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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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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대통령 문장.svg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요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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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John Adams
파일:John_Adams.jpg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735년 10월 30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브레인트리
(現 미국 매사추세츠 주 브레인트리)
사망 1826년 7월 4일[1] (향년 90세)
매사추세츠 주 브레인트리
재임기간 초대 부통령
1789년 4월 21일 ~ 1797년 3월 4일
제2대 대통령
1797년 3월 4일 ~ 1801년 3월 4일
서명 파일:존 애덤스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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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존 애덤스 시니어 (1691 ~ 1761)
어머니 수잔나 보일스턴 애덤스 (1708 ~ 1797)
형제자매 남동생 피터 보일스턴 에덤스
남동생 엘리후 에덤스
배우자 애비게일 애덤스 (1744 ~ 1818)
자녀 장녀 애비게일 애덤스 스미스 (1765 ~ 1813)
장남 존 퀸시 애덤스 (1767 ~ 1848)
차남 찰스 애덤스 (1770 ~ 1800)
삼남 토마스 보일스턴 애덤스 (1772 ~ 1832) 외 2명
학력 하버드 대학교 ( B.A.)
하버드 대학교 ( M.A.)
종교 회중교회 유니테리언[2]
신장 170cm
문장 파일:John_Adams_Arms.png }}}}}}}}}
파일:president-john-adams.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3. 선거이력4. 기타5. 소속 정당6. 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토머스 제퍼슨은 아직 살아있는...
Thomas Jefferson still surv...
애덤스의 유언.[3]
권력 견제 없이 주어져선 안된다.

미국의 제2대 대통령이자, 미국의 초대 부통령. 세계 최초의 부통령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변호사로도 활동했다. 그는 고집불통 성격에 자기보다 만만하거나 유능한 누구에게나 독설을 내뱉는 등 주변이 온통 적이었다. 자신의 신념에 강직하고 청렴했지만 대통령 시절 국민을 괴롭히는 악법을 만들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자신의 대통령 임기종료 직전에 다음 대통령 제퍼슨을 크게 엿먹이는 정책을 시행하는 등 여러 구설수를 남겼다.

2. 생애

존 애덤스는 1735년 10월 30일 매사추세츠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재정적으로 안정되었다. 아버지는 농부이자 회중교회 집사였다. 의무교육이 존재하지 않던 당시 많은 남자 아이들처럼 애덤스는 데임 스쿨에 다녔다. 데임 스쿨은 마을의 여성이 자택에서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 주는 곳이었다. 아들을 성직자로 키우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는 이어서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라틴 스쿨에서 수학하고 15살에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성직자가 되는데 관심이 없던 애덤스는 대학 졸업 후 라틴 스쿨에서 교사일을 하다 지역의 변호사 밑에서 1756년부터 3년 동안 법을 공부했다. 1758년 변호사로 개업했을 때는 1년동안 고객을 한명만 받을정도로 고전했지만, 1770년이 되면 보스턴에서 가장 잘나가는 변호사 중 한명이 되었다. 1764년에는 목사의 딸인 애버게일 스미스와 결혼했다.

변호사 시절에는 보스턴 학살 사건에서 시민들에게 총을 쏜 영국 병사들을 변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영국 병사들을 미국 내에서 변호해주려는 인물도 찾기 어려웠던 상황이었고, 실제로 이 때 영국 병사가 유죄로 처벌을 받았으면 영국 정부가 강경책으로 전환해 훨씬 일찍 무력개입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영국 병사를 정당방위로 무죄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주동자들을 숨기는 형태로 당시 과격파들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4] 훗날 존 애덤스는 이에 대해 "일찍이 조국에 바친 최고의 봉사 중 하나"로 이 행동을 꼽기도 했다.
파일:JohnAdams1785.png
1785년 영국 대사 시절의 애덤스[5]
존 애덤스는 알렉산더 해밀턴과 함께 미국 초기 연방주의자(federalist)들의 거두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작성할때 참여했던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의 정책은 연방정부의 권한 강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대통령 선거는 2등을 한 후보에게 부통령 직위를 주었고, 존 애덤스 다음으로 표를 많이 받은 사람이 그 유명한 공화주의자이자 훗날 애덤스 다음 3대 대통령이 되는 정적 토머스 제퍼슨이었기에, 애덤스의 집권 4년 동안 그는 제퍼슨파의 견제에 자기 마음껏 정부를 운용할 순 없었다. 재선도 왜곡 보도 등 토마스 제퍼슨 측의 정치적 공세에 결국 실패했다. 이런 정치적 앙숙 관계는 말년에 화해하기 전까지 이어진다.

