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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8:34:00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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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édération indochinoise
프랑스 제국 식민지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문장.svg
국기 문장
파일:French_Indochina_1900-1945-fr.svg.png
1887 ~ 1945, 1945 ~ 1953 / 1954[1]
성립 이전 독립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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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국
프랑스령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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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남국
캄보디아 제1왕국
라오스 왕국
위치 인도차이나반도 동부 지역
수도 사이공 (1887~1902)
하노이 (1902~1945)
사이공 (1945~1954)
공용어 프랑스어, 베트남어
라오어, 크메르어, 중국어
종교 기독교, 불교
도교, 유교
정치체제 연방제, 프랑스의 식민지
정부수반 총독
통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피아스트르
면적 749,998 km2
구성국 파일:프랑스령 코친차이나 기.svg 코친차이나
파일:프랑스령 라오스 기.svg 라오스 왕국
파일:프랑스령 캄보디아 국기.svg 캄보디아 왕국
파일:응우옌 왕조 국기.svg 안남 보호령
파일:프랑스령 안남 기.svg 통킹 보호령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광저우만 조차지

1. 개요2. 역사
2.1. 식민화 과정 ( 1858년~ 1897년)2.2. 제도와 정치2.3. 교육 의료2.4. 경제
2.4.1. 강제된 근대화의 명과 암2.4.2. 금융2.4.3. 조세
2.5. 베트남 독립운동의 발아
2.5.1. 껀브엉 운동 ( 1885년~ 1888년)2.5.2. 판보이쩌우와 판쩌우찐2.5.3. 1920년 이후 세대의 독립운동가들과 협력자들
2.6. 베트남 국민당과 인도차이나 공산당 결성2.7. 제2차 세계 대전2.8. 몰락
3. 구성4.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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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프전쟁을 계기로 프랑스의 속국이 된 대남과 프랑스령 코친차이나, 라오스, 캄보디아를 합쳐서 만든 프랑스령 식민지 연방 지역이다.

조선 총독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은 문관도 부임했고, 무관이 올 경우도 역시 일본 육군 장군( 대장)이 대세인 조선 총독에 비해 이쪽은 프랑스 해군 제독들이 많이 취임한 것이 특징이다.

좀 예전 문헌엔 '불령 인도지나(佛領印度支那)'라는 음역어로 나온다.

2. 역사

2.1. 식민화 과정 ( 1858년~ 1897년)

식민화 이전, 대남에는 프랑스 가톨릭 신부 피에르 피뇨 드베엔(Pierre Pigneau de Behaine)의 도움을 받아 떠이선 왕조를 타도하고 왕위를 찬탈한 자롱 황제가 응우옌 왕조를 세웠었다. 자롱 황제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었던 천주교들을 용인하면서도 세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해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활발한 빈민 구호 운동과 전도 운동으로 천주교는 신자 수를 팽창시켜서 몇십년 뒤 30만명에 달했고, 조제프 마흐샹을 위시한 일부는 응우옌 정권을 전복하려는 레반코이[2] 반란에 가담하는 정치적 위협으로 변모한다. 그러지 않아도 자롱의 아들 민망 황제와 손자 티에우찌 황제가 중앙집권화와 원리주의적 유교사회의 건설을 주요 정치적 어젠다로 삼고 있었던 터라, 천주교 활동은 일부 도시들로 제한당하고 나머지 선교자들은 출국령에 처해진다. 출국령에 불응한 선교사들이 체포되어 감옥에서 사망하자 프랑스 천주교 교회는 무력으로 베트남을 개방해달라고 정치권에 압박을 넣는다. 1847년에 프랑스는 다낭을 공격하며 보복했고 티에우찌와 아들 뜨득 황제는 천주교 핍박 정책을 강화한다. 1857년에 두 명의 스페인 선교사가 처형당하자, 이를 명분 삼은 나폴레옹 3세는 1858년에 해군 장교 리고 드즈누이에게 전함 14척과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3천명을 붙여주어 후에와 다낭을 침략하게 한다. 안 그래도 당시 프랑스가 중국 시장에 대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대륙부 동남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아편전쟁으로 돈맛을 본 프랑스 기업인들, 그리고 군사력 증강과 군공에 목말랐던 프로스페르 샤스루-로바 장관 휘하의 해군도 식민지를 개척하라고 정부에 로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반면 대남은 인구의 8~10%를 앗아간 1840년대의 대기근과 콜레라 유행으로 민심이 사나워진 상태였다. 19세기 초에 415개의 크고 작은 폭동들이 일어났는데, 하급관리이자 시인인 까오바꽛(Cao Bá Quát)이 주도한 1854년에 미르엉 농민봉기 때 불만이 절정에 달했다. 응우옌 정부는 구호정책을 실행하지만, 크메르족, 참족, 따이족(Tày)이나 천주교, 불교종파인 브우썬끼흐엉교(Bửu Sơn Kỳ Hương)에 밀려 특히 북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

하지만 3천명은 수도 후에나 다낭을 공략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었다. 명장 레딘리 도통사와 응우옌찌프엉 남부 경략사가 프랑스 전함 6척을 격파하고, 전쟁이 수개월간 교착상태에 빠지자 드즈누이는 물자 공급을 끊기 위해 농업의 중심인 자딘(嘉定/Gia Định)공격을 결정한다. 베이징 조약 체결로 제2차 아편전쟁이 끝나고 지원군으로 보강된 프랑스 원정군은 자딘을 함락한다. 뜨득이 남부 국민들에게 반불 봉기에 착수하라고 호소하지만, 대남 남부(비엔호아, 자딘, 미토 3성)는 1862년에 드즈누이의 공세에 떨어진다. 제1차 사이공 조약(임술화약)의 일환으로 베트남은 전쟁 배상금을 물고, 캄보디아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고 남부에 프랑스 식민지 코친차이나의 설립을 인가한다. 뜨득은 판타인잔을 대불 사절단의 전권대신으로 임명하고 나폴레옹 3세를 접견하게 해서 빼앗긴 영토를 사들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얼마 뒤 판타인잔이 경략사를 맡고 있던 남서부의 3성과 캄보디아도 점령당하지만, 프랑스 본토의 멕시코 전쟁, 보불전쟁, 파리 코뮌 등 위급한 문제들로 잠시 팽창이 멈추게 된다.

1873년 즈음 본국의 문제들이 해소되자, 코친차이나 총독 쥘 뒤프레와 프랑시스 가르니에는 홍강 통행법을 어긴 프랑스 상인 장 뒤퓌(Jean Dupuis)의 감금을 문제삼아 본국의 허가도 없이 하노이를 공격한다.[3] 뜨득은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북부 유지들이 중국 남부의 군벌부대 흑기군에게 개입을 요청해서 사건은 무장투쟁으로 번진다. 흑기군이 가르니에 장군을 죽이고 진남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응우옌 왕조는 모호한 갑술화약(Traité Philastre)을 맺어서 잠시나마 독립을 보존할 수 있었다. 여기서 모든게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은 보불전쟁에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결국 1881년에 "통키누아"(tonkinois)라는 별명을 얻을만큼 열정적으로 식민정책을 주창했던 국무회의 의장 쥘 페리가 앙리 리비에르로 하여금 하노이를 점령하게 한다. 뜨득은 이번에는 관군을 파병해 정면대응했고, 청나라도 공식적으로 흑기군과 태평천국 진압에 앞장섰던 광서군과 관군을 파병함으로써 참전한다. 청-대남 연합군은 리비에르를 꺼우저이 전투에서 사살하고 프랑스군을 저지하지만, 투언안 전투에서 쿠르베 제독이 이끄는 지원군에게 참패한다. 청군은 썬떠이 전투와 박닌 전투에서 잇따라 패배하고, 1884년에 톈진 조약으로 대남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한다. 대남은 차례로 통킹과 안남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1차 후에 조약(Traité Harmand, 1883년)과 2차 후에 조약(Traité Patenôtre, 1884년)을 조인한다. 하지만 배상금 지불과 박레에서 청나라의 철군과 늦어지자 프랑스는 다시 개전한다. 자세한 내용은 청프전쟁 참조. 요약하자면, 청프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2차 톈진 협정에서 전년도에 조인한 조항들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리고 독립운동 문단에서 더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대남 조정의 대신 일부가 항복했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고, 껀브엉이라 부르는 저항군의 잔당은 1897년까지도 지역적으로 독립적인 행정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암의 조공국들이고 식민화 이후 라오스로 묶일 루앙 프라방 왕국, 비엔티안 왕국과 참파삭 왕국은 1886년에 탐험가 오귀스트 파비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걸 인정치 않은 시암은 영국이 지원할 것을 예상하며 1893년에 프랑스측에 항의했지만, 프랑스는 탐험가 그로규랭을 죽인 것을 빌미로 차오 프라야 강을 건너 팍남을 폭격한다. 시암은 영국의 중재 하에 독립은 유지했지만 라오스의 점령을 인정해야 했고, 프랑스군의 철군을 흥정하기 위해 1907년에 캄보디아 영토(바탐방, 씨엠립, 시소폰)를 추가로 할양해야 했다. 이것은 후술할 프랑스-태국 전쟁의 원인이 된다.

