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吾妻連峰雪山遭難事故(아즈마 연봉 설산 조난사고)1994년 2월 13일 일본 후쿠시마현과 야마가타현 사이를 가로지르는 아즈마 연봉(吾妻連峰)에서 등산객 5명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산악 조난 사고. 아즈마산에서 발생한 산악 사고 중에서는 역대 최대의 조난 사고로 알려져 있다. 조난당한 루트와 사진 설명, 사고를 다룬 ‘그리고 5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NHK 다큐멘터리 영상 1, 2, 3
2. 사고 경위
사고가 발생한 루트 |
1994년 2월 11일 30대에서 60대의 남녀 7인(남성 2명+여성 5명)으로 구성된 산행 멤버들이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의 연휴를 이용해 산행 계획을 세우고 후쿠시마로 출발했다. 당시 멤버의 리더(이하 A, 68세)는 신문사에 근무하던 남성으로, 등산 경력 30년에 산악 가이드 자격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특히 이 산행은 아즈마산에는 13번째로 오르게 되는 산행이었고 다른 멤버들도 모두 적지 않은 등산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당초 이들이 계획한 산행 루트는 후쿠시마현 타카유시에서 스키를 이용해 아즈마산을 종주한 후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의 나메카와 온천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11일 도쿄역에서 신칸센으로 출발하려고 했던 이들의 계획은 초반부터 순탄치 않았다. 원래 탑승 예정이었던 야마비코가 이미 만석이었던 탓에 하는 수 없이 각역정차 열차인 아오바를 타게 되었고 예정보다 30분 늦게 후쿠시마역에 도착했지만 후쿠시마역에는 스키를 실을 수 있는 캐리어가 딸린 택시가 없었기 때문에 급하게 마이크로버스를 대절하느라 또 30여분 가량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A는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늦어진 일정 때문에 발생한 시간 손실을 메꾸겠다고 버스 기사에게 원래 목적지였던 아즈마타카유 스키장 입구가 아니라 등산로 입구까지 가 달라고 요청한 것. 당시 도로가 얼어서 등산로 입구까지 버스가 들어가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이 때문에 버스 기사는 산중턱에 있는 아즈마타카유 스키장 입구에서 내려 리프트로 입산할 것을 권했으며 심지어 아즈마타카유 스키장 앞에서 정차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버스 기사는 A의 강권에 못 이겨 버스를 운행하였고, 결국 버스 기사의 우려가 현실이 되어 도로 결빙으로 더이상 버스가 운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일행은 스키장 입구에서 1km 떨어진 곳에서 버스에서 하차했다. 원래는 하차 지점에서 바로 스키를 타고 등산로 입구까지 갈 예정이었으나 에상보다 노면 동결이 심각하여 시간이 대폭 지체될 것이라 판단, 결국 원래 목적지인 아즈마타카유 스키장 입구까지 도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추가로 30분의 시간 손실이 발생했다.
일행은 아즈마타카유 스키장의 리프트를 이용해 입산하려고 했으나 이미 강풍으로 리프트 4대 중 2대(2번, 4번)가 운행중지된 상태였다. 결국 이들은 리프트가 멈춘 2번과 4번 리프트 구간의 급경사면은 스키를 신고 1km 넘게 걸어서 등산로 입구까지 이동했다. 이 때문에 일행은 등산계획서[1] 제출 장소인 4번 리프트 탑승구[2]를 경유하지 않았고 등산계획서를 제출하지 않은 채 입산하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이는 후술될 수색 과정에서 등산 루트 등을 파악하는 데 난항을 빚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일행이 본격적인 등산에 돌입한 시점은 이미 일정이 꽤 지체된 오후 1시였다.
