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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6:44:20

진안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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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왕자
진안대군 | 鎭安大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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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태조의 황자
진안대군 | 鎭安大君
조선 개국공신
진한정효공 | 辰韓定孝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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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354년
고려 동계군 동북면 함흥부 귀주동 이성계 사저
(現 함경남도 함흥시 함흥본궁)
사망 1394년 1월 15일 (향년 40세)
조선 동계군 동북면 함주부 함흥목
(現 함경남도 함흥시)
묘소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황강리 몽상동
재위기간 조선 진안군
1392년 8월 25일 ~ 1394년 1월 15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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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방우(芳雨)
부모 부황 태조 고황제
모후 신의고황후
형제자매 부황 기준 8남 5녀 중 장남
모후 기준 6남 2녀 중 장남
배우자 삼한국대부인 충주 지씨[1]
(三韓國大夫人 忠州 池氏, ? ~ 1440년 이후)
자녀
2남 2녀 [ 펼치기 · 접기 ]
[ 충주 지씨 소생 - 1남 1녀 ]
장남 - 봉녕군 이복근(奉寧君 李福根)
장녀 - 경혜옹주 이씨(敬惠翁主 李氏)[2]
[ 첩실 소생 - 1남 1녀 ]
차남 - 순녕군 이덕근(順寧君 李德根, ? ~ 1412)
차녀 - 옹주 이씨(翁主 李氏)
종교 불교 유교 ( 성리학)
군호 진안군(鎭安君)
진안대군(鎭安大君)[3]
시호 경효공(敬孝公)
→ 진한정효공(辰韓定孝公)
→ 정의공(靖懿公)
}}}}}}}}} ||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3.1. 후손
4. 평가
4.1. 충신 부정설4.2. 충신 긍정설
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진안대군은 여말선초의 인물로 조선 초기의 왕족. 태조 적장자이며 정종, 태종의 친형이다. 이름은 방우(芳雨)이다. 전주 이씨 진안대군파의 파시조이다.

2. 생애

어려서 아버지를 섬기는 것으로 효자로 이름이 났고 형제들과도 우애가 두터웠으며 자라서는 시, 서가 깊었고 검약을 몸소 행했다. 지윤의 장녀와 결혼했고 관직에 나아가 예의판서[4]를 지냈으며 진안군이 과거에 붙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장인인 지윤과 아버지 이성계의 후광으로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간 것으로 보인다.[5] 1388년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자 이방과, 이화상, 유용생, 최고시첩목아와 함께 이성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11월에 밀직부사를 지내면서 강회백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조현을 요청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진안군에 봉해졌고[6] 4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향을 피우면서 신주를 효사관에 안치했으며 을 좋아해 날마다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다가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1393년 사망했다. 그가 죽자 3일 동안 조회를 멈췄으며 시호는 경효(敬孝).

3. 가족관계

3.1. 후손

현대에 들어와서는 대표적인 후손으로는 이경영 ENHYPEN 희승이 있다.

현재 그의 후손은 약 15,000여명이다.

4. 평가

정사인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를 비롯한 조선 초기 기록에선 고려의 충신으로 볼 여지가 전혀 없다. 그저 후계구도에서 배제된 후 과음하다 죽었을 따름이다.

진안대군파 족보에선 개국공신 이지란의 후손들이 인조 9년(1631)에 발간한 《청해백집》을 인용하여, 그가 위화도 회군 당시부터 아버지에 반대하고 고려를 향한 절개를 지켰고, 조선이 건국되자 철원 보개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고 주장한다. 소주를 마시다 죽었음도 망국의 설움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술로 매일을 지내다 병이 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정조의 문집인 《 홍재전서》에 실린 진안대군 묘비명 등을 살피면 양녕대군의 세자 양보설과 동일하게 조선 후기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열었지만 아들, 그것도 다음 왕위가 약속된 장남이 왕위마저 거부한 채 고려에 충절을 다했다는 극적인 요소 때문에, 창작물에선 《청해백집》을 거론하며 그를 고려의 충신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절대 다수다.

문제는 청해백집이 언제 편찬된 서적인지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청해백집을 이지란이 직접 남긴 기록으로 착각하지만 이지란의 후손들이 엮었다고 진안대군파의 족보에 인용문으로 전할 뿐이다. 당연히 내용도 진안대군파 족보에 기록된 것이 전부이다. 청해백집 원본을 서지학적으로 분석할 수가 없으니 실제로는 청해백집이 먼저인지 홍재전서가 먼저인지조차 불분명하다.

4.1. 충신 부정설

정사를 통해 이방우의 행적을 살펴보면 고려에 충절을 지켰다는 《청해백집》의 기록에 많은 의문점이 생긴다. < 고려사>를 보면 이방우는 위화도 회군 우왕 진영을 탈출해 신속하게 이성계 측에 합류했으며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이 즉위하자 1388년 11월, 부사 자격으로 정사 강회백과 나란히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조현(朝見)을 요청했다. 조선 건국의 결정적 계기인 위화도 회군 전후로 아버지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움직였다. 일단 여기까지는 이성계가 아직 고려의 중흥공신이었기에 그랬다고 할 수도 있으나 조선 건국 후에는 이성계의 명으로 사대(四代) 선조를 제향(祭享)하고 신주(神主)를 안치하는 등 맏이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방우 사후 그가 이끌던 군사들을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에게 맡아서 이끌게 했다는 기록을 통해 병권에도 일정 부분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17]

이 군권이 갖는 의미는 태조의 사병 혁파 과정을 살피면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태조는 1389년 기존의 원수직을 절제사로 개편하고, 1390년 전국의 군대를 이성계 본인 아래로 일원화해 기존 절제사들의 인장을 거둬들였다. 이듬해에는 삼군도총제직을 신설해 자신에게 수여하고 휘하 절제사로 배극렴, 조준, 정도전을 임명하는 일련의 군제 개편을 실시했다. 태조 본인의 사병만 남긴 채 나머지 사병을 혁파하는 사다리 걷어차기, 정권 보위를 위한 불안전한 사병 혁파를 한 것인데 정작 1392년 건국 이후 다시 왕자, 종친, 핵심 공신들을 절제사로 임명해 각 도의 군사를 분배해 없앴던 사병을 직접 다시 만들어 버린다.

