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1:22

십자군 전쟁/연표/1198년 이전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십자군 전쟁/연표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십자군 전쟁/연표/1199년 이후
,
,
,
,
,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십자군 전쟁/연표/1292년 이후
,
,
,
,
,

1. 십자군 이전
1.1. 제국의 역습
2. 십자군 직전
2.1. 제국의 위기
3. 1차 십자군
3.1. 예루살렘, 예루살렘!
4. 점령
4.1. 반격의 서막4.2. 1101년의 십자군4.3. 트리폴리에서의 2천일
5. 반격
5.1. 세대 교체5.2. 알레포의 주인5.3. 연이은 내분5.4. 이마드 앗 딘 장기
6. 2차 십자군
6.1. 누르 앗 딘 마흐무드
7. 힘의 균형
7.1. 이집트를 얻는 자,7.2. 살라흐 앗 딘 유수프7.3. 하틴의 뿔
8. 3차 십자군
8.1. 독일 십자군

1. 십자군 이전

일명 Pre-Crusade Era : 이슬람 정복 이후 레콘키스타 세력들과 프랑크 왕국, 동로마 제국 등이 반격.

1.1. 제국의 역습

마케도니아 왕조하의 동로마 제국이 재정복에 나섬. 함단 왕조 파티마 왕조와 대결.

2. 십자군 직전

2.1. 제국의 위기

3. 1차 십자군

3.1. 예루살렘, 예루살렘!

4. 점령

십자군 국가 형성기 : 포위된 항구 도시들의 함락

4.1. 반격의 서막[112]

4.2. 1101년의 십자군

4.3. 트리폴리에서의 2천일

1102년부터 레몽 드 생 질은 트리폴리 외곽의 몽스 페레그리누스[147]에 성채를 짓고 도시를 봉쇄. '트리폴리 백작' 자칭하기 시작.

