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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3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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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God Save the King · 벤틀리 스테이트 리무진 · 영국 왕실과 정부의 전용기 · 찰스 3세(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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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탄생3. 왕세자
3.1. 학업3.2. 청년기3.3. 다이애나와의 결혼과 이혼3.4. 이혼 이후3.5. 활발한 자선활동과 환경운동3.6. 최장수 왕세자
4. 국왕

1. 개요

찰스 3세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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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기 (1953년)[1] 청년기 (1966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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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기 (1997년)[3] 현재 (2024년)
이 문서는 찰스 3세의 생애를 다룬다.

2. 탄생

찰스 3세의 어린시절을 담은 영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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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14일 영국 현지시각 오후 9시 14분, 버킹엄 궁전에서 에든버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 공주 에든버러 공작 필립의 장남이자 조지 6세 엘리자베스 왕비의 첫 손주로 태어났다. 제왕절개로 태어났으며, 엘리자베스 공주 부부가 혼인한 지 1년 만에 얻은 첫자식이자 2차 대전에서 영국이 승전한 후 처음으로 태어난 로열 베이비였기에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성대한 종소리를 울렸고, 왕립 포병대도 마흔한병의 축포를 발포했으며, 이틑날 아침에 4천여명의 시민들이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러 버킹엄 궁전 앞으로 몰려들었다. 영국은 여전히 배급으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찰스의 탄생을 기념해 찰스와 같은날 아이가 태어난 가정에 비누와 버터, 달걀, 꿀, 마멀레이드, 베이컨, 쇠고기 등이 담긴 음식 꾸러미가 선물로 제공되었다.

당시 사회풍조상 남편은 아내가 출산할 때는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 필립 공 역시 찰스가 태어나던 순간에 현장에 없었고 대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개인비서와 함께 스쿼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왕자가 탄생했다는 시종의 보고를 듣자마자 산실로 달려가 아기를 안아본 후 자두 푸딩 같다며[5] 갓 태어난 아들과 처음 대면한 소감을 말했다고 한다. 그 후 마취에서 깨어난 아내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장미 꽃다발과 카네이션을 선물하고선 아들에게 밤새 자장가를 불러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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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15일, 버킹엄 궁전의 뮤직 룸에서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았다. 대부모는 외할아버지 조지 6세,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6], 외증조할머니 메리 왕대비, 이모 마거릿 공주, 아버지 필립 공의 삼촌이자 요르요스 1세의 차남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요르요스 왕자, 루이 마운트배튼 경의 장녀이자 필립 공의 사촌동생 패트리샤 내치불, 친증조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엘리자베스 왕비의 남동생 데이비드 보우스라이언 경[7]으로 총 8명이다.

찰스는 윈저 왕조 창립 이래 처음으로 날때부터 후계자로 태어난 왕손이였다.[8]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는 본인의 침실 바로 옆에 아기방을 두고 생후 2개월 동안 찰스에게 직접 모유 수유를 했다.[9] 또한 편지에도 이렇게 적었다.
아기는 너무 예쁘고, 필립과 나는 아기가 무척 자랑스러워. 갓난아기 치고는 특이한 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손가락이 다소 크지만 길거든. 나랑 필립의 손과는 전혀 달라. 그 손이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흥미로울 것 같아. 아직도 내가 엄마가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1948년, 엘리자베스 공주의 편지
아버지 필립 공도 그의 사촌누나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막내숙모인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가 모친인 옐레나 여대공에게 보내는 편지에 “필립이 너무 좋아한다. 간호사가 우스울 정도로 아기에 대해 꽤나 전문적이다.”라고 썼을 정도로 첫아들에 대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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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15일, 2살 터울의 여동생 프린세스 로열 앤이 태어나며 오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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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밸모럴 성에서 찍은 가족사진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하기 전에는 아버지 필립공 해군으로 근무하던 몰타의 저택과 런던 클래런스 하우스에서 나름 평범한 가족처럼 자랐으나, 이런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3. 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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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1952년, 외할아버지 조지 6세 폐암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가 여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찰스와 가족들의 지위까지 모두 바뀌면서 상황은 순식간에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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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19일 남동생 앤드루 왕자, 1964년 3월 10일 남동생 에드워드 왕자가 태어났다.

