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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
1.1. 상파울루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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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체격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그였으나, 10대 중반 성장기로 접어들며 카카는 크고 강한 몸을 갖게 되었고 운동 능력 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 화려하진 않지만 간결한 테크닉으로 볼을 처리하는 플레이에 반한 상파울루 유스 팀 코치는 카카가 15세 때 정식 계약을 제안했다.
이후 카카는 브라질 청소년 대표팀에도 발탁되어 2001년 FIFA U-20 월드컵에 참가했다. 아드리아누와 함께 공격을 이끌었지만, 브라질 대표팀은 가나에 발목을 잡혀 8강에 머물렀다. 이 대회의 주인공은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끈 하비에르 사비올라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카는 사비올라나 파블로 아이마르에 비해 크게 주목받는 유망주가 아니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엔트리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의 결정에 의문을 품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그러던 그가 AC 밀란으로 이적하게 되었을 때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은 후이 코스타보다 포워드적인 성향을 지닌 카카가 안드레아 피를로와 이상적인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낼 수 있다고 믿었고, 그 판단은 매우 정확했다.
1.2. AC 밀란
307경기 104골 73도움
브라질 리그에서 기반을 닦은 뒤 2003년 밀란으로 이적, 이적하자마자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확고한 주전으로 자리매김한다. 이적 첫 시즌에
세리에 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기까지 하였다.2003-04 시즌, 데뷔 첫 해 리그 10골을 터뜨린 카카의 활약은 대단했다. 리그와 챔스를 가리지 않고 맹활약을 펼친 카카는 다음 시즌에도 밀란을 챔스 준우승으로 이끌었고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급부상했다.
2003-04 시즌: 45경기 14골 6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0 | 25 | 5 | 10 | 5 |
챔피언스 리그 | 10 | 10 | 0 | 4 | 1 |
코파 이탈리아 | 4 | 1 | 3 | 0 | 0 |
인터컨티넨탈컵 | 1 | 1 | 0 | 0 | 0 |
합계 | 45 | 37 | 8 | 14 | 6 |
2004-05 시즌: 51경기 9골 18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6 | 33 | 3 | 7 | 13 |
챔피언스 리그 | 13 | 12 | 1 | 2 | 5 |
코파 이탈리아 | 1 | 0 | 1 | 0 | 0 |
수페르코파 | 1 | 1 | 0 | 0 | 0 |
합계 | 51 | 46 | 5 | 9 | 18 |
뛰어난 개인기와 드리블, 패스, 슛팅, 결정력도 갖추고 타고난 체력과 뛰어난 피지컬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만능형 선수였다. 당시 밀란의 다이아몬드 4-3-1-2 시스템의 꼭지점 공격형 미드필더에 완벽하게 부합하며 전방 투톱, 그 유명한 에르난 크레스포와 안드리 셰브첸코에게 킬러 패스 쫙쫙 뿌려주다가 심심하면 자기도 뛰쳐올라가던 모습은 충격과 공포. 덕분에 카카가 뛸 자리에 뛰었던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후이 코스타가 밀려났을 정도다. 그때 코스타는 이미 33세의 선수생활 황혼기라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카카의 트레이드 마크인 치달은 그야말로 상대 입장에서는 공포스러울 정도였는데, 마치 미친 말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속도로 중원을 치고 달리는 모습은 세계 최고의 플레이였다. 킬러 패스는 물론 본인의 주력을 이용한 수비라인을 붕괴시키는 활약으로 카카의 전성기와 함께 밀란은 제2의 밀란 제너레이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굉장한 위세를 떨쳤다.
2005-06 시즌: 49경기 19골 11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5 | 28 | 7 | 14 | 9 |
챔피언스 리그 | 12 | 12 | 0 | 5 | 1 |
코파 이탈리아 | 2 | 1 | 1 | 0 | 1 |
합계 | 49 | 41 | 8 | 19 | 11 |
2006-07 시즌의 카카의 챔스 활약은 가히 역대급[1]으로, 10골 3도움을 기록하며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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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별리그
1차전(vs AEK 아테네 FC) 1골 1도움
3차전(vs RSC 안데를레흐트) 1골 (결승골)
4차전(vs RSC 안데를레흐트) 3골 (결승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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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vs
셀틱 FC)
2차전 1골 (결승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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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vs
FC 바이에른 뮌헨)
1차전 1골
2차전 1도움 (결승골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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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vs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차전 2골
2차전 1골 (결승골)
- 결승(vs 리버풀 FC) 1도움 (결승골 도움)
이때 밀란이 챔스에서 넣은 골은 총 20골로, 10골 3어시스트를 기록한 카카는 밀란 전체 득점의 65%에 관여하며 당시 노인정이라고 평가받던 밀란에서 원맨쇼를 펼치며 빅 이어를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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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간결하고 날카로운 플레이 스타일과 선수 본인의 건전한 사생활 등으로 개인적인 안티 팬덤도 거의 없는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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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즌의 대활약으로 2007년에 세리에 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고 IFFHS 세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옹즈도르, UEFA 올해의 공격수,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3],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FIFA 올해의 선수와 발롱도르를 모두 거머쥐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등극한다. 카카의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은 2023년 기준으로 현재까지 마지막 세리에 A 클럽 소속 선수와 브라질 국적 선수로서는 마지막 수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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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카카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리오넬 메시를 압도적인 표 차이로 누르고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2006-07 시즌: 48경기 18골 11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1 | 30 | 1 | 8 | 7 |
챔피언스 리그 | 13 | 12 | 1 | 10 | 3 |
챔피언스 리그 예선 | 2 | 2 | 0 | 0 | 1 |
코파 이탈리아 | 2 | 2 | 0 | 0 | 0 |
합계 | 48 | 46 | 2 | 18 | 11 |
07-08 시즌과 08-09 시즌 역시 노인정 밀란을 홀로 멱살 캐리 해야하는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카카는 끊임없이 고통받았다.
2007-08 시즌: 41경기 19골 16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0 | 30 | 0 | 15 | 11 |
챔피언스 리그 | 8 | 8 | 0 | 2 | 2 |
클럽 월드컵 | 2 | 2 | 0 | 1 | 3 |
슈퍼컵 | 1 | 1 | 0 | 1 | 0 |
합계 | 41 | 41 | 0 | 19 | 16 |
2008-09 시즌: 36경기 16골 11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1 | 28 | 3 | 16 | 9 |
유로파 리그 | 4 | 3 | 1 | 0 | 1 |
코파 이탈리아 | 1 | 1 | 0 | 0 | 1 |
합계 | 36 | 32 | 4 | 16 | 11 |
밀란에서의 마지막 해였던 2009년, 당시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카카에게 1억 파운드[4], 주급 한화 10억의 역대 최고액을 제시해 온 바 있다.
당시 밀란은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카카는 팀의 재정난 해결을 위해 이적에 동의했으나 밀란의 팬들이 카카의 집앞까지 찾아와 밀란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시위에 가까운 요청을 하며 밀란의 구단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입지마저 위협을 받는 상황까지 이르러 당장은 이적을 하지 않았으나 결국에는 갈락티코스 2기를 천명한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의 레알 마드리드 CF 재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맨유의 호날두와 함께 레알로 6,000만 파운드[5]의 이적료로 이적하기에 이른다. 호날두와 카카라는 두 세계 최고 스타들의 영입에 많은 레알 팬들은 이제 마지막 챔피언스리그 우승 이후 7년여 동안 들지 못했던 빅 이어와 챔스 10회 우승의 라 데시마를 이뤄 줄 구세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1.3. 레알 마드리드 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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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경기 29골 30도움
1.3.1. 2009-10 시즌
레알에서의 첫 시즌이었던 09-10 시즌까지만 해도 카카의 활약 자체는 무난한 편이었다.라리가 2라운드 RCD 에스파뇰 전에서 2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3:0 승리에 적잖은 공헌을 하였고, 4, 5라운드에서 만난 비야레알 CF와 CD 테네리페를 상대로 연속골을 기록하였으며, 해당 시즌 FC 바르셀로나와의 엘 클라시코 1차전 #에서는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줬다는 평[6]을 받으면서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7] 이 때까지만 해도 데뷔 시즌에 치른 첫 엘 클라시코부터 적응기 따윈 없다는 듯이 전 시즌 6관왕을 이뤄낸 최강 바르셀로나를 매순간마다 위협하면서 찬스를 만들어준 카카가 결정적인 찬스를 여러 차례 놓쳤던 호날두보다 팀내에서 더 중요한 선수가 될 것이라 믿었던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그 이후 카카는 부상을 앓기 시작한다. 첫 부상까지만 해도 카카가 이후 유리몸이 될 거라 생각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부상에서 회복한 뒤에 치른 복귀전 상대인 RCD 마요르카를 상대로 어시스트를 기록하고, 리그 21~24 라운드에 치른 4경기에서 모두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며 4골 2어시스트를 적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리옹을 상대로 졸전을 치르며 탈락한 직후 장기 부상을 앓으면서 카카는 남은 경기 대부분을 거하게 말아먹은데다 후반기에 복귀한 뒤 치른 경기에서 크게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시즌을 무관으로 마무리 지으면서 카카에 대한 평가도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이적 첫 시즌이었고, 운 나쁘게 부상을 당한 점을 감안하여 아직까지는 팬들의 본격적인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2009-10 시즌: 33경기 9골 8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라리가 | 25 | 21 | 4 | 8 | 5 |
챔피언스 리그 | 7 | 7 | 0 | 1 | 2 |
코파 델 레이 | 1 | 1 | 0 | 0 | 1 |
합계 | 33 | 29 | 4 | 9 | 8 |
1.3.2. 201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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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는 이런 마드리디스타들의 기대와 새로 부임한 주제 무리뉴 감독의 신의를 저버리는 최악의 결정을 하게 되니 그것이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출전이었다.
