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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14세 요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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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AA7><colcolor=#fecc00> 스웨덴-노르웨이 베르나도테 왕조 초대 국왕
칼 14세 요한 | 칼 3세 요한 Karl XIV Johan • Karl III Jo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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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프랑스어: 장바티스트 쥘 베르나도트 (Jean-Baptiste Jules Bernadot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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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어: 칼 요한 밥티스트 율리우스 (Karl Johan Baptist Jul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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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63년 1월 26일 | ||
프랑스 왕국
포 (現 프랑스 누벨아키텐 피레네자틀랑티크주 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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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44년 3월 8일 (향년 81세) | ||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
스톡홀름 (現 스웨덴 스톡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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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 퐁트코르보 대공 | ||
1806년 6월 5일 ~ 1810년 8월 21일 | |||
스웨덴 왕세자 | |||
1810년 11월 5일 ~ 1814년 11월 4일 | |||
스웨덴-노르웨이 왕세자 | |||
1814년 11월 4일 ~ 1818년 2월 5일 | |||
스웨덴- 노르웨이 국왕 | |||
1818년 2월 5일 ~ 1844년 3월 8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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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AA7><colcolor=#fecc00> 묘소 | 스톡홀름 리다르홀름 교회 | |
가문 | 베르나도테 가문 | ||
아버지 | 앙리 베르나도트[1] | ||
어머니 | 장 드생장 | ||
형제자매 | 4명[2] | ||
배우자 | 데지레 클라리 (1798년 결혼) | ||
자녀 | 오스카르 1세 | ||
종교 | 가톨릭 → 루터교회[3] | ||
신체 | 180cm | ||
군사경력 | |||
복무 | 프랑스 왕립해군 | ||
1780년 9월 3일 ~ 1789년 | |||
프랑스 혁명정부군 | |||
1789년 ~ | |||
프랑스 제1제국 대육군 | |||
1804년 ~ 1810년 8월 21일 | |||
스웨덴군 | |||
~ 1844년 3월 8일 | |||
최종계급 | 제국원수 (프랑스 대육군) | ||
대원수 (스웨덴군) | |||
경력 |
해군
해병대
사병 (1780년 9월 3일) 해군 해병대 상등병 (1785년 6월 16일) 해군 해병대 상사 (1785년 8월 31일) 해군 해병대 원사 (1788년 5월 11일) 해군 해병대 부사관 (1790년 2월 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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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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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 국왕이자 노르웨이 국왕.현 스웨덴 왕가인 베르나도테 왕가의 창시자이며 더 나아가 노르웨이 글뤽스부르크 왕가의 여계 조상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최대 수혜자이며 인생의 승리자라고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인생을 살아간 인물. 프랑스인이었지만, 스웨덴 왕세자가 된 다음 프랑스군을 몰아내서 그 진영의 왕까지 되고 완벽한 스웨덴인이 되어 현재까지도 자신의 후손들이 그 진영의 왕위를 대대로 세습하고 있다.[4] 친 나폴레옹 세력에서는 배신자라고 주장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나폴레옹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관계였으며 과거 선배이자 상급자인 나폴레옹이 애초에 너무 심하게 대하긴 했다. 프랑스를 저버리고 왕이 된 걸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시점상 전혀 맞지 않은 잘못된 정보다. 애당초 스웨덴으로 갈 때부터 '난 내 나라를 위할 것이다.'라고 했지 '스웨덴을 친불국가로 만들겠습니다!'라고 한 적도 없다.
게다가 프랑스 내부에서 나폴레옹이 전쟁에 고무되어 나라를 망가트린다 해서 반대한 사람들도 많았기에, 프랑스에선 그냥 베르나도트를 포지션상으로 또는 드립상으로만 배신자라 하는 것이고 최근에는 비운의 인물로도 많이 평가한다.[5] 그도 그럴 것이 나폴레옹의 몰락은 외부적 군사 실패와 더불어 나폴레옹 자신의 오판도 있었고 내정과 민심이반 요소도 컸다.
