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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0 09:39:36

영수회담


파일:한시적 넘겨주기 아이콘.svg   2024년 5월 7일 한국일보의 단독 기사에 대한 내용은 윤석열 영수회담 비선 논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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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정부별 영수회담3. 영수회담의 정치적 의미

1. 개요

영수회담()이란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입법부의 제1야당 대표(구 총재) 간의 회담이다.

영수는 어떤 집단에서 특별히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며, 따라서 영수회담은 국가나 정치단체 또는 어떤 사회조직의 최고 우두머리가 서로 만나서 의제를 가지고 말을 나눈다는 뜻이다.[1]

한국 정치에서 '영수회담'이란 단어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의 양자회담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하는 경우가 보통이었고, 참여정부 이래로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분리되는 게 일반화되었지만 여당의 실질적 1인자는 여전히 대통령이다보니 일반적으로는 여당 대표와 야당 대표의 회담은 대개 영수회담이라 부르지 않는다.

다당제 구도였던 노태우 정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문재인 정부에서는 1:1 만남 뿐만 아니라 원내 정당 대표들을 모두 초대하는 대표 회담을 하기도 했다. 문민정부는 당시 민주당, 자유민주연합 국민의 정부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을, 참여정부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국민중심당을, 문재인 정부 국민의당, 정의당, 바른정당과 이후 민주평화당, 바른미래당, 정의당을 초대하는 등 대표 회담을 주최했다. 다만 이 경우는 영수회담이라고 일컫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정치적 난국에 봉착했을 때 야당의 대표들과 회담하여 국정을 풀어가는 것이 역사적 관습으로 존재했다. 회담 장소는 대통령의 집무 공간이 되는 청와대에서 열렸다. 식사를 겸해서 회담하는 경우도 있고 차담회 형식으로 회담하는 경우도 있다.

2. 정부별 영수회담

관습적인 영수회담의 뜻에 맞게 다자회담을 제외한 양자 영수회담만 정리한다.

2.1. 이승만 정부 (0회)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영수회담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초 무소속이었고, 나중에 자유당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 이후의 대통령들에 비해서는 국회나 정당과는 거리를 뒀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삼권분립을 철저히 하는 미국 정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며, 초대 대통령은 정파를 초월한 국부(國父)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2] 게다가 여야 공히 정당으로써 체계적인 정당조직을 갖추지 못 했다. 당시 정당은 조직이라기보다는 국회의원들이 모인 파벌들의 집합에 가까웠다. 한국 정당이 중앙당, 사무처 등 근대적 시스템을 갖추게 되는 것은 일본 정당정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김종필이 1963년 민주공화당을 창당한 이후의 일이다. 제2공화국 시절에도 영수회담은 없었다. 이 때는 정치체제가 총리 중심의 내각책임제였고, 여야 모두 지리멸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2.2. 박정희 정부 (5회)

파일:최초영수회담.jpg
△ 1965년 7월 20일 영수회담
파일:박정희 김영삼.png
△ 1975년 5월 21일 영수회담

2.3. 최규하 정부 (1회)

2.4. 전두환 정부 (1회)

파일:전두환 김영삼.png
△ 1987년 6월 24일 영수회담

2.5. 노태우 정부 (2회)

파일:노김회담.png
△ 1990년 6월 16일 영수회담

2.6. 문민정부 (2회)

파일:영수회담문민정부.jpg
△ 1996년 4월 18일 영수회담

2.7. 국민의 정부 (8회)

파일:영수회담국민의정부.jpg
△ 2001년 10월 9일 영수회담

2.8. 참여정부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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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9월 7일 영수회담

2.9. 이명박 정부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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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5월 20일 영수회담
파일:영수회담0809.jpg
△ 2008년 9월 25일 영수회담

2.10. 박근혜 정부 (0회)

양자회담은 없지만 다자회담은 여러 번 가졌다. 여야 대표와 3자회담, 원내대표까지 5자회담으로 하는 방식. #

최순실 게이트 정국이던 2016년 11월 무렵 추미애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청와대에 영수회담을 제안했고 청와대도 이를 수락하며 박근혜 정부의 첫 영수회담이 열리는가 했지만, 당시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여론이 들끓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영수회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높았으며, 제2, 제3야당이던 국민의당 정의당 또한 반발하였다. 결국 추미애 대표 측에서 하루 만에 영수회담 제안을 철회하여 영수회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2.11. 문재인 정부 (1회)

파일:문홍회담.jpg
△ 2018년 4월 13일 영수회담

2017년에 선출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내가 당 대표 하는 한 영수회담 없다"고 선언하고 임기 초반 여러 번 있었던 대통령+원내 5당 대표 모임 등에 모두 불참했다. 그러나 2017년 10월 미국 방문 당시 북핵위기 대처를 위한 일대일 안보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

그러다가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2주 전인 2018년 4월 13일에 문재인 대통령과 홍준표 대표가 단독 영수회담을 가졌다. 당시 영수회담은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관련 단독 회담을 먼저 제안했고, 홍준표 대표가 이를 수락하면서 국내정치 전반으로 확대된 회담을 역제안하자 청와대가 이를 수용하면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회담 시작 전까지 회담 사실을 공개하지 않을 정도로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

결과적으로 양측 모두 할 말만 하면서 평행선을 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야당의 협조를 요청했고, 홍준표 대표는 '야당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면서도 '(회담은) 북핵폐기를 위한 회담이 되어야 한다', '완전한 북핵폐기 전에 제재 완화는 불가하다', '한미동맹 강화 조치가 필요하다' 등의 의견을 전달했다. 홍준표 대표는 개헌 철회, 김기식 금융감독원장 임명 철회, 정치보복 수사 중단, 지방선거 중립, 홍장표 경제수석 해임 등을 요구했으나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내지 못 했다. #

영수회담은 1회지만, 전술했듯 문재인 대통령은 대표회담을 몇 차례 가지며 여러 당대표와 만났다.

