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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9 09:22:55

이택근/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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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2. 현대 유니콘스 & 서울 히어로즈 1기3. LG 트윈스
3.1. 2010 시즌3.2. 2011 시즌3.3. FA
4. 넥센-키움 히어로즈 2기
4.1. 2012 시즌4.2. 2013 시즌4.3. 2014 시즌4.4. 2015 시즌4.5. 2016 시즌4.6. 2017 시즌4.7. 2018 시즌4.8. 2019 시즌4.9. 2020 시즌

1. 아마추어 시절

배정초, 대천중, 경남상고를 졸업했고 경남상고 시절에는 김사율과 배터리를 이루며 팀의 1998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이끌었던 포수 유망주였다.[1][2] 1999년 현대 유니콘스의 2차 3순위(전체 24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고려대 체육교육학과(99학번)에 진학하였다.[3] 대학 시절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2001년 대만 야구 월드컵에 출전하기도 했다. 2003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현대에 계약금 2억 3,000만 원을 받고 입단했다.

2. 현대 유니콘스 & 서울 히어로즈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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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B93D [[현대 유니콘스|현대 유니콘스]] 시절}}}

데뷔할 때 포지션은 포수였으나, 당시 현대 유니콘스에는 김동수[4], 강귀태라는 수준급 포수가 버티고 있어서[5] 실질적으로 포수로 뛴 시즌은 루키 시즌뿐이었다. 그 이후 1루수 3루수를 오가다가, 2006년부터 외야수로 전향했다.[6] 다만 모든 외야 포지션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제대로 볼 수 있는 외야 포지션이 코너가 아닌 중견수뿐이다. 자신은 코너 외야가 더 어렵다고 한다. 이택근이 포수를 포기한 데에는 이택근의 포수로서의 스킬을 도저히 프로에서 써먹을 수 없다고 코칭스태프가 판단한 것이 큰 이유였다. 입단 이후 이택근은 현대 코칭스태프에게 포구의 기본조차 되어 있지 못한 포수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래서인지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포수인 진갑용의 부상, 강민호의 퇴장에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7]

2003년 입단 첫 해에는 팀 동료이자 갓 상무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온 투수 이동학과 신인왕 경쟁을 벌였지만, 수상에는 아쉽게 실패했다.[8] 하지만 2003년 이후의 이동학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9]

2005년 이숭용이 시즌 중반 부상으로 주춤하자, 복수의 포지션으로 출장하면서 많은 타석은 아니지만 주전과 백업을 오가면서 0.331의 고타율을 기록했다.

2006년부터 중견수로 전향,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뛰면서 전반기에만 9홈런을 기록해 홈런레이스에 출전, 결승에서 홈런 1개를 치고 우승했다.[10] 당시 이택근은 "예선에서 무리를 하는 바람에 명치가 아파서 더 이상 넘길 수 없었다"고 밝혔으며, 결국 후반기에는 홈런 0개를 기록했다. 이 때 양준혁의 배팅볼 투수가 진갑용이었는데 진갑용에게 화내는 모습을 보여주어 큰 웃음[11]을 선사했다.

2007년에는 처음으로 3할과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지만 도루는 전년도에 비하면 조금 하락하였고 투타 엇박자가 지속되면서 승리 기여도 역시 감소 되었다. 그러나 골든글러브 투표에서는 1표 차이로 탈락 했는데 4위를 기록했다. 3위였던 이대형이 수상[12]

중견수로 전향한 후, 2006~2009년까지 4년 연속 3할 타율에 4할 출루율을 기록하면서 리그 최정상급[13] 외야수로 성장했다. 전향 초기만 해도 홈런과 도루수가 한자리였으나 2009년에는 자신의 최다 기록인 15홈런 43도루를 기록하며 골든 글러브도 수상했다. 포수에서 외야수로 전향한 케이스 중 성공적인 케이스.

기량을 인정받아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 출전했으나 도하 참사를 겪으며 동메달[14]에 그쳤고,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금메달을 따면서 병역 특례를 받게 되었다. 팀원들이 감기에 걸릴 까봐 매번 방을 돌아다니면서 에어컨을 끄고, 햄버거 셔틀도 마다하지 않은 모습, AD카드[15] 부족으로 불펜 포수가 없어서 불펜 포수를 보는 모습에서 호감을 느낀 팬들이 적지 않았고, 이 때부터 비로소 팬이 확 늘었다.

이렇게 히어로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잡는 것처럼 보였으나, 구단의 자금난 탓에 2009 시즌 종료 후 트레이드 루머가 돌다가 2009년 12월 17일 강병우, 박영복 + 현금 38억 원을 대가로 LG 트윈스 트레이드되었다.[16] 선수 팔기라는 논란 끝에 이 트레이드는 12월 30일에 승인되었으며, 이로써 이택근은 LG로 이적하게 되었다.

3. LG 트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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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LG 트윈스|LG 트윈스]] 시절}}}

3.1. 201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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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로 이적한 후 원래 포지션이었던 중견수는 이대형이 지키고 있고, 코너 외야나 1루수는 주 포지션인 중견수보다 수비 능력이 부족한 통에 지명타자로 주로 출전했다. 삼성과의 대구 개막전 첫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했고 4월 2일 친정팀 히어로즈와의 홈경기에서는 14:3으로 뒤진 9회말 솔로홈런을 터뜨리며 LG 이적 후 첫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시즌 초반 7경기를 뛰고 허리 통증을 이유로 2군으로 내려갔다. 2009 시즌을 마치고 무릎 수술을 받은 후 페이스를 끌어올리려다 무리한 탓에, 허리 상태가 나빠진 것이었다.