2. 생애
2.1. 초기생애
1763년 프랑스 왕국 남서부 베아른 지방의 변호사였던 앙리 베르나도트의 아들로 조산아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재단사, 증조할아버지는 직공이었지만 아버지와 삼촌, 형은 모두 포의 법원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아들 또한 변호사가 되길 바랐던 아버지에 의해 변호사의 서기로 일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결국 1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립 해군[6] 육전대에 병사로 입대했다.코르시카 등지의 해외 프랑스령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에 투입되어 혁명 발발 이전에 상사로 진급했다. 프랑스 혁명이 벌어지자 베르나도트는 자코뱅 파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혁명정부에 의해 장교로 임관되어, 1792년에 대령, 1794년에는 31세의 나이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병사에서 장군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으며 군공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민중에게 인기가 높았다. 이 시기 그의 인기는 나폴레옹의 정치적 라이벌로까지 여겨질 정도였다. 또한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마르소, 클레베르, 샹피오네와 같이 상브르와 뫼즈군 출신의 유능하고 쟁쟁한 장군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는데 안타깝게도 이들이 혁명전쟁을 거치며 죽어버려 세력이 다소 약화되었다. 또한 마르소와 클레베르는 공화정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므로 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베르나도트와 그들 세력이 나폴레옹의 앞을 막아섰을 가능성이 있다.
1796년 프랑스군이 라인강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대파되어 와해되었을 때, 군을 재편성하고 오스트리아군을 막아내어 명성을 얻었다.
2.2. 1799, 나폴레옹의 쿠데타 시 중립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서는 사실상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묵인하기는 했으나, 중립을 지키면서 나폴레옹과 거리를 두고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베르나도트는 자코뱅 파였기 때문에 자코뱅 반대파인 나폴레옹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기 힘들었다. 1803년에는 루이지애나 총독으로 임명될 뻔했는데 미국의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총독 부임이 무산되었다.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킨 후 반대파였음에도 그를 중용하였고, 1804년에 원수로 임명했다.
2.3. 1805, 퐁트 코르보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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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원수,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 퐁트 코르보 대공으로서의 문장 |
그러나 이 무렵, 그의 아내와 나폴레옹이 불륜관계에 빠져들었고, 전부터 나폴레옹의 쿠데타에도 반대했기 때문에 점차 반항적이 되어갔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묘한 게, 그의 아내인 데지레 클라리는 원래 나폴레옹의 약혼녀였다.[7] 사실 나폴레옹이 베르나도트에게 잘해준 이유 중 하나는 그녀와의 약혼을 파혼하고 조제핀과 결혼했기 때문에 전 약혼녀에게 미안해서라는 말도 있다. 그래서 이 무렵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퐁트 코르보 대공의 작위를 내려줬다.
2.4. 나폴레옹과의 불화의 시작
그 때문에, 1807년 아우어슈테트 전투, 예나 전투에서 아무런 활약도 못하여[8] 프랑스군 원수 직위와 퐁트 코르보 대공의 지위를 잃게 될 위기에 빠지나, 그의 아내이자 나폴레옹의 전여친(...)이었던 데지레 클라리의 베갯머리 송사 덕분에 지위 유지에 성공하고, 프로이센의 명장 블뤼허 원수를 격퇴하고 바그람 전투에서 활약하는 등 나폴레옹의 마음을 돌려, 나폴레옹이 그의 아들의 대부가 되어주는 등 일단은 나폴레옹과 화해하는 듯했다.사실 베르나도트는 바그람 전투 당시에도 삽질을 반복했다. 작센인 군단을 이끌고 있던 베르나도트는 누구라도 관심만 보여준다면 그의 '결정적인 기동' 한 번으로 오스트리아군 진영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큰소리를 땅땅 쳐댔는데, 7월 6일의 전투에서 아더클라 시가지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은 작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집중포격에 신나게 두들겨맞고 나폴레옹이 있는 곳까지 쫓겨오는 추태를 보였다. 나폴레옹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베르나도트에게 "자네가 말하던 결정적인 기동이란 건 이런 거였나?"라고 한마디 던졌는데, 베르나도트에게는 뭐라 변명할 정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가 가까스로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 후 베르나도트는 황제만이 읽을 수 있는 승전 기념사를 자기가, 그것도 작센군의 전공이 제일이라는 내용으로 바꿔 읽는 핵폭탄급 불경죄를 터뜨린다!!! 