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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15:10:27

이베리아반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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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반도 전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a_bataille_de_Somosierra.jpg

스페인어: La guerra de la independencia Española, Guerra Peninsular, Guerra de España, Guerra del Francés, Guerra de los Seis Años,
포르투갈어: Guerra Peninsular
프랑스어: La guerre d'indépendance Espagnole
영어: Peninsular War

1. 개요2. 진행
2.1. 배경2.2. 전개
3. 평가4. 기타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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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07년부터 1814년까지 치러진 나폴레옹 전쟁의 여섯 번째 국면. 보통 영국이나 프랑스는 "반도 전쟁"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고, 스페인에서는 "에스파냐(스페인) 독립 전쟁"이라 칭한다. 또한 현재까지 세계 여러 분쟁 지역에서 쓰이는 게릴라의 시초와 어원이 된 전쟁이다.

2. 진행

2.1. 배경

1793년에 시작되어 10년에 걸친 전쟁에 지친 영국 프랑스는 1802년 아미앵 조약을 맺으며 잠시 숨 고르기를 했다. 그러나 스위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에서 나폴레옹의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프랑스가 지중해로 확장해 오며 위기를 느낀 영국은 항의의 표시로 몰타에서 철수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1803년 5월 분쟁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초창기 영국과 프랑스의 충돌은 1805년 봄까지는 해상에서의 충돌에 그쳤으며, 압도적인 해군력을 가진 영국을 해전에서 이길 수 없었던 프랑스와 육지에서의 교두보를 마련하지 못한 영국의 양국 간의 대규모 충돌은 1805년 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랑스와 접경을 이루는 해상 국가인 스페인은 양국이 원하는 파트너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스페인과 영국의 관계는 절대 우호적이지 못했다. 불과 10여 년 전인 1790년 영국과 스페인은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에 자리한 누트카[1]를 둘러싼 갈등으로 전쟁 직전까지 갔었다. 프랑스 왕국은 스페인과 동맹 관계였지만 혁명 정부는 혁명 이전의 조약을 승계하지 않았으며 같은 부르봉가의 스페인 왕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은 프랑스의 친척들에게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스페인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에게 망명을 제의했지만 혁명 세력은 이를 거부했고, 1793년 봄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혁명 정부와의 전쟁에서 초창기 스페인군은 승승장구했으나, 툴롱 포위전에서의 실패를 시작으로 연전연패했고, 본격적으로 동원령을 내려 엄청난 물량을 뿜어내는 프랑스군의 공세에 밀려 피레네산맥을 내주고 사라고사를 흐르는 에브로강 앞까지 밀려났다. 연이은 전쟁의 실패에 경제적 혼란까지 겹친 스페인은 1795년 7월 바젤 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발을 뺐다. 이때 스페인은 프랑스에게 도미니카 공화국을 할양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듬해 제2차 산 일데폰소 조약을 맺어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어 영국과 대립하게 되었다.

1800년 10월 7일 제3차 산 일데폰소 조약을 체결하며 스페인과 프랑스의 관계는 더더욱 돈독해졌고,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스페인에게 루이지애나를 완전히 얻게 된다.[2] 스페인과 프랑스는 바다호스 조약을 통해서 영국의 오랜 동맹인 포르투갈을 공동의 적으로 선포하고 1801년 오렌지 전쟁을 일으켜 순식간에 포르투갈을 점령했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은 올리벤사를 스페인에 넘겼고, 프랑스에게 2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영국 선박에게 항구를 전면 폐쇄해야 했다. 이는 영국의 지중해 패권에 치명적이었고 영국은 이를 좌시할 수 없었다.

1802년까지 이어진 스페인과 영국의 해상 다툼에서 스페인은 산후안 공략전이나 넬슨의 참패로 유명한 산타크루스 데 테네리페의 패배와 같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전패했다. 당시 세계 3위 해군을 자랑하던 스페인은 일대일이든 함대 간 전투든 가리지 않고 마구 패배했다. 세인트빈센트곶 해전은 스페인 해군의 무릎 관절을 꺾어버리는 패배였고 남은 전쟁 내내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때문에 스페인 식민 제국은 무역 활동이나 식민지에서의 행정이 심각하게 마비되는 수준을 넘어 함선의 건조 자체를 포기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1798년 이후로 주력함을 진수시키지 못했고, 1800년 마지막 프리깃함을 진수시키는 것으로 함대 보충을 포기했다. 스페인 해군 몰락의 절정은 1798년 발레아레스 제도의 메노르카[3]가 영국군에게 함락된 것이었다.