고명딸이라 필립 공이 금지옥엽으로 여겼던 앤 공주,[10] 엘리자베스 2세 늦은 나이에 얻어 사랑을 받았던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와는 달리 찰스는 항상 왕세자로서의 '의무'가 먼저였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나름 귀여움 받으며 자랐지만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에 오른 뒤엔 원칙적이고 차가운 어머니, 무뚝뚝하고 직설적인 아버지에게 거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즉위 초, 장기 해외 순방을 자주 나가던 여왕 부부 때문에 몇개월동안 아동기의 여동생 프린세스 로열 앤과 단둘이 남겨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루 30분 정도 어머니와 만나는 것을 제외하면[11] 대부분의 시간을 유모와 함께 보냈고, 부모로부터 흔한 포옹이나 키스 역시 받아본 적 없다고 한다. 특히 터프하고 마초적인 성격의 군인 출신 아버지 필립 공은 예민하고 섬세하던 찰스의 성격을 이해하기 보다는 이를 못마땅해하며 항상 강하게 키우려 했기 때문에[12] 부자간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찰스가 의지할 사람은 할머니 엘리자베스 왕대비와 아버지의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 정도였다. 엘리자베스 왕대비는 첫 손주이자 큰딸이 낳은 장남인 찰스를 어릴 때부터 매우 귀여워했다.[13] 왕대비는 찰스의 섬세함을 높게 평가했고 음악과 예술 등의 문화에 관심을 갖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루이 마운트배튼은 어릴 때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던 필립 공에게는 거의 아버지나 다름 없던 덕분에 조카손자인 찰스와도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찰스는 루이 마운트배튼 경이 IRA의 폭탄 테러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을 때 몹시 비통해했다고 한다.

3.1. 학업

왕위계승서열 1위의 왕세자가 된 찰스는 콘월 공작, 로스시 공작, 캐릭 백작, 렌프루 남작, 아일즈 영주 그리고 스코틀랜드 왕자이자 섭정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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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 하우스 스쿨 첫 날 침 스쿨 첫 날
왕실이 현대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일반 국민들을 이해해야한다는 필립공의 뜻에 따라 1955년, 영국 왕실은 찰스가 학교에 다닐 것이라고 발표했다. 따라서 찰스는 학력을 보유한 최초의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되었으며, 1956년 11월부터 1957년 6월까지 런던 켄싱턴 첼시 왕립구의 힐 하우스 스쿨에 재학하다 1957년 9월 9일에 필립 공의 모교이자 1645년 개교해 당시 300년 넘은 역사를 자랑하던 침 스쿨로 전학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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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스턴 첫 날
1962년 6월에 침 스쿨을 졸업한 뒤 1962년 9월 왕실 거주지 중 하나였던 윈저 성과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왕족 귀족 출신 자제들만 다니던 이튼 스쿨을 뒤로하고 필립 공의 또다른 모교 고든스턴에 입학하는데, 이 또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찰스를 장남으로서, 그리고 왕세자로서 강하게 키우고 싶어하던 필립 공의 뜻이였다. 전형적인 군인 출신 남성으로 스파르타식 교육을 고집하던 필립 공은 귀족학교였던 이튼 스쿨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지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던 필립 공과는 다르게,[14] 영왕실 후계자라는 탄생 배경을 지녔던 찰스는 부족함 없이 자란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고든스턴에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던 필립 공은 아들 역시 모교에 입학시켜 동문으로서 같은 추억을 가지기를 원했으나,[15] 내성적이고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의 찰스는 계절 상관없이 아침마다 실시되는 구보와 냉수 목욕, 벽난로 없는 냉골 기숙사, 등정과 체력장, 학교 시설 짓기 등의 철저한 스파르타식 교육에 진저리를 쳤으며, 심한 따돌림과 괴롭힘[16]까지 당해 지옥같은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영국 대학 입학 시험인 A레벨에서는 역사에서 B등급, 프랑스어에서 C등급을 각각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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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스타운 스쿨 졸업 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에 입학하여, 대학을 가지 않고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왕실의 관례를 깼다.[17] 인류학, 고고학, 사학을 전공하였고 1970년에 졸업하여 학위를 보유한 최초의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3.2.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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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웨일스 공 책봉식을 마치고 촬영한 사진
찰스는 9세였던 1958년 7월 26일 왕세자에 해당하는 웨일스 공과 체스터 백작 작위를 받았으나, 정식으로 책봉식을 올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다 20세였던 1969년 7월 1일, 웨일스에 위치한 카나폰 성에서 책봉식을 올렸다. 책봉식에서 찰스 3세는 웨일스어로 연설했으며, 이를 위해 두달동안 애버리스트위스 대학교에서 웨일스어를 공부했다. 당시 책봉식은 사상 최초로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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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스 공 공식 책봉식을 올린 후에는 왕위 계승자로서 군 복무를 했는데,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영국 해군에서 복무했다. 찰스 3세는 일반 병사들과 동일한 환경에서 함정에 탑승해 훈련을 받았으며, 직접 훈련용 항공기를 조종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 1977년에는 낙하산 부대의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로 인해 낙하산 훈련을 받았으며, 낙하산 훈련을 받은 최초의 왕족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갖추었다.

