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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3세/생애/다이애나와의 결혼과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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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 다이애나와의 결혼과 이혼 · 2022년 · 2023년 · 2024년 · 2025년)
사건 즉위 · 대관식 · 찰스 시대 · 사건 일람
가족관계 배우자 카밀라 파커 보울스 · 전처 다이애나 스펜서 · 장남 웨일스 공 윌리엄 · 차남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 · 아버지 필립 마운트배튼 ·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 동생 프린세스 로열 앤,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왕자
기타 God Save the King · 벤틀리 스테이트 리무진 · 영국 왕실과 정부의 전용기 · 찰스 3세(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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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혼2. 이혼3. 변명과 반론4. 결론
4.1. 찰스 본인과 왕실 전체에 대한 악영향

1. 결혼

약혼 발표당시 기자회견 영상[1] 결혼기념 인터뷰 영상[2]
아만다와 헤어진 찰스는 스펜서 가문의 8대 스펜서 백작, 존 스펜서의 3녀 다이애나 스펜서와 교제를 시작했다. 다이애나와 남동생 앤드루 왕자가 소꿉친구라서 두 사람은 어린시절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찰스와 다이애나는 1980년 7월, 찰스의 친구가 주최한 바비큐 파티에서 만나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당시는 찰스의 가까운 친척인 루이 마운트배튼이 살해당한지 얼마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장례식을 시청했던 다이애나가 찰스에게 먼저 다가가 위로를 건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졌으며, 찰스는 다이애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도 확신하지 못한채 자신의 신붓감으로 여기게 된다. 찰스는 다이애나를 밸모럴 성과 샌드링엄 하우스의 휴가에 초대해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했다.

다이애나의 친정인 스펜서 가문은 가문은 선대가 무역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덕분에 가문의 재산이 어마어마했다. 다만 현재는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9대 백작이 사업으로 재산을 탕진해 그다지 부유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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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사진 결혼사진
영국 왕실은 1981년 2월 24일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약혼을 공식 발표했고, 5개월 후인 1981년 7월 29일, 전세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20세기의 신데렐라로 불리며 새로운 왕세자비가 된 다이애나를 본 세계인은 그녀의 매력과 아름다움에 열광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부가 앞으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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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가족사진
결혼 1년 만인 1982년에 장남이자 후계자인 웨일스 공 윌리엄 왕세손을 얻었고, 2년후인 1984년에 차남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 왕자를 얻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마찬가지로 두 아들들을 금지옥엽으로 여겼다고 한다. "왕자들을 고든스타운 스쿨에 보내라"는 엘리자베스 2세 필립 공의 뜻을 만류하고 상류층 자제들만 다니는 이튼 칼리지에 보냈을 정도로[3], 본인과는 다른 어린시절을 보내게 했다.

윌리엄 왕세손이 아직 갓난아기였을 때 "아들을 해외순방에 데려가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하는 다이애나 비의 의견을 왕실 어른들과 시종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들어줬을 정도로, 아들들에 관해선 전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게 했다고 한다. 때문에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유튜브의 윌리엄, 해리 형제의 어린 시절 영상 댓글에 "자식들에겐 좋은 아버지였지만 정작 아내한테는 못살게 군 남편"이라는 평가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두 사람의 관계는 갈수록 나빠져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13살이나 되는 나이 차이로 인해 결혼 생활 내내 어려움을 겪었으며, 성격 차이도 심했다.[4] 결국 1986년부터 찰스는 과거 연인이었던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 다시 만나기 시작했으며,[5] 다이애나도 다른 남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완전히 파국을 향하게 되었다.

2.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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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1월, 3박 4일 일정으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했다.[6] 두 사람은 청와대를 방문해 노태우 대통령이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했으며, 파주에 있는 영국군 전적지를 찾아 헌화했다. 마지막 날에는 경주시를 방문해 석굴암 등을 관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국 방문을 끝으로 공식적으로 별거에 들어갔다.