게다가 이렇게 시간 손실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A는 당초 일정을 강행했다. 일행은 도중에 있는 게이오아즈마산장[3]을 그냥 지나쳐서 산악 간이 대피소로 향했는데, 이 대피소는 제대로 된 숙박시설이라기보다 말 그대로 임시 대피소에 가까우며, 심지어 이렇게 대피소에 도착하자마자 휴식을 취하지도 않고 아예 밤 10시까지 술판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날 라디오의 일기예보로 급속하게 발달한 저기압의 영향으로 기상이 매우 좋지못할 것을 알렸지만 일행은 라디오를 소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길이 없었다. 참고로 게이오아즈마 산장은 관리인이 상주하는 산장으로, 라디오로 예보를 미리 파악한 경험 많은 관리인이 반드시 문제가 일어날 것이다고 투숙 중이던 전 팀에게 하산을 권유하여, 이 날 게이오아즈마 산장에 투숙했던 인원 중에서는 조난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 다음날인 2월 12일 일행은 날씨가 맑은 것을 확인하고 아침 8시 30분에 출발했다. 늦게 출발한 데다 눈이 평소보다 더 쌓였기에 예정보다 2시간 늦게 시라하마 능선[4]에 도착했으나 오후부터 날씨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2km 앞의 키리노타이라(霧の平)로 가려고 했으나 분기점 표지를 찾지 못해 길을 잃게 되고 그 와중에 스키의 미끄럼 방지 시트[5]가 벗겨지는 멤버가 속출했다. 이 벗겨진 시트를 접착제로 붙이는 응급조치를 하느라 시간이 더 소모되었고[6] 그동안 다른 멤버들은 눈보라를 맞으며 대기하면서 체력이 더욱 크게 소진되어 갔다. 결국 시라하마에서 키리노타이라까지 무려 6시간 이상을 헤맨 끝에 밤을 맞이한 일행은 시라하마 북쪽 능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스키 판과 은박 돗자리로 간이 텐트를 치고 비박을 하게 되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겐 비박했다는 거 비밀로 하자"며 농을 주고받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는데, 이들은 그래도 겨울 산행 경험자인데다 난방 용품이나 식량도 이 시점에서는 아직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날씨는 점점 나빠졌고 설상가상으로 밤이 되면서 기온도 영하 10도 아래까지 떨어진 데다 누적된 피로가 안 그래도 떨어질 대로 떨어진 일행의 체력을 더욱 더 좀먹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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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은 일요일로, 일행은 악천후와 지속적인 피로 누적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한다며 조식도 먹지않고 아침 7시부터 하산을 강행했다. 전날 들렀던 간이 대피소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아침 8시가 넘어 시라하마에 진입하기가 무섭게 강풍이 불어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때 일행은 등산로를 이탈, 겨우겨우 근처 방풍림에 도달했으나 일행 중 여성 1명이
저체온증으로 의식불명에 빠지는 사태가 터지면서 일행 전원이 그 자리에서 발이 묶여 버리고 말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여유가 있던 일행은 이때부터 당황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낮은 기온으로 인해 스토브가 고장나서 더 이상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일행 중 리더 A와 남성 1명(이하 B)이 바람을 피하기 위해 눈을 파서[7] 간신히 임시 움막을 만들었으나, 여성 2명이 추가로 의식을 잃어갔다. 밤 10시경 겨우겨우 3곳의 움막[8]을 만들어 확보한 것도 잠시, 이번에는 A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는 이 시점에서 B에게 모두에게 폐를 끼쳐 미안하다. 모두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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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아침 8시경 의식이 남아 있던 사람은 B와 여성 2명, 이렇게 3명뿐이었다. A를 포함한 나머지 4명은 이미
저체온증으로 인해 사망했다. 남은 3명이 구조요청을 하기 위해 하산하기로 하고 준비했으나 도중에 일행 중 최연소였던 여성 1명이 거동을 할 수가 없다며 시라하마에 남기를 택했다. B가 설득했으나 이 여성은 "친절에는 감사하나 나는 더 이상 미련이 없으니 여기에 남겠다. 두 사람이 먼저 가라"는 유언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결국 나머지 B와 나머지 여성 1명만 아침 9시경 시라하마를 떠나 하산을 계속했다. 스토브는 이미 전 날 고장이 나서 식사도 거르면서
눈사태의 위험을 무릅쓰고 서쪽 언덕을 내려가던 중 B가 기력을 소진해 2명은 다시 오후 4시 넘어
비박했다.