아직 무릎 부상이 완쾌되지 않았던 2010년 프리 시즌, 그는 자신의 부상 사실을 구단 보드진 및 의료진 및 코치진에게 감추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 무리하게 출전을 감행했고 브라질은 그의 3어시스트와 함께 8강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휴식과 치료를 해야할 시기에 무리를 한 결과 월드컵 종료 후 4개월 가량의 추가 진단을 더 끊게 되었다. 선수로서 몹시 좋지 않은 선택이었고, 애국심과 프로의식 사이의 균형이 어긋난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8]
간혹 일부 팬들은 조국을 위해 억지로 아픈 것을 참고 뛰었는데 오히려 칭찬받을 일 아니냐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프로구단에 소속되어 구단으로부터 급여를 받는 프로선수가 자신의 몸상태를 숨기고 전력에서 이탈하여 부상을 키운 것은 쉴드칠 그 어떠한 이유도 근거도 없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대우와 팀내 최고 연봉을 제공하는 클럽의 선수가 저런 짓을 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아쉬운 결정이라고 밖에 더 표현할 길이 없다. 어느 종목이든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라면 일반인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훈련과 경기들로 인해 작게라도 부상을 달고 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국가대표 경기를 위해 부상을 숨기고 살지는 않는다.[9]
한편, 2010년 여름부터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이적설에 시달렸다. 본인의 트위터에 글을 올려 이적설을 일축했다고는 하나, 심심찮게 '카카의 거취, 이적설' 등의 제목을 달고 있는 기사를 찾아볼 수 있었다. 이는 아마도 2010-11 시즌 레알 선수진의 미드필더 과다 현상과 함께, 메수트 외질이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2010년 10월 외질이 레알에서 점점 입지를 넓혀가는 반면, 부상 재활 치료중인 카카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때문에 카카의 이적설은 점점 커졌으며, AC 밀란, 인테르, 상파울루 뿐만 아니라 맨체스터 시티, 첼시와 같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구단까지 영입 경쟁에 끼어들어 이적 논란이 커지는 데 한 몫 했다.
결국 무리뉴 부임 첫시즌에 리그 전반기는 거하게 말아드셨고 이후에 간간히 서브로만 나와서 스탯을 쌓는데에 그치고 있다.
2011년 1월 10일 라리가 리그에서 교체투입해서 호날두의 어시로 골을 넣었다. 2-2로 밀리고있다가 3-2로 역전후 4-2의 쐐기골을 만들었다.
2010-11시즌 리그 31라운드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경기에서 준수한 활약을 보이고 2골을 넣는 등 서서히 살아날 조짐 역시 보이고 있어 여전히 레알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2010/11 시즌 리그 33라운드 발렌시아와의 경기에서 펄펄 날아다니면서 2골 3어시라는 미친 활약을 하며 클래스 인증과 더불어 부활절 부활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서 바르셀로나의 엘 클라시코 대결 1차전에서 부진하던 외질을 대신해 투입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페페의 퇴장으로 투입되지 못하였다. 많은 이들이 페페가 퇴장당하지 않고 카카가 들어갔으면...하고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적어도 2골이 필요하던 2차전에 마침내 선발 출전을 했다. 그러나 폭발적인 모습은 역시나 보이지 않고 카카답지 않은 조용한 플레이를 하다가 외질과 교체되었다. 골닷컴은 매치 최악의 선수로 카카를 선정했다. 다만 온전히 카카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힘든데, 레알 후위 미들진이 이미 바르샤에게 크게 밀린 상황에서 제대로 볼이 오지 않았다. 교체된 외질도 클로킹 모드는 마찬가지였다.
장기간 컨디션 난조 및 부상으로 인해 필드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기에 카카를 까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시즌 후반부 되어서야 복귀한 것도 있고 눈과 귀가 쏠리는 엘 클라시코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못 한 것은 사실이지만, 2010-11 시즌 카카의 스탯은 14경기 7골 4어시이다. 출전 대비 시간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오히려 A급 스탯이었다.[10][11]
그러나 그나마 준수한 스탯이 무상하게도 70m 광속 드리블을 하시던 분[12]이 달리기도 못하는 잉여 자원이 되었다.[13] 레알로 이적할 때만 해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카카 둘 중 누가 더 뛰어난 활약을 펼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저 리오넬 메시를 둘이서 상대해낼 것인가 하는 설레발들까지 넘쳐났으나, 저 둘을 발랐던 무용담도 이제는 과거의 영광이 된지 오래다. 레알 이적 후의 카카는 저 둘을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의 하락세에 직면하였으며 호날두와 에이스 자리를 두고 겨룰 선수 혹은 메시의 라이벌은 고사하고 레알팬들 사이에선 거의 꿔다놓은 보릿자루 수준의 취급을 받으며 제발 자신과 팀을 위해 이적하라는 요청을 끊임 없이 받게 되었다. 밀란 컴백 루머가 솔솔 불지만 밀란팬들도 꺼리는 상황이었다.
시간당 찍은 스탯 자체는 좋은 걸 떠나서 '어째서 출장시간이 많지 않은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주된 이유는 카카 본인의 월드컵 출전 강행이다. 카카는 월드컵 전부터 이미 부상을 안고 있었고, 본인조차도 이를 알면서도 월드컵을 택했다. 특히 2경기째 치르고나서 부상이 악화했음을 느꼈으나 계속해서 경기를 출전했고, 브라질이 탈락한 이후에도 바로 클럽으로 돌아와 검사를 받는 대신 클럽에서 받은 한 달 휴가를 다 쓰고 와서야 수술을 받았다. 즉 리그 개막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아웃되어 버린 것. 결국 카카는 2010-11시즌 전반기의 대부분을 날림과 동시에 전체적인 피지컬 저하, 그리고 외질이라는 새로운 스타에게 밀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몸 관리도 축구선수로서 필수적으로 해야 될 부분임에도 카카는 이를 실패했고 결국 이적설까지 나오게되고 말았다. 이같은 사실로 카카는 많은 레알 팬들에게 논란의 요소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본인의 잔류 의지도 강력하고 더불어 무리뉴 감독도 "카카는 4시즌째 프리시즌을 갖지 못했다"는 옹호발언으로 팬들을 희망고문을 하고있기 때문에 2011-12시즌은 레알 마드리드에서 뛸 것으로 보였다. 카날레스가 없는 레알로선 외질이 부상당할 경우 마땅한 대체선수도 없기 때문에 카카가 후보라도 있으면 손해볼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클래스가 있는 선수고 멘탈도 좋기 때문에 꾸준한 몸관리만 따른다면 머잖아 부활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지만 워낙 몸값이 비싼 터라 뭐 축구계 최악의 먹튀로 등극할 위험성도 그만큼 높았고, 결국...
