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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8:03

우상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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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기2. 민주화 운동3. 정계 입문
3.1. 대변인3.2.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3.3. 탄핵안 가결3.4. 문재인 정부 시기3.5. 윤석열 정부 시기
3.5.1.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3.6. 22대 총선 이후

1. 유년기

1962년 12월 12일,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현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동송읍) 오덕리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철원 동송초등학교 5학년 재학 중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으로 상경하여 서울숭례초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졸업했다. 이후 광운중학교, 서울 용문고등학교(29회),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2006년 6월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공공정책 전공으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원래 우상호의 집안은 부유했다. 아버지는 지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체육학과에 유학을 떠날 정도였다.[1] 하지만 38선이 그어진 후 우상호의 집안 재산은 소련군정의 지원을 받은 북조선로동당에게 빼앗긴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 국군 철원군의 일부 지역을 수복한 후 일부 땅을 돌려받았으나 집안은 몰락하고 만다. 형제들 모두 성적이 좋았는데 진학을 포기한 것도 가난이 이유라고 밝혔다. 우상호도 대학에 들어갔지만 등록금이 없어 대학 시절 내내 고생을 했다.

시인의 꿈을 키우면서 국민학교 때부터 글을 쓰는 문예반 활동을 했고, 대학교 또한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했다. 대학 재학 시절 오월 문학상(5.18 문학상) 시 부문 당선, 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을 감안하면 시 쓰는 여고 선생님이라는 목표대로 진로가 흘러갔을 수도 있었다. #

2. 민주화 운동

1983년 1월 15일 육군에 입대하여 제30보병사단에서 박격포병으로 복무하였으며, 1985년 6월 6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하여 병역을 마쳤다.

군대전역 후 운동권과 멀어지면서 취업을 준비하는게 일반적인 운동권 대학생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상호는 다른 운동권 학생들과는 달리 군 복무 중에 학생운동을 결심하고 제대 후 사회과학 세미나에 참여한다. 문학 친구였던 인권운동가 박래군[2]이 먼저 학생운동에 뛰어들면서 우상호에게도 영향이 갔다고 한다. 등록금이 없어 입대한 후 나온 휴가에서 박래군이 강제징집 당한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우상호는 '84 국문과 강타'라는 가명으로 3년 후배들과 함께 조를 짜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후배들과도 격의없이 지내는 계기가 된다. 당시 학생운동은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것에 반해 매우 특이한 케이스로 평소 성품을 알 수 있다.

10.28 건국대학교 항쟁이 터진 후 특유의 인망으로 인해 학생회장을 권유받는 원인으로 발전한다. 당시 학생운동은 경찰과 충돌이 격화되면서 천여 명이 구속되고 내부에서도 갈등이 심화되었다. 기존 학생운동 참여자 중 절반 가량이 잡혀간 상황으로,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비운동권 학생들을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운동권의 시각이 있었다. 한편 비운동권 학생들 역시 자기방어 차원에서 운동권의 투쟁 양식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3]

우상호는 자신을 추천한 대학 내 학생운동 지도부에게 내방식대로 맡겨달라고 요구한다. 우상호가 출마한 1987년 연대 학생회 선거는 약 500명이 모였는데, 지원 유세에 문화제 방식의 선거운동이 가미 되자 약 2천여 명까지 불어났다. 비폭력주의 집회의 일환으로 등장한 문화제 형식 선거운동은 다른 대학에 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학내 운동권 서클은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기존 시위방식이 달라지자 불만을 가졌다. 우상호는 공개토론을 열어 비폭력 집회 방침을 관철한다.[4] 늦은 참여로 인해 비운동권 학생들 역시 나름의 고민을 갖고 있음을 이해한 우상호는 자신의 노선을 이렇게 표현한다. '한 사람의 열걸음 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이 중요' 이런 사고방식은 이후의 정치활동과도 이어진다.[5]

이 때 학생운동 지도부에 당선되면서 폭력운동 중심의 문화를 바꾸기 시작한다. 화염병과 투석전 중심의 학생운동을 다수가 참여하는 온건한 운동으로 변화를 시도하다 강성 지하 서클에게 고초를 겪기도 한다. 한 예로 운동권 사람들과 전두환 이야기를 하다가, 전두환도 잘한 점이 있다고 주장하다가 동료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6] 학생회장이 된 우상호가 비폭력 평화 운동으로 전환시키자 급격하게 학생들이 참여한다. 이를 바탕으로 체육관 선거를 규탄하다 결국은 6월항쟁의 주역이 된다. 이러한 균형감각이 향후 정치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는 기존 헌법을 유지하겠다고 하자 야당, 시민사회, 학생운동 세력은 강경해진다. 이에 앞서 1987년 1월 경찰의 고문에 의해 숨진 서울대 박종철 군의 치사 사건이 축소 은폐됐다는 폭로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터지면서 정국이 발칵 뒤집힌다. 서울의 학생운동 진영은 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대회에 맞춰 대규모 집회를 추진했다. 이들은 집회 전날인 1987년 6월 9일 예비집회를 열었는데, 이전보다 다수가 참여한 집회 규모에 당황한 경찰들이 최루탄을 직사로 쏘기 시작하고 여기서 우상호의 대학 후배인 이한열이 사망한다.