한편, 당시 미국은 독립국이긴 했어도 아직은 땅도 지금 미국에 비하면 많이 좁고 인구도 건국 초 기준 250만 명 수준의 신생 국가라 유럽 국가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을 수준은 아니었는데, 때마침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전한 영국은 전쟁에 투입할 전력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같은 언어를 쓰는 미국 상선을 습격하여 배와 선원들을 자국 해군으로 강제로 편입시키는(...) 막장 행위도 종종 저지르자, 유럽 일에 끼어드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 미국은 프랑스에 특사를 보내 영국의 행위를 저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당시 프랑스 정계 실력자였던 탈레랑은 미국 특사들을 푸대접한 것은 물론 미국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

미국의 연방주의자들은 이러한 처사에 분노했고 영국 대신 프랑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프랑스를 상대할 국력도 안 됐을 뿐더러 미국 정부는 이 시기에 프랑스와 친하게 지내는 반역자들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외국인법을 제정했지만, 실제로는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었다. 이는 독립전쟁 당시 지원을 해준 프랑스를 영국보다 좋아한 데다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미국 정부의 권력 확대를 경계하던 공화주의자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행위로 비쳐진 건 당연지사. 결국 애덤스는 전쟁을 철회했고 연방주의자들도 애덤스에게 실망해 지지를 철회해 버려 재선에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애덤스는 자신의 정부에서 딴지 걸기 바쁘던 정적 토머스 제퍼슨이 편하게 대통령 임기를 보내게 할 생각도 없었다. 애덤스는 임기 종료 바로 전날 연방대법원 판사들을 전부 연방주의자로 앉혀버렸고 매버리 대 메디슨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한편 대법원장은 애덤스와 친했던 존 마셜이 차지했기 때문에 제퍼슨은 임기 내내 사법부의 견제를 받았다. 워싱턴 때부터 중립성을 엄중하게 지키던 미국 법원의 전통은 이때부터 확고해졌다.
파일:external/totallyhistory.com/Gilbert-Stuart-John-Adams-in-1826.jpg
1826년 사망 몇달 전
평생 토머스 제퍼슨과 정적으로 얽히고 설킨 관계였으며 한창 싸울 때는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서 서로 말도 안 하고 살았지만[6] 말년에는 화해를 했다고 하는데[7] 실제 화해였는지 알 수는 없다. 공교롭게도 둘은 같은 날, 그것도 미국 독립 50주년을 맞은 1826년 7월 4일에 사망한다.[8] 유언은 "토머스 제퍼슨은 아직 살아있...(Thomas — Jefferson — still surv — )"가 유명한데, 보다시피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죽었으며, 토마스 제퍼슨은 이 말을 하기 몇 시간 전에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향년 90세로 1826년부터 무려 175년간 최장수 대통령 기록을 가지고 있었으나[9] 2001년에 로널드 레이건한테 기록을 내어주었다. 현재는 제럴드 포드 - 조지 H. W. 부시를 이어 지미 카터가 이어가고 있다.

3. 선거이력

<rowcolor=#ffc224>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당선여부 비고
1788~1789 미국 대통령 선거 미국 [[연방당|
연방당
]]
- (--%, 34인) 부통령 당선(2위) 초선
1792 - (--%, 77인) 재선
1796 35,726 (53.4%, 71인) 대통령 당선(1위) 초선
1800 29,621 (39.4%, 65인) 낙선(3위) -

4. 기타

존 애덤스의 아들 존 퀸시 애덤스는 1825년에 제6대 대통령이 되어 미국 역사상 최초의 부자 대통령의 기록을 세웠는데 이때까지도 살아 있을 정도로 장수해서 아들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이 때 존 애덤스는 90세였고 아들 존 퀸시는 58세였다.[10] 또 상술했듯이 아들 퀸시 애덤스의 임기 때 사망했기 때문에 아들 애덤스는 본인의 임기 때 부친상을 맞게 되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노예제에 대해 가장 강경하게 반대했던 사람 중 한명이다. 살아생전 노예를 소유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노예제 폐지에 대해서는 내전이 날 수 있어서 없애지는 못하는데 싫어는 하며 끙끙댔던 기록도 있다.[11] 메사추세츠주는 1780년에 애덤스가 작성한 주헌법에 따라 노예제를 없애버리기도 했다.