1992년 12월 존 메이저 총리는 두 사람의 별거를 발표했다. 1993년 1월 언론을 통해 1989년에 찰스와 카밀라 파커 보울스가 부적절한 대화를 나눈 녹취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찰스가 불륜을 했다는 사실이 대중들에게 공개된다. 테이프 속에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음란한 농담과 찰스가 카밀라의 탐팩스[7]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민망한 대화과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찰스를 조롱하며 그를 탐폰 왕세자라고 불렀다. 결국 궁지에 몰린 찰스는 1994년 6월 29일 방송 인터뷰를 통해 불륜 사실을 인정했으며, 다이애나 역시 BBC '파노라마' 프로그램에 출연해 불륜 사실을 확인했다.[8] 상황이 이렇게되자 결혼 생활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어떻게든 이혼은 막아보려 했던 엘리자베스 2세는 찰스와 다이애나에게 이혼을 명령하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1996년 8월 28일에 이혼했으며, 두 아이들의 양육권을 공동으로 갖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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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다이애나의 장례식
그러나 다이애나 스펜서는 이혼 1년 후인 1997년 8월 31일, 파리에서 교통 사고로 사망했다. 비록 다이애나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당시 찰스는 전처이자 아이들의 어머니였던 다이애나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몹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9] 찰스는 전 배우자의 자격으로 다이애나의 언니들과 함께 파리로 가서 다이애나의 시신을 인수 해왔으며, 장례 행렬 때는 자녀들과 함께 다이애나의 운구를 뒤따랐다. 영국 왕실에서 다이애나의 장례 문제에 냉담하게 굴 때 유일하게 찰스 본인이 왕실장으로서 예우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찰스는 다이애나 스펜서가 사망한 1997년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해라고 여겼으며, 이 시기를 떠올리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가졌다고 한다. 한 예로 엘리자베스 2세는 1997년 필립 공과의 결혼 50주년 기념 만찬을 그린 초상화를 자신의 집무실에 걸어뒀는데, 찰스는 이 초상화를 볼 때마다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한다. 결국 찰스가 즉위한 뒤 이 초상화는 구석으로 치워졌다고 전해진다.

3. 변명과 반론

분풀이 차원이라 해도 다이애나 스펜서 역시 명색이 왕세자비 신분인데다 차차기 왕위 계승자인 아들을 두고 있는데도 공공연히 여러 인물과 불륜 스캔들을 일으켜 왕실 입장을 더 당혹스럽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여러 불륜 스캔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승마 교관과의 불륜 스캔들은 치명적이어서 다이애나의 차남인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의 친부가 찰스가 아니라 불륜 상대였던 승마 교관이라는 악성 루머까지 돌기도 했다.
부부의 이혼에 쐐기를 박은 것은 이 맞불륜으로, 장녀인 프린세스 로열 앤 공주와 차남인 앤드루 왕자가 이혼하자 찰스만은 이혼시키지 않으려 했던 엘리자베스 2세조차, 다이애나가 맞불륜을 저지르면서 BBC와의 인터뷰에서 찰스의 불륜과 어려웠던 왕실 생활을 폭로하자 두손 두발 다 들었다.
다이애나에 대해서도 간혹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2세를 비롯한 왕실 인사들이 아직까지도 다이애나에 대해 감정적 앙금을 보이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시어머니였던 여왕도 그렇지만,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인 시외할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는 스캔들이나 성격상의 이유로 다이애나를 싫어했다.