고려의 권신으로 있을 때야 자기가 세운 왕씨가 임금으로 명분작을 해주니 자기 것을 제외한 나머지 사병을 없애는 조치만으로 충분하다 직접 왕이 되어, 고려수호파가 고려 부흥을 내세워 선동할 수도 있는 상황, 지방 세력에게 불손한 메시지(반역자&힘이 있으면 너도)를 줄 수 있는 상황이 되니 친위세력에게 절제사직과 군사를 분배해 정권 보위를 더 철저히 하고자 한 조치였다.[18]

이방우가 여기에 포함되어 군사를 나눠받았다는 것은 그가 조선 건국에 부정적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방우가 실권에서 밀려나는 시점은 조선 건국 후가 아니라 이성계가 아직 고려의 중흥공신이었던 공양왕 시점이다. 공양왕 즉위를 기점으로 이방우의 활동이 공식 기록에서 사라지고 이방과가 지혜부윤, 판밀직사사, 삼사우사를 거치며 아버지를 받치는 조정 중신으로 자리잡는다. 이방우가 거느렸던 병력을 아들 이복근에게 물려주지 않은 것은 이방우가 가졌던 맏이로서의 위상을 그 후손들에까지 내려가게 하지는 않겠다는 의도였고 이후 이방과가 신의왕후 소생의 살아있는 왕자들 중 장자로서 그 위상을 공고히 한다. 이 점은 무인정사 직후 태조가 이방과에게 내린 교서에서 대놓고 장자라 못 박은걸로 잘 드러난다.

그렇기에 그의 세자위 탈락 원인은 고려에 대한 충절이 아니라 공양왕 조카사위인 이방번과 마찬가지로 지윤의 딸과 결혼하고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여 조선 건국에 저항한 고려의 보수파 핵심과 인척 관계로 엮인 그의 배경, 신돈의 후손이 된 창왕의 옹립에 기여했던 것으로 인한 정치적인 문제에서 기인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이방우의 서자 이덕근의 아내(이방우의 며느리)는 이방번의 장인이기도 한 정양군 왕우의 딸로 공양왕 조카딸이다. 이성계는 고려 정계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이미 장성한 한씨 소생 다섯 아들들로 중앙 정계 인사들과 혼맥을 꾸렸다. 이로 인해 한씨 소생 다섯 왕자와 나중에 정창군 왕요의 조카딸과 혼인한 이방번까지 여섯 왕자는 고려 구 세력과 깊게 이어져 있었다.

며느리로 들인 이방우와 이방간, 아내로 들인 이방번까지 고려 왕성 개성 왕씨와 혼맥으로 엮인 왕자만 셋이다. 이는 변방 무장 출신인 태조가 순조롭게 중앙 정계에 안착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신 왕조 건국 후 후계자 선정에서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 것이다. 태조의 선택은 자연히 중전의 자식인 이방석에게 향했다.[19]

온건파 사대부들의 스승으로 조선 건국에 끝까지 저항한 이색이 정도전, 조준 등 강경파 사대부들에게 공격받은 가장 큰 명분이 신씨를 왕으로 옹립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성계의 맏아들이 명나라에 창왕의 조현을 요청해 신씨 옹립에 공을 세웠다는 사실은 조선 건국 세력에게 커다란 약점이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공양왕 즉위를 기점으로 정계에서 밀려났고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위해 '우창 비왕씨설'이 절대 부정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로 후계 구도에서도 밀려버린 것이다.[20]

비슷한 예로 서진 창업의 기틀을 다진 사마의의 아우 사마부가 있다. 그는 군권을 쥔 형을 보좌해 국가 재정을 책임지며 사마씨가 위나라의 최고 세력으로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고평릉 사변이나 조모 시해 때도 언제나 형과 조카를 지지했다. 그는 실질적으로 조씨 황실을 위해 기여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음에도 황제가 시해되었을 때나 위나라가 멸망했을 때 통곡했다는 기록 하나만으로 그는 위나라의 충신이 되어 위나라의 마지막 충신은 사마씨에게 나왔다는 미담을 만들었다.

같은 여말선초로 봐도 이복형 이원계는 위화도 회군에 반대한 흔적이 전혀 없고, 위화도 회군은 엄밀히 말해 고려에 대한 반역도 아니며[21] 이원계 그 자신과 그리고 그 아들들이 전부 이성계, 이방원 아래 종사하였음에도 이성계가 이자춘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고 적장자인 그를 서자로 변조하는 과정에서 고려 충신으로 치장되었다.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뒤 죽은 사람들 고려 충신으로 미화하는 게 없는 일이 아니라는 소리.

조준의 동생 조견은 조선개국공신 2등에 책록된 공신으로 조선왕조 성실히 봉직해 세종때 궤장까지 받았는데 조선 중기부터 갑자기 고려 충신으로 왜곡되기 시작하더니 숙종때 고려 충신 조견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지고 정조때 화액까지 받았다.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라는 국왕의 의도와 조상을 높여서 자신이 이득을 보려고 했던 후손의 욕심이 더해지자 세종 때까지 살아 활동기간과 기록이 훨씬 많은 조견의 삶조차 왜곡되어버렸다.

조선 건국 후 술로 시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고려를 향한 충심 때문이 아니라, 맏이로서 인정은 받으면서도 정치적 이유로 후계구도에서도 실권에서도 완전히 배제될 수밖에 없는 자기 처지에 울분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인문채널 휴>에서 역사학 강의를 하는 윤훈표 교수도 이방우의 고려 충신설은 부정하고 여말선초 연구자 임용한 박사 또한 조선 초까지는 유교 윤리에도 불구하고 적장자 계승이 왕실은 물론 사회윤리로 정착되지 않았다고 역시 부정했다.

그리고 이방우 고려충신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들고 오는 <청해백집>은 당대가 아니라 인조 9년(1631)에 발간되었다. 이지란 사후 200년이 훌쩍 넘은 시점이다. 물론 문집이 100년, 200년 텀을 두고 나오는 일은 흔하다. 단지 뒤에 나왔다고 의심하진 않는다. 하지만 여진족 출신 무장으로 학문과는 거리가 멀며, 글을 보전하고 모아줄 문우와 제자가 전혀 없던 이지란의 글이 임진왜란 같은 난리를 거치며 2백 수십 년간 보전되고, 심지어 그 양이 문집을 꾸릴 정도로 많다?