5. 반격

5.1. 세대 교체

1차 십자군과 그를 상대했던 주역들 (보에몽, 탕크레드, 보두앵 1세, 리드완, 마우두드, 툭테긴) 사망

5.2. 알레포의 주인

아르투크 왕조의 일 가지, 발라크가 알레포를 구해내고 안티오크 공국의 존립을 위협함

5.3. 연이은 내분

5.4. 이마드 앗 딘 장기

6. 2차 십자군

6.1. 누르 앗 딘 마흐무드

7. 힘의 균형

7.1. 이집트를 얻는 자,

7.2. 살라흐 앗 딘 유수프

7.3. 하틴의 뿔

8. 3차 십자군

8.1. 독일 십자군


[1] 서고트 국왕 로데릭 전사 [2] 무슬림 지휘관 아브드 알 라흐만 전사 [3] 무슬림 지휘관 압둘라 알 바탈 전사 [4] 당시 압바스 왕조의 수비대는 축제로 부재. 2년 후에 재차 습격. 859년엔 펠루시움 습격 [5] 827년부터 시칠리아 정복에 나섬 [6] 977년 시칠리아의 무슬림 군대가 동로마 령이던 타란토를 점령하자 동로마 측이 당시 이탈리아에 머물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2세에게 도움을 청한 결과 일어남 [7] 안티오크 총독 다미아노스 전사 [8] 다만 이는 십자군을 정당화하기 위해 1차 십자군 직전에 위조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9] 동로마가 무슬림 포로 5천을 석방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마스지드 (모스크)가 재개장 하고 쿠트바 (설교)가 가능하다는 조건 [10] A Chronology of the Crusades (티모시 베닝, 피터 프랑코판)에선 이를 모든 것의 시작으로 봤는데, 튀르크인이 이슬람권의 주도권을 잡으며 기독교도들을 위협하고 성지순례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11] Ramón Menéndez Pidal 는 이를 '십자군 이전의 십자군'으로 부름 [12] 십자군은 생명과 재산을 지켜준다는 조건을 제시하자 수비군은 항복하였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십자군은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듬해 그들이 돌아가자 무슬림들이 도시를 탈환하였다 [13] 주민들 학살당하고 성 바실리오스의 성유물 훼손됨 [14] 1월 10일 로베르 기스카르가 입성한 후 행함 [15] 그전인 2월에 부르고뉴 백작 빌헬름에게 셀주크 대한 군사 행동 요구했으나 별 호응 못얻음 [16] 같은해 캉브리에서 카타리파 이단으로 규탄받고 일부 화형됨 [17] 같은해 동로마 황제 니키포로스 3세가 쉴레이만으로부터 비티니아 수복 위해 원정군을 파견하나 그 사령관인 콘스탄티노스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원정 실패 [18] 니키포로스 3세 vs 니키포로스 멜리세노스 (미카일 7세 지지했음). 그러나 어부지리로 알렉시오스 1세가 승리. 멜리세노스는 그에 복속한 대가로 카이사르에 봉해짐. 하지만 사태가 진정된 직후 노르만 인들이 쳐들어오며 동로마는 아시아 영토를 사실상 방치. 십자군 불러 이들을 몰아내기로 함 [19] 교황은 그를 찬탈자로 간주해 파문. 로베르 기스카르의 침공 지지 [20] 그러나 그 직후인 2월 디라키움의 베네치아 인들이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항복해버림 [21] 알레포의 우카일 왕조 아미르 무슬림이 주군 말리크샤에게 도움 요청, 말리크샤가 쉴레이만에게 퇴각 명하나 먹히지 않음. 아미르 무슬림 전사 [22] 이듬해 3월 입성 [23] 십자군 역사가 Carl Erdmann 은 이를 ganz als Kreuzzug ausgeführt, 즉 첫 번째 십자군으로 평가 [24] 한편 같은 해 교황의 중재로 로제르 보르사와 보에몽 1세가 남부 이탈리아 분할 통치. [25]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교회 설립을 대가로. 동시에 교황은 로마 떠나 노르만 영토로 피신. 