2010-11 시즌: 20경기 7골 5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라리가 | 14 | 11 | 3 | 7 | 4 |
챔피언스 리그 | 3 | 1 | 2 | 0 | 1 |
코파 델 레이 | 3 | 0 | 3 | 0 | 0 |
합계 | 20 | 12 | 8 | 7 | 5 |
1.3.3. 2011-12 시즌
2011 여름 이적시장이 일주일 남짓 남은 가운데 갖은 추측성 루머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가장 큼지막한 떡밥은 밀란으로의 복귀와 아스날 FC로의 이적설. 카카 본인은 마드리드를 떠날 생각이 없다고 했다.결국 본인 소원대로 떠나지 않았고 2011-12 시즌 라리가 개막전에서 선발로 출장해 1골 1도움을 올리면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2011-12 시즌 초반 출전 시간을 늘려가면서 부활의 징조를 조금이나마 보였다. 리그에서도 괜찮은 움직임을 보여주더니 챔피언스리그 레알 마드리드-아약스 전에서 3:0의 압승을 거두는 데에 호날두, 벤제마와 함께 각각 1골 1도움을 하면서 아약스를 실신시켰다. 예전만큼 미친듯한 빠르기로 치달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패싱이나 슈팅같은 다른 부분은 여전한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이 시즌 초중반에 폼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이며 밀란 등에서 다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레알이 카카를 얼마 주고 사왔는데 이제서야 진가 발휘하는 선수를 내보내겠는가. 무리뉴 감독이 "모든 선수들은 카카를 본받아라."라고 한 걸로 보아 이적할 가능성은 없을 듯 했고, 실제로 밀란 복귀는 몇 년 뒤에나 성사 되었다.
2011년 10월 16일(한국 시간)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와의 매치에서 선발 출장하여 전반에 심심하게 뛰다가 골 찬스 하나 놓치더니 호날두의 패스를 받고 환상적인 중거리 감아차기로 이과인에 이어 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바로 교체됐다. 무리뉴 감독에 의하면 아직 풀타임 뛰는 건 무리라는 모양. 팬들도 어중간하게 뛰다 나가느니 바로 나가서 코치진에게 칭찬도 받는 게 낫다라는 반응이고 조금씩 살아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2011년 10월 19일 챔스 32강 올랭피크 리옹과의 매치에서 60분 경 메수트 외질과 교체하여 출전해서 뛰기 시작했는데 최근 폼이 살아나고 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교체 투입되자마자 밀란 시절의 카카를 떠올리게 하는 치달을 보여주어 자신감이 생겼다는 걸 알리고, 환상적인 코너킥으로 라모스의 득점을 돕기도 했다. 킬패스도 두어번 정도 찔렀는데 이과인과 벤제마가 못먹어서 날렸을 뿐 팬들도 패스등의 능력은 80%까지 살아났다고 보는 상황이었다. 아쉬운 상황이 있었는데, 호날두가 중거리슛으로 골을 넣었을 때 카카가 오프 사이드 위치에 있는 바람에 무효골이 되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카카는 공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윗 경기들에 이어 말라가, 비야레알과의 매치에서도 2어시를 기록하고 1골에 역습 시작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여전히 플레이 메이커로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며 비야레알과의 경기에선 부상으로 뛰기 힘들다던 풀타임 경기까지 뛰었다. 인터뷰에서 풀타임 경기에도 육체적 정신적으로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고 밝혔다. 덧붙여 호날두가 득점을 하지 못해 답답해하는 걸 알아채고 호날두에게 공을 몰아주는 모습을 보였으나 결국 호날두는 득점을 하지 못했다.
소시에다드와의 매치를 승리로 끝낸 후, 며칠 후 카카가 타박상을 입어 별도로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는 무리뉴의 인터뷰가 나왔다. 오랜 부상 끝에 떨어진 폼이 살아나고 있는 와중에 다시 입은 부상이라 팬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1년 6개월만에 다시 소집받은 브라질 국가대표 참가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무리뉴의 인터뷰로는 완치에 15일 정도 걸릴거라고 하는데 일단 이전에 입은 부상과는 관련 없다고 밝혔다.
대망의 엘 클라시코에선 외질이 선발로 나와 벤치에 있었으나 공미로 나온 외질이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면서 평소보다 이른 55분경 외질과 교체. 공격이 정체되던 공격팀의 활력소가 되었고 본인도 유효슛을 기록하며 득점을 노렸으나 발데스의 선방으로 득점은 하지 못했다. 그래도 준수한 활약을 보이며 아쉽게 엘 클라시코에서 패했다.
마요르카전에서 전반에 레알의 공격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은데다가 한 골을 얻어맞자 무리뉴 감독이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이과인, 코엔트랑과 함께 투입해서 외질과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외질과 카카가 함께 뛰니 킬패스가 상당히 쏟아졌다. 중거리 슛을 차기도했는데, 축구공이 야구공마냥 도중에 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으며 패스도 여전한 모습을 보였다. 피지컬은 죽었지만 발은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외질과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며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기에 엘 클라시코 원정 경기에선 외질과 함께 선발로 출전, 상당히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체력이 급격하게 저하되자 폼이 수직하락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며 70분에 교체. 팀은 2:2로 비겼다.
2012년 3월 5일 에스파뇰과의 경기에서 이과인의 2골에 모두 어시를 기록하며 자신도 한 골을 넣는 모습을 보이며 폼이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 날 레알은 5:0으로 대승.
하지만 카카는 레알 팬들의 기대와 신의를 저버리는 또 한번의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챔피언스리그 4강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2차전. 카카의 부진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교체로 투입되어 한 골이면 그대로 결승 진출인 상황, 그것도 연장 승부에서 훌륭한 찬스를 우물쭈물하다 날려 버렸고, 승부차기 키커로 선택되었으나 실축하여[14] 무리뉴의 마지막 믿음마저 저버리고 말았다. 거기다 경기 종료 후 라커룸에서 이케르 카시야스와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이 올라와 팬들에게 더 큰 실망을 안겼다.[15]
2011-12 시즌: 40경기 8골 12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라리가 | 27 | 17 | 10 | 5 | 7 |
챔피언스 리그 | 8 | 4 | 4 | 3 | 5 |
코파 델 레이 | 4 | 4 | 0 | 0 | 0 |
수페르코파 | 1 | 0 | 1 | 0 | 0 |
합계 | 40 | 25 | 15 | 8 | 12 |
1.3.4. 2012-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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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 시즌이 끝나고 프리시즌 친정팀 밀란과의 경기에서 후반 60분에 교체 출전하여 3어시를 올리는 미친 활약을 했다.
언제나 이적시장이 열리면 이적설이 나돌던 선수였는데, 이전 이적시장은 무리뉴가 항상 카카를 보내지 않을 것이란 쉴드를 쳐왔고 실제로도 이적하지 않았으나 이번 시즌은 무리뉴도 카카가 원한다면 보내주겠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 게다가 레알이 토트넘 홋스퍼 FC의 루카 모드리치를 영입하려는 시도에 더욱 더 입지가 좁아질뻔 했으나 이 시기에 모드리치의 영입이 원활하지 않았던 터라 어떻게 될 지는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2012년 8월, 시즌 첫 경기인 발렌시아 CF와의 경기에서는 벤치에 앉았으나, 그 이후 이어진 스페인 슈퍼컵 경기에도, 2R였던 헤타페와의 경기에도 아예 소집이 되지 않았다.
정규 시즌엔 단 한 경기도 출장하고 있지 못했는데, 외질이 너무나도 부진한 상황에서 카카를 한 경기도 내보내지 않는다는[16] 무리뉴의 이해할 수 없는 로테이션[17] 시달리며 마음 고생하는 와중에도 프리시즌과 친선 경기에는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상대가 강팀이 아니라곤 하나 한 경기 60분 정도의 경기시간에 해트트릭과 2어시는 가히 괴물같았다.
그러나 그 이후 본 시즌에 들어온 이후 교체로 출전한 경기에서는 그야말로 막장의 모습을 보여주며 레알팬들은 일말의 기대도 다 접어버렸다. 잘했던 경기는 아약스전과 같이 의미 없는 잉여 경기정도. 그나마도 카카가 스탯을 쌓아서 그렇지 경기력은 그다지였다. 레알팬들은 카카팬들을 제외하고는 제발좀 카카 팔라는 소리만 했다.