그러나 다이애나가 잘못했다고 해서 찰스가 덜 잘못한 것이 되는 건 아니다. 이 모든 건 찰스의 불륜이 야기한 일이고 다이애나는 그 전부터 남편 찰스의 무시와 시집살이로 인한 왕실 생활 부적응 때문에 시가(媤家)인 왕실에서 고생해 왔다. 게다가 찰스와 다이애나의 나이가 비슷한 것도 아니고 무려 13살이나 어린 여자애 상대로 이렇게 개차반으로 대했다는 것은 찰스의 잘못이다. 어지간히 잘 대우해줘도 사랑받기 어려운 위치임에도, 심하게 냉대했다. 애초에 선빵을 친 건 찰스였고, 시가인 영국 왕실 입장에서도 아들의 불륜을 좌시하고 며느리의 불륜에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내로남불에 팔이 안으로 굽는 격이다.
다만 다이애나가 끝까지 맞바람을 피우지 않고 이혼을 했더라면 이런 논쟁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다이애나의 지지자들에게는 좋든 싫든 일단 다이애나 또한 결혼 중 불륜을 저지른 사실에 실망한 사람들도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삐그덕거렸고, 다이애나는 스트레스로 손목을 4번이나 긋고, 첫째 웨일스 공 윌리엄 임신했을 당시 스스로 계단에 몸을 던지는 등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므로 빠르던 늦던 언젠가는 결국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을 사이였다. 차라리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이혼한 뒤에서야 자유롭게 연애했다면, 시월드 문제와 찰스 감싸주기 병크와 삽질로 도배되어 국민들에게서 싸늘한 시선을 받던 영국 왕실의 언플 시도를 사전에 차단해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고, 이런 논쟁 자체가 나오질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부부관계가 사실상 파탄에 이르러 다이애나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처지에 내몰린 상황에서도 왕실의 체면때문에 왕세자의 이혼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완강한 입장을 고수하던 것이 여왕과 영국 왕실의 태도였고, 찰스의 친구들은 이를 뒷배삼아 오히려 결혼 생활 파탄의 책임이 다이애나의 편집증에 있다는 언플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맞불륜 및 언론 폭로와 같은 강경한 맞대응을 통해 자신이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자신을 계속 억압할 경우 얻게 될 부담이 이혼에 의한 체면 손상의 부담보다 더 커질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다이애나가 겨우 이혼을 통해 불행한 결혼생활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당장 본 '변명'문단에서도 절대로 찰스의 이혼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강한 압력을 행사하던 엘리자베스 2세가 결국 포기하고 이혼을 인정하게 된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다이애나의 맞바람이었다고 분명히 서술되어 있는 것. 즉 맞바람과 같은 강력한 대응으로 맞불을 놓지 않았다면 왕실의 압력과 영향력으로 이혼 자체가 지극히 어려웠을 것이고, 다이애나는 계속 일방적인 피해자의 입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데 이런 맥락을 무시하고 '늦던 빠르던 언젠가는 결국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합리적인 의견 제기라고 하기 어렵다.

그에 대한 동정의 여론도 꾸준히 있다. 사실 불륜만 제외하면 찰스 왕세자는 책을 많이 읽고 문화와 사회전반과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 관심이 높아 과연 일국의 왕세자에 걸맞은 지성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다이애나는 왕세자비로서의 교양이나 지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었다.
집안에서도 언니들과 남동생은 다 우등생인데 다이애나만 유독 공부를 못해서 암암리에 '집안의 망신'으로 여겨졌다. 학업 성적이 심각하게 나빴기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으며, 고등학교 졸업 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해서 중퇴하였다. 그 후 독립해서 친구들과 동거하며 취미생활로 유치원 보모와 청소부 아르바이트를 했고, 종종 여러 다른 친구들과도 어울렸다.[10]
또 검박함보다 호사스러움을 지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이 부분은 왕실 언플일 가능성도 크다. 다이애나의 옷은 협찬받거나 기증받은 것도 많았고, 소유한 보석도 대부분 친정과 왕실에서 물려준 것이며, 개인적으로 가진 보석은 얼마 없었다.

