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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9 01:08:10

울산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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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성격4. 사건사고

1. 개요

대한민국의 NL계열 운동권 정치집단.

1991년 출범한 NL계열 운동단체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울산지부였던 민주주의민족통일 울산연합을 기원으로 하는 정파이다.[1]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을 거치면서 전국연합의 또 다른 지부인 '부산연합' 을 사실상 흡수하여 울산을 중심으로 부산, 경남지역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에는 새민중정당을 거쳐 현재는 경기동부연합과 연합하여 진보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2. 역사

본래 경남연합 산하의 지역연합이었으나 이후 독립하였다.

NL계열은 1987년 이후 선거국면마다 제도권 정치인 중에서 상대적으로 통일에 우호적인 김대중후보를 일관되게 비판적 지지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NL혁신 논쟁 속에서 일부가 독자 후보 및 정당론으로 돌아섰는데, 바로 경기동부연합과 울산연합이다. 두 그룹은 탄탄한 지역기반을 바탕으로 각종 선거에 후보를 내세웠고 특히 울산연합은 1995년 지방선거에서 울산시의원을 배출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민주노총, 독자후보론을 주장하던 PD계열과 손잡고 국민승리21에 참여해서 진보후보 권영길의 선거운동을 하였다.[2]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울산연합의 리더격인 김창현이 울산 동구청장 선거에 진보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28,436표(37.59%)를 받아 26,528표(35.07)를 받은 무소속 변재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같은 선거에서 울산 북구청장에 당선된 PD계열 무소속 조승수와 함께 최초로 진보성향 기초단체장이 나온 것이다.[3] 하지만 당선 23일 만에 민족민주혁명당 영남위원회 사건에 연루되어 1999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으면서 구속되어 직위를 박탈당하고, 1999년 재보궐선거가 열렸다. 울산연합에서는 울산여성회 대표이자 김창현의 부인인 이영순을 후보로 내세워서 선거에서 승리한다.

이후 꾸준히 울산지역 노동계를 바탕으로 활동하다가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4]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울산연합에서 최용규 후보[5]가 울산 북구에 민주노동당 간판으로 출마하지만 18,867표(41.78%)로 19,430표(43.03%)를 얻은 한나라당 윤두환 후보에게 근소하게 패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울산 동구에서 김창현 후보가 정몽준의 벽을 넘지 못하고 30%가 넘는 차이로 패배한다. 이에 비해 같은 민주노동당 내 평등파 소속인 조승수 후보는 울산 북구에서 윤두환 후보를 큰 차이로 꺾고 당선되어 울산연합 입장에서는 체면을 구겼다. 하지만 비례대표로 이영순 후보가 당선되어 울산연합 소속 국회의원을 만드는 것에는 성공한다.

2005년 조승수가 애매한 공직선거법 위반[6]으로 의원직을 잃고, 2005년 재보궐선거가 실시되었다. 여기서 울산연합은 민주노총 국민파[7] 정갑득 전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을 후보로 내세웠으나 열린우리당과의 단일화 불발 속에 22,835표(45.6%)를 얻는 데 그쳐 24,628표(49.1%)를 얻은 윤두환 후보에 근소하게 밀려 낙선했다. 단 두 개 뿐이었던 지역구 중 하나가 날라가면서 분위기가 다운된 건 덤.

