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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21:26:37

정소(서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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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丁紹
(? ~ 309)

서진의 인물. 자는 숙륜(叔倫). 예주 초국(譙國) 출신.

2. 생애

젊었을 적부터 총명하여 일찍이 조정에 출사해 관직을 역임하고 광평태수에 제수받았다. 정소가 청렴하고 공정하게 정치를 펼치니, 그의 판결에는 억울함이 없었고 지역은 크게 교화되었다. 얼마 뒤, 하북 전역은 이민족의 침공을 받고 크게 소란스러워졌으나, 정소가 다스리는 광평군 만큼은 백성들이 기꺼이 법에 복종하면서 안정적인 통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영흥 2년(305년) 7월, 성도왕 사마영이 권력을 모두 잃고 폐출당하자, 그의 옛 장수인 공사번(公師藩)이 조(趙)와 위(魏) 지역에 걸쳐 무리 수만 명을 모아 거병하였다. 공사번은 하북의 여러 군과 현을 유린하면서 서진의 관리를 죽이던 중, 마침내 업(鄴)으로 진격해 평창공 사마모를 치니 그 형세가 매우 위급하였다. 이때 정소가 군대를 이끌고 연주자사 구희와 함께 공사번을 무찔러 업성의 포위를 풀었다. 사마모는 정소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비석을 세워 주었다.

이후 정소는 서주자사로 승진했다가, 서주에 부임하기도 전에 형주자사로 전임되었다. 정소를 무척 흠모하던 백성들이 각자 수레를 끌고 남쪽으로 향하니, 그 수가 무려 1,000여 승이나 되었다. 정소의 무리가 황하를 건너 허창(許昌)에 이르렀을 때, 당시 허창을 진수하던 남양왕 사마모[1]는 정소를 머무르게 하고, 조정에 그를 기주자사로 추천하였다.

영가 원년(307년) 9월, 반란을 일으킨 급상 석륵이 연주자사 구희에게 패해, 패잔병을 거느리고 한왕(漢王) 유연에게 투항하려 하였다. 이에 정소는 적교(赤橋)에서 이들을 습격해 궤멸시켰고, 그 공으로 녕북장군, 가절, 감기주제군사(監冀州諸軍事)에 임명되었다. 완전히 북쪽으로 도망쳐 버린 급상과는 달리 석륵은 유연에게 귀순하고 여러 차례 하북을 침구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정소에게 격퇴당했다. 정소가 붙잡은 갈족 포로들을 전부 주살하고 엄숙하게 군대를 호령하자, 하북의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마음 속 깊이 존경하였다.

정소는 스스로 영웅의 재주가 있음을 자부하였고, 관직에 오른 이래로 정사를 처리할 때마다 매번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또, 자신이 천하의 일을 모두 꿰고 있다 생각하면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당시 유주(幽州)에는 왕준이, 청주(青州)에는 구희가 각각 강성한 세력을 바탕으로 할거하고 있었는데, 정소는 이 두 사람의 불충하고도 탐욕스러운 행실을 경멸했다고 한다.

영가 3년(309년),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상태가 위중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소는 임종 직전에
"이는 하늘이 기주를 멸망시키려는 것이지, 어찌 나의 운명이겠는가!"
라 한탄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사후 회제 사마치에 의해 거기장군으로 추증되었다.


[1] 정권을 잡은 동해왕 사마월이 사마모를 허창으로 옮기고 진동대장군에 임명한 뒤, 남양왕에 책봉했다. 그리고 본래 사마모가 지키던 업성은 범양왕 사마효가 수비를 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