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 토시아키의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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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토시아키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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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 롯데 마린즈 역대 주장 | |||||||||||||||||||||||||||||||||
니시오카 츠요시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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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토시아키 (20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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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요시후미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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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토시아키의 수상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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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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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 2010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 반지}}} |
2006 |
이시이 타카시 ( 세이부 라이온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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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토시아키 ( 치바 롯데 마린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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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바 아츠노리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
아베 신노스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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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토시아키 ( 치바 롯데 마린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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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쿠보 히로키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2005 퍼시픽리그 3루수 부문 베스트나인 | ||||
2003-2004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닛폰햄 파이터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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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토시아키 ( 치바 롯데 마린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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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호세 페르난데스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
2005-2008 퍼시픽리그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 ||||
2004 나카무라 노리히로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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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토시아키 ( 치바 롯데 마린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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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10 코야노 에이이치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
이마에 토시아키의 보유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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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최장 타석 연속 안타 (8타석) | |
일본시리즈 최장 타수 연속 안타 (8타수) | |
일본시리즈 단일 경기 최다 안타 타이 기록 (4안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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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이마에 토시아키 今江敏晃[3]今江年晶를 사용했다.] / Toshiaki Ima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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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83년 8월 26일 ([age(1983-08-26)]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교토부 무코시 |
신체 | 180cm, 89kg |
포지션 | 3루수, 1루수[4][5] |
출신학교 | PL학원고등학교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2001년 드래프트 3순위 ( 롯데) |
소속팀 |
치바 롯데 마린즈 (2002~2015)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16~2019) |
지도자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군 육성코치 (2020)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21~2023.05.25)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23.05.26~2023.10.16)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2024) |
응원가 |
이정현-너(2002~2003) 이정현- 와(2004~2010) Brave Sword, Braver Soul[6] (2011~2015)[7] 구단 자작곡 (2016~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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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 현역 시절 포지션은 3루수와 1루수[8].롯데 시절에는 니시오카 츠요시, 후쿠우라 카즈야, 오오무라 사부로, 와타나베 슌스케 등과 함께 롯데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며, 무엇보다도 21세기 롯데가 진출한 두 차례의 일본시리즈에서 모두 MVP를 수상하며 우승의 주역이 된 선수였다.
2. 아마추어 시절
중학교 3학년 때, 중등부 야구 전국대회에서 우승하여 세계대회에 나갔으며, 그러한 활약 등을 바탕으로 고등학교는 그 당시 최고의 야구 명문 학교인 오사카의 PL학원고등학교[9]로 진학하였다.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그 쟁쟁한 선수들이 모였다는 PL학원 고등학교에서 4번타자 자리를 꿰찼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코시엔 본선까지 진출했으나 3회전에서 그해 고시엔 우승팀인 치벤가쿠엔와카야마고교한테 패하며 탈락하였다. 고교 통산 홈런은 30개.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동기인 사쿠라이 코다이를 비롯한 일부 상급생들이 후배를 의자로 폭행해서 야구를 못 할 정도의 부상을 입혀버리는 대형사고를 치는 바람에 학교 야구부가 1년 간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고,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이마에를 비롯한 나머지 애꿎은 부원들까지 경기를 뛰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10] 이 때문인지 일본에서는 이후 이마에가 사쿠라이를 손절했다는 카더라가 정설처럼 돌고 있다.
2001년 NPB 신인드래프트에서 치바 롯데 마린즈의 3위 지명을 받아 고졸신인으로 입단했다. 이해 롯데는 드래프트 2위 지명권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2라운드 지명.[11][12] 계약금 7500만엔과 연봉 720만엔 계약으로 입단했다.