하지만 다이애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그녀가 명망 있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건 사실이지만 1남 3녀 중 3녀로 태어나는 바람에 오래도록 아들을 바라고 있던[11] 부모가 몹시 실망했고 이 때문에 다이애나가 자존감이 낮았던 건 잘 알려진 일이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심지어 고작 6살 무렵에 부모가 이혼한 뒤 주로 아버지 밑에서 불행하게 자라야 했다. 당시 영국 상류 사회에서 이혼한 부모를 둔 아이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다이애나의 유년시절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다이애나는 자서전에서 부모의 이혼 후 언니들, 남동생과 함께 정기적으로 어머니와 새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어머니가 "너희들을 돌려 보내기 싫다."며 울었다고 회상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에는 부모의 허락을 받아 런던에 아파트를 얻어 친구들과 함께 살았다. 1981년에 만 20살의 나이로 찰스와 결혼하기 전까지 짧은 처녀 시절을 친구들과 함께 지낸 것. 이때 상류층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에서 파트타임 보모로 일했고, 그밖에 언니의 친구들이 주최한 파티에서 서빙을 하는 등, 취미삼아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고 한다. 룸메이트들뿐만 아니라 룸메이트들이 부른 다른 남사친들과도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참고로 저때가 다이애나의 길지 못했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점이라고 한다. 다이애나 본인도 "저땐 아무런 걱정 없이 크게 웃을 수 있었다"고 회상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이애나가 저렇게 자유롭게 살아왔던 것을 찰스가 결혼 전에 몰랐을 리 없다. 애초에 찰스가 결혼 상대자로 낙점했던 건 다이애나의 친언니인 사라였다. 그러나 사라가 말 실수를 좀 했다고 바로 내친 뒤에 이제 막 성인이 된 그 여동생을 왕세자비로 낙점해 놓고 자격 운운하는 것도 어찌보면 적반하장이다. 물론 이런 상황을 다이애나도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다. 결혼을 전제로 연애하던 시절에도 찰스는 다이애나를 위해 그 어떠한 배려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이애나만 파파라치들에 시달리며 호되게 고생했다.
반면 사람들이 못생기고 볼품없다고 여기는[12] 카밀라는 사실 어떤 주제로도 대화가 가능하고 찰스와 토론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교양과 지식이 있어서 둘의 관계가 잘 이어졌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굉장히 예절 바르고 상냥해서 다이애나 생전에도 엘리자베스 2세가 카밀라를 아껴서 가까이했는데, 이 때문에 왕세자와의 사이는 최악이었어도 여왕은 공경했던 다이애나의 배신감이 컸다.
정당성은 다이애나에게 있음에도, 마치 그녀가 찰스와 카밀라의 관계를 방해하는 듯한 모양이 된 것이다. 이는 두 여자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 찰스의 책임이 결정적이다.

두 왕자에게는 좋은 아버지이며 왕족으로서 구설수에 오르거나 잘못된 처신도 없다.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에 따르면, 두 왕자에게 아주 훌륭한 아버지이고 왕자들도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라고 한다. 왕자들의 어린시절 사진과 영상을 보면 두 아들을 상당히 아끼는 것을 볼 수 있다.[13]

이것도 반박될 만한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다이애나가 우는 것을 본 윌리엄이 "아빠는 왜 엄마를 마음 아프게 해요?"하고 물었던 적도 있다. 또 왕실 별장에 휴가를 갔을 때, 찰스 왕세자는 아내와 함께 있기 싫어서 왕세자 부부 침실을 두고 윌리엄의 침실을 썼다고 한다. 침실을 뺏긴 윌리엄이 본인 침실을 쓰고 싶다고 말해도 찰스는 모른 척해서, 다이애나가 "누가 아이인지 모르겠다."(아버지가 아들 침실을 뺏어 쓰고 있으니…)라는 냉소적인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무리 자식의 성장에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아들이 잘 컸다=아버지가 잘했을 것이다"라고 딱 잘라 단정할 수 없다.

불륜에 관해서는 찰스가 잘못한 것이 누가 봐도 맞다. 그러나 찰스가 싫다는 다이애나를 억지로 납치해다가 결혼한 것도 아니고,[14][15] 결혼에 동의하고 왕세자비로서의 권리와 영향력을 누린 사람 역시 다이애나임을 고려하면 그의 입장에서는 불륜에 대한 벌을 과분하게 받았다고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그가 한 행동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았지만, 그것이 전세계인들한테 알려져서 20년간 욕을 먹고, 낙인까지 찍어버릴 정도냐는 것이다. 영국에서 다이애나 사후 거의 20여년이 된 2015년에 들어서야, 십수년 만에 처음으로 찰스가 즉위해야 한다는 여론이 반대의견을 넘어 과반수를 차지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2022년 찰스는 영국 역대 최고령 나이에 즉위한 국왕이 되어 얼마나 재위할지 불투명한 상태인데도 그렇다. 왕실의 새로운 얼굴마담이 들어서고, 새로운 아름다운 왕세손비가 왕실에 입성하며 대중의 관심이 다이애나에게서 멀어지자 자연스레 찰스에 대한 비난도 줄어 들었다는 것이다.