특히 하부리그팀 상대로도 맥없는 플레이를 보여주고, 외질 대신 교체돼서 나가서는 외질보다 못하는 플레이를 보여주며 왜 무리뉴가 카카를 안쓰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18] 그리고 대망의 말라가전에서 그야말로 단체 막장테크가 뭔지를 보여주던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19]중에서도 교체로 나온 카카는 호무란을 날려버리면서 마지막을 장식했다. 주급을 호날두급으로 받는데 교체로 나가서도, 슈퍼서브로조차도 활약을 못하고, 다른 선수보다 나은 챔스 경험의 힘도 못보여주며, 나이조차도 이제 30줄에 접어드는, 이제는 내려가는 일만 남은 선수에게 레알팬들은 빨리 나가주길 바랄 뿐이었다.[20]
교체로 출전했던 팜플로냐 원정에서는 그야말로 막장 오브 막장의 모습을 보이며 퇴장까지 당하는[21] 모습을 보여주며 토레스가 받았던 0.5점에 뒤지지 않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악의 영입과 함께 금지어가 되어가는 중. 이 시기 레알팬들 사이에서는 대괄호가 붙여진 카캌, ㅋㅋ라고 불리는 실정이었다. 이 때 밀란 리턴설이 있었는데 밀란팬들도 반대의견이 많고 찬성의견도 경기력에 대해 기대하기 보다는 그 외에 부수적인 이유로 찬성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부진의 원인에 밀란 시절 혹사로 인한 부상과 이에 따른 신체능력 저하와 스포츠 헤르니아[22]가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카카는 개인기와 패싱, 득점력도 뛰어나지만 세계 축구계를 쥐락펴락하던 원동력은 결국 상대진영을 찢어버리는 경이로운 스피드였다. 워낙 스피드와 볼컨트롤이 뛰어났기에 상대편에서 진영을 찢어버리는 카카를 저지할 수가 없었고, 카카는 축구지능과 패스, 특히 마무리가 뛰어난 선수였다. 하지만 부상 이후 스피드로 찢어버리거나, 힘으로 버티거나, 볼컨트롤과 드리블, 혹은 킥 등으로 순간적으로 와해시키기는 어렵게 되어서 상대 높은 진영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과거 1기 갈락티코에서 지네딘 지단이 왼쪽에서 뛴 걸 보고 카카도 그런가 싶은 사람도 있지만, 카카는 레알에서도 중앙 공미로 뛰고 있다. 오히려 호날두가 왼쪽 측면의 지배자로 확고히 자리 매김하며 1,600억이 무색할 정도의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 카카가 자기 포지션에서 제대로 뛰고 있는데도 부진하다는 것[23]은 거액으로 카카를 영입한 레알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한편, 13-14 시즌을 앞두고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오면서 공식적으로 카카의 잔류 요청을 함으로써 이적을 할 것 같지는 않았고 카카의 마지막 기회가 될듯 싶었다.
이 당시 그를 보는 시선은 2가지였다. 하나는 카카는 이제 끝났다는 것. 물론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마따나 그의 감각이나 클래스는 여전히 그의 안에 남아있겠지만 더 이상 그가 과거의 카카처럼 호날두나 메시 위에 군림하거나 그들과 세계 축구판을 나누는 그런 존재가 될 수는 없어보였다. 현실적으로 따져봐도 이미 그 둘을 따라잡기에 카카는 이제 나이도 들었고 전성기 시절의 기량도 아니었다.
또 하나의 시선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 펠레도 1966년도에 다리가 아예 아작 났지만 1970년도를 그의 대회로 만들며 축구 황제가 되었고 마라도나도 바르샤에서 다리가 아작 났지만 결국 아르헨티나와 나폴리의 신이 되었다. 지단도 2002년 이후에 이제 지단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지만 결국 2006년도에 영원한 클래스를 보여주면서[24] 2006년도 대회를 그의 대회로 만들었다. 또한 호나우두 역시 1998 월드컵 이후 무릎이 두 번 아작 났고 2002년도 월드컵에 참가 못할 뻔 했지만 결국 참가하여 월드컵 최다골 경신, 득점왕, 그리고 우승을 차지하며 그 시대를 지단과 양분했다.
카카 역시 이런 이들처럼 될 수 있을 듯 했다. 그리고 당시 브라질 공격진 중에서 경기의 유무형 가치를 다 따졌을 때 카카의 품격을 뛰어넘는 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25] 만약 2014년 월드컵에서 카카가 주장 완장을 차고 브라질의 주전으로서 2006-07시즌 급의 활약으로 우승한다면 그의 평가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는 일이었으나...
우선 그에게 가장 시급한 목표는 소속팀에서의 주전 확보. 그리고 2014년 월드컵을 앞둔 국대 복귀였다. 레알이든 이적해서 어디든 그의 소속팀에서 주전을 확보해야 했다. 그래야지 국대에 다시 차출될 수가 있었다.[26] 과연 그가 그저 한 시대를 풍미했던 10년의 선수가 될지 100년이 넘는 축구사에서 역대로 남을지는 2014년 전후로 결정날 것이라고 카카의 팬들은 생각했으나 팬들이 알던 카카는 진작에, 이 진작을 하나 더 넘어선 진작의 진작에 끝났음은 누가 봐도 명확했다. 당시 몇 년간 보여줬던 카카의 모습에는 부활의 ㅂ 자도 비치지 않았고 ㅂ 자를 보려는 시도 자체가 말도 안 되고 허망했을 뿐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이니만큼 그의 부활을 기원하는 팬들의 바람은 안쓰러울 만큼 간절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카는 이미 끝이 났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며 사실상 지금 부활해도 이미 너무 늦었다. 카카의 이적료는 그렇다 치더라도 주급이 호날두와 동급이기 때문에 레알 팬 입장에서도 좋게 봐줄 여지가 사라진 편. 오히려 주급 대비 활약을 생각하면 레알 팬들이야말로 카카를 가장 미워해도 될 사람들이다.[27]
그러니까 레알 이적 후의 카카를 한줄로 정리하자면 첼시 FC의 페르난도 토레스와 쌍벽을 이루는 먹튀라고 정리할 수 있다. 다만 포지션을 감안하면 토레스보단 스탯이 나았다.[28]
2012-13 시즌: 27경기 5골 5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라리가 | 19 | 12 | 7 | 3 | 4 |
챔피언스 리그 | 6 | 2 | 4 | 1 | 1 |
코파 델 레이 | 2 | 1 | 1 | 1 | 0 |
합계 | 27 | 15 | 12 | 5 | 5 |
1.3.5. vs 메수트 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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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 (이적료 65m / 연봉 10m)
2009-10 시즌: 33경기(29선발 4교체) 출전 9골 11어시 공격포인트 20개
2010-11 시즌: 20경기(12선발 8교체) 출전 7골 5어시 공격포인트 12개
2011-12 시즌: 40경기(25선발 15교체) 출전 8골 16어시 공격포인트 24개
2012-13 시즌: 27경기(15선발 12교체) 출전 5골 5어시 공격포인트 10개
메수트 외질 (이적료 15m / 연봉 4.5m)
2010-11 시즌: 54경기(46선발 8교체) 출전 10골 29어시 공격포인트 39개
2011-12 시즌: 52경기(44선발 8교체) 출전 7골 29어시 공격포인트 36개
2012-13 시즌: 52경기(40선발 12교체) 출전 10골 25어시 공격포인트 35개
간혹 경기 출전 시간대비 스탯만 보고 '그래도 카카 스탯은 괜찮네요. 서브로썬 괜찮은 활약이 아닌가요?'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세상에 누가 서브로 쓰려고 1,100억을 주고 영입한단 말인가. 자기 몸값의 4분의 1도 안되는 외질에게 주전자리를 밀린다는거 자체가 이미 카카가 먹튀라는 것을 인증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과거 AC 밀란 시절 만을 기억하고 있는 팬들은 "원래 카카는 큰 경기에서 잘 함. 큰경기에서 못하는 양민학살 외질 따위 ㅉㅉ. 무리뉴가 기회만 꾸준히 줬었으면 레알은 진작 챔스 우승했음."라는 주장을 하는데 무리뉴만큼 꾸준히 중요한 경기에서 카카를 중용했던 감독도 드물다. 실제로 무리뉴 이전부터 카카가 출전했던 모든 경기에서 레알은 챔스에서 탈락했었다.[29]
그리고 레알이 우승을 차지했던 순간, 혹은 우승을 확정 지었던 중요한 순간들에는 카카가 없었다는 점 역시 특기할 만한 부분.[30]
위와 같은 주장으로 인해 카카가 큰 경기에서 기회를 못받았다는 말은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특히 큰 경기에서 강하다는 주장은 더더욱 그렇다. 특히나 동일 포지션의 경쟁자인 외질이 강팀과의 경기에서 기복있는 점을 거론하며 양학밖에 못하는 외질대신 큰 경기 작은 경기 가리지 않고 일관된 카카의 경기력을 찬양하는 이들이 있는데 외질이 레알로 이적한 이후 가장 많은 스탯을 뽑아낸 상대는 다름 아닌 FC 바르셀로나다.[31]
오히려 카카가 레알에서 뽑아낸 스탯이야말로 팀이 4~5점 차 이상 크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몰아쳐서 넣었던 영양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며 정말로 큰 경기에서 믿고 내보낸 경기들에서는 여지없이 버로우 타기 일쑤였다. 특히나 2011/12 챔스 4강 승부차기에서 PK 실축 했던것은 레알팬들에게 있어선 두고두고 기가 차는 부분인데 총 3명이 실축했는데도 독박 쓰는것을 보면 레알 팬들에게 그는 완전히 신용을 잃었다고 보는 것이 무방하다. 애초에 연장전에 찾아온 천금 같은 기회를 어물쩡거리다 놓치지 않았더라면 그냥 승부차기까지 가지도 않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엄청난 주급인 1년에 10m은 2년이면 외질의 이적료를 뽑고도 남을 금액이요. 입단 이후 현재까지 레알에서 4년간 파먹은 주급만 40m. 한화로 600억이다. 가히 역대 최고 먹튀라 칭하기에 과함이 없는 수준. 과거에 멘디에타 등의 사례도 있었지만 카카는 이미 이적료와 주급에서부터 그 정도를 달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32]
레알 수뇌부도 더 이상 그에 대한 인내가 바닥이 난 것인지 여름 이적시장에 말라가의 신성 이스코를 영입하면서 2선을 더욱 강화하였고 그로 인해 주전 경쟁은 더더욱 힘들어진 상태. 이제는 정말로 카카 본인도 본인이지만 기존 소속팀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팀을 찾아 나서는 것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안첼로티가 카카를 중용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향후 행보가 기대하는 여론도 있었다. 이미 프리 시즌에 골을 넣었기 때문에 카카빠들에게는 벌써부터 움직임 등이 무리뉴 때와는 다르다는 등등 부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무리뉴 시절에도 프리 시즌은 날아다녔으니 희망고문일 것으로 보였고 실제로 그러했다. 안첼로티도 외질에 이스코까지 있는 마당에 카카를 쓸 이유도 없다.
