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南京 |
뤄양 洛阳 |
시안 西安 |
안양 安阳 |
1. 개요
중국 7대 고도(古都)란, 시안(西安, 서안. 옛 장안), 베이징(北京, 북경), 뤄양(洛陽, 낙양), 난징(南京, 남경), 카이펑(開封, 개봉), 항저우(杭州, 항주. 옛 임안(臨安)), 안양(安陽, 옛 은허(殷墟))을 아우르는 호칭으로, 중국 역사상 국가의 중심지인 수도로서의 역사가 깊은 지역을 뜻한다.
해마다 고도(古都)를 택해 열리는 중국고도학회(中國古都學會)의 회의가 이 7곳을 돌아가면서 열리고 있다. 이 학회는 중국 도시사 연구 방면에서 최대 규모의 학회로, 연간 잡지인 <중국고도연구(中國古都硏究)>를 간행하는 등 문화적 영향력이 상당하다.
현 시점에서의 중국 7대 고도의 권위는 안양, 카이펑, 뤄양, 시안, 항저우, 난징, 베이징 순으로, 뒤로 갈수록 권위가 높다.[1]
2. 선정 역사
중국의 대표적인 고도(古都)에 관한 논의는 1920년대에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시안, 베이징, 뤄양, 난징, 카이펑, 이렇게 해서 5대 고도가 선정되었다. 이들 도시들은 모두 수백 년 동안 수도였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2] 무엇보다 (단기간 수도, 임시수도급을 제외하면) 통일 왕조의 수도였던 도시가 이 다섯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5개 도시는 중국사를 대표하는 고도로 이견 없이 인정받았다.그런데 1930년대에 들어 5대 고도에 남송의 수도 항저우를 더해야 한다는 6대 고도설이 등장했다. 이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상당한 지지를 얻었고, 1988년까지 인정되었다. 이러한 6대 고도설이 제기된 배경은 남송의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거기다 당시 중일전쟁이 벌어지면서 이민족 왕조인 금나라와 원나라의 남침에 대향한 남송의 역사적 경험이 환기(즉 '일본군 = 여진 = 몽골, 남송 = 현재(1930년대)의 중국'이라는 인식)된 결과 한족 전통 문화의 근거지로서 항저우의 의미가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항저우가 들어가니까 다른 여러 도시들 중에서도 '아니 우리 도시 역사가 항저우보다 못한 게 뭔데?'하는 인식 하에서 '우리 도시도 고도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특히 그 선두에 선 것은 안양이었다.
명나라 주원장에게 반향했다가 초토화돼서 오늘날에는 별로 크지도 않은 이 도시가 '우리가 항저우만 못한게 뭐냐'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다름아닌 은허의 발굴 때문이었다. 1920~1930년대 베이징의 중앙연구원 주도하에 은허가 발굴된 결과, 안양은 단숨에 우리는 중화문명의 시초인 은나라의 수도라고 내세울 수 있게 되었고, 바로 이 점을 내세워서 '우리가 지금은 좀 초라하지만 수도였던 역사로 따지면 항저우에 못하지 않거든?'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 실제로 번영 기간과 별개로 역사 출발점은 안양이 6대 고도보다 더 빠르기에 이러한 주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제기된 7대 고도설은 1981년 상해 복단대학 역사지리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찬반양론이 이어지다가 결국 1988년 10월, 중국고도학회 제6차 대회가 안양시에서 열리게 되면서 공인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7대 고도라고 하지만 사실상 5대 고도 + 2라고 봐도 무방하다. 앞의 다섯 개는 대부분이 납득하지만 뒤의 두개는 아무래도 비슷한 격을 지닌 고도들이 여럿 있기 때문에...[3]
3. 각각의 도시 소개
3.1. 시안시 (장안)
자세한 내용은 시안시 문서 참고하십시오.장안이라고 불렸던 도시. 중국 고대~ 중세까지 가장 역사가 깊은 고도. 수도로서의 역사가 1000년을 넘는다.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어서 지금도 '장안의 화제가 되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