베르나도트는 그 직후 보직해임을 당했지만, [9] 무적의 데지레 쉴드(...)와 그 후 네덜란드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세운 전공 덕분에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베르나도트에 대한 악평에 불과하고,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일단 상술한 "결정적 기동" 이야기는 일설에 불과하며, 나폴레옹의 부당한 지휘에 분개한 베르나도트가 먼저 사표를 던졌다는 말도 있다. 애초에 베르나도트의 군 편제 문제를 살펴보면, 베르나도트의 9군단은 작센인으로 편성된 2진급 군단이었고 게다가 가장 낫다고 할 수 있는 뒤푸이 사단은 나폴레옹이 멋대로 외젠군에 배속시켜 9천여 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군의 배치는 중앙이 툭 튀어나와 있었는데, 당연히 그 중앙에 공격이 집중될 게 뻔한데도 가장 약한 사단을 배치한 것이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10] 게다가 베르나도트는 전날 나폴레옹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루어진 야습에 실패하여 자신의 군단을 정비하느라 전체 군단장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여 마세나가 도와주러 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패잔병을 다시 소집하려면 남하하는 것이 나았으므로 무조건 질책할 수만은 없다. 또한 사실 전체 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가장 믿지 않고 약한 군단을 보낸 나폴레옹의 의도가 베르나도트가 오스트리아군의 대포를 맞고 죽어버리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도 있다. 게다가 그는 원정 준비에서 나폴레옹의 핵심측근인 베르티에가 자신의 원정 준비를 방해하는 것을 느끼고 사임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나폴레옹은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승전 기념사를 쓴 것이나 나폴레옹에게 후퇴를 알리지도 않은 것은 확실히 베르나도트의 잘못이었다. 이 잘못은 그만큼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사이가 박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베르나도트는 덴마크 4차 대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의 패잔병 소탕 도중 우연히 끼어들게 된 스웨덴군 포로들을 잘 대해주어 스웨덴인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작은 사실이 엄청난 일로 번지게 되었으니...
2.5. 1810, 스웨덴의 후계자로 지명됨
1810년, 스웨덴 국왕 칼 13세는 스웨덴 의회와의 협의 끝에 베르나도트를 양자로 들이고 후계자로 지명했다 물론 왕이 뜬금없이 엉뚱한 사람을 지명한 것은 아니었다. 이 당시 스웨덴은 가뜩이나 반동적인 정책으로 인기가 없던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혼자 끝까지 나폴레옹의 반대편에 서 있다가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하고 핀란드를 상실하면서 1809년 폐위당하고, 그의 삼촌이던 노년의 칼 13세가 즉위한 상태였다. 그는 사생아만 있었을 뿐 왕위를 이을 적법한 자녀가 없었기에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조 계열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출신 칼 아우구스트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이 양자가 그만 1810년 급사했다.[11] 상황이 이렇게 되자 스웨덴에서는 자타공인 최강국인 프랑스의 비위를 맞출 겸 나폴레옹의 친인척 또는 원수 중에서 한 명을 칼 13세의 양자로 삼아 차기 국왕으로 모시려 한 것이었다. 베르나도트는 정치적 식견도 상당했고 나폴레옹의 인척[12]이었으며 과거 스웨덴인 포로들을 관대하게 대우한 적이 있어 스웨덴인들의 호감까지 사고 있었기 때문에 최적의 후보로 꼽히게 되었다.사실 스웨덴에서는 처음에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이자 나폴레옹의 양자인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도 왕위 계승을 제안했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외젠이 개신교 개종을 거부하자 베르나도트에게 왕좌가 넘어갔다. 스웨덴 의회는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의 국교인 루터파 개신교로 개종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가 후계자가 되는 것에 동의하였고, 베르나도트는 평소 개신교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고 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나폴레옹은 처음에 그에게 스웨덴을 통치하게 되면 프랑스에 절대 대항하지 않을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요구를 스웨덴 통치자로서의 의무와 상충되는 행위라고 하며 거부했고, 결국 나폴레옹은 그를 프랑스에 대한 모든 의무에서 해방시킨다는 조건에 동의하고 스톡홀름으로 보냈다.
또 나폴레옹은 자신이 버린 약혼녀 데지레에 대한 속죄의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데지레가 원래의 약혼자는 프랑스 황제, 친언니 마리는 나폴리 왕비를 거쳐 스페인 왕비가 되었는데 본인은 고작 퐁트 코르보 공비에 지나지 않았으니 상당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13] 그런 의미에서 옛 애인에게 스웨덴 왕비 자리 하나 주려는 뜻이었을지도 모를 일.