그리고 둘 다 레알을 나가게 되었다. 그것도 같은 이적 시장에서 말이다. 다만 한 명은 계약기간이 남았으나 레알이 공짜로 쫓아냈고 한 명은 레알에게 700억을 주고 떠났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관계다.
1.3.6. vs 에덴 아자르
에덴 아자르의 이적 이전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악의 먹튀라고 까여 왔는데, 2019-20시즌, 1,400억 이상(최대 약 2,000억 원)의 이적료를 주고 첼시에서 데려온 아자르가 역대 최악의 먹튀자리를 경신했다.첫 시즌을 기준으로, 철저히 스탯 위주로만 평가하면 다음과 같다.
카카: 09/10시즌 33경기 9골 8도움, 2경기당 공격포인트 1개
에덴 아자르: 19/20시즌 22경기 1골 4도움, 4경기당 공격포인트 1개
골 수 차이도 있고 스탯 부분만 보면 카카가 우위이다. 물론 공격포인트만 가지고 하는 비교를 절대적으로 맹신하기는 어렵지만, 두 선수의 포지션 차이를 감안하면 아자르의 공격포인트는 누가 봐도 심각한 수준이다. 입단 전까지만 하더라도 호날두의 대체자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레알 마드리드의 새로운 구세주가 될 것으로 기대받던 아자르였으나, 여론이 완전히 뒤바뀌어 사실 카카의 대체자 아니었냐는 식의 탄식이 터져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애초에 본 문서에 쓰여 있지만 카카는 부상을 숨기고 남아공 월드컵에 무리하게 참가한 이후에 몸이 망가진 것이지 첫 시즌에는 나쁘지 않게 활약했다. 반면, 에덴 아자르는 에덴 아자르/클럽 경력에 기술되어 있지만, 이적 첫 시즌부터 첼시 시절보다 7kg이 늘어난 상태로 합류했다. 첫 시즌만 이런 것이 아니라 22-23 시즌까지도 뱃살이 늘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기에 이적 첫 시즌부터 시종일관 먹튀에서 벗어나질 못 하고 있다. 원래 첼시 시절부터도 훈련 태도가 불성실했고 햄버거에 감자튀김이 기본이라고 하는 등 프로 축구 선수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의 식단관리를 하던 선수였다. 레알 팬들에게는 중요한 사실이 아니겠지만, 카카는 그래도 이후에도 부활하려고 노력은 했고 레알 이후 이적한 팀들에서 나름대로 활약은 했으며 국가대표에도 승선하는 등 재기하려는 노력은 했다. 반면 아자르는 아예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고 레알 소속 내내 과체중 논란에 시달려 부활할 의지가 있는지도 의문이며 레알과의 계약 기간이 끝나면 유럽은 커녕 아시아에도 자리가 있을지 의문일 수준으로 폼이 망가진 상태다.
아자르는 결국 현지시각 6월 3일 구단 오피셜로 레알 마드리드와 2022-23 시즌을 끝으로 자유계약 신분으로서 이별하게 되었음이 발표되었다. 3월 이후부터 구단 내부에서 계약 해지를 고려하였다고. 아자르는 이로써 총 4년간의 레알 마드리드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통산 기록은 76경기 7골 9도움으로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축구 역사상 역대 최악의 먹튀로 남게 되었다.
물론 아자르가 아무리 못하더라도 카카의 레알 먹튀 시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계속 강조되어 있지만 어디까지나 아자르에게 역대 최악 자리를 넘겨주었을 뿐이지 이분도 여전히 구단 역사에 남을 먹튀임은 변한게 없다. 그나마 카카는 경기 스텟은 커녕 출전도 못한 아자르보다는 스텟만큼은 나름 쌓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20경기 29골 30도움이다, 스탯은 괜찮지만 밀란때 철강왕적인 모습이 사라지면서 교체 출전이 많아지고 밀란시절 득점력,파괴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쌓은 스탯 그마저도 세탁용이 많았던 것은 맞지만 76경기 7골 9도움에 부상도 아닌 과체중이여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인데도 아자르는 결론적으로 극복할려는 노력조차 보여주지 못했다.
1.4. AC 밀란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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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례 행사처럼 나오던 카카의 밀란 리턴설이 2013년 여름에도 나오다 지나가나 했으나... 갑자기 이적시장 마감 이틀을 남겨놓고 급전개를 하기 시작하였다. 카카가 이적 요청을 하였고 레알은 그를 자유계약으로 놓아주었다. 결국 연봉을 10M에서 4~5M으로 줄이는 조건으로 이적료 없이 밀란과 2년 계약하며 산 시로로 컴백하였다. 레알빠들은 자유계약으로 풀어줬음에도
그리고 가자마자 부상. 그런데 밀란에선 부상기간동안 주급을 안 받는다고 하는, 레알팬들의 피가 거꾸로 솟는 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레알 시절 먹튀에 대한 죄책감이 큰 듯했다. 자신도 어떻게든 부활하려 했지만 다시 부상 당해 먹튀 소리 듣게 생겼으니 정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리고 2013-14 챔피언스 리그 조별예선 바르샤와의 1차전 직전에 귀신 같은 타이밍으로 복귀하였다. 앞서 리그의 라치오전에서는 특유의 감아차기로 복귀골을 넣으며 신고식을 치렀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골을 넣고 엄청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상기간 동안 체력 증진에 중점을 두고 특훈을 실시하여 상당한 감량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바르샤와의 챔스 조별 예선 1차전 경기 초반에는 국가대표 최고의 파트너였던 호비뉴와 그림 같은 원투 패스를 주고 받아 호비뉴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후반 중반에 교체될 때 까지 엄청난 활동량과 수비 가담으로 다니 알베스의 공격가담을 억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카카가 호비뉴에게 어시스트를 하자 서형욱 해설 위원은 "역시 카카는 AC 밀란이죠!"라며 외치는 등 경기내내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을 보며 마드리드 지맥이 카카와 안맞는 거 아니냐는 등, 또 부활했다는 등 온갖 드립이 향연했지만 어쨌든 이 한 경기만 보면 준수한 활약을 한 건 사실. 꾸준히 다시 지켜봐야할 듯 싶었다.
이후, 밀란의 경기들을 보면 가장 노릇을 했다. 레알팬 입장에서는 더더욱 복장 터질 노릇이다. 바르샤와의 챔스 조별리그 2차전에서는 아예 치달을 시전하며 다니 알베스의 수비를 돌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골대 앞으로 찌른 패스가 피케의 발에 맞고 들어가면서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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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카카의 기량이 전성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2013-14시즌 이후 밀란이 폭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카카가 있어 어느 정도 버티고 있다고 볼수 있다. 카카가 대부분의 경기에 풀타임으로 출장하고 있다는 것이 그 반증. 2014년 3월 12일 열린 AT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에서도 헤더 골을 넣는가하면[33] 밀란이 탈탈 털리는 와중에도 분전하여 호비뉴에게 절묘한 패스를 찔러 기회를 만드는 등등 여러번 해설진의 찬사를 받았다. 매경기마다 걸출한 활약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카카 정도의 통솔력과 경기조율능력, 패싱능력이라면 준수하다고 볼 수 있으며 몰락한 밀란에게는 몇 남지 않은 인재이다. 3월 말에 카카의 MLS 이적설이 뜨자 AC 밀란 팬 커뮤니티가 발칵 뒤집혔던 것만 봐도 밀란에서 카카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드러난다.