1802년 아미앵 조약으로 짧은 평화가 찾아왔으나 1년이 조금 넘는 평화가 끝나고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이 재개되자 스페인은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스페인에게 동맹을 거의 강요한 프랑스는 매달 600만 프랑의 전비와 포르투갈의 중립을 감시할 것, 주력함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스페인은 영국에게 자신의 중립을 끊임없이 어필했지만 영국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고[4], 1804년 10월 5일 페루의 보화를 실은 스페인 선단을 선전 포고 없이 공격당한 스페인은 격분하여 영국에게 선전 포고 했다. 이로써 드디어 스페인 함대를 통해 영국 함대를 유인하고 프랑스 육군을 영국으로 상륙시킨다는 전략을 시행할 기회가 나폴레옹에게 찾아왔다. 그러나 1805년 10월 21일 벌어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위대한 해전으로 나폴레옹의 꿈은 소멸됐고, 영국에게 적대적인 해상 세력은 소멸됐다.

그러나 스페인과 영국 간의 교전은 이어졌다. 1807년 스페인령이었던 남아메리카를 노린 영국군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를 공격했으나 스페인군의 반격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패배했고 영국군은 본국으로 철수했다.

이베리아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해양 국가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사정이 달랐다. 당시 포르투갈의 경제는 식민지 브라질에서의 산물과 영국과의 무역, 이 두 가지에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었고, 1807년에는 포르투갈의 대영 무역 의존도가 전체 무역량의 절반에 달했다. 때문에 포르투갈은 수세기 동안 영국과 긴밀한 협력 관계였고, 영국과의 관계를 위협하는 것은 곧 포르투갈의 생명줄을 놓으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던 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조치는 포르투갈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중립을 유지하며 영국 함선들에게 테주강[5] 하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은 유럽의 패자로 군림하는 프랑스 황제에게 눈엣가시가 되었다. 이 조치에 중립을 표방하며 참가를 거부한 나라가 하나는 아니었다. 스웨덴 역시 중립을 표방하며 영국과의 무역을 계속했는데, 1807년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가 대패하며 맺은 틸지트 조약으로 러시아는 스웨덴에게 선전 포고 하였고, 이로 인해 스웨덴 역시 나폴레옹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면서 나폴레옹은 이제 눈을 이베리아반도로 돌리게 된다.

1807년 10월, 스페인이 포르투갈 공격을 도와주는 대가로 포르투갈의 영토를 프랑스와 분할한다는 퐁텐블로 조약이 체결되었고, 그에 열흘이나 앞서 스페인은 프랑스군의 피레네산맥 통과를 허가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휘하인 장앙도슈 쥐노에게 2만 4천의 군대를 주어 이베리아반도로 진군을 명령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2.2. 전개

1807년 11월 19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경에 있는 도시 알칸타라를 출발한 쥐노의 군대는 11월 30일 리스본에 입성했다. 포르투갈은 영국의 포르투갈 진공만을 고려해 군대가 항구 쪽에 있었던 탓에 나폴레옹군은 손쉽게 별다른 저항 없이 리스본을 함락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1세와 섭정 주앙 6세[6]를 비롯한 요인들이 브라질로 도망치는 바람에 포르투갈은 해외 식민지를 유지할 수 있었고[7] 이는 나폴레옹에겐 타격으로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군의 저항은 미미했지만, 열악한 도로와 이베리아반도의 악몽 같은 지형이 프랑스군을 철저하게 괴롭혔다. 뿐만 아니라 전쟁 초기 이베리아반도에 배치된 프랑스군은 대부분 신병이었으며, 현지 조달에 상당부분 의지하던 당시의 군대에게 가난한 이베리아 마을은 최악의 환경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은 풍요로운 프랑스 출신 신병들이 버티기엔 너무나 열악했고, 리스본에 입성하던 날 쥐노의 휘하에는 고작 2천여 명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나머지 낙오병들은 그냥 행군로에 주저 앉아 있었다. 더군다나 영국의 함선을 타고 브라질로 튀어버린 왕실은 착실하게 포르투갈의 금고를 챙겨갔고 쥐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찌됐든 포르투갈 본국과 영국의 무역을 차단하는 것에는 성공할 수 있었다.

이때 스페인 내부의 상황이 변수로 작용했다. 스페인은 프랑스와의 동맹으로서 수행한 전쟁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영국에게 당했고, 이는 식민 제국이었던 스페인에게 치명적이었다. 더군다나 스페인의 의견은 프랑스에게 번번이 묵살당했고 이 때문에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자꾸만 전쟁에서 발을 빼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스페인을 시험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은 발트 해안의 베르나도트 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군의 주력이었던 로마나 후작의 군대를 요구했고 스페인이 이를 받아들여 파병하며 스페인은 무주공산이 된다.