게다가 청해백집은 지금 전해져 내려오지도 않는다. 청해 이씨 후손들이 찾으려고 백방으로 애를 썼으나 찾지 못했다. 청해 이씨 종친회는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설명한다. 21세기에 퍼진 청해백집 내용은 전주이씨 족보에서 청해백집을 출처로 밝히고 인용해온 내용이다.

전주이씨 진안대군파에서 인용한 청해백집 내용을 보자. #
이지란의 저서인 <청해백집(靑海伯集)>에 실린 이야기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여기에는 정종대왕이 태종대왕으로 이화상이 아버지 이지란(청해백)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는 정종대왕이 태종대왕으로, 이화상이 아버지 이지란(청해백)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고려가 요동을 정벌할 때 진안대군 · 태종대왕 · 이지란을 위험인물이라 하여 성천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태조고황제가 출동한 이 후 장마가 계속되자, 감옥에서 태종대왕(고려사에는 정종대왕)이 진안대군에게 “탈옥해서 이 사실을 아버님께 알리십시오.” 하니 대군은 답하기를 “임금의 명을 어김은 도리어 효가 아니다.” 하며 거절하자, 태종대왕이 담을 넘어 탈옥하여 위화도로 달려가 태조고황제[22]에게 아뢰었으므로, 회군할 때 성주에 들러 나머지 사람들을 석방했다는 것이다. 이 때 석방된 진안대군은 곧 태조고황제가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붙들고, “죽으면 죽었지 임금의 명을 어기고 회군하는 것은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태조고황제가 듣지 않자 가족을 이끌고 철원 보개산(寶蓋山)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한다.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 옆에 있었던 이지란과 개성에서 가족들을 대피시키는 임무를 맡았던 이방원이 이방우와 함께 감옥에 기갇혀 있었고 이방원이 담을 넘어 위화도로 달려가 이성계가 그들을 구출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이게 이지란이 남긴 기록 같은가? 청해백집이 어떤 내용인지, 언제 간행되었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당당하게 그런 허술하기 그지없는 서적을 이지란이 남긴 1차 사료라며 들이밀 수 있다.

그리고 이원계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1388년 위화도 회군 시점의 이성계는 고려 중흥공신이다. 요동정벌이 누가 봐도 무리수였기에 나중에 갈라서는 조민수, 변안열, 정지 등도 모두 뜻을 같이 했고 이색, 정몽주 같은 온건파도 협력했다. 이성계가 본격적으로 속내를 드러냄은 이듬해 1389년부터이다. 1388년 시점에서 고려에 역심을 품었다 운운은 독심술이나 예언능력이 없고서야 불가능하다.

청해백집을 정말로 이지란이 썼다면 위화도 회군 내용을 결코 틀릴 리 없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 관련 서술조차도 실제 역사와 전혀 다르게 나오므로 이지란이 남긴 기록이 아님이 분명하다. 원본이 없어 서지학적으로 검증도 불가능하다. 청해 이씨가 쓴 것조차 아닌, 조선 후기로 갈수록 범람하는 위서일 가능성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을 바탕으로 한 이방우 고려충신설의 기반이 얼마나 허술한가.

조선 초기 성종 때 이름난 명문들을 모아 엮은 <동문선>에는 동시대 인물 권근이 지은 환왕 신도비명과 신의왕후 신도비명이 포함되었는데, 여기서 이방우는 일찍 죽었다고만 언급된다. 역시 성종 때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도 마찬가지로 일찍 죽었다고만 서술했다. 망한 나라 충신만큼 써먹기 좋은 게 없어 고려 충신이라는 사실이 숨길 일도 아닌 시기다.

조선 초기 기록이 모두 일찍 죽었다, 술병나 죽었다고만 언급하는 인물이 조선 후기 기록들에서만 고려의 백이숙제가 되는데 과연 어느 쪽이 신빙성이 높겠는가.

17세기 청해백집에서 드러난 이방우 고려 충신 만들기를 정조가 더욱 노골적으로 하였다. 정조는 진안대군에게 가장 관심을 많이 두었던 임금으로 진안대군의 무덤을 정비하고 비석을 세웠으며 묘비명도 직접 썼다. 이같은 왕의 공인을 통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숙종은 단종과 사육신을 복권하고 관우 사당에 사배를 올렸으며, 영조는 개성에 그런 야사가 전해지는걸 들어서 알고 있었으면서도 일부러 개성가서 모르는 척 물어보는 방식으로 두문동 72현을 띄웠다. 정조는 장릉 배식단에 일개 무녀까지 올렸고 광해군의 충신으로 여겨져 제거된 유몽인도 충신이라며 복권시켰다. 어리거나 기반에 문제가 있었던 후계자를 둔 왕들이 설사 힘 없거나 문제 있는 군주라도 충성을 다하라는 의도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눈에 띈 인물일 뿐이다.

한씨가 조선 개국 이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붕떠버린 한씨 소생 왕자들이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을 구간이 다들 있긴 했는데 이방우는 그 중에서 특히 심한 편이다. 위화도 회군 이후 차기 국왕 선정을 두고 이색,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가 대립했다는 설이 통설로 널리 퍼져있다. 신종의 7대손이자 이성계와 사돈지간인 정창군(定昌君) 왕요(王瑤)를 즉위시켜 평화롭게 선양받는 그림을 그렸는데, 조민수와 이색이 세자 왕창을 옹립하는 것으로 반격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우창비왕설을 성립시키기 위해 저지른 <고려사>의 가장 대표적인 곡필로 사실이 아니다. 조선 건국 세력이 건드릴 수 없는 명나라의 기록과 이성계 아들들의 활동상, 기록상 모순과 편찬 연대를 감안하면 이 시기 기록에 대대적인 역사 왜곡이 보인다.
백관이 전국보(傳國寶)를 받들어 정비전(定妃殿)에 두자 태조는 왕시의 후손을 택하여 세우고자 하였지만, 조민수는 이인임이 발탁한 은혜를 생각하여 창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제장이 자기를 어길까 우려하여 이색이 당시의 명유(名儒)이므로 그의 말을 근거로 삼고자 몰래 물으니, 이색은 "당연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였다.[23]

