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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3:32:42

정몽준/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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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생2. 정치인이 되기 전
2.1. 병역
3. 정치인으로서의 행보
3.1. 2002년 이전까지3.2. 화려했던 전성기 그리고...?3.3. 한나라당 입당 이후3.4. 탈당 이후
4. 국제정치학 박사5. 재산6. 국내 축구계의 초거물7. 사회복지활동

1. 일생

1951년 11월 15일 경상남도 부산시 초량출장소 범일동(現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서 8남 3녀 중 6남으로 태어났다.

정주영 현대그룹 초대 회장의 6남으로, 현 현대중공업그룹의 총수.[1] 그리고 전직 7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2] 또한 축구행정가로서 한국 축구계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FIFA 부회장(4선, 현 명예 부회장), 대한축구협회장,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를 역임했다.

여담으로 과거 언론 등에서 국회의원들의 재산 조사를 하면 항상 정몽준의 조 단위의 재산 때문에 평균치가 급격히 오르는 탓에 자료가 곡해될 수 있어서, 그는 빼고 조사하는 경우가 많았다.[3] 이는 정몽준이 떠난 이후의 국회도 비슷해서, 수백억 이상의 자산가들은 빼고 계산하는 경향이 있다.

2. 정치인이 되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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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장충국민학교,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한다. 초졸 학력에 컴플렉스가 있던 아버지 정주영[4] 정몽준이 서울대 상대에 입학하여 평생의 한을 풀어준 것을 너무나 기뻐했는지, 다른 재벌 총수들을 만날 때마다 아들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5] 여담으로 정몽준의 자녀들 중 정기선, 정예선, 정남이는 모두 연세대학교 출신이다. 어쨌든 정주영이 정몽헌과 더불어 가장 예뻐한 아들로서, 형제들 중에서 가장 빠른 31세에 사장이 되었고, 부친인 정주영과 술집에 가서 자신이 외상으로 달아놓은 술값을 그 천하의 정주영한테 덤태기 씌우는 용자짓도 했다고 한다. # 정주영 본인도 어이없어 했다고.[6]

정주영은 정몽준이 머리가 좋다보니 현대그룹을 물려줄 생각도 해봤으나 정몽준 본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치자금 겸 현대중공업과 산하 계열사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정치란게 정치자금이 있어야 돌아가는 법이기도 하고, 정주영 본인도 대선출마 경험이 있던 만큼 정계 진출의 꿈을 이해해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통령의 꿈을 아들이 이루어주길 바랬던 측면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못 이뤘다.[7]

군 전역 이후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가 MIT로 옮겨 졸업했고 이후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2.1. 병역

정치인·재벌가 사람들 중 병역문제에서 깨끗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대학 재학중 대한민국 육군 ROTC로 입단, 후보생 시절 동기들의 단가방을 자비로 다 갈아치우기도 했다.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 만기 전역했다.[8]

사실 범 현대가에는 남자는 대체로 꼼수 쓰지 않고 군대는 가는 전통이 있다고 하는데, 이 전통은 정주영 때문에 생겼다. 뭔 소린고 하면, 정주영은 평소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고 그래서 실제 대선 출마도 한 적이 있었다. 정주영은 투표가 가능한 국민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예비역 병장에 장교 및 부사관 출신이니 아들들의 병역을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9] 때문에 정주영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서 일족들의 병역부터 제대로 관리해왔다는 후문.[10]

정몽준의 장남(정기선)도 육군 학군사관(ROTC)으로 병역을 마쳤으며, 제1군단 701특공연대에서 소대장과 연대 작전장교로 군생활을 마쳤다. 당시 아들이 복무하는 부대를 방문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피자 한 판 & 치킨 한 마리씩을 돌렸으며, 낙후한 시설을 보고 사비로 군 시설을 개선해주고 싶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후자는 당시 지휘관에게 거절당했다고 한다. 아마 선거법상 문제의 소지가 있었던 것 같다.[11] ´육군 제대´ 정몽준 "사회 지도층 자녀 전방복무" "병역 의무 엄격히 관리" 강조.

3. 정치인으로서의 행보

3.1. 2002년 이전까지

현대중공업 회장을 하고 있던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을 전후로 해서 민주자유당에 입당했지만, 1992년 초에 아버지 정주영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당연히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합류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재선에 성공했고[12] 통일국민당 대변인, 정책위원회 의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당의 2인자로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대선 직전 초원복집 사건을 기획했으나, 지역감정 역풍으로 아버지의 득표를 오히려 까먹었고 본인은 대선 후 범인도피죄로 기소되는 흑역사를 찍기도 했다. 그나마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를 받아 의원직 상실은 면했다. #

정주영이 대선 낙선 후 정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통일국민당이 와해된 후로는 한동안 당적을 갖지 않았고, 2007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무소속, 1인 정당 소속으로 독고다이 행보를 보인다. 그래도 1998년 정권 교체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김대중 대통령 및 여당 새정치국민회의와 사실상 행보를 같이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기업인 출신인데다 한나라당 강세 지역이던[13] 울산광역시에서 기반을 다진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보를 보여줬던 건 상당히 이례적이었던 셈. 다만 이는 14대 대선 후 김영삼 대통령 및 문민정부에 대놓고 찍혀 현대그룹이 강도 높은 세무조사, 대출 제한 등 정치보복이라 의심할 만한 사태를 겪자 현대가는 반대로 DJ에게 줄을 댔고, 실제 DJ가 대통령이 되고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뒤 남북 화해 무드 속에서 정주영 회장이 북한에 소떼 방문도 하고 금강산 관광 등 대북 사업도 성공하는 등 범현대가가 제법 득을 봤기 때문에 DJ 측과 행보를 같이 할 수 있었다는 게 세간의 중평이다.

3.2. 화려했던 전성기 그리고...?