처음에 칼 13세는 베르나도트를 탐탁찮게 여겼으나, 1810년 11월 스톡홀름에 도착한 베르나도트를 직접 만나보자 호감을 갖게 되었다. 브라헤 가문[14]을 비롯한 귀족들도 베르나도트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스웨덴 국민들도 베르나도트가 러시아로부터 핀란드를 되찾아줄 것이라는 큰 희망을 걸고 있었다. 따라서 스톡홀름에 도착하자마자 베르나도트는 늙은 왕 대신 명실상부한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의 열망과는 달리 베르나도트는 핀란드를 되찾는 것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대북방전쟁이 벌어졌던 18세기 이전이면 모를까 19세기에 들어서 스웨덴과 러시아의 국력 차이는 현저했으며 14세기 망누스 4세부터 시작된 기나긴 러시아와의 전쟁(특히 1809년의 핀란드 전쟁)으로 국고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또한 베르나도트는 핀란드를 되찾는다 해도 그로 인해 촉발될 러시아와의 적대관계와 전쟁에 대해 우려하였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스웨덴 국민의 지지가 영토 확장에 기반하고 있음을 잘 알았기에, 베르나도트는 핀란드 대신 새로운 목표인 노르웨이에 눈을 돌렸다. 노르웨이는 덴마크 국왕 올루프 2세[15] 이래로 덴마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베르나도트가 보기에는 대국 러시아가 차지한 핀란드보다 만만한 덴마크가 다스리고 스칸디나비아 반도도 확고하게 통일할 수 있는 노르웨이가 더 매력적인 목표였다.
한편 1810년 그가 스웨덴에 도착하자마자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덴마크를 움직여 스웨덴이 대륙 봉쇄령에 참가할 것과 영국에게 선전포고할 것을 요구했고, 베르나도트는 내키지 않았지만 이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영국과 스웨덴은 이후 1812년까지 명목상으로 전쟁 상태였으나 실질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륙 봉쇄령은 완전히는 아니어도 지켜졌고,[16] 스웨덴에서 영국 상품 수입 총액은 1810년 48억 파운드에서 1811년 5억 파운드로 줄어들었다.
2.6. 1812, 프랑스를 버리다
이처럼 초창기 베르나도트는 일단 나폴레옹의 지시에(마지못해서이긴 하지만) 순순히 따르고 있었고, 양자의 사이는 겉으로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 원정을 앞둔 나폴레옹이 후방을 안정시키고 완전히 믿을 수 없는 베르나도트가 있는 스웨덴이 후방에 발판을 마련할 것을 두려워해 스웨덴령 포메른을 기습 공격하면서 둘의 사이는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 하필 이 침공은 베르나도트의 생일인 1월 26일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그는 더더욱 체면을 구겼다. 이로 인해 나폴레옹에 대한 베르나도트의 사적인 감정이 크게 악화된 것은 물론이고, 프랑스와 나폴레옹에 대한 스웨덴의 여론도 분노로 들끓었다. 그럴 마음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으나 설령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다하고자 해도 국민 여론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었다.결국 베르나도트는 동년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천명하는 한편(사실상 나폴레옹에게 당신 편 안 들겠다고 선언한 것과 같다.) 영국-러시아와 공개적으로 협상에 들어갔으며, 러시아 전역이 거의 마무리된 시점, 즉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후퇴하는 시기에 2만 병력을 리가에 파견하여 러시아가 프랑스 군대를 터는 데 일조했다. 1813년에 이르러서 베르나도트는 그가 노리던 노르웨이를 얻는 대가로 영국, 러시아와 공개적으로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는 곧 스웨덴 왕위계승자의 자격으로 스웨덴을 제 6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가시키고, 대프랑스 동맹의 주력군 중 하나인 북방군[17]의 총지휘관으로 뤼첸과 바우첸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이 베를린을 노리고 쳐들어오는 것을 그로스베렌과 데네비츠에서 방어해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라이프치히 전투에 북방군을 이끌고 참가, 나폴레옹 몰락 후 스웨덴의 지위향상과 이권 획득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 물론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배신자로 규정했고 이 사건 때문에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으로부터 하사받은 퐁트 코르보 공작의 작위는 정말로 박탈되었다. 그리고 이 작위는 조아킴 뮈라의 아들에게 하사되었다.
한편 베르나도트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매우 소극적으로 전투를 벌였는데, 이 때문에 같은 편인 동맹군에게서 많은 비난을 들었다.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에는 프랑스로 쳐들어가는 다른 동맹군과 갈라져 노르웨이 정복에 나섰으며, 손쉽게 덴마크와 노르웨이군을 제압하고 노르웨이를 스웨덴의 동군연합 상대로 만들었다.
