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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합중국 제53대 대통령 미겔 알레만 발데스 Miguel Alemán Valdé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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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847> 출생 | <colcolor=#000000,#e5e5e5><colbgcolor=#fff,#191919> 1900년 9월 29일 |
멕시코 베라크루스 주 사율라 데 알레만 | |
사망 | 1983년 5월 14일 (향년 82세) |
멕시코 멕시코시티 | |
학력 |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
재임 기간 | 제53대 대통령 |
1946년 12월 1일 ~ 1952년 11월 30일 | |
직업 | 변호사, 정치인 |
국적 | 멕시코 |
정당 | |
경력 |
베라크루스 주지사 내무부 장관 제53대 멕시코 대통령 (1946 - 1952) |
서명 | 파일:미겔 알레만 발데스 서명.sv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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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멕시코의 제53대 대통령.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지 않았던 첫 대통령이다.유년기에 자주 이사를 다녔다. 그러다 영국 소유의 멕시코 석유 회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영어를 배웠다. 군인은 하지 말고 안정된 직장을 찾으라는 아버지의 생전 조언에 따라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법대에 진학하여 직업병 및 근로자의 재해에 관한 논문으로 1928년 법학 학위를 받았다. 규폐증으로 고통받는 광부들을 변호하는 것으로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멕시코 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철도 노동자와 일하다가 다친 노동자들이 보상을 받도록 하는 판결을 이끌었다. 이 승소들을 통해 멕시코의 노동 조합에서 상당한 호감을 얻었다. 이는 훗날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 연합의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된다.
3. 정치 활동
농림축산부 장관의 법률 고문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여러 직책을 거치다가 1934년 고향 베라크루스 주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돼 2년간 재직했다. 1936년 베라크루스 주지사 당선자가 암살되자 1936년부터 39년까지 주지사를 역임했다. 1940년에는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의 선거운동을 돕고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이후 1946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혁명 이후 첫 비(非)군인 출신 대통령이었다. 발데스 정부는 수입대체산업화를 추진했다. 수입대체산업화란 수입하던 상품을 국내에서 직접 생산하여 해외의존도를 줄이는 산업구조를 말한다. 이는 이후 1970년대까지 멕시코의 경제 정책을 담당했다. 이 정책으로 멕시코는 급속한 경제 성장과 산업화를 이루게 되었다. 또한 군사적 지출을 줄이고 인프라 구축과 공공 개발에 많은 투자를 했다. 특히 1947년 오아하카 주에서 미겔 알레만 댐 공사를 시작했다. 이 댐은 1955년에 완성된다. 또한 철도와 고속도로 등 교통망을 확충했다. 그리고 기존의 푸에르토 아에로 센트럴(Puerto Aéreo Central)을 확장하여 멕시코시티 국제공항의 제1터미널을 세웠다.
1952년에는 바하 칼리포르니아를 멕시코의 주로 승격시켰다. 당시에는 칼리포르니아 반도 전체를 아울렀지만 1971년 반도 남부 지역이 바하 칼리포르니아 수르 주로 떨어져 나갔다. 그 외에도 아카풀코를 국제 관광지로 개발하기도 했다. 이렇게 경제 성장의 스타트를 끊었지만, 정부에는 부패가 만연해 있었고, 발전의 혜택은 소수에게만 돌아갔다. 1952년 퇴임한 후에도 한동안 영향력을 유지했다. 1961년 국가 관광 위원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의 개최권을 따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4. 여담
- 발데스의 재임 기간 동안 한반도에서는 남북이 분단되었고, 6.25 전쟁이 터져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멕시코는 지원군을 파병하지 않았지만, 1943년 발효되어 1952년까지 유지되었던 '멕시코와 미국 간 상대국 거주 자국민 병역에 관한 협정'에 따라 미국에 거주하던 멕시코 국적자들 중 약 12만명이 미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영국과 당시 영연방 국가들[1]의 참전자 수를 합친 것보다도 많다. 발데스 정부도 공식적으로 CRIK(한국민간구제단)을 통해 약 37만 8천 달러 가량의 식량을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