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d0000, #d40000 20%, #d40000 80%, #cd0000); color: #ffe4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e400> 육해군인민위원 (1917-1934) | ||||||
<rowcolor=#ffe400> 초대 | 제2대 | 제3대 | |||||
평의회 |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 | 레프 트로츠키 | |||||
<rowcolor=#ffe400> 제4대 | 제5대 | ||||||
미하일 프룬제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e400> 국방인민위원 (1934-1946) | 해군인민위원 (1937-1946) | |||
<rowcolor=#ffe400> 초대 | 초대 |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 표트르 스미르노프 | ||||||
<rowcolor=#ffe400> 제2대 | 제2대 | ||||||
세묜 티모셴코 | 표트르 스미르노프스베틀롭스키 | ||||||
<rowcolor=#ffe400> 제3대 | 제3대 | ||||||
이오시프 스탈린 | 미하일 프리놉스키 | ||||||
제4대 | |||||||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e400> 군무인민위원 (1946) | |||||
<rowcolor=#ffe400> 초대 | |||||||
이오시프 스탈린 | |||||||
<rowcolor=#ffe400> 군무장관 (1946-1950) | |||||||
<rowcolor=#ffe400> 초대 | 제2대 | 제3대 | |||||
이오시프 스탈린 | 니콜라이 불가닌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e400> 전쟁장관 (1950-1953) | 해군장관 (1950-1953) | ||
<rowcolor=#ffe400> 초대 | 초대 |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이반 유마셰프 | ||||||
<rowcolor=#ffe400> 제2대 | |||||||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e400> 국방장관 (1953-1991) | |||||
<rowcolor=#ffe400>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니콜라이 불가닌 | 게오르기 주코프 | 로디온 말리놉스키 | 안드레이 그레치코 | ||||
<rowcolor=#ffe400>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 세르게이 소콜로프 | 드미트리 야조프 | 예브게니 샤포시니코프 | }}}}}}}}} |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7대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Дми́трий Я́зов | Dmitry Yazov |
|||
본명 |
드미트리 티모페예비치 야조프 Дми́трий Тимофе́евич Я́зов Dmitry Timofeyevich Yazov |
||
출생 | 1924년 11월 8일 | ||
소련
러시아 SFSR
옴스크현 칼라친스크구 크레스티나읍 야조포 (現 러시아 시베리아 연방관구 옴스크주 오코네시콥스키군 야조포) |
|||
사망 | 2020년 2월 25일 (향년 95세) | ||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연방시 | |||
묘소 | 러시아 연방 현충원 | ||
재임기간 | 제7대 국방장관 | ||
1987년 5월 30일 ~ 1991년 8월 28일 | |||
서명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
아버지 티모페이 야코블레비치 야조프 어머니 마리야 페도시모브나 야조바 |
|
배우자 |
예카테리나 표도로브나 주라브레바[1] (사별) 엠마 예브게니예브나 야조바 (재혼) |
||
자녀 |
장남 이고르[2] 장녀 라리사[3] 차녀 옐레나[4] |
||
학력 |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보병학교[5] 프룬제 군사대학 소련군 총참모부 사관학교 |
||
복무 | 노농적군 | ||
1941년 ~ 1946년 | |||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 |||
1946년 ~ 1991년 | |||
러시아 연방 지상군 | |||
1991년 ~ 1994년 | |||
최종 계급 | 원수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 ||
주요 참전 |
독소전쟁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
주요 서훈 |
10월 혁명 훈장 러시아 연방 명예훈장 레닌훈장 (2회) 적기훈장 (3회) 적성훈장 조국전쟁 훈장 1등급 샤른호르스트 훈장 |
}}}}}}}}} |
[clearfix]
1. 개요
소련군의 마지막 원수,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국방장관을 지냈다.2. 생애
2.1. 유년기
1924년 11월 8일 소련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옴스크현의 야조보에서 티모페이 야코블레비치 야조프와 마리야 페도시예브나 야조바의 네 자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
모스크바 보병학교 생도 시절 야조프 |
야조프는 독일군을 죽였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는 거기에 “독일인을 죽인 것이 아니라 파시스트들을 죽인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전선에서 야조프가 후회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전선을 뚫고 후방으로 이동하던 그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병사들이 보았다. 야조프는 병사들에게 얼굴이 헬멧 밖으로 튀어 나올 지경이라며 화를 내자 늙은 이등병이 다가와 “아들아, 우리 모두 굶주림으로 얼굴이 퉁퉁 부었어. 우리는 일주일 내내 포위되어 싸웠거든.”라고 말했고 야조프는 사과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조국을 위하여, 스탈린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며 부대원들을 공격에 참여시켰다. 야조프는 자신이 자란 이상과 원칙에 영원히 충실했으며, CPSU의 XX 대회 이후에도 자신의 견해와 신념을 바꾸지 않았다. 야조프의 생각은 스탈린은 때때로 틀릴 때도 있지만 “국가와 군대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가 항상 옹호했던 야조프의 또 다른 영웅은 게오르기 주코프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승리의 원수가 내린 명령을 '어택땅'으로 비난한 최전선 작가들을 멍청하다며 야조프는“인명 손실이 없는 전쟁이 있을까? 라며 주코프가 정말로 무능하게 싸웠다면 왜 주코프는 독일 제국의회에 승전기를 걸고 히틀러는 크렘린궁에 걸지 않았을까?"라고 반문했다.