까마득한 주나라( 서주)시대의 수도였던 호경 때부터 수도로 이름을 올렸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최초의 통일왕조였던 진나라의 수도 함양도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4] 항우가 함양에서 벌인 신안대학살로 파괴해 버렸지만 초한쟁패 시기를 거처 천하를 재통일한 유방의 서한이 다시 장안으로 재건해 수도로 삼았고, 신나라 때도 이쪽이 수도. 동한이 세워질 당시 신나라의 왕망과 경시제, 적미군의 트리플 콤보로 또 한 번 초토화되면서 뤄양에 수도의 자리를 빼앗겼지만 이후에도 관서, 관중 지역의 중심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오호십육국시대에는 이 시기 서쪽 지역에 성립된 국가였던 전조, 전진, 후진의 수도였고, 북위 시절엔 약간 뒤로 밀렸다가 북위의 분열로 서위가 성립되면서 다시 수도가 되었다. 서위에서 북주까지 전한대 장안을 수도로 삼았으나 수나라때 수문제가 전한대 장안성에서 약간만 자리를 옮겨 대흥성을 쌓았고, 당나라 때 대흥성이 다시 장안으로 개칭되어 수-당 대 장안의 역할을 했다. 안사의 난 때에 대연 군에게 점령되었고 그 틈을 노린 토번군에게도 점령되었다. 황소의 난 시에 황소가 세운 대제의 수도가 되기도 하였다. 당나라가 망하면서 수-당대 장안성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이후 너무 오랫동안 땅을 혹사한 탓인지 지력의 쇠퇴가 겹치면서 다시는 수도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게 된다.
고대로부터 시작해 수 차례에 걸쳐 도읍이 된 곳이지만, 한편 왕조가 바뀔 때마다 수 차례 파괴되고 다시 지어지면서 그 때마다 실제 도읍의 위치가 조금씩 바뀐 곳이기도 하다.[5]
3.2. 뤄양시 (낙양)
자세한 내용은 뤄양시 문서 참고하십시오.중국 고~중세에 시안에 맞먹는 위상을 차지한 양대 고도. 이쪽 역시 시안과 마찬가지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다.' 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 한국에서 장안이 큰 수도의 관용구라면 낙양은 일본에서의 관용구이다.[6]
황하의 지류인 낙수가 남쪽에 흐르고 있어 '낙(洛)' 또는 '낙읍'으로 불리고, 도시의 입지가 워낙에 좋아서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때부터 주요 도시로 거론되던 곳. 서주의 수도 호경이 견융의 공격으로 쑥대밭이 되어 버리면서 동주가 이쪽으로 천도하여 춘추전국시대 명목상이나마 종주국인 주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서한 시대에도 유방이 처음에 낙양을 수도로 삼으려 할 정도였고, 동한은 아예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동탁의 천도 과정에서 쑥대밭이 되어 한나라 마지막 수도의 자리를 쉬창에게 내어주었지만, 조조는 이 지역을 꾸준히 복구했고, 선양을 통해 위나라가 세워진 이후 조비가 복구한 낙양을 다시 수도로 삼았다. 이후 서진까지 이어진다.
오호십육국시대 초기 수도로 번창하던 낙양은 다시 이민족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낙양은 대도시 중 한곳으로, 몇번이나 동진의 북벌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북위가 선비족의 한화정책을 밀어붙이는 와중에서 낙양은 또다시 수도로 주목받게 되었고, 효문제에 의해 이전보다 더 큰 대도시로 확충되어 수도가 되었다. 이후 북위가 분열되고, 시안을 수도로 한 수나라에 의해 재통일되었지만 여전히 낙양은 제2수도, 즉 '동도'로 불리며 종종 황제와 조정이 이동하여 정무를 보기도 하였다. 측천무후가 일시적으로 당나라를 멸하고 세운 무주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안사의 난 때에 안록산이 세운 대연의 수도였으며 이후 오대십국시대에 후량은 이 지역을 서도하남부로 삼고 제2수도로 중시하였다. 후량을 멸망시킨 후당도 이 곳을 수도로 삼았다. 하지만 이 때를 마지막으로 이 지역은 수도가 되지 못한다.
