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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19:15:35

에르빈 롬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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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c0><colcolor=#000> 나치 독일 초대 아프리카 집단군 사령관
요하네스 에르빈 오이겐 롬멜
FM Johannes Erwin Eugen Rommel
[1]
파일:Bundesarchiv_Bild_146-1977-018-13A,_Erwin_Rommel(brighter).jpg
출생 1891년 11월 15일
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하이덴하임
(現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슈투트가르트현 하이덴하임)
사망 1944년 10월 14일 (향년 52세)
나치 독일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 대관구 헤를링겐
(現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튀빙겐현 블라우슈타인)
묘소 헤를링엔 묘지
재임기간 초대 독일-이탈리아 아프리카 집단군 사령관
1941년 2월 ~ 8월
서명 파일:에르빈 롬멜 서명.svg
종교 기독교 ( 개신교, 루터회)
신체 168cm
복무 독일 제국 육군
1910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 육군
1918년 ~ 1935년
독일 국방군 육군
1935년 ~ 1944년
최종 계급 원수 (독일 국방군 육군)
참전 내용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서훈 푸르 르 메리트 군사장
금강석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독일 십자 은장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주요 보직 내역7. 진급 내역8. 주요 서훈 내역9. 어록10. 저서

[clearfix]

1. 개요

롬멜은 독일군이든, 이탈리아군이든 병사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다. 이제 그는 거의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다.
1941년 파울 요제프 괴벨스, 전선 라디오 中.
전쟁의 참상과는 별개로 장군들을 평가한다면, 저는 롬멜을 위대한 장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윈스턴 처칠
나치 독일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육군 원수. 속칭 사막의 여우(Wüstenfuchs)[2]라 불린다.

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에르빈 롬멜은 1891년 11월 15일에 브렌츠와 맞닿은 하이덴하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르빈은 교사출신이었고, 어머니는 루츠가문 출신이었다.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중산층 교육자 가정 태생인 에르빈 롬멜은 어릴적 성질이 순하고, 피부가 매우 희어서 백곰이라고 불렸었다. 학교 교장이었던 롬멜의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지만, 성장하면서 장난기가 많아진 롬멜이 공부에 열성을 보이지 않은 탓에 성적은 나빠져만 갔고, 부자간의 관계는 악화되어갔다. 그러다 롬멜이 당시 유행하던 비행기와 글라이더에 열광해 항공역학과 수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마침 수학을 좋아하던 아버지와 협력하며 관계가 호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적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이렇게 글라이더, 비행기, 비행선 등에 빠진 롬멜은 비행선을 제작하는 공장에 기술자로 취직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교육자인 부친은 아들이 공돌이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대신 육군 장교가 될 것을 권유했다. 이에 롬멜은 엔지니어 지망생답게 처음에는 공병, 그 다음에는 포병에 지원했으나, 부친의 추천서 내용이 영 별로였던 점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모두 떨어졌고, 결국 롬멜을 받아준 곳은 보병이었다.[3] 18세가 된 그는 바인가르텐에서 뷔르템베르크 왕국군 제6 보병연대 국와 빌헬름 1세 제124보병연대 훈련소에 입소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다.

보병 장교로 임관하기 위해 군사 교육을 받던 중, 롬멜은 언어학을 전공하던 루셰 마리아 몰린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사랑에 빠졌고 결혼했다. 이때 이들이 만난 곳은 당시 독일 제국령이던 단치히였다. 훗날 폴란드 침공 당시 총통 호위를 맡던 롬멜은 침공에 대해 대외적으로는 독일의 영광 회복을, 사적으로는 아내와 만난 곳을 되찾는 기회로 여겼다. 그런 반면에 아내를 만나기 전 10대 과일장수 '발부르가 슈템머'와 관계를 맺어 얻은 사생아로 게르트뤼드라는 딸이 있었고,[4] 롬멜이 거두어 키웠으나, 평생 자신이 아버지라는 것을 숨기고 삼촌 행세를 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colbgcolor=#c0c0c0>
에르빈 롬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보병 공격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롬멜은 육군 보병 소위로 참전했다. 서부전선에서 저돌적인 지휘로 활약하던 롬멜은 넓적다리에 부상을 입었음에도[5] 투혼하여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는다.
<colbgcolor=#c0c0c0>
파일:에르빈 롬멜_1917년.jpg
1917년의 롬멜 중위
1916년 중위로 진급한 롬멜은 휴가를 내 독일로 돌아가 결혼했다. 이후 1917년 10월 율리쉔 알프스산맥 위 마타주르 산의 이탈리아 왕국군의 요새를 공격한 카포레토 전투에서 벌어진 크라곤자 산 전투의 활약으로 유명세를 탔고, 그로 인한 훈장을 받아야 했으나[6] 평민 출신인 탓에 롬멜이 아닌 엉뚱한 귀족 출신 장교에게 수여되었다.[7] 결국 롬멜은 훗날 다른 마을을 점령해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받게 되었지만, 첫 훈장을 빼앗긴 기억을 결코 잊지 못했다. 그리고 이 전선에서 귀족 출신 장교들의 부조리와 부패를 겪은 롬멜은 이들에 대한 경멸을 훗날 그대로 폰(von)이 붙은 국방군 수뇌부에 대한 경멸로 이어진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후 다른 전투에서 독일 육군 진지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진지의 병력 대부분이 사망한 상태에 적군에 포위되었음을 알고 후퇴를 감행했고 성공해냈다. 또한 적군에게 일체의 정보를 넘기지 않기 위해 전사자의 시체를 생존자들이 들고가게 하는 등 이와 비슷한 기타 여러 일화들은 현대에 와서도 군 교육에 사용된다.

또한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롬멜의 보병 전술이라는 책을 서술하는데 주 내용은 적이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있다 해도 철저히 준비를 갖추고 기습적인 맹공을 연속하면 무찌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주로 보병 수비에 대해서는 후퇴 후 적의 전력 분산을 활용해 재역공을 가하는 형식을 강조했으며 현재 미국육군사관학교 추천도서목록으로 들어가 있으며 보병 교리로 수업에 어느 정도 반영이 되고 있다.

2.3. 전간기

전후 롬멜은 대위 계급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에 잔류, 바이에른 지역에서 경비대대 장교로 복무했다.[8] 그러던 중 공화국이 대공황으로 휘청거리며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자, 나치당의 돌격대와 공산당 행동대원들의 시위가 나날이 격해지고 양측간의 혹은 타 집단에 대한 폭력 시위가 급격히 증가하자, 공산당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사격하라는 주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물대포로 시위를 진압했다. 또한 이에 대해 휘하 장교들에게 “군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러한 롬멜의 신념은 2차 대전 말기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이 성공하고, 독일 본토가 위협받을 위기에 처하자 화평론자로 변하는 바탕이 된다.

그러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과 함께 팽창하기 시작한 군대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 포츠담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후 롬멜은 히틀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폴란드 침공 당시 전선을 시찰하는 히틀러를 호위하며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보여 보병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새로 편제중이던 제7기갑사단의 지휘관으로 부임한다. 군부에선 롬멜을 반대했지만 히틀러는 귀족 출신 독일 장성들을 견제하기 위해 롬멜을 제7기갑사단장으로 임명한 것이었고, 당시로썬 파격적인 인사였다. 제7기갑사단장으로 부임한 롬멜은 자신의 명성을 더 드높이고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부임 직후부터 기갑 운용 교리를 심혈을 기울여 연구하고 휘하부대에 훈련을 철저하게 시킨다.

