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과 영도구 대교동을 잇는 다리에 대한 내용은 영도대교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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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fb9> 영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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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永渡橋/ Yeongdogyo청계천의 다리이다.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7번째 다리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8길(숭인동)과 중구 마장로9길(황학동) 사이에 있다.
2. 이름과 역사
조선 태종 때부터 존재했던 유서깊은 다리로, 원래 이름은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였다. 양녕대군이 폐세자된 후 경기도 광주로 귀양갈 때 이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이 다리가 영도교란 이름을 얻은데에는 단종의 슬픈 이야기가 묻어 있다. 단종이 삼촌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가 여기까지 나와 배웅했는데 이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하여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영이별다리’, ‘영영건넌다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중에 이름을 한문화하여 ‘영도교(永渡橋)’가 된 것이다.[1]
조선 시대에 흥인지문에서 왕십리 방향으로 가려면 이 다리를 꼭 건너야만 했기 때문에 교통량이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 성종은 주변 절의 스님들을 동원하여 이 다리를 돌로 고쳐짓고 큰 규모로 만들게 했다. 그리고 직접 ‘영도교’란 글자를 써서 두었다.
조선 시대부터 역사가 전해오는 청계천의 다리들이 대부분 그렇듯, 영도교 역시 별칭이 많았다. 성종 때 다리를 개축한 스님들이 근처의 영미사(永尾寺)와 영도사(永導寺)에서 동원되었다하여 ‘영미교(永尾橋)’, ‘영미다리’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영도교를 궁궐 공사에 쓰려고 가져갔다.(...) 대신 그 자리에는 나무로 만든 다리가 놓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돌다리보다는 덜 튼튼해서인지 장마 때마다 무너져버려 나중에는 사람들이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다니면서 한때는 ‘띄엄다리’로도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나무 다리를 헐고 콘크리트로 새로 지었으나 1960년대 청계천 복개 공사 때 사라졌다. 지금 다리는 서울특별시에서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지은 것으로 2005년 9월 30일에 준공했다.
3. 구조
<colbgcolor=#006fb9> 영도교 상판과 조형물[A] |
<colbgcolor=#006fb9> 영도교 알림표지판 |
<colbgcolor=#006fb9> 청계천 산책로로 들어가는 영도교 진입로[A] |
4. 교통
4.1. 지하철
- 서울 지하철 1 · 6호선: 동묘앞역 3번 출구 (도보 6분)
- 서울 지하철 1 · 4호선: 동대문역 4번 출구 (도보 12분)
- 서울 지하철 2 · 6호선: 신당역 10번 출구 (도보 12분)
- 서울 지하철 1 · 2호선 · 서울 경전철 우이신설선: 신설동역 10번 출구 (도보 14분)
4.2. 버스
- 이 곳을 참조.
5. 여담
- 1933년 교체공사를 할 때 교각 하부의 구중(溝中)에서 관음보살목각좌상을 출토하기도 했다. 이 관음보살상은 나중에 도난당했다가(...) 8.15 광복 후 효자동 고물상에 나온 것을 개인이 구입하여 소장 중이다. #
-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 지명 등을 기록한 서적 한경지략에 따르면 영도교 인근에 여자들만 드나드는 금남(禁男)의 채소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정순왕후는 남편 단종이 폐위된 이후 동대문 밖에 초가집을 짓고 염색업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를 가엾게 여긴 인근의 아낙네들이 정순왕후의 집에 끼니거리를 가져다 주었다. 얼마나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많았던지 나중에는 아예 긴 행렬이 생겼을 정도였다고. 그런데 궁에서 이 사실을 알고 금지해 버리자, 아낙네들은 지혜를 모아 정순왕후가 사는 집 근처에 모여 남자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채소를 파는 척하면서 먹을 것들을 모아 몰래 정순왕후에게 가져다 주었고, 이것이 나중에 영도교 인근에 금남의 채소 시장이 들어서게 된 경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