찰스가 싫다는 다이애나를 억지로 납치해다가 결혼한 것도 아니는 논리는 그대로 뒤집어서 찰스에게 적용할수도 있다. 누가 찰스 목에 칼을 들이대고 다이애나와 결혼하라고 협박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결혼을 통해 다이애나가 왕세자비로써의 권리와 영향력을 누렸다고 하면 찰스 및 영국 왕실 역시 젊고 아름다운 왕세자비 덕에 스타성을 얻었고, 애초에 영국 왕실이 다이애나를 왕세자비로 선택한 것 자체가 그녀가 그 역할에 적당하다고 판단되기에 고른 것이다. 즉 결혼이 일방의 강요가 아니라 쌍방의 동의에 의한 것이라면 그 약속을 지키고 관계를 유지해야 할 책임도 양쪽 모두에게 있는 것이고, 그 관계로부터 혜택을 얻을 권리 역시 양쪽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 주장은 유독 다이애나에게만 본인도 결혼에 동의한 것이고, 그로 인해 얻은 것도 있지 않느냐고 책임을 요구함으로써 정작 먼저 관계를 파괴한 찰스와 그를 방조한 왕실의 책임을 희석하려는 기묘한 이중잣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주장에서 일방에게만 유리한 이런 노골적인 이중잣대를 제외하고 그나마 말이 되는 부분을 찾아보면 '찰스가 먼저 잘못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수십년간 두고두고 욕을 먹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으냐'는 감정론이라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의 '이중잣대'는 다이애나가 피해자라는 인식을 공격함으로써 그러한 감정론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감정론에 대해 평가한다면, 물론 어떤 사람은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에 20년 이상 흐른 2020년대에 이르러서는 찰스나 카밀라에 대한 여론이 얼마간 호전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사람들은 찰스의 소행이 오랫동안 비판받을만한 것이라고 여기기에 역시 같은 시기에 이르러서도 비판의 목소리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이만하면 됐지 않느냐는 여론 쪽에서도 결코 압도적인 호감으로 돌아서지는 못하는 상태다.

4. 결론

위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속적인 불륜 행각이 한 여자의 인생을 비극적으로 만든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다이애나가 맞바람을 피운 것은 분명 비판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사랑하지 않는 다이애나를 후계자를 낳아 줄 왕세자비로 낙점한 것도, 다이애나와 결혼하고 나서 지속적으로 불륜을 자행해 온 것도 찰스 3세 본인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이애나가 막판에 가서 맞바람을 피워 구실을 잡힐 만한 일들을 벌인것도, 전부 찰스가 원인이라는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 믿었던 남편이 사실은 다른 여자와 사랑을 하고 있었고, 자신에 대한 애정은 전혀 없었으며, 결혼 생활 중에도 상간녀와 당당하게 밀회를 하며 밖으로 나도는데 세상 어느 본처가 기분 좋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여성 인권이 낮았던 중세나 근대도 아니고 엄연히 여성 총리까지 배출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치세인 20세기 후반에 말이다.

찰스는 큰외할아버지가 그랬듯 왕위를 버리고 카밀라를 선택하던지[16], 아니면 다이애나와 왕위를 선택하고 카밀라와의 관계를 접던지 해야했다. 왕위와 사랑, 둘 모두를 욕심내었기 때문에 한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었고 그 대가로 본인이 비난을 받음과 동시에 왕실의 이미지까지 실추시켜 버리게 된 것이다. 본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들여야한다.

다이애나가 막판에 실책을 몇가지 한 건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그 부분에 대해서 크게 비판하지 않고 두둔하는 것은, 다이애나의 상황이 "그럴만했다"라고 자연스레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고, 찰스와 카밀라는 다이애나 입장에서 엄연한 정신적 폭력을 휘두른 불륜남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찰스가 사전에 다이애나에게 카밀라와의 사이를 처음부터 말하고 결혼했다면 합의된 것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이건 엄연히 속이고 결혼한, 명명백백한 사기극이었기 때문.