이후 1987년 6월 항쟁 때에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대규모 시위를 이끌었다 #.

6월 항쟁이 발발하며 국민적 저항에 견디다 못한 전두환 정부는 결국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6.29 선언으로 항복을 하기에 이르렀다. 4.13 호헌조치가 전두환 정권의 명줄을 재촉한 자충수가 되어 버렸던 셈이다.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은 이한열 열사의 상을 찾아갔고, 상주인 우상호에게 학생들 덕에 풀려났다며 울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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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8월 22일, 연세대학교 안에서 연 49재 행사 때 촬영한 사진. 가운데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청년이 우상호이다. 사진 오른쪽 태극기를 들고있는 사람은 배우 우현이며 연세대학교 앞 경의선 신촌철교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장소는 현재의 연세로이다. 여기서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의원은 이한열 영정을 들고 교문 밖으로 나가다 경찰에 연행됐다. 잡아갈 줄 알면서 독재에 그렇게 항거했다. 그렇게 6월 항쟁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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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이한열 추모사업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한열 군의 어머니 배은심 씨는 우상호를 친아들처럼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 때문인지 "나는 이한열 군의 가족이 싫어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2022년 1월 배은심 씨가 별세하셨을때도 호상(護喪)을 맡았다. 또한 이 당시의 인연으로 배우 우현 안내상과는 사적으로 친한 사이라고 하며, 20대 총선과 21대 총선 유세 때 두 사람이 우상호를 지원하기도 했다.

박종철 열사에 대한 죽음의 진실을 밝힌 최환 공안부장 검사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전 공안검사시절 자신의 선배들을 많이 잡아갔기 때문에 미운 감정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친구인 이한열 열사가 많이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3. 정계 입문

우상호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김대중 전 총재에게 직접 평화민주당 영입제안을 받게 된다. 양김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된 후 김대중은 새 인물을 영입해 서울에서 출마시킬 계획을 세웠는데 이때 영입된 인사가 이해찬이다.

김영삼 노무현을 영입한 시기도 1988년이기에 우상호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이해찬, 노무현과 같은 시기에 국회의원을 할 가능성도 있었고 당시 나이도 만 25세 4개월이어서 민주화 이후 통틀어 역대 국회의원 최연소로 당선된 김영삼(당시 만 26세 5개월)의 기록도 깼을 것이다. 하지만 우상호는 이 제의를 거절하는데 1987년 대선에서 양김 단일화를 요구하다 실패한 책임감을 이유로 들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6.10 항쟁을 촉발한 학생운동 지도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는데, 우상호는 결국 1988년 검문에 의해 검거되어 국가모독죄를 이유로 수감되고 발이 묶였다. 언론계와 출판사업에 종사하던 우상호는 1995년 민주당의 서울시장 선거를 지지하며 정치입문 단계를 밟는다. 5년 후 우상호가 출마를 준비한 서대문구 갑 지역구는 김상현 전 의원이 당선되던 지역구로, 김상현은 이례적으로 정치신인인 우상호의 출마도 환영하며 경선을 요구한다. # [7] 당시 새천년민주당 지도부는 여론조사로 경선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 우상호가 승리한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는 총선시민연대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새천년민주당 진영에서는 한보에게 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걸린 김상현이 낙선명단에 오른 부분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김상현은 불공정 여론조사를 이유로 탈당했다. #

이후 우상호는 대학 동문인 이성헌과 지긋지긋한 6번째 데스매치를 시작한다. 자세한 것은 서대문구 갑 문서로. 이성헌은 연대 학도호국단장[8], 우상호는 연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같은 학번이다. 첫 맞대결은 이성헌이 약 2% 차이로 이기지만 제17대 국회의원 선거(2004년)에서 우상호가 승리한다. # 자세한 것은 서대문구 갑 문서로.

우상호는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당시 지역위원장들의 대세인 이인제 전 의원 대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한다. # 소수의 86그룹 정치인은 대세론 대신 김근태 전 의원을 도왔는데 우상호는 정통운동권 출신이 아닌 노무현을 지지한 것도 특이한 결정이다. 우상호의 결정은 일부 사람들에게 대세였던 이인제 또는 선배인 김근태를 지지하지 않았다며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우상호는 노무현의 비전을 보고 지지했다고 밝힌다. 우상호는 평소에 국민의 정부 시기 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했던 노무현에게 많은 호감이 있었고 지역위원장 중에서는 유일하게 초청하여 강의를 진행한 바 있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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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우상호, 가운데는 문석진 서대문구청장.