2.2. 제도와 정치

1861년부터 1879년까지를 아홉 제독의 통치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선무(宣撫, pacification) 정책들로 민심을 안정하고 저항군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통치 양식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서 정책들이 실험적인 성격을 띠었다. 초대 코친차이나 총독인 사르네 부제독과 2대 총독인 보나르 해군 소장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들이었고, 당시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들이 모조리 사퇴해서 후에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통치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 제독이 부임한 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간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졌다. 이때 언어학자 쯔엉빈끼(Trương Vĩnh Ký)가 부역하면서 제독들에게 문화적 교두보 역할을 했고, 문화 통역 학교의 교수로써 꾸옥응으를 퍼뜨리는데 기여한다. 1879년부터 민정이 시작되면서 코친차이나 식민의회가 창설되고, 1885년에는 안남 고등판무관이, 1886년에는 통킹 고등판무관이, 1887년에는 인도차이나 연방이 제도화되고 인도차이나 총독부가 설치된다. 하지만 껀브엉 잔당들을 진압하고 영토 전역을 거의 완전한 통제해서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게 된 것은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의 임기부터다.

인도차이나 연방은 하나의 정치체가 아닌 말 그대로 연방이었다. 캄보디아, 라오스, 통킹, 안남, 코친차이나는 느슨한 재정적 연대로만 묶여 있었고[4], 코친차이나를 제외한 4국은 모두 형식적으로는 보호령임에도, 실질적인 통치방식이 각자 달랐다. 두메르는 1897년에서 1902년 사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영국령 인도를 모방해서 행정과 재정부문에 있어 총독부의 권한을 강화시킨 제도를 도입했다. 총독은 입법권, 군사권, 외교권, 관료 일부를 직접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 재정안 수립, 조정부터 결재까지 하는 재정권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1911년 10월 20일 선포된 칙령으로 총독의 권한은 더 공고히 규정되고 강화되었다. 이러한 중앙집권화 탓에 행정은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고, 유럽인들이나 유럽식으로 교육받은 인도차이나인들로 고용해서 인건비가 비쌌다. 공무원은 수천명에서 2만명에 불과했지만 급여는 인도차이나 예산의 25%에서 57%에 육박했다. 통킹에서 안남에 상주하는 황제를 대표했던 경략사가 폐지되고 총독 휘하에 있는 고등판무관으로 대체되면서 통킹은 명목상으로만 보호령이지 사실상 직할령이 되었다. 황제는 베트남 민족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상징적 도구로 유지되긴 했지만 국고가 몰수된 터라 안남 내에서까지 실권을 잃어버린 허수아비였다. 황제와 마찬가지로 기존 관료제도는 유명무실해졌지만, 사회인식상 1909년에 중단되기 전까지 과거시험은 아직도 출세가도였고 판쩌우찐과 같은 몇몇 깨어있는 관리들은 민족주의적 근대화에 힘쓰거나 프랑스 당국이 허락하는 선에서 민생을 회복하려는 개혁 안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의 권한이 턱없이 적었고 프랑스 당국이 봉급을 응우옌 시절의 몇 배로 인상하는 회유 정책을 펼치자 이들은 무기력하고 부패해졌다. 게다가 후에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라고 볼 수 있는 기밀원(院機密/Viện Cơ mật)은 1895년부터 프랑스인이 의장직을 맡았고, 기밀원의 안건들을 프랑스 대표가 부서(副署)해야 결재될 수 있었다. 1891년에 부임한 장마리 드라느쌍(Jean-Marie De Lanessan) 총독은 예산 문제, 조정관료들의 불만과 프랑스 관료들의 문화적 몰이해 때문에 통킹 안남 분리 정책을 완화하고 조정관료들에게 소정의 자치권을 허용한다.

코친차이나는 예외적인 케이스로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지니고 있었고 두메르 이전부터 안정된 행정 시스템을 이미 구축했었다. 예컨대 토착민들을 포함한 선거인단이 직접 선거로 독자적인 조세와 재정 운용을 할 수 있는 사이공 시의회와 코친차이나 식민의회를 선출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코친차이나가 인도차이나 토착민들의 유사 자치령은 아니었던게, 식민의회의 실세는 식민의회 종신의장과 사이공 시장을 지낸 폴 블랑쉬라는 사업가였다. 식민의회는 재정적 독립을 위해 총독부와 알력다툼을 자주 벌였다. 두메르가 통관세와 아편, 술, 소금에 대한 국가 독점 사업으로 유지하던 세수를 직접세로 늘리고자 코친차이나에 압박을 넣어 조세권의 일부를 얻어낸다. 가난한 라오스의 세수까지 부담하게 된 코친차이나는 이걸 계기로 총독부에 불만을 갖게 된다.