1814년 4월 퐁텐블로 조약으로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당시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베르나도트를 나폴레옹을 대신할 프랑스의 군주로 만들려 했다. 사실 알렉산드르 1세는 즉위 초기만 하더라도 꽤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고 절대군주정을 고수하는 반동적인 부르봉 왕조를 복고시키는 것에 적잖은 회의를 품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프랑스는 자유주의적 사상을 지니고 혁명의 결과물들을 어느 정도 존중할 수 있는 유연한 인물이 통치하는 것이 좋았고,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면 베르나도트가 아니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Dominic Lieven은 베르나도트는 알렉산드르 1세의 의중에 있던 차기 프랑스 통치자 후보 중 하나일 뿐이며, 황제는 베르나도트 외에도 외젠 드 보아르네 등 여러 사람을 고려했다.
물론 동맹국들은 당연히 거부하였고, 부르봉 왕정복고를 지지하였다.[18] 대신 베르나도트는 5월 30일 파리 조약 이후 빈 회의에서 이전에 약속받은 대로 노르웨이 점유를 추인받았다.
2.7. 1818, 스웨덴 국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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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국왕 칼 14세 요한 (노르웨이 국왕으로는 칼 3세) |
스웨덴, 노르웨이 국왕으로서의 문장 |
그의 치세 동안 스웨덴은 내정이 안정되었고, 외교적으로도 평온하여 경제가 빠르게 발전했다. 죽는 날까지 스웨덴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20] 스웨덴인들은 베르나도트를 사랑했으며 노르웨이에서도 민족주의 진영을 제외한 일반적인 노르웨이인에게는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 언어 문제는 스웨덴어를 잘하는 그의 아들이 통역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1844년 그의 사망 후 나폴레옹의 대자였던[21] 아들이 왕위를 계승, 지금도 스웨덴의 왕가는 베르나도트의 직계 후손들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노르웨이의 왕가 또한 베르나도트의 여계 후손들로 이어져 오고 있다.
더 재미있는 점은 나폴레옹과 스웨덴 왕실의 인연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 베르나도트의 아들인 오스카르 1세는 외젠 드 보아르네의 딸인 조제핀 드 보아르네(Joséphine de Beauharnais)와 결혼했는데, 이 외젠 드 보아르네는 바로 나폴레옹의 양아들이다.[22] 나폴레옹에게 끝까지 충성한 보아르네와 나폴레옹을 배신한 베르나도트가 서로 사돈이 된 셈.
3. 가족관계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오스카르 1세 (Oscar I) |
1799년 7월 4일 | 1859년 7월 8일 |
로이히텐베르크의 공녀 조제핀 4남 1녀[23] |
4. 평가
일개 사병에서 원수, 그리고 왕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한편으로 당시의 프랑스의 여론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개인의 입장에서는 철천지 원수이자 배신자, 매국노이고, 폴란드와 노르웨이[24][25]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독립을 막은 침략자였다고 할 수 있다.그럼에도 스웨덴인에게는 어려운 시대에 나라를 구하고 반석 위에 올려놓은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실 스웨덴의 관점에서 보면 나폴레옹을 배신한 것이야말로 스웨덴을 위해 최선의 길을 선택한 것이고, 나폴레옹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반대로 자신을 믿어준 스웨덴인들을 배신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 잘했다 잘못했다를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즉 스웨덴이나 나폴레옹 둘 중 하나와는 반드시 척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분명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에게 스웨덴의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나폴레옹은 이를 수긍하고 그를 보내줬으며, 그럼에도 먼저 스웨덴령 포메른을 점거하면서 베르나도트의 통수를 친 사람은 나폴레옹이었다. 사실 상식적으로 볼 때도 스웨덴의 국가원수가 된 이상 베르나도트는 프랑스가 스웨덴을 침략하거나 외교적으로 제재를 한다면 프랑스에게선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역사를 들여다보면, 베르나도트는 이전부터 나폴레옹과는 라이벌에 가까웠고, 사상적으로도 자코뱅 파였기 때문에 나폴레옹과는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다. 쿠데타 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처음부터 베르나도트는 그다지 나폴레옹에게 협력하거나 충성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폴레옹이 베르나도트를 중용한 것이 기이할 정도.[26]
당대 유럽에서 나폴레옹의 이미지는 19세기 판 아돌프 히틀러였기 때문에, 유럽의 평화를 생각하면 베르나도트는 매국노라기보다는 야심가를 막아내기 위해 조국인 프랑스를 떠나가야 했던 비운의 지도자였고, 동시에 19세기 스웨덴을 발전시킨 명군이었다.