젊은 시절에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의 후광과 세련된 외모의[18] 젊은 왕자라는 점으로 인해 지금의 윌리엄 왕세자만큼이나 영국 대중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결혼 전인 1980년에는 무려 국민의 70%가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가 조기 퇴위하고 찰스 왕세자가 즉위하는 데 찬성한다는 영국 현지의 여론조사까지 있었다.[19] 거기에다 전 세계 셀럽들과의 화려한 스캔들로 국내외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정도로 차기 왕위계승자로서 전세계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20]

차기 왕위를 물려받을 젊은 왕세자가 과연 누구와 결혼하게 될지도 당시 전세계 언론과 대중들의 뜨거운 관심사였다. 당시 찰스 3세는 여러 여성들과 교제했는데, 당시 찰스가 만났던 여성들은 주로 상류층 여성들이었다. 전 주 스페인 영국 대사 존 러셀의 딸인 조지아나 러셀과 제8대 웰링턴 공작의 딸인 제인 웰슬리, 다비나 셰필드, 스펜서 백작의 딸인 사라 스펜서[21], 그리고 3대 애쉬컴 남작의 외손녀 카밀라 섄드 등과 만난 것으로 알려져있다. 모나코 레니에 3세의 장녀인 모나코의 카롤린 공녀와 약혼설이 난적도 있었다.

그러나 찰스 3세의 결혼 상대로 진지하게 고려되었던 여성은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의 외손녀인 아만다 내치불이었다. 아만다는 찰스와 6촌 관계로, 마운트배튼 백작의 별장에서 매년 함께 여름 휴가를 즐겼을 정도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특히 1974년부터는 결혼 논의가 급물살을 탔고, 찰스가 아만다의 어머니인 패트리샤 내치불과 결혼 계획에 대해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다.[22] 1980년에 예정되었던 찰스의 인도 순방에 아만다가 동행하여 장차 찰스의 아내가 될 여성이자 차기 왕세자비를 공개하는 방안까지 왕실에서 내부적으로 고려되었을 정도로 찰스와 아만다의 결혼은 머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79년 8월 루이 마운트배튼과 가족들이 IRA의 폭탄 테러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아만다의 가정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결국 아만다는 왕실과 결혼할 생각을 완전히 접게 된다.[23][24]

3.3. 다이애나와의 결혼과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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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혼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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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카밀라와의 결혼식 당시
다이애나 스펜서 사후 불륜상대였던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 재혼했는데, 당시 이에 대한 영국의 여론은 정말 좋지 않았다. 심지어 이 이혼 때문에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찰스를 보는 시선이 좋지 않다. 본인들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재혼 후에는 조용히 지내려고 노력했다. 당시 영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다이애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기 때문에, 그 반대급부로 카밀라의 인기는 매우 낮다. 재혼 후 한 설문조사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 사후 왕위를 찰스의 장남 웨일스 공 윌리엄이 잇기를 바란다는 여론이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데에는 찰스 자신의 매력 없음과 함께 카밀라와의 재혼이 이유로 꼽힐 정도다. 윌리엄이 다이애나 스펜서의 아들이라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도 2010년대 기준으로는 이미지를 상당 부분 회복했다. 실제로 영국 내 여론조사에서도 찰스가 왕위를 잇기를 바란다는 응답의 비율이 상당히 높아졌다. 주목할 부분은 아버지 필립 공이 2017년 그의 96세 생일부로 왕실 공식 업무에서 은퇴하면서, 여왕의 의회 연설을 비롯한 제 행사에 여왕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 왕정에서 상징성 있는 어머니의 후광 효과를 옆에서 받으며 평탄한 왕위 계승을 노리는 것으로 보인다.

2013년 웨일스의 조지 공자, 2015년 웨일스의 샬럿 공녀, 2018년 웨일스의 루이 공자, 2019년 서식스의 아치 공자, 2021년 서식스의 릴리벳 공녀가 태어나며 5명의 손주를 두었다.

3.5. 활발한 자선활동과 환경운동

찰스 3세와 프린스 트러스트 재단
왕세자 시절부터 활발한 자선 활동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특히 1976년에는 7,500 파운드의 해군 퇴직금으로 직접 '프린스 트러스트(Prince's Trust)'[25]라는 이름의 재단을 설립했다. 프린스 트러스트는 노숙자나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취약계층의 젊은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수행했는데, 지금까지 100만명의 청소년들이 삶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왔으며, 12만 5천명의 기업가들을 배출했다고 한다. 현재 영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자선 단체로 손꼽히고 있다. 이외에도 영연방 국가 전역에서 16개 이상의 자선 단체를 추가로 설립했다.

