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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15:41:02

열관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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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3067><colcolor=#fff> 광신공(廣信公)
悅綰 | 열관
시호 없음
작위 광신공(廣信公)
(悅)
(綰)
불명
생몰 ? ~ 368년 11월
출신 합노성(榼盧城)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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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연의 인물. 합노성(榼盧城)에 거주하던 선비족 부락의 대인(大人)이었으나 모용부에 복속되었다.

2. 생애

모여근과 마찬가지로 합노성의 선비족 부락들 중 하나를 이끌던 대인으로, 모용부가 세력을 한창 확장할 때 복속되어 모용황의 사마로 배속되었다.

함강 5년(339년) 9월, 후조의 영주목(營州牧) 이농이 정북장군 장거(張舉)와 함께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전연의 범성(凡城)을 습격하였다. 이에 모용황은 열관을 어난장군(禦難將軍)으로 삼고, 1,000여 명 밖에 되지 않는 병력으로 범성을 수비케 하였다. 오래지 않아 후조군이 성 밖에 이르자, 범성의 장수와 관리들은 두려워 모두 두려워 성을 버리고 달아나려 하였다. 이때 열관이 소리쳤다.
"외적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상 죽을 각오로 지킬 뿐이다! 성벽에 의지해 굳게 지킨다면 한 사람이 가히 백 명의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니, 망언(妄言)으로 무리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자는 베겠다!"
열관의 불호령에 비로소 성 안의 소란은 가라앉았다. 열관은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친히 병사들 앞에 서서 농성을 지휘하였고, 장거 등은 서른 배가 넘는 병력으로도 열흘간 이기지 못하여 물러났다.

영화 7년(351년) 2월, 양국(襄國)에서 염민이 이끄는 염위군에게 포위되어 궁지에 몰린 후조의 황제 석지가 전연에 태위 장거를 사신으로 파견해 전국옥새를 대가로 구원을 청하였다. 마침 전국옥새가 무척이나 필요했던 연왕 모용준은 석지의 청을 수락하고, 열관에게 30,000 군사를 주어 양국을 구원케 하였다. 열관은 남하하면서 그처럼 양국을 구원하러 가던 강족 요양과 후조의 여음왕 석곤(石琨) 무리와 합류하였다.

영화 7년(351년) 3월, 마침내 구원군이 양국에 도착하자, 염민은 양국을 포위하던 병력들까지 죄다 동원해서 친히 요양과 석곤의 군대부터 영격하였다. 염위군과 몇 리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던 열관은 적들이 요양, 석곤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기병을 넓게 포진시킨 후, 기병들로 하여금 나뭇가지를 땅바닥에 끌고 다니게 하여 흙먼지가 휘날리게 하였다. 이를 본 염위군은 두려움에 급격히 사기를 잃었고, 열관은 이를 기회로 삼아 전군을 들어 요양, 석곤과 함께 염위군을 3면으로 협격하였다. 이때 양국의 포위가 풀린 것을 확인한 석지까지 튀어나와 염위군의 후방을 치니, 염위군은 이내 궤멸되어 수많은 장수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염민은 기병 10여 기만 거느리고 염위의 수도인 업(鄴)으로 돌아갔다.

염위군을 격파한 열관은 석지에게 일전에 약속받은 전국옥새를 요구하였는데, 석지는 그런 일 없다며 시치미를 떼고 열관을 돌려보냈다. 열관은 빈손으로 돌아와 이를 그대로 연왕 모용준에게 보고하였고, 모용준은 분노하여 사신으로 왔던 장거가 거짓말한 것이라 여기고 그를 주살하였다.

영화 8년(352년) 8월, 보필장군 모용평을 도와 염위의 수도인 업(鄴) 평정에 공을 세워 전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원새 3년(354년) 2월, 노구(魯口)에서 여호(呂護)가 안국왕(安國王)을 자칭하자, 열관은 태원왕 모용각과 함께 여호를 토벌하였다. 전연군에게 패한 여호는 야왕(野王)으로 도주를 시도하였으나, 열관이 그 뒤를 추격해 대파하니 여호의 무리가 모두 항복하였다. 이 공으로 열관은 상서우복야로 승진하였다.

광수 2년(358년) 9월, 본래 병주(并州)의 군벌 장평(張平)을 따르던 보루 100여 개가 전연에 항복하자, 경소제 모용준은 열관을 안서장군, 영 호흉노중랑장(領護匈奴中郎將), 병주자사로 삼아 지역을 위무케 하였다.

건희 원년(360년) 정월, 헌무제 모용위가 즉위하자 다시 중앙으로 돌아가 상서좌복야로 옮겨지고, 광신공(廣信公)에 봉해졌다.

건희 9년(368년) 9월, 태부 모용평이 정권을 잡은 이래로 많은 전연의 왕공(王公)과 귀족들이 몰래 호적을 자기 소유로 편입시켜 국가 소유의 호구 수보다 귀족들이 소유한 호구가 훨씬 많았다. 이로 인해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 국고가 거덜날 지경에 이르니, 열관이 헌무제 모용위에게 상소하여 말했다.
"지금 천하는 세 나라가 정족지세를 이루면서 저마다 천하를 병탄할 마음을 지니고 있는 가운데, 태부의 정치가 너무 관대하여 많은 백성들의 호구가 음호(廕戶)로 편입되었습니다. 《전(傳)》에 의하면 '오직 덕이 있는 자만이 무리를 관용으로 이끌 수 있으나, 그에 버금가는 정도라면 사나우니만 못하다.'라 하였습니다. 지금 병영이 세 군데로 분할되어 있고, 풍기와 교화가 퇴폐하였으며, 나라의 위엄과 기강이 바로 서지 못하여, 호족과 귀족들이 멋대로 전횡하여 민호(民戶)가 모두 나라의 호적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또, 관리의 녹봉과 병사의 봉급 지급도 단절되어, 관원들조차 조와 비단을 빌려 자급자족하는 실태이니, 이러한 소식이 이웃 나라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의당 음호(蔭戶)를 파악해 군과 현의 호적으로 되돌림으로써 국고를 다시 부유케 하고, 법과 기강을 명확히 하여 사해(四海)의 통치를 바로 잡으소서."
모용위는 열관의 말에 동의하여 그로 하여금 감추어진 간사함을 드러내게 하고, 귀족들이 숨기는 것을 없게 하는 임무를 맡겼다. 열관이 귀족들에 의해 숨겨져있던 민가 200,000여 호를 찾아내 다시 국가의 호적으로 등록시키니, 태부 모용평을 포함한 모든 전연의 황족과 고위 관료들이 심히 원망하였다.

건희 9년(368년) 11월, 조정의 여론을 신경 쓰지 않고 호적 조사에 온 힘을 다하던 열관은 결국 이전부터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어 병사하였다. 훗날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의 천왕 부견은 열관의 충성심과 절개를 전해듣고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을 무척 아쉬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