2.4.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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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ommelinFrance.jpg
프랑스 침공 초기의 롬멜과 독일 육군 제7기갑사단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롬멜은 기동전의 강력한 지지자로서 기계화 부대의 운용에 대해 연구했고, 이는 훗날의 활약의 밑거름이 된다. 사실 폴란드 침공 초기 때까지만 해도 롬멜은 승전의 가장 큰 기여자는 기갑, 기계화 부대가 아닌 항공 전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히틀러를 호위하면서 본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 운용에 감명을 받은 것을 계기로 롬멜은 기갑 부대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9]

프랑스 침공 때 롬멜은 제7기갑사단장으로 복무했다. 침공이 시작되자 롬멜은 전격적으로 프랑스로 진격해 구데리안보다 더 빨리 뫼즈 강을 도하했다. 이때 롬멜의 부대는 제2호, 3호 전차의 최대 속도를 가정한 이동 범위보다 더 멀리 이동하는 등 상식을 뛰어넘는 기동력을 보여 프랑스군에게 ‘유령 사단(Ghost Division)’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런 성과의 비결은 제7기갑사단 소속 로텐부르크 기갑 연대장의 서신과 당시 제7기갑사단 기갑수색중대장 직책으로 근무했던 한스 폰 루크의 저서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의 서술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죽도록 갈궜다."[10] 또는 "회오리바람처럼 우리 앞에 나타났다."[11] 정도로 요약된다. 몇몇 학자들은 이 경이로운 기동력에 각성제 등 항정신 약품 사용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실제 문서상에는 그러한 품목의 보급 기록이 없다. 물론 당시에는 각성제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기도 했고[12] 워낙 놀라운 기동력을 보여줘서 그렇게 의심해 볼만하기는 하다.

롬멜은 여기서 롬멜 특유의 좋게 말하면 솔선수범하는, 격하게 말하면 겁대가리 없는 지휘 패턴을 보여주었는데 뫼즈 강을 도하하기 위해 도하작전, 수송대 편성 등을 직접 하며 최전선에서 동분서주하고, 결국 한 개 보병대대를 직접 지휘하기 시작, 포탄이 사방에 작렬하는 가운데 7기갑의 분견부대는 결국 강을 건넜다.[13]

사실 그때 직속상관 헤르만 호트 장군과 동료 하르클리프 장군과 마찰을 빚는데, 2개 사단이 한 번에 도하하지 못할 거면 하르클리프에게 갈 물자와 도하 장비를 5기갑사단보다 진격속도가 빠르다는 이유로 제7기갑사단에게 해줄것을 요구한다. 이미 호트는 5월 12일 에르빈 롬멜을 지원하기 위해 5기갑사단의 31전차 연대를 7기갑사단으로 보내준 상황이었다.[출처] 안 그래도 한개의 전차 연대를 지원받은 상황에서 들어온 이 오만하고 이기적인 요구에 호트는 크게 당황하고 하르클리프는 격분하지만 인자한 영감 호트 장군은 롬멜의 과격한 요구를 들어주고 하르클리프 장군을 달랬다.

뫼즈 강을 건넌 롬멜은 옹에라는 마을로 서진을 시작했는데, 진두지휘를 위해 휘하 연대장의 지휘전차인 3호 지휘전차를 빼앗아 타고 가고 있다가 대전차포 매복에 걸려 피격되고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옹에를 손에 넣는다.

제7기갑사단은 드디어 벨기에 국경의 연장 마지노선에 도착하는데 집단군사령부는 이 요새선에 대한 '공격 대기'를 할 것을 명령했지만, 롬멜은 사령부에 자기 참모만 남기고 전차연대를 이끌고 나가버렸다. 결국 '제한 조건'을 달고 있던 서식이 도착했을 때 롬멜은 이미 닥돌을 시작한 뒤였다.

이렇게 진격한 끝에 드디어 아헨에 도착했는데, 그 후 프랑스 육군 전차부대와 조우하여 승리를 거두면서 그 여세를 몰아 서쪽의 랑드르시로 돌격, 그냥 가서 롬멜이 “항복하라!”고 하자 그곳에 주둔한 프랑스 육군은 독일 육군을 대군으로 착각하고 그대로 항복했다. 이때 한 프랑스 시민이 권총을 빼들고 롬멜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다가 이미 독일군에 항복한 프랑스군에게 제압당하는 웃픈 광경도 나왔다.

드디어 제7기갑사단은 유류와 탄약 고갈로 랑드르시에서 정지했고 이미 50km 가까이 진군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롬멜 자신이 직접 지휘한 기갑연대만 돌진했고, 군단장 명령 때문에 남은 병력은 아직 요새를 넘지 않았다. 결국 롬멜은 사령부로 돌아가기로 결심,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험을 시작한다. 롬멜은 자기 지휘차와 3호 전차 한 대를 호위용으로 붙여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그 3호 전차는 가던 도중 엔진 고장으로 퍼져버렸고 결국 롬멜의 지휘차만 다시 후방 50km를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후방에는 우회당해 교전도 못 해본 프랑스 육군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롬멜은 요새지대를 피해가며, 뭔가 많아보이는 행군 중인 적에게 지휘장갑차 혼자 다가가서 당당하게 적 지휘관에게 “항복하라!”고 외쳤으며 프랑스 육군들은 전부 낚여서 항복했고 이렇게 몇 차례 성공했다.[15]

드디어 롬멜은 아헨에 도착했을 무렵, 사단 참모들이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아헨에 도착하는 중이었다. 롬멜의 장갑차 뒤에는 프랑스 육군 트럭 40대 안에 포로가 가득 들어 있었다. 롬멜은 이 공으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맹진격을 거듭하던 도중인 5월 21일, 롬멜이 지휘하는 제7기갑사단은 아라스에서 역습에 나선 영국 육군의 전차들과 마주치기도 했는데, 이때 상대편 전차의 방어력이 뛰어나 50대 이상의 전차가 순식간에 파괴당하자, 사단장인 자신이 직접 루프트바페 소속 방공포병 부대의 8,8cm FlaK을 빌려다가 적 전차들을 제압하기도 했다. 대구경 대공포의 화력을 응용한 이 작전은 유효해서, 이후 독일군은 대전 내내 88mm 대공포를 대전차용으로도 사용하게 된다. 다만 독일군은 전에도 88mm 대공포를 지상 표적에 대고 쏜 적이 몇 번 있었다.

물론 완전한 임기응변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 이 88mm 대공포는 개발 초기부터 대전차용으로도 쓸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물건이라 사용 가능한 탄종 중에 철갑탄이 있었다.[16] 독일군은 아라스 전투 이전부터 88mm 대공포를 야포 역할로 활용했는데, 5월 13일에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가 뫼즈 강 도하작전 도중 저항하는 프랑스군 벙커를 상대로 야포가 안 먹히자 88mm 대공포를 직사해 박살낸 적이 있었다. 단, 소련에서 KV-1을 만날 때까지는 고폭탄으로도 충분히 전차를 격파할 수 있어서 철갑탄의 숫자는 매우 부족했다고 하며, 역시 화포 자체의 수량 부족 및 대부분의 대공포가 공군 소관이라 소속도 달라서 사실상 이때 용도 전환하기 전에는 해당 대공포를 운용하는 대공포병도 지상목표를 잘 사격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물꼬를 튼 셈이다.

프랑스 침공에서 극적인 활약으로 일약 독일 육군 최고의 저명인사로 떠오른 롬멜은 그를 주연으로 하는 전시 선전영화 "서부의 승리"가 그를 위해 특별 상영되는 등, 인생 최고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이때의 영광이, 이후 그의 전설을 만들게 되는 또다른 무대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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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rwin_Rommel_in_Afrika.jpg
북아프리카 전역 당시 롬멜의 기록화

프랑스 점령 후,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려 계획하게 되었으나 이때 동맹국인 이탈리아가 나치 독일의 진격속도를 보고 근자감을 가진 채 일을 벌였다가 그리스에서도 털리고 아프리카에서 영국군에게 대패, 이탈리아가 유일하게 소지한 식민지인 리비아를 되려 먹힐 지경에 처하자 무솔리니까지 나서서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문제는 이 시기에는 소련 침공 작전 준비가 대부분 진행된 상태라 빼낼 수 있는 병력이 얼마 없었다는 거다. 그런 이유로 독일군은 소수의 기계화 부대유능한 장군 한 명을 보내는 것으로 아프리카에서 완전히 이탈리아가 축출당하는 것만 막는 선에서 마무리지으려 했는데, 그때 도착한 사람이 바로 사막의 여우라 불리는 롬멜이었다. 롬멜은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정찰기를 타고 영국군 지역 상공을 정찰했다.