3.3. 베이징시 (북경)
자세한 내용은 베이징시 문서 참고하십시오.중국 근세~현대까지 가장 수도로서의 역사가 깊은 곳이다. 10세기 이전의 중국사를 시안과 뤄양이 주도했다면 13세기 이후의 중국사는 베이징의 시대였다.
춘추전국시대 전국칠웅의 일각인 연나라의 수도였던 계, 또는 연경이라고 불리면서 주요 도시로 대두했다. 이후 전연, 후연, 북연 등 동북쪽에 자리잡은 왕조들이 이 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그래도 이 시기까지는 아직 지나치게 동북쪽으로 몰려 있고 하북을 넘어선 지역과의 연계망이 원활하지 않아 통일 제국의 수도로서 적당한 편은 아니었으나 수양제가 이 지역을 대운하의 북쪽 종점으로 삼으면서 여타 지역과의 수송, 통신망이 갖춰지게 되었다. 당나라 때도 동북쪽 방어의 핵심 거점으로 중요시되었고 안록산의 난 당시 안록산의 핵심 거점도 이곳.
오대십국시대를 거치면서 이 지역은 연운십륙주에 속하여 요나라에게로 넘어갔고, 마찬가지로 5경 중 한곳이자 매우 핵심적인 지역으로 중요시되었다. 북송은 어떻게 해서든 여기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매번 실패. 이후 금나라가 들어서면서 화북까지 빼앗긴다. 금나라는 이 지역을 수도로 삼아 중요시하여 동북변 관리의 중추로 삼았다. 그러나 이렇게 남북 대치형국이 펼처지면서 수양제의 대운하로 구축되었던 연계망이 끊겼다.
이 연계망을 다시 잇고, 베이징을 완전한 수도로 만든 게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였다. 원나라는 대운하를 철저하게 복구하여 강남(중국)의 물자를 운송할 체계를 완성했고, 베이징( 대도(大都))을 기점으로 중국 전역을 연결하는 역참제도를 완비하여 베이징을 북부의 중심도시에서 중국 전체의 수도에 걸맞은 도시로 부흥시켰다.
이렇게 수도로 완비된 것을 이후 중국 통일국가인 명나라, 청나라도 아주 잘 써먹었고, 신해혁명 이후에도 중국의 수도하면 베이징으로 인식될 정도였으며, 오늘날까지 중국의 수도로서 존속하고 있다. 다만 근대 중국은 군벌의 전국시대였으며 중화민국 시절에는 북경이 아닌 타 지역이 수도였던 적도 있기는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북경을 수도로 정하면서 현대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3.4. 난징시 (남경)
자세한 내용은 난징시 문서 참고하십시오.강남(중국) 정권의 고도.
최초로 이 지역의 이름이 거론된 건 진시황의 천하 순행 시기. 진시황은 이 지역에서 제왕 의 기운이 느껴진다면서 그걸 파괴하기 위해 소나무를 빽빽히 심고 '금릉(金陵)'이라 불리던 이곳을 '말릉(末陵)'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이 지역이 수도가 된 것은 삼국시대(중국) 손오에 의해서이다. 손권은 이 지역을 수도로 삼고 이름도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의 건업(建業)으로 바꿨다.
이때부터 난징은 강남(중국)에 세워진 한족 왕조인 육조시대의 주 무대가 되어 역사에 오르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피휘를 위해 건강(建康)이라고 이름이 개칭된다. 그리고 통일왕조인 당나라 시기에 이름이 다시 금릉(金陵)으로 원상복귀. 오대십국시대에는 십국에 속하는 오와 남당의 수도였다.
14세기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웠을 때 최초의 수도를 이곳으로 잡았다. 이때 베이징을 '북경'이라고 부르면서 이 지역이 자연스럽게 '남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영락제가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제2수도가 되었고, 이후 북경이 완전한 수도로 확정되면서[7] 수도의 자리에서 밀려난다.