5. 여담
- 이등병부터 시작해 최후엔 한 나라 국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지만 애정관계에 있어서는 불우했다. 그의 아내인 데지레는 나폴레옹과 연인관계였지만 나폴레옹이 애 딸린 이혼녀 조제핀에게 빠진 동안 베르나도트와 결혼했다. 후에 나폴레옹은 자신이 전선에 나가있는 동안 조제핀의 불륜으로 조제핀과 멀어지자 다시 옛 여인인 데지레에게 접근했는데 데지레는 그를 다시 받아들였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과 불륜을 저지르던 데지레를 끝까지 사랑했다. 스웨덴의 섭정으로 있을 때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그를 마음에 들어해 러시아의 대공녀와 결혼하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베르나도트는 아내가 있다면서 정중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더구나 그 당시엔, 아내 데지레가 북방의 스웨덴의 추운 기후와 풍토, 문화에 익숙해지지 않아 파리에 남아서 부부가 긴 별거생활을 했을 때였다.[27] 그 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베르나도트는 왕이 된 후 자신의 아내를 스웨덴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데지레는 마지막 유언에 자신의 남편이 아닌 나폴레옹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의 침실 안 베개 밑에는 예전에 나폴레옹과 주고받았던 수많은 연애편지들이 남아 있었다.
- 하지만 데지레도 남편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등 남편을 사랑하기는 했다는 얘기가 있다.
- 젊은 시절에는 왕정에 격렬히 반대하는 자코뱅 파였는데, 야사에 의하면 베르나도트가 죽은 후 몸을 검시해 보니 "왕에게 죽음을!"이라는 문신이 있었다고 한다. 훗날 그가 왕이 되는 걸 생각해보면 아이러니. 그러나 다른 설에 따르면 이것은 몇십년 후에 연극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 상하관계가 엄격하기로는 수위를 달리는 곳이고, 스웨덴은 그 반대라고 한다. 실제로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에서 처음으로 연설을 할 때 스웨덴어가 서툰 탓에 단어를 잘못 말하자 스웨덴인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었고, 프랑스에서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베르나도트는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무사히 극복하고 스웨덴을 잘 다스렸다. 그는 "스웨덴에 나보다 훌륭한 군인이 100명 있다고 반박하지 않겠소. 그러나 경제에 있어서는 내가 가장 뛰어나오."라고 했다고 한다.[28] 그의 통치 후반에는 스웨덴의 인구가 노르웨이를 빼고도 과거 스웨덴과 핀란드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무력 사용을 싫어하여, 후의 노르웨이 정벌에서도 박살낼 수 있던 것을 싸움을 최대한 피하고 자치권을 상당히 인정해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노력했다. 이는 그의 즉위 연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전쟁을 가까운 거리에서 봐왔습니다. 나는 그 모든 참상을 잘 압니다. 외국 땅에 뿌려진 그 자식들의 피에 대해 조국이 위로받을 정도의 정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많은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또 그 무적의 군대에 둘러싸인 위대한 프랑스 황제가 평화의 올리브 가지 뒤에서 한숨을 내쉬는 것을 봐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평화야말로 현명하고 계몽된 정부의 유일하게 영광스러운 목표입니다. 국력과 독립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국가의 영토 넓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국가의 법과, 통상과, 산업과, 그리고 무엇보다 그 국민 정신입니다.
- 말년에는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을 통제하기도 해서 인기가 꽤 식었지만, 그럼에도 스웨덴 국민들은 그를 여전히 좋아했고 꼭 업적이 아니더라도 일개 사병에서 원수가 되었다가 왕까지 된 그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 다리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젊은 시절 별명이 '각선미 하사'. 위 초상화만 봐도 몸관리를 철저하게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칼 요한 거리(Karl Johans gate)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오슬로 왕궁과 오슬로 대성당이 있으며, 에드바르 뭉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칼 요한의 저녁(Aften på Karl Johan)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 떠난 아내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전임 왕 칼 13세의 정부였던 마리아나 코스쿨(Mariana Koskull)을 비공식적인 정부이자 시녀로 두었다.