상기했듯 정몽준은 국회의원까진 몰라도 대통령과는 인연이 멀어보였는데, 2002년 그에게 천운이 다가온다. 바로 한일 월드컵을 유치하는데 그가 큰 힘을 썼기 때문. 게다가 이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기적적인 4강에 오르자, 축구협회장으로서 한국 축구를 적극 후원한 그의 입지 역시 급격히 올라가 몇개월만에 유력 대선 후보가 된다. 한때 여론조사에서는 당시 유력대권주자였던 노무현을 제치고 이회창을 위협하기도 했을 정도.[14][15]

이에 정몽준은 대선 출마를 결심하고 국민통합21을 창당한다. 처음에는 당시 이회창에 반발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만들었다 자신처럼 붕 떠버린 동병상련 박근혜와 힘을 합쳐보려 했으나[16], 식사 자리에서 박근혜로부터 다짜고짜 김재규를 변호한 변호사 강신옥을 내치라는 요구를 받았고, 이에 결국 측근이던 강신옥이 곁을 떠났으나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은 것도 있고 애초에 정몽준과 박근혜는 성향이나 결이 좀 달랐던 것도 있어서 박근혜는 한나라당이 콜하자 다시 복당해 버린다(...). #

그 후 후단협의 압박 등으로 새천년민주당 후보 노무현과 여론조사 방식에 따른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으나, 여론조사 결과 간발의 차로 패하고 만다. 단일화 후 이에 승복하여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 선거 운동에 나섰으나, 선거일 전날 밤 지지를 철회했다. # 지지 철회 이유로는 외교 정책상의 이견, 차기대권주자로서 인정받지 못한 소외감 등이 거론되지만, 실제로는 대선 전날 극단적인 지지 철회를 선택한 것은 감정 문제가 컸다.

당시 민주당을 탈당하고 정몽준 측에 섰던 김민석의 증언에 따르면 기존 단일화 합의는 모든 유세장에 단일후보 둘만 오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명동 유세에서 당 관계자의 실수로 노 후보 진영 인물 대다수가 단상에 오르게 된다. 김민석은 사고를 직감했고, 종로에서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본인이 커버를 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종로 유세에서 서갑원의 지시로 또 다시 모든 인물이 단상에 오르게 된다. 게다가 직후 정몽준 진영에서 어떤 사람이 '차기는 정몽준!'이라 적힌 피켓을 보이자 노무현 후보가 '너무 속도위반하지 말자. 정동영, 추미애 최고위원도 있다.'[17]고 한 것이 결정적으로 정몽준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 이후 이동하게 된 냉면집에서 정몽준은 화가 나 소주만 마시고 있고 당직자들은 가만히 냉면만 먹는 분위기 속에서 정몽준 측근인 가수 김흥국이 열이 뻗쳐 막 떠드는 상황이 벌어진다.[18] 그리고 직후 정몽준은 지지철회 오더를 내린다. 그리고 이 날 밤 집에 찾아온 노무현에게[19]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밖에 세워두다 돌려보내면서 정몽준과 노무현은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뼈를 때리는 굽시니스트 만화.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참고.

하지만, 제16대 대통령 선거 결과 노무현이 극적으로 당선되면서, 결과적으로 하루만 더 참았으면 얻을 수 있었던 국무총리직을 스스로 날려먹은 셈이 되었다.[20]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를 하면서 후일을 준비했다면 미래가 어찌 됐을진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그 이상 못가고 정계 은퇴를 한 지금에 와서 보면 여러모로 기회를 놓친 행보긴 하다. 어쨌든 서로 간의 감정을 정산하는 문제는 이긴 뒤에 해도 늦지 않은데 굳이 선거 전날에 판을 깨야 되겠냐는 비판이 거세지면서 뭔가 쪼잔한(...) 인간처럼 되어버려[21] 정계에서의 입지도 확 줄어버리고 만다. 여기엔 후술되어있듯 버스비 발언 등 본인의 실언도 한몫했다.

이렇게 월드컵으로 얻은 정치적 위상 및 입지를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신기루처럼 흩어보낸 후, 국민통합21을 이끌고 17대 총선에 나섰으나 본인 1명만 당선된다. 결국 국민통합21을 해체하고 다시 무소속으로 있다가, 2007년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년간의 제3지대 활동을 마무리지었으며, 이 때부터 완전히 보수진영으로 편입되었다.[22]

노무현과는 정치적으로 결별한 이후에도 공식석상에서는 몇 번 만나 인사를 했지만, 더 이상의 인연은 이어지지 않았고 노무현이 사망할 때까지 교류는 없었다. 더군다나 대선 이듬 해인 2003년 정몽헌 회장이 대북송금 특검을 받다가 자살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회복불능으로 악화되고 말았다.[23]

훗날 한나라당에 입당한 뒤, 노무현과 단일화를 했던 경력 때문에 공격을 받기도 했다.[24] 2008년 당 대표 경선에 나갔을 때 노무현과의 단일화를 무척 후회한다며 여러차례 강조하고 다녔으며, 이 때문에 친노 지지자들에게는 단단히 원성을 사게 된다.[25]

3.3. 한나라당 입당 이후

한나라당 입당 후엔 계파색이 뚜렷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범 친이계로[26] 분류되었고,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는 기존 지역구인 울산 동구를 측근인 안효대에게 넘기고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로 지역구를 옮겨 당시까지만 해도 민주당 거물이었던 정동영을 누르고 당선되었다.[27] 동작구을 지역구는 당시 최대 격전지로 보도되었으나 투표함을 까고 보니 생각보다 쉽게 정몽준이 승리했다.