당시 영국군의 상태는 이탈리아군을 추격하는 데만 과하게 집중되어 조직적인 전투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당시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을 몰아붙이는 와중에 그리스에 독일군이 침공하면서 그리스 방위라는 정치적 이유로 2개 사단이 차출당해 실제 전력 자체도 약화되어 있었다.[17]

영국군의 현 상황이 상당히 어수선하다는 점을 파악한 롬멜은 아직 수송선에서 병력이 제대로 하차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반격을 냅다 개시한다.[18]

반격할 병력이 없다는 말에 롬멜은 트럭과 경차량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전차 모양이 나게 만들라고 지시하고 이들을 끌고 가 기만 작전을 펼치는 과감함을 발휘했는데, 놀랍게도 이 작전이 대성과를 거뒀다. 이미 주력 지상 병력을 처칠의 명령에 따라 억지로 그리스에 파견했다가 상당수를 잃어버려 약체화된 영국 육군은 지휘관 교체로 방어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블러핑한 독일 육군의 공격에 간단히 격파당했고 무엇보다 영국군 상황 자체가 보수적이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사실상 아프리카의 전쟁은 롬멜 대 영국군의 전쟁이 되어 영국군으로부터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며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 이 무렵 그를 주제로 삼은 군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곡명은 우리의 롬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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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7194e5b0e282e83438b58af8d7472f2c.jpg
Sd.Kfz. 250/3 그라이프 호에서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는 롬멜 장군

영국군에게 롬멜은 정말로 무섭고 미운 적이지만, 동시에 군인으로서 존경할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처칠조차도 때때로 롬멜을 언급하며 '까마귀 무리 속 단 한 명의 진짜 군인'이라는 식으로 묘사했다. 대치 중이던 영국군 야전병원에 식수가 떨어졌다는 소문이 들리자 장갑차에 백기를 달고 식수를 전달하기도 했고, 언제나 최전선에서 부하 장병들과 함께 했기에 식사조차도 장갑차를 타고 달리는 중에 장병들과 함께 통조림 같은 전투식량으로 때우기 십상이었다.[19] 이탈리아 육군 장교들이 사막에서도 하얀 식탁보를 깐 테이블 위에 포도주, 평시급의 식사류와 반찬 등을 차려놓고 먹던 것과 비교하면 천지차이의 마음가짐, 즉 헌신하는 군 지휘관과 병사들의 처지와 동떨어진 군 지휘관이라 할 수 있다.[20] 그렇게 일선 장병들과 함께 하다가 잠깐 안 보인다 싶으면 어느새 정찰기를 타고 적군 진지 위로 날아가는가 하면 아군 진지 위로도 비행하며 이상이 없나 확인했다.

롬멜은 일선 병사와 부사관, 초급장교들에게 친절하고 호탕하게 대하며 그들의 의견과 고충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작전에 반영했으나, 고위 지휘관이나 참모들에겐 악몽 그 자체였다. 심지어 어느 육군 장교는 잠시 진격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사이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간 정찰기에서 롬멜이 "지금 당장 진격하지 않으면 내가 내려가서 부대를 지휘할 테다"라고 적은 쪽지를 떨어뜨린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적의 저항이 너무 거세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보고를 받아도 '그건 자네를 포함해 병력 절반이 희생당해도 이미 예정된 희생일 뿐이야!'라며 기각하고 공격을 계속 하게 독촉하기도 했다. 얼마나 지휘관들을 거칠게 채찍질했던지 롬멜과 동갑내기인 휘하 사단장 육군 소장 하인리히 폰 프리트비츠는 그의 독촉을 받고 황급하게 전투에 나섰다가 초장에 전사하고 말았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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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3.bp.blogspot.com/Rommel%27s_Staff_Car_(8).jpg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탑승한 호르히 901/40 차량

심지어 그 자신은 너무 빨리 진격한 나머지 퇴각하는 영국 육군의 후위에 끼어버리는 경우마저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당시 야간이었는데다 영국군들 중 그 누구도 옆에 있는 차량이 롬멜의 것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조용히 이탈하여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롬멜의 능숙한 야전 임기응변 및 야음과 함께 롬멜이 사용한 지휘차량 '마무트'가 노획한 영국제 장갑차였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사실 프랑스에서도 그는 이런 일을 겪었는데, 전차 2대를 대동하고 단독으로 전선 시찰을 나갔다가 숨어있던 영국 육군 전차 부대의 기습을 받고서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서 2시간 동안 숨어있었다가 구조된 일화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영국 육군은 독일 육군이 근처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이어 벌어진 아라스 전차전에서 첫 패배를 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 그를 괴롭힌 것은 적군보다는 오히려 보급품의 부족과 무능력한 이탈리아 육군이었다. 이탈리아 육군은 병력만 많지 가장 중요한 전의와 능력은 중구난방이어서 발목을 잡을 때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탈리아군은 앞서 멋도 모르고 이집트를 쳤다가 영국군에게 영혼 끝까지 털린 상태였고, 그나마 자랑이었던 해군력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해 지중해 제해권은 영국 해군이 꽉 잡고 있었다. 이렇게 롬멜은 이탈리아 육군 병력에 대해 격하게 비판했으나, 이탈리아군 공병과 특공대 병력에 대해서는 훌륭하다고 평하였다. 특히 이탈리아 공병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였는데, 그들의 방어 진지 구축 및 요새화 건축 능력에 감복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이탈리아군의 아리에테 사단과 리토리오 사단을 포함한 이탈리아 육군 제20군단은 이런 비난에서 예외였다. 이들은 열심히 싸워서 몇몇 독일군 부대보다 훌륭한 전과를 내었고, 덕분에 롬멜은 이들을 매우 아꼈다. 물론 그런 20군단도 영국군 포화를 맞자마자 도망가버렸다면서 롬멜이 불평할 때가 간혹 있었다.

여기에 중요한 과감한 진격을 할 때마다 연료와 탄약이 크게 모자랐다. 당시 독일 육군 3개 사단에 대해 이탈리아 육군은 6~7개 사단으로, 이들의 총 보급 소요는 독일 육군과 비슷하거나 더 많았다. 그런데 정작 이탈리아 육군의 보급품 운반용 차량은 독일 육군의 절반도 되지 않았고, 그나마 성능도 나빠 고장률이 매우 높았다. 더구나 독일군조차도 차량은 실제 소요의 절반을 조금 넘는 정도밖에 갖고 있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니 진격을 하면 할수록 보급은 점점 어려워졌고, 결국 후퇴의 원인이 됐다. 이런 상황 때문에 롬멜은 언제나 보급에 불만을 제기했으며,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OKW)과 히틀러는 그런 롬멜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소련전으로 병력과 물자가 소모되어가는 마당에도 아프리카 군단에 의외로 많은 양의 보급품을 보내주었다.