- 사생아가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결혼 전인 1789년에 태어나 동년 요절한 올랭프 라무르(Olympe Louise Catherine Lamour)이다.
- 나이가 들어 가늘어진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 가발을 착용했다.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젊은 시절엔 풍성한 검은 머리를 자랑했다.
- 식사를 굉장히 빨리 해서 동석한 사람들이 제대로 먹기도 전에 음식 서빙이 끝나버리고는 했다.
-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황후 바덴의 루이제 공녀는 평민 출신의 베르나도트가 세운 베르나도테 왕가를 '다시 아름다워진 유럽의 불쾌한 얼룩'이라고 불렀다.
- 저녁형 인간이었다.
- 치세 동안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했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것은 1842년 오스카르 왕세자의 주도로 시작된 국민학교 제도이다.
[1]
칼이 17세 때 사망했다.
[2]
이 중 2명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3]
스웨덴 왕위를 계승하기 위하여 개종했다. 그러나 원래부터 신앙심이 투철하지는 않았다.
[4]
현재까지도 스웨덴 왕실은 유지되고 있으나 노르웨이는 1905년 노르웨이가 독립하면서 이전 왕조인
올덴부르크 왕조의 방계인
글뤽스부르크 왕조가 복위했다.
[5]
베르나도트의 생가는 프랑스에서 잘 보존 되어 있다.
[6]
프랑스 왕국이니 왕립 해군. 영국 군함 이름 앞에 붙는 HMS는 His/Her Majesty's Ship(국왕 폐하의 함선)을 줄인 말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7]
실제로 데지레 클라리 가문과 나폴레옹의 가문은 친분이 매우 깊어 서로 사돈맺기로 약속하고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는 데지레 클라리의 언니와 결혼했다.
[8]
원래 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참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예나 방면으로 가는 바람에 다부의 부대 혼자서 두 배에 달하는 프로이센군을 막아 악전고투 끝에 승리했다. 그런데다가 예나 전투는 나폴레옹의 압승으로 빨리 끝나버리는 바람에 베르나도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만 이때 고려해야 될 것은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주력군이 예나에 있다고 착각하고 그를 예나로 불렀기 때문에 만약 다부를 지원하러 갔다가 별 것 아니면 오히려 더 안 좋을 수도 있었다. 특히 이전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기병대도 거의 없는 군단을 이끌고 패잔병 추격을 잘 못했다고 혼이 난 그로서는 어떻게든 나폴레옹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고 있었다. 다만 결과가 나빴을 뿐이다. 추가하자면, 이후에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다부에게 가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프랑스군의 문서를 보관했던 대육군 기록 보관소에서 그런 명령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베르나도트가 확실히 받은 명령서는 "어디로 갈지 니가 알아서 판단해. 난 예나로 오면 좋겠지만."이라는 사실상 답정너 명령서였다. 오히려 베르나도트 입장에서 보면 나폴레옹의 의도대로 따라가준 것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 이 사태를 만든 비판을 받아야 했고 황제 자신이 아니면 가장 덮어씌우기 좋은 상황이었던 게 베르나도트였던 것.
[9]
아이러니한 건 이후에 스웨덴 왕세자가 된 후에는 이게 도움이 되었다. 작센군 입장에서 보면 차별받아 힘든 일은 다 했지만 아무도 고생한 걸 알아주지 않았던 자신들을 보호해주려 노력했고 자기들의 체면을 살려줬기 때문에 작센은 베르나도트에게 우호적이 되었다. 이 결과 1813년 독일 전역에서 작센은 빠르게 베르나도트의 대불동맹에 합류했다.
[10]
심지어 해당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포격 사거리 안이었다.
[11]
대중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이때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이 암살 의혹을 뒤집어쓰고 시민들에게 린치당해 사망했다.
[12]
그의 아내 데지레의 언니가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의 아내였다.
[13]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정치나 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 데다가, 스웨덴에서의 삶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추워서.
[14]
무려
구스타브 1세 바사 시절부터 내려오는 명문 귀족이었다.
[15]
덴마크 공주(나중에 여왕)
마르그레테와 노르웨이 국왕
호콘 6세의 아들로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의 외손자이자 스웨덴 국왕
망누스 4세의 손자였다.
[16]
완전히 영국과의 무역을 단절한다면 스웨덴의 경제가 작살날 판이었다. 안 그래도 스웨덴은 1809년까지의 전쟁으로 재정도 경제도 말이 아니었다.