또한 기후위기 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되기 훨씬 전부터 환경 운동을 활발히 해온것으로도 유명하다. 오래전부터 타고 다니던 애스턴 마틴 차량을 바이오 연료로 움직일 수 있도록 개조한 일화도 유명하며, 1968년에 이미 환경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특히 지속가능한 산업과 유기농법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도시 설계와 기업의 생산 방식에 대해서도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방향으로 추진하길 독려하고 있다. 실제로 왕실이 매년 여름에 머무는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은 바이오매스 보일러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많은 사람이 환호했던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정(UN Climate Change Conference: COP21)의 주창자도 찰스 3세였으며, 2019년 기후변화 협정에서 미국의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설득한 사람도 찰스 3세로 알려져있다. 2021년 글래스고에서 열린 COP26에서는 기후 변화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산업계와의 협력이 필요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때문에 환경 운동계와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찰스 3세의 즉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1 #2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행보는 정치 간섭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특히 이른바 "흑거미 메모"[26] 사건은 큰 논란의 대상이었다. 2004년부터 찰스 3세는 당시 정부 장관들에게 사적인 편지를 보냈는데, 농업 도시계획, 건축, 교육, 심지어 파타고니아 이빨고기 보호 같은 문제에 대한 정부의 접근 방식에 대한 의견까지 담겨있었다. 이는 왕실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깨는 일이었다.[27] 이로 인해 당시 간섭쟁이 왕자라는 다소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기도 했다. 스스로도 이 논란을 의식했는지 2018년 BBC 인터뷰에서 "나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군주가 되는 것과 의견 표명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답한 적도 있다.

환경문제와 관련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갈등설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찰스는 평상시에도 지구 온난화를 비롯한 생태계 보전에 큰 관심을 가져서, 트럼프 대통령이 정식으로 영국을 방문하면 "훈계"하지 않을까 트럼프 측에서 걱정했다고 한다. 때문에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찰스 대신 윌리엄이나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 #2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의하면 찰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정식으로 맞이할 것이며, 무슬림 입국 거부와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한 뜻깊은 토론을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찰스에 대한 여론이 좋아졌었다. 그러나 실제 트럼프의 2018년 영국 방문에서는 찰스와 윌리엄 모두가 만남을 거부해 트럼프는 여왕만 만나고 돌아왔다.

즉위 후에는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당시 집권 보수당과의 갈등설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보수당 내각에서는 북해 유전 개발을 승인하는 등 탄소 중립에 역행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찰스 3세가 내각의 정책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리즈 트러스 총리 집권 당시에는 트러스 총리가 찰스 3세의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참석을 막아섰다는 의혹이 있다. 2023년 9월 리시 수낙 총리가 현행 탄소 중립 정책을 사실상 재검토하겠다고 밝힌 직후에는 찰스 3세가 프랑스 국빈 방문 도중 프랑스 상원 연설에서 기후 위기에 대한 심각성을 언급해 정부 입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을 밝혀 찰스 3세와 내각의 갈등설이 나왔다.[28]

역설적으로 찰스 3세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는 군주제 반대론자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는데, 군주제를 반대하는 국민들은 청년층이 대부분이고, 이들은 기후 변화 문제에 가장 민감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한 왕실의 적극적인 대응이 군주제에 대한 지지도가 낮은 청년층의 호감을 얻기 위한 전략적인 판단이라는 분석도 있다.

3.6. 최장수 왕세자

파일:external/2.bp.blogspot.com/Charles.jpg
The Man Who Will Be King
왕이 될 남자
[29]
Given the robust good health of his mother Queen Elizabeth, chances are that it will be some years before Bonnie Prince Charlie becomes King.
어머니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성한 건강을 감안할 때, 찰스가 왕위에 오르기엔 몇 년은 걸릴 것 같습니다.
1978년 5월 15일, 찰스를 인터뷰했던 타임지 기사 중 출처
When you're 60 years of age. And your mum won't leave the stage, It's good to know that you're still Prince of Wales!
전하께서는 벌써 예순이신데, 모친께서는 여전히 무대를 떠날 생각도 안 하시네. 그래도 여전히 웨일스 공이긴 하니 그게 어디요!
영국 코미디언 에릭 아이들(Eric Idle), 2008년 찰스의 환갑 기념 공연 중[30]
21세기 들어 의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올라가자, 전세계적으로 군주제 국가들의 군주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너무 늦은 나이에 즉위하는 것을 막고자 적당한 시기에 은퇴, 양위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 입헌군주국의 국왕들은 이를 통해 왕실의 이미지를 젊게 유지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재확인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찰스 3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만큼은 고령의 나이에도 전혀 은퇴의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고, 찰스는 칠순이 넘은 나이까지도 오랫동안 왕세자에 머물러야 했다. 하도 왕세자로 지낸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인터넷상에서 놀림거리가 되거나, 아예 어머니보다 먼저 죽어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예상까지도 나왔을 정도.

2012년에 즉위 60주년을 맞은 엘리자베스 2세가 찰스에게 양위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여왕이 "그런 일은 없다"라고 부인했다. 여왕이 공주시절부터 "짐은 퇴위하지 않고 끝까지 국왕으로서 의무를 다하겠다."고 선언했고,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가 불명예와 함께 퇴위한 영향으로 엘리자베스 2세는 생전 퇴위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왕은 퇴위한 국왕이 온갖 비난과 욕을 다 듣는 것은 물론이고, 국왕이라는 임무와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며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다.