이 기록은 창왕이 신돈의 후예라는 전제를 깔았으므로 후대의 인식이 투영된 내용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색은 이때 재야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판문하부사가 되어 정계를 이끌고 있었음에 비추어 실제로는 이색의 주도 아래 정계 전반이 창왕 옹립에 동의한 듯하다. 이색은 어린 창왕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창왕 즉위년(1388) 10월 하정사(賀正使) 자격으로 대명 사행길에 오른다. <고려사>는 이때 이성계가 덕망이 높고 민심을 사고 있어 자신이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 일부러 5남 이방원을 서장관으로 동행시켰다고 서술한다.[24] 그러나 이색의 사행 바로 1달 뒤 11월에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가 창왕의 명 입조(入朝)를 요청하는 사신단의 부사로 임명된 것에서 이것이 사실을 아님을 알 수 있다. 창왕 즉위조차 반대했다면 1달 사이 아들 둘을 창왕의 입지를 강화하는 목적의 사신단에 동행시킨다는게 말이 안 된다. 11월 사신단이 출발할 때 이색은 없는데 대체 뭐하러 그런단 말인가? 이성계 일파가 창왕 즉위에 반대했다는 주장 자체가 우창비왕설에 기반해 나중에 덧붙여진 왜곡이고 창왕 즉위년의 이성계 일파는 창왕 옹립하고 명나라의 인정을 받는 문제에서 이색 측과 의견이 같았고, 긴밀히 협력했던 것이다.

우왕은 요동 정벌을 주된 명분으로 삼아 폐위되었으나 전왕이자 왕의 부친으로 꾸준히 예우를 받았다. 흔히 사극에서 위화도 회군과 우왕 폐위에 바로 이어서 김저 사건을 묘사하는 바람에 대중들이 헷갈리는 부분인데 우왕은 1388년 6월에 왕위에서 내려왔고 김저 사건은 1389년 11월이다. 명나라에는 우왕이 지병으로 물러났다고 블러핑을 쳤으나 홍무제는 우왕이 강화도에 구금되고, 주동자로 이성계가 있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우왕 때도 공민왕이 시해되었다는 이유로 1374년에 죽은 공민왕의 시호를 1385년이 되어서야 내려주고 우왕의 승계를 공인한 적이 있어서 창왕을 승계를 인정받기 위해선 좀 더 세심히 전략이 필요했다. 이색은 그것을 감국(監國, 관리를 파견해 고려를 감독해줄 것)에서 찾았는데 <고려사절요>에서는 이색이 창왕의 감국을 요청했다고 적고 있다. 우왕이 물러난 이유가 병이 아님을 알고 있는 홍무제에게 일단 이런 식으로 인정을 받아내려는 의도였고, 실제로 성공해서 홍무제는 이색의 감국 요청에 부정적인 언사를 보이지 않았다.

1388년 12월 홍무제는 고려에 사람을 보내 말과 환관을 구해오게 했는데 이때 파견된 사신단 중 고려 출신들은 창왕에게 4배(四拜)하는 의례를 행했다. 즉, 실질적으로 창왕의 계승을 인정한 것이다. 근데 <고려사> 이색 열전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색이 창왕이 명나라 황실에 친조(親朝)하기를 청했다는 것이다. 흔히 주원장이 이색 발음이 나하추 같다고 비웃었다는 바로 그 대목이다.[25] 이 기록은 전후 맥락이 전혀 없이 갑자기 튀어나온데다 바로 1달 뒤에 진짜로 친조를 요청하는 사신단이 강회백[26]과 이방우의 주관하에 출발했다. 10월에 출발한 이색 일행은 이듬해 4월에나 돌아왔으며 동일한 목적의 사신을 1달차로 파견하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인력과 비용 낭비고 황제를 우롱하는 처사로 보일 수도 있다. 게다가 왕의 정통성에 관련된 문제라서 이색이 독단적으로 거론할 만한 사안도 아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색은 감국만 요청했고 받아들여졌는데 이성계 세력이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것은 명나라 황제가 인정한 왕을 쫓아낸 패역으로 규정될 수 있다. 우왕의 폐위에 대해 요동정벌이라는 반명 행위를 명분으로 제시한 것처럼 창왕의 폐위에도 창왕이 신씨라서 명나라의 인정을 못 받았다는 등의 명분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1445년에 편찬된 < 용비어천가>가 이색이 입조를 요청했다 적은 가장 이른 기록이며, 그 다음에 1448년 6월 증보편수관명단을 통해 세종 대 상당한 개정이 이뤄졌음이 확인되는 <태조실록>. 마지막이 1451년에 완성된 <고려사>다. 이 장대한 왜곡을 위해 명나라의 공식 외교 문서를 뜯어고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색이 명나라로 떠나고 겨우 1달 지난 1388년 11월 강회백이 정사, 이방우가 부사로 창왕의 친조를 요청하는 사신단이 파견된다. 창왕의 입조를 위한 사신이 1달 뒤 따로 파견된 것에서 이색이 친조를 요청했다는 기록이 후대에 덧붙여진 서술임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사> 이색 열전에는 이성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처럼 적고 있지만, 이는 후에 공양왕 즉위를 둘러싸고 이성계와 대척점에 서게 된 이색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곡필이고, 실제로는 1388년 내내 이색과 함께 창왕의 즉위를 위한 대명 외교에 이성계 세력이 주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이들은 1389년 말부터 갈라섰는데, 위화도 회군의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창왕의 친조가 실현된다면 명나라가 창왕의 왕위 정통성을 완벽히 보증하는 것이 되고, 요동 정벌의 모든 책임을 최영에게 전가함으로써 창왕의 즉위를 가져온 위화도 회군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합포에 유배갔다 7월에 충주로 옮겨진 최영을 친조 요청 사신이 출발하는 11월에 처형한 것도 이런 의도였다.[27] 이색이 관리를 보내 고려를 살펴달라 청한 것도, 이성계가 왕이 직접 입조하게 해달라고 한 것도 원 간섭기를 기억하는 저때 기준으로는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왕이 중국을 찾아가는 정도를 넘어 말 한 마디에 교체되고, 감시를 위한 관리는 수시로 찾아오던 고려-몽골 관계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에 외교적 승인을 얻는게 당연한 절차로 여겨졌다. 하지만 강회백과 이방우는 이듬해 3월 성과없이 귀국했다. 명나라는 고려의 일에 간섭하지는 않겠고, 앞서 이색의 사행을 통해 창왕의 즉위를 소극적으로 인정하긴 했으나 그 즉위 명분까지 인정하려 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명태조실록>에 기록된, 조선이 쓴 기록에선 대대적으로 잘라먹은 홍무제의 발언을 보면 그 이유가 명확하다.[28] "신하가 권력을 잡아 폐립(廢立)을 마음대로 했다. 아버지를 구금하고 아들을 세웠는데 이번의 입조(入朝) 요청이 어찌 왕의 뜻이랴. 필시 권신(이성계)이 도모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노회한 홍무제는 뒤에 숨은 이성계와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괘씸하게 여겼으며 홍무제는 창왕도 그리 내켜하지 않았다. 홍무제가 고려와 마찰을 빚었던 이유는 고려가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흔히 반원 개혁이라고 일컫는 공민왕의 정책은 현대 한국에서 흔히 떠올리는 민족주의의 결과물이 아니라 중원의 세력 변동으로 원나라가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북원의 세력 변동에 따라 공민왕 말기부터 우왕 시기까지 고려는 중간에서 간을 봤는데 우왕 시기 북원의 연호를 쓴 적도 있고 우왕은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그 우왕의 아들이 창왕이니 홍무제 입장에선 전혀 믿음이 안 가지만 당장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없고, 이성계란 권신의 개입에 뚜렷하니 마지 못해 인정한 것. 그래서 요동의 관리에게 친조 일행이 오더라도 돌려보내도록 조치함으로써 친조 불가 입장을 확고히 하였다. 한편으론 해로를 통해 귀국하는 이색에게 자신의 아들과 고려 명문가의 여식들간 혼인을 추진해보라는 답변을 보낸다.[29] 강회백과 이방우의 사신단의 친조 요청을 거부할 때는 친조는 거절, 창왕 계승 자체는 인정, 고려 사정에는 불개입 기조를 밝혔는데 그 사이 마음이 바뀌어서 고려 내부 사정에 개입할 각을 재기 시작한 것이다.