이 과정에서 노무현은 우상호에게 " 우리는 87년 동지들입니다. 그러니 386들이 힘을 합해서 정치를 뒤집어봐야 하는거 아뇨?"라는 내용을 말했다고 술회했다. 당시 2001년 국민참여경선은 지역을 순회하며 경선하는 방식을 채택했고, 제주, 울산, 광주에서 이긴 노무현을 대전과 충남에서 이긴 이인제가 대세론의 위상을 되찾는 상황이었다. 분수령인 6번째 지역경선에서 강원도 득표를 책임진 우상호로 인해 노무현이 신승하고 김중권이 사퇴하며 영남후보론의 선택지를 하나로 좁힌 결과로 이어졌다. 이인제의 다른 텃밭인 경기 경선이 시작되기 전 호남과 영남 경선에서 잇달아 노무현이 완승하자, 이인제 역시 외압을 핑계로 후보를 사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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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이길 거라 생각하지 않은 동교동계는 이인제를 후원하는 과정에서 민주당에 입금된 중앙당 후원금을 다 써버리고 만다. 이에 대선 후보에 따로 대선자금을 모아오라고 요구하던 민주당 지도부와 중앙당 후원금으로 당이 대선주자를 지원하길 원한 노무현 캠프가 격하게 대립했다. 이 앙금은 민주당의 보수적 영입인사들과 결합해 현대가 출신 정몽준을 지지하는 후단협으로 이어졌다. 당시 비노/반노로 분류된 34명의 의원들은 한화갑 전 대표에게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였고 2002년 10월 4일 이른바 후단협, 독자세력화를 추진하였다. 같은 날 한영애 전 의원이 "성실하고 꾸밈없는 정치인 정몽준을 지지하기 위해 탈당을 결심했다"며 탈당을 선언하며 갈등은 더욱 치달았다. 이에 우상호를 비롯한 이인영 등 수도권 30대 40대 원외 위원장과 이종걸, 임종석 등 현역 의원들은 비노/반노의원들의 탈당 움직임을 '해당 행위'로 비난하며 국민경선으로 선출된 후보로 뭉칠 때임을 강조했다. #

노무현의 대선 후보 지지율이 하락하고 후단협이 노무현을 흔들자, 우상호는 국민참여운동본부를 설립하고 부본부장을 맡았다. 희망돼지 저금통 모금 방식으로 노무현에 협력했다. 애초에 중앙당 정치자금이 증발한 상태기에 기업에게 정치자금을 받은 이상수, 이광재, 안희정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지만(...) 우상호는 결국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에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된다.

결국 386세대, 민평련계 대표 정치인 중 하나로 성장[10]했다.

3.1. 대변인

우상호는 이례적으로 대변인을 여덟 번이나 했다. 대변인은 언론 노출도가 올라가는 장점이 있으나 높은 업무강도[11]로 인해 여러 번 하는 경우가 드물며, 거기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여러 번 맡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덕분에 당을 위해 희생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대변인을 자주 하면서 우상호는 다른 86그룹 정치인들과 선명성을 강조하는 의정활동을 하지만 다른 정치인과 달리 유연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86 운동권 중에서 언론과 폭넓게 소통하는 몇 안 되는 인사이다.

오랜 대변인 생활로 주옥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이언주는 경유형 철새, 영도는 철새 도래지가 아니다"라며 이언주에게 묵직한 돌직구를 날린 적도 있다.[12] "김문수, 대구에서 뼈 묻겠다더니 살만 올라왔나?"라며 김문수에게도 돌직구를 날린 적이 있다. 유인촌 장관의 임명 당시도 돌직구를 날린 적이 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청문회에서 청와대가 '유인촌 장관은 전북 완주 출신'이라고 발표했는데 유인촌 전 장관이 "서류상 출생지는 전북이지만 나는 56년간 서울에 산 서울 사람"이라고 해명하자 우상호는 "그러면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이 대통령은 일본 사람이냐."라고 맞받아쳤다.

박근혜 정부 시기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세월호 참사 당일 관저에서 정상적으로 집무를 봤다는 소명자료를 낸 것에 대해 우상호는 "이 정권을 재택근무 정권이라고 규정하겠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카피가 화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박근혜 정권 들어서 침대는 집무실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게 됐다."라고 했다. 최양희 미래부 후보자 인사청문회 때는 최 후보자의 농지법 위반 의혹을 제기하며 "최양희 미래부 후보자의 전원주택 잔디밭에 고추가 심겨져 있다. 잔디가 채소인가? 최 후보자는 잔디를 먹을 수 있나? 농지에는 잔디를 심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한편 같은 진보 진영으로 평가받는 유시민 작가에게도 돌직구를 날린 적이 있다. 유시민 의원이 대통합민주신당 탈당 및 진보정당 창당을 하자 "당이라고 하는 곳은 일시적인 사랑으로 들르는 러브호텔이 아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끌고 가야 할 가정 같은 곳이다."라고 돌직구를 날렸다.

3.2.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3선에 성공하였고,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 그리고 원내대표 선거 결과 결선 투표로 가는 접전 끝에 상대적으로 진보성향인 우원식 의원을 이기고 원내대표가 되었다.