4.1. 찰스 본인과 왕실 전체에 대한 악영향

게다가 영국 왕실은 국민들에게 입헌군주제 폐지의 꼬투리가 될만한 스캔들을 어떻게든 무마시키고 덮으려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찰스의 외도를 알면서도 모른척, 입다물고 쉬쉬할 수 밖에 없었고, 다이애나 입장에서는 제 편을 들어줘도 시원찮을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이 전부 자신에게 참고 살라고만 하니 당연히 속이 터질 수밖에 없다. 다이애나의 익히 알려진 성격 상, 절대 넘어갈 수 있을만한 일도 아닐 뿐더러, 찰스는 자식들까지 낳아놓고 당당히 카밀라와 불륜을 저지르고 심지어 다이애나가 사고로 죽어주니 아예 카밀라와 재혼했다.

아버지로서의 자각도 남편로서의 자격도 없는 정말 찌질한 면모만 잔뜩 보이니 영연방 국가에서는 "윌리엄 왕세손이 왕이 되면 인정해줄 수도 있겠지만, 찰스가 왕이 되는 꼴은 못 본다. 차라리 국민투표 입헌군주제를 폐지해라"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위에서도 지속적으로 언급되어 온 사실이지만, 찰스 왕세자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때 왕위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권력욕 때문에 큰할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와 달리 사랑만을 택하는 방법을 쓰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할 용기는 없지만 자기 마음대로 살고는 싶은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서 왕세자비감으로 손색 없는 다이애나를 인형처럼 앉혀 놓고, 후계자 출산 셔틀로 써먹으며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도 왕위를 물려받을 왕세자로서도 빈말로조차 잘했다고 할 수 없는 역겨운 행실이었다.

이 때문에 다이애나 사후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불륜커플이라는 꼬리표를 뗄레야 떼지 못한 채 언제 어디를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든 뒤에서 은근히 따라붙는 비웃음과 조롱 속에 영원히 시달리며 사는 것으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지 찰스와 카밀라는 이에 대해 변명 한 마디 없이 살고 있다.

찰스와 카밀라의 사랑이 안타까운 사랑이라고 동정하며 "저만 하면 인정해 줘야 한다"는 아주 극소수의 반응도 있는데, 문제는 이 둘의 행실 때문에 피해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들은 꿈 많던 한 어린 여자의 인생이 자신들 때문에 철저히 망가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외면한 채 지속적으로 부도덕한 사랑을 나눠 왔으며, 결국 다이애나가 이혼하고 왕실을 떠난 뒤 곧 사망하자 얼마 지나지도 않아 대놓고 우리 사귄다는 티를 내며 둘이 같이 다니기 시작하더니, 끝내 결혼에 골인했다. 이혼 후 바로 재혼한 것은 아니고 9년간 텀을 두긴 했지만, 그것도 세상의 눈치를 봤다기보다는 찰스 왕세자의 외할머니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가 이혼녀를 말 그대로 극혐했기 때문이 크다. 엘리자베스 왕대비가 101세까지 장수하지 않았다면 말 그대로 이혼하자마자 재혼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왕대비가 죽고 난 바로 이듬해(2003년)부터 동거를 시작했고, 3년상 끝나자마자 재혼했는데 이 타이밍이 과연 우연일까?

어쨌건 해리 왕자는 일단 "새어머니가 좋다"면서 대외적으로는 카밀라를 어머니로 인정하는 발언을 한 바 있으며, 뿐만 아니라 영국 왕실에서는 찰스의 재혼에 대해서 크게 반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서열과 전통을 그렇게 중요시하는 영국 왕실에서 과연 아들이 새어머니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더군다나 친어머니는 이미 교통사고로 사망해 이 세상을 떠난지 오래고, 아버지는 불륜 빼면 잘못한 게 없고, 할머니도 왕위 계승을 지지하며 버젓이 살아 계시던 상황에서 말이다. 두 왕자가 카밀라를 어떻게 생각하든 윌리엄 왕세자가 친어머니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윌리엄은 오래전부터 항상 같은 시계만 착용해왔는데, 다이애나 비가 생전 마지막 생일선물로 준 것이라고 한다.