이성계는 이 때부터 명나라의 인정을 받기 쉽고 얌전히 선양해줄 새 임금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신종 후손으로 몽골과 아무 상관없고, 자신의 사돈이기도 한 정창군 왕요다. 실제로 홍무제는 공양왕에겐 상당히 호의적이었고 공양왕의 세자 왕석의 입조를 허락했다.[30] 1389년 6월 친조를 요청하는 사신이 또 파견되었다. <고려사 >상으론 3번째, 실제론 2번째다. 윤승수는 9월에 귀환해 홍무제의 명에 따라 명나라 예부에서 작성한 외교 문서를 전했는데 <고려사>[31]에 인용된 명나라의 문서에는 홍무제의 아들들과 고려 명문가 여식 결혼시키게 처녀를 보내라는 요구(=고려 내부 사정에 개입하겠다.)와 친조 거절 사유로 왕씨가 피살되고 이성(異姓, 신씨)이 왕씨를 가탁하였기에 입조를 거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홍무제가 신우, 신창을 주장했다는 순 말도 안되는 왜곡이다. <고려사>를 편찬한 세종이 손 댈 수 없었던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에는 간략하게 거절했다고만 적혀 있으며[32] 창왕의 폐위는 우왕의 폐위와 동일한 반역으로 규정했다.[33] 창왕이 너무 어려서 폭정을 명분으로 폐위시킬 수가 없으니 왕통 자체를 부정하는 방법을 택했고, 아버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이용해 폐가입진(廢假立眞)이란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시켰다. 이게 워낙 뜬금없는 소리니까 '명나라가 창의 친조를 거부했다. 왜? 창이 왕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폐위하고 진짜 왕씨를 세운다.'로 친조 거부의 이유를 이성계가 아닌 우왕과 창왕에게 돌린 것이다. 이를 위해 조선 건국 세력과 세종은 필요하면 명나라의 예부 자문도 왜곡한 것이다. 이 때문에 완전히 새 된 사람이 이방우다. 그가 사신단의 부사로 간건 당연히 아버지의 의중에 따른 것이었고, 열심히 아버지를 거들었을 뿐인데 명나라의 움직임과 이해득실 따지다 뜻을 바꾼 아버지 때문에 졸지에 창왕의 즉위를 인정받기 위해 동분서주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보다 앞서 사신으로 갔던 이방원은 21살로 나이도 매우 어렸고, 일개 서장관이라 사신단을 책임지는 위치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이색이 이때 친조를 요청한 건 세종 대에나 만들어 붙인 왜곡이고 실제론 감국 요청 정도만 하고 돌아왔던지라 문제가 없었지만[34] 명나라가 친조를 거부한 사실을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는 근거로 들이민 상황에서 창왕의 친조를 요청하는 사절의 No.2였던 이방우는 사정이 달랐다. 결국 동생 이방과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공양왕 시기에 이방우는 대외활동을 끊었다. '이방우 고려 충신설'이 말이 안 되는 이유이며 그가 소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4.2. 충신 긍정설

물론 고려 충신설이나 은거설은 후대의 역사나 야사에 언급된 것이고, 부정론에서 근거로 언급한 기록들은 정사에서 나온 것이니, 고려 충신설 자체는 신빙성이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부정론에서 주장하는 근거들을 다른 시각에서 보면 고려 충신설은 과하더라도 이방우가 스스로 세자 자리를 거부했을 가능성까지 배제하긴 어려운 점들이 일부 있다.

일단 창왕 대까지 이성계에게 동조하다가 공양왕 대에 이르러 가장 큰 정적이 된 정몽주 같은 사례도 있으며, 그 외에도 변안열을 비롯해 위화도 회군까지는 이성계의 편이었다가 그가 왕위를 찬탈하려 하자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 많다.

세자가 되지 못했던 이유들로 지목되는 것도 다시 보면 설득력이 약하다고 볼 여지가 있다. 일단 지윤 등과의 혼인관계 때문에 세자가 되지 못했다고 한다면, 정종 역시 즉위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부인과 첩이라는 차이가 있는 것은 맞지만 정종 역시 지윤의 딸 두 명과 혼인했기 때문이다.[35] 위화도 회군의 경우도 요동 정벌이 시작되기 전부터 많은 반발이 있었던 만큼 이성계와 평소에 친분이 깊지 않은 인물들까지도 어쩔 수 없이 동조했었으며, 이방우가 이성계의 아들로서 도망치지 않고 우왕 진영에 남았다면 인질로 잡혀있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마당이었으니 회군에 참여했다는 것이 곧 그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는 근거까지는 되지 않는다.