당시 원내대표 선거는 한 석 차이로라도 원내 1당이 된 민주당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선거였다. 당초 언론과 여론조사의 예상을 깨고 122석 밖에 얻지 못한 여당을 눌렀고 호남과 비례에서 돌풍을 일으킨 국민의당, 6석을 거둔 정의당과 함께 거야가 출현됐기 때문에 정국의 주도권이 제 1야당인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주도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비롯한 상원이라고 불렸던 법제사법위원회장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

우상호는 상대적인 진보성향이었던 우원식보다 밀리는 상황이었고 1차 투표에서 2등이 되었으나 비교적 계파색이 엷어 비주류를 포함한 당내 주류 계파까지 고르게 지지를 확보했다는 후문이 있다 # 자칭 타칭 정치구단으로 불리는 박지원은 남들이 우원식의 우세를 말할때 본인은 우상호가 당선될 것이라 예측했다면서 그 이유를 '친문이 밀어서'로 분석했다. 우상호가 다른 후보들과 달리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을 일찍이 지지했고 후단협사태를 끊임없이 비판해 왔기 때문이다. 2012년 문재인 대선 캠프 관계자는 당시 안철수와의 단일화이슈에 시달리며 공조직이 마비되었던 상황속에서 우상호만이 달랐다고 평가한다. #

20대 국회 개원 협상은 첫번째 큰 고비였다. 한 석차이지만 무소속으로 나가있는 의원들을 더하면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에게 원내 1당을 내줘야 하는 상황임에도 국회의장을 가져와야 했고 지지자들의 요구사항인 법제사법위원장 사수와 청와대와 권력기관 감시가 가능한 국회운영위원회장을 가져와야 했다. 하지만 집권 중후반부를 달리던 박근혜 정부의 새누리당은 레임덕을 원하지 않았고 운영위원회 사수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협상 속에서 국회의장과 예산과 결산을 책임지는 예산결산특위를 민주당이, 운영위원회와 법사위원장은 새누리당이 가져갔다. # 이런 협상 결과에 당내에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호남없이 총선에서 이긴 민주당과 호남과 중도층에서 인기몰이한 국민의당, 양당 중심 거야의 출범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선 국회의장 확보가 필수였고 그 덕분에 후에 촉발된 국정농단 사태를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우상호 원내지도부의 특징으로는 의원책임제를 꼽는다. 통상 3선 이상은 원내대표,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재선은 상임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입법 우선순위를 정하는 재량권이 주어진다. 그에 반해 초선의원들은 당내 중진과 계파, 당론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어 ' 거수기'역할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 그래서 선수에 상관 없이 대정부 질의나 국감에서 나온 주제 법안을 이끌어갈 대표의원을 배당해 활약할 여지를 '의원책임제'로 마련해주기로 한다. # 결국 20대 국회에서만 더불어민주당내 초선 53명에 달할 정도로 많은 의원들이 자발성을 갖고 참여한 성과가 나왔으며 주요 TF나 국정조사에서도 초선 의원들이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대정부 질문이나 국정감사에서 고민한 부분을 입법하라고 권장했기에 법안의 완성도가 올라간 것도 긍정적인 변화라 한다.

2016년 6월 12일, 정부가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려고 하자, 당 회의에서 "폐지되면 보조금 경쟁으로 통신 시장이 다시 정글로 바뀔 수 있다. 신중해야 한다"며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네티즌들이 "휴대폰 직접 사본 적 없나?" "민생을 위한다고 입으로만 얘기할 뿐, 현실 감각이 전혀 없다" 등의 비판을 퍼부었다.

2016년 6월 14일에는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개성공단 가동과 금강산 관광을 전향적으로 재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

2016년 6월 이후 서영교 등 당 소속 의원의 비리나 실수에 대한 단호한 조치보다 두둔하는 데에만 주력하고 있어 이 같은 온정주의가 오히려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국민 눈높이와 맞지 않는 '제 식구 감싸기'란 비판이다. 특히 더민주 소속의 전직 의원은 "우 원내대표가 자를 것은 잘라내는 결단을 보여야 하는데 강단 없이 유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지나친 온정주의에 빠져 있다는 인상을 계속 준다면 결국 그것이 부메랑이 돼 당 전체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통과 이후 취지는 동감하면서도 제한을 완화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가 인상을 감안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국민 여론은 대단히 안 좋다. 심지어 해당 법률에 대해 힐 자도 안 고친다고 발언한 사람이 단 하루 만에 시행령을 개정하자며 말을 바꾼 것이다. #

우상호 원내지도부는 2016년 20대 국회 개원후 8월 중순부터 비공개로 최순실 태스크포스를 꾸린다. # 조응천, 손혜원, 도종환 의원 등이 멤버로, 각자 제보받은 정보를 모아 TF 차원에서 국정농단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민주당은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장관 해임건의안을 내놓으며 새누리당에 대적하기 시작한다. 38석을 거머쥔 제3당 국민의당을 끌어들인 원내지도부는 박근혜정부를 효과적으로 압박하고 이에 반발한 새누리당은 보이콧을 선언한다. 비공개 TF의 활약 덕택에 매일 주요 언론 1면에 최순실 보도가 실리게 되었고, 박근혜 정부는 친박 핵심 이정현과 범 친박으로 분류된 정진석으로 구성된 새누리당 지도부에 국감을 파행시키기 위한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추미애와 우상호 투톱으로 이뤄진 민주당 지도부는 단독 국감을 밀어 붙였고, 이정현 전 대표는 이를 허가한 정세균 전 의장에게 단식으로 맞섰다. #