이후 남명이 이 지역을 기점으로 버텨보려고 했지만 결국 몰락. 그래도 대도시는 대도시라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혼란기때 난징을 점령하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남경정부가 몇 번 성립되었던 적이 있으며, 북벌을 끝낸 장제스가 중화민국이 수도로 정한 곳도 난징이다. 중일전쟁 당시 난징대학살로 대표되는 큰 피해를 입은 곳이기도 하다.[8] 1949년 새로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이 베이징에 정도하면서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3.5. 카이펑시 (개봉)
자세한 내용은 카이펑시 문서 참고하십시오.오대십국시대~ 북송의 수도이자 중국 중세사의 중심지. 잠시 금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다. 옛 이름은 대량, 변, 변량, 변경으로도 불렸다. 세간의 명칭은 그러했지만 정식 이름은 송나라 때에도 개봉 즉 카이펑이었고 마치 우리의 서울특별시처럼 북송 당시의 공식 명칭은 동경 개봉부였다. 주요 도시를 마치 지금 중국의 4 직할시처럼 지정했던 송, 요, 금, 발해의 5경제를 반영한 명칭이다. 드라마 판관 포청천의 오프닝 곡에서 "카이펑 여우거 빠오칭티엔"이란 가사가 고증 오류가 아님을 알려준다. 몰락과 중흥을 자주 반복했다.
원래 춘추전국시대 전국칠웅 중 하나인 위나라의 수도였다. 이후 진시황의 초토화 명령 때문에 몰락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 천 년이 흘러 수나라 때 다시 복구된다.
당나라를 멸망시킨 주전충의 봉지가 이곳이었기 때문에 주전충은 후량의 수도를 카이펑으로 잡았다(동도개봉부). 이후 후당 시대에 잠시 낙양이 수도가 되었으나 다시 카이펑이 수도가 되었고, 이는 북송까지 이어진다. 특히 북송 시절에는 불야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인구 백만을 넘긴 세계 최대의 메트로폴리스로서 번영했다. 그러나 북송이 정강의 변으로 멸망하면서 그 지위를 상실하며 쇠퇴기를 맞이한다. 금나라 멸망 직전에 몽골의 침입을 피해 아예 베이징과 그 이북을 포기하고 이곳으로 천도하며 약 20년 간 금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금나라 멸망 이후 다시는 과거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게 되며 쇠퇴해 현재에 이른다.
지리적으로는 장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 남부 구간의 북쪽 종점이고, 황하에서 베이징까지 이어지는 대운하 북부 구간의 출발점이라는 위치를 지닌다. 광활한 평야라 방어에 취약점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수도가 될만큼 도시가 번창한 건 이 때문.
또한 고대사의 중심지인 시안/뤄양과 근세 이후의 중심지인 베이징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이를 두고 관중에서 화북으로의 이동하는 과도기로 카이펑 시기를 바라보기도 한다.
3.6. 항저우시 (항주)
자세한 내용은 항저우시 문서 참고하십시오.남송의 수도. 진나라에서 군현제를 실시하며 회계군 전당현(錢唐縣)으로 불렸다가, 양(梁)나라 시기에 현에서 군으로 승격해 전당군(錢唐郡)으로 불렸고 수나라 때는 다시 격하되어 항주(港州) 전당현으로 불렸다가, 당나라 때 唐(당)이라는 글자가 국호와 겹친다고 해서 한자만 바꿔 전당군(錢塘郡)으로 불렀다. 최초로 이 도시를 수도로 삼은 국가는 오대십국시대 국가 중 하나인 오월국(吳越國)이었고 이후 남송 시대에는 임안(臨安)으로 불렸으며 마찬가지로 수도로 삼았다. 북송 시절 개봉 못지 않게 번영하였고 인구 역시 100만에 육박하는 대도시였다. 그러나 원나라에 의해 정복된 이후 마찬가지로 과거의 영광을 상실했고 현대에는 지역 내 패권 역시 상하이에 빼앗겼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앞선 5개 고도에 비한다면 격이 좀 떨어지는 감이 있다. 통일왕조의 수도였던 적이 없단 점에서 7대에 끼지 못하는 청두, 정저우와 다를 바 없지만, 남송을 고평가하던 근현대 사관에 의해 격상된 케이스다. 다만 시민들의 역사적 자부심은 그에 뒤지지 않는 듯.[9] 남송의 수도로 번창했으며, 지리적으로는 대운하의 남쪽 종점이라는 장점이 있다. 난징보다 약간 남쪽에 위치.
