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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9 02:05:35

오초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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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르날도 오초아2. 재판3. 논란

1. 아르날도 오초아

파일:external/www.thecubanhistory.com/ochoa-1.jpg

아르날도 오초아(Arnaldo Ochoa)는 쿠바의 전직 장군이다.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휘하로 쿠바 혁명에 참전했으며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좌파 게릴라를 지원했고 에티오피아 내전, 앙골라 내전에 파병된 쿠바군을 지휘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1] 정치적 입지도 강력하게 확대하던 오초아는 1989년 6월 5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체포되었다.

2. 재판

오초아가 체포된 혐의는 마약 거래였다. 쿠바 미국에 의해 경제가 사실상 봉쇄되었기 때문에 산업에 필요한 부품들을 밀수를 통해 공급하는 경우가 잦았다. 쿠바 정부는 이를 위해 파나마 등지에서 소규모 회사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오초아는 그 책임을 맡고 있었다.

오초아가 관리하던 회사들은 변질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내무부에서 엄격하게 통제하였지만 오초아는 점차 내무성의 통제를 넘어 임의적으로 예산을 운영하였고 이 과정에서 마약 거래업자들과 접촉하기까지 했다. 카스트로는 오초아의 동기가 애국적이었다고 인정하였지만 그렇다고 오초아를 용서하지는 않았다. 국제 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사안이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마약 거래에 사용된 불법 계좌들이 발각된 데 이어 콜롬비아 카르텔과의 커넥션과 앙골라 내전 파병 당시의 불법 행위까지 드러나면서 공화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오초아는 몰락했다. 국가평의회 성원 31명은 오초아의 사형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오초아 등 공범자로 지목된 4명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에 처해졌고, 이어서 공범자로 지목되어 기소된 내무부장관 호세 아브란테 등 공범들도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정계에서 퇴출되었다.[2] 아브란테는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91년 1월 21일 옥사했다.

3. 논란

한편 오초아 사건으로 오초아를 비롯한 주범들에게 사형이 집행되면서 너무 가혹한 판결이 아니냐는 비판과 함께 이 사건을 피델 카스트로 정권의 대표적인 정적 숙청 사건으로 조명하는 시각도 나타났다. 물론 쿠바에서 정치범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지기는 했어도 사형까지 가는 경우는 없던 상황에서[3] 오초아 사건이 정말 정적 숙청이 목적이었다면 그 의미와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후에도 오초아 사건은 쿠바의 정적 탄압과 사형제 폐지 논쟁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의 전직 경호원은 카스트로의 호화생활과 비리를 폭로하면서 오초아 사건이 카스트로의 비리를 오초아에게 뒤집어 씌워서 숙청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기사
[1] 피델은 훗날 프랑스 언론인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인터뷰에서 오초아 사건을 논하면서도 오초아를 역사적인 업적을 세운 장교이며 쿠바 공화국의 영웅이었다고 평가하였다. [2] 추가적으로 공범자가 기소된 건을 '제2사건'이라고 한다. [3] 물론 온건하고 평화적인 경우에나 그랬다는 것이지 '테러범'으로 지목되면 얄짤없이 사형이 선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