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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31 02:15:47

웅원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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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熊遠
(? ~ 322)

서진 동진의 인물로 자는 효문(孝文). 양주 예장군(豫章郡) 남창현(南昌縣) 출신. 조부 웅교(熊翹)는 본래 석숭 집안의 종이었으나, 그를 범상치 않게 본 황문랑 반악 덕에 풀려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 생애

현에서 웅원을 불러 공조에 임명하려 했으나, 웅원이 이에 불응하자 사람을 보내 강제로 관복을 입히고 관청에 출근시켰다. 10여일 후, 군(郡)의 문학연(文學掾)으로 천거되었지만 웅원은 이렇게 말하며 현에 남기를 간청했다.
"큰 것을 말하되, 작은 것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태수는 그를 효렴으로 천거해 저족 강족 토벌에 종군하게 했다. 웅원은 이번에도 따르지 않으려 했지만, 태수가 직접 농우(隴右)까지 그를 끌고 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토벌에 참여한 뒤 귀환했다. 이후 회계태수 하정(夏靜)의 초빙을 받고 그의 공조로 들어갔고, 하정이 퇴직할 때는 배웅까지 해줬다. 웅원은 계속 승진해 주(州)에서 주부, 별가를 지내다가, 수재로 천거되어 강주자사 화일의 사마, 영남창태수, 영원호군을 역임했다.

건흥 원년(313년) 8월, 강주자사 화일을 제거한 좌승상 낭야왕 사마예가 웅원을 불러 주부로 삼았다. 당시 서진의 회제 사마치 전조의 황제 유총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막 강동에 전해져, 낭야왕 사마예는 상복을 입고 애도를 표했다. 웅원은 상소를 올려 낙양 복원을 주창했으나 하필 그때 두도의 난이 일어나 기각되었다. 당시 낭야왕 사마예는 강동에 한창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고, 그의 정권은 이제 막 세워진 터라 국가의 농업이 이폐하니, 웅원이 건의했다.
"입춘 날, 황제는 상제께 곡식을 기원한 뒤, 길일을 택해 삼공, 구경, 제후, 대부를 거느리고 친히 밭을 경작하면서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면했습니다. 《 시경》에 이르기를, 「정사를 친히 돌보지 않으면, 서민들이 믿지 않는다(弗躬弗親,庶人不信).」라 했습니다. 국상 이래 농경을 돌보지 아니한다면 놀고 먹는 자들만 많아져 모두 멸망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웅원의 건의는 의자(議者)들 사이에서 아름답다 칭송받았다.

건흥 원년(313년) 12월, 원제가 음악을 연주하게 하며 본격적으로 새해를 즐길 준비를 하자 웅원이 간했다.
"삼가 아뢰오니, 《 상서》에 따르면 요 임금이 승하하자 사해(四海)에서 팔음(八音)의 연주를 막았다 합니다. 《 예기》에 이르기를, 「흉한 일이 일어난 해에 천자는 음악을 끊고 반찬을 줄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효회황제의 재궁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며, 되려 승냥이와 이리 같이 탐욕스러운 자들이 당도하여 인신(人神) 모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공명과 덕을 무성히 하고, 사직을 올바르게 세우는 일에 힘써야만 합니다. 지금 두도의 무리가 상천(湘川)에 개미떼처럼 몰려들어 몇 해째 정벌을 행하고 있음에도, 백성들이 피폐하여 의(義)의 무리를 봉영하지 않아 반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침 곧 있을 이단(履端)[1] 시기에 남북에서 사람들이 운집할 터이니, 그때 유식한 선비들에게 명해 예(禮)를 권하게 하시옵소서. 과거 제환공이 관택(貫澤)에서 회맹을 열었을 때, 뭇 제후들도 중국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어 부르지 않았음에도 모두 모였습니다. 이리하여 제환공은 제후들을 거느리고 규구(葵丘)에서 주나라에 반역한 9개국을 벌할 수 있었습니다. 인심을 귀의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도(道)와 의(義) 뿐입니다. 황위를 이으신 폐하께서는 패권을 회복해 현재에 이르셨으니, 도덕의 궤도를 보이시고 충효의 의를 천명하셔야 합니다. 또, 인의를 밝히시고 예약의 근본을 널리 알려, 사방에 선비들을 파견해 법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허나, 지금 폐하께서 하시려는 것이 선비들의 눈에는 놀이와 희롱을 숭상하는 것처럼 보일까 두렵습니다. 《운(雲)》, 《소(韶)》, 《아(雅)》, 《송(頌)》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마시고 속세를 크게 교화시켜 주시옵소서. 정단날에는 군신들에게 음식을 하사하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원제가 이에 따랐다.

건흥 2년(314년), 웅원은 승상참군으로 옮겨졌다. 두도가 왕돈, 도간, 감탁 등과 혈전을 벌이며 쉽사리 제압당하지 않았다. 시랑 왕감은 낭야왕 사마예에게 두도를 친정할 것을 건의했지만 웅원이 반대해 그만두었다. 과연 웅원의 예상대로 두도가 이듬해에 관군에 의해 제압당하니, 웅원은 누차 승진해 태자중서자, 상서좌승, 산기상시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낭야왕 사마예는 매번 그의 충심을 치하하고 탄식하며 이르길,
"경(卿) 덕분에 조정은 진지한 분위기로 여유를 부리지 않고 강건함을 드러내며, 그대는 충량(忠亮)까지 지극하니 가히 왕신(王臣)이라 할 수 있소. 그러므로 나는 기꺼이 경에게 의지하고 부지런히 격려해주겠소!"
라 하였다.

태흥 원년(318년) 3월, 서진의 마지막 황제 민제 사마업마저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강동에 도착했다. 사마예는 마침내 황제에 올라 그동안 자신을 도왔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과도한 상을 하사하려 했는데, 그 수만 무려 20여 만 명이나 되었다. 웅원은 진나라 한나라의 예를 들며 간했지만 원제 사마예는 따르지 않았다. 동진이 본격적으로 세워지자 어사중승에 임명되어, 술에 취해 사고를 친 조협의 파면을 주청했지만 이번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시중으로 옮겨졌다가 회계내사로 부임했다.

영창 원년(322년) 정월, 대장군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거병하니, 왕돈의 심복 심충도 이에 호응해 들고 일어났다. 심충은 웅원에게 장군을 더했으나, 웅원은 반란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국경을 지키며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데에 힘썼다. 이후 왕돈이 석두성에서 원제 사마예의 항복을 받아내고, 황제의 명령을 사칭해 웅원을 태상경(太常卿)에 임명하고 산기상시를 더했다. 그러나 왕돈은 웅원이 본래 정직하고 모략이 있는 것을 두려워 해, 그를 불러 자신의 장사로 삼고 곁에 두었다. 웅원은 수 개월간 왕돈을 섬기다가 병사했다.


[1] 음력 1월 1일로, 새해 명절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