5월 25일 KIA 타이거즈와의 홈 경기를 앞두고 1군에 복귀했다. 5월 26일 KIA전에서 17-2로 앞선 8회말 곽정철을 상대로 쓰리런을 치며 복귀를 알렸다. 수비는 계속 중견수로는 나오지 못하고[17] 좌익수 혹은 1루수로 출전, 야구에서 가장 쉬운 포지션이라지만 주 포지션이 아닌 탓인지 불안한 수비와 함께 2할 초반대의 빈타에 허덕이며 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지만...

박용택과 함께 후반 3개월동안 괴물같은 타율 상승폭을 보이며[18] 결국 10시즌을 타율 .303로 마무리. 역시 스탯근 어디 안간다. 여담이지만 이적 후 KIA와의 시범경기에서 벤치에 있을 때 서용빈 코치에게 헬멧 쓴 채로 손으로 가격당했다고 기술되어 있었지만 사실은 그냥 헬멧테스트. 사실 팀이 플옵권 경쟁팀이었다면 이택근의 후반기 활약은 칭송받았겠지만 그것도 아닌데다 이택근은 클러치 상황에서 심히 부진해서...

이전의 FA 규정대로 라면 2012년 시즌 종료 후 FA 권한을 득템할수 있었지만, 2011년 KBO 1회 이사회에서 대졸 선수의 FA 연한이 8년으로 축소됨에 따라 2011 시즌을 부상으로 날려먹어도 FA 선언이 가능하게 되었다. LG 구단에서는 FA 연한이 아직 남은 이택근에게 저렴한 축의 연봉을 제시하며 상호 마찰이 있었는데, 이 연한 축소에 뒷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이를 전해 들은 이택근의 반응은 "야~, 살다가 이런 행운도 오네요". 특히 대졸 선수 축소를 기자에게 전해 듣자마자 전화를 끊고 사실 확인을 하러 가기도 했다.[19]

이 소식을 들은 넥센 팬들은 다시 사오자라고 하고 있는 추세였다. 혀갤에서 '돌택돌'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돌았다. 그리고 2011 시즌이 끝난 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3.2. 2011 시즌

시즌 초 부상으로 나오지 못했다 합류하여 그럭저럭 괜찮은 타격을 선보였다.

하지만 5월 13일 기준으로 타율이 0.270대로 떨어지고 연이어 찬물을 끼얹고 있다. 5월 21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오랜만에 멀티히트를 기록하면서 타격감이 살아났고 볼넷을 하나 추가해서 팀의 역전승의 단초를 마련해줬다.
그럼에도 그 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다 설상가상으로 허리부상[20]을 당해 엔트리에서 빠졌다. 언제 복귀할지 기약이 없다고 할 정도로 허리가 좋지 않다. 2011시즌 홈런이 단 한개밖에 없을정도로 심각한 장타력의 저하와 도루의 실종은 이미 부상을 안고 뛰었단 얘기.

아무튼 두달여의 재활을 마치고 간신히 복귀, 8월 23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잠실경기 대타 출전을 시작으로 다시 경기에 나섰다. 4위권인 롯데와 SK와의 경기차가 5.5 ~ 6게임차로 벌어져 가을야구 진출이 다소 힘들어졌지만 돌아온 이택근은 매 게임 맹타를 시전하며 팀에 활력소를 불어넣었다.

10월 2일 두산전에서 유원상의 볼이 오재원의 머리뒷쪽으로 날라가면서 오재원의 배트를 맞춰 오재원이 헬멧을 벗고 식빵거리면서 유원상에게 걸어가는중에 1루수비를 하고 있던 이택근이 총알같이 뛰어와서 오재원을 밀치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0.297 4홈런 10도루 29타점(득타율 0.233)[21]으로 2010년의 득타율 0.241보다 더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둘다 영양가는 없고 타율만 관리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LG팬들에게 스탯근 이란 별명도 생겼다.

3.3. FA

넥센 히어로즈와 4년 총 50억 원에 계약하면서 친정 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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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넥센-키움 히어로즈 2기

4.1. 2012 시즌

넥센으로 다시 돌아와서 팀의 중견수와 3번 타자를 맡았다. 사실 돈값을 따진다면, 일단 4월 성적은 썩 좋은 상황은 아닌 편. 하지만, 높은 득점권 타율과 도루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팀 타선의 구심점 자체가 없던 넥센 입장에서는 팀 타선의 구심점[22][23]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덧붙여서 온갖 트레이드로 팀을 떠나게 된 선수 중 하나가 돌아왔다는 것으로도 넥센 팬들에게는 감격 그 자체.