3.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3.1. 2002~2004 시즌
이 시즌 동안 이마에는 주로 2군에서 출장하였고, 1군에서도 백업 정도밖에 하지 못했었다.[13] 2002년에 첫 안타와 첫 선발출장을, 2003년에 2군 올스타전 MVP를, 2004년에 첫 홈런을 기록하였다.3.2. 2005 시즌
2004년까지 갈고 닦은 실력을 통해 데뷔 후 처음으로 개막전에 9번 타자 3루수로 선발출장했고, 이후 주전으로 정착해 주로 하위타순을 맡았다.이 해는 커리어에서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4년 중에서도 가장 임팩트 있는 활약을 펼쳤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22경기 연속 안타를 치면서 잠시나마 수위타자에 오르거나 8월에 4할 타율을 자랑하기도 했으며, 최종적으로 수위타자는 놓쳤지만[14] 개인 첫 규정타석 시즌과 함께 132경기에 출장해 타율 .310(6위) 8홈런 71타점 4도루 OPS .804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홈런 갯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리그 최다의 2루타 35개를 기록하며 하위타순의 복병으로 맹활약하며 팀의 31년 만의 퍼시픽리그 제패에 공헌했다.[15]
그리고 이 맹활약은 일본시리즈에서도 이어지는데, 무려 1~2차전 전타석 안타인 8연타석 안타 포함 타율 .667 1홈런의 불방망이를 휘두르며 한신 타이거스를 그 유명한 33-4로 박살내는 주역으로 활약했고 일본시리즈 MVP도 거머쥐었다.[16] 시즌 종료 후엔 골든글러브 및 베스트나인에도 뽑히는 등 주전 첫 해부터 선수 생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3.3. 2006 시즌
3월에 있었던 초대 WBC 국가대표팀으로 뽑혀 대회에서 5경기 4타점을 기록하며 일본의 우승에 큰 공헌을 하고 돌아왔다. 한국에서는 본선 2라운드 한국전에서 8회초 이병규의 중전안타때 2루를 돌아 3루로 향하던 김민재를 태그하고 심판 판정을 기다리는 그 표정이 짤방급이었던 것으로도 기억되는데, 당시 최훈의 WBC카툰에서 기합의 승리라는 제목으로 조명되기도 했다. 분명 아웃 타이밍이었지만 이마에가 송구를 놓치며 태그에 실패해 김민재는 세이프. 이후 이종범이 후지카와 큐지를 상대로 역전 적시 2루타를 때려내며 한국의 역전 승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이 해에는 주로 2번 타자로 많이 나왔으나, 기복이 심한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지난 해에 비해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대신 시즌 종료 후 퍼시픽리그 동서대항전[17]에 출전해서 3점 홈런을 포함한 3안타를 치면서 대회 마지막 MVP를 차지했고, 2년 연속 3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시즌 성적은 126경기 타율 .267에 9홈런 47타점 OPS .682.
3.4. 2007 시즌
5월에 왼손 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한동한 결장해야 했다. 결국 8~9번의 하위타선으로 주로 출장하면서 작년처럼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부상 이후로 수비력도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102경기 타율 .249에 9홈런 42타점 OPS .680에 그쳤다. 다만 이러한 모습에도 수비력은 나쁘지 않게 평가받았는지 3년 연속으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3.5. 2008 시즌
타격감이 상당히 좋아져서 3할 타율에 복귀했지만 오른쪽 척골 골절로 인해서 또 다시 한동안 결장해야 했다. 거기다가 커리어 최초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부상이 매우 아쉬웠던 상황. 그러나 전성기에 다다른 타격력에 비해서 수비는 보살, 병살 갯수가 줄어드는 등 퇴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시즌 성적은 117경기 타율 .309 12홈런 55타점 OPS .853. 그리고 이 해에도 골든글러브를 타면서 4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에 성공하였다.
3.6. 2009 시즌
113경기 타율 .247에 9홈런 60타점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뒀고, 5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도 실패했다.3.7. 2010 시즌
시즌 초반에는 9번 타순에서 뛰었으나, 오기노 타카시의 부상 이후 주로 2번 타순으로 선발 출장해 개인 최다인 희생 번트 30개를 기록했고, 시즌 막판에는 키요타 이쿠히로에게 2번 타순을 내주고 5번 혹은 6번 타순을 맡았다.이 해의 성적은 타율은 140경기 타율 .331 10홈런 77타점 OPS .825로 개인 타율 커리어하이를 갈아치우며 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큰 공을 세웠고, 3위 진출이라는 파란을 일으킨 2010년 일본시리즈에서도 타율 .444을 기록하며 일명 하극상이라 불리는 롯데의 5년 만의 일본시리즈 제패를 완성. 2번째 일본시리즈 MVP를 획득했다.
3.8. 2011~2012 시즌
2011년에는 공인구 도입으로 인한 갑작스런 투고타저의 여파로 타율 .269에 8홈런 51타점에 그쳤다.[18]2012년에는 2년 만에 다시 도입된 팀 주장을 맡게 되었으나 지난 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136경기 타율 .253 6홈런 47타점을 기록했다.
3.9. 2013 시즌
2013년에는 주장 자리를 오카다 요시후미에게 넘겼고, 4번 타자로 주로 출장하면서 중심타석의 한 축을 맡으며 132경기 출장 타율 .325에 10홈런 74타점과 함께 동시에 3루수 수비율 1위+퍼시픽리그 타율 2위[19]라는 호성적으로 간만에 반등하며 팀의 가을야구 진출의 큰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골든글러브 수상은 실패하였다.여담으로 이해 FA 자격을 얻었으나 자격 행사를 선언하지 않고 구단과 2년 계약을 맺었다.
