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M. 랜드럼 Eugene M. Landr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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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유진 매뉴얼 랜드럼 Eugene Manuel Landrum |
출생 | 1891년 2월 6일 |
미국 플로리다주 펜사콜라 | |
사망 | 1967년 7월 24일 (향년 76세) |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 | |
복무 |
앨라배마 주방위군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소장 |
복무 기간 | 1909~1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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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플로리다주 펜사콜라에서 태어났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앨라배마 주방위군에 사병으로 입대해 제1연대 M중대 소속이 되었다. 1년 뒤 정규군으로 편입 후 해안포병으로 배치되었으나 얼마 안 가 보병으로 전환했다. 병장까지 진급 후 1916년 OCS를 수료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하와이에 있는 제20보병연대에 배치되었고 중위로 진급했다.1917년 필리핀에 있는 제43보병연대에 배치되어 로버트 K. 에반스의 부관으로 복무했으며 이후 러시아 내전 당시 시베리아 원정군으로 파견되었다. 귀국 후 대위로 진급했고 지휘참모학교, 육군참모대학을 수료했으며 1938년 중령으로 진급했다.
1941년 전시계급 대령으로 진급해 제3보병사단 참모장이 되었고 전쟁이 발발하고 준장으로 진급했다. 부사단장으로 영전했다가 제7보병사단장이 되었다. (1차 사단장 직) 알류샨 전역에서 공을 세워 육군, 해군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1943년 소장으로 진급하고 제87보병사단장이 되었다. (2차 사단장 직)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시점에서 J. 로턴 콜린스가 지휘하는 제7군단 소속으로 전투력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된 예하 제90보병사단장으로 (3차 사단장 직) 전임자인 제이 W. 매켈비와 교대해 사단을 지휘했는데 그의 부임 후에도 사단엔 뚜렷한 개선이 없었고 노르망디의 내륙 생울타리 전투들에서 7월에 발생한 사단의 사상자가 5천명이 넘었고, 작전을 두고 부사단장과 생긴 갈등 끝에 상부의 동의 하에 해당 인물을 강등시키고 쫒아내는 등 내부적 문제의 매끄러운 해결과 봉합을 하지 못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랜드럼에게 실망한 군 상부에선 7월 말에 그를 해임하고 미국 본토로 소환했다.
미국으로 보내진 후 로버트 L. 스프레진스의 후임으로 제71보병사단장이 되었고 (4차 사단장 직) 사단을 훈련시켜 유럽으로 보냈지만, 전선에서 해임된 경력때문인지 사단의 파병 직전 이임되어 훈련소장 직을 맡아 본토에 머물며 종전을 맞이했다. 종전 후 원 계급 대령으로 복직했고 이후 유럽에서 복귀해 미국 본토의 군관구 부대가 된 제5군의 참모가 되었다가 참모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사령관은 월튼 워커로 랜드럼은 대령으로 원복했으나[1][2] 그에게 장군 호칭을 항상 붙여 존중했다. 야전군 참모장의 계급은 준장, 소장 급이었으나 랜드럼이 전직 장성이었던 것과 워커의 신임 속에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지휘관으로선 능력이 부족했을진 몰라도 참모 역할은 평균 이상의 능력을 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워커가 1948년에 제8군 사령관이 되었을 때 랜드럼은 워커를 따라 제8군 참모장으로 일본에 부임했고 1950년에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워커를 보좌해 한국에 배치되어 제8군의 한국 배치와 작전의 전반 사항을 감독했고 워커가 전선 시찰로 바빴을 때 후방의 일을 랜드럼에게 일임하고 낙동강 방어선 전투 당시 전선 상황이 급박할 때 워커는 매일 일상적으로 랜드럼에게 오늘 사용할 수 있는 예비 부대가 얼마나 되는지를 질문할 정도였다. 전선 상황이 안정되고 인천상륙과 반격작전이 진행될 무렵 상부에선 랜드럼의 연령을 이유로 참모장 직을 다른 장성에게 이임했으나 워커의 참모로 계속 남았다. 청천강 전투 직후인 연말에 워커가 교통사고로 하직하고, 후임자인 리지웨이는 조직 개편을 통해 참모 및 지휘관을 대거 교체하면서 랜드럼도 직에서 물러났는데 마침 연령정년이 눈앞이라 1951년 연초에 본토로 귀국한 그는 그대로 퇴역하면서 2차대전 당시 계급이었던 소장으로 진급했다. 군에서 은퇴한 랜드럼은 캘리포니아주를 거쳐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했고 1967년 사망했다.
[1]
2차대전 종전 후 미국 육군 장성들은 전쟁 중의 행적에 따라 전시 계급을 그대로 유지되거나, 소폭 강등을 통한 전시 계급의 유지가 가능했는데 전시 계급의 완전 삭제 등을 겪고 평시 계급 상의 영관급 장교로 강등된 이들의 경우 대개 전쟁 중 논란과 문제가 있었고 이것은 흠결로 작용해서 전후 군 구조조정에 영향을 준 것 같다.
[2]
여담으로 전후 전역 장성의 일부는 전역 전날, 전시 계급장이 삭제돼 평시 계급으로 전역한 후 1948년 여름에 의회에 입법된 미군 예비군 개편 관련 법안을 통해 2차대전 당시의 전시계급을 예비역 계급으로 재진급했다. 다른 일부는 전시 계급 채로 전역해서 전역자에 대한 처분도 경우에 따라 달랐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