3월 30일에 열린 키에보전에서는 멀티골을 넣었다. 혼다의 크로스를 문전에서 받아 가볍게 밀어넣은 첫번째 골에 이어 측면에서 감아찬 중거리슛이 들어가면서 멀티골을 달성. 이 경기는 카카의 300번째 출장경기였기 때문에 의미가 더욱 크다. 후반 74분 호비뉴와 교체될 때 관중은 카카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갈리아니 단장은 카카에게 기념메달을 수여하며 카카의 지난 공로에 감사를 표했고, 카카는 앞으로 밀란에서 300경기를 더 뛰고 싶다고 화답하였다.
전성기 시절 환상의 콤비였던 셰브첸코는 밀란을 방문하여 카카의 부활을 확인했다며 기쁨을 표하였다.
2014년 6월 29일, 밀란은 카카와의 계약을 상호협의하게 해지하였음을 발표하였다. 애초에 카카 본인은 밀란에 남기를 원하였으나 개인적인 사정[34]으로 인해 브라질로의 귀국, 혹은 MLS 이적을 고려하였다고 한다. 카카의 이적으로 밀란에서 영구결번을 지정했다는 헛소문이 퍼졌는데, 우리나라 기자가 멋대로 오역한 것이다. 구단 측에서는 22번의 영구결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고(영구결번이었으면 공식 홈페이지에 난리가 났을 것이다.) 단지 카카가 앞으로는 22번을 달지 않을 것이라고 인터뷰 했을 뿐인데 어찌 22번이 영구결번이 됐는지 기자의 자질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2013-14 시즌: 37경기(선발 34경기) 9골 5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세리에 A | 30 | 27 | 3 | 7 | 4 |
챔피언스 리그 | 6 | 6 | 0 | 2 | 1 |
코파 이탈리아 | 1 | 1 | 0 | 0 | 0 |
합계 | 37 | 34 | 3 | 9 | 5 |
1.5. MLS와 상파울루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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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름 메이저 리그 사커(MLS)의 올랜도 시티 SC로 이적하면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올랜도 시티 SC 등번호는 10번으로 배정받았다.[35] 올랜도 시티는 2015년 3월에 시즌이 시작하므로 MLS 시즌 전까지는 처음 몸담았던 상파울루 FC로 임대된다.
반 시즌짜리 임대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카카의 친정인 상파울루에서는 홈 구장에서 행사까지 열며 카카를 성대하게 환영하였다. 이에 보답하듯 임대 기간동안 좋은 폼을 보여주었다. 9월 5일에 열린 남미 클럽컵인 수다메리카나 16강 2차전에서는 결승골을 뽑아내며 팀의 8강 진출을 이끌어내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올랜도 시티에서 716만 7,500달러(약 82억 1,538만원)의 연봉을 받아 MLS 선수 중 가장 높은 연봉을 받게 되었다.
마지막 계약기간을 준수하고 올랜도 시티를 떠나겠다고 말했다. 다시 브라질 리그로 리턴할 생각도 가지고 있으며, 그럴 경우엔 상파울루 FC가 차기 행선지가 될 것이라고 하며 또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은퇴 이후에도 축구계에 종사할 계획이며 정확하게 어떤 직종으로 갈 지는 모르지만 감독직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이 전성기를 보냈던 AC 밀란에서 감독을 맡는다면 상당히 멋진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올랜도 시티와 2017년 12월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지만 재계약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카카는 재계약을 하지 않고 이 시즌을 끝으로 올랜도를 떠나게 되었고 현재 은퇴와 밀란과의 6개월 단기 계약, 상파울루 복귀 후 은퇴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었다.
결국 30대 중반에 현역 은퇴를 선언해 17년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2. 국가대표 경력
1
마르쿠스 · 2
카푸 ⓒ · 3
루시우 · 4
호케 JR · 5
에드미우송 · 6
R. 카를루스 · 7
히카르지뉴 · 8
지우베르투 · 9
호나우두 10 히바우두 · 11 호나우지뉴 · 12 지다 · 13 벨레티 · 14 A. 포우가 · 15 클레베르송 · 16 주니오르 · 17 데니우손 18 밤페타 · 19 주니뉴 · 20 이지우송 · 21 루이장 · 22 R. 세니 · 23 카카 |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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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 월드컵 엔트리 중 한 명으로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다. 물론 본인은 당시 어렸기에 2002년 월드컵 때는 C조 조별리그 3차전 코스타리카전에 후반 교체 출전해 30분가량 뛴 게 전부지만, 저 나이에 브라질 국가대표에 차출됐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듯. 카카 본인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는지 다음 목표는 자신이 국가대표 주장 완장을 차고 월드컵을 우승하는 것이라 했다.
원래 FIFA 월드컵에 출전하는 선수 구성이 23명인데 모두 잘하는 성인 선수로만 채워 넣는 게 아니라 22명만 정예로 짜 넣고 나머지 한 명을 유망주 중에서 제일 뛰어난 선수로 뽑는 경우[37]가 있다. 물론, 감독의 성향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큰 대회의 경험을 쌓은 유망주가 후기대회 월드컵에서도 출전하여 팀을 이끌어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994년 미국 월드컵 때의 호나우두[38]가 있으며 우승까지 경험을 했지만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2002 한일 월드컵 때 브라질 대표팀은 카카를 이 포지션에 넣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그 직후기 월드컵인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이 포지션에 리오넬 메시를 넣었다. 물론, 꼭 그렇지도 않고 아무리 나이어린 유망주 취급을 받는 선수들이라 해도 처음부터 실력이 좋아서 맹활약을 펼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마이클 오언, 킬리안 음바페... 물론, 나이와 관계없이 실력으로 뽑히는 국가대표에서 나이가 어린 선수는 필연적으로 유망주 취급을 받는 것는 당연지사라고 볼 수 있다.
2005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독일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견인했다.
2006년 월드컵에서는 호나우두- 아드리아누라는 최전방과 당시 세계 축구계를 씹어먹었던 호나우지뉴와 더블플레이메이커 체제를 형성하며 판타스틱 4로 불리면서 엄청난 포스를 보여주었지만 정작 월드컵 본선에서는 빛좋은 개살구. 스티븐 제라드- 프랭크 램파드 공존 논쟁에 버금 갔던 호나우딩요-카카 공존은 완벽한 동선의 불협화음을 보여줬다.[39] 거기다 과거의 활동량을 완전히 상실해 슈팅력만 남아있는 살찐 호나우두(...)와 2006년부터 급격히 몰락하던 아드리아누의 공간 창출은 완전히 꽝이었다. 물론 약팀을 두들겨버리는 경기 정도는 선수들의 개인능력으로 해결 가능했지만... 이러한 문제점이 제대로 터져나온 것이 바로 대 프랑스전이였다. 마케렐레와 비에이라라는 걸출한 홀딩들이 저 4명을 효율적으로 억제했고 거기다 최후방의 튀랑과 갈라스 역시 엄청난 방어로 공격을 차단했다.[40]
거기다 그 경기는 '런던의 왕'이라는 소리를 듣던 티에리 앙리가 이름값을 제대로 해 줬고, 신인 프랑크 리베리가 브라질의 왼쪽 측면을 휘저었으며, 그리고 브라질 그 어떤 스타만큼 쟁쟁한 이름인 지네딘 지단이 전성기 시절을 그대로 재현해 애초에 브라질이 프랑스를 이길 수 없었던 게임이었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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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메시와의 달리기 시합 시절. 물론 저 때의 메시는 한창 유망주 취급을 받을 시기였으나, 훗날 축구의 신으로 불리게 되는 메시를 상대로 공을 달고 드리블까지 하면서 압도적으로 앞서 나가며 득점할 정도로 당시 카카의 임팩트는 정말 최고였다.
2006년 월드컵 이후 호나우지뉴의 막장화와는 반대로 카카는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며 세계 축구의 중심으로 올라섰고, 자연스럽게 둥가 감독이 이끄는 브라질 대표팀을 이끄는 에이스로 급부상하게 된다. 에이스의 상징적인 등번호 10번 역시 그의 차지였다.
브라질 대표팀 감독인 둥가가 브라질 대표팀에서 호나우지뉴의 비중을 줄이고, 카카가 에이스로 완전히 자리잡자 브라질은 호나우지뉴가 있었던 때보다 더 빠른 공격 템포와 단단한 수비 조직력을 갖추게 되었고, 이후 카카를 중심으로 브라질 대표팀은 보다 짜임새 있는 팀으로 탈바꿈했다.