설상가상으로 지중해를 장악한 영국의 해•공군의 공격으로 많은 물자가 수장[22][23]된 데다가 하역된 물자의 보급을 담당한 이탈리아 육군의 비효율성, 그리고 사실상 해안가에 놓인 비포장인 단일 도로망에 과하게 의존하는 취약한 보급로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 양의 물자는 절대 제시간에 충분한 물량이 도착할 수 없었다. 결국엔 아무리 강인하고 경험 많은 베테랑 롬멜이라도 거칠고 긴장된 전장 생활과 밤샘 지휘와 업무의 연속으로 인해 심한 질병을 얻어 본토로 간병 차 떠나게 된다. 롬멜은 본디 몸에 베은 규칙적인 군 생활에다[24] 뜀걸음, 산악등반과 승마 등 운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체력을 지녔으나, 북아프리카 사막의 혹독하고 열악한 환경은 그런 강골에게조차도 너무 힘들고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아붙인 것이다. 특히 북아프리카 전역 이전부터 앓고 있던 류머티즘은 롬멜을 심각하게 괴롭혔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그가 아프리카를 잠시 떠난 사이 엘 알라메인에서 영국의 대반격이 시작되고, 급하게 돌아왔던 롬멜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히틀러의 명령마저 무시해버리면서 병력을 최대한 온존하며 퇴각하기 시작한다. 이후 영미 연합군의 모로코 상륙으로 튀니지에 꼼짝없이 봉쇄당해 버렸고, 총통을 직접 만나 병력 증파를 요청하러 독일로 갔지만, 롬멜의 병세를 알고 있는 히틀러의 요구로 그는 요양을 위해 독일에 남게 되고 아프리카 방면군 사령관은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육군 상급대장으로 교체된다. 이는 히틀러 또한 이미 전황의 상태가 결정되었으며, 여기서 전쟁 영웅 롬멜이 포로라도 되면 심각한 위신 손상이 올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아르님 장군 또한 유능하게 분전을 펼쳤으나 결국 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에게 항복한다. 항복 전 아르님은 롬멜이 자신에게 인계하고 간 마무트 장갑차를 직접 소각하며 오열했다고 한다.

2.5. 최후

그 후 롬멜은 잠시 동안 이탈리아 방위사령관을 역임하다가 유럽지역에서 연합군의 상륙을 막는 대서양 방벽을 방어하는 B집단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 때 짧은 시간 동안 임시방편이지만 방어능력을 상당히 향상시켰다.[25] 하지만 이때 롬멜은 어이없는 행동을 하는데, 하필이면 연합군의 상륙 당일 폭풍우가 치는 것을 보고 아내의 생일파티에 참석하러 떠나서 작전 당일 전선이 아니라 본국인 독일에 가 있었던 것.

정말 롬멜이 불운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게, 노르망디는 날씨가 험하기로 유명하여 노르망디 상륙 작전 전날까지 심각한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쳤다. 기상대에서도 6월 6일 당일은 날씨가 매우 안 좋을 것이라 예보했고,[26] 날씨가 이렇게나 안 좋으면 연합군의 상륙이 불가능하다고 현지 지휘관의 대다수가 판단했고, 롬멜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안심하고 아내의 생일파티에 가버렸다. 하지만 일기예보가 틀렸다.[27]

그리고 당시 히틀러를 포함한 수뇌들은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은 벨라루스와 서부 우크라이나의 겨울동안 얼어붙은 땅이 봄철에 녹아 진흙탕으로 변하는 시기가 끝나는 6월 말에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는 소련군의 공세와 보조를 맞추어 실시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이 6월 초에 개시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롬멜의 귀국은 당연히 허가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롬멜의 부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개 당시 독일군 지휘부의 2가지 중요한 문제 중 하나[28]가 되었다.

그리고 사령관 롬멜의 부재 중 B집단군 사령부를 책임져야 할 참모장 한스 슈파이델은 갈팡질팡하다가 이렇다 할 방편을 마련하지 못했고, 연합군의 상륙 이후에도 롬멜은 7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 육군 상급대장과 갈등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돌만 장군의 갑작스러운 자살 이후 공석이 된 사령관 자리에 파울 하우서 SS 상급대장이 임명되는 것을 맹렬히 반대했다. 훗날 독일군이 팔레즈 포위망을 탈출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야전 지휘관이 하우서 장군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잘못된 판단. 그뿐만 아니라 룬트슈테트와 반격작전으로 마찰을 겪었고 한편으로는 히틀러에게 서부전선에서의 불리함을 강조하며 최고사령부와 다시 한번 갈등을 겪는다.[29] 이렇듯 서부 사령부 내에서의 분열로도 부족해 최고사령부 VS 서부 사령부의 갈등이 터지면서 독일군의 야전 지휘체계는 망가졌으며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회상한 말 그대로 인용하면 독일군 장병들은 노르망디에서 공군의 지원 없이 연합군 군대와 힘겨운 전투를 벌였고, 그들에게는 고위 지휘 체계가 무질서해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다만 몽고메리의 회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롬멜과 타 장교들의 갈등이 고위 지휘체계의 무질서함의 원인이라고 매도하기엔 상황이 상당히 복잡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연합군의 군세를 결코 밀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롬멜은 룬트슈테트와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고 연합국과 휴전에 돌입해야 한다'라는 합의점을 도출한다. 이를 늑대굴에 있던 히틀러에게 보고했지만 히틀러는 오히려 화를 벌컥 내며 위치 사수를 명령하고 패배주의에 찌들었다며 룬트슈테트를 날려버린다. 그리고 그 후임으로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귄터 폰 클루게를 임명했다. 헌데 히틀러는 클루게에게 롬멜이 패배주의에 찌들었다고 경고하며 그를 굴복시키라고 명령한다. 클루게는 부임하자마자 7월 3일 서부전선 사령부에 출근하여 휘하 장교들이 모두 보는 가운데 롬멜의 패배를 강하게 비판하며 두 사령관이 또 대판 싸우게 된다. 이후 롬멜은 클루게에게 그의 비난은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고 이러한 비난을 퍼부은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편지를 쓰며 갈등 봉합을 시도했다. 클루게 역시 동부전선에서 야전 지휘관으로 활약한 만큼 직접 전장에 나가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여러 차례 피한 이후 7월 7일 롬멜의 보고가 정확했음을 시인하고 사과한다. 하지만 히틀러는 계속해서 클루게와 롬멜의 정확한 상황보고와 부대 재정비를 위해 노르망디 지역을 포기하고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간언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연합군을 무자비하게 바다로 밀어넣으라고 명령했고 이를 불가하다고 조언하는 롬멜과 클루게를 패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형태가 지속되게 된다. 여기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며 서부전선 사령부는 게슈타포의 수사망에 갇혀 두 사령관이 자살하는 등 문자 그대로 카오스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후 히틀러의 고집으로 진행된 그 어느 서부전선 장교도 찬성하지 않았던 독일군의 공세는 실패하고 미군의 코브라 작전이 성공하며 서부전선의 정예군은 팔레즈 포켓에서 소멸하게 된다.

1944년 7월 17일, 전선 시찰을 나가던 중 연합군 공군기의 공격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30] 영국과 미국의 특수부대가 롬멜 암살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사고로 인해 암살 작전은 취소되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전선에 있던 시절에도 롬멜에 대한 납치작전이 있었으나 실패로 롬멜이 그때도 경미한 부상으로 지휘소에 없어서 피할 수 있었다. 롬멜은 이후 사살된 영국군 특수부대원들을 높이 사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영국군의 납치작전은 대전기 내내 실패하였으며, 크레타 섬 주둔군 22사단장 하인리히 크라이페에 대한 납치만이 유일하게 성공했다.

이후 부상을 치료하던 와중에 발생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관련성이 제기되는데 암살자 그룹의 호파커[31]와 여러차례 미팅이 있었다는 점, 체포된 슈파이델의 애매한 진술, 독일 국방군 중 유일하게 서부전선에서 호응하여 파리 친위대 본부를 습격한 점, 지속적으로 히틀러에게 연합군과의 휴전을 제의했던 것으로 인해 히틀러의 의심을 사고 결국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실제로 롬멜과 클루게가 어느정도 암살작전에 연관되어있는지는 아직까지도 뜨거운 감자이다. 그저 알려진 사실은 암살자 그룹이 영미 연합군들에게 상당히 유명세를 가지고 있는 롬멜을 포섭하려고[32] 수차례 떠보기 위한 미팅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 총통 암살 모의 소식이 들리자 롬멜의 첫 반응은 "감히 총통각하를"이라고 극대노했다는 증언 정도이다.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은 훗날 자신들도 암살자 그룹이 접촉했으나 거부했다고 자서전에 저술했지만 실제로 그룹이 직접적으로 암살 음모에 동참을 제시했는지는 패전 직전 게슈타포의 철저한 증거인멸과 이들의 회고를 입증해줄 음모 핵심 관계자들이 몽땅 처형당하면서 밝힐 방도가 묘연하다. 실제로는 암살 모의가 진행중인걸 알고도 동참을 거부만 하고 신고하지 않았다가 들키면 불고지죄로 숙청 대상이 되기 충분했다. 독일 국방군 보충군 사령관이었던 프리드리히 프롬 역시 이후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암살 모의에서 간보다가 결국 폭탄 테러가 실패한걸 인지한 후에 반란을 진압하는 편에 섰음에도 모의에 한발 걸치고 있었단 이유만으로 사형당했다.