한편 같은해 가을 예루살렘 순례하고 돌아가던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가 페체네그 원정에 나선 알렉시오스 1세와 만나 5백의 기사 파병 약속하고 돌아감 [26] 같은해 알폰소 6세는 엘 시드 다시 기용하여 군대 재건. [27] 가을. 알렉시오스가 서방에 파견한 첫 황실 사절단 [28] 동시에 셀주크 제국군이 니케아 침공. 이에 알렉시오스는 니케아에 지원군 보내고 자신은 페체니그 군대 격파. 차카는 동로마 해군에게 패해 후퇴. [29] 이후 동로마 장군 시네시우스가 사로잡힌 페체네그 포로들이 반란 일으킬까봐 학살. 이에 쿠만인들이 두려워하며 도주. 그에 상관없이 알렉시오스는 예정된 선물 줌. 다만 이 전투를 위해 니코메디아의 5백 플랑드르 기사들 불러들임. 그틈에 니케아의 아불 카심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전 동방의 수도였던) 니코메디아 점령. 여담으로 이때 알렉시오스가 플랑드르의 로베르에게 더 큰 규모의 지원군 요청하는 편지 보냈다 하는데 학자들에게 십자군 정당화하기 위한 위조 문서로 여겨짐 [형] 기욤 4세가 1088년 떠난 성지 순례 중 사망 [31] 동로마 장군 타티키오스가 니케아 탈환에 나섬. 그러나 같은 시기 술탄 바르키야루크가 파견한 부르수크의 셀주크 군대 역시 접근. 아불 카심은 알렉시오스에게 도움 청함. 지원군 받아 버팀. 물자 부족해진 부르수크 철수. 하지만 셀주크 군대가 재차 원정을 준비하자 아불 카심이 알렉시오스에게 복속, 니케아 총독을 자처한 것. 한편 같은해 엔히크 백작의 포르투갈 백국 성립. 여름, 발칸 원정 중이던 알렉시오스를 로마노스 4세의 아들 니키포로스가 암살 모의. 이에 심문하여 황제의 동생 아드리아노스 등의 수뇌부 숙청 [32] 1093년이라는 기록도 있음 [33] 이마드 앗 딘 장기의 부친 [34] 본래 형 알리 폐위시키려는 무함마드가 고용한 것이었는데 카르부카가 그를 살해하고 모술 2차례 포위 끝에 성공. 마지막 아미르 알리는 무즈야드 왕조로 도주 [35] 그의 십자군에는 '성령이 깃든 거위'를 앞세우기도 했다 [36] 5월 3일이란 기록도 있음. 이때는 교회가 개입, 살인자들의 손을 자르는 형벌 가함 [37] 이미 메츠와 슈파이어의 참극을 전해듣고 주교궁에 숨기도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심지어 유대인 보호를 명한 하인리히 4세의 칙령도 무용지물이었다 [38] 본대라 하기도 [39] 대주교가 1000여명을 지하에 숨겨주었지만 이를 알아챈 십자군이 그들을 찾아내어 대부분 죽일 수 있었음.. 50여명의 생존자들도 개종 거부하고 순교. 개종한 이들은 이후에 회개하고 자살 [40] 시민들이 가정집에 유대인들을 숨겨주었지만 결국 대부분 학살됨 [41] 그 낙오자들이 헝가리 왕국 남부의 셈린 (제문)을 약탈하다가 축출됨. [42] 상당수가 강물에 투신 자살. 이후 분견대가 돌아왔으나 이미 에미코는 헝가리로 향함. 따라서 라인란트의 노이스 등지에서 유대인 학살 [43] 시민들이 가정집에 유대인들을 숨겨주어 큰 화는 면했으나 대주교가 주변 마을들에 숨겨놓은 유대인들은 발각되어 학살됨 [44] 고트샬크 부대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괴멸됨. 주민들 약탈하다가 헝가리 왕 칼로만에게 패하고 무장해제 된 후 점잖게 굴겠다고 약속하나 또다시 훔치자 이번엔 학살됨. 다뉴브 지류 도하 거절당한 2대는 6주간의 대치 끝에 기습적으로 다리를 건너 비젤부르크 (현 오스트리아)에 공성탑 배치해 포위. 그러나 헝가리 군대가 다가온다는 소문에 도주. 수비군이 추격. 