2008년 무렵부터는 카카를 위시한 둥가의 선 수비 후 역습의 전술로 나서는 브라질은 남미예선 때부터 강력함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2009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는 명실상부 에이스로 활약하며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었고, 아마 국가대표 경력에서 최전성기였을 것이다. 2006-07 시즌으로 대표되는 주력과 활동량은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며 대회 MVP까지 수상하였다.
그리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둥가 감독이 이끌던 브라질 대표팀에서 카카는 에이스 중의 에이스였다. 카카-파비아누-호비뉴로 구성된 화려한 공격진을 앞세운 브라질은 월드컵 8강 네덜란드전 직전까지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당시 브라질은 브라질 색채를 버렸다고 할 정도로 실리 축구를 추구했지만 진작에 스페인과 우승을 놓고 겨루는 명실상부한 강팀이었고 카카는 그런 둥가 브라질의 핵심이었다. 아마 카카가 부상을 숨기고 무리하면서까지 월드컵에 출전한 것은 에이스로서의 강박 때문이 아니었을 까 유추할 따름이다. 그리고 8강에서 멜루의 화려한 활약으로 광탈했다.[42]
희한하게 코파 아메리카 출전 경력이 없다. 팀 상황이나 부상 등으로 참가하지 못했었다. 2004년 대회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호나우지뉴라도 있었지만 카카의 전성기였던 2007년 대회 때는 부상...
카카가 브라질 대표팀에서 에이스 노릇을 한 것은 부상 기간을 포함해도 약 3년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적어도 카카가 에이스로 있었던 2008년부터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네덜란드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브라질 대표팀은 2002년 이후 가장 단단한 조직력을 갖춘 강팀이었다. 어린 팬들은 국가대표 경력에서 카카는 호나우두와 네이마르 사이에 계보를 잇는 선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카카의 몰락 이후 브라질 대표팀의 침체와 시련을 생각하면 상당히 저평가된 감이 있다.
2012년, 무려 1년 10개월 만에 브라질 국대에 차출되었다.
이라크, 일본과의 2연전에서 말 그대로 날아다니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라크전에서 1골 1도움, 일본전에서도 골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복귀전을 치렀다.
2012년 당시 30세로 한창 나이의 선수이고 아직 현역 생활이 꽤 남았던 선수지만, 이 때 브라질 국가대표 역대 득점 순위 공동 12위[43]였다. 그 위에 있는 선수들은 우선 펠레를 정점으로 해서 호나우두, 호마리우, 지쿠, 베베투, 히바우두, 자이르지뉴, 호나우지뉴, 호베르투 히벨리누, 아데미르, 토스탕, 지지뉴 등 이미 브라질에서도 전설로 추앙받는 선수들, 그 중에서도 현역은 히바우두와 호나우지뉴밖에 없다. 거기다 히바우두는 사실상 국대 승선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상황[44]이고, 브라질 리그에서 활약 중인 호나우지뉴 정도나 국대에 소집될 가능성이 있을 정도.
이미 브라질 축구계에서는 호나우지뉴와 함께 리빙 레전드 취급 중. 네이마르나 오스카같은 선수들이 괜히 카카가 국대 복귀하고 나서 ‘오오 카카 오오..’ 이런게 아니다. 이 페이스로 꾸준히 국대에 승선한다면 센추리 클럽 가입과 역대 브라질 국대 득점 순위 10위권 내 진입도 바라볼 수 있었다.
본인이 2014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를 간절히 원하였고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도 카카에게 몇 차례 관심을 보이는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최종 명단에는 선발되지 못했다. 하지만 예상 외로 브라질이 독일에게 아주 처참하게 박살 나고 3, 4위전에서도 네덜란드에게 털린 뒤 여러가지 문제점[45][46]이 드러나자 오히려 카카의 공백이 아쉬울 정도였다.
2014년 월드컵 이후, 다시 감독으로 부임한 둥가에 의해 국가대표에 재승선했다. 굴라트의 부상으로 인해 대체 선수로 선발되었는데 어느 정도 예상된 상황인 게, 둥가가 다시 지휘봉을 잡고 나서 카카에 대해서 지금과 같은 경기력을 유지하면 그에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브라질 월드컵 탈락이 새옹지마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경기에서 네이마르 주니오르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했다.
2015년 9월 5일 코스타리카와의 경기에서 교체 출전하며 9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2016년 4월 30일, 2016 코파 아메리카 예비 명단에 선발되었다.
더글러스 코스타의 부상으로 인해 결국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카카마저 부상을 당하며 결국 최종적으로는 낙마하게 되었다.
2017년 12월 17일, 카카는 은퇴 선언을 하였고 과거의 영웅으로 남게 되었다. 국가대표에서의 최종 기록은 월드컵 3회 출전, 92경기 29골.
[1]
2006-07 시즌의 카카는 2010-11 시즌의
리오넬 메시, 2016-17 시즌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2021-22 시즌의
카림 벤제마와 함께 UCL 역대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는다.
[2]
2004-05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리버풀과 밀란이 만났고 팀은 결국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였지만 이때 카카는 경기 내내 리버풀을 말 그대로 복날에 개패듯이 시원하게 탈탈 털어버렸었다.
[3]
오늘날의 UEFA 올해의 선수이다.
[4]
당시 한화 2,000억
[5]
당시 역대 3위의 이적료. 한화로 약 1,100억 원이었다.
[6]
많은 팬들이 이 패배에서 보여준 카카의 퍼포먼스가 레알에서 그가 치른 경기 가운데 가장 돋보였던 순간이라 냉소하는 편이다.
[7]
여러 번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어 냈지만 결과는 아쉽게도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골로 바르샤가 1-0의 승리를 가져가며 자신의 첫 엘클을 패배로 장식하게 되었다.
[8]
이에 당연하게도 무리뉴는 솔직히 그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반응했다.
[9]
메시와의 비교가 있는데 메시의 경우
2008 베이징 올림픽 때 팀의 명령을 거부하고 출전한 경력이 있지만, 카카처럼 부상을 숨기고 간 것도 아니었고, 아르헨 협회와 바르셀로나가 법적 분쟁까지 갈 정도로 다투다가 바르샤가 승소한건 맞지만 그 당시 감독에 오를 예정이었던
펩 과르디올라가 메시의 편을 들며 올림픽 참가를 허락하라고 팀과 보드진을 설득했다. 거기다 올림픽 금메달까지 땄으니 해피하게 마무리 되었다만 카카의 경우와 같이 세계에서 좋은 대우와 고연봉을 제공하는 명문클럽들 중 한팀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는 프로선수가 법적분쟁에서도 승소한 소속구단의 명령을 어겼다는 사실은 메시 본인에게 금메달이라는 해피엔딩이 되었어도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틀림없다. 어쨋든 카카는 부상을 숨긴데다 감독의 믿음도 배신했고 월드컵은 8강에서 떨어졌고 게다가 그 이후 완전히 먹튀로 전락하고 말았다.
[10]
같은 시즌 EPL 최상급 플레이어 나니가 38경기 9골 18어시였다는 걸 생각하면 클래스는 여전했다.
[11]
클래스는 물론 여전하지만, 공격쪽에 포진한 선수들 전부 미친 것처럼 스탯 올리는 레알 마드리드 선수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반면 맨유는 1:0 꾸역승의 본좌였다.
[12]
덤으로 이 때 볼 트래핑 실수로 카카에게 공을 넘겨주고 뒤에서 빨빨거리면서 쫓아가다가 끝내 못 따라간 선수가 메시다. 이 때 카카는 교체 투입된 상황이라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긴 했다. 간혹 메시 팬들 중 메시가 카카보다 빠른데 체력 때문에 따라잡지 못했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스피드면에선 원래부터 카카가 메시보다 뛰어났다. 게다가 체력 문제가 있다 치더라도 뒤따라 달려가는 메시를 보면 체력이 떨어져 설렁설렁 가기보다는 정말 공을 뺏겠다는 집념으로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공을 드리블하는 카카를 따라잡기는 커녕 뒤로 서서히 밀리니 당시엔 속도 면에선 카카가 우위라고 할 수 있다.
[13]
일단 스포츠 탈장이라는 부상의 특수성상 예전같은 치달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힘들다고 한다.
[14]
다만 승부차기에서의 패배를 카카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혼자만 실축했으면 까였겠지만 첫번째 키커였던 호날두도 실축했고 마지막 키커였던
세르히오 라모스는 아예 나로호를 쏘았다.
