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제4대 군사경찰사령관 에드윈 P. 파커 주니어 Edwin P. Parker J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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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드윈 피어슨 파커 주니어 Edwin Pearson Parker Jr. |
출생 | 1891년 7월 27일 |
미국 버지니아주 위스빌 | |
사망 | 1983년 6월 7일 (향년 91세) |
미국 워싱턴 D.C.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소장 |
복무 기간 | 1912~1953 |
학력 |
웨스턴 고등학교 조지 워싱턴 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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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버지니아주 위스빌에서 태어났고 1912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OCS과정을 수료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베라크루스 원정대에 참가했고 파나마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1918년 독일이 항복하고 프랑스로 건너왔으며 라인란트에 진주했다.귀국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하버드 대학교에서 군사학교관으로 복무했고 포병학교 OAC를 수료했다. 뒤이어 지휘참모학교를 수료하고 당시 야전포병사령관 해리 G. 비숍의 명령으로 야전포병잡지를 편찬했다.
1935년 중령으로 진급했고 포트 브래그에 있는 제83포병연대 2대대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육군전쟁대학을 수료했다. 1941년 전시계급 대령으로 진급했고 10월 준장으로 진급했다. 미국이 2차 대전에 개입하자 1942년 소장으로 진급해 제78보병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1] 이후 영구계급 대령으로 진급했다. 또한 포병훈련사령관도 겸직하고 있어 포트 브래그에서 40,000~50,000명의 포병을 양성했다.
이후 국내에 진주하며 1944년 필라델피아 파업의 진압에 나서기도했다. 그 해 10월 유럽전선으로 투입되어 제9군 소속으로 벨기에에 진주했다. 이후 제1군 5군단소속으로 편제되었고 벌지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독일본토를 넘어 독일군과 전투를 치렀고 라마겐 전투에서 루덴도르프 다리를 점령하는데 기여했다. 이후 루르 지역으로 진군해 부퍼탈을 장악했고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독일을 돌아다니며 포로수용소를 해방시켰고 1946년 레이 바커에게 사단을 인수인계했으며 제23군단장이 되었다. 이후 제5군을 거쳐 1948년 군사경찰사령관이 되었다. 1953년 퇴역했다.
퇴역 후 워싱턴 DC에 거주하다가 1983년 심혈관질환으로 사망했다.
3. 여담
- 아들을 4명 뒀는데 장남인 해리는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대령까지 진급했으며 차남 에드윈 P. 파커 3세는 버지니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해병 항공대에 소속되어 베트남전에 참전했으며 대령까지 진급했다. 4남 니콜슨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대령까지 진급했다.
[1]
당시 부사단장은
윌리엄 켈리 해리슨 주니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