스페인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이 혼란이 나폴레옹 몰락의 시발점이 된다. 당시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4세는 계몽 군주였던 선왕 카를로스 3세에 비해 능력과 카리스마가 매우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고, 정치에 무관심했다. 이 때문에 왕비였던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8]와 그녀의 애인이었던 마누엘 데 고도이에게 매우 휘둘렸다. 고도이는 부패한 인물로 개인의 권력 강화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수많은 부정행위를 저질렀고, 이 때문에 민중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 페르난도 왕태자였다. 두 세력 간의 대립은 나폴레옹에게 내정 간섭의 빌미를 주었고, 스페인에 파견된 프랑스의 첩자들은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

1807년 10월 29일 고도이가 페르난도를 국왕 폐위 모의 및 왕비 살해 혐의로 공격하며[9] 정치적 혼란은 첨예해졌다. 그 와중에 12월 17일 영국과 해상에서 통상하는 상선의 나포를 허가한 밀라노 칙령이 발표됐는데, 스페인 해안은 영국과의 밀무역의 천국이었고, 지방관들은 이를 용인했다. 파리에서는 이를 이미 알고 있었고, 포르투갈 점령의 강화, 내정 질서 회복과 왕실 간의 대립 중재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북부 스페인 도시들을 점거하고 12만에 가까운 군대를 뮈라 원수에게 주어 스페인에 진주시켰다. 그들은 초기에는 혁명의 군대, 자유의 군대로 여겨져 민중에게 따뜻한 환대를 받았으나 짧은 단꿈에 불과했다.

프랑스군이 마드리드로 향하자 불안해진 국왕 부처와 고도이는 아랑후에스라는 작은 도시로 몸을 피했는데 이것이 호시탐탐 기회만 옅보던 왕태자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왕실 근위대를 앞세워 민중들을 선동한 왕태자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고도이의 궁전을 점령, 약탈했으며 이때 민중들은 고도이를 죽기 전까지 패줬다. 정변으로 입지가 크게 약해진 카를로스 4세는 사흘 뒤 폐위되었고, 왕태자가 페르난도 7세로 즉위했다.

이후 왕가는 마드리드로 돌아왔지만 3월 24일 조아킴 뮈라가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왕실의 분란을 중재한다는 명복으로 스페인 왕실 가족들을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 근처에 있는 바욘으로 소환했고, 이로 인해 반프랑스 폭동이 발생했다. 페르난도 7세는 이러한 주변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을 만나기 위해 떠났다. 중재 회의는 5월 10일에 시작되었는데,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 페르난도 7세가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게 만들고 독단적으로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 호세 1세로 옹립했다.[10] 마드리드도 아닌 바욘에서 대관식을 치른 조제프는 호세 1세가 되어 7월 20일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카를로스 4세는 로마로 쫓겨났으며, 페르난도는 프랑스 중부의 도시 발랑세에서 대프랑스 동맹군이 파리를 점령할 때까지 연금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러한 나폴레옹의 독단적인 결정에 스페인 민중들은 분노했다.

한편 마드리드에서는 카를로스 4세의 막내아들 돈 프란시스코 파울로 왕자를 뮈라가 프랑스로 압송하려 했다. 마드리드시의 위원회는 이를 거부했으나 페르난도 7세가 친서를 보내며 결국 왕자를 보내게 되었는데,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의 왕궁 정원으로 시민들이 모여 왕자의 압송을 저지하려 했다. 이때 뮈라 원수는 프랑스 제국 근위대의 척탄병 대대와 포병대를 동원하여 군중을 해산하려 하였고, 맘대로 되지 않자 군중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나폴레옹 본인도 파리의 시위대를 대포로 날려버리며 집권한 인물답게, 프랑스의 시위 진압 수단은 대포였다). 포격으로 인해 분노한 시민들은 봉기했고 마드리드 시민들은 무기를 들고 나와 닥치는 대로 프랑스군을 공격했고 130명의 프랑스군이 목숨을 잃었다. 마드리드에 있던 일부 스페인군 또한 민중의 편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반격은 매우 체계적이었다. 이들은 이미 프랑스에서 여러 번의 민중 반란을 진압한 경험이 있었고, 이를 토대로 착실하고 잔혹하게 진압해 나갔다. 도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행정망을 장악했으며 이를 통해 도시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같은 날 저녁 뮈라는 무기를 가진 사람은 곧바로 처형할 수 있다는 법령을 발표하고 무기의 자진 반납을 촉구했다. 모든 모임 또한 금지하였다. 이로써 마드리드에서의 봉기는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이튿날 마드리드의 교외에서는 시위에 참가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총살당했다.[11][12]

마드리드에서의 봉기는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5월 10일 있을 왕실 조정 회의에 앞서 친프랑스 세력들이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세워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지며 5월 9일 아스트리아스 주에서의 반란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거병이 시작되었다. 각지의 훈타(Junta)[13]를 중심으로 저항 운동이 빠르게 번졌다. 각지의 훈타들은 공동의 목표와 하나의 명령 체계를 갖추지 못했지만 페르난도 7세를 순교자로 여기며 감정적인 호소로 빠르게 커져갔고, 대규모 군대들이 생겨났다. 안달루시아에서만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카스타뇨스 장군 휘하에 3만 명의 병력이 구성된 것이 그 예였다.

