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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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尼
(? ~ 312년 이후)
1. 개요
서진의 인물로 자는 효손(孝孫).2. 생애
청주 성양 출신[1]이라고 하나, 유년기를 낙양에서 보내며 자유롭게 살았다. 시간이 흘러 성년이 되자 군역을 치르기 위해 호군(護軍)으로 징병을 당했는데, 왕니와 친했던 호무보지, 왕징(王澄), 유여(劉輿), 순수(荀邃) 등의 명사들이 낙양 군역 담당관이던 하남공조 견술(𤮔述)과 낙양령 조터에게 왕니의 군적 해제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지어 제출하였다. 조터는 이를 무시하고 법에 따라 집행하려 했으나, 호무보지 등 여러 명사들이 양고기와 좋은 술을 들고 호군부 문 앞까지 직접 찾아왔다. 문지기들이 이들의 명단을 작성해 조터에게 보고하니, 조터는 각지의 명망 높은 명사들이 왕니를 위해 모여든 것을 보고 감탄하며 명사들을 들여보내게 하였다.당시 왕니는 군부에서 말을 돌보는 보직을 맡고 있었는데, 호무보지 등이 군부에 들어오자 이들을 마구간으로 맞이하여 그곳에 앉아 함께 양고기를 굽고 술을 마셨다. 왕니와 명사들은 술을 너무 마신 나머지 취해 조터를 만나러 가지 못하고 말았다. 부하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조터는 왕니를 기이하게 여겨 장기휴가를 보낸 뒤 그냥 군적에서 제외시켜 주었다.
311년, 낙양이 함락되고 영가의 난이 발생하자 왕니는 강동으로 피난갔다. 미리 강동으로 도망가 있던 그의 친구인 왕징은 낭야왕 사마예로부터 형주자사로 임명받았는데, 도망쳐온 왕니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왕니는 강동으로 도망간 호무보지 등 명사 친구들과도 재회해 더불어 술을 마시며 놀았으나, 다음해에 그를 챙겨주던 왕징이 사망한 데다 이어서 형주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 왕니는 생활이 급격히 궁핍해져 아들과 함께 수레를 부수고 농사 지을 때 쓰던 소를 삶아먹었고, 이내 식량이 완전히 바닥이 나자 왕니 부자는 그대로 굶어죽고 말았다.
[1]
중국 위키피디아에서 이렇게 쓰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