이후 에미코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그 잔당은 위그 드 베르망두아의 군대와 합류 [45] 고티에의 1대라는 기록도 있음 [46] 필리포폴리스에서 동로마 특사와 함께 모두 합류했다는 기록도 있음 [47] 주민들은 대부분 기독교도였다; 이후 셀주크 군대가 출정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 [48]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와 심히 헷갈린다, 원정비 마련 위해 공국을 1만 페니로 잉글랜드의 형제 윌리엄 2세에게 매각 [49] 아드리아해 지나다가 난파되었지만 디라키움 총독 요안니스 콤니노스에게 구출됨 [50] 대부분의 십자군이 순교를 택했으나 기사 레이날드 본인은 이슬람으로 개종해서 호의호식(...) [51] 알렉시오스의 항의에 고드프루아는 위그의 감금에 대한 보복이라 대꾸 [52] 이후 알렉시오스에게 충성 서약했다고 하는데 확실치 않다 [53] 십자군의 진격을 틈타 요안니스 두카스의 동로마 함대가 스미르나 점령. 차카의 아들 차카는 누이 (동로마 포로된 클르츠 아르슬란 아내) 설득에 항복. 안전히 떠남. 다만 이후 도착한 동로마 사령관 카스팍스가 아랍인 포로에게 살해됨. 이에 그의 군대가 차카의 부관 하얄레아스와 에페수스의 페체아스 등의 포로 학살. 요안니스는 메안데르 협곡 따라 진군, 페르가몬과 사르데스 수복. 폴리보투스 전투에서 튀르크 군대 격파하고 아모리움 점령 [54] 당시 동로마와 동맹이었다. 이후 그들은 보에몽의 선발대 습격했으나 탕크레드가 강을 헤엄쳐 건너 지원해오자 패퇴 [55] 얼마나 많은 십자군이 오는지에 대한 논쟁. 이후 알렉시오스가 식량 지원 끊음. 이에 십자군이 주변 약탈 [56] 그럼에도 도메스티코스 칭호는 받지 못함. 대신 방 가득한 보물 하사받음 [57]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는 서약 안한채로! [58] 보에몽, 탕크레드, 로베르, 타티키오스가 선발대, 고드프루아, 보두앵, 레몽, 에티엔, 위그는 후발대. [59] 지역 아미르 하산과 연합하여 공격하나 보에몽에게 패배. 이 원정이 보에몽과 탕크레드가 한 것이라고도 함 [60] 아르메니아의 영주 코그 바실의 동생 바그라트를 동행해 지리를 잘 알았고 역사가 풀케르 드 샤르트르를 대동해 정확한 원정 날짜를 알 수 있다 [61] 이후 탕크레드를 돕기 위해 보에몽이 보낸 3백의 노르만 기사들이 당도했는데 그들의 입성을 거부하였고 튀르크 인들에게 죽게 놔둠. 이에 보두앵의 부하들이 봉기하여 성내의 튀르크 인들을 학살하고 보두앵마저 탑에 가두었는데 결국 설득되어 사태 종결. [62] 이때 아다나의 아르메니아 군주의 초대를 받았고 아르메니아 보병대를 지원받음 [63] 이때 두명이 죽고 수십명씩 포로가 발생. 십자군끼리 칼부림 한 첫 사례. 이후 구이마르 드 불로뉴의 십자군 함대와 함께 알렉산드레타 공격 [64] 탕크레드와 보두앵이 모험하는 동안 카이세리 점령하고 아우구스토폴리스 향하며 아미르 하산 격파. 이후 아르메니아인의 도시 코마나 점령. 주민들이 타티키오스에게 동로마 총독 부탁. 프랑크 용병대장 피에르 달푸스 임명. 레몽, 피에르 드 카스티용 등 5백 기사 파견해 튀르크 인들이 안티오크 버렸다는 소문 확인케함. 거짓 판명 [65] 이미 타르수스에 있을 때 그들의 편지를 받았다 [66] 본래 동행하던 아르메니아 왕족 바그라트에게 주었으나 얼마 후 돌연 그가 셀주크 측과 모의했다며 체포, 고문한 후 성채를 빼앗음 [67] 이때 아데마르의 기수 전사 [68] 알렉시아드의 기록. 보에몽은 '동로마의 배신'이라며 자신의 입지 다짐. [69] 그들 중엔 잉글랜드의 왕위를 주장하는 색슨 부족의 에드가 애설링 (에드워드 참회왕의 6촌 조카) 등의 지휘관. 이 지원은 타티키오스가 주선한 것으로 추정되나 십자군은 여전히 그를 배신자라고 비난 [70] 보두앵이 공성탑 만들어 진군하자 항복하고 용서구하며 에데사로 향했으나 처형됨. 이후 보두앵은 기독교도하고만 동맹 [71] 하지만 클르츠 아르슬란의 반격과 에티엔 등의 이탈자들의 전한 절망적인 소식에 한두달 후 철군 [72] 이에 안티오크 수비대는 카르부카와 맞서러 가는 것인줄 알고 안도. 에티엔의 이탈에 대해 6월 10일이라는 기록도 있고 부상당해 그랬다고도함. 이후 에티엔은 아내 아델라 (잉글랜드의 윌리엄 1세 딸)의 비난으로 1101년 십자군 종군 [73] 동틀무렵 연대기 작가 풀케르 드 샤르트르가 60명의 기사들과 두자매탑 올라감. 야기 시얀은 도주 중 수행원들에게 버려져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살해됨. 