[15]
카시야스는 괜찮다는 격려와 응원의 말과 함께 올린 것이었지만 다른 선수도 아니고 탈락의 일등 공신 카카의 너무나 해맑은 표정에 마드리드 팬들은 황당했다.
[16]
심지어 교체조차 하지 않는다. 이 시기엔 리그 경기 중 그라운드를 밟아본 적도 없다.
[17]
덕분에 카카 팬들에겐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카카가 몸값을 하지 못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나 현재 외질의 폼을 보면 카카를 교체카드로도 써보지 않는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그러나 정작 교체나 선발로 나왔을 때에는 외질이나 카카나 다를바 없었다.
[18]
애초에 프리시즌에 잘한다고 해봤자 레알팬들은 이미 3년동안 카카의 실망스런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거의 설레발 치지도 않았다. 카카팬들의 설레발에 부활만 여러번 했다고 예수급, 게임 캐릭터급이라고 조롱했다.
[19]
이 경기에서는 아무도 잘한 선수가 없었다.
[20]
애초에 엄청난 주급을 받으면서도 이정도 활약밖에 못한 선수가 3년 이상씩이나 레알 마드리드에 남아있는 건 전례가 없었다. 대부분 1,2년 정도 있었다.
[21]
이 부분은 오심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는 등 논란의 여지가 있다.
[22]
이는 완벽하게 치료할 수 없는 부상으로 레알 의료진은 경기전 후 30분씩 운동하는 것으로 문제를 막을 수는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근본적 해결은 불가능하다.
[23]
카카의 첫 시즌 때 카카가 부상으로 빠지고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의 자리에
라파엘 반 더 바르트가 들어왔을 때 오히려 카카가 뛸 때보다 경기에 미치는 영향력이 좋았다.
[24]
비록 결승전은 골넣고도 나중에 박치기를 해서 퇴장당했다.
[25]
헐크는 타고난 피지컬을 받쳐줄 센스가 부족했고
리그의 인지도가 너무 떨어졌다. 네이마르는 당시에 초특급 유망주였지만 전성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고 간수 또한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카카와 마찬가지로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당시 결과적으로 이 서술에 어울리는 선수는 2013년 남미 올해의 선수였던 호나우지뉴였다.
[26]
2012/2013 정규 리그에 한 경기도 나오지 않았음에도 차출되어 버려 해결되었다. 2014년까지 국대로 남아있을까 하는 문제는 두고봐야 한다.
[27]
카카 주급이 조금만 적었어도 무리뉴 시절이나 현재 안첼로티의 레알은 더 많은 선수를 살 수 있었다.
[28]
2014-15시즌 기준 카카는 상파울루에서 에이스 놀이, 토레스는 밀란에서 스트라이커 말고 얼굴 마담으로 활동 중이다.
[29]
2009/10 챔스 16강 대 리옹 2차전. 2010/11 챔스 4강 대 바르셀로나 2차전. 2011-12 챔스 4강 대 뮌헨 2차전. 2012/13 챔스 4강 도르트문트 대 2차전
[30]
2010/11 코파 델레이 결승 대 바르셀로나전. 2011-12 프리메라 리가 35라운드 대 바르셀로나 전, 2012/13 수페르코파 대 바르셀로나 전 2차전
[31]
대 바르셀로나전 16경기 출전 4승 6무 6패. 1골 7어시. 카카는 대 바르셀로나전 12경기 2승 4무 5패 0골 0어시
[32]
뭐 라치오의 멘디에타 영입의 경우는 라치오의 재정상태가 레알보다 확실히 열세에 있으므로 타격은 더 컸겠지만 그건 팀 환경의 차이고 순수하게 누가 더 최고의 먹튀인가로 치면 당연 카카의 우위. EPL로 눈을 돌리면
페르난도 토레스나
앤디 캐롤 같은 초특급 먹튀들이 있지만 카카처럼 말도 안되게 많은 주급을 받지는 않았다. 비교라도 가능한 수준은 토레스 정도다.
[33]
참고로 이 골은 2021-22 시즌 챔스에서 밀란이 다시 복귀하기 이전까지 밀란이 넣은 마지막 챔피언스리그 골이었다. 토너먼트로 따지면 2022-23 시즌 브라힘 디아스가 골을 넣기 전까지 이 골이 마지막 득점이었다.
[34]
가족문제라고 한다. 자녀들의 교육문제가 큰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문에 아내와도 불화를 겪었다는 설이 있다.
[35]
여기서 카카는 밀란이 아닌 팀에선 22번을 쓰지 않겠다고 밝혔다.
[36]
2015 시즌 29경기 9골 7도움 기록.
[37]
실제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팀에 당시 2003 U-20 월드컵 대표였던
정조국,
여효진,
최성국, 염동균이 훈련 파트너로 참가했고, 벤치멤버로서 형님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모두 월드컵 23명 명단에 들지 못했기에 성인대표팀 명단에 들었던 카카와 직접 비교하는건 무리가 있다.
[38]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브라질 대표팀 벤치멤버로 만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호나우두가 뽑혔다. 그리고 당대의 레전드급이었던
베베투,
호마리우 등에 활약으로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비록 쟁쟁한 선배들에게 밀려서 직접 경기를 뛰지는 못했지만, 상당한 경험을 쌓았다고 이야기를 했다.
[39]
둘의 역할이 거의 비슷하니 안 맞는게 당연하다. 여기에 수비가담이 좋지 않다는 공통점까지...
[40]
당시 브라질은 프랑스를 상대로 유효 슈팅을 단 한 개밖에 때리지 못했다.
[41]
이때 잠깐의 순간이긴 하지만 카카가 지단과 미드필드에서 1대1 볼 경합을 펼쳤는데 지단은 간단하게 카카를 벗겨냈다.
[42]
호비뉴가 전반전 이른 시간에 선제골을 넣었는데, 최전방에 있다가 하프라인 근처에서 대지를 가르는 스루 패스를 받아 원터치로 성공시켰고 그 패스를 한 선수가 멜루였다. 그리고 멜루는 후반전에
웨슬리 스네이더르의 크로스에 머리를 갖다 대며 자책 동점골을 기록했고 얼마 뒤 퇴장까지 당해 1-2 역전패의 원흉이 되었으니 가히 멜루가 모든 것을 창조한 게임이라 할 수 있겠다.
[43]
같이 12위에 있는 선수는
카레카.
[44]
39세까지 국대에 승선했던
로타어 마테우스 같은 경우도 있으나, 마테우스는 말년 들어서는 대부분 수비수로 출전했다. 그리고 마테우스도 30대 중반부터 노쇠화의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마지막 국대 메이저 대회였던
UEFA 유로 2000에서는 1무 2패 광탈이라는 흑역사에 기여하는 데 그쳤다.
[45]
특히 팀을 다잡을 베테랑의 부재가 가장 컸다. 8강전까지는
치아구 시우바가 주장을 맡으며 팀을 잘 이끌어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우바가 경고 누적으로 출전을 못 하고
다비드 루이스가 주장을 맡게 되자 브라질은 멸망했다. 다비드 루이스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올 수 있을 만큼 공격력이 뛰어난 선수라 센터백으로 나와도 오버래핑을 통한 공격 가담에 적극적인 선수이고, 이는
치아구 시우바가 뒷공간을 든든하게 커버해 줘서 가능했지만 독일전에서는 단테가 대신 나왔고 단테도 상당히 공격적인 선수라 다비드 루이스와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 결국 완전히 개방된 뒷공간을
토마스 뮐러,
토니 크로스,
미로슬라프 클로제,
안드레 쉬를레 등이 완전히 유린하고 말았다.
[46]
당시 브라질은 공격보다 수비가 강력한 팀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그것이 거짓도 아니었다. 2014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레귤러 포백은
마르셀루 비에이라-
치아구 시우바-
다비드 루이스-
다니 아우베스였고, 4명 모두 유럽
명
문
팀
의 주축으로서 어떤 팀도 쉬이 뚫지 못하는 단단한 수비 라인을 구축했다. 하지만 공격은 오직
네이마르 한 명에게 의지했고 최전방 공격수인
프레드와
조 등은 1인분도 제대로 못 했었다. 결국 네이마르가 8강 콜롬비아전에서 부상으로 이탈했고 시우바까지 경고 누적으로 결장하자
대참사가 일어났고 브라질은 그렇게 월드컵을 말아먹게 되었다. 이때 카카, 호나우지뉴 등 공격진에 고참 선수들이 있었으면 네이마르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고 실제로 호나우지뉴는 대표팀에 뽑니 마니 하는 논쟁이 있었을 정도였다. 어쨌든 전부 과거의 넋두리에 불과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