새누리당의 국감 보이콧과 이정현의 단식으로 최순실의 증인채택을 막는 효과를 보였지만, 이정현이 혼수상태에 빠지며 단식이 며칠 만에 종료되자 갖은 조롱이 쏟아졌다. 조선일보, 한겨레 두 언론사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최순실 사태의 논란이 불거지자 박근혜 정부는 결국 여론에 못 이겨 국감 실행을 최종적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새누리당도 국감에 참여하면서 완결한 형태의 국정감사가 진행될 것으로 보였으나, JTBC의 태블릿 PC 보도가 나면서 상황은 급반전하게 되고 정국은 더 큰 혼돈에 빠지게 되었다. #

3.3. 탄핵안 가결

촛불집회가 시작되고 민주당 추미애 지도부는 당의 노선을 3단계로 정리한다. 1단계는 박근혜 전 대통령 2선 후퇴, 2단계는 하야 요구, 3단계는 탄핵당론 확정이다. 해당 과정에서 한 번이라도 박근혜 청와대가 동의했다면 탄핵안 가결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박근혜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타협을 거부하면서 정권을 나락으로 몰고 간다. 우상호는 이 과정에서 새누리 비박계를 분리해 탄핵안 가결로 끌고 오는 지대한 공을 세웠다.

당시 민주당은 추미애 전 대표보다 우상호가 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보수진영 시민도 납득할 만한 절충안을 계속 제시하자는 전략인 셈이다. 우상호는 문재인 전 대표에게도 이를 납득시켰기에 문재인 역시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

초반부터 진영 간 대결로 가면 보수진영의 시민도 결집하고 탄핵 소추안에 필요한 새누리당 내 40석이 넘어올 리 없다는 우상호의 판단은 현실적이었다. 절충안을 계속 제시하는 우상호의 전술은 촛불집회와 맞물려 시너지를 낸다. 문재인 전 대표가 제안한 거국 내각이 거부되자, 촛불집회는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규모까지 불어났다. 새누리당 비박계는 이에 공포를 느껴 우상호와 협상했는데, 여기에서 도출된 절충안인 조기하야 요구를 박근혜 청와대가 거부하자 민주당은 결국 탄핵안을 당론으로 채택한다.

비박계는 그동안 탄핵에 부담을 느껴왔으나, 자진 사퇴 요구가 거부되자 당내 생존을 위해서라도 탄핵 찬성으로 마음이 쏠렸다. 김무성계, 유승민계 등으로 분류되는 비박계는 '여당 내 야당' 행위를 강하게 보복해 온 친박세력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국정농단의 책임까지 공유하기도 싫을 수밖에 없었다. 우상호는 이들과 협상해 비박계의 활동 공간을 열어주며 보수진영 내 비박 지지층의 이탈을 유도한다.

한편 새누리당 지지층이 붕괴하자 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간에 대통령 박근혜 탄핵소추안 가결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다. 대선 주자와 정당 지지율이 민주당에 못 미쳤던 국민의당은 탄핵소추안 상정 시기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당대표 간 회동에서 박지원은 12월 9일을, 추미애는 12월 2일을 주장했다.[13] 광장의 민심을 고려하지 않은 국민의당이 비판을 받자 박지원은 JTBC에 출연해 국민 70~80%가 개헌에 찬성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자충수를 던진다. 탄핵으로 조기 대선이 일어나면 민주당, 그리고 문재인에 유리한 선거국면이 형성된다고 판단하며 그랬던 것이다. 박지원은 비박계를 빌미삼아 원포인트 내각제 개헌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박영선, 박병석 등이 토론회에 참여하는 등 내각제에 지지를 보냈으며 국민의당의 이상돈 또한 내각제 개헌 주장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다. 이런 계산에 분노한 시민들이 비박계와 국민의당에 수백만 개의 문자행동(폭탄)을 시전하며 원포인트 내각제 개헌 계획은 실패했다. 결국 12월 2일 상정이 불발된 다음날 232만 명이 촛불집회에 나오며 무시무시한 민심을 보여주었다. 그 덕에 민주당 원내지도부의 설득과 박근혜정부의 표단속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비박계는 굴복하게 된다. 절충안을 제시해 온 우상호도 시민들에게 비박계와 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오히려 비박계, 국민의당과 공감대를 갖는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표단속을 이어나간다.

우상호는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중요한 역할을 타 정당에 대부분 양보했다. 국회 탄핵소추안 제안설명은 국민의당 출신 김관영이 맡고 헌법재판소를 담당할 탄핵소추위원단장은 비박계인 권성동이 맡겠다는 주장을 인정하며 탄핵의 정치적 장면을 타당에 넘겨주는 대신, 표 계산에 집중했다. 우상호는 국회 의결 당일 당 지도부에 222표에서 226표가 확보되었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11월 말에도 우상호와 표계산이 달랐던 친박계는 12월 9일에도 이탈표가 25표에 불과해 부결될 것으로 예측했다. 우상호는 친박계가 오판한 이유를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새누리당보다 국정원, 우병우 라인의 보고서를 더 신뢰했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

그렇게 모두가 불가능할 것[14]이라고 말한 탄핵이 성공하였다. # 우상호 의원은 자신이 6월 민주항쟁의 주역이 됨과 동시에 박근혜 탄핵의 주역이 될 수 있어서 기뻤으며, 운명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파일:탄핵직후.jpg

같은 날 인터넷에서는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국회 본회의장을 나서던 우상호가 한 손을 들어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네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되었다. 인사의 대상이 방청석에 있던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였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고, 제대로 위로받지 못한 채 거리로 나앉았던 유가족을 방청석에 앉히고 그 순간을 선물하고자 한 건 우상호의 아이디어였다.