그런데 12시즌 LG와의 경기마다 야유가 쏟아졌다. 심지어 시범 경기부터. 시작된 야유가 4월 24일 경기에서 절정에 달았다. LG 팬들의 야유는 LG 나름대로 후한 제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FA협상이 결렬된 것에 대한 분노와 인터뷰에서 LG 팬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대인기피성향이 생겼다는 발언에서 온 서운함 등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야유를 보낸 것 자체는 팬으로서 일면 이해가 가는 행위이지만 문제는 야유에 그치지 않고 도를 넘어서는 비난이 뒤따랐고 심지어는 인신공격까지 이루어졌다는 점. 다만 선수 스스로 유학드립을 친 것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비난포화 속에서도 야유를 무색하게 하는 3안타 2타점을 기록하며 맹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426 대첩에서도 멀티히트를 기록하며 확인사살.

5할에 달하는 득점권 타율과 준수한 타율, 출루율을 보여주며 넥센 타선을 이끄는 존재가 되었다. 팀 타선 전체에는 준수한 우산이 하나 씌워진 셈. 넥센 타선의 강화에 있어 박병호라는 거포의 활약과 강정호의 재도약 외에 이택근의 존재를 꼽는 사람들이 많았다.

5월 첫 주 동안 24타수 1안타를 치며[24] 극히 부진(그동안 팀은 1승 1무 4패)했으나 LG를 만나면서 귀신같이 부활, 5월 9일 현재 타율 0.298, 허나 LG전 타율 0.588...혹자는 LG에서 부진한 이유가 다 있었다고도 하였다.[25]

혹자는 2011년 탈쥐효과의 산 증인이 박병호라면 2012년의 산 증인은 이택근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5월 23일, 탈쥐효과를 온몸으로 입증이라도 하듯 LG와의 경기에서 내야안타와 솔로홈런을 추가하며 팀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게임 중반 타구판단을 잘못하여 1점을 헌납하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택근의 활약에 힘 입어 넥센은 2008년 팀 공식 창단 이래 첫 1위를 차지하는 감격을 누렸다.

6월에 접어들며 타율과 득점권 타율 등에서 부진을 보였는데, 검진 결과 손바닥 부상이 있다고 한다. 그 때문에 6월 6일부터는 선발에서 빠졌다.

6월 9일에는 대타로 나와 3타석에 나왔으나 무안타. 하지만 12회말 4:3 2사 주자 2루 상황에서 이대수의 타구가 중견수 쪽을 향해 날아가자 펜스까지 죽어라 뛰어서 나이스 캐치를 선보이며 경기를 마무리, 문자 그대로 팀을 구원하는 수비를 해냈다. 동영상 링크

손바닥 부상이 심해져 1주 결장한 후 6월 26일부터 다시 출장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결장하는 동안 침체된 타선으로 인하여 고생하던 소속팀은 6월 26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1회에만 5득점하는 등 방망이가 불을 뿜으며 13:3으로 크게 이겼다.

그리고 6월 27일 경기에서 그는 적시타를 치고 도루를 성공시키고 보살을 기록하는 등 원맨쇼를 펼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정수빈을 홈에서 아웃시킨 보살은 두산의 추격의지를 꺾어버리는 중요한 순간이었고, 그는 이 경기에서 MVP로 선정되었다.

2군에 오래 내려가 있던 강병식을 대신해 7월 11일, 넥센의 새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7월 24일 올스타 브레이크가 끝나고 후반기 첫 경기에서 투런 홈런을 쳤다. 시즌 6호 홈런. 이 날 최종 성적은 4타수 1안타 1홈런 2타점.

FA 총액 50억의 임팩트가 커서 뭔가 할 때마다 수식어로 50억이 붙는다. 50억 땅볼, 50억 삼진, 50억 테러 등등. 초반에는 50억에 맞지 않는 저조한 타율로 우려를 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기 페이스를 찾고 넥센 공격을 이끌고 있다. 6월 말에는 타율을 3할 언저리까지 끌어올렸다. 본인 또한 돈값을 하기 위하여 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솔선수범하여 출전하는 등 나름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넥센 타선의 리딩 히터로 뛰면서 넥센에 우산 효과를 씌워주고 있지만, 이 상황은 때론 넥센에 독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보여주고 있다. 가령 이택근이 부진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넥센 타선 자체가 점수를 못 내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 특히 이택근이 주자를 여럿 두고 찬물이라도 끼얹는 경우[26] 에는 더더욱. 이런 날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 잔루에 시달리다가 패배하거나, 그냥 아예 상대팀 투수들에게 말려버리거나, 역전을 해야 할 때 하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났다. 그 정도로 넥센 타선에서 이택근의 비중은 크다는 말.

2012년 8월 후반부터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1군 엔트리에서 다시 제외되었다. 팀 또한 DTD를 제대로 당했고, 그 또한 8월 24일 이후 1군 경기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남은 시즌은 김시진 감독이 1군 선수단과 같이 동행한다는 하에 덕아웃에만 앉게 했다.

