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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합중국 제45대 대통령 펠리페 아돌포 데라우에르타 마르코르[1] Felipe Adolfo de la Huerta Marc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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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847> 출생 | <colcolor=#000000,#e5e5e5><colbgcolor=#fff,#191919> 1881년 5월 26일 |
멕시코 소노라 주 과이마스 | |
사망 | 1955년 7월 9일 (향년 74세) |
멕시코 멕시코시티 | |
재임 기간 | 제45대 대통령 |
1920년 6월 1일 ~ 1920년 11월 30일 | |
직업 | 정치인 |
국적 | 멕시코 |
정당 | 자유입헌당 |
경력 |
주
뉴욕시 멕시코 총영사(1918) 소노라 주지사(1919 - 1923) 제45대 멕시코 대통령 (1920) 재무장관(1920 - 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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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멕시코의 45대 대통령. 사실상 임시 대통령이다.2. 생애
원래 음악을 공부했지만 생계를 위해 회계사가 되었다. 그러나 1908년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재출마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가 직업을 잃었다.1911년 소노라 주의원 자리를 놓고 뒷날 가장 큰 경쟁자가 되는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와 맞붙어 승리했다. 머지않아 1913년 빅토리아노 우에르타가 쿠데타를 일으켜 프란시스코 마데로 정부를 전복시키자, 카예스와 함께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를 수장으로 한 입헌군에 가담했다.
이후 카란사 정부 하에서 뉴욕시 주재 멕시코 총영사, 상원의원, 소노라 주지사를 지냈다.
1920년 소노라 주지사를 역임하던 중 카란사 정부와 소노라 강 수역 통제를 놓고 갈등을 벌인다. 또한 카란사는 알바로 오브레곤과 갈등이 생기자 오브레곤을 배제하고 외교관 출신인 이그나시오 보니야스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3. 아구아 프리에타 혁명
오브레곤과 멀어진 카란사는 오브레곤을 체포하도록 한다. 하지만 오브레곤은 소노라에서 데 라 우에르타, 카예스와 손잡고 카란사 정부에 반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이 아구아 프리에타 혁명이다.이 반란에 멕시코군의 4분에 3이 가담하면서 카란사 정부는 붕괴 직전에 놓였고, 카란사는 항복도 협상도 하지 않고 항구도시 베라크루스로 도주했다. 하지만 동행하던 부하의 배신으로 혁명군에게 피살당했다.
이때 데 라 우에르타는 의회에서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소노라 주지사직을 겸임한 상태에서 약 6개월간 재임했다.
4. 대통령 재임기
짧은 임기 동안 오브레곤파에게 있어서 눈엣가시였던 판초 비야에게 대농장을 주고 은퇴시켰다. 그리고 1920년 대선에서 오브레곤이 승리하자 정권을 이양하고 퇴임했다.5. 갈등과 반란
이후 데 라 우에르타는 카예스와 함께 오브레곤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결국 오브레곤이 카예스의 손을 들어주자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오브레곤 정부의 교회 재산 몰수 정책에 반감을 가지던 가톨릭 교회와 일부 육군 장교들에게 지지를 얻었지만, 미국 정부와 대다수 국민들에게 지지받지 못했고 결국 진압당했다.데 라 우에르타를 따르던 소령보다 높은 계급은 전부 처형당했고, 데 라 우에르타는 로스엔젤레스로 망명하여 할리우드에서 성악 교실을 열어 생계를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