이러한 세력이 빠르게 성장하는 데는 크게 두가지 요인이 더해졌는데, 첫 번째는 프랑스의 보급 체제였다. 나폴레옹이 보급에 신경을 썼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현지 조달에 의존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기동전을 좋아했고, 그를 위해 병사들의 짐을 가볍게 하고 그만큼 더 적극적으로 현지 조달(약탈)을 했다. 예를 들면 텐트를 가져가는 대신 민가의 집주인을 내쫓고 자는 식이다. 문제는 프랑스군은 대부분 중서부 유럽에서 전투를 치렀고 중서부의 유럽은(북이탈리아 등) 어느 곳보다 풍요로운 곳이었기에 어느 정도 현지 조달이 이루어져도 충분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베리아반도는 중부 유럽과 사뭇 달랐다. 이베리아의 농토는 중서부 유럽에 비해 척박했고, 스페인의 경제는 식민지에 의존하여 제대로 된 산업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민중의 삶은 피폐한 상황에서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영국의 견제를 받아 식민지와의 연결이 끊어져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고도이를 중심으로 하는 정부는 부패하여 민중을 수탈하는데 힘썼기 때문에 당시 이베리아의 민중들은 뭘 털어 가려 해도 털어 갈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프랑스군도 마찬가지로 현지 조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보급품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뺏기면 굶어 죽는 민중과 안 뺏으면 굶어 죽는 외국군 간의 갈등은 결국 최악으로 치달았고 이는 민중들의 반프랑스 봉기로 이어졌다. 두 번째 요인은 영국의 지원이었다. 훈타의 대표로 파견된 토레뇨 공작의 사절단은 런던에 도착해 6월 8일 영국의 외상 조지 캐닝의 무기, 탄약, 자금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이에 반프랑스군에 입대하면 프랑스군에게 빼앗기는 상황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 보장됐기 때문에 반프랑스군은 빠르게 늘어갔다. 이런 와중에 6월 14일 아서 웰즐리(웰링턴) 경이 약 1만의 원정군 지휘관으로 임명되며 본격적인 반도 전쟁의 막이 올랐다.

이런 가운데 포르투갈에서도 나폴레옹에 맞선 반란이 일어났고 1808년 7월 19일, 안달루시아의 바일렌(Bailen)에서 뒤퐁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에게 격파당하면서[14]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군은 점점 불리해졌다. 결국 스페인군은 8월 마드리드에 입성해 호세 1세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호세 1세는 나폴레옹에게 '이베리아를 점령하려면 20만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고 내 권위를 세우려고 하면 단두대만 1만 개쯤 필요할 것 같다. 너는 집집마다 요새화되고 사람들은 쉽게 단결하는 여기 상황을 몰라. 우리가 정복자 행세하는 한 여긴 희망이 없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을 정도.[15]

특히나 나폴레옹에게 타격이었던 것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일어난 반나폴레옹 반란이 귀족이나 군인들이 주도했던 게 아니라 일반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점이었다. 영국은 이에 주목했고 나폴레옹을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 영국은 포르투갈에 상륙해 나폴레옹을 격파하려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성난 민중들은 게릴라가 되어 활약했고, 일부 게릴라는 정규군에 준하는 전력으로 프랑스군을 끝없이 괴롭혔다.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이 프랑스에 비해 정찰과 정보력에서 항상 앞섰던 것은 게릴라들의 정보 자산 덕분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베리아 프랑스군의 주력이 에브로강 건너편으로 퇴각함에 따라 쥐노는 포르투갈에 고립되어 있었다.

1808년 8월, 아서 웰즐리(웰링턴)가 이끄는 영국군은 포르투갈에 상륙해 8월 17일, 로리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이후 8월 21일에는 영국, 포르투갈 연합군이 비메이로에서 다시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연전연승하던 나폴레옹군의 기세가 꺾이자 영국은 환호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잘 지휘하던 아서 웰즐리(웰링턴)가 너무 젊다는 이유로 포르투갈에 보내는 추가 병력을 잘 지휘할 수 없겠다고 판단해 해리 밸러드가 원정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는 포르투갈에서 불리해지게 되어 신트라에서 협정을 맺고 포르투갈에서 프랑스군은 철수한다. 그러나 쥐노가 고립되었던 데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프랑스군 전부와 무기, 전리품을 영국 선박으로 프랑스까지 안전하게 이송한다'는 내용의 신트라 협정을 맺은 휴 달림플, 해리 버라드 등 장성 3명에 대한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아서 웰즐리(웰링턴)는 이 협상과 무관하다고 판단되어 진상 조사 대상에서 벗어났으나 귀국 조치 되었고, 한동안 지휘관이 아니라 아일랜드 수상으로 있게 되었다. 이후로 포르투갈의 영국군 3만 명은 존 무어 경이 지휘하게 되었다.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은 프랑스의 코앞인 바스크까지 진군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폴레옹은 직접 친정을 결심하게 된다. 무려 12만 5천 명[16]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이베리아반도로 진군한 나폴레옹은 부르고스에서 영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부르고스 방면으로 진군중이던 존 무어 경의 영국군은 나폴레옹에게 패하였고 결국 이듬해 1월 코루나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때 존 무어 경이 전사하지만 영국군은 붕괴하지 않고 전력을 유지하면서 퇴각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친정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프랑스군은 그해 12월 마드리드를 탈환했으며, 스페인 임시 정부는 세비야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원수들에게 전쟁을 맡긴 뒤, 자신은 귀국했다. 그러나 존 무어 경의 군사 행동은 스페인군에 집중되던 나폴레옹의 시선을 분산시켜 스페인군에게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이후 아서 웰즐리(웰링턴)의 작전에 영향을 준다.

