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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2 02:34:32

육엽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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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강릉목공(江陵穆公)
陸曄 | 육엽
시호 (穆)
작위 평망정후(平望亭侯) → 강릉백(江陵伯) → 강릉공(江陵公)
(陸)
(曄)
사광(士光)
생몰 261년 ~ 334년 10월 21일
출신 오군(吳郡) 오현(吳縣)
부모 부친 - 육희(陸喜)
자녀 아들 - 육감(陸堪), 육하(陸嘏)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진의 인물로 자는 사광(士光). 양주 오군(吳郡) 오현(吳縣) 출신으로, 삼국시대 오나라의 명문가인 오군 육씨 집안 출신이다. 할아버지 육모는 오나라의 승상 육손의 친동생으로 오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했으며, 아버지 육희는 서진 시기 고평상, 원외산기시랑을 역임했다. 동생으로는 육완이 있다.

2. 생애

젊은 나이에 명망이 높아 사촌형 육기가 칭찬하며 말하길,
"우리 집안은 대대로 공(公)에 오를 사람이 모자라지 않겠구나."
라 하였다. 이윽고 아버지 고평상 육희가 세상을 떠나고 상을 치르면서 효심이 깊다는 명성 또한 얻었다. 같은 군 출신의 명사 고영은 마을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사광의 기력이 허약해 그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말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구려.」
라며 육엽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했을 정도였다. 이후 효렴으로 천거되어 영세(永世)와 오강(烏江)의 현령직을 제안받았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영가 원년(307년) 9월, 안동장군 낭야왕 사마예가 내려와 건강(建康)을 거점으로 삼고 강동에 정착했다. 육엽은 출사해 사마예의 좨주에 임명되었고, 오래지 않아 진위장군, 의흥태수로 옮겨졌으나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영가 5년(311년) 6월, 낭야왕 사마예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강주자사 화일 토벌에 공을 세워 평망정후(平望亭侯)에 봉해졌고, 거듭 승진해 관직은 산기상시, 본군대중정에 이르렀다.

태흥 원년(318년) 3월, 진왕 사마예가 즉위해 동진의 초대 황제에 오르자, 육엽은 태자첨사에 임명되었다. 원제 사마예는 본디 장강 이북 출신의 인사들만 시중(侍中)으로 기용했기에, 강남 출신의 인사도 중용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청렴하기로 소문난 육엽을 시중으로 삼았다. 이후 육엽은 옮겨져 상서, 양주대중정을 역임했다.

영창 원년(322년) 11월, 명제 사마소가 황위를 계승하자, 육엽은 광록훈에 임명되었다가 태상으로 옮겨졌다.

태녕 원년(323년), 병에 걸려 다른 직책을 맡게된 기첨을 대신해 상서좌복야, 태자소부에 임명되었고 금자광록대부가 더해졌다. 오래지 않아 이번에는 변곤이 승진하니, 육엽은 그를 대신해 영군장군으로 옮겨졌다. 이후 2차 반란을 일으킨 왕돈의 심복 전봉을 토벌할 때 공을 세워 강릉백(江陵伯)으로 진작되었다.

태녕 3년(325년) 8월, 명제 사마소의 병환이 위독해졌다. 자신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명제는 영군장군 육엽, 사도 왕도, 태재 사마양, 상서령 변곤, 거기장군 치감, 호군장군 유량, 단양윤 온교 불러 어린 황태자 사마연의 보좌를 부탁하고, 유조(遺詔)를 내려 육엽을 녹상서사, 산기상시에 임명했다. 며칠 뒤, 명제 사마소가 붕어하고 성제 사마연이 그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했다.

함화 원년(326년), 좌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에 임명되고, 산기상시 직책은 전과 같이 하며 100명의 친위병을 거느렸다.

함화 2년(327년) 12월, 역양내사 소준이 예주자사 조약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도성 건강을 함락시키고 황궁을 대거 약탈했다. 좌광록대부 육엽은 시중 저삽, 사도 왕도, 상서좌복야 순숭, 상서 장개와 함께 성제 사마연 곁을 엄히 호위했다.

함화 3년(328년) 5월, 도간 등이 역적 소준을 토벌하고 성제를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거병했다. 소준은 의병을 무찌르기 위해 사도 왕도를 비롯한 대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성제 사마연을 강제로 수레에 태워서 석두성으로 향했다.

함화 4년(329년) 정월, 당시 소준의 부하인 광술이 홀로 남아 건강의 궁성을 지켰는데, 머지않아 소준이 허무하게 전사하자 육엽과 육완의 설득에 넘어가 동진으로 귀순했다. 육엽은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재빨리 궁성의 병권을 장악하고 소준의 잔당을 소탕했다. 평릉산(平陵山)에서 소준의 장수 한황과 장건의 무리까지 모두 평정되자 위장군이 더해졌으며, 1,000명의 친위병과 100명의 기병을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작위도 강릉공(江陵公)으로 진봉되었고, 차남 육하도 친강자(新康子) 작위에 봉해졌다.

함화 연간(326년 ~ 334년), 육엽은 성묘를 위해 귀향하고 싶다 청했다. 담당 관리는 육엽의 청을 조정에 상주하면서 60일의 휴가를 구했다. 조정에서 해당 안건에 대해 논의할 때, 시중 안함과 황문시랑 풍회가 육엽의 청을 들어주어도 기일을 정해서는 안 된다 주장했다. 성제는 이들의 주장에 따랐고 육엽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함화 9년(334년) 9월 8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1] 향년 74세. 동진 조정은 육엽을 시중, 거기대장군으로 추증해주었다. 시호는 목(穆).


[1] 양력으로 계산할 시, 334년 10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