고집불통이자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정적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없이 내뱉곤 했는데 조지 워싱턴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풍자한 적이 있다.
"워싱턴 씨의 특별한 지위(대통령직을 의미)는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하면 우선 키가 크지요.[12] 다른 유대인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서 선택된 유대 지도자와 마찬가지요.[13] 또한 버지니아 주 출생이오.[14] 버지니아산 거위는 모두 백조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리고 침묵할 때를 아는 천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소. 보다시피 난 워싱턴 씨의 재능을 이렇게 여러가지를 댔소. 읽기, 쓰기, 생각하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말이오."

두뇌의 명석함은 논외로 치고 워싱턴이 특별한 지위를 얻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는 풍자이지만 이쯤 되면 거의 용자 수준. 좀 나쁘게 말하면 사람들의 그에 대한 열광과 숭배가 과대평가됐다는 뉘앙스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자신의 의견과 맞지 않는 정책을 워싱턴이 수행하자 '그 망령난 늙은이!'라고까지 했던 적도 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워싱턴을 존경했고 영웅으로 봤다고 한다. 그러나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미국에서도 평가가 갈리는 편이다. #실제로 워싱턴은 내각 회의 등에 애덤스를 자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보다는 알렉산더 해밀턴 등 다른 인사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애덤스는 워싱턴에 대해 타인의 조언보다는 자신의 독단적 판단에 기댄다는 취지로 돌려깐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애덤스는 사실 자기 주변 사람 대부분에게 독설이나 돌려까기를 자주 시전했다. 그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예의를 갖춰 말한 건 아내 아비가일, 존 퀸시, 존 제이 및 존 마셜뿐이었다고 한다. 특히 공식 석상에서와 달리 사적 편지 등에서는 조지 워싱턴에게 무례한 언사도 종종 사용했다고 한다. 애덤스가 워싱턴을 공식적으로 칭찬할 때도 그는 워싱턴의 직무 수행능력을 극찬한 바는 없다. 오히려 칭찬 같지만 듣기엔 풍자로 볼 수 있는 모호한 언사를 썼다.

같은 연방주의 진영인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과는 임기 말년 즈음부터 사이가 크게 나빠져서 " 스코틀랜드 행상인의 후레자식", "복숭아나무 뿌리의 벌레처럼 뿌리를 갉아먹기 위해 어둠과 땅 밑에서 12년간 애를 썼고 그동안 그의 정적들은 물론 영국 상인에 빚진 채무자나 프랑스 고용인들의 도끼가 항상 나무 밑동을 쳐댔어도 나무는 쓰러지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함께 대륙회의에 참석한 존 디킨슨[15]을 "돈만 많고 천재성은 희귀한 자"라고 놀리기도 했다. 종합적으로 보면 그는 자기가 택한 소수 인원을 제외하면 모든 이를 모욕하며 적으로 돌리는 등 능력과 자질이 다소 부족했다.

이런 면모를 두고 당대의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애덤스는 분명 정직하고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그는 때때로 완전히 미쳐 버렸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사람을 가려서 미치는 성향도 있었다. 즉 맘놓고 모욕하기 좋게 만만한 사람에게만 미치는 모습이었다.

무능한데 야심만 많았던 호레이쇼 게이츠를 몰래 지원해 워싱턴을 내치려 했다는 설도 있다. 존 애덤스가 막역한 친구인 게이츠를 밀어서 워싱턴을 실각시키려고 했고 이걸 위해서 토머스 콘웨이라는 인물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후 대통령 선거때는 그렇게나 절친하던 게이츠를 배신하고 토머스 제퍼슨을 지지하는 등 뒤통수도 잘 치는 인물이었다.