3.10. 2014 시즌
2014년에는 종아리 근육 염증으로 개막 당시엔 2군에 있었고, 4월 1일의 홈 개막전부터 1군에 복귀했다. 그러나 불과 2주 만에 요통으로 인하여 2군으로 내려가는 등 시즌 내내 부상으로 신음했고 2번부터 9번까지 모든 타순에 기용될 정도로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시즌 성적은 120경기 타율 .270 10홈런 53타점.
3.11. 2015 시즌
2015년에는 알프레도 데스파이네가 쿠바 법에 따라서 쿠바 리그에 참가하느라 4월 중순까지 팀에 합류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막전에서 4번 타자로 출장했다. 그러나 이 시즌에는 몸에 맞는 공으로 인해 골절상을 입고 2개월간 빠지면서 98경기 타율 .287 1홈런 38타점에 그쳤다.시즌 종료 후 2년 계약이 만료됨과 동시에 FA를 선언했다. 롯데는 FA를 선언한 선수를 절대 잡지 않는 방침이라[20] 예상대로 협상을 거부했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협상 끝에 3년 6억엔+옵션 계약을 맺고 이적했다. 등번호는 롯데에서 쓰던 8번을 그대로 달게 되었으며, 롯데는 라쿠텐에게 보상선수 대신 양도금 1억 6천만엔을 받아갔다.
4.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시절
4.1. 2016 시즌
롯데 시절인 2014년에 발병한 왼쪽 종아리 통증이 스프링 캠프 직전의 훈련 기간 동안 재발. 이후 검사에서 왼쪽 종아리 염증으로 진단된 것 때문에 캠프의 시작을 2군에서 맞이했다. 시범 경기 중반부터 1군에 합류하였다.5월 11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홈 경기에서 통산 300호 2루타를 달성했다.
전반기에만 몸에 맞는 공으로 인한 타박상+타격 부진 등으로 2군만 두 번이나 갔다왔다
7월 20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전에서 시즌 1호 홈런을 때렸다.
8월 26일 오릭스 버팔로즈 전에서 통산 1500번째 안타를 때렸다. NPB 사상 122번째라고 한다.
시즌 성적은 89경기 타율 .281 3홈런 23타점으로 돈값을 전혀 하지 못했고, 2007년 이후 처음으로 100안타 미만에 그쳤다.
4.2. 2017 시즌
이 해부터 등록명을 今江年晶로 바꿨다. 또한 이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1루수로 출장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서 3루수 능력이 떨어진 것+3루수 외국인 타자 젤러스 휠러의 존재 때문인듯.개막전부터 6번 1루수로 출장하였고, 전반기에는 주로 6번타자 1루수로 꾸준히 주전 출장하였다.
그러나 7월 27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전에서 8번 타자 1루수로 선발 출장한. 상황에서 3루수 젤러스 휠러의 악송구를 잡으려다가 타자와 충돌하면서 손목이 골절되고 말았다. 결국 전치 10주 판정을 받았다. 사실상 시즌아웃.
시즌 성적은 51경기 타율 .250 1홈런 10타점으로 먹튀라고밖에 할 수 없는 성적을 냈다. 2시즌 합쳐서 140경기 4홈런 33타점을 냈으니...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1차전에서 대타로 나왔으나 안타를 치지는 못했다. 2차전은 결장.
그 후로도 대타로 나오거나 안 나오거나를 반복했다. 팀은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4대2로 패하여 탈락.
4.3. 2018 시즌
3월 31일 경기에 대타로 나와 1루땅볼로 아웃당했다.4월 1일 경기에 5번 타자 1루수로 선발출장했다. 결과는 3타수 무안타 2삼진으로 망.
4월 4일 경기에 대타로 나와 1타수 1안타를 치며 시즌 첫 안타를 신고했다.
4월 7일 5번 타자 1루수로 선발출장해서 4타수 1안타 1홈런 3타점을 기록했다. 이날 친 쓰리런 홈런이 시즌 1호 홈런.
4월 11일 5번 타자 1루수로 선발출장했다. 결과는 5타수 2안타.
5월 23일 기준 3할 3리 3홈런 12타점으로 재기할 조짐이 보인다.
6월 23일 4번 타자 3루수로 선발출장하여 4타수 1안타 1홈런 1타점을 기록하였다.