이후 울산연합은 NL계(자주파)의 일원으로서 평등파와 당내 선거 패권주의 문제로 이런저런 갈등을 빚었는데,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주파의 지지에 힘입어 민주노동당의 후보로 선출된 권영길이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일심회 사건까지 일어나자 이전부터 쌓여있던 자주파의 패권적, 친북적 정치행위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평등파는 책임론을 주장하며 비대위 구성을 요구했다. 이 국면에서 리더격인 김창현은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에 불출마할 것을 발표했다.강력한 울산연합의 세력때문에 비례대표가 쉽게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을 포기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처럼 울산연합은 분당국면에서 인천연합과 함께 당권파 경기동부연합에 맞서는 당내 혁신파의 입장에 서나 끝내 분당을 막지 못했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평등파가 진보신당으로 분당해 나가면서 울산 지역의 진보단일화에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이 되었으나, 민주노동당 김종훈 동구위원장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사실상의 단일화가 진행되어 북구, 남구 갑/을, 중구에는 민주노동당이, 동구에는 진보신당이 진보단일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구에 출마한 이영희 후보는 16,621표(31.84%)를 얻는 데 그쳐 한나라당 윤두환 후보에 밀려 낙선, 남구 갑에 출마한 이영순 후보는 21,610표(36.8%)를 얻어 한나라당 최병국 후보에 밀려 낙선, 남구 을의 김진석 후보는 12,960표(26.71%)를 얻어 한나라당 김기현 후보에 밀려 낙선, 중구의 천병태 후보는 15,994표(21.39%)를 얻어 한나라당 정갑윤 후보에 밀려 낙선하면서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2009년에는 울산 북구 한나라당 윤두환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8]하면서 열린 보궐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후보로 울산연합 김창현과 민주노총 국민파 이영희가 경합하나[9] 결국 김창현을 합의추대하는 형식으로 정리가 되고 한나라당 박대동, 민주당 김태선, 민주노동당 김창현, 진보신당 조승수, 무소속 김수현의 5파전의 구도가 되었다. 반한나라당 단일화 요구가 거셌고, 여러 사정으로 단일화가 교착된 상황에서 민주당 김태선 후보가 김창현과 조승수의 단일화를 촉구하며 사퇴하기도 했다. 결국 투표 3일 전인 26일 여론조사를 통해 조승수 후보로 단일화가 되어 김창현 후보는 사퇴했고 본선에서 조승수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김창현 후보가 민주노동당의 울산시장 후보로 나왔으나 133,437표(29.25%)를 얻는데 그쳐[10] 279,421표(61.26%)를 득표한 한나라당 박맹우 후보에게 패배했다. 다만 북구청장에 출마한 윤종오 후보가 37,811표(56.44%)를 얻으며 당선된 것과, 남구청장에 출마한 김진석 후보가 66,478표(49.34%)를 득표해 단 1.4%p 차이로 낙선, 동구청장에 출마한 김종훈 후보가 36,550표(48.66%)를 득표해 3.6%p 차이로 낙선하는 등 기초단체장에서는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었고 광역의원 7석, 기초의원은 14석을 얻는 등 선전했다.

2011년에는 울산 동구청장이었던 한나라당 정천석 구청장이 지역언론사가 벌이는 여론조사와 관련해 금품을 건넨 죄로 구청장 직위를 상실해서 보궐선거가 열렸고, 울산연합 계열의 김종훈 후보가 2만9561표(47.30%)를 얻어 2만6887표(43.02%)를 얻는데 그친 한나라당 임명숙 후보를 누르고 울산 동구청장에 당선된다.