안티오크 대주교 요안니스 풀려남 [74] 이때 샴스 앗 다울라 대신 아흐마드 이븐 마르완이 시타델 수비대장으로 봉해짐 [75] 그랑트메스닐의 오브리, 기욤과 람베르트 드 클레르몽 등의 기사들. 타르수스로 향하여 에티엔과 합류. 필로멜리온의 알렉시오스 진영으로 향함 [76] 은자 피에르가 아닌 피에르 바르톨로메오 [77] 6월 14일이라는 기록도 [78] 전투 때 레몽이 아파 아데마르가 지위. 한편 레몽이 항복 사절단 접견하고 자신의 깃발 보냈으나 아흐마드 이븐 마르완은 이를 거절하고 기다렸다가 보에몽이 돌아오자 그의 깃발을 계양. 이에 레몽 분노 [79] 이는 개인에 국한된 권리였으나 이후 시칠리아 군주들도 주장하며 교황의 교회 간섭 거부. 이후 우르바노 2세는 바리에서 현지 정교회 성직자들과 동로마 대표단과 모여 필리오케 문제에 대해 논의하나 무성과. [80] 나르본 후작 베르나르의 아들 [81] 전초전에선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 그러나 이후 알레포 군대가 증원되어 다가오자 버티다 식량 고갈 [82] 황제에게 지원군 청하고 거절당하자 본국 귀환. 이후 서약 져버렸다며 욕먹고 교황에게서 파문 경고까지 받은 후 1101년 십자군 종군 [83] 수비대의 다수는 카르부카의 안티오크 구원병에 파견되어 있었음. 이후 알 아흐달은 십자군에게 튀르크 영토에 대한 분할 제시하나 묵살됨. 셀주크 총독 소크만 (아르투크의 아들)은 자지라로 피신 [84] 한편 노르망디 공 로베르는 옛 친구인 색슨 왕족 에드가와 라타키아에서 만남 [85] 아데마르 후임자 보내거나 본인이 직접! 오거나 [86] 마라트 알 누만에서 서북쪽으로 15km [87] 마라는 생각보다 부유한 도시가 아니었고 십자군은 몇주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88] 레몽이 시내를, 보에몽이 성벽과 탑을 점령한 상태 [89] 이후 레몽은 고드프루아와 로베르 등을 매수하여 십자군 지도자 되려함. 지연에 분노한 병사들이 마라의 성벽 무너뜨리려함 [90] 맨발의 순례자 복장으로. [91] 미래의 크락 데 슈발리에! 이후 십자군은 그곳에 3주간 머무름. 이에 트리폴리의 카디가 잠재적 동맹으로 생각한 레몽에게 사절보내 대사 파견 요청. 이에 일단의 십자군이 트리폴리 입성. 그 부유함에 감탄, 레몽에게 그 도시들 중 하나 공격해 협박할 것을 주장 [92] 본래 보에몽도 동행했으나 라타키아에서 회군. 이후 라타키아 도착한 동로마 제독 부투미티스 감금. 킬리키아 돌아가던 동로마 함대 좌초됨 [93] 1백 기사와 2백 보병이 전부였다! [94] 레몽의 반대에도 십자군은 기다리지 않고 남하하기로 결정 [95] 이에 대해 노르망디공 로베르 등의 북부 프랑스인들은 거짓이라 주장, 레몽의 남프랑스 인들과 설전 [96] 전통적인 이집트 기반 왕조의 북방 국경 [97] 농지를 건드리지 않는 대가로 식량, 황금, 안내인을 제공 [98] 아랍인들은 사이다로 부름 [99] 당시까지도 로마 시대 이름인 아일리야에서 유래된 일리야로 통용됨. 이슬람 학자들은 알 쿠드스로 불렀지만 [100] 7월 10일이라는 기록도 [101] 6월 13일로 표기된 기록도 있음. 이후 레몽 드 필레가 라말라에서 매복해 있던 파티마 군대를 격파, 제노바 측의 보급로를 확보. 이때 자파 점령한 것일지도 [102] 수비대가 인근 나무 다 베어버림. 탕크레드, 소화불량으로 쉬던 중 동굴에서 목재 발견, 사다리 만들기 충분. 이는 파티마 군대가 셀주크로부터 예루살렘 포위할 때 쓰다 남은 목재였으나 십자군은 이를 솔로몬이 남겨둔 것이라는 등 기적으로 여김. 이후 제노바 함대가 공성탑 더 지원해주었다고도 함 [103] 그것도 3일간 금식 후 맨발로 한 것이다. 여리고 성을 함락했던 때의 오마쥬.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여호수아 6:3) 사제 피에르 데시데리오와 몇명의 기사들이 꿈에 작고한 아데마르가 나와 이 방법을 알려주었다 하는데 당시 상황이 상황인지라 수용되었다. 피에르 데시데리오의 꿈에 따르면 9일 후 함락된다고. 