이날 기준 타율 .304(퍼시픽리그 6위) 5홈런 26타점을 찍으면서 공격 쪽에서는 전성기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슬슬 재기의 날갯짓을 펴고 있다.
올스타전 멤버로 뽑혔다.
7월 24일 4번 타자 3루수로 선발출장해 4타수 2안타 1홈런 1타점으로 활약한 후 교체되어 내려갔다.
시즌 최종 성적은 127경기에서 타율 .276에 10홈런 49타점. 돈값은 아니어도 타격 쪽에서는 그럭저럭 전성기의 모습을 찾았다. 2017 시즌이 하락세였으면 명구회도 빨간불이었을텐데 2018 시즌에 다시 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명구회 가입도 다시 박차를 가할 듯. 이마에는 339안타만 더 치면 명구회에 가입한다. 현재 1983년생이니 관리만 잘 하면 4~5년 정도는 충분히 주전으로 뛸 수 있으니 명구회 가입 가능성이 꽤 높은 편. 아쉬운 것은 3루수를 종종 보긴 하지만 3루는 주로 백업으로 들어가며 본 포지션이 1루가 되었다는 것. 1루수치고는 확실히 아쉬운 성적이다.
여담이지만, 이 시즌엔 헐리우드 액션으로 몸에 맞는 공을 얻어낸 적이 있는데, 하필 상대팀이 친정팀인 치바롯데라서 친정팀 팬들에게 까이기도 했다.
4.4. 2019 시즌
개막때는 눈쪽에 문제가 생겨서(중심장액성망막증) 1군에 들지 못했고 5월부터 합류하였다. 5월은 명불허전의 좋은 성적을 보였으나 6월부터 다시 눈 부상이 악화되면서 6월말에 말소된 채로 시즌 종료시까지 올라오지 못했다.그리고 팀이 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 패배하여 시즌이 종료된 다음날인 10월 8일에 전력외 통보를 받고 방출되었다. 사실 타격코치 제안을 했는데 본인이 현역 연장을 선언해서 풀어준 것. 일본 넷에서는 롯데가 주워가서 후쿠우라처럼 연간 50안타씩 6년 동안 묻지마 기용 시켜서 명구회 보내자 등의 드립이 나오는 중(...)[21]
결국 현역 연장을 포기하고 은퇴. 그리고 은퇴 권고와 함께 팀에서 보낸 코치 오퍼를 받아들여서 내년부터는 라쿠텐의 코치로 부임할 예정이다. 다만 당초에는 타격 코치로 부임할 예정이었으나 이후 라쿠텐에서 새로 육성군(3군)을 발족할 계획이라 이마에에게 육성군 코치를 맡길 것이라고 한다.
5.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 첫 시즌인 2020년에는 2군의 육성코치, 2021년부터 2군 타격코치를 역임하였다. 2023년 초반에 라쿠텐 타선이 전반적으로 2할을 밑도는 심각한 타격부진을 겪자, 1군 타격코치 타카이 유헤이가 2군으로 좌천되고 이마에가 1군 타격코치로 승격되었다. 이마에 타격코치 체제 하에서 아사무라 히데토는 물론, 오카지마 타케로, 코부카타 히로토, 오고 유야, 무라바야시 이츠키, 아베 토시키, 시마우치 히로아키 등 주전 타자들의 타격이 살아나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22]정규시즌 최종전에서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A클래스가 걸린 단두대 매치에서 패배하며 라쿠텐의 CS 탈락이 확정되자 이시이 카즈히사가 감독에서 퇴임, 이마에가 후임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라쿠텐 구단은 2023년 10월 17일 오전에 감독 취임을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2023년 시즌 종료 후 팀의 마무리였던 마츠이 유키가 MLB로 떠나면서 생긴 마무리 투수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선발진의 기둥이였던 노리모토 타카히로를 마무리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취임 첫 해인 2024년엔 초반부터 4~5위를 전전하다 교류전에서 구단 사상 첫 우승을 거두며 반등의 조짐을 보이는 듯 했지만 직후 상승세가 꺾인 모습을 보이면서 4위를 도통 벗어나지 못했고, 8월 이후 닛폰햄과의 2위 경쟁에서 탈락하고 휘청이는 모습을 보인 롯데를 제치고 3위를 빼앗을 마지막 찬스가 생겼으나 도리어 8연패로 똑같이 추락한 끝에 10월 1일 롯데와의 직접대결에서 5:1로 패하며 3년 연속 B클래스가 결정. 최종적으로 67승 72패 4무 승률 .482로 4위를 기록하며 감독 첫 시즌을 아쉽게 마무리지었다. 교류전에서 첫 우승을 거두며 나름 잘 나간 반면 리그전에선 세이부를 제외한 나머지 4팀 상대로 모두 루징을 기록한 데다, 팀 평균자책점이 12구단 최하위인 3.73을 기록하는 등 투수진이 붕괴되었고[23] 리그 최다안타를 기록한 타츠미 료스케 정도를 제외하면 작년 이상의 활약을 못 보여준 타선의 부진이 투수진 붕괴를 보완하지 못하면서 결국 B클래스로 이어졌다.