4.2.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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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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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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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은 누적기록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좋은 편이었지만 시즌 마무리가 몹시 매끄럽지 못했다. 소위 "좀비데이"라는 넥센 고유의 홈 최종전 그라운드개방 행사에서 부적절한 처신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미리 싸인한 종이를 탁자위에 올려놓고 팬들에게 가져가라 했던 것. 그리고 행사 종료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먼저 행사장을 이탈한 것. 가뜩이나 무기력한 경기내용에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해 팬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거기에 과거에 했던 부적절한 발언이나 기분에 따라 싸인을 거절하는 등의 행동이 재발굴 되면서 더욱 가열차게 까이는 중. 더군다나 준 PO에서의 삽질로 인해 하루가 멀다하고 비난받는 중이다.
이 부분은 2022년 유튜브에서 해명을 했다. 보통 팬싸인회를 하게되면 자기 경험상 싸인 요청이 많이 오다보니, 예비로 열장 정도 해두고 팬 앞에서 이름을 추가로 적어서 주려고 준비를 해두었다고 한다. 방송에서의 내용은 '싸인을 하던 중이었는데 코치진이 경기때문에 주장인 자신을 불러서 다녀왔다. 감독과 얘기하고 돌아와서보니 싸인해뒀던 종이들은 안 보이더라. 바람에 날아갔나보다 하고 행사에 마저 참여해서 싸인을 하고 갔다. 그런데 다음날 들으니 인터넷으로 그렇게 소문이 났더라. 모든 선수단이 참여하는 행사인데 내가 빠질리가 있는가' 즉, 선수가 본의 아니게 피해를 봤다는 소리이다.

4.5. 2016 시즌


2번째 FA 자격을 얻어 4년 총액 35억 원의 조건으로 재계약에 합의했다.

2012년부터 맡아오던 주장직을 2루수 서건창에게 넘겼다.

좌익수로 수비전향을 할 예정이었으나 외국인 타자 대니 돈의 송구 능력[27] 영 좋지 못한것으로 드러나 우익수[28]를 맡게 되었다. 2월 연습경기에서 드러난 바로는 예상보다 우익수 수비가 안정적이어서 팬들이 놀라고 있는 중. 또한 그동안 고수해온 타격폼도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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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 대전 한화전에서 산책 도루를 선보이며 한화 선수단을 당황하게 했다.[29] 팀은 5:9로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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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2일 kt전에서 밴와트를 상대로 2점 홈런을 치며 포효, 고척 스카이돔의 첫 홈런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수훈선수로서 단상인터뷰 자리에 서서 "고척돔 1홈런은 우리팀에서 치고 기왕이면 내가 치고 싶었는데 홈런돼서 세리머니 했더니 채태인이 부끄럽게 그게 뭐냐고 쿠사리 먹였다"는 뒷얘기를 풀어놓았다. 단상인터뷰 동영상 요약본

4월 26일 NC와의 마산 경기에서는 멀티히트를 기록해놓고도 혀갤러들한테 엄청나게 까였는데 8회 2사에서 볼넷으로 출루한 이후 박동원의 타구를 나성범이 애매하게 처리하면서 페어 지역에 떨어졌는데 2아웃임에도 불구하고 설렁설렁 뛰다가 홈에서 아웃당했기 때문이다.[30]

5월 3일 삼성과의 원정 경기에서 투런 홈런 포함 3타점을 기록하며 나름 밥값을 했다.

5월 29일 kt전에서 개인 통산 2000루타를 달성했다.

6월 14일 롯데와의 홈경기에서 8회말 박정음의 대타로 나와 한아두를 기록했는데 팀의 대역전으로 묻혔다.

6월 18일 한화전에서 대타로 나와 정우람에게 블론을 안기는 동점 적시타를 쳐냈다. 바깥쪽 공을 배트를 던지다시피 스윙을 해 밀어친 기술적인 타격이 일품이었다.

7월 12일 kt전에서 9회에 대타로 나와 개인 통산 1400안타를 때려냈다. 그것도 팀이 4대5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동점 솔로 홈런으로! 이 홈런으로 기세를 가져온 넥센은 이 이닝에서만 3점을 내 7대5로 역전승한다.

7월 20일 LG전에 오랜만에 선발 출장, 소녀 어깨 고종욱과 대비되는 홈 보살을 보여줬고 타석에서도 결승타가 된 2타점 2루타를 쳐내며 화려한 복귀전을 치렀다.

8월에는 그놈의 고질적인 허리 통증 때문에 몇 번 빠지기도 했으며 8월 11일~14일 4경기 동안 심각하게 답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8월 들어 타격감 자체도 매우 형편없다. 그러나 8월 27일에는 투런 포함 3타점을 기록하면서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준플레이오프 LG전에서는 1승 3패로 업셋 당하면서 그대로 팀은 광탈

4.6. 2017 시즌

개막 3연전에서 9타수 1안타로 엄청나게 부진[31]하면서 욕을 먹고 있다. 결국 팀이 5연패에 빠진건 덤. 그리고 그동안 말이 많았던 팬서비스와 관련해 얘기가 다시 나오면서 더더욱 까이는중. 함께 부진한 대니 돈, 채태인과 엮여서 까이고 있다.

그러다 4월 12일 kt전에서 대타로 출전, 2타점 적시타를 때리면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4월 27일 두산전에서 7번타자 우익수로 출장, 3타수 2안타 1타점 3득점으로 활약했다.

개막 직후만 해도 타격도 안 되고 수비도 설렁설렁하는 유리몸 35억 먹튀라고 팬들에게 무척 까였는데, 본인도 선수생활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4월 말 기준으로는 타격감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으며 경기에 좀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5월 18일 한화전에서 9회 말 무사 만루에서 대타로 출전, 팀이 6대 4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정우람을 상대로 극적인 끝내기 그랜드 슬램을 날렸다. KBO 역대 두 번째 대타 끝내기 만루홈런이다.[32] 이날 인터뷰에서 한 타석, 한 경기의 소중함을 후배들이 알게 되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기도. 그렇게 소중함 알라고 하던 양반이 작년에는 기본이 안되어서 설렁설렁 뛰었습니까?