행진의 마무리로 은자 피에르가 올리브 산에서 의욕 꺾인 십자군에게 설교. [104] 쥘베르 드 투르네와 리톨드가 이끄는 로타링기아 기사들이 앞장섬 [105] 다만 먼저 바위의 돔 장악한 탕크레드는 알 아크사의 무슬림 피난민과 성직자 보호해줌 [106] 한편 예루살렘 함락 후 대부분의 십자군 귀국 [107] 불로뉴 백작. 고드프루아와 보에몽의 형. 예루살렘 함락 후 귀국 [108] 성묘교회부터 성전산까지. 8월 9일이란 기록도 [109] 레몽 (수비대는 그에게만 항복한다함)과 고드프루아의 다툼으로 아슈켈론은 점령 못함. 아르수프도 비슷한 경우. 이후 레몽은 영지 확보 위해 타르투스로 향함 [110] 다른 제후들과 함께 피사를 압박해 포위 풀게 만들고 이에 보에몽까지 포기하자 자신이 알렉시오스 1세의 봉신으로서 라타키아를 통치한 것. 이후 풀려난 동로마 제독 부투미타스는 노르망디 공 로베르와 플랑드르 백 로베르 대동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귀환 [111] 다임베르트에게 아슈켈론 함락되면 예루살렘 내어주고 그곳으로 옮기겠다 서약 [112] 고드프루아, 보에몽, 레몽이 모두 성지를 이탈 [113] 3월이라는 기록도 [114] 베네치아 함대와 카이사레아의 아미르 만나기 위해 떠난 상태 [115] 이후 다임베르트가 보에몽 추대하기 위해 사절 파견, 라타키아의 레몽 부하들에게 잡힘 [116] 안티오크의 정교회 주교 요안니스 축출하고 베르나르 드 발렝스 임명 [117] 알렉시오스, 아드리아노폴리스와 필리포폴리스 등지에 캠프 마련해둠, 하지만 각지에서 약탈 자행됨 [118] 아랍인들은 그를 알 바르다윌로 부름 [119] 안티오크에서 4일 머무는 동안 보에몽 대신해 맡아달라는 요청 거절 [120] 11월 11일이라는 기록도 [121] 이때 포로가 된 베두인 부족장의 부인이 해산 임박하자 풀어줌. 이에 그 부족장과 동맹 성립 [122] 이후 군자금이 부족해지자 장인에게 수염 면도시키겠다고 협박해 3만 베잔트 뜯어냄.. / 여름, 탕크레드가 아다나, 마미스트라, 타르수스 등 동로마로부터 킬리키아 수복하고 라타키아 포위 [123] 알렉시오스, 바로 보스포루스 건널 것을 명하나 십자군은 해로를 통해 오고 있는 블루아 백작 에티엔, 부르고뉴 백작 에티엔 기다리며 요지부동. 이에 알렉시오스가 식량 끊음. 소규모 전투 발발. 일단의 십자군이 블라케르나이 진입, 동로마 황궁까지 약탈하여 그 와중에 알렉시오스의 애완 사자가 죽음. 이에 안셀무스가 중재, 레몽이 십자군 이끄는 것으로 일단락 [124] 레몽이 십자군 가있는 동안 툴루즈 백작령을 노려 파문될 뻔 [125] 한편 티레, 아르수프, 카이사레아, 아크레가 보두앵에게 사절 보내 조공. 다마스쿠스의 두카크, 5만 베잔트에 저번 '개의 협곡' 전투의 포로 석방 제안 [126] 수비대가 안전한 철수 조건으로 항복 [127] 3월이라는 기록도. 이후 다임베르트는 300 베잔트 바치고 직위 유지. 정확힌 모리스는 결국 그가 죄가 없다고 판정했는데 보두앵이 거부하자 다임베르트가 돈 바침. 이후 다임베르트가 동방 정교회 사제들을 성당에서 추방하려 함. 이에 정교회 신도들이 부활절 성묘교회에서 시위. 이에 보두앵이 성당과 수도원 열쇠를 정교회에게 돌려줌 [128] 동로마 장수 치타스의 5백 튀르크 용병대도 가세. 이후 콘야 (이코니움) 향하자는 블루아백 에티엔과 레몽의 조언에도 롬바르드 십자군은 같은 '이탈리아인' 보에몽 구하기 위해 파플라고니아 향할 것 고집. 한편 사드 앗 다울라 앗 카와시의 파티마 군대가 아슈켈론 도달, 라말라까지 진격하나 카이사레아의 보두앵의 군대가 다가오자 철수. 이후 보두앵은 자파에 머물고 아슈켈론의 사드는 지원군 기다리며 대치 [129] 툭테긴의 아들 부리가 총독으로 파견됨. 하지만 시민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트리폴리 군대가 진주. 부리는 트리폴리 카디 파크르 알 물크의 사과 편지와 함께 다마스쿠스로 보내짐 [130] 한편 6월 초 혹은 기욤 이후에 도착한 아키텐-바이에른 십자군은 롬바르드 십자군 합류 대신 예루살렘 직행 선택. 아키덴 공 기욤은 레몽과 원수. 부르고뉴 백 에티엔과 합류 원함. 한편 도중에 아키텐 십자군이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동로마 군대와 전투. 