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정몽준의 아들 정예선이 페이스북에서 국민이 미개하다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된 사건.2. 과정
당시 강남대성학원에서 재수하던 중이던 정몽준의 막내 아들 정예선이 2014년 4월 18일,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직후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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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그의 어머니까지 "아들의 발언은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시기상 좋지 않았다"고 발언해 아들과 마찬가지로 구설수에 휩싸였다. 동료 의원들은 그걸 또 틀린 말이 아니라고 맞장구쳤다고 한다.
결국 정예선의 이 발언을 한 직후 세월호 유가족 측으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하여 이에 정몽준 의원이 아들을 데리고 직접 유가족들에게 찾아가 머리 숙여 사과하며, 간신히 고소가 취하되기에 이르렀다.
3. 여파
본인의 위의 발언으로 당시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했던 아버지 정몽준에게 심각한 타격을 줬다. 그렇잖아도 박원순 후보에 여론조사상 10% 가량 뒤처진 상태에서 판세를 반전시킬 모멘텀을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아들이 이 사건을 터뜨리면서 판세를 반전시킬 기회는 완벽히 사라졌고 결국 정몽준은 큰 격차로 낙선했다. 이 패배는 정몽준의 공직 선거에서의 첫 패배였다. 게다가 정몽준이 이후 사실상 정계은퇴나 다름없는 지경으로 밀려나면서 '아버지의 오랜 꿈을 일거에 무너뜨린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2]다만 정예선의 발언이 정몽준의 정치적 경력에 끼친 타격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는 반론도 있다. 애초에 6대 지선 자체가 새누리당이 우세한 선거는 아니었고 서울 자체가 민주당세가 상당히 강한 지역이었다. 무엇보다도 위에 설명된 것처럼 이 사건 이전에도 정몽준 후보는 박원순 후보에게 이미 10%p 이상의 격차로 여론조사상 지지율이 뒤쳐진 상태였다. 박원순이 50~52 정도라면 정몽준은 39~41을 왔다갔다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정몽준 후보의 선거전략 자체가 한때 대권후보로 거론되던 정치인의 선거전략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잡했다.
박원순 후보의 선거 포스터에 정면이 아닌 측면 사진을 사용한 것이 "떳떳하지 못해서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공격하고 후보 부인의 행보가 적다는 이유로 부인 잠적설을 주장하는 등 정치적으로 의미도 없고 상식 이하로 수준 낮은 네거티브 공세를 퍼부으면서[3] TV 토론에서는 "내 질문에 예/아니오로만 대답하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박원순 후보의 목소리를 흉내내 상대를 자극하고 대답을 재촉하는 등 초등학생 말싸움 수준의 유치한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차라리 정예선의 문제 발언은 "아직 판단능력이 미숙한 어린 학생(미성년자)의 실수"라고 봐 준다거나 "비하적이고 모욕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나 유가족이 격분할 수 밖에 없던 상황에 대한 몰이해는 변명할 수 없지만, 감정에 휩쓸려 격하게 반응하기보다는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장의 수준에서는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의견이 아니냐"는 변호가 가능하기라도 하지 정작 정몽준과 정몽준 캠프의 선거전략은 이런 변명거리도 찾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물론 대중적인 공분을 일으킨 발언인 만큼 정예선 사태가 정몽준 후보의 입지에 타격을 입혔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버지의 오랜 꿈을 일거에 무너트린 불효자"라고 하기에는 과연 그 시점에서 정몽준의 꿈이 아직 안 무너지고 서있기는 했는지 자체가 의문이라는 것. 물론 정몽준 지지자의 입장에서야 선거전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리면 역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정작 당사자인 정몽준 후보 및 캠프의 행적 자체가 정몽주니어보다 그리 낫다고 하기도 힘든 수준이어서는 못난 자식에게 화를 내기도 민망한 셈이다.
그러나 정예선의 발언이 아버지를 선거에서 직접적으로 끌어내린 것은 아니더라도 결국 정몽준의 이미지를 실추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정몽주니어 사건으로 정몽준의 지지율은 30% 초반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본인이 사과를 하고 본인 입장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대처를 해서 그 이상 지지층이 이탈하는 건 막았지만, 이미 경력에 흠집이 난 건 돌이킬 수 없었다.
