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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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彬(278 ~ 336)
동진의 인물. 자는 세유(世儒). 서주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출신. 승상 왕도과 대장군 왕돈의 사촌동생. 아버지 왕정은 서진 시기 상서랑을 지냈으며, 형으로는 왕이가 있다. 자녀는 장남 왕팽지를 포함해 4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 있었는데, 아들들은 모두 조정에 출사했으나 그 중 명성이 제일 높은 자는 차남 왕표지였다고 한다.
2. 생애
어려서부터 품행이 단정하다는 명성을 얻었고, 20세가 되었을 때는 여러 주와 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다가 광록대부 부지에 의해 징소되어 그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후 형 왕이가 복양태수 직책을 버리고 건업의 낭야왕 사마예에게 가자, 왕빈도 형을 따라 장강을 건너 사마예에게 귀순했고, 그의 밑에서 건무장사, 적조참군, 전병참군을 역임했다.영가 5년(311년) 6월, 화일 토벌에 참여해 공을 세우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당시 영가의 난으로 도읍 낙양을 잃고 장안에 다시 정권을 세운 민황제 사마업이 왕빈을 초빙해 상서랑으로 삼으려 했으나, 길이 험하다는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왕빈은 사마예를 섬기면서 건안태수, 군자좨주를 차례로 지냈다.
대흥 원년(318년) 3월, 사마예가 건강을 도읍으로 삼고 황제에 오르자 시중에 임명되었다.
영창 원년(322년) 3월, 무창(武昌)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촌형 왕돈이 건강의 석두성(石頭城)을 점령하고, 원황제 사마예가 보낸 토벌군을 대파했다. 원제는 패배를 선언하고 왕빈을 사자로 보내 양위의 뜻까지 있음을 밝혔다. 일찍이 왕빈은 명사 주의와 무척 친한 사이였는데, 토벌군을 무찌른 왕돈이 주의의 명망을 경계하여 이내 살해하자, 이를 몹시 비통하게 여기고 서럽게 울면서 석두성으로 갔다. 황제의 사자로 온 왕빈의 모습이 눈물 범벅이로 참담하기 그지 없는 것을 본 왕돈은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왕빈이 답했다.
"친구로서의 정이 다하지 않아, 백인(伯仁: 주의의 자)을 위해 울고 있습니다."
왕빈의 답을 들은 왕돈이 노하여 말했다."백인은 스스로 형륙(刑戮)을 자초한 것이다. 또, 사람들이 너를 만나기 시작하면 나는 어찌해야 하겠는가!"
그러자 왕빈이 다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 시작했다."백인은 장자(長者)이자 임금의 친우요, 비록 조정에 바른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아첨하는 무리에 속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면을 번복하고 극형을 내리시니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형님께서 순리를 범하고, 충직한 인물들을 살육하여 역적이 되고자 하신다면 그 화가 가문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왕빈의 말이 끝나고 왕돈은 대로하여 크게 소리쳤다."네가 드디어 미쳐가지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 나는 널 죽일 수밖에 없겠구나!"
그 자리에 있던 왕도는 왕돈이 진짜로 왕빈을 해칠 것이 두려워, 일단 왕빈에게 당장 사죄할 것을 권하자 왕빈이 답했다."발에 병이 난 이래로 황제를 뵙고 절을 하지 못했는데, 어찌 무릎을 꿇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사죄하라는 말입니까!"
왕돈이 말했다."발의 통증이 목에 비할 만하겠는가?"
왕빈은 그 말의 뜻을 알고도 전혀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태녕 원년(323년) 3월, 원제가 붕어하고 명황제 사마소가 그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했다. 왕돈이 다시 거병할 때 왕빈이 나서서 강하게 반발하자, 왕돈은 정색하고 좌우에 명해 왕빈을 잡아들이게 하니, 왕빈도 정색하며 말했다.
"그대는 작년에 형을 해치더니, 이제는 아우도 죽이려 하는가?"[1]
왕돈은 거사를 앞두고 차마 같은 낭야 왕씨 일족을 해칠 수 없어 왕빈을 예장태수로 좌천시켰다.태녕 원년(323년) 11월, 왕돈에 의해 전장군, 강주자사에 임명되었다.
태녕 2년(324년) 7월, 왕돈은 마침내 2차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얼마 안 가 병사하고 남겨진 그의 군대는 모두 패배해 흩어졌다. 왕돈에게 가담했던 왕함(王含)은 형주자사 왕서에게 가려 했으나, 왕함의 아들 왕응(王應)이 왕빈에게 투항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왕함은 이에 따르지 않고 왕서에게 갔다가 왕서의 계략에 당해 아들과 함께 수장당했다. 한편, 왕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밀히 배를 준비해 배웅까지 나왔던 왕빈은 왕함 부자가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심히 한스러워 했다. 왕돈의 잔당이 모두 평정된 후, 왕빈은 조정의 부름을 받고 광록훈, 탁지상서를 지냈다.
함화 3년(328년) 2월, 역양내사 소준이 반란을 일으키고 도성 건강을 점령했을 때, 소준의 병사들이 황궁을 크게 약탈하였다. 이때 반란군 병사들은 재미삼아 궁녀와 백관들을 욕보였는데, 광록훈 왕빈을 비롯한 백관들의 경우 채찍질 당하면서 짐을 지고 황궁 동북쪽에 위치한 장산(蔣山)을 기어올라야 했다.
함화 4년(329년) 2월, 소준의 반란이 평정된 후, 성제 사마연과 피난갔던 백관들은 다시 건강으로 돌아왔으나 반란군에 의해 궁궐이 흔적도 없이 불타버린 상황이었다. 성제는 건평원(建平園)에 임시 거처로 삼고, 광록훈 왕빈을 대장(大匠)에 임명해 궁을 신축하게 했다. 궁궐이 완공되자 그 공으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지고, 상서우복야로 옮겨졌다.
함강 2년(336년) 2월, 세상을 떠났다. 향년 59세. 사후 위장군으로 특진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시호는 '숙(肅)'. 장남 왕팽지(王彭之)가 후사를 이었고 관직은 황문랑에 이르렀다.
[1]
왕빈의 사촌형인 예장태수 왕릉(王棱)은 왕돈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매일 같이 간언하다가 왕돈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한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