프랑스 식민화가 응우옌 왕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킨 것과 반대로 라오스 루앙프라방 왕국이나 캄보디아의 경우에는 오히려 프랑스 통치 하에 왕과 기존 엘리트의 위신이 상징적으로나마 강화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민망 황제 시절에 캄보디아는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쩐떠이성이라는 일개 지방으로 강등되었다가 시암의 반대로 겨우 속국 지위를 존치했다. 캄보디아 관리들은 적극적인 베트남어 교육을 받았으며, 꼭두각시 앙 메이 여왕은 대남 황제 멋대로 폐위당했다가 다시 복직되길 반복했다. 라오스의 왕국들 역시 이미 대남과 시암의 속국으로 전락해버린 상태였다. 프랑스 치하에서 라오스/캄보디아 왕과 엘리트는 존폐 위기는 면했지만 그렇다고 식민화의 수혜자는 아니었다. 베트남에 비해 둘의 경제적 가치가 적었기에 당국이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까닭이었다. 밀림이 우거지고 인구도 적은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5], 베트남에 위치한 거점으로부터 접근성도 좋지 않았으며, 라오족 외에도 므엉족, 흐몽족을 포함한 고산민족, 타이족 등 민족적으로도 잡다해서 정치적 위험성이 컸던 탓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다. 이걸 방증하듯, 베트남 지역에 프랑스인 관료들이 5천명 정도였던 것에 비하여, 라오스에는 24명밖에 없었다. 총독부는 캄보디아/라오스 농촌을 통치하기 위해선 앞서 언급한 값비싼 관료주의보단 토착 귀족들과 지주들에 의존했고, 도시에는 베트남인 행정가들을 대거 기용하고 이주시켰다. 이것은 라오스/캄보디아인들이 게으르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인데[6], 시암 접경 지역 군인과 인프라 건설 인부까지 베트남인들로 기용하는 마당에 당연히 라오스 캄보디아의 도시 엘리트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화는 크게 두 가지 담론으로 정당화되었다. 프랑스 본토에서는 "전제군주"(despote)로부터 억압받는 민족들을 해방해야한다는 오리엔탈리즘적 "문명화 사명"(mission civilisatrice) 패러다임이 주된 담론이었다. 일례로 나폴레옹이 안남과 전쟁을 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선교자들은 프랑스군이 후에를 공격하면 베트남인들이 압정에 맞서 호응하고 같이 봉기할 것이라 주장했다. 나폴레옹이 3천명이라는 가소로운 숫자의 군대만을 보낸 것을 볼 때, "아시아 전제정론"은 방편적인 명분이 아니라 실제로 당시 유럽인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던 패러다임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지에선 안남-프랑스 협동론이 주요 담론이었다. 인도차이나인들의 상호주관적 정체성을 다룬 크리스토퍼 고샤의 Going Indochinese에 의하면, 인도차이나 베트남인들에게 애국과 프랑스와의 협력은 상호배타적인 행위가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인도차이나 전문가 쥘 아르망은 시암의 위협을 경제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베트남인들을 순종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식민화를 베트남과 프랑스의 합작으로 포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응우옌 왕조의 숙원인 "남진", 즉 베트남 제국의 팽창을 실현하기 위해 프랑스가 단지 운전대를 잡는 것이라 홍보했던 것이다.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을 잇는 도로망이 구축됨에 따라 많은 베트남인들이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인도차이나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수용하고 그것을 베트남의 역사적, 공간적 단절이 아닌 연속선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친불파 사상가 팜퀸(Phạm Quỳnh)은 남진 정책이 거의 완료된 시점에서 서진 정책은[7] 불가피한 미래였고, 단지 프랑스 개입에 따라 앞당겨진 것으로 기술한다. 후술할 알베르 사로의 프랑스-안남 합작(Collaboration franco-annamite) 정책, 20년대의 친프랑스 민족주의자들인 헌법주의당의 존재, 2차 세계대전 시절에 베트남 민족주의를 프랑스 당국이 어느 정도 지지한 것도 유사한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도차이나인"이라는 국적이 제도화되지 않았고 안남/통킹/코친차이나, 캄보디아, 라오스라는 부차적 법적 정치체가 소멸하지 않았기 때문에[8] 인도차이나적 정체성은 기존 정체성에 덮어씌워졌고, 인도차이나의 범주 내에서도 민족적 라이벌 의식이 존속하게 되었다. 캄보디아 정체성을 보호하고자 하고, 베트남인 이주를 제한하거나 이주자에게 캄보디아 국적을 부여해서 동화하려고 했던 캄보디아 엘리트와 반대로, 베트남인들은 캄보디아를 자유롭게 출입하기 위해 인도차이나 국적을 제도화하려고 했다.

2.3. 교육 의료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베트남을 지배할 때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 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9],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10]라는 피진 프랑스어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을 수 있었다. 일부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불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산을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동화 정책의 초기 담론과 실상에는 어느 정도 괴리가 있었기 때문에 공식 입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예컨대 당국은 교재들과 커리큘럼을 프랑스와 완전히 같은 것을 사용할 것을 요구했지만, 인도차이나 초등학생들에게 인도차이나인들의 시조가 갈리아인이라고 납득시키는 것은 당연히 어려웠다. 따라서 교사 재량에 따라 현지 언어로 강의하거나 신교재를 사용하는 등 인도차이나의 특성을 반영한 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1900년대 초반을 전후해서 공식 입장도 동화 교육의 한계의 지적, 인도차이나에 적합한 교육을 도입하자는 의견을 포용하는 태세로 전환했다. 일례로 저학년 학생들을 겨냥한 장 마르케(Jean Marquet)의 베스트셀러 "꽃 다섯 송이: 인도차이나 설명서"에는 쯩 자매, 레러이, 쩐흥다오, 딘보린에 대해 호의적으로 서술하는 대목이 있었다.

폴 두메르는 강력한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였다. 기존 과거 제도는 1909년에 중단되었고, 서당을 포함한 전통 교육기관들은 1918년에 강제 폐관되었다. 폴 보 총독과 두메르는 프랑스인과 소수 엘리트들을 위한 프랑스 교육을 시행했고, 알베르 사로 총독이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늘리는 정책을 펼쳤지만 보편적인 교육을 실행한 것은 아니었다. 지방 편차도 심해서 초등교육은 거의 대부분 베트남 위주로 이루어졌고 심지어 베트남마저 내륙 지방에는 학교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베트남의 공립 초등학교 학생 수는 1920년 12만 6천명에서 1943~44년 70만명으로 증가했다. 1943년 베트남의 인구가 2,260만으로 추산되므로 이는 전체의 3.1%에 해당한다.[11] 베트남보다 열악한 캄보디아, 라오스 대부분은 면적당 학생수가 10제곱 킬로미터당 1명 이하였다. 캄보디아의 공립 초등학생은 1945년 3만2천명으로 절대수로나 인구 대비 비율로나 베트남보다 훨씬 뒤처졌다.

대학 과정을 마친 베트남인 수는 600~1,200명 사이였다. 또 캄보디아와 라오스 출신 대학 진학자는 각각 연간 5명에서 20명 정도밖에 안 됐고,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초등교육만을 이수한 인도차이나인 수와 고등교육 이수자의 괴리는 인도차이나인의 엘리트직 진출을 저지하려는 당국의 의도로 설명 가능하다. 중/고등학교 교육은 토착민과 프랑스인들이 분리했으며, 토착민이 프랑스인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려면 연줄을 이용하거나 별도의 시험을 봐야했다. 운 좋게 고등교육을 이수한 인도차이나인들은 주로 행정직이나 교육직으로 진출했고, 그마저도 동등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백인에 비해 차위직을 맡았다. 최초의 인도차이나 출신 물리학 박사생(호앙티응아)은 1930년에서나 졸업했다.

식민당국은 의료 면에서는 어느 정도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었다. 천연두 백신이 의무화되어 1908년부터 인도차이나 전역에 퍼졌고, 냐짱과 사이공에 페스트균을 분리한 알렉상드르 예르생과 BCG의 발견한 알베르 칼메트의 추진으로 파스퇴르 연구소와 하노이 의학 대학이 1902년에 설립되어 백신 대량 생산과 연구를 위한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콜레라도 1931년 마지막 유행 이후 감소세를 보였다. 그럼에도 접근성이 어려운 지역이 많아 접종된 사람은 전체 인구의 절반에 불과했다. 또 천연두에 비해 말라리아, 트라코마와 페스트 퇴치는 덜 성공적이었다.

2.4. 경제

2.4.1. 강제된 근대화의 명과 암

사실상 본토로 간주된 식민지였던 알제리와 달리 본국과 거리가 먼 인도차이나는 경제적 식민지였던만큼 인도차이나 거주 프랑스인들은 극소수였고 그마저도 절반 이상은 군인과 가족이었다.[12], 프랑스인의 보조를 맞춘것은 과거부터 쩌런(Chợ Lớn)[13]에 정착해 상공업을 담당하던 중국계 베트남인, 이른바 화교(Hoa)였다. 화교는 응우옌 왕조와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민망 황제 시절 쌀 수출 금지령을 무시하고 암거래하다 징벌받기도 했고, 다른 소수민족/종교인들과 폭동에 자주 가담하며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 식민시기가 시작되자 이들은 재빠르게 새로운 지배자들과 발맞춰 부유한 도매상, 중간관리층, 지주가 된다. 이 프랑스인들을 포함한 10%의 프랑스-화교 엘리트 계층은 전체 토지와 부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화교들은 식민화 이래 중국에서 꾸준한 이주로 초기 20만명대부터 1940년에 41만명까지 늘었다. 화교들 사이에선 내혼이 지배적이었고 대다수가 융화를 거부했기 때문에 현지인들과 관계는 당연히 분쟁적일 수밖에 없었다. 1차세계대전 동안 베트남 부르주아들이 급속히 성장해서 발언권이 강해진 뒤 화교와 대결 구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1919년에 사이공 아믈랭 도로의 다방들을 독점하던 화교들이 가격을 급격히 인상한 것에 분노해서 헌법주의자 은행가 출신인 응우옌푸카이 주도 하에 화교 상점들을 보이콧했고, 1927년에 하이퐁에선 100명이 넘는 사상자가 속출한 반화교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교들은 베트남 전쟁까지도 중요한 경제 행위자였고, 종전 직전엔 쩌런에만 150만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1976년에 공산당이 사이공에 진입하면서 화교 부르주아와 지주들의 재산을 몰수했을때 지역사회가 호응한 배경에는 장기간 침적된 민족 감정이 있었다.