그러나 5월 21일 kt전에서 우익수로 나와 1회말 노바운드 캐치를 노리다 장타를 만들어주는 어처구니 없는 수비로 위의 까방권을 순식간에 소모하였다. 이 삽질로 인해 선발 투수였던 최원태는 주지 않아도 됐을 실점을 하고 말았고 이후 멘탈이 무너지면서 대량실점, 3이닝도 채우지 못한 채 강판됐다. 결국 팀은 대패.

노련미가 더해진 공격력과는 달리 수비력은 신체능력 저하로 인해 매년 퇴보하는 추세이다. 사실 이쯤 되면 수비는 접고 지명타자나 대타로 주로 활약해야 맞겠지만, 정작 넥센 외야진(이정후, 고종욱, 박정음 등)의 상태가 수비 면에서는 이택근과 비교해도 하나같이 고만고만하거나 오히려 더 떨어지는[33]데다, 그나마 수비력이 가장 낫다는 평을 듣는 임병욱은 부상 중이라 코칭스태프의 고민을 깊게 하고 있다.

시즌 중후반부에 들어서며 체력이 바닥난게 역력한 어린 선수들을 대신해 이택근의 역할이 늘어나고 있다. 역시 스탯근답게 낮았던 타율을 2할 후반대까지 끌어올리며 팀의 막판 5강 싸움에 힘을 보탰지만.

약간 아쉬운 올해 성적이지만 연차가 다른 팀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팀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은 잘해주고 있다. 선수들의 인터뷰나 해설위원들이 이택근을 칭찬할 때마다 언급되는 사항.

8월의 크리스마스 두산전에서 5타수 4삼진 1병살타로 삽을 펐다. 1회초 이정후의 볼넷 후 타석에 들어서서 삼진 먹은 건 그렇다 치는데, 2회초 장영석의 솔로 홈런으로 1점을 더 달아나 2:0이 된 후 주자가 차곡차곡 쌓여 1사 만루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유격수 병살타로 날려먹었다. 5회초에는 이정후가 볼넷으로 나갔지만 헛스윙 삼진 후 이정후가 도루사되면서 졸지에 창조병살을 먹었다. 7회초 고종욱이 내야플라이 실책으로 출루하는 행운을 얻은 후 희생번트와 진루땅볼로 3루까지 갔으나 거기서 또 삼진을 먹고 잔루. 8회초 초이스의 적시타로 다시 앞서갔다가 8회말 김상수가 백투백 홈런을 맞아 재역전된 뒤 9회초 박정음의 사구 출루 후 이정후가 3루 파울플라이로 물러나며 2사 1루가 된 상황에서 6구만에 끝내기 삼진을 기록, 3:4로 팀이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영웅 게시판과 혀갤 등지에서 미친듯이 까였다.

시즌 최종 기록은 타출장 .278, .347, .386으로 ops가 7할 5푼도 안 된다. 극악의 타고투저 시대에 센터 라인도 아니면서 8할을 못 넘는다는 건 확실히 문제가 있다.

4.7. 2018 시즌

스프링캠프 중 무릎 부상으로 조기 귀국한 후 2군에서 개막을 맞이했다.

2018년 4월 14일 콜업돼 대 두산 베어스전에서 싹쓸이 2루타를 치면서 팀의 7-6 승리에 공헌했으나 다음날 두 번의 사구를 맞고 교체됐다.

4월 20일 4회 1사 만루에서 좌전 안타로 결승타를 때려내 팀의 6-1 승리를 이끌어냈다. 다음날 역시 8회 2사 1,3루에서 우전 안타로 결승타를 때려내 4-3 역전승을 이끌어냈다. 팀의 3연승을 이끌어내는 안타들로 타율이 2할이 채 안되는 상황임에도 부활의 조짐이 보인다며 박수를 박고 있다.

4월 24~26일 LG와의 시리즈 에선 7타수 5안타 4볼넷으로 그야말로 혼자서 야구했다.

5월 3일 NC전에서도 5타수 3안타 3타점으로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체력적인 문제가 있는지 거의 지명타자로 출장하고 있지만 단순히 잘 치는 타자가 아니라 주자가 있으면 팀배팅을 하고 루상에 나가면 특유의 야구센스로 투수를 흔들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주루도 열심히 하는 등 여러모로 트루 리더를 외치게 만드는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다. 먹튀행각으로 욕을 먹던 시절에 비하면 확실히 절실함이 느껴진다는 평.
5월 17일 기아전에서 4타수 1안타 2타점 1홈런을 기록했다 팀의 8-2 승리를 이끌어냈다. 옛 동료 김세현의 1군 복귀전 초구를 받아쳐 홈런을 만들었다. 높게 몰린 공이 아니라, 정타를 맞추기 힘든 꽤 높은 볼이었는데 받아쳐서 홈런을 만들었다. 상당히 기술적인 타격이었는데, 체력은 예전만 못하더라도 기술이나 센스는 여전한 듯하다.

5월 30일 기아전에서 대타로 나와 2타점 적시타를 쳐 한현희의 승리를 도왔다.