2.12. 윤석열 정부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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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4월 29일 영수회담

2022년부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8차례 영수회담을 제안했으나 윤석열 대통령은 참모진의 의견에 따라 ' 범죄 피의자와 면담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고수해 영수회담이 이뤄지지 않아왔다.[5]

그러나 2024년 4월 19일, 22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이 참패한 뒤 국정 지지율이 20%대를 기록하자 협치를 이유로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상호 합의 간 영수회담을 실시하기로 했다. # #

2024년 4월 29일 오후 2시에 영수회담을 실시하였다. # 본격적인 회담에 들어가기 전 기자들이 퇴장하려하자 이재명 대표는 "퇴장할 것은 아니고 제가 대통령에게 드릴 말을 써서 왔다"라고 하며 A4지 원고 10장을 손에 쥐고 등장해 15분 동안 윤석열 대통령에게 할 말을 다 했다고 한다. # 윤석열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고 알려졌다.

회담을 마친 후 이재명 대표는 "답답하고 아쉽지만 그나마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데 의의를 두겠다"면서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민주당 측은 회담 내내 윤석열 대통령은 경청하는 척만 했을 뿐 민생 회복과 국정 기조 전환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으며, 대통령의 상황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나마 대통령실 측과 제대로 의견을 주고 받은 사안은 의대 증원 및 의료 개혁 이슈와 이태원참사 특별법 말고는 딱히 없다 # #. 그 외 억지로 범위를 넓히면 민생회복지원금 필요성에 대해 서로 공감한 정도.[6] 공동 발표문은 고사하고 추후에 다시 회담을 잡는 것 조차도 의견이 갈렸을 정도로[7] 양측이 평행선을 달린 회담이었다.

3. 영수회담의 정치적 의미

대통령이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권위주의 체제 시절에 영수회담은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영수회담이 아예 없었고,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총 5번 열렸지만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전두환 정부 들어서는 한번도 열리지 않다가 87년 6월 항쟁이 거세지고 정국이 급박히 돌아가고 나서야 한번 열린 것이다.

영수회담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진 시기는 8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노태우 정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시기였다. 즉, 3김시대였다. 이때 영수회담 뿐 아니라, 당대표간 다자회담도 많이 열렸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시기였던 동시에, 카리스마적 보스가 당을 장악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대통령은 여당 총재를 겸임했고, 야당 총재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보스였다. 당 장악력이 높은 보스들끼리 통 큰 타협을 통해 여소야대 정국의 어려운 매듭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참여정부 이후 영수회담은 줄어들게 된다. 영수회담이 열리더라도 과거와 같은 통 큰 타결은 보기 어려워졌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다만 80, 90년대처럼 중요한 현안을 영수회담에서 단칼에 해결하기는 어렵지만, 영수회담은 여전히 그 자체로서 정부와 야당이 서로 소통하는 최고 수준의 자리라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 대통령은 야당 지지자들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있고, 야당은 대통령에게 핵심 의제들에 대한 결단을 요구하고 압박하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영수회담의 정치적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1] 한자로 ‘옷깃 영’(領), ‘소매 수’(袖)자를 쓴다. 옷깃과 소매가 왜 이러한 뜻으로 해석되는지에 관해서는 해당 글 참조. [2] 미국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지금까지 유일한 무소속 대통령으로 남아있다. [3] 출처: 1980년 2월 19일 조선일보 보도 [4] 사실 그 당시 중간평가 공약이행 요구를 주도하고 밀어붙인 것은 김영삼 총재였다. 김영삼 총재와 재야세력은 노태우 임기 초반에 밀어붙이지 않으면 결국 노태우가 공약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김대중 총재는 임기 2년차에 중간평가를 하자는건 시기상조이며 그보다는 5공청산이 먼저라는 입장이었고, 김종필 총재는 국민투표를 통한 임기단축은 위헌이라는 입장이었다. 결국 3김씨가 모여서 중간평가 국민투표를 추진하기로 합의했지만, 영수회담을 거치면서 이견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이는 YS와 DJ의 야권내 헤게모니 투쟁과도 관련이 깊다. [5] 2024년 제22대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내부에서 이어졌다. 국민의힘 박정훈 당선인(서울 송파 갑)은 ' 영수회담은 항복'이라며 대통령이 재판을 받는 피의자와 절대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6] 물론 이마저도 전국민지원과 취약계층 지원간의 의견이 갈리기는 했다. [7] 민주당 측에서는 대통령의 태도변화가 없이 회담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입장이고, 여당측에서는 대통령이 제의하는데 회담을 안할 방법이 있겠냐면서 추후 회담을 압박하는 모양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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