식민 경제가 가져온 근대화의 수준은 산업 분야마다 달랐다. 인도차이나의 경제는 주로 농업, 수산업, 전통 수공업, 광업이 인도차이나 총생산량의 4분의 3을 형성했고, 이중에도 쌀 농업은 특히 비중이 커서 총수출액의 60~75%를, 경제활동인구의 90%를 차지했다. 코친차이나는 기존 쌀 수출 지역이던 자바, 방글라데시, 하미얀마에 비해 인구 과잉이 없다는 강점을 보유하고 있어서 매혹적인 투자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소작이 일반적인 경작 방식으로 자리잡아서, 코친차이나 서부에는 파산한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받아들이는 화교 사채업자 겸 대지주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기술적인 진보는 이루어지지 않아서 화학 비료, 도정 기계의 사용은 1930년까지 전무했다.[14] 당국은 1866년부터 강제 노역을 동원해서 재배한 쌀을 쩌런의 도정공장과 바다까지 연결하는 600킬로미터의 수로를 건설했고, 1869년에 1946년까지 농지를 21배 늘리고 인도차이나를 버마 다음가는 세계 2위 쌀 수출국으로 도약시키는데 성공한다. 쌀 총생산량의 6분의 1이 수출되었는데 수출 사업의 80%를 화교와 프랑스인 이익단체가 관리했다. 20세기 초부터 프랑스 자동차 산업이 비약적인 성장을 하면서 고무 수요가 늘어나자 안남과 코친차이나에 고무나무 플랜테이션을 만들었다. 고무 재배는 현지인의 피눈물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작업환경은 지옥을 방불케 했고, 식민당국은 사실상의 강제노동제를 통해 농장에 노동력을 공급했고[15] 그들이 관리자들의 폭력과 과로, 굶주림이나 질병으로 죽어가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미쉐린 소유 농장은 아예 도살장이라고 불렸는데 1917년부터 1944년까지 고용된 노동자 4만5천명 중 2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벼농사와 달리 광업은 라오스, 캄보디아를 포함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1890년부터 통킹의 꽝옌과 타이 응우옌 안남의 농썬 지역에서 무연탄과 석탄이 발견되자, 프랑스 자본은 프랑스 통킹 석탄 회사와 동찌에우 석탄 회사를 설립해서 채굴에 착수한다. 유럽, 홍콩, 싱가포르, 일본의 수요 증가가 석탄 생산을 견인했다. 1900년대부터 인도차이나는 20만톤의 석탄을 수출하기 시작했고, 1939년에는 180만톤으로 동아시아에서 만주국 다음가는 석탄 수출국이 된다. 아연과 주석 채굴 또한 1920년 중반부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공업은 직물, 담배, 맥주, 시멘트 공장들이 있었는데 통킹과 코친차이나의 면화 가공 공장의 직원은 수만 명에 달했다. 이 공장들이 생산한 제품들은 프랑스 식민제국의 교역로를 통해 프랑스 본토와 식민지 각지로 향했다. 이외에도 발전소와 조선소, 유리, 도자기, 알코올, 기름, 비누 공장 등이 있었는데 국내 수요 충족에 그쳤다. 인도차이나의 경제가 발전하고 식민제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제국의 진주"(perle de l'Empire)라는 별명을 얻었다.[16]

인도차이나의 주민들 거의 대부분이 근대화의 혜택을 입기는 했으나, 그 크기는 지역과 계층별로 편중되었다. 베트남의 해안도시와 도시민들은 근대화의 혜택을 가장 크게 입었다. 1937년 사이공은 프랑스 본토와 식민지를 통틀어 6위의 물동량을 자랑하는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영국의 싱가포르와 경쟁할 정도였다. 하이퐁 다낭 등 다른 해안도시들도 항구시설과 철도, 병원, 공항 등이 들어섰고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상업 중심지인 해안도시들의 성세보단 못해도 하노이 또한 천년고도라는 정치적 상징성을 무시할 수 없어 인도차이나의 정치 중심지로 육성되었고 총독부와 우체국, 언어학교 등 근대적인 시설들이 들어서 인상적인 도시경관을 자랑했다. 식민지배가 끝날 때까지 인도차이나는 근대화된 해안도시와 전통적인 생산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륙의 농경사회가 두드러지게 다른 모습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농업의 상업화가 가속화되고 철도와 도로, 공장들이 건설되면서 상공업 쪽의 노동자들이 급격히 불어났다. 이들은 상류층 도시민 다음으로 근대화의 혜택을 크게 입었지만 여전히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베트남 북부와 남부를 잇는 남북철도 건설은 중국 시장을 정복하겠다는 목적으로 건설되었고, 열악한 건설 환경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상당한 인명피해를 수반했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건설된 철도들은 후일 활발한 노조운동의 근거지가 된다. 다만 노동자의 성장을 과대평가하면 안 되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광공업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샤를 로브캥(Charles Robequain)[17]의 L'évolution économique de l'Indochine française(1939)에 따르면 1930년대 말 베트남에서 근대적 광공업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는 최대 12만 정도였고, 다른 추산치도 1930년 10만 명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 가운데 최대치인 12만을 선택해도 1936년 베트남 인구(1,900만)의 0.6%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18] 이 비중은 1936년 0.2%에 머물던 네덜란드령 동인도나 역시 비슷했던 영국령 버마에 비하면 높지만, 1934년 일제강점기 조선의 3.3%에 비하면 낮았다.[19]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당국으로부터 외면당했다. 1910년대까지 별 개발이 진척되지 않다가, 파라 고무나무 식목업, 명주 등을 생산하는 직물공장, 증류주 제조소와 목화 산업이 드물게나마 발전했다. 이후 당국은 라오스에서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구베트남 남북 삼각주 지역에 비하면 극소액의 투자만을 받았다. 현지에 파견된 프랑스인 관리의 숫자도 베트남에 비하면 극소수였다. 이들의 보조를 맞춘 것은 현지의 지주와 귀족, 그리고 대월 시절부터 이 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던 베트남인 관리들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방치되었다고는 해도 총독부 당국은 인프라와 농업에 대한 최소한의 투자는 했으며 1930년대 캄보디아는 쌀과 후추 재배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통계청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1939년 수공업 숙련노동자는 15,323명으로 코친차이나와 비슷했다. 그러나 라오스만큼은 소규모 벌채만 이루어질 뿐 식민통치가 끝날 때까지 거의 방치되었다. 1939년 같은 해 라오스의 수공업 숙련노동자는 1,225명에 불과했는데 이마저도 목공이 265명으로 가장 많았다.