다만, 롬멜에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능성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다. 히틀러는 롬멜과 암살자 그룹의 연관성을 보고받고 난 이후 롬멜에게 자살 옵션과 함께 베를린으로 출두해 이것에 대해 해명하는 옵션도 제공하였다. 다른 장군들이 해명의 기회 없이 즉시 체포-구금-재판 후 처형 루트를 탄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대우였다.[33] 히틀러는 자신과 친분이 있거나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했던 장군들을 해임하거나 좌천시킬지언정 끝까지 처형하지 않았다. 구데리안이 대표적인 케이스. 이외에도 히틀러는 정에 약해 에른스트 룀을 숙청할 때도 그동안 공이 있으니 그만큼은 살려둘 것을 제안했다. 물론 괴링, 힘러 등이 결사반대해서 무산됐지만. 만약 이때 롬멜이 히틀러의 요구대로 베를린으로 출두해 해명했다면, 좌천이나 해임에서 그쳤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롬멜은 출두하지 않았고 이는 히틀러에게 롬멜도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롬멜이 히틀러의 출두 요구를 거부하고 자살을 선택한 것은 후술하겠지만 이미 앞서 여러차례 슈파이델 구명 탄원서, 부상 이전 히틀러와의 면답 요구 거절의 영향과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된 장군들이 이미 모욕적인 재판을 받고 있었기에[34]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할 것이며 이미 한쪽으로는 자살 옵션을 제공한 히틀러가 자신을 만나주기는 커녕 베를린으로 출두하는 자신을 사고로 위장해 죽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롬멜과 히틀러의 친분이 과연 롬멜의 목숨을 보장해주었을 가능성조차 단정하기 어렵다. 이미 롬멜과 히틀러의 관계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노르망디 전역 포기 및 휴전 협상 문제로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다. 롬멜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방어 실패 이후부터 룬트슈테트와 함께 주구장창 히틀러에게 동부전선의 소련군을 막기 위해선 연합군과 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거부했고 해안 방어에 실패한 롬멜과 룬트슈테트를 맹비난한 이후 룬트슈테트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클루게를 앉혔다.[35] 그런 클루게 역시 몇 번 연합군의 공격을 몸소 겪은 이후 롬멜과 동일하게 노르망디 전역 포기를 주장했다. 이때부터 히틀러는 클루게와 롬멜에 대해 이미 의심을 품고 있었고 롬멜 전기인 위대한 3인의 전사들에 따르면 부상당하기 직전 늑대굴에서 있던 롬멜의 보고 자리에서 노르망디에서의 퇴각과 서방 연합국과의 휴전을 주장하려는 롬멜에게 ''원수! 당장 이 방을 나가시오!' 라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히틀러의 이러한 불신과 불만은 7월 21일 암살 미수사건 발발과 게슈타포의 서부전선 사령부 참모부 곳곳에서 발견한 검은 오케스트라단과의 연관성 보고를 증폭시켰고 의심을 받던 클루게는 자살로 자신의 결백과 충성심을 호소했다. 클루게조차도 총통의 의심에 모가지가 날아가던 상황에서 게슈타포와 독일 검찰의 수사는 모두 롬멜이 암살단에 연루되었음을 가리키고 있었고[36] 무엇보다 출두 옵션과 함께 모든 명예를 보장하는 자살 옵션을 제시했다는 것부터 총통은 롬멜의 해명과 이를 증명하기 위한 법정 싸움이 아닌 롬멜의 깔끔한 자살을 원했다는 뜻이며 총통 경호대에서 복무한 롬멜은 그 누구보다 이러한 총통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1944년 10월 14일, 히틀러는 SS를 동원해 그의 자택을 은밀히 포위하고 연락선도 차단한 다음 국방군 인사처장 빌헬름 부르크도르프와 국방군 전쟁해군 해전지휘부장 빌헬름 마이젤을 보내 베를린으로 출두해 자신을 변호하든가 명예롭게 죽든가 두 가지의 선택권을 강요했다. 국민적 영웅인 그가 암살에 관련되어 재판과 처벌을 당하는 것은 정권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절대 좋지 않다고 여겨 자살을 선택할 경우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고, 공식적으로는 영웅의 죽음으로 국장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전술했던 이유로 어차피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며 베를린으로 출두하는 과정에 사고사로 위장한 암살을 당할 것이라고 확신한 롬멜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두 번째 선택지를 택했고, 아내와 아들에게 그의 결심을 설명하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후[37] 아프리카군 원수 정복을 차려입고 SS 장교가 탄 메르세데스 차량에 동승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나섰다. 롬멜은 헤를링엔과 울름을 연결하는 언덕길에서 동승한 빌헬름 부르크도르프의 지시에 따라 청산가리 캡슐을 음독하였고 그의 시신은 짜여진 각본대로 병원으로 이송된 뒤 게슈타포의 감시 하에 사인이 심장마비로 처리되었다.
마이젤 장군이 나를 차에서 내리게 해 같이 언덕길을 계속 걸어 올라갔다. 약 5분 뒤 부르크도르프 장군이 마이젤 장군과 나를 다시 차로 불렀다. 롬멜이 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분명히 죽어가고 있었다.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며 앞으로 쓰러졌다.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그의 군모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를 바로 앉히고 군모를 다시 머리에 씌워주었다.
에르빈 롬멜이 자살할 당시 해당 차를 담당한 운전병 하인리히 도제의 증언[38]

이후 장례는 약속대로 국장으로 치러졌고 룬트슈테트가 추도식을 주도했으나,[39] 히틀러를 포함한 나치 고관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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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의 데스마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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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차에 연결되어 운구되는 롬멜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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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의 묘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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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롬멜이 아프리카 전선에서 쓰던 고글은 독일국방군 정식 보급품이 아닌 영국군의 방풍 고글을 노획한 것이라 한다. 당시 아프리카군단 병력들은 사막의 모래바람을 방독면을 써서 막았다고 한다.

대외적인 대인관계는 어쨌던 간에 가족에게는 자상한 인물이어서, 아내에 대한 사랑도 지극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에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러 간 게 그 예인데, 연합군 상륙 보고가 들어올 당시 집에 있던 롬멜은 잠옷 바람으로 아내에게 줄 깜짝 선물을 숨겨두느라 끙끙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선에 있을 때도 아내한테 "사랑하는 루셰에게"로 시작되는 편지를 보냈다. 그중 한 통이
사랑하는 루셰에게. 상륙 후 어떤 장애도 받지 않고 쾌진격을 거듭하고 있소. 아군의 사상자는 극히 경미하며 포로나 전리품은 셀 수도 없소. 기쁨에 밤잠을 못 이루는 내 마음을 당신도 알 거라 생각하오.
덕분에 후세 역사가들은 당시 아프리카 군단의 자세한 상황과 더불어 롬멜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런 지극한 사랑은 친아들 만프레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프레트가 수학을 잘한다니 참 기특하다."라는 내용의 편지가 지금도 남아 있고 이에 더해서 사생아 게르트뤼트에게도 나름대로 정을 보였다. 그래서 일부 역사가들은 "롬멜이 군인으로의 삶 외에 애정을 가진 대상은 아내와 아들뿐"이라고도 평한다.

