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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제25대 대통령 이그나시오 코몬포르트 Ignacio Comonfo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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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847> 본명 |
<colcolor=#000000,#e5e5e5>이그나시오 그레고리오 코몬포르트 데로스리오스 Ignacio Gregorio Comonfort de los Ríos |
출생 | 1812년 3월 12일 |
멕시코 푸에블라 아마조크 데모타 | |
사망 | 1863년 11월 13일 (향년 51세) |
멕시코 과나후아토 차마쿠에로스[1] | |
재임 기간 | |
1855년 12월 11일 ~ 1858년 1월 21일 | |
직업 | 군인, 정치인 |
국적 | 멕시코 |
정당 | 자유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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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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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그나시오 코몬포르트는 멕시코의 정치인, 장군 출신의 제25대 대통령이다.2. 생애
2.1. 정치 입문 전
1812년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태어나 군인 부모 아래에서 자랐다. 14살 때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인 푸에블라 카롤리노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20살에는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대통령을 전복한 자유주의 반란에 참여해 푸에블라등 여러 지역에서 전투를 치뤘다. 부스테만테 대통령이 전복된 이후에는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아수카르 데마타모로스 지역의 군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2. 정치 활동
이후 군사 사령관으로 계속 일하다 1842년, 1846년에는 멕시코 의회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했지만 1842년 의회는 산타 안나 대통령, 1846년 의회는 마리아노 파레데스 대통령에 의해 해산되었다. 의회가 해산된 그 해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파레데스 정부에 대한 반란에 가담했다. 파레데스 대통령이 축출되고 미멕전쟁에 참전해 총사령관 보좌관이라는 높은 직책을 맡았다. 이듬해 1848년 코몬포르트는 멕시코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후에는 한 항구의 세관 공무원이 되었지만 코몬포르트가 맡았던 직위들은 1854년 산타 안나에 의해 해임되었다.코몬포르트의 자유방임주의적 신념과 남부에서의 그의 입지는 멕시코의 장기집권 독재자였던 산타 안나를 몰아내기 위한 아유틀라 계획에서 핵심적인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었고 계획에 성공해 산타 안나가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후안 알바레스 정부에서 전쟁 장관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알바레스 집권 전후에 멕시코에서는 멕시코 역사 전반에 걸친 군부독재가 일으킨 무질서에 대해 큰 불만이 있었고 군을 해체하고 기초부터 재건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알바레스 정부의 내각 인사들과 훗날 대통령이 될 베니토 후아레스 오악사카 주지사, 멜초르 오캄포 주지사등 많은 정치인들이 이 의견에 찬성했지만 코몬포르트는 반대했다, 그는 오히려 군대의 계급을 재정비해, 개혁된 새로운 군대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알바레스 내각과 일부 정치인들끼리만 논의되었던 이야기였고 코몬포르트의 친군부적인 생각에도 국민들에게 코몬포르트는 여전히 온건한 이미지로 비춰졌다.
알바레스는 자신이 퇴임한 후 코몬포르트에게 대통령직을 넘기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코몬포르트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던 일부 내각 관료들은 알바레스가 계속해서 대통령 자리에 머물것을 요구했고, 12월 4일, 알바레스는 누구에세 대통령직을 승계시킬것 인지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자유당 당원들을 소집했다. 고민 끝에 알바레스는 다음 날 전체 내각의 사임을 수락하고 코몬포르트에게 대통령직을 이양했다.
