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클리퍼드 호지스 리 John Clifford Hodges L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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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7년 8월 1일 |
미국 캔자스주 정션시티 | |
사망 | 1958년 8월 30일 (향년 71세)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요크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중장 |
복무 기간 | 1909~1947 |
학력 |
정션시티 고등학교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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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캔자스주 정션시티에서 태어났고 성장했다. 고등학교 성적 2등으로 졸업했고 당시 하원의장이였던 찰스 F. 스콧의 추천을 받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09년 12등을 기록하고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1] 초임지는 디트로이트였고 이후 파나마 운하를 거쳐 록아일랜드, 피츠버그에서 근무했고 포트 레번워스에서 3공병대대 소대장으로 복무하다가 중위로 진급했다.진급 후 주방위군 교관으로 복무했으며 1912년엔 전쟁부에서 1913년부터 필리핀, 웨스트버지니아에서 복무하다가 1916년 대위로 진급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제89보병사단에 배속되었고 소령, 1918년 중령으로 진급했다. 사단 참모로 복무하며 랑그레에서 공을 세워 은성훈장을 수여받았고 생미에헬 전투에서 또 공을 세워 훈장을 수여받았다. 전후 훈공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라인란트에 진주했으며 귀국 후에도 군복무를 지속하다가 미시시피주 빅스버그에서 근무하던 시절 1927 미시시피 대홍수가 발생해 대민지원에 힘썼다. 1931년 전쟁대학에 입학했고 32년 수료했다. 이후로도 공병으로 대민지원에 힘쓰다가 1940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포트 메이슨에서 지원부대를 담당했으나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에게 경고를 받았다.
포트 베닝에서 제2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고 부임하자마자 진행된 첫 훈련에서 부대원들이 미흡한 모습을 보이자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부대원들의 전투력을 향상시켰고 이에 레슬리 맥네어가 칭찬해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유럽주재 연합군최고사령부 배치에 큰 기여를 했으며 1943년 횃불 작전에서 병참쪽을 총괄했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후 연합군최고사령부 병참을 담당했다. 하지만 마켓 가든 작전의 실패,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안트베르펜까지 보급선이 길어지고 병력 보충은 안되는 상황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흑인들을 보병병과에 정식적으로 투입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에 참모장이였던 월터 베델 스미스가 적극적으로 반발하며 다툼이 있었지만 아이젠하워의 동의로 흑인들이 전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했고 성과를 보이며 병력문제를 해결했다.
전후 프랑크푸르트, 이탈리아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47년 기자 로버트 C. 러크가 사병들을 사적으로 부려먹는다는 폭로를 했고 이에 감찰 결과 무혐의로 나왔다. 그해 중장으로 퇴역했고 1958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3. 여담
- 전쟁 당시 1943년 미 육군 영화에 출연해 흑인과 백인 군인을 동등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흑인 최초의 장성인 벤저민 O. 데이비스 시니어를 인종차별 조정 자문관으로 임명하고 인종갈등을 해소하려 노력했다.
- 성공회신자였다. 퇴역 후 성공회 평신도 조직을 이끌었다. 신앙심도 돈독해 별명이 Jesus Christ Himself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