다만 이는 전후에 롬멜 관련 서적이 많이 출간되면서 널리 알려진 사실일 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대부분의 독일군 장성들이 집으로 보낸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담겨 있다.[41] 특히 아들의 나이가 아직 20대가 아니어서 군에 입대하지 않은 소년인 경우는 그러한 내용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처럼 20대의 장성한 아들이 같은 전선에서 종군하고 있는 경우에도 아버지로서의 애정은 매우 지극하다. 그리하여 종전 후 상당한 시간이 흘러 이러한 일선의 장교들이 집으로 보낸 편지에는 전선의 상황이 상당히 직접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중요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괴벨스가 상당한 양의 편지를 검열 후 압수하기도 했지만, 무사히 가족들에게 전해진 편지들을 보면 아내와 자식, 부모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으며 '승리 이후의 평화'를 간절히 기원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다. 수도 없이 언급된 말이지만, 롬멜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는 연합군 장교들도 마찬가지다.

그의 아들인 만프레트 롬멜은 1944년 루프트바페 방공포병 보조원으로[42] 근무하다 대체복무 국가노동자단에서 종전시까지 병역을 마쳤고, 이후 20년간 슈투트가르트 시장으로 재직하였고, 과거의 적국이었던 프랑스로부터 우호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도 받았다. 그 이유는 어찌되었건 롬멜은 히틀러가 죽였으며, 영미 연합군과의 전투는 동부 전선에 비하면 굉장히 신사적이었기 때문에 연합군 측의 주요 인물에게 호감을 샀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용해서 만프레트 롬멜은 십대 소년 시절부터 열심히 아버지의 변호를 했고, 그게 먹혀들기도 했다.[43] 다만 만프레트는 결국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80년대에 그를 만난 전사학자는 만프레트가 아버지 롬멜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상당히 부담스러워하고 어쩔 수 없어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워낙 유명한 장군이다 보니, 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여러 서적이 번역 출간되었다. 한국에는 롬멜의 일기와 회고를 롬멜의 아들 만프레트와 리델 하트가 엮은 《롬멜전사록》이 번역되었으며 작정하고 '롬멜을 이해하기 위해 쓰여진 책'으로 필립 마우리체 레미의 《롬멜》이 있다. 기타 다른 책이 있긴 하지만 참고문헌이 빈약하거나 일방적인 롬멜 찬양 수준이거나 해외보다 국내에서 많이 팔린 서적이다. 해외에서의 최신 연구를 반영하여 롬멜 비판을 제대로 다룬 책은 국내에 없다시피 하며 《 전격전의 전설》이나 《보급전의 역사》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롬멜의 부정적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패튼 몽고메리, 롬멜을 함께 다룬 책인 <<위대한 3인의 전사들>> 모두 읽어보길 권한다. 위대한 3인의 전사들의 경우 크림 전쟁 경기병의 돌격에 대한 저서로 유명한 테리 브라이튼의 저작으로 특별히 한쪽으로 치우쳐져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44]

『패튼과 롬멜』, (일조각, 2012)이란 말 그대로 패튼과 롬멜을 다루는 책이 출간되었다. 저자인 데니스 쇼월터는 영미권 군사학계에서 독일군 관련 연구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는 학자인데, 본서는 롬멜을 비롯한 독일군 지휘관들의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인 2005년에 출판된 책인 만큼 롬멜에게 상당히 우호적이다.

2012년 독일 ARD 방송국에서 그에 관한 TV 영화가 제작되었다. 꽤 공들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 살펴보자. 이 영화는 후에 CNTV에서 더빙판으로 방송된 적이 있고, 2020년 05월 기준 유튜브에 자막이 달린 영화가 등록되어 있어 원한다면 감상할 수 있다. 유튜브 검색창에 롬멜이라고 입력하면 상위에 나온다.

롬멜에 관한 일화. 영국군 기관총 진지에 돈좌된 독일군 분대장을 누군가 뒤에서 두들기자 분대장이 돌아봤는데 롬멜이었다. "지금 여기서 뭘 하나?", "적 기관총 진지에 고전 중입니다." 그러자 롬멜은 상체를 내밀어 기관총 진지를 살펴보더니 "별 거 아니군. 당장 돌격해 제압하라." 잠시 후 독일군 분대는 고함을 지르며 기관총 진지로 돌격했고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이 그 진지를 제압했다.[45]

다른 유명한 야사로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미군의 노획품을 점검해보니 보급품에 모자란 것이 없었고, 심지어 한 미군 병사가 어머니로부터 배달받은 신선한 초콜릿 케이크까지 있어서 미군과의 전쟁에서 희망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군의 뛰어난 보급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명한 이야기라 '벌지 대전투' 같은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내용인데 이런 류의 이야기들이 그렇듯 출처는 불명이다. 롬멜이 미군과 북아프리카에서 제대로 교전한 건 카셀린 협곡의 전투뿐이며, 곧 보직에서 해임됐기 때문에 미군의 보급이 월등하단 걸 체감했을 공산은 미비하다.[46]

롬멜에 관해서는 한 가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롬멜의 황금", 혹은 "롬멜의 보물"이 그것.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재직하던 시절, 유대인들에게서 각종 귀금속과 역사 유물들을 약탈했고 이것을 사하라 사막이나 코르시카섬 어딘가에 숨겼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지금도 이 이야기를 믿는 보물 사냥꾼들이 일대를 뒤지고 다닌다. [47]

롬멜이 총애했던 군인인 한스 폰 루크의 자서전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의 내용에서 1943년 한스 폰 루크가 북아프리카의 군대를 후퇴시키려는 작전의 승인을 위해 구데리안을 포함해 알베르트 케셀링, 루돌프 슈문트 등 여러 장성의 사인을 받으려 돌아다닐 당시 구데리안의 제안으로 퓌어 야레스자이텐 호텔에서 롬멜과 구데리안의 회동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의 롬멜(Unser Rommel)이라는 아프리카 전역에서의 활약을 선전하는 군가가 있는데, 원본은 유튜브의 정책으로 검열당하기 때문에 악기 버전만 남아있다. 알트센서드 백업본이 존재한다.

독일군 구축전차 야크트판터 롬멜습격포전차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전차 이름을 제멋대로 붙이던 초창기 타미야에서 야크트판터 프라모델을 출시할 때 롬멜 전차라고 이름을 븥였고, 한국에서 카피판을 출시할 때도 이 이름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 야크트판터는 롬멜이 맡던 북아프리카에 투입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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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미야의 롬멜 전차 키트

5. 대중매체에서

6. 주요 보직 내역

7. 진급 내역

8. 주요 서훈 내역

9. 어록

세상이 널 버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세상은 널 가진 적이 없다.[50]
하나의 철십자 훈장보다는 한 대의 전차와 기름을 다오!
기사란 옷과 칼은 피로 물들어도 마음은 순백의 상태를 유지한 자, 그 자가 바로 기사다.
전쟁 중에는 군사의 사기가 중요하다. 만 대의 자주포[51]가 있다 하더라도 군사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다면 그것은 패배다.
부하에게 필사의 신념을 가지게 하는 것은 쉽다. 승리의 기회를 많이 경험시키면 된다.
모험을 시도하라. 그러나 도박은 하지 말라.
용기있게 행동하라! 불운하다면 불행에 맞서라.
자기 인생은 스스로 연출해라.
땀은 쏟아도 피는 쏟지 마라.
생각이 많아지면 용기는 줄어든다. 적당한 생각은 지혜를 주지만 과도한 생각은 나를 겁쟁이로 만들 뿐.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잡념이다.
일대일 전투에서는 총알이 하나라도 더 많은 쪽이 승리한다.[52]
루크! 자네가 내 말을 꼭 기억해 주기를 바라네. 우리 국민만이 아니라 유럽에 위기가 닥치고 있어. 동쪽으로부터 말일세. 유럽 민족이 뭉치지 않는다면, 언젠가 위기가 현실이 된다면, 서유럽은 초토화가 되어갈 거야. 요즘 내 생각건데 하나로 단결된 유럽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위인'은 말일세... 처칠이야.
롬멜과 함께 전선에서 293 쪽.[53] 북아프리카 전역 당시 제 21기갑사단의 휘하 참모이자 제자 한스 폰 루크에게 냉전시대 북대서양 조약 기구 유럽 연합의 탄생, 전면 핵전쟁 위기의 공포를 예언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그가 루크에게 예언한 대로 세계는 동서 냉전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고, 전면핵전쟁 위기가 감돌게 되었으며,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창설해 서방에 대적하려 했고, 이에 서유럽은 NATO를 창설해 롬멜의 예언대로 유럽 민족이 뭉쳐 동쪽으로부터의 위기에 맞섰고, 서독은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최전방이자 나토의 한 주축이 되었다. 롬멜이 루크에게 개인적으로 예언한 위기가 현실이 된 셈. 하지만 서방 국가들이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결성해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대치한 결과 전쟁이 날 경우 끝내 서로 공멸을 우려해 대치만 하다 21세기를 맞이했으니 불행 중 다행. 처칠도 롬멜을 적장임에도 높이 평가했고 롬멜도 처칠을 고평가한 것이 재밌는 점이다.