3.7. 안양시
자세한 내용은 안양시(중국) 문서 참고하십시오.상나라의 수도로 번영했고, 이후에도 주요도시로 거론되었다.
은허의 발굴로 이 지역이 상나라의 수도임이 확정되면서 7대 고도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은허 발굴 이전까지 사실상 상나라의 수도로 인식되던 뤄양은 그 지위를 빼앗겼다(...).
4. 그 밖의 고도들
4.1. 업성
자세한 내용은 업성 문서 참고하십시오.하북평야의 중심에 위치하여 위진남북조 시대에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한복과 원소가 각각 본거지로 삼았으며, 조조가 원소를 멸망시킨 뒤(204년) 위공(魏公)에 오르자 허창을 떠나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다. 황제가 있는 허창(당시 이름은 허도)은 상징적인 도시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뤄양의 압도적인 위상에 밀릴 수밖엔 없었고, 위나라가 건국된 후 수도는 뤄양이 되었다.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에도 후조와 전연의 수도로 번성을 이어갔다. 북위도 업으로 천도하려 한 적이 있고, 북조의 동서 분열기에 관중 지방 (서위 & 북주) 세력은 장안, 관동 지방 ( 동위 & 북제) 세력은 업에 수도를 두었다.
하지만 수나라- 당나라의 통일제국이 들어서자 관동의 중추지인 업성보다 옛 전통 도읍지인 장안, 낙양으로 정도하면서 업성은 지역도시로 전락했다. 홍수만 나면 업성 전체가 물바다인 등 수공에 취약해서였고, 수문제의 선양에 반발한 울지형이 업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해 성이 파괴되었다.
다만 안사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가 대연의 수도를 낙양에서 업군으로 옮기는 기적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사명이 다시 당에 반란을 일으켜 안경서의 연 세력을 몰아내었고 업군도 함께 다시 몰락하였다.
항저우만큼 7대 고도의 자격은 있으나 현재 도시가 사라져서
4.2. 청두시 (성도)
자세한 내용은 청두시 문서 참고하십시오.쓰촨 (사천) 분지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삼국지 유비의 촉한, 5호 16국 초창기의 성한, 후촉, 원나라- 명나라 교체기 군벌시대 당시에 장헌충이 세운 대서 등의 수도였다.
국공내전 당시 중화민국의 마지막 임시수도였다. 결국 청두가 함락되기 직전 국민당은 국부천대를 하게 된다.
통일 제국의 수도였던 적은 전무하지만 아무래도 한자문화권 전역에 흘러 넘쳐나는 삼국지 팬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역사 도시. 청두 사람들의 역사적 자존심도 다른 7대 고도 못지않아서, 청두 시내에 가 보면 실크로드의 시작점을 장안에서 서남쪽으로 뚝 꺾어서 성도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그려놓은 관광안내도가 있었다고 한다. 실크로드의 어원이 된 당대의 주요 거래품인 비단이 바로 성도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10][11]
4.3. 정저우시 (정주)
자세한 내용은 정저우시 문서 참고하십시오.7대 고도에 하나를 더해서 8대 고도라고 하면 여기가 들어간다.
신석기 시대부터 주거 흔적이 확인되며, 상나라 시대부터 도시가 세워졌다가 원래 섬서성에 있던 정나라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신정(新鄭)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후 전국시대 초기에 한나라가 정나라를 멸망시키고 신정으로 수도를 옮긴다.