2.2.1. 대통령 재임기
코몬포르트는 대통령에 취임한 지 이틀 만에 내각을 꾸렸다. 코몬포르트가 임명한 장관들은 산타 안나가 갤즈던 매입에서 저지른 것처럼 국가 영토를 분할하지 않고, 내전을 피하고, 무력은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즉시 헌법 의회를 소집하고, 그 사이에 임시 헌법으로 유기적인 법령을 발표하는 것을 계획의 개요로 잡았다.또한 코몬포르트 정부는 산타 안나의 독재 정권의 나머지 부분을 해체하기로 했다. 1856년 1월 9일 산타 안나와 그가 임명한 장관, 주지사 및 기타 부하들이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해 국가와 개인에게 책임지도록 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또 정부는 개인의 권리, 언론, 경찰, 국가 경비대 및 교회 문제에 대한 온건한 접근 방식에 대한 입법을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경제적인 조치로는 항구를 상업에 개방하고, 상업, 제조 및 광산, 교육을 위한 시설을 개방하는 것이 포함되었고, 외국인은 특정 조건 하에만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코몬포르트가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1856년 12월 10일 반란이 일어났다. 미초아칸주, 틀락스칼라주에서 적대적인 움직임이 있었고 보수파 집단이 반란을 지휘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코몬포르트 대통령은 사카테카스 주지사와 과나후아토 주지사가 조직한 아나스타시오 파로디 장군 휘하의 4천명의 군단을 파견했고, 반군은 곧바로 자원 부족에 빠졌다. 결국 반군은 반란 2달 후인 2월 6일 후퇴했다.
12월 12일에도 푸에블라에서 반란이 있었지만 곧바로 진압되었다. 이 반란 또한 보수파가 일으킨 것으로, 모든 반란이 진압된 이후 정부는 피해를 입은 주에 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법령을 발표했다.
1857년 3월 17일, 모든 공무원은 헌법에 대해 공개적으로 선서하고 서명해야 한다는 법령을 제정했다. 가톨릭 교회는 선서를 한 사람을 파문했고, 그 후 멕시코 정부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선서를 거부해 직장을 잃었다. 이로 인해 성직자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코몬포론트 대통령은 이를 저지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당시 다른 반란들도 일어나고 있었기에 쉽게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다. 너무 잦은 반란으로 인해 의회는 대통령을 지지하게 되었고, 이전에 코몬포르트와 충돌했던 진보 강경 의원들까지 합류한 신임 투표를 승인했다. 반란을 저지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 군대들이 파견되었고 반군을 파괴하기보다는 포로로 잡는것을 작전 계획으로 잡았다. 포위된 보수파는 마침내 11월 29일 항복했지만 일부 포로들은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계속되는 반란, 각료 위기, 의회 해산등으로 코몬포르트 정부는 계속해서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보수파들은 의회를 억압하고 코몬포르트의 비상 권한을 회복하기 위한 계획에 대한 주지사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2.3. 최후
코몬포르트는 이제 자신을 집권하도록 도운 정부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행정 권한을 대법원장에게 넘기겠다고 말했다. 그의 통치 위원회는 그에세 완전한 철회를 권고했고, 전쟁 장관이었던 가르시아 콘데는 반란과 국가의 정치적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주지사 회의를 제안했지만 거부되었다.1월 11일, 코몬포르트는 정부에서 물러나 헌법상 후임자인 대법원장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대통령직을 넘기려고 했다. 후아레스는 과나후아토로 떠나 1월 19일 그곳에서 정부를 수립했다.
대통령 퇴임 후 1861년 코몬포르트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정치 세력들을 피해 텍사스에 거주하고 있었고, 누에보레온, 코아우일라 주지사를 역임한 산티아고 비다우리의 중개를 통해 멕시코로 돌아가 몬테레이주에 거주하도록 허락했다. 정부는 처음에 코몬포르트를 체포하도록 명령했지만 프랑스의 개입이 시작되면서 그의 멕시코 정착이 허용되었다.
코몬포르트는 정착 후 프랑스에 맞서 군대를 이끌며 전쟁을 했고 1863년 5월 8일 산 로렌초 전투에서 패배해 멕시코 시티로 후퇴했다. 코몬포르트는 1863년 5월 31일 수도에서 후퇴했을 때 정부를 따랐고 심지어 전쟁 장관으로 임명되기까지 했다.
11월 13일, 산루이스포토시에서 과나후아토로 향하던 도중, 곤잘레스 아기레 멕시코 추장이 지휘하는 부대의 기습공격으로 사망했다. 코몬포르트의 시신은 과나후아토 주의 산미겔 데아옌데로 옮겨졌고, 1867년 공화국이 재건된 후 유해는 산페르난도 묘지로 옮겨졌다.
[1]
現 무니시피오 데코몽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