그런데 시즌 종료 직전부터 경질설이 나돌더니 최종전 직후인 10월 10일에 구단이 내년 시즌 속투 요청을 하지 않기로 하면서 사실상 경질되었다. # 라쿠텐에서 1년 만에 감독이 경질되는 사례가 벌써 5명째인데, 팬들에게선 이마에의 경질을 두고 "인터뷰 때 팀 사기를 꺾는 발언을 연발하고 중요한 승부처에서 이해할 수 없는 작전을 펼쳐 팀의 상승세를 막았으니 경질이 마땅하다"는 찬성 의견과 "구단이 제대로 보강을 안해놓고서 1년차 감독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게 아니냐, 1년마다 감독을 계속 갈아치우면서 어떻게 팀의 상승을 바라냐" 등의 반대 의견이 팽팽하게 나눠지는 중.[24][25]
후임 감독으로 현 2군 감독이자 2020년에 1군 감독을 역임한 미키 하지메가 취임하게 되었다. #
6. 플레이 스타일
라인드라이브형 타구를 많이 치기 때문에 홈런 갯수는 10개 안팎으로 많지 않다.[26] 하지만 2루타를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갭 파워를 지닌 중장거리 교타자이자 배드볼 히터이다. 볼삼비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지만 배드볼 히터 특성상 볼넷의 개수는 적다.수비력은 NPB 3루수 중 최상 수준. 4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받았을 정도로 수비력 하나는 좋다. 4년 연속 골글 타던 시절에는 평균 수비율이 9할 8푼이었다. 그러나 연이은 부상 등으로 인해셔 최근은 많이 수비력이 저하되었고[27], 17시즌부터는 1루수 출장을 자주 하는 편.
주력은 그다지 좋지는 못하고 도루도 많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 타석 매 타석 전력질주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느리지는 않다.
7. 연도별 성적
NPB 통산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2002 | 롯데 | 15 | 25 | 5 | 3 | 0 | 0 | 2 | 0 | 0 | 0 | 7 | .200 | .200 | .320 | .520 |
2003 | 5 | 6 | 2 | 1 | 0 | 0 | 1 | 0 | 0 | 0 | 2 | .333 | .333 | .500 | .833 | |
2004 | 41 | 149 | 35 | 8 | 2 | 1 | 18 | 12 | 0 | 5 | 21 | .257 | .295 | .368 | .663 | |
2005 | 132 | 509 | 143 | 35 | 3 | 8 | 71 | 58 | 4 | 22 | 62 | .310 | .353 | .451 | .804 | |
2006 | 126 | 489 | 122 | 25 | 2 | 9 | 47 | 49 | 3 | 17 | 74 | .267 | .293 | .389 | .682 | |
2007 | 102 | 338 | 76 | 14 | 2 | 9 | 42 | 32 | 0 | 13 | 55 | .249 | .283 | .397 | .680 | |
2008 | 117 | 450 | 125 | 37 | 4 | 12 | 55 | 57 | 3 | 19 | 48 | .309 | .344 | .509 | .853 | |
2009 | 113 | 441 | 101 | 19 | 2 | 9 | 60 | 35 | 2 | 12 | 60 | .247 | .277 | .369 | .646 | |
2010 | 140 | 596 | 176 | 37 | 1 | 10 | 77 | 74 | 8 | 22 | 66 | .331 | .364 | .461 | .825 | |
2011 | 134 | 543 | 134 | 30 | 1 | 8 | 51 | 53 | 2 | 20 | 48 | .269 | .304 | .381 | .685 | |
2012 | 136 | 501 | 113 | 21 | 3 | 6 | 47 | 45 | 0 | 19 | 37 | .253 | .287 | .354 | .641 | |
2013 | 132 | 551 | 165 | 26 | 0 | 10 | 74 | 44 | 5 | 26 | 45 | .325 | .355 | .435 | .790 | |
