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2-01 16:30:00

왕량(동진)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1. 개요2. 생애

1. 개요

王諒
(? ~ 323)

동진의 인물. 자는 유성(幼成). 양주 단양군(丹陽郡) 출신.

2. 생애

왕량은 젊었을 적부터 재간과 지략이 있었다. 초기에 진동대장군 왕돈에게 발탁되어 진동장군부의 업무를 처리하다가 무창태수로 승진하였다.

건흥 3년(315년) 8월, 교주자사 고비(顧秘)가 사망하자 교주 사람들은 고비의 아들 고수(顧壽)를 교주자사로 옹립했는데, 당시 교주에서 위세를 떨치던 호족인 신창태수 양석(梁碩)이 고수를 살해하고 교주를 장악했다. 이에 왕돈은 광주자사 왕기를 교주자사로 전임시키고 양석을 토벌하게 했지만, 양석은 교지태수를 자칭하고 멋대로 동오 시절 교주자사를 지냈던 수칙의 아들 수담(修湛)을 영접해 행주사(行州事)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보내 왕기의 부임을 막으니, 왕기는 울림(鬱林)에서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 했다. 이에 왕기는 다시 광주(廣州)로 돌아가 두홍(杜弘)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1]

영창 원년(322년) 10월, 왕돈이 왕량을 교주자사로 삼으면서 이르길,
"수담, 양석은 모두 국가의 적이니, 경은 이르거든 그들을 붙잡아 참수하도록 하라."
라 하였다. 왕량이 교주 경계에 이르자 수담은 구진(九真)으로 도망쳤는데, 광주자사 도간이 수담에게 사람을 보내 그를 안심시키면서 왕량을 만나볼 것을 권했다. 결국 도간의 설득 끝에 수담은 마지못해 왕량의 집을 찾아갔다. 이때 왕량은 수담이 데리고 온 측근들은 방 바깥에 머물게 하고, 수담은 안으로 초대한 뒤에 사로잡았다. 바깥에서 대기하다가 사태를 파악한 양석이 말했다.
"수담님은 과거 교주를 다스리셨던 분의 아드님이시오. 죄가 있다면 수도로 압송할 일이지 죽일 수는 없소."
이에 왕량은
"그대의 과거의 의리는 내 업무과 관계없는 일이오."
라 답하고는 즉시 수담을 참수하였다. 양석이 분노하여 문을 박차고 나가자, 왕량은 뒤이어 암살자를 고용해 양석을 죽이려 했지만 암살자가 역으로 당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양석은 곧바로 자신의 무리를 일으켜 거병하고, 왕량이 있는 용편(龍編)을 포위하였다.

태녕 원년(323년) 4월, 광주자사 도간이 양석의 거병을 알고 왕량을 구원하기 위해 급히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도간의 군대가 이르기도 전에 왕량은 패했고 용편은 함락되었다. 왕량을 사로잡은 양석은 그의 부절을 강탈하려 했지만, 왕량은 끝까지 저항하면서 부절을 빼앗기려 하지 않았다. 이에 양석이 부절을 들려있는 왕량의 오른팔을 자르니, 왕량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을진대, 팔이 잘린들 어떠하랴!"
이후 10여 일 동안 양석의 포로로 구금되어 있던 중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왕량을 죽인 양석은 교주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흉폭한 성격 탓에 이내 민심을 잃었고, 도간에게 공격받은지 2개월만에 패하여 도간의 참군 고보(高寶)에 의해 참수당했다. 도간은 양석의 수급을 넘겨받고 수도 건강(建康)으로 보냈다.


[1] 다만 왕기는 1년도 못 버티고 도간에게 토벌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