2008년 8월에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2위로 최고위원에 당선되었고, 2009년 박희태 대표가 재보궐선거 출마를 이유로 사퇴하면서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직도 승계하였다. 다만 이 시기 후술된 버스비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대권 욕심도 여전히 있었는지 당내 유력 대선 주자인 박근혜와 대립했는데, 박근혜가 2011년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기고문에 대해 "내가 잘 아는 교수가 대필한 것이다"라고 깎아내리거나, "식자층에선 박 위원장이 대통령이 되면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 있다고 걱정한다", "당이 유신(독재)의 그림자에 덮여있다" 등 독설에 가까운 멘트를 날려 친박 세력에 제대로 찍히기도 했다. 허나 당시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고, 이후 경선에서도 큰 바람은 일으키지 못하고 물러나고 만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동작 을에 출마해 당선되는데, 재미있게도 당시 상대 후보는 17대 국회 당시에 이 지역구의 의원이었던 현대자동차 사장/ 현대카드 회장 출신의 이계안 전 의원이었다. 조선 시절 정감록에 데인 이씨의 반격?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나섰다. 당초에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마땅한 후보가 없던 새누리당의 강력한 요청과 함께 당시 안철수의 신당 창당 활동으로 야당 표가 갈릴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입장을 바꿨다. 같은 당의 총리 출신의 김황식[28] , 재선 의원 출신의 이혜훈 후보[29]와 경선을 치러 5월 13일에 최종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후보 등록과 함께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26년만에 국회를 떠난 셈이다. 그러나, 선거 결과 현직 시장 박원순에게 큰 표차로 참패하면서 낙선하고 만다. 정치 인생 최초의 낙선이라 뼈 아팠을 듯 하다. 더군다나 대선을 제외하고 보면 한국에서 가장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직 중 하나인 서울시장 선거였으니..

패배한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후보자 토론에서의 발언 문제[30][31], 그리고 당 차원에서 너무나 어설펐던 네거티브 전략 등이 있다. 박원순이 포스터에서 정면이 아닌 측면 사진을 쓴 건 떳떳하지 못해서라고 하는가 하면, 박원순 부인 잠적설을 꺼내는 등, 안하느니만 못한 무리수같은 네거티브였다. 자세한 내용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화젯거리 문서 참조.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건 아래의 논란에서도 설명하는 가족들의 팀킬이었을 것이다.

2016년 20대 총선에는 아예 불출마했다. 대신 이런 글을 블로그에 올려 지역구를 물려줄 정도였던 자신의 측근인 안효대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나, 안효대는 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울산연합 계파인 김종훈에게 패배하여 낙선하고 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분당 사태까지 벌어진 2016년 12월 29일 새누리당을 전격 탈당했다. 개혁보수신당으로의 합류는 부인했으며, 이후 별다른 정치 활동이 없는 상황. 이제는 나이도 70이 다 되어가는 만큼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3.4. 탈당 이후

2020년, 박원순 사망 당시 조문을 하면서 오랜만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한때 경쟁상대여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상기했듯 둘은 사적으론 친한 사이였다.

2022년, FIFA 회장 선거에 다시 도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는데, 진짜 도전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

2024년 3월 27일, 국민의힘 소속으로 용인시 정 지역구에 출마한 강철호 후보의 지지를 선언했다. 강 후보는 현대로보틱스 대표이사 출신이다. 같은 날 국민의힘 소속으로 수원시 을 지역구에 출마한 홍윤오 후보의 캠프에도 격려차 방문했다. # 정 이사장은 2014년 서울시장 선거 이후 10년간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때문에 정 이사장의 강철호 후보 출정식 격려 방문에 대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

4. 국제정치학 박사

1993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SAIS)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본인의 프로필에도 '국제정치학 박사'임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본인의 주도로 설립된 아산정책연구원은 국내 유수의 국제정치 연구기관, 싱크탱크로 성장하고, 자신이 주장하는 핵무장론이 국내외의 주목을 이끌어내는 배경으로 작용했다.[32]

단 정몽준의 박사 논문 주제인 "일본의 정부-기업간 관계: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원제: The government-business relationship of Japan : a case study of the Japanese automobile industry)는 외교, 국제분쟁과 같은 일반적인 국제정치보다는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비교정치, 정치경제 부문에 더 가깝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국제정치는 이런 지역정치학 역시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기 때문에 납득의 여지는 있는 편이다.

전공이 국제정치학인데다가 오랜 국회의원 경력과 피파부회장 경력 때문에 글로벌 인맥을 따라올 사람이 없다. 헨리 키신저와 매우 가깝고 마이클 블룸버그와도 교분이 있다. 조 바이든, 블라디미르 푸틴, 시진핑을 위시해서 전세계 거물들과도 교류한다. 분명 인맥은 세계구인 인물이다.

실제로 18대 대선을 앞두고 2011년에 『세상을 움직이는 리더와의 소통』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쓴 책이 아니고 대담집이다. 키신저를 포함해서 마이클 샌델, 기 소르망, 도널드 럼스펠드 같은 유명 인물들과 대화한 내용을 정리했다. 헤리티지 재단 회장 에드윈 풀너도 있다.

국제적 활동의 베이스는 아산정책연구원이다. 매년 아산플래넘이라는 컨퍼런스를 개최하는데 거의 800명 가까운 국내외 인사들이 참여한다. 단순히 국제 인맥교류가 아니고 콘텐츠 기반으로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비중을 확보하는데 기여한다고 보면 된다. 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이 이사장인데 자문위원단 면면이 화려하다. 전 세계은행 총재 폴 월포위츠, 전 브루킹스 연구소 소장 마이클 아마코스트도 있다.