노쇠화 문제가 뚜렷하던 지난 시즌의 염려를 반전시키고 노련한 플레이와 팀배팅으로 보급형 5툴 플레이어답게 상황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수비를 풀타임으로 뛰기는 어렵지만 마침 팀에 우수한 외야수 자원이 많아져서 굳이 이택근이 수비로 들어가야 할 일이 별로 없어졌기에 체력 관리 면에서도 도움을 받게 되었다.

요새는 은퇴 전이라 그런진 몰라도, 팬서비스가 굉장히 좋아졌다.

10월 13일 삼성과의 시즌 최종전에서 갈비뼈 부상을 당해 4주 진단을 받아 포스트시즌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선수단과는 계속 동행한다. (규정에 따라 경기 중 덕아웃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 뛰겠노라 다짐하면서 재활과 훈련을 반복했지만, 팀이 패배하면서 빛이 바랬다. 그의 4번째 한국시리즈 출장 기회도 그렇게 날아갔다.

4.8. 2019 시즌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택근 문우람 폭행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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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퓨처스리그 6월 22일 고양 국가대표 야구훈련장 한화 이글스전에 첫 선발라인업에 확인되었으며 1회 주자 1루 상황에서 3루수 병살타아웃, 3회 주자1/2루 상황에 몸에 맞는볼로 대주자와 교체되었다. 1타수 4사구 1을 기록하였다.

6월 23일엔 1회 주자1/2루 상황에 5구 몸에 맞는볼, 3회 3구 3루수 땅볼아웃으로 1타수 4사구 1을 기록하였다. 이후 9월 중순이 되도록 감감무소식인데다 장정석 감독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올 시즌 후 정리당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포스트시즌에 경험많은 선수가 필요하기 때문에 깜짝 합류하지 않을까 예측하는 목소리도 있으나, 본인의 잘못으로 구설수에 오른데다 실전 감각도 없는 선수를 기용하자고 팀이 굳이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다. 그리고 실제로 임병욱의 무릎 부상과 샌즈의 컨디션 난조로[34] 외야진에 이정후, 대타 카드로 박동원 외엔 믿을만한 카드가 없었음에도 포스트시즌 엔트리에도(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 모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결번으로 거론되는 등 소속팀의 전설로 남을 수도 있었던 선수가 순간의 잘못된 행보로 인하여 이렇게 추하게 은퇴각이 잡혔다. 이 점은 같은 시즌 음주운전으로 인해 불명예 은퇴를 하게 된 박한이도 마찬가지. 다만 박한이의 경우에는 사고 이후 도의적 책임을 지고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진정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데다 한순간의 불찰로 그동안 쌓은 영광이 무너졌다는 데 대해 조금이나마 동정여론이 있는 반면, 이쪽은 전적으로 본인의 명백한 잘못이기 때문에 아쉬워하거나 실드쳐주는 팬도 거의 없어 더욱 초라해진 상태.

9월 말쯤 판결이 나왔다고 한다. 검찰이 약식기소했고 법원에서 벌금 300만원 선고,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되었다.

팀의 대타마저 부족한 상황에서 콜업이 안되고 언급조차 없는 걸 보면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서 못 올리게 막았거나 아예 팀 내부 징계로 2군에만 짱박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소식이 전혀 들리지 않아서 포털사이트에 이택근을 치면 이택근 근황이 자동으로 뜨며, 심지어 KBO 선수이동현황 페이지에서도 어떤 형태로든(웨이버든 임의탈퇴든) 방출이 됐다면 이름이 올라가 있을 텐데 이택근의 이름은 검색되지 않는다.[35]

4.9. 2020 시즌

방출이 예상되었으나 법정분쟁을 마치고 2020시즌에 복귀할 예정이다. 2020년 연봉은 5천만원. 전년도 5억원에서 90% 삭감된 금액으로 이는 박명환에 이어 역대 연봉 최고삭감률 타이기록. 1군 최저연봉으로 백의종군하는 형태로 마지막 기회를 얻게 되었다. 시즌을 통으로 날리기도 했고 나이도 있기 때문에 일단 대타 및 1루수로 활약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소속팀의 외야진이 꽤 부실해진 관계로 외야수 출장이 아주 잠깐씩이라도 가능하다면 전력 면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월 23일, 대만 라쿠텐과의 연습경기에서 교체 출장해 홈런을 쳐냈다.

5월 5일 개막전 5번타자로 선발출장했다. 2018년 10월 13일 대구 삼성전 이후 무려 1년여 만에 갖는 1군 복귀전이 무색할 만큼 펄펄 날았다. KIA 에이스 양현종을 상대로 멀티히트를 때려냈다. 4타수 2안타 1타점 1득점

이후 타격감이 차갑게 식으면서 6월 13일 기준 타율 0.193, 볼넷은 7개를 얻어내는 동안 삼진은 21개를 당했다. 배트 스피드가 느려지는 등 노쇠화가 역력한 모습. 결국 6월 13일부로 1군에서 말소되었지만, 샌즈의 재계약 실패와 임병욱의 부상으로 소속팀 외야 선수진이 이정후 빼고는 별 볼 일 없는 수준이라 새 외국인 선수가 오기 전까지는 김규민-박준태-박정음-허정협 등의 고만고만한 자원들과 함께 계속 1군 엔트리 언저리에 들락날락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거기다 하필 새로 오기로 한 외국인 선수 에디슨 러셀도 내야수.