2.4.2. 금융

조폐권은 1875년에 설립된 인도차이나 은행이 보유하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은행은 중앙은행의 역할과 유일한 대형 상업은행의 역할을 겸하고 있어서 금융업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7개의 영국 ( HSBC, 인도 공인 은행), 프랑스, 중국 계열 은행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인도차이나 은행이 지배적이었다. 이들은 총독부는 물론 프랑스 본국 정부와도 대립각을 자주 세웠으며, 총독부가 제안했던 미온적인 개혁정책에도 반대해서 인도차이나의 발전을 발목잡는 세력이었다. 식민화 이전엔 아연, 구리와 은으로 주조하는 라오스의 랏(lat), 캄보디아의 티칼(tical), 푸앙(fuang)과 앗(att), 그리고 베트남의 전(錢)이 통용되었다. 프랑스 당국은 기존 화폐 제도를 이웃 스페인과 영국 식민지가 사용하던 은, 즉 피아스트르(piastre)로 통합시켰다. 기존 화폐를 피아스트르에 고정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된 화폐 개혁은 자연스럽게 투기와 혼란을 야기했다. 농촌에서는 거래가 적고 화폐유통속도가 느려서 기존 화폐를 고수하는 지역들이 많아 신화폐가 침투하는데 수십년이 걸렸다. 피아스트르는 은본위제 특성상 상당히 불안정해서, 프랑스 프랑 기준 피아스트르는 1864년부터 1902년까지 325%의 인플레이션을, 1915년부터 1920년까지는 -633%의 인플레이션을 보였다. 간혹 금본위제나 피아스트르를 프랑에 고정시켜서 안정화시키자는 의견들이 있었으나, 환전 차익으로 돈을 벌던 인도차이나 은행이 거부해서 무산되었다. 1차 세계대전 때문에 프랑이 불안정해지자 프랑에 고정하자는 의견은 잠잠해지는 듯 싶었지만, 1928년에 피아스트르의 가치가 급락하고 중국이 은본위제를 포기할 조짐을 보이자 인도차이나 은행은 금본위제를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

2.4.3. 조세

인도차이나, 특히 안남과 통킹의 독립운동의 진압은 초기 식민당국이 계산했던 수치를 크게 상회했다. 당국이 투입한 액수를 1914년 프랑의 가치로 집계한 결과 1859년부터 1895년까지 코친차이나에서 1억5,574만8천 프랑, 1874년부터 1895년까지 안남과 통킹에서 5억9,423만9천 프랑, 총 7억4,998만7천 프랑에 달했는데 대부분은 군비였다. 이것은 1984년 프랑으로 89억 프랑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프랑스 정부가 본국과 식민지 예산을 철저히 분리한터라 지출을 온전히 세수로 충당해야 했으니, 식민당국은 인도차이나인들을 쥐어짜게 된다. 예컨대 코친차이나의 세수는 1868년에 6.9백만 프랑이었는데, 1879년에는 18.8백만 프랑까지 올라갔다.

폴 두메르는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이 지역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확산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헤롱헤롱거리는 걸 극히 죄악시하던 베트남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바로 다음 시기 총독부 역시 토지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에 더해 소작료,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마구 식민지인들을 쥐어짜게 된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지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다.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에 부여하고, 마을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 조치로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였다. 베트남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던 관습이 있었다. 따라서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시간이 지나 인도차이나의 경제가 다양화되면서 소금, 아편, 술이 총독부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갔다.(1920년 44%→1930년 20%)

2.5. 베트남 독립운동의 발아

2.5.1. 껀브엉 운동 ( 1885년~ 1888년)

1885~1888년까지는[20] '껀브엉(勤王) 운동'[21]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보위해서 국토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식민침략 열풍이 거셌던 터라 '그들만의 리그' 취급받았다. 베트남인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왕조가 야만적인 프랑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분노심도 한 몫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함응이 황제를 추존하는 근왕운동은 1885년에 시작하긴 했지만, 그 이전부터 코친차이나의 점령에 저항하는 유학자 중심 운동이 전개되었다. 향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거인 응우옌흐우후언은 1859년부터 남동부 3성을 사수하기 위해 의군을 일으켰고, 1862년부터는 남서부 3성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응우옌흐우후언은 프랑스군에게 붙잡혀서 5년동안 남미에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어 쩌런으로 돌아왔지만, 저항운동을 재개해서 결국 1875년에 처형당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껀브엉 운동의 시작점은 응우옌 왕조가 후에 공성전에서 패배한 이후부터다. 비록 2차 후에 조약이 안남을 법률상으로 보호령화했지만, 뜨득 황제가 사망한 이후 후에 조정에는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 주전파가 주화파를 압도했다. 1885년 7월 4일에 루셀 드쿠르씨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후에에 당도하자, 총리대신이자 황제의 섭정자였던 똔텃투옛[22]이 응전했다가 압도적인 물자, 병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하루만에 패배한다. 투옛은 12살배기 황제 함응이를 데리고 피신하고, 베트남인들에게 봉기하도록 호소한다. 입궁한 프랑스군은 황궁의 30톤이 넘는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권력 공백을 채우기 위해 북부 경략사인 응우옌흐우도를 포함한 고위 관료 몇 명을 승진과 뇌물로 매수하고 동카인(Đồng Khánh)을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운다.[23] 투옛의 호소에 응한 판딘풍, 호앙호아탐, 마이쑤언트엉 등 조정 또는 지방 관료들은 농민 군대를 동원해 꽝찌성, 타인호아성, 바딘성, 빈투언성, 타이응우옌성 등 전국 (주로 북중부)에 거점을 두고 저항한다. 때마침 캄보디아 노로돔 왕의 정적 시 보타가 1884년에 맺은 불평등 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을 캄보디아 전역에 퍼뜨리고 있어, 프랑스는 양쪽 전선에서 싸워야했다. 껀브엉 지도자들은 장악한 도시 주변에 토성, 대나무 울타리 등을 쌓고 조세, 경제활동 일반적인 행정제도를 유지했다. 이들의 적은 프랑스군뿐만 아니라 프랑스인들의 앞잡이라고 인식한 기독교인들이었다. 1887년에 투옛은 청나라로 피신하고, 캄보디아 반군이 진압당하고, 1888년에는 함응이까지 체포되어 알제리로 유배당하지만, 껀브엉 운동은 판딘풍 휘하에 북부 꽝닌 성의 산과 밀림을 위주로 1897년까지도 유의미한 반군 세력으로 활동한다.

2.5.2. 판보이쩌우와 판쩌우찐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었다.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였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 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쩌우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보이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의 힘, 특히 일본 제국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물리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하고, 오쿠마 시게노부 등 일본 지식인들과 만나며 저항운동을 계획했다. [24]. 동유운동에 이어, 1912년 중국의 신해혁명을 보면서 캉유웨이 옌푸 등 청 지식인들과 접촉하고, 베트남 유신회(Duy Tân hội)와 광복회를 조직해 프랑스 식민주의의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는 방향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판보이쩌우는 결국 중국과 프랑스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평생 풀로 콘도르 [25]에 구금당하게 된다. 판보이쩌우가 중국에 감금된 동안, 1차세계대전의 혼란을 틈타 주이떤 황제는 광복회의 운동가들인 타이피엔, 쩐까오반에게 연락해서 독립운동을 계획한다. 하지만 한 광복회 일원의 배반으로 타이피엔과 쩐까오반은 처형당하고, 주이떤은 동아프리카의 레위니옹 섬으로 유배된다.

판보이쩌우가 외부에서 활동한 무장 강경파라면 판쩌우찐은 내부 평화개혁파로, 외세에 의존한 독립에 반대했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전통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제자 르엉반깐과 응우옌뀐과 함께 동경의숙(Đông Kinh Nghĩa Thục)과 같은 무료 농민 교육기관을 창설해 저항의식을 지닌 후학을 양성하고자 했으나, 1908년 농민 폭동이 일어나자 주동자로 지목되어 판보이쩌우와 마찬가지로 풀로 콘도르에 3년 동안 수감되었다가, 그의 추종자들의 압박으로 풀려나게 된다. 이후 프랑스를 여행하며 호찌민과 만나 "베트남 애국회"라는 모임을 창설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안남애국청원"을 발표한다.

