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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02 23:20:32

원보(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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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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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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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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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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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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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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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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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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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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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袁甫
생몰연도 불명

서진의 인물로 자는 공주(公胄). 화담과 함께 제(齊) 지역의 명사로 유명했다고 한다.

2. 생애

배우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고 사(詞)를 잘 지었다. 어느 날, 원보는 중령군 하욱(何勖)을 찾아가 스스로 극현(劇縣)의 현령에 임명시켜달라 청했다. 하욱이 물었다.
"어째서 중앙의 관직을 마다하고 지방의 현령이 되고 싶다 하는 것이오?"
원보가 말했다.
"사람에게는 각자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비단(繒) 중 제일 좋은 것은 양단(錦)이지만 양단으로 모자를 만들 수 없고, 벼가 곡물 중 제일 맛있어도 벼를 생으로 먹을 수 없는 법입니다. 무릇 성왕(聖王)은 사람을 부릴 때, 그의 그릇을 먼저 파악하고 섣불리 재능을 넘겨집지 아니하니, 어찌 모든 것이 훌륭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황패(黃霸)[1]는 주와 군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고, 수도에서도 이름을 떨쳤습니다. 자고로 정위(廷尉)의 재능으로 삼공(三公)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욱은 그의 대답에 만족하며 그를 송자현(松滋縣)의 현령으로 부임시켰다. 원보는 이후 회남국대농, 낭중령을 역임하다가 나이가 여든 남짓 되었을 때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1] 전한의 인물로 지방의 말단 관직으로 시작했으나 선제 시기에는 승상까지 오르며 출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