오랜 역사로는 시안이나 안양, 뤄양에 전혀 밀리지 않는 정저우의 치명적인 단점은 통일 왕조의 수도였던 것이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각각 정나라와 한나라가 도읍으로 삼은 것이 끝이다. 위에 보면 알겠지만 주위에 있는 뤄양은 통일 왕조의 수도를 여러 번 해봤고 안양은 상나라의 수도였으며 카이펑은 북송의 수도였고 오대십국시대에도 수도로 삼은 왕조가 존재했고 심지어 남쪽에 있는 쉬창도 후한의 수도를 해봤는데 정저우는 그조차도 없다. 다만 여기 나열된 도시들 중에서 가장 교통이 좋고 주위에 소림사를 비롯한 유적지가 많아서 방문하기 좋다는 장점은 있다.
4.4. 충칭시 (중경)
자세한 내용은 충칭시 문서 참고하십시오.춘추전국시대에는 파(巴) 지역이었고, 한나라 때에는 익주(益州)에 속하다가 삼국시대에는 유비가 세운 촉한의 강주였다. 유비가 세상을 떠난 백제성이 있는 곳도 충칭시이다. 몽골-남송 전쟁 중 하나인 조어성 전투도 충칭시 허촨구에서 벌어졌다. 1259년 조어성 전투 이후 장각의 지휘 하에 원군의 공격에 계속 버티다가 1279년 수장 왕립이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12] 원나라 말기인 1362년에는 명옥진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 하(夏)나라를 세우고 잠시 이 지역을 지배하기도 한다.
원나라- 명나라 교체기 시에 명하의 수도였고 이후 중일전쟁 시에 중화민국의 임시 수도였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일전쟁 당시 마지막으로 옮겼던 장소이기도 하다.
4.5. 다퉁시 (대동)
자세한 내용은 다퉁시 문서 참고하십시오.현대의 다퉁은 특색 없는 공업지역으로 보이기 쉽지만 북위 시대에 수도(옛 이름은 평성)였던 곳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윈강석굴 등 중세 중국의 찬란한 불교 유산이 대부분 이때 지어졌다. 수도였다보니 도시 자체에도 성곽들이 남아있고 최근에는 이 도성에 대한 정비공사가 한참 진행중이다. 그 밖에도 관광도시로의 탈바꿈을 모색하듯 관련 역사관광 시설들이 정비, 재개관 중인 곳이 많다.
청나라 이전까지는 만리장성의 바로 남쪽이라 중요한 유목민들을 막는 북방 군사 요충지였다. 내몽골자치구와 맞닿는 지역 근처만 가도 명나라 대의 장성이 남아있으며 곳곳에 명, 청대의 봉수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후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절에도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진북자치정부의 수도가 되었다.
4.6. 한단시 (대명부)
자세한 내용은 한단시 문서 참고하십시오.춘추전국시대 조나라의 수도. 한단지몽, 한단지보 고사의 유래가 되는 도시다.
신화시대에 여와가 한단의 고중황산(古中皇山)에서 최초로 사람을 빚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역사에는 죽서기년에 처음 등장한다. 죽서기년에서는 제신이 한단에 별궁별관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위나라(衛)의 수도로 시작하여 조나라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시내 남서쪽 4km에 위치한 조왕성(趙王城)과 한나라 때의 번국인 조나라의 궁궐 유적이 남아있어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끈다. 시내에 가면 조나라의 중흥을 만든 조무령왕의 커다란 석상과 호복 도입을 기념하기 위한 호복을 착용한 기마무사상이 서 있다.
기원전 260년 진나라가 조나라군을 장평대전에서 박살내고 한단성을 포위했으나, 한단성은 매우 견고했기 때문에 진나라도 결국 함락하지 못했다. 이렇게 한단성은 전국시절 당시 여러 나라들의 침략을 저지한 난공불락의 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기원전 228년 왕전이 지휘한 진나라군에 함락되었고 조나라는 멸망한다.
북송 대에는 대명부로 불렸는데, 정강의 변 이후 금나라가 세운 괴뢰국인 제나라의 수도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역사의 뒤켠으로 물러난 작은 도시로 전락하였고, 역사에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의외로, 중국의 여러 도시들 중 고대로부터 단 한 번도 이름이 변하지 않은 얼마 안 되는 지명 중 하나이다. 좀 유명한 도시들은 황제의 기분대로 이름이 자주 고쳐졌는데, 한단은 춘추전국시대에 처음 기록에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지명이 변경되지 않았다. 한단 이외에는 그나마 낙양이 역시 긴 역사 내내 같은 이름을 유지했지만 처음에는 낙읍 등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였다.