그 외에 판반찌와 응우옌딘찌우 등 꾸옥응으 문학을 통해 식민 사회의 폐해를 비판하는 문화적 저항도 있었고, 옛날 유교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세력들도 있었다.

2.5.3. 1920년 이후 세대의 독립운동가들과 협력자들

1920년대부터 샤스루-로바 고교, 알베르 사로 고교 등 베트남의 몇 안 되는 프랑스 초,중,고등학교들이 첫 졸업생들을 배출하면서 프랑스 영향을 받은 젊은 지식인 계층이 반식민운동과 신관료들의 주축이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유럽으로 9만명이 넘는 군인을 파견하면서 더 포괄적인 참정권을 요구할 명분이 생기기도 한 상황이었다. 이들은 주로 전통 관료와[26] 엘리트층의 자녀들이었으며, 극소수는(연간 700명 가량) 프랑스 본토에서 대학 교육을 수료했다. 프랑스인들과 동일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참정권, 시민권, 요직으로의 진출이 제한되는 상황에 이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식민주의를 부정하고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독립운동 세력이 있는가 하면, 제도에 협력하면서 내부로부터 점진적으로 개선해가자는 파가 존재했다.

전자의 주요 인물로는 판반동, 응우옌티민카이, 보응우옌잡같은 공산주의자들 외에도 질베르 쩐짠찌에우, 응우옌타이혹, 녓린 등 민족주의자들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소르본 대학교를 졸업한 기자 출신 응우옌안닌은 "안남청년의 이상"과 "금간 종"(La Cloche Fêlée)이라는 신문을 출판했고, 유교 사회를 비판하는 동시에 민족독립을 제창했다. 또 반목하던 트로츠키파와 친인터네셔널파를 포함한 독립운동 계파들을 규합하면서, 30년대 독립 운동의 정신적,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다. 활개치는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인도차이나 공안부가 1917년에 창설되었다.

후자 친불파들은 헌법주의당(Constitutionalist party)과 응우옌푸카이, 부이꽝찌우 등을 위시해 제도와 협력해서 식민지의 민주화를 얻어내고자 했다. 부유한 사이공-쩌런에 주로 거주하는 지주, 기업인, 의사, 변호사, 관료 등 토착 중,상류층을 주 지지층으로 하고, 진심으로든 사회적 상승을 위한 수단으로든 식민주의자들의 선의에 어필해 식민지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보다 많은 권리와 자율성을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트리뷴 앙디젠" (토착민 논단), "에코 안나미뜨" (안남의 메아리)등 프랑스어 언론을 개설하는 등 독립운동가들과 같은 수단으로 이용해, 사법개혁과 민주주의 도입, 실권을 지닌 식민지민의 정치기관 도입과 같은 주제를 논의했다. 급진당 출신 온건개혁파 총독인 알베르 사로와 사회당 출신 알렉산드르 바렌느가 부임한 점도 이들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들은 프랑스인들의 호의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개혁에 태생적으로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방증으로 이들의 요구로 신설된 중기인민대표원은 자문 역할밖에 갖지 못했다. 게다가 후술할 옌 바이 운동을 계기로 총독부는 더 강경하게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친불파의 개혁 목소리 또한 억눌렸다. 환멸을 느낀 친불파들은 독립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으며 불명예스럽게 정치를 떠나거나, 소극적으로 식민정치를 비판하는 소소한 이탈을 할 수밖에 없었다.

2.6. 베트남 국민당과 인도차이나 공산당 결성

이렇게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타이혹(阮太學/Nguyễn Thái Học)이었다. 응우옌타이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개혁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5년에는 친구들과 남동서사(Nam Đồng Thư xã)를 설립해서 쑨원 삼민주의의 번역본이나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VNQDĐ)을 창설한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0년 옌 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이 결과 몇천명의 당원이 체포되고, 응우옌타이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된다.

그 동안 호찌민은 프랑스 공산당, 러시아 공산당, 중국 공산당에 걸쳐 미하일 보로딘,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주요 인사들과 네트워킹을 하고 있었고, 베트남 청년 혁명동지회(줄여서 탄니엔: 청년)를 창설했었다. 청년 회원들은 1930년 새로 창설한 공산당을 베트남 공산당이라 명명했지만, 민족주의적 성격이 국제적 확산을 지향하는 공산주의적 성격보다 앞서는 것을 우려한 코민테른이 인도차이나 공산당이라 칭호를 바꾸라고 요구하고, 당원들은 요구를 따른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응에안 성과 하띤 성에서 기근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조합해 폭동을 일으켰지만 이듬해에 진압당한다. 호찌민은 중국과 러시아로 다시 10년 동안 망명하다가 1940년에 인도차이나가 프랑스와 일본의 공동통치에 처해져서야 독립운동을 조직하려고 귀국한다. 호찌민 휘하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중국국민당의 금전적 지원을 얻어내고 [27] 남부 박썬에서 봉기(Nam Kỳ khởi nghĩa)를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주동자들은 대거 처형당한다.

2.7. 제2차 세계 대전

国際信義上ドウカト思フガマア宜イ
국제 신의상 어떨지 싶지만 뭐 괜찮겠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격을 허용하는 쇼와 덴노의 반응, 1941년 6월 25일.[28]
스기야마 메모 (杉山メモ) 상권 231쪽.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 제국은 이 기회를 틈타 대다수가 유럽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일본은 쿠데타로 새로 정권을 잡은 태국 총리 쁠랙 피분송크람과 동맹을 맺어 인도차이나를 졸라오고 있었다. 당시 중일전쟁을 치르던 중국으로 가는 세 물자 보급로 중 가장 효율적인 보급로는 북베트남으로 통해 윈난성으로 향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은 보급로를 끊고 북쪽에 일본 국경 통제관을 도입하라고 프랑스를 압박했고 총독부는 승낙했다. 이는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치안 유지군에 불과했고,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일본 정규군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역량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영국 해군이 인도양을 봉쇄하고, 미국이 일본군과의 교전을 거부하여 군수물품 거래를 거절하고, 본국의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인도차이나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거의 완전한 자급자족 상태에 놓인다. 일본은 다시 인도차이나에서 일본의 특권과 군사적 이점을 보장하도록 비시 프랑스를 압박했고, 반강제로 허락을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기존 지배국 영국, 미국 등의 잔재를 신속하게 청산하고 군정 실시 후 괴뢰국을 세운 것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시스템을 인정하는 식으로 간접 지배를 시행했다. 이는 프랑스 본국이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시기 기준으로는 비시 프랑스도 따지자면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는데, 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도 마음대로 빼앗아 버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고 프랑스 본국을 조종하는 독일 눈치도 조금 봐 줘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태국은 프랑스가 약화된 틈을 타 일본과 동맹을 맺은 뒤 인도차이나를 침공해 1893년에 빼앗긴 실지를 수복하자 했고, 우월한 공군력으로 1941년에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서부 지방을 점령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태국군은 코 창 해전에서 막힌다. 더 이상 지역질서가 무너지는 것이 위험하다 판단한 일본은 중재자를 자처하고, 태국이 점령한 영토의 일부를 태국으로 편입시키는 국경 변경을 승인해주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 왕은 강화 협상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지만, 무력한 프랑스는 캄보디아의 불만은 일축하고, 라오스에게 직할령을 늘려주는 방식으로 달래는 방향을 택했다. 한편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결정해서 태국-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지 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태국을 무단 점령하고 2차세계대전 참전을 강요한다.