한편 이날 수도권에 거주하던 일행의 지인들은 이들이 아즈마산에 간 뒤 13일 밤까지 연락이 완전히 끊긴 것을 걱정하여 후쿠시마에 있는 관계자에게 연락했다가 현지 기상 상황이 최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각 참가자들의 자택에 일일이 전화를 걸었으나 모두 연결되지 않는 상태였고 이에 지인들은 최대한 알아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산행 멤버들 중 6명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후쿠시마현경 본부에 팩스로 보내 이들의 실종 신고를 했다. 신고를 접수한 후쿠시마현경과 야마가타현경은 즉시 수색을 시작했으나 전술되었듯 이들이 등산계획서를 제출하지 않았던 탓에 신원과 등산 루트 파악에 난항을 겪게 되었다. 그러던 중 등산계획서를 정상적으로 제출했던 다른 등산객들의 목격 정보를 바탕으로 일행의 등산 루트를 파악하여 수색을 개시했다. 이후 일행 중 신원을 파악하지 못했던 한 명의 가족이 경찰에 추가로 실종신고를 했고 그가 먼저 실종신고된 6명과 같은 등산계획을 적어 둔 메모가 발견되면서 일행 7명 전원의 신원 파악이 완료되었다.
- 2월 15일 경찰 및 육상자위대 수색대, 지역 산악회 등으로 구성된 민간 수색대가 아즈마산장에 집결해 후쿠시마 경찰서 니와즈카 주재소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아침 8시 30분부터 본격적으로 실종자 수색작업에 들어갔다. 오후 1시경 일행들 중 생존한 남녀 2명이 심한 동상에 걸린 채 당초 목적지였던 나메가와 온천에 도착했다. 남성 B[9]는 오른쪽 손가락 1개를 절단해야 하는 동상에 걸렸고 여성은 손발이 저려오는 후유증을 앓았다.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오후 3시경 육상자위대 헬기가 일행의 비박 지점을 특정하고 움막과 가방, 스키 등 각종 등산 장비들과 함께 멤버 5명의 시신을 발견해 이송했다. 이 날의 아즈마산은 전날까지 몰아치던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맑아졌다고 한다.
헬기가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 |
3. 사고의 원인
이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일기예보를 제때 확인하지 못한 기상악화로 인한 조난이었으며 일행의 거듭된 오판과 준비 부족도 사고를 키운 원인으로 거론된다.우선 전술된 바와 같이 신칸센 열차 변경으로 일정이 꼬이면서 발생한 시간 손실을 메우겠다고 한 행동들이 결과적으로 도보 이동거리를 대폭 늘렸고 이는 체력소모로 피로가 누적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들이 등산로 입구를 지난 시점 또는 늦어도 게이오아즈마산장 부근에 도착한 시점에서 산장으로 이동해 충분한 휴식을 취했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당초 일정대로 산악대피소행을 강행한 점도 큰 판단 착오로 지적된다. 게이오아즈마산장은 관리인이 상주하고 적절한 설비가 갖추어진 정식 산장이지만 일행이 갔던 산악대피소는 말 그대로 임시 대피소에 지나지 않는 숙박지로는 부적합한 곳이었다.