통합진보당 출범 과정에서는 처음에는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하는 듯 했으나 결국 경기동부연합과 함께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찬성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결국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통합연대( 진보신당 탈당파)가 함께 통합하는 형태로 출범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009년 재보궐선거 때 단일화로 공방을 벌였던 조승수와 김창현이 같은 울산 북구를 놓고 계파간 정면충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하는 우려가 있었으나 조승수 의원이 남구갑으로 피하면서 충돌을 피했다.[11] 하지만 야권단일후보로 나온 김창현 후보는 36,482표(47.62%)를 득표하는데 그쳐 40,116표(52.37%)를 받은 새누리당 박대동 후보에게 패했다. 본선경쟁력이 강한 현역의원을 밀어내는 모양새로 유리한 지역구에 출마했는데 패배했기 때문에 체면을 구긴 상황. 이 외에도 노동자 밀집지역 중 하나인 울산 동구에서는 당내 경선에서 울산연합 이은주 후보가 진보신당계 노옥희 후보를 경선에서 이겼으나 본선에서는 약 8%p 차이로 새누리당 안효대 후보에게 패배하고, 울산 남구 을에서는 김진석 후보가 새누리당 김기현 후보에 20%p 넘는 큰 차이로 패배하면서 울산연합은 결국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원래 동구가 지역구였던 김창현이 유리하다는 이유만으로 현역 의원인 조승수를 밀어내고 북구에 출마한 점,[12] 이로 인해 동구에 내세울 후보가 없자 시의원을 하고 있던 이은주를 사퇴시켜 경선에 참여하게 한 점,[13] 남구 갑에서 경선에 참여했던 이경훈 전 현대자동차지부장에 대한 논란 등으로 조직 이기주의라는 비판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에서 울산연합은 처음에는 국민참여당계열, 인천연합, 통합연대( 진보신당 탈당파)와 함께 진상조사위 결과를 수용하며 경기동부연합 이석기와 김재연의 사퇴를 압박했으나, 신당권파과 함께 하지는 않고 중도파의 입장에 있었다. 그러다가 당 지도부 선거에서 경기동부연합이 주축이 된 구당권파와 연합해 강병기 후보[14]를 지지함으로서 강기갑 후보를 낸 신당권파와 경쟁한다. 하지만 울산연합의 이러한 노력에도 결국 신당권파가 승리해 강기갑이 대표로 당선되고, 울산연합은 구당권파인 경기동부연합의 전횡에도 반대하지만 참여계와 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가 주도하는 분당 프로젝트에도 제동을 걸겠다는 애매한 입장에 서지만 끝내 분당을 막지는 못했고 울산연합은 경기동부연합과 함께 통합진보당에 남는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울산연합 소속이며 울산시장 후보로 나온 통합진보당 이영순 후보가 정의당 조승수 후보, 새정치민주연합 이상범 후보와 단일화에 합의했으나 통합진보당와의 연대를 금지한다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방침에 따라 무위에 돌아가고 이영순 후보는 결국 사퇴를 하고 만다. 기초단체장 선거도 부진은 이어져서, 현역 북구청장인 윤종오 후보가 야권단일화 불발 속에 33,877표(43.06%)를 얻는 데 그쳐 새누리당 박천동 후보에 밀려 낙선하고, 역시 현역 동구청장인 김종훈 후보도 야권단일화가 불발되면서 32,438표(40.44%)를 득표해 새누리당 권명호 후보에 밀려 낙선, 5회 지선 때 1.4%p차로 낙선한 남구청장 김진석 후보는 58,427표(39.30%)를 얻는데 그쳐 새누리당 서동욱 후보에게 크게 밀렸다. 결국 이번 선거에서 울산연합은 울산에서 기초의원 9석을 얻는 데 그쳤다. 새정치민주연합과의 단일화 실패가 큰 영향을 미쳤기에 부정경선 사태 이후 왕따신세가 된 통합진보당의 씁쓸한 위상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가 끝나고 난 다음 진보대통합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자 김창현 전 사무총장이 오마이뉴스에 이런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 기사에서는 크게 두 가지를 다루고 있는데 첫번째는 부정경선 사건에서 탈당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고,[15] 두번째는 내란음모 사건이 조작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창현은 중앙위원회 폭력사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나 대체적으로 경기동부연합와 비슷한 현실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정당으로 판정되어 해산되어 소속 정당이 사라지는 아픔을 겪는다.(현재 울산연합 출신 국회의원이 없으므로 의원직이 박탈된 의원은 없지만..)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경기동부연합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민중연합당에 참여하지 않고 '민주와 노동'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무소속으로 부울경 지역에 출마하였다. 지역구별로 진보성향 후보들과 단일화를 했는데, 창원 성산에서 정의당 노회찬 후보와 붙은 손석형 후보만이 탈락했을 뿐 울산 동구에서는 김종훈 후보가 노동당 이갑용 후보를 이겼고 울산 북구에서는 윤종오 후보가 두 번이나 울산 북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던 정의당 조승수 후보를 이겼다. 주로 민주노총 조합원 투표로 이루어진 경선 과정에서 자주파 특유의 조직력이 빛을 발했다는 평가. 이 조직력은 본선에서도 이어져 윤종오, 김종훈 후보 모두 여유있게 새누리당 후보를 따돌리고 원내 입성에 성공했다. 통합진보당이 해산되었지만 아직도 울산연합이 울산, 경남 지방에서 확고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박근혜정부의 노동 정책에 반발한 울산의 야당성향 지지자와 노동자들도 결집했다는 평가.