이 점에서는 서울특별시장 문서에서도 설명된 것처럼 한국의 정치계에서 서울시장이라는 자리, 그리고 서울시장 선거 출마 자체가 상당히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서울시장은 선출직 공무원 중에서는 대통령 다음가는 위상을 가진 사실상의 2인자로 소통령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까지 하는 자리이지만 동시에 지자체의 장이기에 중앙 정계에서는 한발짝 떨어져 있는 자리이다. 게다가 지자체장의 경우 국회의원이나 국무위원과는 겸임이 불가능하기에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면 이러한 직위에서는 사퇴해야 한다.[4] 따라서 중앙 정계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가고 있는 정치인이 굳이 그때까지의 경력을 중단하고 지방선거에 도전하는 경우는 드물며 주요 정치인이 서울시장 등 광역지자체장 선거에 출마하는 경우는 낙선이나 정치활동 일시 중단 또는 다른 여러 사정 등으로 맡은 공직이 없는 상태에서 지방선거 출마를 통해 공직(및 정계)에 복귀를 시도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6대 지선 당시 정몽준의 경우 서울시장에 출마하기 위해 의원직을 사퇴하여 이전까지 7회 연속 당선으로 26년간 끊임없이 이어가던 경력을 중단한 특이한 사례에 해당하는 것. 그리고 이런 과감한 시도를 한 이유는 일종의 승부수 였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2002년의 전성기를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사건으로 허무하게 날려 버린 이후 국회의원 경력은 이어가고 있었지만 무소속(또는 사실상의 1인 정당) 정치인이면서도 주요 대권주자로까지 거론되던 전성기에 비하면 그 위상과 존재감을 많이 상실했고 2007년 한나라당에 입당하였지만 이후 새누리당 시기까지 당내에 자기 계파를 꾸리거나 뚜렷한 정치적 도약의 계기를 만들지도 못한 상태에서 어느새 본인의 나이는 60대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로서는 더 늦기 전에 분위기를 전환하여 다시 상승 국면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낄 법한 상황이었고 299석이나 되는 국회의원에 비해 단 1석뿐인 서울시장은 '선출직 2인자', '소통령'이라고까지 불리며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훨씬 많이 받는 자리이기에 이런 국면 전환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가능했다.
따라서 정예선의 발언이 아버지 정몽준에게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줬다'는 입장과 '별다른 타격을 줬다고 할 것도 없다'는 입장이 갈리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정몽준의 정치적 경력에 기대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로서는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승부수를 던졌는데 남도 아닌 가족들이 초를 쳐 버린 것이니 이 어찌 치명적인 타격이 아니겠느냐고 하는 것이고, 특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면 역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지지자들로서는 판세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안 그래도 모자란 지지율을 더 떨어트려버렸으니 이보다 더 큰 타격이 있을 수 없다고 여길만 하다.
반면 정몽준의 정치적 경력에 별 기대감이 없는 사람들은 어차피 해당 선거에서 정몽준에게는 사실상 승산이 없었고[5] 모험적인 승부에서 패하면 본전이 날아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를 피하기 어렵게 된 이상 정몽준의 정치 경력 역시 어차피 거기서 마무리되는 것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다못해 정치를 계속할 거라면 참패냐 석패냐, 이미지가 얼마나 손상되었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은퇴를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본다면 미개 파동으로 인한 추가적인 데미지가 있건 없건 별 차이는 없다는 것. 