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9:03

덕수궁 인화문

인화문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5
영성문
상림원(배후림) 흥복전 의효전
흥덕전 장옹대 양희당
운교 생물방 소주방 어재실 양이재 함희당
사성당 우중배설청
내재실 선원전
좌중배설청
제기고
숙경재
돈덕전 생양문
환벽정 구성헌 덕경당 가정당 정관헌 수인당 양심당 포덕문
수풍당 흠문각 만희당 석조전 준명당 즉조당
명례궁터
석어당 함유재 구여당
중명전 평성문 석조전
서관
정원 중화전 덕홍전 함녕전 영복당 공시청 비서원 태의원 시강원
강태실 장방처소 광명문 내반원 궁내부 원수부
용강문 승녕부 전무과 중화문
인화문
소방계 조원문 금천교 대한문
운교 건극문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
덕수궁 인화문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덕수궁 대한문
德壽宮 大漢門
창덕궁 돈화문
昌德宮 敦化門
덕수궁의 원래 정문은 인화문이었으나 후일 폐쇄되고 대한문으로 바뀌었다.
정문 · 중문 · 금천교 · 정전 정문 · 정전 · 내정전 · 태후전 · 선원전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덕수궁의 원래 정문은 인화문이었으나 후일 폐쇄되고 대한문으로 바뀌었다.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colbgcolor=#e3ba62> 덕수궁 인화문
德壽宮 仁化門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 정동 5-1)
건축시기 1896년 (창건) / 1902년 (철훼)
파일:경운궁 인화문.jpg
<colbgcolor=#e3ba62> 인화문 사진
파일:경운궁 인화문 현판.jpg
인화문 현판[1]

1. 개요2. 이름3. 역사
3.1. 철거

1. 개요

덕수궁(경운궁)의 정문던 문. 현재는 없다. 위치는 후술.

2. 이름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 마찬가지로 ‘화(化)’자 돌림을 썼다.[2] '인화(仁化)' 뜻은 ‘어진(仁) 덕을 베풀어 교화(化)한다’이다.

참고로, 경운궁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기 전에 없어졌기에 엄밀하게는 경운궁 인화문이 맞다.

3. 역사

원래 임진왜란 당시 임시 행궁이었던 경운궁(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인조 연간 이후 즉조당과 주변 별당 몇 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이었다. 그러다 1896년( 건양 원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이 1년 뒤 1897년(건양 2년) 궁으로 돌아갈 때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이 아닌, 근처의 경운궁을 선택했다. 고종은 애초부터 환궁을 경운궁으로 하려고 했는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 공사를 실시했다.[3]

이 때 인화문도 지은 듯 하다. 확실한 건립 연대는 모르나, 1896년 11월 19일 민병석을 인화문현판서사관으로 임명했다는 1896년 11월 23일 자 《대조선국 관보》를 보아 그 무렵 완공한 듯 하다. # 일성록》과 《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할 때 인화문을 거쳐 수안문, 의록문을 통해 경운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
파일:인화문 앞 인파.png
<colbgcolor=#e3ba62> 인화문 앞에 모인 사람들[4]
이후 이 곳 밖에서 고종 외국 외교관들을 소견하고 #, 명성황후 국장 때 곡하고 영결하기도 했으며 # 만민공동회를 열게 했다. # 이렇게 인화문 앞은 황궁 정문이란 입지를 바탕으로 중요한 정치적 공간으로 쓰였다.

3.1. 철거

그러나 지은 지 불과 6년도 채 안 지난 1902년 경에 헐렸다. 인화문 앞이 좁아서 통행이 뜸했기에 철거했단 의견이 널리 퍼져있는데 틀렸다. 왜나하면 윗 문단에서 썼던 것처럼 인화문 앞은 여러 군중행사가 열릴 정도로 공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화문을 없앤 이유는 이렇다. 경운궁에 번듯한 정전( 중화전)을 지으려했지만 기존의 궁역으로는 비좁아서 남쪽으로 확장시키려 했는데 바로 인화문이 그 권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화문을 새로 넓힌 남쪽 담장으로 옮기면 안되냐고 할 수 있지만, 그러면 언덕 바로 앞에 놓여서 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철거당했다. # 어차피 큰 길에 있어 사람들과 접촉이 쉬웠던 동문(東門) 대안문이 있어 인화문 철거로 인한 불편함은 크게 없었다. 인화문이 사라진 이후 정식 정문은 대안문으로 바뀌었다. 다만 공사 초기에 헐리진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 승정원일기》 1901년 11월 2일( 음력) 기사를 보면, 법전[5] 공사에 들어가는 재목들이 인화문과 돈례문[6]을 경유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파일:중화문 인화문.png
<colbgcolor=#e3ba62> 중화문(왼쪽), 대한문(가운데), 인화문 헐린 흔적(오른쪽).
오른쪽에 담장이 끊긴 채 빈 터로 남아있는 곳이 인화문이 있던 자리이다.
철거 이후 인화문 터 바로 뒤에 새 정전 중화전의 정문 중화문이 들어섰다. 윗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중화문과 인화문 터의 거리는 도보로 불과 약 6 ~ 7 걸음 밖에 안 될 정도로 굉장히 가깝다. # 그리고 1904년 화재 이후 중화문을 남쪽으로 살짝 더 옮겨 재건했다. # 이를 미루어 보면 인화문 터는 현재 중화문 자리 언저리로 봐도 무방하다. 간혹 인화문 옛 터를 현재 덕수궁의 남쪽 담장 어딘가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1902년 경의 경운궁 궁역 확대를 고려하지 않은 듯 하다.
파일:PS01001001_pan000_2019_0909180636769_pan017742-000-01.jpg
<colbgcolor=#e3ba62> 창경궁 명정전 회랑에 걸려있는 인화문(왼쪽)과 대안문(오른쪽) 현판[7]
인화문이 헐린 후 현판은 한동안 창경궁 명정전 회랑에 걸려있었다가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 #

[1] 사진 출처. [2] 경복궁의 광문(光門), 창덕궁의 돈문(敦門), 창경궁의 홍문(弘門), 경희궁의 흥문(興門), (사라졌지만) 인경궁의 명문(明門) 등. [3] 하지만 몇 백 년을 버려진 곳을 임금이 거처로 삼으려니 대공사가 필요했고, 명목상으로는 중건이라 했지만 사실상 새 궁궐 하나를 새로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4] 사진 출처 - 국가기록원. [5] 정전의 다른 말. 중화전을 가리킨다. [6] 경운궁의 원래 중문(궁궐의 정문과 정전 사이에 있는 문)으로, 인화문과 거의 동시에 헐린 듯하다. 이후 중문은 새로 지은 조원문으로 바뀌었다. [7]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26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26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