종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유니테리언 계열이었다. 다만 이들 중 거의 유일하게 독실한 개신교(장로회)인이었다고 한다.[16] 하지만 생애 후반 칼뱅과 청교도 노선을 모두 부정하고 불신자의 영원한 형벌, 칼뱅의 예정설, 예수의 신성을 싸그리 부정하고 확고한 비삼위일체 기독교인 유니테리언 신자가 되었다. # 나머지 조지 워싱턴, 제퍼슨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은 무늬만 신자거나, 이신론자였다.

한반도에서는 이 사람 말기에 왕이 정조에서 순조로 교체되었다.

미국 대통령 인기 순위에서는 주로 무난한 중상위권으로, 그 엘리너 루즈벨트와 더불어 영부인으로서의 평가가 최상위권을 달리는 자신의 아내와 비교된다. 하필 앞뒤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순위 TOP 5 안에 자주 꼽히는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인 탓에 인지도 등에서 밀리긴 해도 애덤스도 대체로 무난한 평가를 받는 편이다. 이건 아들 존 퀸시 애덤스도 동일하지만 차이점이라면 아버지 애덤스는 가끔 상위권에 꼽히기도 하고, 아들 애덤스는 가끔 중하위권에 꼽히기도 한다는 점. 그리고 항상 아버지 애덤스가 아들 애덤스보다는 인기가 좋다(...).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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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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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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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매체에서의 등장

파일:external/soseriadosdetv.com/john-adams-06.jpg
(드라마 <존 애덤스>의 한 장면. 워싱턴의 취임식 장면이다. 앞쪽 오른쪽에 검은 옷을 입은 키 큰 남자가 조지 워싱턴. 바로 왼쪽에 있는 남자가 주인공 존 애덤스.)[17]

사실 워싱턴이나 제퍼슨에 비해 역사적 비중에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볼 시 저평가되는 인물이었지만, 2008년 방영된 7부작 드라마 〈존 애덤스〉에서 간지폭풍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로 재조명되었다. 연기파 배우 폴 지아마티가 주인공 애덤스를 맡아 열연. 그는 이 배역으로 제66회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드라마 속에서는 괴팍하고 성깔 있지만 원칙과 소신을 내세우는 강직한 면모가 매우 잘 드러난다. 죽기 직전에 한 유명한 말은 이 드라마에서 "토머스 제퍼슨은 살아남는구나(Thomas Jefferson survives)"이란 말로 나타낸다. 해당 장면. 작중 제퍼슨의 죽음도 함께 묘사된다.