사신으로 파견된 것 역시 세자가 되지 못했던 이유가 아니었을 수 있는데, 이색과 이성계 간의 갈등이 시작되고 있던 시점이었으므로 강제적으로 사신으로 선발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목적은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방원도 이색의 '요청' 에 따라 이색, 이숭인과 더불어 서장관으로서 파견되었으니, 이방우 역시 이러한 경우였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부정설의 주장에 의하면 창왕과 관련하여 이성계가 두 아들을 사신단의 일원으로 파견하였다는 점, 그리고 조선 건국 세력을 포함한 당시 대신들이 상왕이 된 우왕에게 한 우대 등에서 사료에 따라 판단한 조선 건국 세력과 우왕, 창왕 부자, 그리고 이색 일파 간의 관계나 초반 갈등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간단히 풀릴 수도 있는 문제이다.

일단 우창비왕설이나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의 과장, 곡해 여부를 떠나서 우왕은 얼마 뒤 조정의 대신이었던 변안열의 아들인 변현과의 혼인을 앞둔 또 다른 대신이었던 왕흥의 딸과 동침하고 그녀를 선비로 봉했다는 일화도 있는 등 음행과 폭정을 일삼은 왕이었다는 점은 물론이고, 최영과 더불어 명나라에 맞서 요동정벌을 추진하려 했던 만큼 명에서도 그리 달갑지 않은 인물이었다는 점도 있었고, 위화도 회군 직후에는 자신의 명을 거역한 그들에게 악감정이 생겼다고 해도 다수의 환관들을 이끌고 대신들인 이성계, 조민수, 변안열의 저택에 침입하는 무모한 행동을 보여줬던 만큼 회군 세력에게 있어서 그의 폐위에 대한 명분이 있긴 했으나, 어쨌든 왕을 폐위한 만큼 그 왕의 아들을 어리다고 해도 후계자로 미는 것은 그 전의 국내외 역사들을 고려해봐도,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조선 건국 세력도 그렇지만 회군 세력 전체에게 있어서도 썩 좋은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민수가 창왕을 옹립하기 전에 위치 상 위화도 회군과 관련이 없었던 이색과 손을 잡은 것도 그 점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36][37][38]

그래도 창왕이 왕위에 오른 만큼 어린 그에게서든, 아니면 차후 다른 이에게서든 깨끗하게 선위를 받고 새 왕조를 세우려면 조선 건국 세력은 국내외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쌓아 훗날을 위한 명분을 만들 필요가 있었으니 일단 창왕에 대한 충성심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줘야 했을 것이고, 장남인 방우와 문신 출신인 방원을 창왕에 대한 사신으로 보낸 것이나 상왕이란 명분으로 개경에서 쫓겨난 우왕을 여러 차례 찾아가 우대한 것은 그러한 움직임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건국 세력의 과장된 조작인지, 정말 우왕이 벌인 일인지는 모르나 그가 김저, 정득후와 접촉하여 그들에게 곽충보를 만나게 함으로써 또 다른 틈을 주었고, 그로 인해 우왕에 이어 창왕도 우창비왕설에 의해 폐위되고, 이어서 두 부자가 비극적으로 죽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만큼 공양왕 이후의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 또한 창왕의 조현을 청하기 위해 간 사신이라서 정치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상술했듯이 정몽주라는 예도 있는 만큼 그 역시도 공양왕 대에 이르러서야 아버지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본심을 알게 되어서 관직을 내려놓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령 최영은 이성계 집안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던 인물이고 정몽주는 이성계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이는 이들이 진안대군과도 어느 정도 친밀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으며 자신과도 잘 아는 사이였던 어르신들을 모두 제거해 가면서까지 역성혁명을 시도한다는 것은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은거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조선 건국 이후에 사대 선조를 제향한 것이나 신주를 안치한 경우도, 당시 세자였던 이방석의 나이가 어렸기에 장자로서 그 임무를 맡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이는 조상을 모시는 일이니, 개인적으로 조선 건국을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거부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부정설에서도 언급되기도 했던, 사망 직전까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로 남는데, 이 부분같은 경우에도 당시 조선군의 최상위 요직을 맡아 병권을 가진 이들이 당시 어렸던 이방번 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조선 건국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큰 공을 세웠던, 이방과를 비롯한 왕족들이나 정도전, 남은, 이제 등의 공신들이었던 만큼 설령 그가 정말 충신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조선에 부정적이어서 다른 마음을 가졌다고 해도 그가 가진 사병만으로는 그들, 더 나아가서 고려 말의 명장이었던 아버지 이성계를 상대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감시나 호위 목적으로 조선 왕실과 조정에서 이방우의 사병을 유지시켜줬다고 볼 수도 있는 만큼 이 점도 문제가 되긴 좀 애매해 보인다. 특히 정말로 이방우의 마음에 문제가 없었다면 이방우 사후 그의 아들인 이복근이 계승했어야 될 사병을 이원계의 아들이자 이방우의 사촌인 이조가 물려 받은 상황은 긍정론의 관점에서 봐도 마치 이방우가 사라졌으니 군대를 물린 것처럼 보이는 묘한 부분이다. 물론 장성한 형들이나 조카들을 두고 가장 어린 막내가 세자로 책봉되었다는, 차후 생길 수 있는 이방석의 정통성 문제를 고려해서 이방우 가문의 영향력을 줄여야 되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한편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두문동 72현 전설이나 양녕대군 왕위 양보설이 한낱 야사로만 치부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당대의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안 나오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인데, 진안대군이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는 이야기는 바로 당대에. 그것도 이성계를 최측근에서 보필했던 의동생 이지란이 쓴 《청해백집》에 나온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이성계의 집안 일을 깊이 알고 있었을 사람이 남긴 기록이므로, 공식 기록에는 차마 실을 수 없었던 내용을 남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사실 진안대군은 스스로 세자가 되고자 했다면 뭘 해볼 수 있는 위치였다. 오랜 세월동안 집안의 장손 역할을 했다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적장자 계승론은 그 자체로 강력한 명분이었으며, 특히나 조선과 같은 유교 국가에서는 더욱 힘을 받을 수 있었다. 아무리 조선초기라고 하더라도 아들들의 서열대로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고가 아니라면 이방원이 굳이 정종이라는 완충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했을 것이다. 5번째 아들로써 위에 명실상부한 형들을 모두 제끼고 즉위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방원 같은 철혈의 군주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며, 진안대군은 혼맥과는 관계없이 누구보다도 강력한 정통성과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왕자의 난의 주동자가 이방원이 아닌 이방우였다면 태조로써도 한 수 접어줄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최소한 명확한 사실은 이방우가 후계구도에서 배제된 것은 순수하게 외부의 영향으로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당부분 아니면 최소한이라도 진안대군 본인의 의지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고려에 대한 충정은 아닐지라도 어떤 이유에서도 이방우가 쉽게 물러나준 것은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와 욕망을 가진 태종에게도 다행인 일이었을 것이다.

