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11-25 08:17:35

우희(동진)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1. 개요2. 생애

1. 개요

虞喜
생몰연도 불명[1]

동진의 인물. 자는 중녕(仲寧). 양주 회계군(會稽郡) 여요현(餘姚縣) 출신. 동오 시기 정로장군을 지낸 우찰(虞察)의 아들. 동진 시기 역사가 우예의 형. 광록대부 우담과는 친척 사이.

2. 생애

어려서부터 태도와 행실을 갖춰 여러 학문을 섭렵했고, 과거의 일을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 명성을 들은 회제 사마치가 마차를 보내 우희를 박사로 초빙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건흥 원년(312년) 4월, 제갈회가 회계태수로 부임하자, 우희는 출사하여 공조로 임관했다. 이후 효렴으로 살펴져 주의 수재로 천거되고, 사도부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우희는 전부 응하지 않았다.

태녕 연간(323년 ~ 325년)에 명제 사마소가 그를 박사로 삼아 중앙에 불러들이려 했으나, 우희가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명제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조서를 내리자, 우희는 병을 핑계대며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함화 원년(326년), 황문시랑 하충이 상소를 올려 우희를 천거하니, 조정에서는 우희를 산기상시로 삼았지만 이번에도 우희는 역시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우희는 이후로도 집에서 경전을 연구하면서 《모시》를 해석해 《모시략》(毛詩略)을 집필하고, 《효경》에 주석을 달았으며, 《지림》(志林) 30편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도참설에도 흥미를 느끼고 연구하던 중에 우연히 천문학에 대한 관심도 생겨, 우주에 관한 동양의 주요 학설인 선야설, 혼천설, 개천설 세 학설들을 비교, 연구하여 《안천론》(安天論)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관직을 거부하고 학자로서의 삶을 살다가 76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슬하에 자식이 없어 대가 끊겼다.


[1] 270년 ~ 345년으로 봐야한다는 설이 우세하나, 281년 ~ 356년으로 봐야한다는 설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