2014 | 120 | 478 | 120 | 23 | 3 | 10 | 54 | 48 | 1 | 23 | 43 | .270 | .312 | .402 | .714 | |
2015 | 98 | 400 | 107 | 18 | 4 | 1 | 38 | 40 | 2 | 16 | 35 | .287 | .330 | .365 | .695 | |
2016 | 라쿠텐 | 89 | 351 | 89 | 7 | 0 | 3 | 23 | 33 | 2 | 25 | 30 | .281 | .340 | .331 | .671 |
2017 | 51 | 135 | 32 | 7 | 1 | 1 | 10 | 11 | 0 | 6 | 26 | .250 | .284 | .344 | .627 | |
2018 | 127 | 465 | 116 | 17 | 2 | 10 | 49 | 44 | 0 | 32 | 76 | .276 | .334 | .397 | .731 | |
2019 | 26 | 79 | 21 | 2 | 0 | 1 | 7 | 7 | 0 | 3 | 16 | .276 | .304 | .342 | .646 | |
NPB 통산 (18시즌) |
1704 | 6506 | 1682 | 330 | 30 | 108 | 726 | 642 | 32 | 280 | 751 | .283 | .321 | .403 | .723 |
8. 기타
- 별명은 고리(ゴリ)인데, 하필 신인 때부터 프로필에 나오는 얼굴 그대로였던 탓에 저런 별명이 붙었다. 상술했듯 저 별명 때문에 선발에서 빠지는 해프닝도 겪었을 정도.
- 아직 주전으로 자리잡기 전이었던 2004년에 10살 연상의 부인과 결혼하였다.
- 프로 데뷔 전엔 부모님의 영향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이었으며, 또한 스즈키 이치로의 팬이라고 한다.
- 패션에 관심이 많고 피아노를 잘 친다고 한다.
- 롯데 시절 장애인 야구단의 경기를 본 뒤로 장애인 야구단 관계자를 본인의 경기에 초대하고, 시즌 이후에 같이 연습을 하는 등 아직까지도 교류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고아원 아이들을 자신의 경기에 초대하기도 하고, 소아암 환자를 돕는 법인 회장으로도 취임하여 1타점당 1만엔씩 기부를 하고 있으며, 백혈병을 앓는 소년과 가족을 경기에 초대하는 등 선행을 굉장히 많이 하고 있다.
- 그러나 이렇게 선행을 많이 하는 등 일본에서는 이미지가 굉장히 좋지만, 한국에서는 별로 좋지 못한 이미지이다. 2017년 이마에의 부상이 기사로 나왔을 때의 베댓들은 이 사람은 누구인데 우리나라에서 기사까지 써주냐는 반응이었으며[28] 이마에를 기억하는 사람들[29]은 이마에를 욕하기 바빴다. 그 이유는 바로 이승엽이 요미우리에서 뛰던 시절에 홈런 하나를 취소시킨 장본인이 이마에였기 때문. 당시 이승엽이 홈런을 쳤을 때 선행주자의 누의 공과로 홈런이 취소되었는데, 이때 누의 공과를 어필한 사람이 바로 이마에였다.
- 치바롯데 타격 인스트럭터였던 김성근의 부탁으로 최정에게 자신의 글러브를 선물로 준 적이 있다고 한다.
- 주니치 드래곤즈 상대로만 홈런을 치면 전구단 홈런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으나 아쉽게도 2019년을 끝으로 은퇴하며 기록 달성에 실패했다. 참고로 전구단 홈런 기록 보유자는 통산 32명으로 매우 희귀하다.[30]
-
이정현의 팬이라 한 때 응원가가 이정현의 곡(너,
와)이었다.[31]
- '이마에 씨에게 가려진' 이라는 유행어가 있다. 본인 때문에 일어난 유행어는 아니고 롯데 시절, 라쿠텐의 시마우치 히로아키가[32] 3루 주자로 나가 있다가 희생플라이가 가능한 넉넉한 플라이아웃 때 혼자 앞으로 고꾸라져서 태그업에 실패한 후 왜 태그업을 못 했냐고 인터뷰가 들어오자 '(3루수로 출전한) 이마에 씨에게 가려진 타구를 보려고 하다가 넘어졌다.' 라고 변명한 일화가 있었다. 근데 해당 플라이는 우익수 플라이였고, 이마에는 시마우치의 뒤에 있었다. 우익수 방향도 아니고 좌익수 방향으로 뒤쪽. 즉 시마우치의 시야에 이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것. 이게 네타화가 돼서 생긴 유행어이다.