이러는 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국왕들이 은퇴하고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시작했다.
2013년 11월에 열리는 영연방 정상회의에 엘리자베스 2세가 불참하고 찰스와 카밀라 부부를 대신 보내기로 해 "왕위 승계를 위한 수순 밟기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7월 22일, 장남 윌리엄의 아내 캐서린 미들턴이 왕위 계승 서열 3위인 웨일스의 조지 공자를 순산하면서 손자까지 봤다. 게다가 권한이 없느냐면 그것도 아니고 왕실 내 실권의 상당 부분은 그가 갖고 있어, 간판은 왕세자라도 실질적으로는 공동 왕으로 봐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2010년대부터는 엘리자베스 2세의 고령으로 인해 기존 국왕의 공무중 일부를 찰스와 앤 공주 등 자녀들이 나누어서 수행했다. 거기에다 2017년 필립 공이 왕실 공무에서 은퇴하면서 기존 필립 공의 공무도 떠맡았다.

2015년에는 왕세자의 전기 <찰스, 왕의 심장>을 인용해, "왕세자가 즉위하면 여왕과는 다른 적극적인 왕권 행사를 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어났다. # 왕이 된다면 국민의 삶에 '진정어린 개입'을 하는 군주로서 역할을 개조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나, GMO를 반대하는 등의 행보 때문. 2015년 5월 13일, 찰스의 국정 개입 정황이 담긴 '흑거미 메모'가 10년 간의 소송 끝에 공개되어 왕실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와 관련해 2018년 70세 생일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BBC와 인터뷰를 한 찰스가 '국왕이 된 후에는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국정 개입 논란을 의식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2018년 4월 19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자신이 맡은 영연방 수장 자리를 찰스에게 물려 주고 싶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여왕이 공개추천 형식을 빌려 찰스를 후임자로 못 박은 데는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한 안팎의 반대여론을 잠재우고, 차기 왕권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

어쩔 수 없는 게 엘리자베스 2세 추축국에 맞선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자이자 대영제국의 마지막 국왕으로서 왕실의 비효율성에 대한 지적 등 부정적인 여론이[34] 증가하는 2020년대에도 왕실의 위신과 명분을 세울 수 있지만 찰스는 뒷세대이기에 처음부터 명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여왕도 누구보다 이를 잘 인지하고 있어 연합왕국과 영연방 수장이라는 책임감으로 노구에도 왕위를 계속 지켜 왔던 것이다. 따라서 영국의 왕위 계승 문제는 북유럽이나 스페인, 베네룩스와 비교 될 수 없다. #

또한 옆 나라 국왕들도 인지도가 영국 국왕보다 한참 떨어져서 전세계에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국왕 본인들이 재임 중에 자국에서 벌어진 사건 사고들이 워낙 많았다.[35] 다이애나 스펜서 사건이 워낙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서 말이 많았던 것일 뿐이다.

2019년 10월 일본 덴노 나루히토의 즉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이틀 일정으로 여왕을 대신해 일본을 방문했다. 찰스는 29년 전인 1990년 11월에 열린 아키히토의 즉위식에도 신분으로 참석한 바 있다. #

2019년 3월 5일에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 서임 50주년 기념식이 버킹엄 궁전에서 있었다.[36] #

한편 "찰스가 남동생 앤드루 왕자와 갈등을 빚고 있다"는 기사가 나와, 호사가들은 왕자의 난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있다. 찰스는 일하지 않는 왕족에 대한 과도한 지원을 금지하는 왕실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방계 왕족은 물론 자신의 친동생들인 프린세스 로열 앤 공주,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왕자 왕자와 그 일가에 대한 지원까지 줄이려는 움직임을 보여 당사자들이 반발한다는 것. 공교롭게도 2012년에 거행된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 마지막 순서인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서의 인사 때 앤 공주,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소문을 부채질했다.[37]

2018년 4월 17일,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가 "찰스의 영연방 수장 계승을 지지한다."라고 밝혔으며 19일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버킹엄 궁전에서 열린 영연방 정상회의에서 찰스를 후임 영연방 수장으로 공식 추천했다. 일단 이를 기점으로 엘리자베스 2세가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 자체는 반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물론 엘리자베스가 2022년에 사망하면서 왕이 되었긴 했지만 본인도 워낙 고령인지라 왕위를 물려 받는다고 해도 재위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듯 하다. 일단 부모인 엘리자베스 여왕과 필립 공 모두 장수한 걸 보아 찰스 본인도 장수 유전자를 타고났고, 앞으로 자신의 건강 관리만 잘 한다면 부모님만큼 오래 살 가능성도 크기에 왕위에는 오를 확률이 충분해 보인다.[38]