1941년 말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였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시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으며, 자원 채굴권, 수력 발전소 이용권과 농수산물 수탈권을 양도받게 되었다. 공납을 프랑스 따로 일본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것이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온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황인들의 연대로 백인들의 지배를 몰아낸다는 대동아공영권의 약속을 믿고 있었고, 일본 지배의 현실에 실망해 자주적인 독립운동밖에 없다는 신념을 강화한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권력이 생긴 셈이다. 이런 긴장된 동거 상황에서, 일본과 프랑스는 넓히기 위해 서로와 경쟁했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 민족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는다. 일본은 대중국 상황이 안정되자 다시 인도차이나에 일본의 영향을 넓히는 방향으로 눈을 돌린다. 일본군과 마쓰이 이와네는 황제 베트남 복국동맹회(Việt Nam Phục quốc Đồng minh Hội)의 황자 끄엉데를 추존하고, 친일 독립운동가들이나 종교단체들(호아하오교, 까오다이교, 캄보디아 불교)과 접촉을 늘린다. 프랑스 총독 장 드쿠는 전략적, 군사적 열세에서 대중적 지지로 식민지를 존속할 수밖에 없었고, 더 적극적으로 프로파간다 사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로 인해 친불파 인도차이나인들에게 행정/참정권을 소폭 늘리고, 프랑스와 베트남의 불가분한 관계를 강조하며 페탱을 우상화한다. 드쿠는 일본이 지원하는 끄엉데에 대응해 바오다이 황제와 자신의 파시스트 성향에 동조한 왕정주의자 지식인 팜뀐을 이부상서로 앞세운다. 또 총독부가 베트남 역사, 문학, 민족을 찬양한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물론 이는 목전의 위협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공안부는 협력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과 공산주의자들을 잡기 위해 어느 때보다 활발히 활동했으며, 일례로 랑썬에서 공산당 반란이 일어났을때 군사법정에서 주동자들을 대거 사형하는 사건이 벌어졌었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독립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약칭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지휘를 맡았다.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성향에 관계없이 조직원을 받아들여 1943년쯤 가면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 세력이 된다.

베트남은 태평양 전쟁 과정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식량 수탈로 1944~1945년에 인구의 2~10%에 달하는 40만~200만명이 굶어죽는[29] 이른바 을유년 대기근(Nạn đói năm Ất Dậu)을 겪은 바 있다. 일본군은 남부에서 생산한 쌀을 인구 밀집지역인 북부로 수송하는 것을 금지하고 대신 일본에 헐값에 팔도록 하였다. 일본의 묵인 하에 유지되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일본에 식량을 공급하는 한편 후일 프랑스의 베트남 재점령에 대비하여 따로 쌀을 비축했다. 일본과 전쟁 중이던 연합군은 남북을 잇는 교통 인프라를 파괴하여 물자의 이동이 힘들게 하였다. 잡곡 재배마저 일본에서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전쟁물자인 황마를 대신 심게 하여 불가능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홍수와 가뭄이 연이어 닥치는 기상이변에 병충해까지 겹치면서 재배하던 식량작물마저 수확이 힘들게 되었다. 이 모든 악조건이 1944~1945년에 동시에 겹쳐서 대기근이 들이닥친 것이다.

2.8. 몰락

1944년 전세가 불리해져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패망하자 일본 제국 남방군 사령부를 사이공으로 옮기게 되면서 인도차이나 지역의 중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비시 프랑스 정부가 몰락하자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가 자유 프랑스 쪽에 붙을 것을 염려했고, 이에 쿠데타를 일으켜 1945년 3월 9일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시키고 행정권까지 장악한다. 그리고 각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괴뢰국들( 베트남 제국, 라오스 왕국, 캄보디아 왕국)이 성립된다. 이에 자유 프랑스 샤를 드골은 식민지 회복을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핍박에 질려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30]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측에 제공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참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31] 바오다이와 총리 쩐쫑낌도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했다.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가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켰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세력, 군소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참가하였다. 이후 모든 정치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고, 공산당은 뒷전으로 물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였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에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8월 혁명을 일으키면서 한 달만에 베트남 전역의 정권을 장악한다. 호찌민은 바오다이로부터 전권을 받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2차대전 종전 후 전후 처리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북부에는 국민혁명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하였다. 북부에 주둔한 국민혁명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지 않은 채 호찌민과 베트민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 혼란으로 치달았다가 1946년 2월,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게 북베트남을 넘기고 철수했다. 이어 1946년 3월 6일, 프랑스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에 지배권을 다시 행사하려는 프랑스의 눈속임에 불과했고, 같은 해 3월 26일,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에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성립시켜 프랑스가 구상한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시킬 요량이였다. 독립협상이 지지부지한 와중에 결국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어 통킹만에 상륙함으로써 베트민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은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북위 16도 이남 남베트남에서는 일본 패망 후, 승전국들이 영국군에 일본군 잔당 처리를 위해 남베트남 지배를 맡겼는데,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다시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이에 프랑스 측은 1949년 바오다이를 내세워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국으로 형식적으로 독립시켰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반면 베트민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며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몰아붙였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민에게 패배하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그해 10월, 남북 베트남에서 군대를 전면 철수시켰다.

한편, 일본이 패망하자 라오스에서는 독립할지 프랑스 식민지로 돌아갈지를 둔 갈등이 있었는데, 독립파가 라오 이싸라(자유라오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해 활동을 시작했으며,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연대하였으나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재개되자 지도부는 태국 등으로 망명갔다. 라오스-베트남 간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쑤파누웡 주석이 이끄는 빠텟 라오당(파테트라오) 등이 게릴라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후 1949년 라오스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보장받았고, 1953년에는 독립하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프랑스군이 완전 철수했다.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은 일본의 힘을 빌려 독립하려던 작전이 실패한 후로도 꾸준히 독립 운동을 벌였고, 1949년에 다시금 독립을 선언하였다. 프랑스로부터 온전한 독립을 보장받게 된 건 1953년. 그리하여 캄보디아의 독립을 승인하여 모든 구성국이 독립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해체된 것은 제네바 합의 직후인 1954년 7월 21일이다.

독립 이후 프랑스 정부의 영향력은 사실상 사라졌지만, 민간 등에선 심리적으로 프랑스에 대한 두려움 등이 꽤 오래 남아 있었다. 베트남 전쟁 종전 후, 탈출하지 못한 이대용 공사 등 주월한국대사관 직원들이 대사관 내 식량이 떨어지자 외부에서 구매해 올 계획을 세웠는데, 한국 국적자임이 탄로나면 사로잡힐 것을 우려하여 고민하던 중 누군가가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인들한테 하도 당해서, 지금도 프랑스인들을 무서워 한다. 트럭에 프랑스 국기를 꽂고 다니면 아무도 손을 못 댈 것이다."라는 제안을 했고, 실제로 프랑스 국기를 단 트럭이 지나가자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고 순순히 비켜 주어, 무사히 식량을 구매해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는 일화도 있다. 일화 자체는 사실이지만, 베트남 사람들이 프랑스인들을 무서워해서 시비를 걸지 않은게 아니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패한 후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해 중립을 지켜 공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굳이 따지면 남베트남과 우호적이었지만 남베트남 측에 파병하지는 않았다. 미국이 파병을 요청하자 미국을 비난하기도 했다.