폐세자가 될 만큼 심각한 문제도 없고 과실도 저지르지 않은 장손을 막후 공작으로 폐한다는 것은 일단 국시에 어긋날 뿐더러 왕실 종친들에게서도 공감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진안대군 다음 가는 둘째이자 부왕을 보필한 공로가 매우 큰 영안대군 이방과가 특별한 사유도 없이 이복동생들에게 밀려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자 그 동복동생들이 형을 국왕으로 추대한 사건이 바로 1차 왕자의 난이다. 즉, 당시 진안대군은 심각한 결함이나 과실이 없는 적장자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원한다면 세자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대중들의 인식과는 다르게, 정도전은 이방원보다도 이방과를 더 견제했다. 그런데 이방우는 하고자 했다면 이방과 이상으로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기록을 보면 저 둘과는 달리 뭘 제대로 하고자 한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되지 않았고 친동생들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본인 스스로가 강력하게 거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러한 사실에 대한 공감대로 왕족의 전반에 걸쳐 퍼져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요컨대 고려에 충절을 바쳤다는 것은 과장이라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왕위를 찬탈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정치에 대한 환멸로 인해 혹은 개개인의 밝히기 어려운 사정들로 인하여 스스로 정치적 활동을 거부했을 가능성까지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5. 대중매체에서