야조프의 생각에 적군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을 “독일군의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중상모략가들이 너무 많았다. 야조프는 그러한 주장을 “거짓일 뿐만 아니라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리더십 자질과 군사적 기량, 개발 능력이 주목받고 인정받아 소련에서는 앞으로도 야조프같은 사람이 필요할 것이라 판단, 1943년 3월 지휘관 향상 과정에 입학하여 1944년 1월까지 공부했다. [6] 전쟁으로 인해 중대를 지휘하던 수많은 중간급 지휘관들이 전멸했고,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간급 지휘관인 그가 진급한건 야조프는 어느 정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야조프는 항상 5월 9일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로 여겼다.
2.2. 장군 생활
1953년에 소령으로 진급한 야조프는 같은 해,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고등학교 교육을 마치고 졸업장을 받았다. 이후 1963년 6월, 바실리 추이코프 원수의 개인적인 요청에 따라 동력 소총 연대의 사령관인 대령으로 임명되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1963년 10월까지, 야조프와 그의 부대는 미국의 침공에 대비해 총력전을 펼쳤으며, 그의 부대는 비밀리에 리버티 섬으로 이동했다. 소련이 쿠바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한 작전은 "아나디르"라는 코드명 아래 철저히 비밀로 진행되었고, 야조프 역시 소련을 떠난 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1965년, 야조프는 러시아 합동군사참모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사단장, 군단장, 육군사령관, 극동 군사 지구 부사령관, 중앙아시아 군사 지구의 체코슬로바키아 중앙군 사령관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 1984년에는 하바롭스크로 복귀하여 극동 군사 지구의 질서를 재정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극동 지역에서의 야조프의 복무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일부 군인들은 그가 기강을 바로잡고, 부대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병사들의 생활 환경을 세심히 점검했던 점을 긍정적으로 회상했다. 반면, 다른 이들은 그가 부하들에게 오만하고 가혹하게 대했다고 불평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극동 군사 지구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 낙후된 지역으로 평가되었으며, 야조프는 이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지휘관들의 잦은 휴가를 탐탁지 않아 했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떠나지 않는 것을 중시했다.
하바롭스크에서 근무하는 동안 야조프는 극동 지역에 대한 애정을 키워갔다. 그는 김일성을 존경했으며, 상하이 시장이었던 장쩌민에 대해서도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 장쩌민은 러시아 노래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존경하는 서방 정치인으로는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였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철의 여인"이라 불린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를 꼽았다.
야조프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이반 트레티아크 장군의 뒤를 이어 극동군 사령관으로 취임했으며, 군대 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2.3. 고르바초프 시기
1980년대 중반, 야조프는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198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을 때 그는 크렘린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1986년 초, 그는 자신의 지휘관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페레스트로이카에 반대하지 않은 이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질타했다.1987년 1월, 야조프는 국방부 주요 인사 부서의 책임자로 모스크바로 전출되었다. 그는 거의 반세기 만에 원수 계급이 없는 최초의 군부 수장이 되었으며, 원수 계급은 1990년에야 수여되었다. 과거에는 전선이나 대규모 군대를 지휘한 인물들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야조프는 소대장 출신으로서 이 자리에 올랐다. 고르바초프는 당시 "때 묻지 않은 신선한 인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야조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그를 선택했다.