5. 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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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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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아버지 정주영이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1993년 이래로 현역 국회의원 당시, 재산 1위를 항상 고수했다. 알려진 재산 총액은 2조[33]대다. 대선 출마 경력까지 생각하면 사실 한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34] 바로 아래에 있는 김세연(정치인), 안철수, 박덕흠도 어디가도 꿀리지 않을 자산가지만 엄연한 재벌인 정몽준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워낙 혼자서 튀는 수치라서 국회의원들의 평균 재산액이 언론에 보도될 때, 정몽준 재산은 반드시 빼고 평균을 계산하는 것이 거의 불문율이다.[35] 정몽준을 제외한 국회의원 총 재산 평균은 대충 30억 원 정도 하는데, 정몽준을 평균에 포함시키면 거의 100억원으로 3배(!)나 증가한다. 2조 원을 국회의원 총 인원인 대략 300으로 나누면 67억 원이다. 그러니까 다른 국회의원 299명의 재산을 다 합쳐도 정몽준의 반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재산 때문에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주로 활동했다. 공직자들은 자신이 맡은 직무와 주식 및 해당 기업이 전혀 무관함을 입증하지 못하면 관련 주식을 비롯한 자산을 3,000만원만 남긴 채 모두 처분하거나 금융기관에 신탁 처분해야 한다. 이를 주식백지신탁제도라고 한다. 처분이라 해서 나머지 재산을 버리라는 건 아니고 주식을 매각해서 현금으로 바꾸거나 직무와 관련없는 분야의 주식으로 바꾸거나 하면 된다만, 정몽준이 가진 정도의 자산이면 변환 과정의 번거로움과 손실을 고려했을 때 그냥 안하는 게 낫다는 것.[36] 그래서 현대중공업과 무관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박사 전공 국제정치학도 살릴 수 있는 외교, 통일 분야에서 활동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거시적인 외교정책을 다루는 외통위는 대표적인 거물들의 상임위, 말년병장 상임위로 꼽히기에 국회의원 재직 당시 다른 의원들이 고개도 못 들 정도의 거물이었던 정몽준이 가기에 적합했다.[37]

이 때문에 현역 국회의원이던 시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은 뇌물 받을 일이 없다'는 평가 내지는 농담이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사람들 사이에 종종 나돌았다. 거기에 주변인 취업 청탁을 받았으면 받았지 할 일도 없다. 현대가에 취업시키면 되니까...

참고로 재산 꼴찌는 성완종으로 나와있는데, 성완종 게이트 당시에 그가 전달한 뇌물의 액수나 경남기업 회장을 지냈다는 점 등을 생각해보면 순 뻥이다.[38] 그러나 성완종 개인이 경남기업에 연대보증을 걸어두는 등 재산 상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후에 밝혀졌고 이 막대한 채무가 아들에게로 상속되었다. 결국 성완종은 사망 3년이 지나고 묘소가 경매로 넘어가 파묘되는 일을 겪었고 유골은 베트남에 모셔졌다고 한다. 정말로 수중에 돈이 없던 것.

6. 국내 축구계의 초거물

파일:정몽준-4.jpg
한국 축구 역사에서 정몽준의 공로는 빠지면 섭하다. 정몽준은 1994~98년 동안 한국프로축구연맹 1-4대 총재를 맡았고, 1993년부터 2009년까지 16년간 47-50대 대한축구협회장을 역임했는데, 특히 2002년 월드컵 유치전 당시 활약상이 많이 회자되는 편이다. 당시 한국은 일본보다 5년이나 늦게 유치 준비를 시작한데다, FIFA 회장 주앙 아벨란제는 대놓고 일빠였다. 하지만 사실상 패배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정몽준은 치열한 축구 외교전을 벌였고 현대그룹의 재력과 경험을[39] 총동원하여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레전드인 디에고 마라도나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등의 성과를 쌓아가며 기적적으로 공동개최안을 성사시킨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생각해보면 대부분 태극전사가 이룬 “4강 신화”를 먼저 떠올릴 테지만, 공동개최를 이끌어 낸 정몽준이나 기타 관련자들이 없었다면 당시 성적과 무관하게 국내에서 치러지는 월드컵의 감동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단 월드컵 개최에 성공한 것 뿐만 아니라 정몽준은 한국 축구계의 인프라 개선에 자신의 사비까지 써가며 앞장섰고, 그 결과 한국도 축구 선진국 못지 않은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이후 더 커진 국민적 관심 고조와 인프라 개선 등의 영향인지 이전까진 주구장창 조별리그 탈락만 하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박지성이 이끌던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원정 최초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루기도 한다.

대한축구협회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도 한국 축구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일단 울산 현대 대주주로서 표면적으론 팀을 운영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론 2011년부터 2016년까지 그룹 산하 현대오일뱅크가 K-리그 타이틀 스폰서로 연간 35억원씩 후원하기도 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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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AFC 회장 선거에서 정몽준 지지파가 떨어졌을 당시 사진으로 정몽준의 침울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미소짓는 제프 블라터. 자세한 내역은 항목 참조.

FIFA 회장이나 AFC 회장직도 노렸으나 모두 실패했다. 제프 블라터와 반목했었고 반블라터파 렌나르트 요한손 전 UEFA 회장을 지지하며 그의 FIFA 회장 선거를 열심히 도왔으나 완패를 당했고, 이후 요한손이 블라터 지지를 얻은 미셸 플라티니에게 UEFA 회장 재선에 실패하면서 피파 내에서 블라터파에게 많은 견제를 받아야 했다. 결국 2011년 정몽준은 FIFA 부회장 5선을 노렸으나 블라터의 지지를 받은 알리 빈 알 후세인 요르단 왕자에게 패하여 떨어지고 명예 부회장이 됐다. 하지만 말 그대로 명예직이라 아무런 권한이 없기에 더 이상 FIFA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가지진 못한다.

그의 몰락은 한국 축구 국제 외교력의 몰락이라는 말도 있으나 김운용과 마찬가지로 후계자를 전혀 만들지 않고 자신의 집권에만 신경썼다는 지적도 있다.

주앙 아벨란제 전 FIFA 회장의 심복이 바로 제프 블라터였다. 덕분에 아벨란제가 물러난 뒤로 터진 그의 비리혐의를 죄다 블라터가 쉴드쳐주거나 덮어버려서 그 어떤 수사도 조사도 이뤄지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IOC 위원장 자크 로게는 전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심복으로 역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이 두 조직 부회장, 부위원장인 정몽준, 김운용은 전혀 후계자 및 지지 후임자가 전무했다.