1809년, 프랑스군은 포르투갈 재침공 작전을 감행했다.(바스크까지 밀려났다가 다시 포르투갈까지 밀어붙인 셈이다.) 일부는 포르투갈의 민병대에게 격파당하기도 했으나 3월 29일, 포르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되레 프랑스군은 포르투갈 각처의 저항으로 포르투에 고립되는 형국이 돼버렸다. 그런 가운데 1809년 4월, 영국군의 아서 웰즐리(웰링턴)가 돌아와 포르투를 재탈환했다.

이후 아서 웰즐리(웰링턴)는 스페인으로 진군해 호세 1세가 이끄는 스페인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스페인군과의 공조가 잘 진행되지 않았고[17] 앙드레 마세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포르투갈 재침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포르투갈의 방비를 위해 아서 웰즐리(웰링턴)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이른바 "토레스 베드라스 전선"을 구축해 나폴레옹군의 진군을 막은 것이다. 토헤스 베드라스torres vedras 방어선은 흉벽과 요새, 강화진지들로 이뤄진, 전근대판 마지노선이었다. 영국의 건축공학과 쇼미더머니, (프랑스군의 약탈로 근로의욕이 상승한) 포르투갈 노무자들이 합쳐진 3중 방어선은 통곡의 벽 그 자체였다. 어느정도냐면, 마세나 원수가 한번 보고 아예 접근 자체를 포기해버릴 정도. 3중 방어선을 건설했는데 1차 방어선조차 건드리지도 않았다.

프랑스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여러차례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군과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지는 못했고 전쟁은 갈수록 지리한 장기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이러면서 프랑스는 점점 병력과 물자가 부족해져갔다. 해상보급 받는 우주방어선 탓에 프랑스의 장기인 기동전은 불가능한데, 그 상황에서 스페인 전역에서 게릴라전을 치러야 하니 당연한 노릇. 설상가상으로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길에 나서면서 그나마 부족한 병력을 차출당하기까지 했다.

포르투갈을 굳게 지키고 있던 아서 웰즐리(웰링턴)는 1812년, 스페인으로 진군하여 살라망카 전투에서 오귀스트 마르몽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18], 프랑스군은 안달루시아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러시아 원정으로 이베리아 전선의 병력 상당수를 차출했다는 것을 알게된 후, 아서 웰즐리(웰링턴)는 이듬해인 1813년 6월 21일, 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 이베리아반도에서 완전히 프랑스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아서 웰즐리(웰링턴)는 프랑스군의 측면을 위협하는 기동으로 호세 1세를 비토리아까지 후퇴시켰다. 스페인 북부의 항구도시들을 탈환하여 보급선을 줄인 것은 덤.[19] 그리고 비토리아 전투에서 원래는 사라고사에서 프랑스군의 증원이 오기로 했는데 아서 웰즐리(웰링턴)는 이 때 연합군의 장점인 (게릴라들이 수집한) 정찰 자산을 이용해 사라고사의 증원이 22일에서야 도착한다는 것을 듣고 21일에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서 웰즐리(웰링턴)는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프랑스 남부 본토까지 쳐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발목이 잡힌 나폴레옹은 이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이 전쟁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큰 타격을 남겼다.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크리오요 계층 사람들 입장에선 가뜩이나 식민지 따위 안중에도 없는 본국의 태도에 불만이 많았던 데다, 미국의 건국과 프랑스 혁명을 보고 우리도 슬슬 독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러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이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유린당하자, "아니꼬운 본국이 호구인 게 입증되었으니 당장 독립하자"라는 여론이 기름 만난 불처럼 빠르게 들끓게 된다. 이 반도 전쟁이 1808년 5월에 발발하고 불과 4달 뒤인 9월부터 스페인령 아메리카 지역에서 차례차례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 건 이를 증명한다.

결국 1820년대에 쿠바 푸에르토리코를 제외한 모든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를 내줘야 했고[20], 포르투갈은 아예 왕가가 브라질로 피난한 탓에 본국보다 몇 배나 큰 브라질 식민지의 입지가 너무나도 커져, 다시 포르투갈이 제대로 브라질을 통제하려 하자 왕태자 페드루 4세를 내세워 브라질 제국으로 독립해 버렸다. 포르투갈은 프랑스의 약탈, 영국의 약탈, 게릴라의 약탈, 영국의 청야작전 등이 겹치며 인구 3%가 사망했다. 한국 전쟁 때 남한의 사상자가 2.5%인걸 감안하면 얼마나 큰 피해인지 감이 올 것이다.