10. 저서


[1] 표준 독일어에서는 한 형태소 안에서 철자상으로 중복되어 쓰는 자음이라도 따로 구별해서 발음하지 않는다. 앞 모음의 장음 여부에 영향을 줄 뿐. 그래서 실제 발음은 로멜에 가깝고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 용례에서도 로멜을 올바른 표기로 기재해 두고 있지만, 롬멜이란 발음을 사용하는 게 보편적인 상황이다. 심지어는 로멜로 바르게 정정해도, 롬멜이 맞다면서 로멜을 잘못된 발음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많아서 로멜에게 원래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은 지극히 요원한 실정이다. [2] 곰TV MSL S1에 사용되었던 스타크래프트 1의 맵 데저트 폭스는 이 별명에서 따 온 이름이다. [3] 당시 독일 장교들에게 보병은 평민 출신이나 이름 없는 가문의 출신들이나 가는 기피병과로 인식되었다. 규모가 가장 큰 탓에 봉급도 가장 적었으며, 롬멜의 예와 같이 기병, 포병에 떨어진 장교 후보생이 마지못해 가는 병과였다. 여담으로 기병과 포병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훗날 전쟁양상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전장에서 가장 활약을 많이 하는 것은 보병이었고 자연스럽게 군 최고 자리는 보병 출신들이 차지하게 된다. [4] 독일 제국은 군인이 결혼시 큰 돈을 요구했는데 당시 롬멜은 이를 감당할 능력이 안되어서 전역후 결혼과 복무 중에 고민하다가 복무를 택했다. 이후 발부르가는 1928년 루셰 마리아가 롬멜의 아들을 낳자 자살했다. [5] 이때 부상을 입은 사연이 좀 골때리는데, 숲에서 적과 교전하던 중대장 롬멜이 적 보병 5명을 맞닥뜨리자 2명을 사살하고 즉시 엄폐한 후 다른 병사들에게 지원을 요청해도 듣지 않자 총검술을 해서 3명을 처치하려다가 넓적다리에 부상을 입고야 말았다. [6] 1개 대대 정도의 병력으로 적의 방어선 심층부까지 돌격해 이탈리아군의 전의를 박살내 5개 연대를 포로로 잡았다. [7] 데니스 쇼월터의 "패튼과 롬멜"에는 그 귀족 장교가 페르디난트 쇠르너로 나온다. [8] 푸르 르 메리트 서훈자였으므로, 일반참모를 양성하는 전쟁대학에 입학 추천을 받았지만 거절하였다. 덕분에 롬멜은 페르디난트 쇠르너와 함께 몇 안되는 ‘일반참모 출신이 아닌 원수’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9] 아이러니하게도 후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 시에 독일 기갑군은 제공권을 빼앗겨 장기이던 신속한 운영을 하지 못하고 제 때 방어하는 데에 실패한다. 롬멜의 측근 중 하나였던 한스 폰 루크의 자서전(롬멜과 함께 전선에서)에 따르면, 당시 독일군의 해안방어 주력지점은 다른 곳이었고, 노르망디에 상륙했다는 걸 알자 마자 후방 60개 사단을 동원하여 방어하려 했으나 수일간 떨어진 지옥같은 포격과 항공폭격에 발이 묶여 기동조차 할 수 없이 상륙 교두보가 확장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고 한다. [10] 말 그대로 휘하 연대장과 중대장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미친 수준의 기동을 강요했다. [11] 연대본대보다 롬멜이 직접 이끄는 서너대의 전차가 전선에 돌진하여 돌파하거나 재정비한다고 쉬는 부대가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와 공격을 명했다. [12] 대표적인 예로 구데리안은 휘하 부대에게 각성제를 적극적으로 공급하였고 이에 힘입어 쉬지 않고 스당을 돌파했다. [13] 다만 이를 롬멜만이 그렇다고 보기 어려운데 스당 전투 당시 제 1기갑사단의 도하 1파였던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와 제 1보병 연대 모두 1파 제대장이 선두에 섰으며 구데리안 역시 선두 대대가 도하를 마치자 마자 2파 제대와 함께 마스강 도하를 실시하며 일선에서 지휘를 하였다. [출처] 전격전의 전설 [15] 이런 사기가 연달아 성공할 수 있던 이유는 당시 프랑스 육군은 통신도 개판이었고 상황 전파도 개판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 육군의 장군이 갑툭튀해서 “항복하라!” 하니까 상식적으로 적 장군이나 되는 자가 아무 대책없이 왔을 리가 없으므로 “어, 우리 포위된 건가?”라 생각하고 항복해버린 것. [16] 진짜 대공사격만 하는 대공포는 대공사격 전용 탄만 쓸 뿐 철갑탄은 전혀 쓰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철갑탄은 장갑을 두른 표적에 피해를 주려고 쓰는 건데, 항공기가 장갑을 두르는 경우는 없다. [17] 영국군 사령관 웨이벌은 병력 차출에 대해 군사적으로 어리석은 행위라고 반대했지만, 처칠은 그리스를 지키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기어코 강행했다. [18] 이 소식에 독일 육군 참모본부는 문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다. 참모부에서는 북아프리카 군단 본대까지 도착하여 완벽한 전력을 갖추고 수비를 하다가 영국군을 리비아 바깥으로 몰아내길 원했는데 롬멜이 이 명령을 생까고 닥돌했으니 참모부 입장에서는 1940년 5월의 악몽 시즌 2 그 자체였다. 아예 나중엔 사막 폭풍 때문에 롬멜이 진격을 하지 못했다는 소식에 통쾌해할 정도로 롬멜의 돌격은 직관적인 동시에 대책이 없었다. [19] 원래 유럽에서 독일군의 레이션, 즉 야전 식사류는 감자, 그리고 소시지 등의 육류였다. 그러나 사막에서 이런 식품들은 변질이 쉬웠기에 딱딱한 비스킷 정어리 통조림 및 이탈리아제 쇠고기 통조림이 주를 이루었으며, 고기 통조림 또한 질긴 힘줄이 대부분을 차지한 저급 통조림이었다. 특히 비타민이 너무나도 부족하여 민가에서 귀한 과일을 교환해서 얻어오거나 연합군 보급품을 노획하여 보충하였다. 한스 폰 루크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의 남방 작전으로 말라리아 약 부족에 시달리던 영국군과 교환하기도 했다고 한다. [20] 그렇지만 이는 한편으로는 그의 건강을 해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청년 때부터 군 생활을 해 온 직업군인들인 장군들은 청년들인 병사들보다 20~30살은 더 연상인 부친뻘이다 보니 병사들이 취식하는 똑같은 야전 식사는 장기간 동안 자연히 몸에 부담이 된다. [21] 롬멜이 그에게 가까이 있는 적은 사실상 피자 배달부 같은 애들이니 철수한 거나 다름없다고 하자 롬멜을 너무 믿은 나머지 부대도 아닌 차 한대로 달려간 것이다. 그것을 본 아군이 말리려 했지만 그냥 닥돌했고, 이윽고 적진에서 요란한 총성이 들렸다고 한다. [22] 롬멜과 함께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종군한 한스 폰 루크의 자서전(롬멜과 함께 전선에서)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기갑부대 보급을 위한 유조선 10척이 출발하면 영국 해군에 의해 모조리 수장되고 1~2대만 도착할 정도로 보급 사정이 극악이었다고 한다. [23] 이시기 영국군은 에니그마를 해독한 상태였고 롬멜의 보급 요청서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보낸 수송대의 일정은 매일 아침 처칠의 책상으로 배달되고 있었다. [24] 전쟁 전 롬멜은 항상 06:00 정각에 먼저 기상하여 연병장에서 구보를 뛰어 다른 장교들에게 모범을 보였다는 주변 증언들도 있다. [25] 다만 여기서 연합군의 상륙 지점을 칼레쪽으로 잘못 예측했다. 다만 이건 롬멜만의 잘못은 아니었는데 독일군 참모부도 도버를 출발한 연합군이 칼레 해변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기 때문. 