찰스의 개인적인 평판과는 별개로 군주로서 요구되는 능력은 비교적 갖춘 편으로 평가된다. 내정뿐만 아니라 외교, 군사 분야에 대하여 지식이 풍부하고, 국내외의 정세 판단에 관한 식견, 통찰력도 상당한 수준. 한 보기로 1997년 홍콩 반환 당시 찰스는 "홍콩을 중국에게 반환해서는 안된다. 중국에 홍콩을 반환했다간 홍콩은 훗날 큰 불안정에 휩싸일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2019년 홍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통찰력과 별개로 무책임한 발언인 게, 중국정부의 대응은 차치하더라도 홍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인 신계는 조차기간이 끝났고 대영제국이 무력으로 점령한 식민지이기 때문에 청의 국체를 승계한 중국이나 대만에 반환해야만 하는데, 반환을 거부하거나 대만에 반환했다가 중국이 홍콩을 봉쇄하면 자립이 불가능한 홍콩은 싱가포르가 따위로 보일 정도로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2020년 3월 25일,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 다만 가벼운 증상 외에는 좋은 건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39]에서 아내 카밀라 자가격리 되어 있다고 한다. 카밀라는 코로나19 음성 판정을 받았다. 그 후 자가격리에서 해제되었다. # 하지만 코로나 19 후유증으로 인해 오감 후각 미각이 상실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 11개월 후에는 코로나19 백신을 맞았다고 한다. # 그러나 2년 뒤 22년 2월에 재감염되었는데, 이때 카밀라와 엘리자베스 2세까지 함께 감염되었다. #

그 후 콘월의 새 영지에 머물렀는데 세세한 규정으로 주변 주민들의 불만이 있다고 한다. #

2021년 4월에 아버지 필립 공의 사망 후 엘리자베스 2세의 퇴위설이 또다시 돌았지만[40] 왕실측은 곧바로 부인했다. 다만 2022년에 열릴 예정인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70주년 플래티넘 주빌리를 전후로, 공식적으로 섭정을 맡기거나 국왕의 일부 업무를 양도할 가능성은 있다.[41] 지금도 총리 접견이나 의회 개회선언 등 국왕의 가장 중요한 공무를 제외하고는 해외순방[42] 등 외교업무, 행사참석 등 대부분의 대외적인 공무는 찰스와 여동생 앤 공주가 각각 나누어서 담당하고 있다. 특히 2017년 필립 공이 왕실 공무에서 은퇴한 후에는 필립 공이 수행하던 공무들을 찰스를 비롯한 자녀들이 도맡아 수행하고 있는중이다. 예를 들어 2021년 필립 공 사망 후에 열린 의회 개회식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찰스 부부가 함께 참석했으며, 2021년 영국 콘월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도 찰스가 여왕과 함께 참여했다. 현재 사실상 공동 왕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영국에서도 찰스가 팔순 전에는 그래도 즉위를 할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필립 공의 사망 후 여왕의 심신이 쇠약해졌지만, 그래도 2027년 75주년까지 왕좌를 지키려 노력하지 않겠냐는 예측과 맞물리는 것이고 이를 넘기면 여왕의 101세의 고령이 되는데 100세~110세 경에도 대외활동을 이어가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43][44]

2022년 들어서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외 활동이 대폭 줄어들면서 찰스가 여왕의 역할을 대행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5월 10일에는 의회 개회식에 불참한 여왕을 대리해 여왕 연설(Queen's Speech)을 낭독했다. 이는 찰스가 왕세자가 된 후 처음 있는 일이다. 데일리 메일은 찰스가 감정이 솟구치는 듯 여왕 연설을 읽기 전에 옆에 놓인 왕관[45]을 쳐다봤다고 전했다. 왕위가 점진적으로 찰스에게 넘어간 역사적인 순간이라는 평가가 뒤따랐으며, 향후 여왕이 찰스를 섭정으로 임명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나왔다. #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해 여왕이 사망하면서 섭정은 거치지 않았다.[46]