반면 블라터에 맞서다가 지금은 야인이 된 렌나르트 요한손 전 UEFA 회장은 후임을 여럿 둬서 이들이 현재도 UEFA 고위직으로 남아서 플라티니의 경쟁 후보로 남아있다. 그래서 블라터와 플라티니가 요한손 전회장에 대한 문제를 언급할 때 이들이 똑같이 막아버린 거와 달리 김운용, 정몽준은 그러질 못했다. 파벌까지 뿌리뽑고 IOC에서 어떤 명예직도 없고 축출당한 김운용과 달리 그나마 정몽준이야 비리적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기에 명예부회장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걸 내주긴 했지만.

그의 몰락에 대하여 IOC가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 있다.
그러나 제프 블래터가 회장직을 사임함에 따라 FIFA 회장 출마여부를 국제 축구 인사계들을 만나 경청한 후 좀 더 차분히 결정할 것이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하지만 결국 6월말 들어서 FIFA 회장에 도전한다고 뜻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몽준의 FIFA 회장 당선에 대해서는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아프리카 및 아시아 쪽 상당수 FIFA 임원들이 블라터를 지지하며,[41] 다른 경쟁자들도 무시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아시아 축구 연맹을 좌우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아랍 측에서도 정몽준을 견제해오는 게 사실. 위에 서술한 대로 정몽준을 그동안 FIFA 부회장이나 AFC에서도 견제하고자 블라터가 지지하던 게 아랍 측 인사였듯이. 게다가 블라터 반대파가 가장 많은 유럽 쪽도 유럽파 후보를 지지할게 뻔하다.

2015년 7월 23일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8월에 공식 출마 선언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선 가능성이 그렇게 높지 않지만, 출마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8월 들어서 강력하게 어필하고 개혁을 촉구하면서 강력한 후보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 회장을 블래터 전 국제축구연맹 회장과 아들과 아버지라고 비난하면서 나서고 있다. 문제는 2015년 들어서 터진 현대중공업 비리 문제로 반대 후보들이 기업 하나 감당못하는 주제에 어디서 FIFA 개혁을 외치냐고 맞설 거리를 만들어버린 셈. 게다가 더더욱 문제는 AFC 안에서조차 정몽준 지지세는 그리 없다는 점[42] 사실상 정몽준이 승리보단 정치적인 홍보로 이미지를 남기고자 크게 나선다는 반응이다. 이런 가운데 정몽준 사촌동생인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지지를 표명하며 FIFA 내에서 정몽준 입지를 보여주고자 2005년 8월 이후 끊긴 남북친선 평화축구 부활을 부르짖었으나...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 서부전선 포격 사건이 터지는 통에 이건 가망이 없게 되었다.

정몽준 본인도 승산이 없다는 걸 아는지 2015년 9월, AFC가 블래터의 똘마니(...)라는 듯한 발언을 하며 하고픈 말을 다했다. 당연히 AFC에서는 분노했다.

시사저널에서도 사실상 정몽준이 회장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기사로 분석한 바 있다. 유럽에서는 플라티니를 비난하면서도 사실상 그가 된거나 다름없다고 본다고 독일 및 여러 유럽 나라 언론을 보도하고, 남미, 아프리카는 플라티니 절대 지지세, 북중미도 미국 빼고 플라티니 지지세, 오세아니아랑 아시아도 마찬가지라면서...정몽준이 안된다는 글은 없으나 해외 5대륙 반응, 외신 보도로 보면 딱히 가망이 없어보인다.

여기에 FIFA 윤리위원회에서 2022 월드컵 대회 유치과정에서 한국 유치위원회의 국제축구발전기금 조성안 계획을 각국 집행위원들에게 전달했다는 이유로 자격정지 15년, 윤리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 혐의로 4년을 구형받았다. 김 이에 한국의 법률회사인 '김앤장'이 정몽준을 변호하기 위해 나섰다는 기사가 떴다. 다만 정몽준 자신은 이에 대해 자신이 개혁세력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꿈보다 해몽'급 해석을 시전했다. 결국 2015년 10월 8일에 FIFA로부터 6년간의 자격정지를 받았다.

이에 항소했지만[43] 기각당해 사실상 FIFA 회장에 도전조차 못하게 되었다. 사실 FIFA 회장은 너무나도 가망이 없었고, 차라리 부회장 선거를 나가고 강력한 회장 후보를 지지했다면 어떨까하는 아쉬움도 있다. 물론 플라티니가 너무나도 굳세 다른 후보로도 도저히 가망이 없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전에 요한손을 이렇게 밀어줬다가 참패하고 자신도 부회장에서 오래가지 못했던 일이 있었기에 이것도 어렵다는 분석도 많았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후 플라티니와 블래터도 정몽준과 같이 징계 및 처벌을 받아 FIFA에서 사실상 매장되었다.[44] 그리고 FIFA 회장은 잔니 인판티노가 새롭게 취임했다.

정몽준은 2017년 3월 항소위원회로부터 결정 이유를 통보받고 바로 4월에 스위스 로잔에 있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FIFA를 제소했다. CAS는 2018년 2월 정몽준에 대한 FIFA의 제재를 대부분 무효로 하는 판정을 내렸다.[45][46] 징계가 취소됐다. 그의 징계 취소 후 첫 행보는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1차전 한국-스웨덴 경기 관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FIFA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으며, 국내에서도 재단 이사장으로만 활동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 축구계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선 정몽준 본인이 울산 현대 대주주이며, 그의 장조카 정의선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주다. 사촌동생 정몽규는 대한축구협회장 겸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다.[47]

7. 사회복지활동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이다. 이 재단은 1977년에 정주영이 현대건설 주식 50%를 내놓아 만든 것인데 세간에서는 서울아산병원재단으로 통한다. 당시 현대건설은 석유공사 다음으로 큰 국내 2위 기업이었다. 그 지분 50%는 거액이다. 정부 복지 예산의 3배쯤이었다는 말도 있다.