간호사, 구청 공무원, 학교 강사 등의 직업을 가진 일행들 모두 출발 전날까지 생업에 바빴던 탓에 충분한 사전 준비기간 없이 거의 벼락치기 식으로 계획된 것이었고 멤버들 중에는 등산 필수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비상용 라디오를 지참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등산용 간이텐트 유무 여부 확인은 물론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등 최소한의 준비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은 허술한 산행이었다. 여기에 더해 리더 A가 자신의 아즈마산 등반 경험을 재미있게 소개한 반면 등산 장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리지 않았고 도중에 산악대피소에서 술잔치를 벌인 것에 대해서도 문제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도 사고를 키운 원인으로 지적된다.
일행들 모두 산행 출발 시점에서 이미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고[10] 산장으로 가던 중에도 이미 지쳐서 낙오되기 직전의 상태인 일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휴식 없이 산악대피소로 향한 것이 비극의 단초였다.
특히 이들이 도중에 등산계획서를 제출하지 않고 그대로 산행을 강행한 것이 큰 문제가 되었는데 이게 왜 중요하냐면 조난이나 실종 사고 발생시 등산계획서에 기재된 신원정보와 등산 루트 등의 정보가 있어야 이것을 토대로 신속하고 용이한 초동수사를 거쳐 조난자를 빨리 구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등산계획서는 제출자가 무사히 하산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경찰서에만 제출되는 것이 아니라 등산자의 가족에게도 통지되는데 하산 예정일에 하산하지 않은 조난자(실종자) 수색은 경찰이 즉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직장 측에서 신고한 이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경찰서에 등산계획서를 제출했더라도 등산자 본인이 가족이나 직장에 행선지를 밝히지 않았을 경우 조난 사고 발생 시 조난자가 어느 산에 갔는지 아무도 모르니 수색할 방도가 없고 끝내 구출되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산행 도중 기상 상황이 악화되었음에도 무리하게 등산을 계속하다 결국 눈보라 속에서 비박을 하는 상황을 초래한 것도 가뜩이나 피로 누적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극심한 체력 소모를 불러왔고 저체온증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도 전무해서[11] 적절한 응급처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로 인해 거동을 하지 못하는 일행 1명을 구하려고 나머지 인원들이 전부 강풍과 눈사태 위험이 있는 구역으로 들어갔다가 그들마저 잇달아 저체온증을 일으키고 말았다.
한편 이들이 예정했던 등산코스는 등산 전문 서적에도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일정 자체는 문제가 없었으나 후쿠시마시 관광과에서 발행한 아즈마산 등산로 지도에는 해당 코스가 강풍이 불고 숲이 깊은 데다 산사태 및 눈사태가 발생할 위험이 커서 겨울 산행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여름철 산행 코스로 소개되어 있었다. 실제로 사고 발생 당시 해당 코스는 예년보다 눈이 많이 쌓여 있는 상태였다.
4. 아즈마산은 어떤 곳인가
아즈마산 또는 아즈마 연봉(吾妻連峰)은 후쿠시마현과 야마가타현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일본 100대 명산에 이름이 올라오기도 한 곳이다. 후쿠시마시 서부에서부터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 남부의 텐겐다이 고원에 걸쳐 있으며 해발 2,000m급의 화산이 연달아 자리하고 있다. 급행열차 아즈마[12]와 러일전쟁 당시 주력 함선 중 하나였던 장갑순양함 아즈마는 이 산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 사고 이후
마지막에 살아남은 남성 생존자 B는 NHK와의 인터뷰에서 “왜 그 때 움막을 1cm, 10cm 더 깊게 파지 못했을까. 그런 점에선 살아남은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런 괴로움이 살아남은 사람에겐 계속 남아있다.“고 얘기했다. 정작 당시 B는 다른 사람의 움막을 파느라 본인의 움막을 팔 시간이 없어서, 간신히 머리만 들어갈 움막을 파서 두부의 체온만 보존한 채 밤을 버텼다고 한다.1997년 리더 A의 친구가 <1994년 2월 아즈마연봉 산악스키 조난사고 보고서>를 자비로 출판,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사고의 원인을 "장비가 미비했던 점과 더불어 '눈 내리는 나메가와 온천'이라는 매력적인 목적지에 집착한 결과, 다른 루트를 택한다는 선택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행의 최초 도착 지점이었던 아즈마타카유 스키장은 사고 이후에도 계속 영업하다가 2006년을 마지막으로 영업을 종료했다.