4. 국왕

4.1.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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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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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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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세 생일 기념 사진 [2] 18세 생일 기념 사진 [3] 다이애나 스펜서의 장례식 당시 모습. 49세이다. [4] 찰스 3세의 대관식을 기념해 BBC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국왕 찰스: 군주의 탄생(Charles R: The Making Of A Monarch)'의 하이라이트 장면으로, 왕실 기록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던 미공개 영상들을 모아 제작되었다. [5] 크리스마스에 먹는 자두 푸딩은 검붉은 색이다. 갓난 신생아를 보고 그 모습을 떠올린 셈. [6] 당시 찰스의 이름을 대부인 호콘 7세의 왕자 시절 이름 칼(Carl)에서 따온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었다. [7] 1902. 5. 2. ~ 1961. 9. 13. 향년 59세. [8] 왕조의 창립자이자 증조할아버지인 조지 5세는 장남이던 형 앨버트 왕세자의 요절로 인해 후계자 수업도 몇년 받지 못하고 왕위에 올랐고, 할아버지 조지 6세는 형 에드워드 8세의 자진퇴위로 평생을 왕위 생각없이 살다 하루아침에 왕이 되는 날벼락을 맞았으며, 방계 왕족이자 종친으로 살아갔던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역시 뒤늦게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9] 본인이 홍역을 앓자 그만두었다고 한다. 아기방도 다른 곳으로 옮긴 후 유모가 전적으로 돌보았다고. [10] 버킹엄 궁전에 있던 필립 공의 방에는 딸 앤 공주의 사진만 걸려 있었다고 한다. [11] 의자에 앉아 유모가 아이들을 목욕시키는걸 아주 어색하게 바라보다 나갔다고 한다. [12] 필립 공이 찰스에게 수영을 가르쳐 준답시고 물에 집어던졌는데, 이 때문에 감기에 걸려 유모가 기겁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실제로 대다수의 해군 조직에서 맥주병에게 전투수영을 가르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물에 던져넣는 것이다. [13] 손자며느리 다이애나 스펜서가 사망했을 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큰딸 엘리자베스 2세에게 다이애나의 장례식에 불참할 것을 요구하면서 암묵적으로 손자의 편을 들 정도였다. 다만 이때 찰스는 불참 요구에 반발했다는 말도 있을 뿐더러 엘리자베스 왕대비의 이혼녀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요구일수도 있으므로 확인이 필요하다. 증손자들 중에서도 찰스의 두 아들들인 윌리엄 왕자 해리 왕자를 가장 아꼈다고 한다. [14] 가문인 그리스 왕실이 몰락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쫓겨난후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애인과 함께 살았으며, 제일 좋아하던 누나 만삭일때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15] 매주 직접 비행기를 몰아 찰스를 등교시키는 등, 장남이 자신의 모교에 입학해 동문이 된다는 것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던 것으로 보인다. [16] 럭비 경기 도중 한 상대팀 선수가 찰스에게만 집중적으로 럭비공을 던지다가 코에 맞아 코뼈가 깨진적도 있다고 한다. [17] 에드워드 8세 옥스퍼드 대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으나, 졸업은 하지 않아 학위는 없었다. 조지 6세도 왕자 시절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재학했으나, 1년만 다니고 그만두었다. [18] 전체적으로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와 많이 닮았으며, 높고 얇은 코는 아버지인 필립 공과 닮았다. [19] 여왕이 정년인 60세가 넘으면 30년이 넘게 재위했으니 조기 퇴위하고 젊은 왕이 즉위하기를 바라는 기류가 어느 정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같은 시기 네덜란드에서는 율리아나 여왕이 딸 베아트릭스 여왕에게 왕위를 넘기고 퇴위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찰스는 왕세자로만 70년 7개월을 넘게 보낸 후 여왕이 70년을 재위하고 96세에 사망한 후 73세에야 즉위했다. [20] 당장 국내 언론의 당시 기사들만 찾아봐도, 찰스의 열애설 관련 기사와 결혼설 관련 기사를 쉽게 찾아볼수 있다. 오죽하면 당시 조선일보의 다이애나 스펜서와의 열애설 기사 헤드라인이 "영국 황태자 또 염문설"이었다. [21] 다이애나 스펜서의 언니이다. [22] 그러나 당시 아만다의 나이가 16세였기 때문에 결혼 논의는 아만다가 성년이 된 이후 진행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23] 만약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이 테러를 당하지 않았거나 테러가 1~2년 정도 더 늦게 일어났더라면 찰스는 아만다와 약혼했을 가능성이 크며, 현재 영국의 왕비는 다이애나도 카밀라도 아닌 아만다였을 수도 있다. [24] 아만다가 찰스의 유력한 신붓감 후보로 급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찰스와 사이가 매우 가까웠던 루이 마운트배튼이 적극적으로 밀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지적이 많다. 애초에 찰스와 아만다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던것도 루이 마운트배튼이었다. 