탄핵으로 인해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조기 대선으로 치러지자, 우상호는 취약지역, 소외지역 전문 유세단인 봄봄유세단을 지휘한다. 보통 대선 일정이 12월이던 시절은 대선 레이스가 약 반년 전에 결정되고, 선출된 후보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한 번씩은 지역을 방문하고 지역의 전통적인 조직과 지지층을 결속한다. 그러나 2012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안철수와의 단일화 이슈로 인해 공조직이 정지된 시절이 길었다. 당시 공보단장이었던 우상호는 조기 대선으로 인해 다시 민주당이 유세 일정에 제한을 받자 대선후보자 선거 유세단과는 따로 초재선 중심의 유세단을 만들었다.

당대표인 추미애와 함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정국-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 제19대 대통령 선거라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당을 별 잡음 없이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19대 대선의 승리와 함께 명예롭게 원내대표 임기를 마쳤다.

3.4. 문재인 정부 시기

원내대표를 성공적으로 마친 공이 있어서인지 문재인 정부의 새 통일부장관 후보로도 거론되었으나 부인했고 차기 총선의 역할이 있어 국회 일에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통일부장관으로는 조명균이 내정되었다. 이후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 당내 후보군 중 하나로도 거론되고 있다. 1기 전대협 의장이었던 이인영도 우상호와 같이 서울시장 출마후보군 중 1명으로 거론되었으나, 이인영은 당내에서의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는 걸 봐서는 상호간에 교통정리를 하면서 우상호가 86그룹을 대표해서 나가는 쪽으로 정리되었다.

2018년 1월 21일, 서울특별시장 도전 의사를 공식 표명했다. 출마 결심의 배경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도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현역 시장이자 같은 당의 박원순 전 시장과의 경쟁이 예견된다. 출마 선언 첫날부터 박원순 전 시장의 미세먼지 관련 행정에 비판을 가하면서 경쟁에 불을 붙혔다. #

2018년 3월 9일, 문재인 전 대통령의 외교적 성과를 칭찬하는 우상호는 망했다라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려 화제가 되었다. # 물론 '망했다'라는 표현은 반어적인 표현으로, 우상호 본인조차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외교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의미의 칭찬이다.

2018년 3월 10일 박근혜 탄핵 1주년을 맞아, 당시 원내대표였던 우상호의 역할과 활약이 재조명되고 있다. #

2019년 1월, 손금주, 이용호의 입당을 불허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의 결정의 대해 "순혈주의"라고 비판하면서, 당의 문호를 개방하고 민주평화당 및 정의당과의 협력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보수정당이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를 계기로 결집하고 오세훈, 황교안 두 사람을 받아들여 반문연대를 주창하고 있다"며 "지금은 반문연대에 맞서기 위해 범진보진영의 개혁전선을 정립하고 확대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 비슷한 시기에 우상호뿐만 아니라 송영길, 박영선 등 비문계 의원들이 잇따라 당의 입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송영길은 신한울 3, 4호기 건설 재개를 주장했고, 박영선 또한 우상호와 유사한 주장을 하였다. 이를 두고 더불어민주당 내 친문과 비문 간 갈등이 심화되는 거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

2019년 2~3월에 문재인 정부에 입각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있었지만, 예상과 달리 개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실제 우 의원은 인사 검증 대상에 올랐다는 보도 이후부터 일체의 외부 활동을 접고 인사청문회 준비를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해식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 이해찬 대표의 만류가 있었다"며 "차기 총선에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은 "여러가지 고려가 됐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당의 요청"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인사 발표 직전에 개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 의문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당의 필요로 만류했다면 그보다 일찍 개각 대상에서 빠졌어야 한다는 것. 인사 검증 과정에서 문제가 돼 제외됐다는 추측도 있고, 또 2018년 지방선거에서 함께 당내 서울시장 경선에 출마했던 박영선 전 의원이 중소벤처기업부장관에 내정된 점을 감안하면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 이후 6월 2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인터뷰 도중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입각준비를 실제로 했었다고 자폭했다.