이 드라마 속에서는 기괴한 노인 스타일로 등장하는 프랭클린과 냉철하고 지적인 제퍼슨도 볼거리. 로라 리니의 애비게일 애덤스 연기도 훌륭하다.[18] 리니 역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다. [2] 본디 개신교 분파 중 하나인 회중교회 신자였다. 하지만 생애 후반 칼뱅의 예정설, 불신자의 영원한 지옥 형벌, 예수의 신성을 모두 부정하고 비삼위일체 기독교 종파인 유니테리언 신자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청교도와 칼뱅의 신학적 노선을 모두 부정한 것으로 보인다. # # [3]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참고로 정치적 라이벌이자 말년의 동지이기도 했던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애덤스가 죽기 몇 시간 전에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제퍼슨은 유언으로 애덤스에 대한 특별한 언급도 없이 오늘이 4일이느냐고 물은 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4] 그래서인지 대체역사를 다룬 책 만약에에서 역사학자 토머스 플레밍은 만약 존 애덤스가 변론을 하지 않았다면 보스턴에는 강경대응에 나선 영국 정부가 파견한 군대가 깔렸을 것이고 당연히 보스턴 티 파티는 벌어질 엄두도 못내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했다. [5] 물론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한 건 1789년이므로 이 시절 영국 측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6] 애덤스는 변호사 시절의 언변으로 수려하게(?) 제퍼슨을 폄하하고, 당연하게 제퍼슨은 그런 아담스를 싫어했다. [7]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이것을 언급하며 해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다 늙은 애덤스와 제퍼슨을 2컷에 나눠그리며 애덤스는 "허무한 인생인데 왜 그리 미워했을까... 잘못했네..." 제퍼슨은 "미안허이... 나 부통령때 너무했지?" 라는 대사를 넣었다. 다만 실제 화해했는지 역사적 기록은 없다. [8] 당시 미국 대통령은 그의 아들 존 퀸시 애덤스였다. 즉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은 임기 중 독립기념일에 부친상을 당한 것이며 존 애덤스는 아들이 대를 이어 부자(父子) 대통령이 되는 것까지 지켜보고 간 셈이 되었다. 심지어 아들이 임기를 시작한지 정확히 1년 4개월만이었다.(1825년 3월 4일~1829년 3월 4일) [9] 중간에 허버트 후버도 향년 90세로 같은 나이로 사망했지만 개월수의 차이로 그의 기록을 깨지 못했다. [10] 20세기 허버트 후버가 90세 이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존 애덤스가 유일하게 90년 이상을 산 대통령이었다. 따라서 1964년 후버에 의해 장수 기록이 경신되기 전까지는 138년이라는 엄청난 기간 동안 최장수 타이틀을 가진 셈이다. 참고로 후버 이후 세 번째로 90세 이상을 산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다. 애덤스가 후버보다 몇개월 더 오래 살았으므로 2001년 당시 레이건이 애덤스의 기록을 깰 때까지는 가장 장수한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가장 장수하였다. 허나 2024년 기준 지미 카터가 모든 대통령들을 다 쌈싸먹을 정도로(...) 오래 사는 중이라 대통령 장수 순위에선 5위로 밀려났다. 4위 레이건은 93세 4개월, 3위 포드는 93세 5개월, 2위 아버지 부시는 94세 5개월, 1위 카터는 [age(1924-10-01)]세를 넘어 여전히 생존 중이다. [11] 실제 당시 미국 초기 주요 정치인들은 노예제에 부정적인 경우가 더 많았다. 허나 주의 자치 문제나 내전 우려와도 엮여 노예 허용주를 잘못 건드리면 벌집을 쑤시는 격이 된다는걸 알았기에 노예제에 반대하는 자유주를 늘리다 보면 자연스레 노예 허용주가 사라질 것이라는 좀 안이한 혹은 희망론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12] 워싱턴의 키는 188cm이다. [13] 유대인의 첫 왕 사울을 말한 것인데 사울은 남들보다 키가 컸다라는 기록이 성경에 있다. [14] 버지니아는 독립초기 남부의 대표적인 주로 독립전쟁을 주도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으며, 크기도 지금보다 훨씬 컸다. 1대 워싱턴부터 5대 제임스 먼로까지 초기 5명의 대통령 가운데 매사추세츠 출신인 존 애덤스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버지니아 출신일 정도. 그리고 이걸 막아낸 인물이 6대 존 퀸시 애덤스, 존 애덤스의 아들이었다. [15] 대륙의회에 참가한 식민지 대표 중 끝까지 독립을 반대한 사람이지만, 막상 투표로 독립이 확정되자 헌법 초안 등 적극적으로 건국에 앞장섰던 사람. [16] Founders who remained unaffected by Deism or who (like John Adams) became conservative Unitarians used terms that clearly conveyed their orthodoxy (“Savior,” “Redeemer,” “Resurrected Christ”). Holmes, David L.. "The Founding Fathers, Deism, and Christianity". Encyclopedia Britannica, 21 Dec. 2006, https://www.britannica.com/topic/The-Founding-Fathers-Deism-and-Christianity-1272214. [17] 전임 워싱턴이 188cm, 후임 제퍼슨이 190cm라 왜소해 보이지만 애덤스는 170cm으로 당시 미국인 남성의 평균신장인 168cm보다 컸다. 현대 미국으로 가정하면 180cm인 사람이 2m인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18] 존 애덤스의 옆에서 조언하는 역할이다. 상당히 고등교육을 받은 모양으로 라틴어 프랑스어도 할 줄 아는 듯하다. 남편이 지나치게 현학적인 표현을 쓰려고 할 때면 제동을 건다든지, 기운이 없을 때면 기운을 북돋아 주기도 한다. 좋은 정치적 동반자이며 여성 및 노예 인권에 대한 언급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