5. 기타
중국 내에는 한족 왕조 계통의 수도가 아닌 고도도 여럿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만주족 계통 후금의 수도로 선양고궁이 있는 선양시, 만주국의 수도로 위만황궁이 있는 창춘시, 티베트의 수도로 포탈라궁이 있는 라싸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었던 지안시 등이 있다. 이런 도시들도 역사적인 장소나 볼거리는 많지만, 중국 7대 고도는 중국사 주요 왕조 기준이기 때문에 이 도시들이 들어가지 않는다.
[1]
역사성이 이 순서라기보단 현대의 번영에 따른 권위에 가깝다.
[2]
가장 수도로서의 역사가 짧은
카이펑도 후량, 후진, 후한, 후주,
북송,
금나라 합쳐 231년 동안 수도였고, 그중
북송은 통일 왕조였다. 가장 역사가 긴
시안시의 경우 수도의 역사가 무려 1000년이 넘는다.
[3]
프로파간다 격으로 선정된
항저우는 물론,
상나라의 수도라는 네임밸류를 가진
안양도
주나라의 수도였던
시안,
뤄양과 포지션이 일부 겹친다. 이는
주나라도 본격적인 중원국가란 점에서 의의가
상나라 못지않기 때문이다. 사실 세세히 따지고 보면 난징과 카이펑 역시 시안, 뤄양, 베이징에 비하면 아무래도 격이 좀 밀린다.
[4]
호경, 함양, 후한 시기의 장안, 당나라 시기의 장안(현재의 시안)은 모두 관중 평야 지역에 모여있다 못해 서로 이웃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같은 지역에서 성 위치만 뱅글뱅글 옮겨다닌 수준. 서울로 따지면 한양도성과 위례성, 행주산성, 북한산성, 남한산성 같은 모양새인데 중국 대륙 스케일상 이보다는 좀 떨어져 있다.
[5]
진나라의 함양과
한나라의 장안,
수나라/
당나라의 장안은 각각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 진 함양은 사실 시안과 별개의 도시인 셴양이며 한 장안 역시 당 장안으로부터 서북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다. 진한 대의 장안에 비해 수당 대의 장안이 동남쪽으로 멀찍이 옮겨져서 건설된 것.
[6]
헤이안 시대 중후반기로 가면 낙양의 '낙(洛)'은
교토를 의미하는 말로도 쓰였다. 즉 한국어의 '
서울'에 해당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던 것.
[7]
다만 한 번에 완전히 바뀐 건 아니고 이후 일정 기간 '경사'(정식수도), '행재'(임시수도)로 바뀌길 거듭하긴 했다. 물론 실질적 수도는 북경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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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의
국부천대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명목상 수도로 난징을 내세웠지만 21세기 들어서는 실질적 수도인
타이베이를 점차 중시하는 분위기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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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범유행 속에 등교수업을 시작한 학교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한다면서 좌우로 50cm씩 1미터나 뻗어있는 독특한 송나라 스타일 관모를 쓰고 수업하는 것이 화제가 되었는데, 이는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신하들이 조회 시간에 귓속말로 쑥덕거리는게 꼴뵈기 싫다고 조정 내 거리두기(...)를 강제하고자 도입하여 송나라를 상징하는 유니크 아이템이 되었던 물건이다. 역사 선생님 1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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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의
만화 십팔사략에서 해당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고우영 작가가 청두 시내에서 직접 보고 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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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코에 걸면 코걸이인 게, 실크로드의 또다른 주요 거래품인 도자기는 강남의
경덕진이나
한반도에서도 많이 생산했기 때문에 이런 논리라면 그쪽으로 연장해 선을 그을 수도 있다. 실제로 한국 박물관의 지도는 그런 식으로 그린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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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각은 1280년 원으로 압송되던 와중 측간에서 자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