아산재단 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서울아산병원이다. 미국 뉴스위크가 한국 1위로 평가한 적도 있을 정도로 순위권의 대형병원이다. 3개 과목에서는 글로벌 4~7위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원래 병원은 대학이든 재단이든 별 비중을 두지 않는 곳인데, 아산병원은 정몽준이 지원을 잘해서 의사들의 연구, 진료 환경도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2011년에 정주영 10주기 기념으로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했다. 정몽준이 2천억 원을 냈고 범현대 회사들이 낸 기금을 합쳐서 2021년 현재 5,870억 원이다. 주로 청년창업 지원 사업을 한다.

물론 이 공익재단들은 현대중공업지주를 비롯한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사들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경영승계에 이용할 가능성이 없진 않다. @


[1] 권오갑 회장이 현대중공업을 실질적으로 경영하고 있다. 정계 입문 전인 1988년까지는 정몽준이 현대중공업 회장이었다. 이 당시는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되기 전이다. [2] 현대중공업 공장이 있던 울산 동구에서 5번 연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13-17대)됐다가, 18대와 19대 총선 대는 서울 동작 을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 나갔지만 낙선하였고 2016년 20대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당도 탈당하면서 사실상 정계 은퇴. [3] 쉽게 말해 나머지 국회의원 재산이 평균 30억 수준인데, 정몽준 하나 때문에 평균을 내면 100억이 돼 버렸다. [4] 그래서 정주영은 직접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히는 스타일의 정몽구에게는 아주 엄했으며, 반대로 학구파 스타일의 정몽준과 정몽헌을 제일 예뻐했다. [5] 과거엔 나라가 가난했기에 부잣집 자녀들의 입학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면이 있던 사립대와 달리, 제아무리 재벌이라 해도 서울대에 들어가는 건 본인의 능력이 갖춰지지 않으면 힘들었다. 재벌가 자제 중 연고대 경영학과 출신은 수두룩하지만 서울대 출신은 꽤 드물고 이들은 어릴 때부터도 영특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인물들이다. 특히 당대 서울대의 위상은 현재보다도 압도적이었기에, 자식들을 미국에 얼마든지 유학 보낼 수 있는 재벌들에게도 각별한 면이 있었다. 정몽준 이외에도 서울대를 졸업한 재벌로는 삼성의 이재용, 정용진(중퇴)이 있고, 이 둘은 각각 인문대학의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 출신이다. 또 상대 출신인 박용성,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 법대 출신 보광그룹 홍석조 회장(이쪽은 고검장 출신으로 경영인 전업), 의대 출신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과 박용현 전 두산그룹 회장, 전자공학과 출신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도 있다. [6] 다만 정몽준은 정실인 변중석의 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엔 찬밥대우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다. 하지만 정몽준이 서울대학교에 진학하고부턴 대우가 달라졌다는 카더라성 후문이 있다. 정주영의 수많은 자식 중 유일하게 서울대를 합격한 아들이고 그 공로(?)로 혼외자임에도 불구하고 정식 아들로 편입할 수 있었다는 것. 단 정주영 회장의 공개된 자식들 중 정몽준만 혼외자인 것은 아니고, 정몽윤 또한 혼외자인 것이 기정사실이긴 하다. 막내인 정몽일은 정주영 회장이 아예 혼외자가 맞다고 직접 인정했다. [7] 정작 정주영이 세운 회사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회장까지 승진했던 샐러리맨 이명박이 이후 대통령이 되었다. [8] 당시 학군단 교관이 후일 국방부장관과 안보실장까지 오르는 김관진 대위였다. [9] 실제로 이회창이 대선 아들들의 병역 문제에 발목이 잡혀 대선에서 패배한 적이 있다. [10] 예외적 케이스로 정의선은 담낭 절제술로 면제 판정을 받았다. 다만 정의선의 경우, 정의선의 어머니인 이정화 여사가 담낭암으로 사망한 것을 보면 가족력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 때문에 재벌가의 병역면제 치고는 별다른 이슈가 되지 않고 넘어갔다. 다만 본인은 이게 떳떳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라 현대차그룹 임원은 정의선 앞에서는 가급적 군대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고 한다. [11] 막내아들 또한 학군단으로 보내고 싶다는 견해를 내비친 적이 있으나, 결국 막내아들은 공군 병으로 입대했다. [12] 이 때 아버지 정주영은 통일국민당 전국구(비례대표) 3번으로 당선되어 원내에 입성했다. [13] 이 당시까지만 해도 울산광역시 경상남도는 TK 못지않은 한나라당 초강세 지역이었다. [14] 일부 여론조사에선 1등도 했다는데 출처 필요. 메이저급 여론조사 기준으론 민주당 경선이 끝난 4월 이후 이회창 vs 노무현 구도가 형성되었지만(이때 이미 노무현이 이회창을 제치기도 했다.), 여권의 지방선거 참패와 월드컵 붐이 일면서 8월 들어 정몽준이 여권 지지층의 기대를 업고 대안 기대주로 떠올랐다가, 2002년 가을 접어들면서 다시 격차가 좁혀져 단일화 논의 끝에 결국 노무현 후보로 여권 대선주자가 최종 낙점된다. [15] 월드컵 붐이 아직 식지 않은 8월 조사 결과 양자대결을 전제로 했을 때 정몽준이 39.7로 이회창을 33.5%로 앞서는 것으로 나왔고 노무현으로 양자대결을 한다면 이회창이 48.4%, 노무현이 31.7%로 지는 것으로 나왔다. 3자 대결의 경우 이회창 38.8%, 노무현 28.8%, 정몽준 27.4%로 나왔다. 