- 또 다른 별명으로 2만엔이라는 별명이 있다. 이마에라는 발음이 2만엔(にまんえん)과 비슷해서 생긴 별명.
[1]
치바 롯데 마린즈는 2011년에는 주장 제도를 폐지했었다.
[2]
사실 2010년의 경우는 말이 우승반지지 일본시리즈 우승을 엔트리에서 겪었다는 기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치바 롯데 마린즈는 2010년에 공식적인 우승반지를 만들지는 않았기 때문. 다만 2005년에는 만들었다.
[3]
2017년부터 2019년까진 한자 표기로
[4]
2015년부터 1년에 한두 경기씩 나오더니, 2017년부터 주로 1루수로 나오고 있다.
[5]
이외에도 커리어 초창기에 유격수와 2루수로 모두 4경기씩 출전하기도 했다.
[6]
소울칼리버 2 OST.
[7]
가사는 사라나루 미라이 메자시테 츠키스스메 쵸오텐 레라에 이마에 토시아키 X2.
[8]
신인 시절엔
2루수와
유격수도 간혹 했으며, 2015년 시즌부터 가끔씩
1루수를 보다가 라쿠텐 이적 후인 2017년에 완전히 1루수로 전향했다.
[9]
PL학원은 일본의 신흥종교인 퍼펙트 리버티, 약칭 PL(Perfect Liberty=PL) 교단에서 설립한 학교로 가장 유명한 PL학원 고등학교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아라이 히로마사,
쿠와타 마스미,
키요하라 카즈히로,
마츠이 카즈오,
후쿠도메 코스케,
마에다 켄타 등 내로라 하는 유명한 프로야구 선수들을 배출했으며
코시엔 본선 진출 경쟁이 제일 치열한
오사카부에서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전국제패까지 성공한 강자였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PL 교단의 재정 악화와 폭력사태 등으로 수차례 물의를 빚으면서 여러 차례 제재를 받는 등의 난항을 겪다가 결국 2016년에 야구부를 해체하였다. 요즘은
나카무라 타케야 등을 배출한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가
오사카 부의 최고 명문 야구부로 대접받고 있으며,
T-오카다와
야마다 테츠토를 배출한
리세이샤 고등학교도 뒤를 잇고 있다.
[10]
뻔뻔스럽게도 사쿠라이는 야구를 그만두지 않았고,
한신 타이거스에 지명받아 슬러거 유망주로 인정받기까지 하였다. 다만 2시즌 정도 준주전급으로 활약한 것을 제외하면 기대 이하의 모습만 보여주다 부상으로 방출당했고, 이후 독립리그에서 몇년 더 뛰다 은퇴했다.
[11]
이 해에 이마에를 제치고 1위 지명으로 뽑힌 선수는
게이오기주쿠대학의
외야수 키타 타카시. 그러나 첫 2년 동안 53경기 출장을 끝으로 2군에만 머무르다가 2006년 방출당한 후 야구 용품점 사업과 고교야구 코치를 거쳐 현재는 고등학교에서 체육교사를 맡고 있다.
[12]
이해 롯데가 드래프트 2위 지명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있었던 자유범위 획득이라는 입단제도 때문인데 대학, 사회인 야구선수에 한해서 2명까지 자유롭게 영입이 가능했지만 대신 자유범위 획득 제도를 행사한 횟수만큼 드래프트에서 특정 순위 때의(미사용 시엔 2위 지명 불가/1회 사용 시엔 1, 3위 지명 불가/2회 사용 시엔 1~3위 전부 지명 불가) 지명권 행사가 불가능했다. 앞에 나왔듯 이 해 롯데가 자유범위 획득 제도를 1번도 사용하지 않았기에 2위 지명은 불가능했던 것.
[13]
저 시기에 백업인생이었다지만 드래프트 1년 선배인 3루수
아오노 타케시는 이마에에 밀려서 그나마 백업자리 조차 얻지 못하고 이마에가 주전으로 올라선 뒤에야 드문드문 1군에 보이다 부상으로 인해 통산 200경기도 뛰지 못하고 2013년에 은퇴했다.
[14]
이 해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수상자는
와다 카즈히로(.322)였다.
[15]
여담으로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내야수를 다 쓴 탓에 어쩔 수 없이 3루수를 이 해를 끝으로 은퇴 예정이었던 선배
하츠시바 키요시에게 내주고 자신은 2루수를 보았다고 한다.