21대 총선에서는 당에서 공천을 받고 예비후보로 등록하면서 4선에 도전하게 되었다. 경선 없이 단수공천으로 후보에 확정되었다. 본 선거에서는 또 출마한 이성헌을 상대로 10,458표차, 11.6%포인트차로 여유있게 이겼다. 윤미향을 지지 선언한 15인 중 1명이다. # 일각에서는 박원순 이후의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 이미 과거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박원순과 경쟁한 바 있기도 하고, 현재 민주당 내에서 차후 서울시장 후보로 나갈 만한 인물로 거론되는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원순이 불미스런 일로 목숨을 끊은 상황에서 룸살롱에서 여성 접대부를 끼고 여성 정치인에게 폭언을 한 바 있는 우상호의 출마로 인해 되레 역풍이 불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일단은 경선 패배로 이러한 우려가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의 비례대표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훗날 당선 이후 각종 문제가 밝혀지면서 논란 끝에 제명된 양정숙 김홍걸의 비례대표 공천을 걸러내지 못한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20년 5월, 평론에서 남북관계, 반값 등록금, 통신비 인하를 위해 노력해온 범진보 성향, 계파정치 혁신을 외쳤던 대변인 전문가로 '진보성'을 강조하는 의정활동에 앞장섰지만 대변인 활동을 하며 기타 86출신들과 달리 유연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강성파라기 보다 합리적인 중도파로 분류 #되며 특정계파에 속하지 않은 행보를 걸어왔다는 차별점이 있다. #

2020년 6월 22일, 은평구에서 관악구까지 연결된 서울 경전철 서부선을 본인의 지역구가 있는 연희동 신촌으로 끌어오는데 성공하였고, 2023년부터 착공에 들어가서 2028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

2020년 6월 26일 김기현과 함께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나와 토론을 했다. 김기현이 존 볼턴의 회고록을 읽고 그를 증인으로 세운 후 북미정상회담에 대해 문재인 정부를 국정감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의 주장이 현실성이 없고 오히려 외교적 결례가 우려된다며, 그런 논리라면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박근혜 아베 신조도 증인으로 불러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기현에게 차라리 볼턴을 사비로 불러서 강연을 시키는 편이 낫다고 조언도 했다. #

2020년 12월 13일,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 2월 초반 기준으로 박영선에 비해 지지율은 낮은 편이나, 박영선과 달리 확고한 친문이라는 장점이 있는 편. 하지만 경선에서 30.44% 득표에 그쳐 69.56%를 득표한 박영선 후보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다. 일찌감치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도 불출마 의사를 밝혔고, 우상호 본인도 서울시장 출마를 마지막 정치적 도전이라고 표현한 만큼 결국 21대 국회의원을 끝으로 정계를 은퇴할 것으로 보인다. #

한때 박원순 전 시장 이후의 유력한 서울시장으로 거론되기도 했었지만, 2021년 재보궐선거 후보 당내 경선에서 박영선한테 7:3으로 압도적으로 밀려 탈락했는데 그 박영선조차 본선에서 상대 후보인 오세훈한테 완패를 당하면서, 훗날 우상호가 서울시장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서울시장에 당선될 가능성은 더더욱 멀어졌다.

2021년 6월 7일, 국민권익위원회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그 가족 총 816명의 최근 7년간 부동산 거래 내역을 전수 조사한 결과 농지법 위반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에 8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자진 탈당을 권유했지만 자신은 억울하다며 탈당을 거부하고 있다.

2021년 6월 28일, 서울시장 경선 출마로 하차했던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반년 만에 다시 출연하기 시작했다. 김어준은 우상호가 농지법 관련 문제로 조만간 탈당을 하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여당 패널로 출연시킬 것을 약속했다. 결국 탈당권고를 무시하고 당에 잔류했고, 8월 19일 경찰 수사 결과 무혐의 처분을 받으면서 당 활동 재개를 선언했다. #

2022년 1월 27일, 이재명 대선 후보의 대한민국대전환 선거대책위원회의 총괄선대본부장에 임명되었다. 선대위 공보단장을 맡은 박광온 의원은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임명 소식을 전하며 “대선 승리를 위해 당 역량을 총 결집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라고 밝혔다. #

우상호가 임명된 이후 중심을 잡지 못했던 민주당 선대위가 다시 기강을 잡고 막판 스퍼트를 냈으나[15], 윤석열 후보와 안철수 후보간 단일화의 영향으로 결국 0.73%p라는 간발의 차로 이재명 후보가 낙선하고 말았다.

3.5. 윤석열 정부 시기

총괄선대위원장으로서 대선 패배에 대한 일부 책임을 진 만큼 공개적인 정치 활동보다는 종편 등에 출연하는 행보를 이어가다 2022년 5월 15일, 김진표 의원에 대항해 대한민국 국회의장에 도전할 것을 선언했다. #.