즉 고정지지층은 민주당에 속한 노무현이 더 높지만, 단일화를 이룰 경우 정몽준은 중도층을 유의미하게 흡수할 뿐 아니라 한나라당 지지자들조차 뺏어와 이회창을 앞설 수 있지만, 노무현의 경우 이회창에게 훨씬 많이 중도층을 뺏긴다는 결과인 것이다. 당시 기준으로 중도층은 물론 보수층 지지자들에게 정몽준이 노무현보다 훨씬 어필한다는 결과인데, 정몽준에게 가장 낙관적인 결과에서조차 28.8%가 태도유보층일 정도이니 확실히 앞서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미 대세가 된 노무현vs이회창의 구도를 흔들 정도로 월드컵 열풍이 대단했고, 당선도 꿈이 아닐 정도로 정몽준이 급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6] 정몽준과 박근혜는 서울장충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다만 학창 시절엔 서로 친분이 없던 사이였다. [17] 노무현 본인은 이후 이 발언에 대해 정몽준 지지자들과 정몽준 진영의 김민석, 신낙균 등이 정동영을 단상에서 밀어내는게 안타깝게 느껴져 한 발언이었다고 말했다. # [18] 이는 지지철회 선언을 발표한 김행 대변인과 허운나 전 의원의 증언이다. [19] 사실 노무현 본인은 내켜하지 않았으나, 참모진의 성화 때문에 반강제로 온 것이라고 한다. [20] 다만 백지신탁 문제 때문에 어찌 되었을지는 의문. [21] 이는 재벌가 출신으로 울산 지역 기반 속에서 나름 편히 당선된 정몽준과 자수성가해 뻔히 낙선할 거 알면서도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부산에 들이박은 노무현의 이미지가 더 상반되어 나타난 효과도 있었다. [22] 제3지대에 머문 기간으로만 치면 안철수보다 2배 이상 길다. [23] 참고로 정몽헌의 장례식 때 정몽준은 정몽구와 함께 빈소를 지켰으며, 장례식의 전체적인 진행을 도맡아했다. 이유는 정몽헌의 외아들인 정영선이 당시 미성년자였기 때문이다. [24] 노무현이 대선에서 승리하는데는 정몽준과의 단일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노무현의 신선한 이미지, 노사모로 대표되는 정치팬덤의 결집 등이 작용했겠지만 중도층의 포섭은 정몽준과의 단일화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25]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봉하마을에 조문하러 갔으나 진입도 못 하고 쫓겨났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의 화환이 부서지고,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 대다수가 조문을 거부당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26] 비박계란 말은 새누리당내에서 친박세가 커지고 친이세가 줄어든 2010년대 중반 이후 쓰인 말이고, 이때는 친이계 아니면 친박계로 분류하는게 보통이었다. [27] 여기에도 에피소드가 있는데, 원래 정몽준은 자기 지역구에 출마할 예정이었고 동작구 을에는 비례대표였던 이군현이 출마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정동영이 동작구 을에 나오면서 한나라당 지도부는 정동영을 잡기 위해 정몽준을 서울 동작구 을, 안효대를 울산 동구로 공천하고, 대신 이군현은 통영ㆍ고성으로 내려보내서 공천을 주게 되었다 [28] 대법관 - 감사원장 - 국무총리를 거치면서 법조계에서는 전설로 남은 인물이다. [29] 선수가 낮다고는 해도 서초구에서 뛰어난 지역구 관리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30] 발언의 내용도 문제가 많았지만 그 정몽준답지 못하게 토론의 자세 또한 엉망이었다. 자신의 질문에 무조건 ' 네, 아니오로만 대답하라'고 강요하며 토론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심지어 박원순 특유의 말투와 목소리를 성대모사하며 빨리 대답하라고 떼를 쓰는 등 초등학생들 싸움에서나 나올 법한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여론조사상 꾸준히 밀렸으니 정몽준 입장에서는 다급함도 있었을 것이다. [31] 아이러니한 것은 잘 안 알려져 있는 사실이기도 한데, 본래 정몽준과 박원순은 서로 목욕탕도 갈 정도로 친분이 있는 사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박원순은 현대그룹 법률고문 출신이다. 그래서 이 당시 일부 네티즌들은 서울시장 자리를 현대가 출신들이 겨룬다, 같은 집안 싸움 아니냐는 식의 우스갯소리도 했다. 선거 때는 네거티브로 모양새를 망쳤지만, 그래도 낙선 후에는 결과에 승복하고 얼마 안가 박원순의 집무실을 찾아가 축하해줬다. 기사. 원래는 축하만 하려고 했는데, 박원순이 서울시 고문으로 있어달라 몇 차례나 제안하자, "고문이라는 말은 너무 연배가 있어 보이고, 내가 나이도 좀 더 많으니 '정치 선배' 어떠냐"고 제안했다고. 여하튼 실제 서울시 고문으로 있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당시 서울시의 정책들 중에는 정몽준의 공약도 일부 실행된 것이 보였다. [32] 한국 정계에서 핵무장론을 이야기하는 정치인은 소수나마 있기는 했지만, 정몽준 정도의 거물이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사실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은 케네스 월츠가 중동 정세를 언급하며 차라리 핵확산이 중동 평화를 부를 것이라고 주장한 것의 동북아 버전으로 근거 없는 허튼 소리로 치부될 것은 아니지만 유불리를 따지면 불리함이 많을 것이라는 게 전반적인 평. 