그런데 6월 9일 삼성전 이후 7월 7일까지 한 달이 다 되도록 1군은 물론 퓨처스에서도 경기 출장이 전혀 없다. 그 동안 팀에서는 허정협-박준태가 각자의 장점으로 앞서나가고 러셀의 합류에 대비해 김혜성 등을 외야수로 전향시키는 시도까지 하고 있어 당장 이택근이 급하지도 않게 되었다. 물론 부상으로 인한 재활이나 은퇴 후 지도자가 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지만 공식적으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한편 10월 8일 NC전을 앞두고 성적 부진을 이유로 손혁 감독이 갑작스럽게 물러나면서 김창현 QC 코치가 감독대행이 되었는데 이택근보다 5살이나 어려서 본의 아니게 주목을 받았다.

이후 시즌 말 손혁 감독의 퇴진, 의사회 의장 허민과 관련된 각종 루머 등으로 팀이 어지러운 가운데, 이택근이 시즌 중에 구단에 내용증명 보낸 걸로 뒤늦게 알려져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내용증명이 무엇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선수가 구단에 시즌 중에 내용증명이라는 걸 했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기도 하고, 기사에 의하면 1군 엔트리 제외 이후 부상으로 인한 재활로 시간을 보냈고 이후에도 선수단에 합류하지 않고 따로 몸을 만들고 있었다는데도 그동안 그의 거취 관련 소식이 팬들에게 거의 전해지지 않았던 것도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즌 막판이 다 되도록 어떤 소식도 안 들리던 와중에 10월 12일 키움 구단과 갈등을 빚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됐다. 자세한 내용은 사건사고 문단 참조.

10월 29일 이정후의 인스타 라이브를 통해 은퇴를 선언하였으며 은퇴식은 술집에서 동료들의 주최로 이루어졌다.

팀의 프랜차이즈 선수 였던 이택근은 2020년 11월 키움구단으로부터 방출되었다.