오직 히틀러만 연합군 놈들은 못 믿는다며 노르망디라고 정확하게 예측해버렸다. [26] 실제로 연합군도 작전이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하고 연기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으나 다행히 5일 날씨가 개기 시작해서 일정대로 진행이 되었다. [27] 훗날 롬멜의 부관에 의하면, 연합군의 상륙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환하면서 롬멜은 연신 "내가 어리석었어, 어리석었어!"라고 크게 분노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출처 [28] 나머지 하나는 히틀러가 늦잠을 자느라 히틀러 직속 명령으로만 이동할 수 있는 기갑사단이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29] 이 시점에서 히틀러와 롬멜의 관계도 크게 악화되는데 롬멜, 몽고메리, 패튼을 다루는 위대한 3인의 전사에 소개된 이야기에 따르면 롬멜은 히틀러에게 계속 강화를 요청했고 아예 나중엔 히틀러에게 내 앞에서 당장 사라지라는 폭언을 듣기까지 한다. 그래도 포기를 모르는 롬멜은 계속해서 편지로 강화를 주장했지만 보어만 선에서 다 짤렸다고. 다만 해당 서적의 1944년 롬멜 부분은 롬멜 신화를 정립한 이들의 증언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기도 하다. [30] 스핏파이어라는 설도 있고 타이푼이라는 설도 있으나 독일측 목격자는 스핏파이어라고 증언했다. 일단 롬멜이 공습받은 지역에서 영국과 캐나다 공군의 스핏파이어가 독일군 차량에 기총소사를 가했던 것은 사실이다. [31]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의 주역이었던 슈타우펜베르크 백작과 친척관계였던 공군의 호파커 중령은 암살 미수 이후 체포되어 프라이슬러에게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32] 히틀러와 나치 수뇌부를 제거한 후에 연합군과 협상하기 위한 얼굴마담으로써 필요했다. [33] 단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연루되어 처형된 대부분의 장군들은 롬멜과 달리 확실히 암살단에 가입되어 있었거나, 오스터 암살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등 혐의점이 명확했기에 롬멜과 동일 선상에 두는 것은 옳지 않다. [34] 말이 재판이지 오늘날 북한의 인민 재판과 다를게 없었다. 피고인들은 유죄로 확정지어진 상황에서 배심원들과 판사, 검사들은 감히 총통을 암살하려고 했다며 온갖 인신공격을 쏟아냈다. [35] 이때 클루게를 그냥 앉힌게 아니라 롬멜과 서열 정리를 명확하게 해주지도 않은 상태였고 롬멜이 패배주의에 빠져있다고 말해 두 사령관간의 싸움을 유발했다. [36] 단 어디까지나 암살단과의 접촉이 있었다라는 것과 슈파이델은 검은 오케스트라단이 맞다 라는 것이지 롬멜이 검은 오케스트라단이었다 라는 뜻은 아니었다. [37] 만프레드 롬멜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롬멜은 연합군과의 강화 필요성을 역설하며 소련군의 위험을 경고했고 다가오는 소련과의 전쟁에서 유럽을 살릴 수 있는 지도자는 처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만 만프레드 롬멜은 아버지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생전 아버지의 행적을 변호하고 다녔기 때문에 정말로 롬멜이 아들과 최후의 대화에서 처칠을 높게 평가하며 차기 유럽의 지도자로 언급했을지는 의문이다. [38] 출처: 위대한 3인의 전사들 P511 [39] 룬트슈테트는 사적으로 롬멜과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고, 오히려 전통적인 융커 출신도 아닌 롬멜이 히틀러의 총애 덕분에 국방군 원수까지 올라온 것에 불만이 아주 많았기에 추도사는 그저 사무적이었다고 한다. [40] 히틀러가 자신이 직접 임명한 원수의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히틀러가 롬멜이 자신의 암살에 관여했다고 믿었으며 롬멜이 출두를 선택하여 해명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옳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히틀러는 군부와 친위대의 장성들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장성들의 장례식에 꼬박꼬박 참여했다. [41] 당연하지만 이건 일반, 말단 병사들도 예외가 아니라서, 전투 후 연합군들이 독일군 시신들을 조사할 당시 그들의 주머니나 품 안에는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고향에 있는 가족들 사진, 혹은 아직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가 가득했다고 한다. 사실 이렇게 강조할 필요도 없는 서술인 게, 개막장 부모나 패륜아가 아니고서야 죽음과 피가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가장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가족과 징병 이전에도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인 것이 당연하다. [42] 나치의 탁월한 거짓 선동을 믿어온 그 당시 청년들 답게 무장친위대에 근무하기를 희망했으나 아버지인 롬멜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43] 정작 롬멜 부인은 '뷔르템베르크의 아들은 결코 반란을 역모하지 않는다.'며 남편이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다는 주장을 적극 부인하였고, 롬멜 신화 정립에 앞장선 한스 슈파이델을 배신자라 칭하며 만나지 않았다. [44] 가령 롬멜이 총통 경호대 소속이었던 점, 롬멜이 얼마나 열렬히 나치를 찬양했고 히틀러 유켄트 단장의 연락장교로 파견되었을 때 유대인 문제를 포함한 나치당 강령 교육을 받은 것을 모조리 적어두었다. [45] 출처: 리더스 다이제스트. [46] 다만 알람 엘 할파에서 독일군이 영국군의 수비에 제지되어 고생할 때 히틀러를 만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영국이 모든 면에서 독일군을 압도한다고 말한 기록은 있다. 이때 공군이 진다는 것을 참아넘길 수 없던 괴링이 끼어들어 '미국은 면도날이나 만드는 나라'라고 하자 롬멜이 우리는 그 면도날이 필요하다라고 받아친 것이 그것이다. 정작 괴링이 미국을 무시하면서 언급한 면도날마저도 꽤나 고수준의 공업기술을 갖춘 나라만 제작 가능한 물건이다. [47] 동쪽에도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이 비슷한 짓을 했다는 "야마시타 골드" 도시전설이 있다. 롬멜과 야마시타가 모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전쟁 범죄에 관여된 바는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묘한 일이다. [48] 주변에 있던 장병들이 웅성웅성거리길 "저 맘모스는 어디서 난 거래?", "노획한 영국군 트럭 개조한거래", "어떻게 개조하면 저리 되냐". [49] 단 미쓰루누루오도의 경우 롬멜, 율리우스 카이사르, 셜록 홈즈를 결합시켜 만들었다고 한다. [50] 가장 유명한 말이다. 그리고 에르빈 롬멜의 삶은 철저하게 이 말대로 흘러갔다. [51] 사족이지만 착각하면 안 되는 게 당시 자주포는 그냥 전차였다. [52] 비슷한 말로 " 백병전에선 총알 남은 사람이 이긴다"가 있다. [53] 루크가 롬멜에 대해 저술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