거칠게 비교하자면 HP가 1 남은 상태에서 막타를 회피할 수 없다면 데미지를 1 받건 2 받건 10 받건 어차피 게임 오버인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오랜 꿈, 더 나아가 할아버지의 꿈이기도 했던 것을 일거에 무너트린 자식' 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정예선 사태가 없었어도 이미 정몽준이 그 꿈을 이루기엔 힘이 부친 상태로 보이니 굳이 자식 탓을 할 것도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정몽준을 높게 평가하고 그에 대한 정치적 기대감을 가졌던 사람일수록 정예선의 책임을 무겁게 본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정몽준에게 정치적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하기에 지선 패배 이후 결국 재기하지 못하고 정계 은퇴 수순을 밟게 된 원인을 외부, 즉 가족인 정예선의 행태에서 찾게 된다는 것. 이러한 온도차는 2014년 지선 당시에도 상당히 명확하게 느낄 수 있던 것이다. 2014년 서울시장 선거는 민주당계의 유력 정치인으로 떠오른 박원순과 유력 보수 정치인으로서 새누리당에 자리잡은 정몽준이라는 두 거물의 정면 대결로 큰 주목을 받는 선거였으나 선거 전 여론조사상으로는 10% 이상의 격차가 계속 유지되어 주목도에 비해서는 결과가 쉽게 예측 가능한 싱거운 선거이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정몽준 지지자 및 보수 지지자 또는 정몽준의 정치적 위상에 익숙한 고연령층(게다가 당시 이 두 집단은 서로 교집합의 범위가 크기도 했다.)을 중심으로 '그래도 설마 정몽준이 지겠느냐?'는 정서 역시 적지 않았다. 어쨌건 당시 기준으로 정몽준의 경력은 박원순보다 훨씬 화려했기에 그만큼 경쟁력이 더 강할 것이라 예상하는 이들도 많았고 이런 이들은 당장 눈앞의 여론조사 결과보다도 자신들의 경험에 기반한 인상을 더 믿었던 것. 그리고 결국 선거 결과가 정몽준의 패배로 나타났을 때 이런 이들은 (흔히 그렇듯이) 정몽준이 패배한 뭔가 특별한 이유를 찾으려 했고 그 이유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정예선의 발언 논란이었기에 더욱 주목받은 면도 있다고 볼 것이다.
4. 비슷한 발언들
의외로 한국 사회에 대해 정몽주니어와 비슷한 소리를 했던 사람들은 옛날에도 많이 존재했다. 구한말 조선인의 의식 수준을 질타했던 유길준, 민족개조론의 이광수와 윤치호, 안창호, 서재필, 박중양 등이 그런 사례.위에 언급된 인사들 중 유길준과 안창호, 서재필을 제외하면 거의 국개론으로까지 발전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일제 통치 협력에 앞장섰다. 물론 이들은 대놓고 미개하다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취지의 지적들을 남겼다. 조선총독부는 시세민도론이라는 억지 논리로 "조선인들의 민도가 낮으니 그에 맞게 차별대우를 해도 된다"는 식민통치 정당화 방식으로 써먹었다. 일본이 개화기에 심어놓은 씨앗이 꽃을 피워 친일파와 식민통치 정책으로 열매를 거둔 것이다.
정몽주니어의 발언이 있기 전인 2011년에 박근혜 정부의 총리 후보자이자 언론인이었던 문창극이 온누리교회에서 강연하며 "조선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 것은 이씨조선 시대부터 게을렀기 때문"이라며 "조선 민족의 상징은 게으른 것이다.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는 것이 조선 민족의 DNA로 남아 있었다. 이를 고치기 위해 하나님이 일본으로 하여금 식민통치를 하게 했다"고 주장한 것이 2014년에 재발굴되어 큰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문창극은 총리 후보에서 낙마했다.
2년 뒤인 2016년 7월에는 정몽주니어의 연세대학교 동문인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민중은 개돼지"라는 발언을 해 비슷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디시위키의 정몽주니어 문서에서는 이 과정에 대해 우스갯소리로 "정몽주니어가 후쿠자와 유키치와 유길준에게 영향을 받아 개똥철학 이론을 펼친 것을 나향욱이 다시 영향 받았다"고 서술했다.
