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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左芬(? ~ 300)
서진의 인물이자 좌사의 누이동생으로 자는 난지(蘭芝).
천하의 명문장 삼도부(三都賦)[1] 를 편찬한 당대의 문장가 좌사의 여동생이다.
2. 생애
청주 제국 임치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해 문장을 잘 지으면서 명성이 좌사에 버금갔으며, 사마염이 좌분의 문필과 재능이 뛰어나단 소문을 듣고 후궁으로 들였으며, 272년에 수의가 되었다. 조서를 받들어 걱정에 관한 문장을 짓고 완성해 이사부라 이름을 붙였다.이후에 귀빈(貴嬪)에 책봉되었고 용모가 못생겨서[2] 호색한으로 유명했던 사마염의 총애를 받지는 못했지만 재덕(才德)으로 예우를 받았다. 몸이 약하고 걱정이 많아 감상에 젖어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항상 누추한 방에 살아서 사마염이 매번 화림(華林)에서 놀 때마다 항상 수레를 돌려 좌분을 보러왔다. 문학이론을 이야기하게 되면 답변이 맑고 아름다워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찬미했다.
274년 7월에 무원황후가 죽자 뇌문을 지었고 276년에 무도황후를 들이면서 사마염이 송을 짓도록 하자 글을 지었으며, 이후 만년공주가 죽자 사마염이 뇌문을 짓게 하자 그 문장이 화려했다.
사마염이 좌분의 글을 중하게 여겨 매번 공물이나 신기한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조서를 내려 부송을 짓게 했고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은사를 받았으며, 좌사에게 답하는 시, 편지, 부송 수십 편이 있었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20개 넘는 시, 노래 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전해지는 내용에 따르면, 사랑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고 슬픔이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녀가 못난 외모와 연약한 몸 때문에 황제의 총애를 받진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좌분은 재능있는 여인이지만 황제의 문학적 소품으로 살다 간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좌분이 항상 누추한 방에 살았다는 것은 황제의 후궁들에게 주어진 처소의 차등 때문에 나온 말인데, 황제가 총애하는 애첩일수록 더 좋은 집이나 방에 살 권리가 있었다. 좌분이 자연스럽게 누추한 방에 살았던 것은 총애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좌분의 묘지명에 가족관계가 나오는데 사마염과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다.
[1]
당시 사람들이 이 삼도부를 베끼느라
낙양의 종이 값이 폭등하기도 했다.
[2]
오빠
좌사도 못생겼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