[1] 투수 김사율과 배터리를 짰으며 결승전 상대는 송승준 경남고였다. 연장 12회초까지 6-7로 뒤지고 있던 경기를 경남상고의 김호영이 극적인 2점 역전 끝내기 홈런을 날리며 우승을 차지했다. [2] 송승준이 말하길 이 당시 경남상고는 훈련량이 많아 특공대 같았다고. 경남고는 훈련이 오후 4시에 끝나고, 경남상고는 훈련이 밤 10~11시에 끝났다고 한다. 경남고 선수들이 훈련을 마치고 경남상고 담벼락에 매달려 '니들 뭐하노?'하면 경남상고는 훈련중이었다고. 송승준과 친구들은 경남상고 앞 카페에서 여학생들과 파르페를 마시면서 즐겁게 놀고 밤 9시쯤 카페를 나설 때 경남상고는 라이트까지 켜가며 밤 10~11시까지 운동했다고 술회했다. [3] 입학 당시 3년 선배(96학번) 강병식, 강봉규, 김상훈, 2년 선배(97학번) 김대원, 1년 선배(98학번) 박용택이 있었다. 1년 뒤 정근우가 고대 유니폼을 입었다. [4] 이후 최강야구에서 주전 포수 이홍구의 입스로 인하여 본인이 포수 마스크를 쓰게 되면서 얘기를 밝혔는데, 원래는 포수로 입단하였으나 SK 와이번스에서 김동수가 방출되어 현대로 올 때 제2의 전성기가 와 버리는 바람에 본인의 설 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5] 박경완이 FA 자격을 얻어 SK로 이적한 후 현대 구단의 계획은 강귀태와 이택근을 번갈아 기용하고, SK에서 방출된 김동수를 데려와 백업 및 대타, 지명타자로 쓴다는 것이었는데, 정작 2003년 시즌 개막 직후 강귀태는 부상으로 이탈해 버리고 이택근의 포수 수비가 시망 수준으로 드러나면서 김동수에게 기회가 돌아와 결국 김동수는 생애 첫 3할 타율+골든글러브 탈환에 성공하며 잠시나마 부활하게 되었다. 즉, 시즌 시작 전만 해도 은퇴 위기에 몰렸다가 가까스로 현대에 입단한 김동수는 퇴물 취급을 받았고, 강귀태는 데뷔 초에만 기대가 컸지 그 이후에는 성장이 정체되며 수준급 포수라고 봐 주기 어려운 선수였다. [6] 경기 전 훈련 때마다 간간이 포수 마스크를 쓰면서 공을 받아준 적은 있다. 이는 포수에서 타 포지션으로 옮길때 주로 선수들이 틈틈히 공을 받아준다. 특히 베테랑들은 포스트 시즌을 앞두고 있으면 투수들의 볼도 확인해주고 있다. [7] 다만 마지막 쿠바전에서 이택근이 포수 마스크를 쓸뻔했다. 당시 윤석민이 마무리로 등판하고 포수경험이 있던 이택근을 포수로 넣으려했다. 그런데 진갑용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대신 포수를 보겠다고 나섰고, 진갑용이 정대현 추천해 없는 얘기가 되었다. [8] 1차 투표 동률, 2차 투표에서 2표 차이로 졌다. [9] 사실 2003년 시즌은 KBO 역사상 유례없는 신인 흉작 시즌이었다. 자세한 건 이동학 문서 참고. [10] 상대인 양준혁에게 질 것으로 예상됐으나 양준혁0개의 전설을 세웠다. [11] 진갑용과 이택근은 고려대 출신이다. [12] 3할 + 도루왕 [13] 특히 2009년을 제외한 앞선 3년의 시즌은 투고타저 라서 그런지 제대로 된 빛을 보지 못했다. [14] 자기가 못하는 좌익수 수비에 들어가야 했다. 그 당시 중견수는 이용규가 전담, 좌익수 선발은 이병규가 했다. 그러나 둘 다 동메달에 그치고 베이징 올림픽에서 병역 혜택을 받게되었다. [15] 올림픽같은 대회에 선수 구역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분증이다. 이 카드가 없으면 대회 기간 중 선수 구역에 들어갈 수 없다. 특히 올림픽의 경우 보안 관계로 이걸 최소한만 주기 때문에 AD카드를 전 종목이 분배해서 써야 되는데, 가뜩이나 야구는 코칭스태프 규모가 큰 축에 속하는지라 다른 종목을 생각하면 불펜 포수 몫까지 달라고 할 수가 없다. [16] 현금 트레이드 액수는 25억 원으로 발표했으나, KBO 트레이드 이면 계약 파문으로 실제 금액이 38억 원이었음이 드러났다. [17] 당시 이대형의 페이스가 3할대 중반의 몬스터급 활약이었던지라... 뭐, 결국 시즌 후반에 원위치를 넘어 바닥을 파고 들어갔지만. 설령 이대형이 초반부터 부진했어도 수비는 이대형이 한 수 위라 이택근이 중견수를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18] 7월 0.299, 8월 0.325, 9월 0.431 [19] LG가 넥센에게 이택근을 30억+서울 입성금 20억 퉁치는 조건으로 영입했는데 만일 넥센이 2011 시즌 후 이택근의 FA 보상금 9억을 주고 사오게 되면 물경 41억이 남는 장사... [20] 커리어 내내 무릎과 허리 때문에 결장한 날이 있는 이유가 이 부상들 때문이다. [21] 부상당한 이대형보다도 득타율이 1리가 낮다. 참고로 이대형의 11년도 타율은 0.249. 타점은 24타점. [22] 현대 시절부터 오래 뛰었고, 커리어도 어느정도 있으며, 나이도 중간급. 이숭용이 자신의 은퇴이후 팀을 이끌 인물로 꼽은 두 사람 중 한 명이 이택근이었다.(다른 한 명은 정성훈) [23] 이택근이 돌아오기 전까지 넥센의 구심점을 맡아줄 사람은 다들 한가지씩 부족한 상황이었다. 송지만은 나이가 너무 많았고 오늘 내일 은퇴 할지 모르는 판국이였다., 김민우는 커리어가 부족했으며, 강정호는 그런 역할을 맡기엔 아직 어렸다. 그외의 선수들은 외부출신( 박병호, 허도환)이거나 커리어가 너무 부족했다.( 오윤, 장기영, 유한준) [24] 타율은 0.0417이었다. [25] LG로 가기 전에도 LG전 타율이 유독 상당히 높았다. 반면 LG에 있었을 때 대 넥센전 타율, 목동구장에서의 타율은 형편없이 낮았다. ' 엘넥라시코'라는 말이 생기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택근의 대 LG전 타율은 LG팬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좋았다. [26] 2012년 넥센의 테이블 세터가 당시 서건창이 장기영과 김민우가 나서는데 이 셋 출루율이 4할도 안됐다. 서건창은 신고선수 겸 풀타임 첫해 라는 것에 감안하면 3할 6푼으로 선전 했다. 더군다나 셋 다 출루도 드럽게 못했다. [27] 수비 개판인 고종욱이 좌익수를 보면 지명타자는 이택근이 봐야하는데 지명타자의 경우 윤석민의 고정 자리이므로 오히려 넥센 타선에는 구멍이 크다. 그렇다고 타격이 깝깝한 유재신을 계속 선발로 쓰기에는 부담이 크다. [28] 그와중에도 골고루 중견수 수비도 나오기도 했다. 대신 이택근이 자리를 옮기면 우익수는 박정음 임병욱이 대체, 혹은 다른 백업들을 2군에서 수혈을 했다. [29] 재밌게도 6회에 정근우가 똑같은 플레이를 했다. [30] 참고로 2아웃일 때 전력질주하는 건 프로야구 선수라면 기본 중의 기본이다. [31] 원래 감독이던 염경엽이 포스트시즌 탈락 후 뜬금없이 사퇴하면서 시즌 전부터 분위기가 뒤숭숭 했었다. 감독 선임도 나름 좋지 않았었다. [32] 참고로 첫번째 대타 끝내기 만루홈런은 데뷔 첫 타석에 김원형의 초구를 받아친 송원국이다. [33] 수비 코치가 당시 홍원기 였는데 이 사람은 히어로즈가 창단 했을때부터 팀의 수비코치 였었다. 철밥통 주제에 매년 팀 수비가 하위권에 그치고 반등할 기미도 별로 안보였다. [34] 무릎이 좋지 않은 상태임에도 경기장에서 쓰러지지 않는 이상 계속 뛴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35] 비슷한 처지에 놓인 박한이 9월 30일자로 임의탈퇴로 이름이 올라가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