경제 관료 출신에 당내 우파로 평가받는 김진표 의원에 반감을 가진 이재명계 처럼회 등 당내 강경 소장파의 지지를 받을 것으로 알려졌으나, 경기도지사 경선에서 패한 조정식 의원 역시 출마를 결심하면서 표가 나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5월 24일 경선 끝에 57표(34.3%) 득표에 그쳐 89표(53.6%)를 얻은 김진표 의원에게 패했다. #

3.5.1.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2022년 6월 7일, 더불어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 20대 대선의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으며 대선 패배에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그 수습을 맡기는 것에 논란이 있긴 했지만, 정세균 국회의장, 문희상 국회의장, 유인태 국회사무총장 등 당내 원로들과 이광재 강원도지사, 김부겸 전 총리 등의 중진급 인사들이 위원장직을 거부하면서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우 의원에게 자리가 돌아간 것이다. 의원총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를 받아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처음에는 8월로 예정된 전당대회 관련으로 분당 얘기가 나올 만큼 시끄러웠던지라 평이 좋지 못했으나, 이후 윤석열 정부와 여당 국민의힘 지지율 급락의 반사효과와 더불어 당내 혼란을 안정감 있게 추스른 ‘우상호 리더십’의 효과로 지지율 1위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민주당 지지율을 국민의힘에 역전시켜 놓고 (비대위를) 떠나겠다”던 우 위원장의 공언이 현실화된 것. #

한편 임기 종료를 20일 정도 남겨 둔 8월 4일 코로나19에 확진되어 10일까지 자가격리되었다. #

8월 26일, 비대위 종료를 앞두고 마지막 기자간담회를 열고 80일간 비대위 활동에 대한 소회를 밝혔는데 특히 임기 막판 논란이 된 당헌 80조 개정 논란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비대위가 특정인 사당화를 돕기 위해 이런 논의를 한 것처럼 규정하는 건 억울하다. 제가 그렇게 할 이유도 없고, 견해를 달리하는 분들이 논쟁하는 건 좋은데 엉뚱한 비대위를 공격하는 건 솔직히 좀 서운하다"고 주장했다.

8월 28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이재명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의 제6대 대표로 공식 선출되면서 비대위원장직에서 공식적으로 내려오게 됐다.

2023년 11월 14일, 제22대 총선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3.6. 22대 총선 이후

22대 총선 불출마 약속을 그대로 지키면서 그의 지역구를 이어받은 김동아 후보를 후방에서 지원해 김동아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다.

총선 종료 후에는 정치 평론 등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아직까지 향후 진로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힌 바가 없다.

이후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한 방송에서 현재 사업회의 적자가 심한 상태라면서 흑자를 만들기 전까지는 이사장직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2024년 8월경에 인터뷰를 했다. 광역단체장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으며 서울특별시장 혹은 강원도지사 출마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 현재로서는 서울특별시장 출마에 의중을 두고있으나 여러군데서 강원도지사 출마도 적극 권하는 상황이라[16] 여러모로 고민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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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라톤 선수로 국가대표 수준이었다고 한다. 손기정 선수와 함께 뛰기도 했다.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면 97p [2] 민주화운동가 고 박래전 열사의 형. [3] 촌놈 214p. [4] 촌놈 216p. [5] 열의걸음은 이한열 열사의 추모곡 제목이기도 하며, 30년이 지난 후 연세대학교 이한열학생위원회의 이름이 되기도 한다. [6]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면 222p. [7] 당시 모든 정당은 당원이 지구당위원장을 선출할 권한이 없었고, 지구당위원장이 대의원을 뽑고 대의원이 지구당위원장을 선출하는 순환출자 구조였다. 하지만 김상현이 경선을 '선언'했던 것으로, 매우 개혁적인 결단이다. 그러나 김상현이 한보그룹으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재판중이었던 걸 감안하면 개혁이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 [8] 군사정권 하에서 존재했던 학생단체이다. [9] 당시 노무현은 20여명도 안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타운홀 미팅처럼 얘기할 줄 알았는데, 50명이 넘게 와서 당황했다는 후문이 있다 #. [10] 이인영 전대협 초대 의장일 때, 우상호가 부의장이었다. [11] 조간신문을 내기 전에 대변인에게 해당 사안에 대한 발언을 요청하는데 이때 사안 숙지가 안 되어 있으면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12] 사실 철새 도래지 드립은 그녀가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을 때 정청래 "당은 이익 따라 움직이는 철새 도래지가 아냐"라고 먼저 쳤다. 참고로 정청래는 20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했음에도 잔류 의지를 밝힌 바 있었고 21대 총선에서 국회에 복귀하면서 그의 선택은 긍정적으로 작용한 바 있다. [13] 우상호는 1년 후에 12월 2일 상정은 비박계의 찬성표를 확보하기엔 상당히 아슬아슬했음을 술회한다. [14] 당시 민주당 의석은 121석이고 탄핵을 위해서는 200석 정도가 필요했다. [15] 우상호 전 위원장이 키를 잡은 후 이낙연 전 총리의 선대위원장 취임 등 본격적으로 선대위가 구색을 갖추게 됐다. [16] 현재 민주당 내 강원도지사 후보군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광재 전 지사는 출마만 한다면 민주당 최종후보로 유력하며 당선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나 22대 총선에서 분당갑 지역에 전략공천된 이후 수도권쪽에 관심이 생긴것인지 성남 분당갑 지역위원장직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며, 송기헌 의원이나 허영 의원은 의원직 사퇴라는 리스크가 있다. 그렇다고 기초자치단체장 중에 한 명이 출마하려해도 정선, 고성, 인제 등 소규모인데다가 그나마도 대부분 연속 3선을 채운 인물도 거의 없어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지사 출마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민주당 강원특별자치도지사 후보로 누가 나온다는 것이 예측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