라 부를만한 바티스타와 혁명 이전 기득권세력 등 호의호식하던 사람들도 있지만, 오히려 혁명에 참가했거나, 처음엔 지지했다가 이후 정권에 대한 환멸을 느끼거나 카스트로 독재 완성 과정에서 쫒겨나온 사람들도 꽤 있다. 뭐 국제 공산권의 역사란게 다 그렇고 혁명 이전 쿠바 반체제 인사들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스페인 제2공화국 출신 망명 정파들이 그랬듯이, 여기서도 좌파 내 갈등은 여전한지라 혁명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던 중도좌파, 아나키스트, 비소련계 독립 공산주의자들 또한 적지 않은 수가 우익 망명객, 정치범들과 함께 나란히 핍박을 받은 걸로 보아 카스트로 정권의 폭압성이 죄다 혁명 당시 망명한 쿠바인들의 선동이란 것도 무리다. 정확한 진실은 먼 훗날 이런 민감한 주제에 관련된 쿠바 당국과 미국 각 정보기관들의 비밀 자료들이 공개된 뒤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1]
그런데 바꿔 생각해보면, 제아무리 (서방 자유민주주의 기준으로 '완전'하다는 평가를 받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해서 정부 전복 논의가 허용되는가? (국제적으로 논란이 매우 많긴 해도) 한국의 사례나 독일의 연방헌법수호청이라는 반례가 있다. 또한 반미, 반서방 보도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사실상 금지되어 있다. 바로 돈줄,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실상 생명줄. 군검경 등 공권력의 물리적 제재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물론 정보기관 등의 예외는 언제나 있다)지만 거래가 끊기고 고용이 단절되는 것이 전자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전술한 비판은 허수아비 타격에 가까운 사실상의 무의미한 비판이다.
[2]
아니, 사회주의적 경향이 아니더라도 (심지어 공개적으로 사회주의 반대를 천명했더라도) 단순 탈식민, 반제국주의, 심지어 필수불가결한 토지개혁조차 경기를 일으키는 게 당시의 미국이었다. 이를테면 이란의 모사데크가 사회주의자였는가? 이 때문에 2차대전에서 렌드리스로 대표되는 쇼미더머니를 실현했음에도 신생 독립국이 친미나 하다못해 중립조차 선택하지 않은 것 또한 미국이 자초한 짓이다.
[3]
피델의 6남 2녀 중 큰아들을 제외하면 정계나 공직으로 뛰어든 사람이 없고, 그 큰아들은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 아무런 비호도 없이 공직에서 추방당했다. 그리고 딸인 앨리나 페르난데스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빠 미국으로 망명하여 열심히 아버지를 비판했다. 현재 그녀는
CNN의
논평가로 활동 중이다. 그렇지만 숙부 라울과는 관계는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다.
[4]
라울이 개국공신이어서 많은 지지를 통해 선출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형제세습이 되었기에 일부 서방측 언론에서 북한과 같은 세습 아니냐는 질문에 라울은 "그런 국가랑 비교를 하지도 말아달라"라며 불쾌함을 표했었다.
[5]
실제로 현재 쿠바의 국가주석은
미겔 디아스카넬이다.
[6]
재판을 열면 전세계의 사회주의 세력의 구명운동이 일어날게 분명해서 재판없이 비공개적으로 그냥 바로 죽여버렸다. 체도 그걸 노리고 있었지만 미국은 체가 생각했던것 보다 붉은 물결이 더 퍼지는것을 두려워했고. 이는 체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7]
북이 고난의 행군을 겪은 근본 원인이 사실은 쿠바 핵 위기 등 데탕트 직전의 냉전 대결 구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제3세계 대리전 등으로 다시금 불거진 1980년대 냉전의 격화에 있다는 분석이 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경제학에서 말하는 '샤워실의 바보'라는 건데, 이 때 국방 우선 노선을 취하면서 상대적으로 과학기술 일반의 비중이 줄어든 것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소련이 해체되던 정치적 격변기와 맞물리면서 정체 내지는 퇴보가 더욱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2023년도의 연구 개발 예산의 전액 삭감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 반드시 과학기술 그리고 경제 발전에 치명적 독소가 될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그리고 이런 비판에
입틀막으로 화답했다.) 실제로 고난의 행군은 2010년대 무렵이면 거의 일단락된 것으로 나오는데, 북이 이후에는 다시금 병진 노선을 거쳐 핵 무력 완성 선언 후에는 경제 우선 노선으로 아예 선회하고, 2024년도 들어서는 북러동맹조약이 부활하면서 BRICS 가입 가능성까지 시사한 것과 그 시간차가 얼추 일치한다.
[8]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편집자이자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인터뷰 참조.
[9]
다만 피델 카스트로의 대표적인 정적 숙청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오초아 사건의 경우 단순히 마약 밀매에 대한 응징이었다는 것이 피델과 쿠바 정부의 주장이다. 하지만 세계 독재국가를 다 통틀어서 "우리 지도자에게 밉보여서 숙청했다."고 대놓고 밝히면서 숙청하는 꼴이 있는지를 보면.
[10]
여담으로 직장의 물건을 빼돌리는 일은 '큰형님' 소련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하다못해 사무실에 놓인 스탠드나 공책 같은 것도 집으로 슬쩍해 가져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