3. 평가

역사적인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침략과 유린을 본토에서 직접 바라본 스페인인들에게 있어 이 전쟁은 독립전쟁이라 부를 만큼 큰 의미를 가지고, 스페인 사학계에서 안티고 레히멘[21]이 끝나고 현대 스페인사가 시작되는 기점으로 볼 중요한 사건이다.[22] 이후 스페인 좌익은 민중이 주도한 게릴라전이란 요소를, 스페인 우익은 근대 혁명 세력에 맞서 왕실과 교회를 수호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좌우파 모두 대불항쟁의 역사적 유산을 주장했고, 지금도 서로 험악한 카스티야, 카탈루냐 모두 동등하게 유린당해 지방 사이의 관계가 나쁜 스페인에서도 전 이베리아인들이 공유한다고 할 만한 국민적 통합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역사적 추앙과는 별개로 동시대에는 프랑스 편에 붙은 스페인인들도 적지 않았고, 이들 중 많은 수는 단순한 기회주의적 매국노였지만 진지하게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스페인에도 전파하고 프랑스의 힘을 빌려 종교 재판을 비롯한 구시대적 악습을 개혁하려 했던 이상주의자들도 꽤 있었다. 이런 친프랑스 근대주의자들을 아프란세사도(afrancesados), 즉 '프랑스화된 사람들'이라 부른다. 민족주의 사학계에선 이들을 매국노, 절대악 취급했지만 좀 더 중립적이고 비판적인 분석이 가능한 현대의 학계는 외세에 대한 투쟁 못지 않게 반도 전쟁에 내전의 측면도 있었다는 점을 긍정한다. 그만큼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혁명파 지식인들이 구체제를 향한 적대감도 클 수밖에.

이 전쟁은 나폴레옹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 전쟁 이후로 나폴레옹은 군대를 한곳에 집중시켜도 모자를 판국에 항상 반도 전쟁을 염두에 두고 전략을 짜고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으며, 이는 이중전선 형성이라는 결과까지 낳게 된다. 결국 본 전선에서도 패배하고, 이베리아반도 전선에서도 패배하여 프랑스 본토가 백년 전쟁 이후 360년만에 외적들에게 짓밟히는 결과가 초래되었고, 나폴레옹 본인도 몰락하는 결말에 이르게 되었다.

전쟁의 잔혹한 면을 보여주는 시궁창스러운 모습도 있었다. 게릴라들과 프랑스군의 잔학행위와 보복 행위들로, 게릴라들은 프랑스군이 자신들을 죽이고 약탈했기 때문에 습격하고, 프랑스군은 게릴라들이 자신들을 납치하고 죽이기 때문에 역으로 그들을 죽였다. 프랑스 장교들이 게릴라들의 타겟이 되어 잔혹한 죽음을 맞는 경우도 많았으며 프랑스군 역시 보복에 나서서 게릴라 활동을 벌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마을을 발견하면, 그 마을로 들어가서 주민들 전체를 집밖으로 끌어낸 다음, 한 명씩 벽에 세워놓고 총으로 쏘아죽이는 학살도 자주 벌였다. 극단적인 예시로 어떤 프랑스 장군은 스페인에 가족을 데려왔다가 포로로 잡혔는데 자신의 아내가 윤간당하는 걸 본 후 말 그대로 톱으로 가랑이부터 썰려서 살해당했고 그의 아내와 가족도 그와 같은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상황이지만 이 과정에서 서로는 서로에 대해 인간 내면의 모든 잔혹함을 겉으로 마구 드러내 서로에게 행했다. 게릴라들도 자신들끼리 싸우거나 동족을 학살하기도 하는 등 지옥도가 펼쳐졌다. 지원군이라고 온 영국군의 약탈은 덤이었다.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행위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이만큼 참혹했던 만큼 당연히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는 분쟁, 전쟁 중 스페인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다. 현대 학계는 민간과 군을 모두 합쳐서 한 백만명 가량이 죽었다고 추산하는데, 이는 20세기에 터진 스페인 내전보다도 많은 숫자고 적어도 어느 정도 믿을 만한 통계를 낼수 있는 역사상 스페인의 전쟁 중에선 가장 압도적이다. 그나마 비교할만한 건 중부 이베리아 메세타 고원지대 같은 일부 지방에선 아예 수십년간 풀한포기 안 자랄만큼 심각한 파괴를 불러왔다는 중세 초기 무어인의 침략인데 이건 수십년에 걸쳐 진행된 과정이고, 애초에 신빙성 있는 기록 자체가 거의 안남은 한창 이전 사건이다.

사실 중세부터 프랑스는 마치 청나라 병자호란마냥 힘이 좀 강해지면 나머지 유럽에 국력을 투사하기 전 후방안정+위력 테스트를 한답시고 늘 피레네 산맥 건너 만만한 카탈루냐계 소국이나 통합 스페인 형성 이후 스페인을 한대 쥐어박는 걸로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이 전쟁은 파괴의 정도가 유독 심했으니 지금까지도 표면적, 정치적인 차원에선 원만한 수면 아래 스페인 민간 감정에선 종종 발견할 수 있는 은연중의 반불 감정의 역사적 근원이자 정점이라 할수 있다.