[1] 여기에서 비극적인 결혼생활의 복선이라고 평가받는 발언이 등장한다. 기자가 "그녀를 사랑하나요?"라고 묻자, 찰스 왕세자가 "사랑합니다. 그게 무슨 의미라도요."라고 답한다. [2] 인터뷰 영상을 보면 곧 결혼할 사이인데도 스킨십 없이 인터뷰 내내 경직된 모습을 보인다. [3] 대신 고든스타운 스쿨은 여동생 프린세스 로열 앤의 자녀들이자 조카들 피터 필립스 자라 틴달이 입학했다. [4] 다이애나는 결혼 후 언론의 지나친 관심과 임신 전후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렸지만, 찰스는 이런 다이애나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갈등이 더 곪아갔다고 한다. [5] 이전에도 카밀라와의 관계는 계속 유지했지만, 본격적으로 불륜 관계가 된 시점은 이때부터였다. [6] 당시 두 사람이 머물렀던 숙소는 그랜드 하얏트 서울이었는데, 그로부터 7년 후인 1999년 국빈으로 방한한 엘리자베스 2세 필립 공이 같은 방에서 거처했다. [7] 미국의 유명한 생리대 브랜드이자 탐폰 제품명. [8] 다만 후일 이때 다이애나가 한 인터뷰는 다이애나가 원해서 한 인터뷰가 아니라 기자의 사기와 협박에 의한 인터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 [9] 특히 이혼 후에는 켄싱턴 궁전에서 티타임을 함께 가지는 등 사이가 잠시 좋아지기도 했었다. [10] 다이애나의 친정은 부유한 최상류층 귀족 가문이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일할 필요가 없었다. 다이애나가 했던 일은 어디까지나 취미생활이었다. [11] 당시에는 스펜서 백작위를 물려줄 후계자가 없어 작위가 단절될 위기였다. 영국 귀족 작위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여자의 승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현재는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현 스펜서 백작이 낳은 두 아들이 있다. 여담으로, 부계쪽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현 스펜서 백작도 딸들만 줄줄이 얻다 아들을 얻은 것이다. [12] 사실 그렇게 추녀인 건 아닌데, 다이애나가 워낙 빼어난 미모를 지닌지라 비교되어서 못생겼다는 평가가 나온 것이다. [13]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원했던 찰스는 차남 해리 왕자가 태어났을 당시 둘째도 아들이 태어나자 매우 실망했다고 한다. 그 실망이 어찌나 컸는지 아내 다이애나와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을 정도. 해리 왕자가 빨간머리라서 더 싫어했으며, 심지어 언론에 아기를 본 소감을 말해줄때 "머리카락은 어중간한 색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후에 이 비화가 알려지자 사람들은 해리 왕자가 핍박받으며 자란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는데, 주변인들은 왕세자는 두 왕자를 차별 없이 매우 아꼈다고 말했다. 다이애나도 "찰스는 윌리엄보다 해리와 더 친근하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부인과의 불화와 개인의 생각과는 별개로 자기 자식인 아들들에겐 다정하게 대해준것. [14] 감정을 속였다지만… [15] 다만 당시 영국 상류층 사회의 정서를 생각하면 다이애나가 현재 왕실에 시집온 평민 출신 며느리들처럼 '알 거 다 알고 자기 뜻으로 왕실에 시집 온' 케이스라고 보기 어렵다. 그녀는 당시 20세의 어린 나이에, 연애 경험 한 번 없는 숫처녀였다. 남자와 사귀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다이애나의 입장에서는 찰스가 자신을 대하는 것이 사랑인지, 그저 적당히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얼굴마담을 내세우기 위해 대충 속여넘기는 것인지 알아차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당시만 하더라도 왕족들과 귀족들은 뒤로는 정부를 둘지언정 겉으로나마 대단히 보수적인 결혼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다이애나 혼자 주변의 압박을 무시하고 파혼을 결정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16] 다만 이조차도 전시상황에 군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멋대로 양위한 점과 이후 친나치 행보를 보인 탓에 비판을 받고 있다. 거기다 말이 윈저 공작이지, 공식적으로만 왕족이자 전 국왕으로 인정받고 실질적으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영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비공식적 제명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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