물론 (타당성을 떠나) 정예선의 망언, 그리고 나향욱의 망언은 당연히 차원이 다르다. 정예선의 발언의 경우 당시 고작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자신의 SNS에 되는 대로 쓴 글에 불과하지만 발언자가 재벌이자 서울시장 후보인 정몽준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여파가 커진 것이고 나향욱은 고위공직에 있다는 작자[6]가 그런 되도 않는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
2017년에는 자유한국당 충북도의원이었던 김학철이 지역구인 중부권 폭우 상황을 외면하고 유럽으로 외유성 출장을 나갔다가 국민들의 비난 여론에 직면하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국민들이 레밍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만만한 게 지방의원이냐고 되려 버럭하다가 후폭풍으로 정치 인생을 말아먹었다.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훈민정음을 반포하려던 세종대왕에게 "어차피 무지한 백성들은 교화가 안 되는데 그깟 글자 만들어서 뭐하냐"고 대들던 정창손이 있다. 당연하지만 파직됐다. 위의 사례들과는 달리 정창손은 진짜로 백성에 대한 선민의식에 찌든 사람으로, 가장 나향욱과 비슷한 사람이었다. 정창손을 비롯한 조선의 양반 및 사대부들은 단순히 백성들이 교화가 안 된다는 이유로 훈민정음을 반대하였던 것이 아니다.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평민들의 식자율이 높아져 생각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경계하는 속내를 품고 있었음이 분명하다.[7]
사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교육받은 기득권 계층이 일반 대중에 대해 선민의식을 가지다 못해 '무지한 대중'이라며 멸시하는 것은 현대적인 민주사회가 형성되기 전까지도 흔하디 흔했던 엘리트주의의 전형적인 현상으로, 어느 나라에서나 보편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한 예로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이었던 필립 마운트배튼 공작은 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님에도 본인 의도와 다르게 일반 대중이나 개발도상국 입장에서 기분 나쁠 만한 발언을 여러 번 하여 문제가 된 바 있으며 옆나라의 어떤 총리양반은 자국 노인들에게 돈 아끼지 말고 돈 좀 쓰라면서 "언제까지 살아있을 셈이냐"라고 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민당의 당시 정책이 노년 세대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다시피했는데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은 노년 세대를 늙어서 쓸모없으니 이제 그만 사회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존재로 보았다는 의미이다. 정작 본인은 80이 넘은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막후 실세 노릇까지 하고 있다.
[1]
글 중 '국무총리가 물세례 맞은 것'은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세월호 사고 다음날 새벽에
정홍원 총리가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진도체육관에 방문해 구체적인 구조 계획도 없이 "책임있게 하겠다"는 형식적인 소리를 하는 보여주기식 행정에 분노가 폭발한 실종자 가족들이 물병을 던진 것이다.
# 즉, 전복 직후 배 안에 생존자들이 아직 있다고 알려진 시점이었는데(실제로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이때 이미 전부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이 시점에서 피해자 가족들은 대부분 이들이 살아 있다고 믿고 있었다.) 가족들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구조작업을 해도 모자란 시점에 총리가 찾아와서 뻔한 얘기만 하며 최선을 다하는 시늉만 내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세월호 침몰 사고는 노화하고
마개조한 선박 문제는 넘어간다 쳐도 구조 과정 자체가 하나부터 열까지 수준 이하였던 비극이었다. 이성적이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피해자 가족이 슬픔과 분노가 폭발한 것을 두고 "국민의식이 미개해서 그렇다"면서 비난한 것이다. 자식의 목숨이 위기에 빠졌는데 이성적일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2]
따지고 보면
할아버지의 꿈에도 포함된다.
[3]
물론 선거전에서 네거티브 공세라는 것이 썩 바람직하지 못하게 여겨지기는 해도 효과는 분명 있는 만큼 사라지기도 힘든 것이라고는 한다. 하지만 당시 정몽준 후보의 네거티브 공세는 도저히 상대 후보에게 타격을 입힐 만한 수준이 아니었고 오히려 자기 자신만 우습게 만들고 있었기에 대체 저걸 왜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4]
즉 지방선거에 당선되면 사임하여 시장직을 수행하고 낙선하면 원래 직책을 계속 수행한다는 꼼수조차 쓸 수 없다.
[5]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 10%p 이상의 격차로 뒤지는 상황, 그것도 50%대 초반의 과반 지지 대 40% 전후의 지지율 격차라면 이를 뒤집고 반전시킨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며 위에서 설명된대로 당시 정몽준 선거캠프는 그런 놀라운 역전극을 기대할 만큼 기민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6]
무려 2급(이사관)에 해당되는 직책이었다. 고용안정성이 보장되는 공무원의 급수가 2급까지다.
[7]
같은 이유로 현재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남미,
동유럽 등
개발도상국에서는 지역 유지,
토호 등 기득권 세력들이 시스템의 변화와 개혁에 대해 회의적이고 국민들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