다만 연구원에서 주최하는 '아산 핵포럼' 등의 각종 행사에 참석해서 늘 언급하기 때문에 당시엔 꽤 주목을 받는 편이었다. [33] 현대중공업 주가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는 4조 원이었지만 2015년 기준으로는 조선업이 최악의 불황을 맞은 탓에 1조 7,000억 원대로 쪼그라들었으며 지금은 지주회사 전환으로 재산이 더 줄어들었다. 현재 재산은 11억달러다. [34] 문서 내에도 나와있지만 아들인 정예선에 가려져서 그렇지 정몽준 본인의 막말 워딩도 나름 화려하다. 외교통일위원회 국감일정이 변경된 것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화가 났는지 국회 수석전문위원에게 반말을 하기도 했다. [35] 대학교 통계학 교재에서도 평균값의 맹점에 대해 잘 나오는 사례다. [36] 현대중공업의 시가총액은 잘 나갈 때 40조대, 이후 많이 떨어지면서 현재 기준 8조액 정도이다. 정몽준의 재산이 전부 현대중공업 주식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조 단위의 자본이 빠져나가면 주가가 폭락하게 된다. 잘 나갈 때도 큰 타격이며, 8조대로 추락한 2014년 이후라면 회사가 무너질 수도 있다. [37] 흔한 지역구 초선의원처럼 국토위, 교육위, 문광위 등에서 지역구 예산 따내려고 들 필요가 전혀 없던 사람이다. 어차피 울산 동구는 현대 왕국이라 웬만한 건 다 현대 지원으로 지어진 것이었고, 6~7선 때인 서울 동작구 시절에도 선수도 높고 당 대표도 지낼 정도로 워낙 거물이라 굳이 국토위에 안 가도 지역 안건은 다 살필 수 있었다. [38] 김한표도 재산이 없는 편인데, 이 사람은 15-19대 총선에 무소속, 민주국민당 같은 군소정당에서 내리 출마해서 선거 자금으로 재산을 많이 까먹었다. [39] 현대그룹은 앞서 1988 서울 올림픽 정주영 주도하에 이뤄낸 경험이 있었다. [40] 2017 시즌부터는 서울은행 시절부터 현대 못지않게 한국 축구계를 꾸준히 후원해온 하나은행이 스폰서를 이어받았다. [41] 아프리카축구연맹 회장 이사 하야투가 정몽준과 함께 반 블라터 진영 핵심 인사로 자리했었고, 지금도 정몽준과 가까운 사이지만, 현재는 하야투가 거듭된 패배로 인해 친 블라터 인사로 분류되고 있다. 원래 아프리카가 하야투가 반 블라터 활동을 할 때에도 표 단속이 안 될 정도로 친 블라터 성향이 강하고. [42] 정몽준이 블래터 전 회장을 비난하면서 내세운 근거가 2022 카타르 월드컵 선정비리인데 이 점으로 나서자면 AFC에서 입지가 큰 아랍 측에게 분노를 받을게 뻔하다. 그리고 알 칼리파 AFC 회장, 알리 후세인 FIFA 부회장이나 알 사바 OCA(아시안 게임 조직 위원회) 총재 겸 FIFA 진행위원은 정몽준에 대하여 어떤 지지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다가, 알 사바나 알 칼리파는 알리 후세인 부회장이 FIFA 회장 후보로 나서지 않는다면 플라티니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당연히 한국 편 들어줄리가 없기에 공식적으로 플라티니 지지를 밝혔다. 이로서 아시아에서조차 지지도 못 받는 주제에 무슨 회장이 된다는거냐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43] FIFA 윤리위윈회가 차일피일하다가 제재 이유를 6개월이나 지난 후에 통보해줬기 때문에 정몽준은 항소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자격정지가 유지된 셈이어서 선거에 나갈 수 없었고 UEFA 사무총장 출신 잔니 인판티노가 9대 회장에 당선되었다. 정몽준은 FIFA 회장 선거와는 별도로 명예회복 차원에서 항소했지만 항소위는 제재를 다소 감경하는 데 그쳤다. [44] FBI의 FIFA에 대한 비리 수사 개시를 계기로 FIFA 내의 분위기가 달라져서 2015년 12월에는 블라터와 블라터가 일찌감치 후계자로 점찍어 두었던 미셸 플라티니가 함께 제재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플라티니는 2011년의 회장 선거 때 블라터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은 것이 문제되었다(플라티니는 2019년에는 카타르 월드컵 관련 뇌물죄로 체포까지 된다). 블라터와 플라티니는 재빨리 항소했는데 2016년 2월에 항소위는 두 인물에 대한 제재를 확정했다. 블라터는 85세가 되는 해까지 자격정지다. 불명예로 축구계를 떠났다. [45] CAS는 2018년 2월 9일자 50페이지짜리 장문의 판결문을 통해 FIFA의 정몽준에 대한 제재가 '중대하고 명백하게' 부당하다고 결론 내렸다. 4가지 이유다. 첫째, FIFA의 임원들은 본국이 개최지 선정에 나설 때는 본국이 선정되는 데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통상적이다. 둘째, 정몽준은 한 번도 윤리규정을 위반한 사실이 없다. 셋째, 정몽준은 항상 FIFA 내의 부패 문제를 제기하고 개혁을 역설해 왔다. 넷째, 정몽준은 오랫동안 FIFA와 축구의 발전에 공헌해 왔다. [46] CAS는 정몽준에게 씌워진 혐의는 블라터와 플라티니의 혐의에 비하면 그 정도가 미미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CAS는 판결문에서 FIFA가 시간끌기로 일관한 점을 특별히 비난하기까지 했다. 정몽준이 조사에 비협조적이었다는 대목에서는 FIFA를 매우 훈계하면서 블라터는 8일 만에 항소 결과를 받았고 플라티니는 9일 만에 항소 결과를 받았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O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The pot cannot fairly call the kettle black, especially when it itself is blacker.)이라고 덧붙였는데 이는 통상 판결문에서 잘 볼 수 없는 강력한 어법이다. [47] 다만 현대그룹은 왕자의 난을 겪으며 그룹이 분해되는 내홍을 겪었기 때문에 단순히 족보만 가지고 한데 엮기는 무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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