[16]
이때
이승엽이 4경기 3홈런을 기록하며 거포로써의 활약을 유감없이 보여줬으나 이마에의 활약에 밀려 시리즈 MVP 수상에 실패하고 대신 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17]
일본프로야구
올스타전과는 별개로 1988년부터 2006년까지 시즌 종료 후인 매년 11월마다
퍼시픽리그에서 소속 6구단을 동부, 서부 팀으로 나눠서 개최했던 올스타전.
[18]
이 해 롯데는 타선 부진으로 리그 홈런왕
나카무라 타케야(48개)의 홈런 갯수에도 못 미치는 팀 홈런 46개에 그치는 굴욕을 겪었다.
[19]
당해 퍼시픽리그 수위타자는
하세가와 유야(.341)가 수상했다.
[20]
FA 제도(일본프로야구) 항목에도 나오지만,
일본프로야구는 보통 소속팀에 잔류할 땐 어지간해선 FA를 선언하지 않고 구단과 따로 다년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가 많아서 FA 선언 자체가 "나 다른 구단 가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FA를 선언한 후 구단과 재계약을 맺어 잔류하는 사례도 간혹 있으나 대부분의 FA 선수들은 그대로 다른 팀으로 이적하는 경우가 많다.
[21]
진지하게 말하자면 일본 롯데 프런트도 꼴런트의 원조답게 굉장히 FA로 나간 선수에게 매우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구단이라 데려올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구치가 가뜩이나
토리타니 타카시를 데려오고 싶어하는 상황이라 토리타니보다 수비가 안되는 이마에는 더욱.
[22]
라쿠텐 프런트는 1-2군 코치 보직 변경으로 효과를 보자 투수 코치까지 그대로 1-2군 보직 변경을 단행했다.
[23]
선발진에선 11승을 거둔
하야카와 타카히사, 후지이 마사루와 3년 만에 규정이닝을 채운
키시 타카유키가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분전했으나 나머지 선발진이 무너지며 셋의 활약이 빛바랬고, 구원진에선 핵심 계투진인 사카이 토모히토, 스즈키 쇼타, 후지히라 쇼마가 나름 팀을 지탱했으나
마무리 투수였던
노리모토 타카히로가 세이브왕 수상과는 별개로 5월 이후 불안한 모습을 보이다 8월 이후 6점대 이상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무너지는 등 불펜 붕괴가 확연히 보였다.
[24]
스포츠조선 민창기 기자는
기사에서 전임 라쿠텐 감독들이던
오쿠보 히로모토나
타오 야스시의 이야기까지 인용해 가며 비판 의견을 내비쳤다.
[25]
이마에와 같은 연예 소속사로 토호쿠 출신이자 거물 오와라이인
샌드위치맨의 다테 미키오도 구단의 행태에 쓴소리를 남겼다. 참고로 다테는 이마에뿐만 이시이 카즈히사와도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있다.
#
[26]
그래도 투수친화 구장인 마린스타디움 보정도 감안해야되고, 어쨌든 꾸준히 활약해오면서 2018년 통산 100홈런을 돌파했다. 슬러거 유형 선수 중에서도 한두 시즌만 반짝하는 바람에 100홈런을 못 치고 은퇴하는 선수도 있는 것을 감안하면 장타가 아예 없는 똑딱이는 아니다.
[27]
FA 바로 전 해인 2015년에는 9할 6푼까지 추락했다. 9할 6푼이면 수비가 좀 불안한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는 수준.
[28]
사실 일본도 다르지 않다. 야후재팬에 2017년 9월에 올라왔던 김국영,
박병호,
박석민 기사를 보면 베댓 중 하나는 꼭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데 기사가 올라옴?이다.
[29]
이승엽,
김태균,
이대은과 같은 팀에서 뛴 적이 있기 때문에 나름 한국인들에게도 인지도가 있다.
[30]
일본프로야구는 양대리그에다 2015년 이후 기준으로
교류전에서 만날 기회도 딱 3번뿐이기 때문에 전구단 상대 홈런 기록 달성이 매우 어렵다. 이것도 2005년 교류전 도입 전까진 이 기록을 달성한 사람이 단 3명뿐이었을 정도. 참고로 그 32명 중
아롬 발디리스도 있다.
[31]
이마에가 이 응원가를 쓰기 이전에는 킨테츠 출신
이시이 히로오가 사용하고 있었다.
[32]
메이지대학 출신 외야수로 빠른 발과 장타력, 준수한 컨택을 모두 가진 선수. 프로에서도 좋은활약을 펼쳐 2021년 현재는 라쿠텐의 중심타선을 맡고 있다. 다만 주루센스가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