이후에는 '민중의 꿈'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진보정당 대통합 운동을 진행하다가 새민중정당 창당으로 이어지고, 이후 경기동부연합 민중연합당과 합당하여 민중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중간에 윤종오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는 등 어려움도 겪었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국민파인 민주노총 지도부의 주도 하에 울산 지역에서의 진보단일화를 거의 휩쓸다시피 했다. 울산시장 후보로는 울산연합 리더 격인 김창현으로, 윤종오 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인한 북구 재보궐선거 후보로는 전 민주노총 울산본부장 권오길로 단일화되었고, 북구/동구/남구청장 후보까지 모두 민중당으로 단일화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이 단일화에 참여하지 않고 각자 출마했고,[16] 그 결과 기초의원 1석을 건지는 것 외에는 모두 박살이 나버렸다. 김창현이 4.8%밖에 득표하지 못하고, 구청장 후보들이나 권오길도 10%대 초중반의 득표율을 거두는 데 그쳐 유의미한 득표율을 올리지도 못했다. 통합진보당 때인 6회 지선 때에도 울산에서 기초 9석을 거두는 등 선전한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뼈아픈 선거 결과.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중당 소속으로 부울경 여러곳에 출마하였으나 울산 동구 김종훈 후보[17]를 제외하고는 모두 의미있는 득표를 하지 못한 채 낙선하였다.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울산 동구 김종훈 후보가 동구청장에 당선되었다. 이는 12년 만에 최초로 원외정당에 소속해서 당선한 셈.

3. 성격

임미리의 책 <경기동부>[18]에서는 자주파의 3대 정파 인천연합, 경기동부연합, 울산연합을 각각 기업 조직, 군사 조직, 정치 조직에 비유하는데, 강력한 내부 규율을 가진 경기동부연합이나 세련된 방식의 운동을 하는 인천연합과는 달리 수많은 정파들의 각축장이었던 울산의 지역적 특성 상 울산연합은 정치적 감각이 남달랐으며, 따라서 NL내 다른 정파들하고 대립하기보다는 인천연합과 경기동부연합 사이를 오가며 세력을 유지했다.

일례로 울산연합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에서 처음에는 이석기와 김재연의 사퇴를 압박했지만 강기갑 강병기가 대결한 지도부 선출 과정에서 경기동부연합의 편에 섰고, 분당과정에서는 인천연합이 조직적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중앙으로 진출하는 실리를 챙기는 등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이기도 했다.

또한 상대적으로 학출(대학생 출신)이 주축이 된 경기동부연합에 비해 울산연합은 지역의 특성상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울산지역에서 큰 영향을 미치는 현대그룹의 노동조합들에 깊게 관여했다)했기 때문에 대중운동 노선에 철저하고, 대중의 눈높이에 민감하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경기동부연합과 같이 민혁당의 영향을 받아 친북성향은 강한 편인데, 그 특유의 균형감각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희석이 잘 되는 편이다.