이성계의 장남이지만 고려의 충신이라는 묘사가 야사임에도 극적이고 이방석의 세자 책봉과 1차 왕자의 난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시발점으로 쓰기도 좋은 데다 무엇보다 창왕 입조와 관련된 전근대의 정치적 사안이 현대의 시청자들이 이해하기에는 난해하기 때문에 퓨전 사극은 물론 어지간해서 고증을 지키는 정통 사극에서도 여전히 초야에 묻혀 고려에 충성을 다하다 죽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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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40년(세종 22년)에도 살아있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장수한 듯 하다. [2] 또는 한산군주(韓山郡主), 영동현주(永同縣主). [3] 제릉 비문 1404년 건원릉 비문 1409년에 동생들은 대군으로 새겨진 반면, 이방우만 혼자 그냥 군으로 올라있다. 당시에는 대군 칭호가 공식적으로 소급되지 않았던 것 같다. 후대, 특히 정조 이후에 진안대군이라는 호칭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4] 고려식으로 표현하면 예부상서, 조선식으로 표현하면 예조판서 [5] 이성계의 아들 중에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인물은 이방원 이방연이 있다. [6] 조선에서 왕의 적자에게 '군'이 아니라 '대군'이 붙게 된 것은 태종이 즉위한 이후부터이다. 태조의 적자들은 당시 대부분 '군'을 받았지만 태종이 즉위한 후에 전부 '대군'으로 바뀌었다. [7] 다른 자매들은 성빈 지씨 숙의 지씨로 동생 정종의 후궁이 되었다. [8] 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 9월 12일 갑자 2번째기사 [9]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8월 20일 병인 2번째기사 [10] 태조 손녀 경혜옹주 • 이숙무묘 문화재청 조선왕릉 [11] 세종실록 54권, 세종 13년 10월 18일 기유 3번째기사 [12] 세조실록 11권, 세조 4년 윤2월 19일 정축 5번째기사 [13]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6월 13일 기축 1번째기사 [14]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6월 13일 기축 1번째기사 [15] 신의군 이인(慎義君 李仁) [16] 익안대군의 장남 [17] 다만 개국 직후 왕자들을 책봉하고 절제사를 임명하며 이방과, 이방번, 이제 3명을 중심으로 군권을 재편했기에 죽기 직전 거느렸던 군사력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18] 도당에 이동, 소집 상황을 보고하게 하는 안전장치는 걸어두었으나 군사들이 국가가 아닌 절제사 개인에게 예속되는 현상 자체는 막을 수 없어 1차 왕자의 난을 막아내지 못한다. 이 사병화 문제는 태종 즉위 직후부터 후반기까지 꾸준히 이어지는 장기적인 군제 개편을 통해 비로소 일소된다. [19] 세자 책봉 논의 당시 이성계는 한씨 소생의 아들들보다는 당시 중전이던 강씨의 소생을 세우려고 하였다. 이에 처음에는 이방번을 이야기했으나 이방번은 태조가 끌어내린 공양왕의 조카사위라 자질과 상관없이 세자가 될 수 없었다. 왕과 신료들이 이를 모를리 없으니 장자가 우선이라는 명분상 의례적으로 꺼낸 말이었을 뿐이다. [20] 윤정, <정종의 즉위과정과 즉위 명분>, 진단학보, 2013년 [21]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 자체가 무리수다보니 폭정을 명분으로 우왕을 폐위하는데까지는 적지 않은 온건파 신료들이 동의했기 때문이다. 원간섭기의 역사적 기억이 진하게 남아있는 시대인데 원간섭기의 시선으로는 중국을 거스른 임금이 왕위에서 내려오는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심지어 나중에 다시 즉위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충렬왕이나 충선왕이 그랬다.) 이성계가 본격적으로 속셈을 드러낸 때는 회군 이듬해인 1389년이다. 1388년까진 창왕을 옹립하고, 창왕의 승계를 명에 인정받아야 한다는 데 조민수와 이색과 뜻을 같이해 적극 협력했다. [22] 대한제국 성립 이후에 태조를 황제로 추증하며 붙은 시호다. 만약 이게 진안대군파가 인용하는 과정에서 고친 호칭이 아니라면, 청해백집 자체가 17세기 저작으로 꾸민 조악하기 그지 없는 위서거나 청해백집으로 꾸민 위서를 진안대군파가 인용했다는 소리다. [23] 고려사 권137, 열전50 창왕 1년 7월. [24] <태조실록> 권1 총서. [25] <고려사> 권115 열전 28 이색. [26] 막내동생이 공양왕의 사위로 공양왕 폐위 직후 참수되는 강회계다. 공양왕 시기 정몽주 측에서 활동했고 공양왕이 폐위될 때 귀양갔다 태조 7년에 재등용된다. [27] 명나라에는 이듬해 2월에 사신을 보내 보고했다. [28] <명태조실록>, 권195, 명태조 22년 1월 20일(辛未) [29] <고려사> 권137, 열전50 창왕 1년 4월 [30] 이성계가 예상못한 것은 공양왕이 순순히 선양하지 않았다는 것. 명나라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 순순히 선양까지 해주면 금상첨화지만 반대로 버티기 시작하면 난감해진다. 공양왕 폐위는 음력 기준으로 1391년 9월 세자 왕석의 명나라 입조 → 1392년 3월 세자의 귀국 행렬 맞으러 간 이성계 해주에서 낙마 → 1392년 4월 정몽주 피살 → 1392년 6월 말 공양왕 명나라에 책봉 요청 사신 파견 → 1392년 7월 공양왕 폐위. 사신단 중도 귀환으로 굉장히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31] 권137, 열전50 창왕 1년 9월 [32] <명사> 권320, 명태조 22년 [33] <명사> 권3, 명태조 22년 [34] 우창비왕설 강화를 위해 <용비어천가>에 처음 추가 -> <태조실록>을 증보편찬하며 추가 -> 한창 작업 중이던 <고려사>에도 살며시 추가해서 사료 충돌을 막고, 아버지 태종이 이색의 사절에 참여한 것에 대해선 이색이 백성의 추앙을 받는 이성계를 두려워해 일부러 태종을 참여시켰다는 설명을 추가해 깔끔히 정리. [35] 물론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와 정종이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의 상황이 다르다는 점, 그리고 정종은 이방원 일파가 무인정사의 명분으로 주장한 적장자로서 왕이 된 점을 감안해야 한다. [36] 고려사, 특히 원간섭기에 대한 이해부족이다. 여말선초에 이런식으로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아들을 세우는 게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원간섭기에 충렬-충선-충렬-충선-충숙-충혜-충숙-충혜를 이미 겪어 봤기 때문이다. 태종이 이거이를 탄핵할 때 그가 정종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명분을 거론할 수 있었던 건 고려 멸망 후 조선 초기까지도 한번 양위한 왕이 다시 즉위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인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우왕이 다시 복위한다해도 이상하지 않게 생각하는게 이 시대의 사고방식이고 당연히 누가 봐도 무리수인 요동정벌의 책임을 물어 내려오게 한 걸로 정치적 부담이 생길 일도 없다. 중국의 슈퍼파워에 의해 왕이 수 차례 갈린 영향으로 중원 왕조의 인정이 그 어느 시대보다 중요한 권위로 작동했던 시절인데 당연히 요동정벌을 추진한 우왕은 여기서 실격이었다. 창왕을 명에 인정받게 만들려 부단히 애쓴 이색도 우왕 끌어내리는 것은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37] 우왕이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끌려내려 왔으니 창왕과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신을 옹립한 신료들이 마찰을 빚는다는 건 고려사 이전에 전근대 권력의 기본 속성도 이해못한 주장이다. 공양왕은 자신을 옹립한 사람이 사돈인 이성계였기에 그가 왕위를 노리는 권신임에도 견제만 했을 뿐 그의 세력을 숙청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이색과 (마음 바뀌기 전의) 이성계는 함께 창왕을 옹립했고 이들과 손절을 시도한다는 건 창왕 스스로 자기 기반을 흔드는 정치적 자살행위를 한다는 뜻이다. [38] 다만 충자 계열 왕들이 겪은 것은 음행과 폭정으로 폐위된 충혜왕을 제외하면 후궁문제라든지 고려왕과 심양왕 간의 권력투쟁이나 개혁 정책과 관련된 갈등 등과 같은 정치문제로 인해 당시 상국이자 처가였던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서, 혹은 자발적인 의지로 이뤄진 퇴위에 가까웠던 반면, 우왕과 창왕 부자같은 경우에는 차후 우왕을 상왕으로 대우해주긴 했으나 아랫사람인 대신들에 의해 벌어진 폐위와 즉위였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고 본다. 또한 창왕이 왕권 유지를 위해 두 당파 간 연합을 유지하는 상태로 아우르고 가는 것도 사실 불가능했는데, 조선 건국 세력 중에서는 남은이나 조인옥 둥과 같은 경우처럼 이미 위화도 회군 직후부터 이성계의 속내가 어떻든 그를 왕위에 올릴 생각을 하는 인물들이 있었기에 목표가 다른 두 당파는 서로 갈라질 수 없는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39] 갈등이 커졌다는 것보다는 형을 이해하는 동생들이기에 별 수 없이 받아들였던 것뿐이며 드라마상에서는 이방과만이 그 부분에 대해서 계속 신경써주고 있었다. [40] 다만 신덕왕후는 진안대군이 세자 자리를 버리고 은거하자 자신의 친아들을 세자로 삼겠다는 욕심을 가지게 된다. [41]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의 셋째 아들 견용검 역. [42] 2009년 MBC 드라마 < 선덕여왕>에서는 알천 역. [43] 역사적으로 이방과는 이성계의 무골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인물이다. [44] 해당 장면을 보면 신덕왕후는 이방원이 미쳐서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도록 이중 삼중으로 계획을 짜놨다. 이성계가 부인과 세자를 놔두고 온천을 가게 만들고, 이방원에게 가별초까지 쥐어준 다음, 이방원을 보살펴주었던 방우의 비극적인 최후를 보게 함으로써 군사행동을 유도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