[17]
Army of the North. 러시아, 프로이센, 스웨덴군으로 이루어진 혼성군이었다.
[18]
동맹국들이 보기에 베르나도트는 정통성 없는 일개 장군일 뿐이었다. 게다가 동맹국들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서유럽에 미치는 것을 경계했으며, 러시아 황제의 지지를 받는 프랑스의 군주가 세워진다면 프랑스가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놓일 것을 두려워했다.
[19]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의 첫 왕은 베르나도트의 선왕 칼 13세였다. 베르나도트는 노르웨이에서 칼 3세 요한으로 불린다.
[20]
이 때문에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모든 공공문서는 베르나도트를 위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다만 20세기 전반까지 유럽 사회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였고
구스타브 3세와 같은 스웨덴 국왕도
프랑스 문화에 매료되어 프랑스 문화를 스웨덴 궁정으로 들여오는 데 열심이었던 터라 스웨덴 상류 사회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이 큰 무리는 없었다.
[21]
후견인을 대부라고 하는데, 대자는 후견인의 지원을 받는 남성을 말한다. 즉, 나폴레옹의 후원을 받았다.
[22]
나폴레옹의 첫 아내였던 조세핀이 나폴레옹과 재혼하면서 데려온 전남편의 아들이 이 외젠 드 보아르네다.
[23]
칼 15세,
오스카르 2세 등
[24]
오슬로의
왕궁에 있는 칼 14세 요한 동상이 노르웨이 독립 후에도 철거되지 않은 건 현
노르웨이 왕실이 칼 14세 요한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가 독립할 때 왕위에 올랐던
호콘 7세의 어머니가
스웨덴의 로비사 공주인데 그녀의 증조할아버지가 바로 칼 14세. 만약 노르웨이가 공화정으로 독립하거나 칼 14세 요한의 피가 흐르지 않는 다른 사람을 왕으로 추대했다면 칼 14세 요한의 동상은 가차없이 철거되었을 것이다.
[25]
물론, 다 같은
노르드계
민족이 세운 나라인 데다, 누구는 잘 살고 누구는 못 사는 게 아니라 두 나라 다 세계 상위권의
선진국이라서, 오늘날에도 서로의 국경을 넘어서 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양국 간의 국민감정은 나쁘지 않다. 심지어
노르웨이가
스웨덴의 식민지로 넘어간 후에도, 말이 식민지지 사실상 자치권을 가진 본토의 일부 수준으로 잘 대해준 터라, 당대에도 노르웨이인들이 스웨덴인과 칼 14세에 대해 딱히 악감정을 품지 않았다. 노르웨이인들이 한때 스웨덴인들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던 직접적인 이유는 오히려
제2차 세계 대전 때 스웨덴이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략을 묵인한 것인데, 이때도 스웨덴은 나치 독일의 자국 침략을 막기 위해 그런 측면이 강하며 직접적으로 노르웨이를 공격한 것은 아닌지라 해당 역사와 관련해서 노르웨이는 (당연한 일이지만) 스웨덴보다는 독일을 훨씬 크게 비판하는 편이다.
[26]
여기에는 나폴레옹이 버렸던 옛 애인 중 하나인 데지레 클라리의 배겟머리 송사가 상당부분 작용하기도 했다. 나중에 베르나도트와 결혼해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던 그녀가 죽고 난 뒤 침실에서 그 옛날 나폴레옹과 주고받았던 연애편지가 나왔다고. 또한 나폴레옹이 자코뱅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차원에서 자코뱅 출신이면서 그나마 인척관계에 있는 베르나도트에게 높은 지위를 주었다고 보기도 한다.
[27]
다만 아내가 파리로 돌아가고 스웨덴에서 사실상 홀몸으로 지낼 때 스웨덴 출신 정부를 두었는데, 그 정부가 그의 양부인 칼 13세의 정부였던 여자라...
[28]
군 경력만 가지고 있던 사람이 저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게 베르나도트는 전통적인 농업 강국인 프랑스 출신이라 당시 스웨덴의 경제가 왜 쇠퇴했는지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와 비교해 볼 때 당시 스웨덴은 인구가 심각하게 적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프랑스에 비해
농업이 심각하게 후진적이었고, 그로 인해 인구가 늘지 않고 인구가 늘지 않으니 농업을 포함한 다른 산업이 쇠퇴하는
악순환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게 왕실 농업학회를 설립해서 농업 선진화를 먼저 추진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