4. 사건사고


[1] 2008년 전국연합이 해산하면서 지부인 울산연합 조직도 이때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이 맞다. 하지만 조직 공식 해체 이후에도 이들은 진보운동 안팎에서 끈끈한 인적, 사상적 네트워크를 이루어 활동해왔기에 편의상 이들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하는 그룹들을 통상적으로 울산연합이라고 지칭한다. 마치 친박, 친노 처럼.. [2] 단 이때도 조직원들이 선거운동은 권영길로 하고 실제 투표는 김대중한테 했다는 썰이 있다.(...) 이후에도 주요 선거때마다 상당수 NL계 조직들이 이런 행태를 보였다. [3] 울산지역 노동운동계의 협의로 북구는 PD 조승수, 동구는 NL 김창현으로 후보단일화를 한 것이다. 이 둘은 앞으로 10여년간 울산 진보정치계의 숙명의 라이벌이 된다. [4] 이때 울산연합은 지도부의 결정으로 지분을 보장받고 전원이 합류했지만, 경기동부는 개별적으로 참여하였다. 반면에 인천연합은 독자적인 진보정당을 비판하면서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고수하다가, 2001년 9월 전국연합의 군자산의 약속(소위 9월테제) 이후에야 뒤늦게 민주노동당에 합류하였다. [5] 하단 사건사고의 울산 북구 기습 출마 사건 참고 [6] 이때는 심지어 정치성향인 정반대인 한나라당 의원들까지 조승수 의원을 지지할 정도로 검찰수사와 재판에 대한 논란이 심했다. [7] NL에 친화적인 노동운동정파. 울산연합의 가장 큰 동맹은 울산지역 대기업노조 국민파 노동운동이었다. [8] 총선 당시 공약으로 건설교통부장관으로부터 울산~언양고속도로 통행료 폐지를 약속받았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등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기소돼 1·2심에서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았고, 100만원 이상의 형을 받았기에 의원직을 상실하게 된 것. [9] 이영희는 바로 1년 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산 북구 선거에 출마했지만 윤두환에게 밀려 낙선한 후보였고 김창현 후보는 울산 동구청장을 지냈지만 울산 북구에서 더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 하에 지역구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10] 이는 진보신당 노옥희 후보와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은 것도 득표율이 다소 저조한 원인이 되었다. [11] 조승수 입장에서는 울산연합의 거두인 김창현과 대립해서 계파갈등을 겪는 것이 부담스러운데다가, 경선에서 울산연합의 강력한 조직력에 맞설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 하지만 조승수는 남구갑에 가서도 현대차 노조위원장 출신 이경훈 위원장과 경선에서 대결해야했고(이 과정에서 이경훈 위원장 측에서 당비대납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경선 승리는 했으나 야권연대 과정에서 민주통합당 심규명 후보에게 패해 낙마하게 되었다. [12] 새누리당은 이 점을 선거운동에 써먹었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유세할 때 한 사람이 '조승수 북구 의원은 어디로 갔나요'라고 외치면 다른 사람이 '남구로 쫓겨갔대요'라고 받고, 다시 '그럼 지금 있는 사람(김창현)은 어디서 왔나요'라고 외치면 '동구에서 왔대요'라고 대답하는 등.. 결과적으로 김창현은 야권단일후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낙선했다. [13] 통합진보당은 의원직 사퇴로 인해 재보궐이 발생하면 그 비용을 물어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이는 계파의 이익을 위해 시의원직을 중간에 사퇴하고 총선에 출마한 이은주를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내로남불인 일. 그렇다고 당 내 후보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노옥희가 출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은주를 출마시켜 경선에서 승리시킨 것. 실제로 당시 새누리당에서도 이 점으로 이은주 후보를 공격했었고, 결과적으로 낙선했다. [14] 전농출신으로 정파색이 옅으나 경남지역에서 활동하며 울산연합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한다. [15] 김창현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비난하며 사퇴를 촉구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떠난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석기, 김재연 의원을 위해 표를 조직한 자들도 있었다는 것이 검찰 조사나 재판을 통해 밝혀졌고, 진상조사위는 경기동부계열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 아닌 일괄사퇴를 주문한 것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16] 민중당의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또 민주당의 높은 지지율을 생각해보면 민주당 입장에서는 딱히 단일화를 할 필요가 없었고, 선거 결과 실제로 그랬다. [17] 3자구도에서 33.88% 득표로 2위 [18] 이매진, 2014 [19] 현대자동차 부품 하청기업 [20] 거기에 최용규는 유세 도중 미제축출, 식민지 해방 같은 표현으로 NL적 색채를 노골적으로 들어내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다. [21] 최용규는 낙선 이후 진보정치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가 민중당 창당후 울산 노동위원장으로 복귀한다. 이상범은 이후 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울산 북구청장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2007년 민주노동당 분당사태때 당을 탈당했고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에 입당했다. 여러차례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패배하자 다시 민주당을 탈당하고 2017년 국민의당에 입당하였다. 이상범의 이런 철새행각 때문에 진보진영에선 아무도 이때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22] 정신분석학적 용어이다. 칼럼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