게다가 당시의 스페인은 루이 14세 이후 프랑스와 우호관계였고, 포르투갈이든 모로코든 딱히 스페인을 침공할 강국은 아니었으니 국방예산을 해군과 식민지군에 투자하는 영국스러운 국방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르봉 왕조의 몰락과 혁명 프랑스의 등장은 군사적 재앙이었고, 실제로 프랑스군이 침공하자 (펠리페 시대처럼) 대규모 정규군으로 받아칠 육군력이 없어 전 국토가 초토화되는 게릴라전을 벌여야 했다.

아직 통합 스페인이 등장하기도 이전이고 유럽의 정치 전반이 여전히 귀족 족벌 봉건제로 묶여 있던 중세에 카스티야, 아라곤의 왕위를 둘러싼 계승전쟁들은 대외적으론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대리전스런 성격이 강했고, 반대로 스페인이 유럽 패권 세력으로 전성기에 오를때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를 한껏 줘패는 게 패권 등극의 신호탄이었다. 이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스페인의 유럽 패권 상실, 부르봉 왕조 프랑스의 부상 또한 로크루아 전투[23]를 필두로 17세기 중후반에 프랑스가 스페인을 줘패는 걸로 시작했다. 한 마디로 유럽 권역 내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 중근세 내내 서로를 끊임없이 때리고 견제해온 관계였던 것이다.