루이 마운트배튼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조카가 영국의 국서인데 외손녀까지 차기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왕실과 이중으로 관계를 맺게되며 가문의 평판을 더욱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25] 찰스 3세가 즉위한 후에는 킹스 트러스트(King's Trust)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26] 찰스 3세의 필체가 마치 거미 모양 같이 보여서 붙은 이름이다. [27] 다만 단순한 의견 전달을 정치 개입으로 간주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영국은 성문헌법이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를 왕실의 정치 개입으로 봐야할지를 규정해놓은 법이나 판례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찰스 3세가 개인적으로 보낸 의견이 정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여부도 당사자들이 직접 밝히지 않는 한 알길이 없다. [28] 정부의 정책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비판한 것은 아니었지만, 환경 문제가 심각한데 현 내각의 정책은 이에 역행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발언이었다. [29] 1978년 5월 15일 타임지로 당시 29세였다. 해당 기사가 나온 지 무려 44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이 지나서야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30]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Life 문서 참조 [원문] "Queen gives up throne for her son
(sorry, Prince Charles, it's Queen Beatrix of Netherlands.)"
[32] 사실 막시마 소레기에타 왕비의 아버지인 호르헤 소레기에타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차마 입에도 담기 꺼릴 정도로 끔찍한 아르헨티나 독재정권의 행각에 심각하게 연루된 인물이라 결혼 당시부터 네덜란드 의회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혔고, 장인과 군사정권의 연관성을 무리하게 부정하거나 법적 조치 및 입헌군주제의 권력을 동원해서까지 비판적인 의견의 제기를 틀어막으려 드는 빌럼 알렉산데르의 행태 역시 상당한 비판을 받아 그의 정치적 입장에도 손상을 입혔을 정도였으니 전적으로 긍정적으로 볼 면모라 할 수는 없다. 다만 비교 대상이 찰스 3세(및 그가 다이애나 비를 대한 태도)가 되면 "빌럼 알렉산데르는 최소한 남편으로써 자기 책임은 다했다. 그런데 찰스는 그러고도 인간이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33] 이는 찰스가가 된 후 2번째로 목격한 일본 황태자의 즉위다. 첫 번째는 1990년 아키히토의 즉위다. [34]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으로 연합왕국이 흔들리고, 독립한 지 한참이고 우리나라에 머물지도 않는 왕을 왜 원수로 받드냐며 영연방 구성국에서 부정적인 여론이 증가했다. [35] 벨기에 알베르 2세는 사생아 문제로 도망간 것에 가깝고, 네덜란드의 베아트릭스 여왕은 즉위하자마자 대관식에 쓰일 왕궁을 개축하겠다고 세금을 퍼먹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다. 영국의 버킹엄 궁전은 누수가 심한데도 120년째 제대로 수리를 못하고 있는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베아트릭스 여왕은 재위 말년에 참석한 행사에서 자동차 테러가 일어나 그로 인해 사망자까지 발생하면서 한동안 쇼크 상태로 지냈던 적도 있었다.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말년에 코끼리 사냥을 한 게 딱 걸려서 도망가듯이 양위했고, 그 후 탈세 혐의까지 드러나 사실상 해외로 도피했다가 미신고 세금을 납부하고 2년만에 겨우 스페인에 돌아갔다. [36] 프린스 오브 웨일스 칭호를 받은 것은 1958년이었지만, 1969년에 공식적으로 서임되었다. [37] 다만 이는 훗날 찰스 3세가 자신이 실행할 왕실 개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38] 수명은 유전의 영향을 받는다. 이론적으로 후천적인 요소(질병, 스트레스, 영양 섭취 등)가 동일하면 부모가 장수한 쪽이 오래 산다. 찰스의 부모인 필립 공과 엘리자베스 여왕이 각각 99세와 96세로 장수를 했기 때문에 찰스도 큰 문제가 없다면 오래 살 것으로 보인다. [39] 영국 왕실의 여름 별장. [40] 애초에 이 퇴위설의 근거가 엘리자베스 2세의 정신적 버팀목이던 필립 공이 사망하면서, 여왕이 정신적으로 힘들어할 것이라는 신빙성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엘리자베스 2세가 지금껏 남편만 바라보며 재위한 것도 아니기에 왕실 측에서 곧바로 부인한 데다가, 필립 공의 장례식이 끝난지 며칠 후 건강하게 공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퇴위설은 누그러든 상태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2세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힘겨워보이는 건 사실이다. [41] 국왕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인 문화사업을 찰스에게 넘길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42] 엘리자베스 2세가 아무리 건강해도 나이가 나이이기 때문에 엄청난 스케줄을 장기간에 걸쳐서 소화해야 하는 해외순방은 아무래도 무리일 수밖에 없다. [43] 엘리자베스 2세가 사망하면 자메이카, 바하마등지의 영연방 왕국 탈퇴는 거의 확실시되고 있고, 이는 연쇄적인 타 왕국의 공화국 전환을 부추길 개연성이 높다. 오세아니아 카리브의 소앤틸리스의 동카리브 연안의 소국을 제외하고 확실히 영연방 왕국에 잔존하리라 보장할 수 있는 국가가 거의 남지 않는다. 그나마 캐나다가 주요국 가운데서는 공화국 논의에 소극적이다. 이러한 전반의 문제는 영국 외교와도 직결된 문제이기에 단순히 왕가의 즉위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44] 파푸아뉴기니는 그 중 유일하게 군주제 지지 여론이 더욱 강해지는 국가다. 영국도 여왕과 이미지가 겹치는 프린세스 로열 앤을 파푸아뉴기니에 파견하는 등 각별히 신경쓰고 있다. [45] 원래는 왕관을 쓰고 여왕 연설을 낭독하는 것이지만, 찰스는 즉위한 상태가 아니니 당연히 왕관을 착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옆에 왕관을 놓은 상태에서 연설을 낭독한 것이다. [46] 여왕의 사후 발간된 전기에 따르면 실제로 왕실 관계자들은 찰스 3세를 섭정으로 임명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섭정직에 부담을 느낀 찰스 3세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실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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