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18:12:25

치륭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1. 개요2. 생애

1. 개요

郗隆
(? ~ 302)

서진의 인물. 자는 홍시(弘始). 연주 고평군(高平郡) 금향현(金鄉縣) 출신. 후한의 어사대부 치려의 증손자. 치감의 작은아버지.

2. 생애

치륭은 비록 몸에 장애가 있어 절름발이로 불편하게 살았으나, 나라를 생각하는 절개가 깊었다고 한다. 초기에 상서랑으로 임관하였다가 상서좌승으로 옮겨졌는데, 조정의 대신들은 치륭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꺼리며, 국가 기밀을 누설시켰다는 누명을 씌워 면직시켰다. 오래지 않아 상서이부랑에 임명되어 다시 벼슬길에 올랐지만, 이번에는 중앙에서 쫓겨나 동군(東郡) 태수로 부임하였다.

영강 원년(300년) 4월, 조왕 사마륜이 정변을 일으켜 황후 가남풍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치륭은 어릴 적부터 사마륜과 친구였기에, 사마륜은 멋대로 치륭을 산기상시에 임명해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영녕 원년(301년) 정월, 사마륜이 혜제 사마충을 태상황으로 내쫓고 본인이 황제로 즉위하자, 치륭은 양주자사(揚州刺史)에 임명되었다. 치륭은 휘하 관료들이 죄를 지으면 대각(臺閣)의 준칙에 따라 엄벌로 다스렸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원망을 샀다. 이후 영동장군(寧東將軍)이 더해졌지만 받지 않았다.

영녕 원년(301년) 3월, 제왕 사마경이 역적 사마륜을 토벌하자는 격문을 전국 각지에 뿌렸다. 치륭은 사마륜 밑에서 조왕연(趙王掾)을 지내고 있는 조카 치감과 낙양에 있는 아들들의 안전을 걱정해, 망설이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 하였다. 이에 주부 조유, 수재로 천거받은 우담, 별가 고언(顧彥), 서조연 유승(留承)이 나서서 사마경에게 가담할 것을 설득했지만, 치륭은 격문이 도달한지 6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결정을 내놓지 않았다.

당시 영원장군, 진류왕 사마수(司馬邃)가 동해도위에 임명되어 석두(石頭)를 지키고 있었는데, 치륭의 우유부단함에 분노한 군사들이 탈영하여 사마수에게 귀순하였다. 치륭은 종사를 우저(牛渚)로 파견하여 탈영을 막으려 했으나, 이 조치는 오히려 부하들을 더욱 자극하고 말았다. 결국 진류왕 사마수가 분노한 치륭의 장병들을 거느리고 치륭을 야습하니, 치륭 부자를 비롯한 고언 등과 같은 측근들도 모두 살해당했다. 사마수가 치륭이 반역을 꾀해 토벌했다 선포하자, 뜻 있는 자들은 치륭의 억울한 죽음에 몹시 애석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