이런 불편한 라이벌리의 서불관계는 18세기 초반 스페인의 왕위교체기 혼란을 틈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후 프랑스가 아예 스페인에 왕가 지부를 박아두는 걸로 프랑스 우위를 확정지었지만 적어도 나폴레옹 전쟁 시기까진 스페인이나 프랑스 양국 본토가 처참하게 유린당하며 전쟁터가 된적은 없었다. 중세 프랑스 왕이 이베리아 왕국들의 왕위 계승 분쟁에 파병한 거야 중세의 프레임 자체로 봐야 되고, 근세를 화려하게 장식한 치열한 압스부르고 스페인과 발루아-부르봉 프랑스의 사생결단은 주로 이탈리아나 독일, 네덜란드, 혹은 프랑스 내의 종교 분쟁을 통한 대리전의 형태가 주를 이루었으며,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이 치고박은 전장도 주로 제3자의 땅에 있었다.[24] 17세기 카탈루냐 반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때야 프랑스군이 피레네 산맥 직접 넘어오긴 했지만 이때는 주로 카탈루냐에서만 활동했고, 진입 명분도 어쨋든 스페인 내 특정 세력의 지원군이었으니 마냥 점령군으로 행동할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시기 그것도 유럽 기준에선 작지도 않은 바르셀로나에서 세비야까지 스페인 전역을 유린한 건 전례가 없을만큼 참혹한 사례였고, 이러다 보니 당연히 현대에서도 민간에선 은연중에 종종 볼수 있는 스페인사람들의 반불감정, 프랑스에 대한 불신감의 역사적 근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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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의 밴쿠버 [2] 원래는 스페인이 영유권을 주장한 곳이었지만, 루이지애나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프랑스가 차지했다. 그러나 7년 전쟁의 식민지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에게 패배하여 캐나다를 잃었고, 프랑스는 동맹 관리 차원에서 광대하지만 관리는 어려운 루이지애나를 프랑스의 동맹이었던 스페인에게 넘겼다. 다만 광대한 영토와 통신 시설 미비로 1803년까지 스페인 행정관들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3] 1714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에게 넘어가 지브롤터와 함께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이 활동하는 주요 거점이 되었다. 7년 전쟁 당시 프랑스-스페인이 잠시 탈환했다가 다시 영국에게 넘어갔고 미국 독립 전쟁으로 스페인이 다시 되찾았다. 이후 아미앵 조약이 체결되면서 스페인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4] 비슷한 처지로 스페인 카를로스 4세의 아우 페르디난도 1세가 다스리던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이 있는데, 이들 역시 프랑스의 압력을 받고, 1차, 2차 대불 동맹에서 이탈해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러나 페르디난도 1세는 무능력한 형과 달리 지속적으로 프랑스에 대항해, 한때 나폴레옹의 부재를 틈타 영국의 지원을 받아 로마를 점령하기도 했다. 물론 프랑스군에게 쫓겨 다시 시칠리아로 후퇴하고 돌아와 본전도 못 건졌지만 말이다. [5] 타구스강이라고도 불리며, 이베리아반도의 중앙에서부터 리스본까지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 [6] 남편인 페드루 3세와 차기 왕위 계승자였던 장남을 잃고 정신병이 심해져 도저히 국정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차남인 주앙이 섭정을 맡았다. [7] 그리고 브라질은 사실상 본국이 되었다. [8] 카를로스 4세와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딸도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이다. [9] 이 사건은 에스코리알 음모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페르난도 왕태자는 재빨리 자신을 도와줬던 동료들의 이름을 불며 목숨을 건졌다. 당시 왕태자는 자신이 자유주의적 헌법을 약속하며 왕위에 오른다면 프랑스에서도 도와줄 것으로 여겼지만 이때 이미 스페인의 직접 통치를 염두에 두고 있던 나폴레옹은 왕태자에게 관심이 없었고 왕태자의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다. [10] 이때 조제프는 나폴리의 왕이었는데 본인도 정든 나폴리를 떠나 스페인으로 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11] Dos de Mayo라고 불리는 이 봉기를 기념하기 위해 현재도 5월 2일은 마드리드 지역의 공휴일이 되었다. [12]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이 학살을 배경으로 한다. [13] 위원회라는 뜻으로 프랑스에 의해 해체된 행정 기구를 대체하는 지방 자치적인 통치 기구이다. [14] 이 전투는 전리품 약탈에 눈이 먼 군대는 민병대에게도 처절하게 털릴 수 있다는 극명한 사례로도 유명하다. 뒤퐁과 그 부하들과 병사들은 전리품을 지키느라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했으며, 항복하는 순간까지도 전리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고. 심지어는 소지하던 병장기를 포기하고서라도 어떻게든 금은보화만큼은 본국으로 바리바리 싸가지고 가려고 했다고 한다. 사실 월급 100~200만 원 받고 전쟁터를 굴러야 하는 병사 입장에서 10억짜리 금덩이를 지나치는 건 불가능하다. [15] 실제로 반도 전쟁이 본격화된 1809년부터 1813년 4월까지 프랑스는 상시로 최소 20만 명 이상을 이베리아 전선에 주둔시켜야 했다. 러시아 원정으로 병력을 빼 갈 때에도 최소 20만은 남겨두었다. [16] 계속 증강되어 1810년에는 32만 5천 명까지 증가하지만 이후 프랑스의 전황이 나빠지는 데다 러시아 원정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야 하면서 줄어든다. [17] 식량 지원을 약속해놓고 잠수 탄다든지, 영국군 보급대열을 약탈한다든지 하며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영국군도 현지 약탈을 안 한건 아니었다. [18] 마르몽은 아서 웰즐리(웰링턴)가 신중한 장군이라 수비를 할 것이라 착각하고 측면 공격을 시도했지만, 아서 웰즐리(웰링턴)은 언덕 너머에 영국군 3사단과 포르투갈 기병대를 숨겨두었고, 이들을 돌격시켜 프랑스군을 기습 후 와해시키는 공격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19] 원래는 리스본을 통해서 해상보급을 받았기에 비토리아 전투 시점에서는 보급선이 길어졌어야 했지만, 북부의 항구도시를 통해 보급선을 크게 줄였다. [20] 영국과 미국이 남미의 독립을 지원했다. 전통적으로 영국은 스페인을 적대국으로 여겼고, 행여나 나폴레옹을 몰아낸 스페인이 중남미의 방대한 식민지들을 토대로 다시 강대국이 될 것을 우려하여 스페인의 중남미 식민지에 영국군 장교들을 보내 식민지 반군을 훈련시키거나 아예 그들과 합류하여 직접 스페인군에 맞서 싸우는 식으로 스페인을 괴롭혔다. 이 사실을 안 스페인 정부가 영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영국 정부는 모르는 일이라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21] Antiguo regimen, 스페인어로 그냥 앙시앵 레짐, 구체제란 뜻. [22] 스페인 사학계에서 19세기 이후의 역사는 '현대사 (historia contemporánea)'로 분류하고 '근대사 (historia moderna)'는 카스티야-아라곤 통합왕국 성립에서 나폴레옹 전쟁까지 흔히 스페인 제국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23] 사실 특정 전투를 특정 패권 국가의 몰락의 시발점으로 보는 것 자체가 현대 역사학계에선 지양하는 풍조고, 해당 전투 자체는 조밀하게 살펴보면 그리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여전히 장기적인 패권 교체 현상 자체를 상징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24] 사실 서술된 역사가 증빙하듯이 피레네 산맥자체가 큰맘먹고 작정한 원정을 준비하면 전근대 국가도 충분히 전쟁을 치를만큼 막되먹은 지형은 아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일부로 큰맘먹고 한쪽에서 계획한 원정이 아니라면 중세, 근세 유럽 봉건 정치조직간 일상적이었던 수준의 분쟁을 방지할 만큼의 자연방벽 역할 정도는 했다. 따라서 스페인-프랑스 국경이 이리 숱한 전쟁, 분쟁의 역사 치곤 통합 스페인 형성 이래 17세기 피레네 조약 당시 스페인 최후의 산맥 이북 영토였던 북부 카탈루냐, 바스크 지방 상실 빼곤 굉장히 안정적으로 유지됐던 것이다. [25] 단 명확한 플롯 없는 영화 구성상 중심 내용은 아니다. 작중 설정으로는 등장인물이 읽던 책 속 이야기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