3.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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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출처



[1] 모든 구성국이 독립한 것은 1953년이지만 1954년 공식적으로 해체된다. [2] 레반코이는 자롱의 심복이었던 레반주이옛의 양아들이었다. 레반주이옛이 화교 출신 아편상들을 비호하고 떠이썬 반란에 가담했던 자롱의 정적들에게 중임을 맡기는 정책을 도입하자, 민망은 레반주지옛을 약화시키고, 사후에는 그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 모욕하고 가족을 처형한다. 레반코이는 자롱의 적장자이자 민망의 이복형인 응우옌푹까잉을 앞세우고 조제프 마르샹을 비롯한 천주교도, 시암과 화교들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을 일으킨다. 레반코이가 사망하고 반란이 실패하자 레반코이의 아들 레반꾸와 조제프 마르샹은 능지형에 처해지고, 천주교의 핍박은 심해진다. [3] 뒤퓌가 식민 로비에 강력한 연줄을 갖고 있다는 점도 코친차이나 당국의 대응 수위 높이는데 한몫했다. [4] 프랑스 본국 정권은 국민들이 식민정책에 반대할 것과 지지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인도차이나에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았다 [5] 물론 현대 라오스의 농업은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해 프랑스 치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나아진 편이다. [6] 이런 인식은 라오스/캄보디아인의 노동윤리를 베트남인이 낮잡아보는 인식이 프랑스인들이 옮아버린 것이다. 베트남인에 따르면 베트남인이 논에서 일을 할 때, 캄보디아인은 그걸 보고만 있고, 라오스인은 그 일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 빠진다고 한다. [7] 라오스 편입을 지칭한다. [8] 인도차이나인들은 귀화하지 않으면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했다. 프랑스 당국은 코친차이나인들에게 "프랑스 신민"(sujet), 나머지 보호령 인도차이나인들에겐 "프랑스 피보호민"(protégé) 또는 "토착민" 같은 새로운 방편적 정체성들을 부여했다. 일제의 황국신민과 유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제의 신민은 식민지인과 본토 일본인들을 동시에 일컫는 포괄적인 신분이었던 반면 인도차이나 신민은 프랑스 본토의 시민과 대치되는 단어였다. 또 프랑스는 공화정이었기 때문에 "신민"은 모순적인 측면이 있었다. [9]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따르면 이는 베트남인들의 결속을 강화시켰으나 한편으론 베트남어를 사용하지 않는 인도차이나인(캄보디아인, 라오스인)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이 주로 베트남인들을 관리로 기용하면서 인도차이나 내부에 베트남인과 라오스인, 캄보디아인 간의 격차가 만들어졌고 이것은 베트남인들에게는 인도차이나라는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든 반면에 라오스인과 캄보디아인들에게는 전혀 공감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가 그대로 독립한 반면에 인도차이나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로 각각 별개의 국가로 분리되어 독립하게 되었다. [10] 굴절이 존재하는 프랑스어와는 달리, 동사원형과 명사 위주로 말을 이어나가는 것이 특징이었다. [11] 사실 같은 해 한반도는 인구 대비 7%가 공립 초등학교 학생이니 그렇게 고평가할것도 아니다.(일본인 초등학생 숫자를 감안해도 그렇다) [12] 1936년 주민의 0.4%가 유럽인으로 이는 절대수로 나타내면 9~10만명 정도 된다. 1940년 인도차이나에 체재하는 프랑스인은 3만9천명이었다. 1차대전 당시 독일인 소유 자산 몰수를 제외하면 유럽인 간의 차별은 없었다. [13] 촐론이라고 많이 알려진 곳. 영미에서 diacritic을 뺀 Cholon으로 부른 것이 아직 베트남어에 대한 지식이 한미하던 1970년대 한국에 유입된 것이다. [14] 화학 비료는 20세기 후반기 녹색혁명이 일어난 뒤에야 비로소 확산되었다. [15] 원칙적으로는 자발적인 고용이었으나 인력 모집 과정에 강제적 수단을 많이 동원했다. [16] 비슷하게 영국령 인도는 별명이 "왕관의 보석"(The Jewel in the Crown)이었다. [17] 1897~1963. 1924~1926년에 프랑스 극동연구원(EFEO)의 연구원으로 재직한 바 있다. [18] 10~12만명은 수공업 종사자를 제외한 것이다. 베트남은 공장제 공업보단 농민 개개인이 여유시간에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들어 자급하거나(가내수공업) 마을의 수공업자가 생산한 물건을 구입하는게 일반적이었다. Virginia Thompson의 Labor Problems in Southeast Asia(1947)은 수공업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농민이 20만에, 자급 또는 부수입을 위한 부업으로 매년 최소 수주일을 수공업에 투입하는 농민이 최소 80만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통계청(Service de la Statistique Générale de l’Indochine)이 파악한 1939년 수공업 분야의 숙련노동자(artisan)는 통킹 95,670명, 안남 12,652명, 코친차이나 19,034명으로 총합 127,356명이다. 업종별 종사자는 면방직업자가 60,141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바구니 직조업자로 16,155명이었다. Willard Miller의 Industrial Resources of Indochina(1947)는 수공업 종사자를 135만 명으로 추산했다.(숙련/비숙련을 구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Jack Shepherd의 Industry in Southeast Asia(1942)에 따르면 수공업은 남부보다 북부에서 번성했는데, 수공업에 의존하여 생계를 잇는 사람의 비중이 통킹에서는 7%에 달했고 나머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4%였다고 한다. [19] 조선의 근대적 광공업 종사자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 유발한 수요 증가로 일본 당국과 기업의 막대한 투자를 받아 폭증 일로에 있었다. [20] 엄밀하게는 1888년에 끝났지만, 지역적 저항군은 1913년까지도 항전했었다 [21] 한국 세계사 교육 과정에서는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그대로 읽어 '근왕 운동'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조타'를 ' 찌에우다'라고 베트남식으로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 물론 '근왕'은 말 그대로 왕을 근면히 섬긴다는 의미의 일반 명사이니, '찌에우다' 같은 고유 명사와 달리 원음을 살려 쓸 유인이 좀 적긴 하다. [22] 뜨득 황제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아서 권신들이 난무했는데, 이때 네 명의 어린 황제를 옹립한 실세가 똔텃투옛이었다. 똔텃투옛은 응우옌반뜨엉과 함께 대표적인 주전파였다. [23] 동카인은 4년만에 사망하고 1889년엔 타인타이가 즉위한다. 1907년에 타인타이는 지나친 문란함과 기행으로 폴 보 총독에 의해 퇴위를 강요당하고 주이떤 황제로 대체된다. 원래 총독부는 주이떤이 아니라 유배간 이후 프랑스 여자와 결혼하고 그림에 심취해 순종적으로 변한 함응이를 다시 소환하려고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엔 기밀원이 함응이는 프랑스적인 변절자라며 거부했다. [24] 판보이쩌우는 러일전쟁 시기만 해도 일본을 호의적으로 봤으나, 이후 일본이 프랑스와 결탁해 일본에 있던 판보이쩌우를 추방하는 등 제국주의 본성을 드러내면서 철저한 반일주의자로 굳혔다. [25] 꼰다오 섬에 위치한 반식민주의 운동가들을 수감하는 교도소. 1861년에 건설되었으며, 1.4 평방미터의 "호랑이 감옥"을 120개 보유해 악명이 높다. [26] 코친차이나의 해직당한 관료들 외에도, 보호령의 기밀원 같은 유명무실한 기존 행정기관에 복무하는 관료들도 있었다 [27] 중국국민당은 일본군에 타격을 주고 인도차이나를 중국 영향권 아래 둔다는 계산에서 이들을 도울 동기가 있었다. [28] 태평양 전쟁에 대한 쇼와 덴노의 반응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나 원본은 인도차이나 진격이다. [29] 학계에서 합의된 정설은 없다. 그러나 일본의 베트남사 전문가 후루타 모토오(古田元夫) 교수에 따르면 2차대전 종결 50주년을 맞아 1990년대 전반에 베트남 북부 23개 촌(村/thôn: 톤)에서 피해 실태를 복원하기 위한 조사가 실시되었고(후루타 자신이 여기에 참여함) 그 중 22개 촌에서 거의 정확한 복원에 성공했는데, 각 촌별로 사망률이 최소 8.37%에서 최대 58.77%에 달했다. 이쯤되면 악명높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울고갈 수준. [30] 이들 사이에서는 프랑스에게 핍박을 당하느니 차라리 같은 동양인 일본에게 투항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심리가 있었다고 한다. [31] 이것을 일본에서는 명호작전(明号作戦)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