국방부 장관으로서 야조프는 고르바초프가 유엔에서 50만 명의 병력을 일방적으로 감축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군비 감축과 관련해서도 침묵을 유지했지만, 내심 미국과의 양보에 대해 불만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야조프는 인터뷰에서 이러한 감정을 밝히며 자신의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고르바초프는 그의 우려를 감안하여 야조프를 외무부로 전출시켰다.
2.4. 8월 쿠데타
소련의 몰락이 점차 가시화되던 시기, 소련 곳곳에서 분쟁이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1989년 4월 9일, 조지아 트빌리시에서는 정부 청사 앞 야당 집회를 군인들이 강제 해산하려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의 책임자로 야조프가 지목되었다. 또한, 1991년 1월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발생한 TV 센터 유혈 사건과 관련해서도 그는 반인도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야조프는 두 사건 모두에서 자신의 관여를 부인했다.
|
국방장관 재임 당시의 모습 |
야조프는 소련 붕괴의 원인으로 보리스 옐친을 지목하며, 옐친이 러시아 연방 법을 소련 법보다 우선시하고 특권 체제를 비판하며 모든 이를 기만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에 대해서는 소련과 같은 거대한 국가를 이끌기에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인물로 평가했다. 1991년 8월, 소련 보수파 쿠데타에 참여한 야조프는 결국 실패로 끝난 사건으로 인해 체포되었다. 많은 군 고위 관리들과 함께 심문을 받았으나, 야조프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사죄하는 영상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고르바초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고르바초프의 실각과 함께 소련이 해체되면서 모든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다.
야조프는 체포 후 호화로운 아파트를 박탈당하고 더 저렴한 주거지로 이사해야 했으며, 정부 제공 차량도 몰수당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 엠마 예브게니예브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귀중품을 팔아야 했다. 그는 498일 동안 구금된 후 1993년 초에 석방되었으며, 1994년 2월 국가두마의 결의로 사면되었다.
그러나 사면 이후에도 야조프의 삶은 다른 원수들에 비해 초라했다. 대부분의 소련 원수들이 명예 직책과 특권을 누린 반면, 야조프는 개인 보좌관이나 차량을 제공받지 못했다. 그는 지하철로 이동하고 직접 상점을 방문하며 검소한 생활을 해야 했다.
2.5. 말년
1998년 7월, 러시아 연방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원수인 이고르 세르게예프는 야조프를 국방부 국제 군사 협력 본부의 컨설턴트로 임명했다. 2008년에 야조프는 국방부 감찰국의 감찰관이 되었다. 그는 노년까지 복무하다가 주코프 원수를 추모하는 위원회 회장단의 일원이 되었고 러시아군 군사 기념 센터장에게 자문을 제공했으며 다양한 재향 군인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020년 2월 25일 향년 95세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3. 매체에서
추축국이 승리한 대체역사를 다루는 Hearts of Iron IV의 MOD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 시베리아 흑색연맹의 장교로 등장하며, 시베리아 흑색연맹의 지도자인 드미트리 카르비셰프가 사망한 이후 흑색 연맹을 이끄는 지도자로 등장한다.8월 쿠데타가 성공한 세계를 다루는 모드 Red Dusk에선 소련의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초강경 매파로 바르샤바 조약기구 부활을 위해 동유럽을 침공하며 핵무기 사용도 불사한다.
4. 여담
1988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함께 제27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활동하였다.5. 둘러보기
소비에트 연방군 원수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육군 |
|
|
이오시프 스탈린P | |||
소비에트 연방 원수
Маршал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
|||
소비에트 연방 초기 5원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P · 미하일 투하쳅스키 · 세묜 부됸니 ·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 바실리 블류헤르 |
|||
제2차 세계 대전기 세묜 티모셴코 · 그리고리 쿨리크 ·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 게오르기 주코프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이오시프 스탈린P · 이반 코네프 · 레오니트 고보로프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로디온 말리놉스키 · 표도르 톨부힌 · 키릴 메레츠코프 |
|||
냉전기 바실리 소콜롭스키 · |
|||
NKVD |
제2차 세계 대전기 |
||
해군 |
함대 제독
{{{-2 Адмирал Флота}}} |
||
제2차 세계 대전기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 이반 이사코프 |
|||
소비에트 연방 함대 제독
Адмирал Флота Cоветского Cоюза |
|||
냉전기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 이반 이사코프 ·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
|||
비고 | P : 정치장교, AD : 방공군, SRF : 전략로켓군 | ||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