6. 조난한 실존 인물/사건
-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대장 어니스트 섀클턴)
- 료에이마루 조난 사건: 조난이라기보단 표류에 해당하지만 조난 사건이라고 네이밍이 되어 있어서 추가.
- 핫코다산 참사[13]
- 토무라우시산 조난 사고
- 청주 여중생 조난 사건
- SOS 조난 사건
- 사와구치산 조난 사고
- 시로우마다케 대량 조난사고
- 제5공수특전여단 동사사고
- 태국 유소년 축구팀 동굴 조난 사건
- 김홍빈
- 디아틀로프 사건
[1]
보통 '등산 카드' 또는 '등산자 카드'라고 부르는 물건으로, 등산자 개인의 인적사항과 등산 루트, 등산 및 하산 일정 등을 기록한 서류. 기본적으로는 의무사항이 아니고 등산자가 임의로 제출하게 되어 있지만 지자체에 따라서는 특정 산에 등반할 때 이것을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지역도 있으며 의무화를 추진 중인 지자체도 많이 있다.
[2]
탑승구 근처에 등산계획서 제출함이 있다.
[3]
게이오기주쿠대학 산악부 졸업생들로 구성된 모임 '게이오 등고회(慶応登高会)'가 1970년에 건립한 산장이다. 참고로 위의 사진은 조난자들의 사진이 아니며, 그 날 투숙한 다른 일행의 사진이다.
[4]
위의 지도에서 대피소(小屋)와 키리노타이라의 중간 지점에 있는 능선이다.
[5]
등산용 스키는 경사로를 오르기 쉽도록 발끝 부분만 고정되고 발뒤꿈치 쪽이 들려 올라가도록 되어 있고 스키 판 뒷면에는 미끄럼 방지 시트를 붙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 쓰이는 전용 접착제는 온도가 빙점 이하로 내려가면 접착력이 약해지고 특히 접착면에 눈이나 얼음이 들러붙으면 접착력이 아예 사라져서 스키를 신고 눈 위에서 보행이 불가능해진다.
[6]
1인당 10~20여분
[7]
이 때
삽 같은 장비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A와 다른 남성 1명이 식기 등으로 눈을 팠는데 이 눈이 워낙 단단하게 뭉쳐 있었던 탓에 눈을 파내느라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고 이로 인해 체력이 더 빠르게 소진되었다.
[8]
심지어 A가 피로 누적으로 인해 만들었던 3개 중 하나의 움막을 파괴하여 다시 만들게 되었다.
[9]
이 생존자는 움직이지 못하는 일행의 짐을 들고→그 사람들의 구조를 행하고→움막을 파고→다른 사람의 움막도 파 주고→그 움막은 크기가 작아서 머리만 넣고 하룻밤을 버텼고→극적으로 생존하는 초인적인 체력을 보여주었다. 참고로 이 남성은 당시 38세로, 아이러니컬하게도 등산 경험이 적은 편에 속했다. 이 조난 사고 전에는 초심자 루트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10]
당시 연말연시가 끼어 있어서 모두 바쁜 와중에도 등산에 참가했다고 한다. 실제로 일행들 중에는 열차에 탄 시점에 이미 잠이 들었던 사람도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11]
사고 당시는 저체온증이라는 개념 자체도 생소하던 시기였다.
[12]
1958년 10월부터
도호쿠 본선을 경유하여 우에노~후쿠시마·센다이 구간에서 운행했던 급행열차.
도호쿠 신칸센 개업 후인
1985년에 폐지되었다.
[13]
근대 일본군 199명이 얼어죽은 참사. 문서에 동사체 사진이 있으므로 열람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