알렉시오스의 냉대 하에 콘스탄티노폴리스 도달 [131] 도시는 동로마 측에 반환됨 [132] 룸 셀주크의 클르츠 아르슬란이 주도, 다니슈멘드와 리드완의 지원군 [133] 종교적 지도자였던 밀라노 대주교 안셀무스는 부상이 도져 사망 [134] 기사들과 기욤, 에티엔은 길잡이 고용했다가 배신당하고 도적떼 (게르마니케아에서 동로마 측이 붙여준 페체네그 호위병들이라 주장)를 만나 다 털렸음에도 맨발로 타우루스 산맥 넘어 안티오크 도달. 이후 예루살렘에서 보두앵과 합류 [135] 이때는 기사들이 보병 버리지 않고 같이 싸우다 죽음. 잘츠부르크 대주교 티에모 전사. 기욤, 타르수스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감. 이후 해로를 통해 레반트 향함. 한편 이때 실종된 오스트리아 백작 부인 이다, 하렘 들어갔다는 소문. 이후 십자군 사이에 그녀의 아들이 장기라는 전설 생김. 연대상으로 불가능. 한편 바이에른 공 벨프 1세는 키프로스에서 사망. 바이에른 십자군 일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레몽, 블루아 백 에티엔과 함께 안티오크 향한듯 [136] 3차에 걸친 십자군의 돌격 모두 실패했고 신임 갈릴리공 위그가 자파로 도주, 패전보 알리고 안티오크의 탕크레드에게 도움 청하기도. 하지만 보두앵의 반격 성공. 베이루트 총독 사드 앗 다울라 앗 카와시 전사 [137] 시칠리아 백작 로제르 1세가 보내준것 [138] 리드완의 수긍 이후 카디 이븐 알 카샤브 등이 시위하여 성 헬레나 성당으로 옮김. 그외에 카르부카 사망. 아들 제케르미슈 계승. 자신이 지지하는 후계자 앉히기 위한 마르딘의 소크만과 싸움. 한편 하란의 태수 카라자가 민중 봉기로 축출되고 이스파한의 무함마드가 집권. 보두앵은 탕크레드 견제 위해 동로마에 동맹 제안하는 사절 파견. 사자 2마리 바침 [139] 탕크레드가 숙부 보에몽 대신 레몽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안티오크 주교 베르나르, 석방 위해 노력함 [140] 비록 필요없었지만 예루살렘측 구원 요청에 남하한 것으로 보임 [141] 블루아 백작 에티엔, 부르고뉴 백작 에티엔은 풍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보두앵과 함께 이집트 군에 맞섬. 한편 봄, 사치 부리던 교황 특사 모리스 사망 [142] 블루아 백작 에티엔이 보두앵에게 정찰병 보내라 했지만 저번 승리로 자신만만했던 보두앵에게 무시됨 [143] 풀숲에 숨었다가 파티마 병사가 그를 못알아보는 바람에 살아났다고도 하고 인근의 성채로 도주한 후 파티마 군대가 포위했는데 저번에 은혜 베풀어준 베두인 족장이 다음날 총공격을 알려줘 밤을 틈타 빠져나왔다고도함. 부상당한 고스만 드 브뤼셀이 예루살렘 도달해 패전 알림. 보두앵의 친척이자 에데사 백작 보두앵의 동생인 위그는 전투 중 탈출, 파티마 군의 추격에 휘하 병력 거의 다 잃고 자파 도달 [144] 격전 끝에 잡힘. 그의 용맹에 파티마 측이 감탄 [145] 며칠후 90여명의 기사들이 참십자가 조작을 대동하고 포위망 뚫어 자파 입성 [146] 이후 알 아잠은 회군 후 체포되어 감금됨 [147] 순례자의 산이란 뜻. 현재는 트리폴리 신시가지 한가운데에 위치함 [148] 제노바 함대와의 트리폴리 공격 실패 이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트리폴리 포위 시작 [149] 이후 가브리엘은 여전히 저항하는 성의 항복을 설득했으나 먹히지 않자 다니슈멘드 측에 의해 처형됨. 1102년 가을이라는 기록도 [150] 알렉시오스 : 26만 디나르, 클르츠 아르슬란 : 군사적 위협, 보에몽 : 13만 디나르 현금. 다니슈멘드는 제 3안 체택 [151] 이후 조슬랭과 주변 무슬림 영주들을 공격하여 몸값 13만 디나르 만큼의 돈을 뜯어냄. 이때 무슬리미예 점령. 이후 킬리키아와 동로마 총독 타토울이 지키는 마라쉬 공격. 알렉시오스가 파견한 부투미타스의 지원병 나타나자 철수. 모나스트라스가 킬리키아 맡음 [152] 다니슈멘드 가지 사망. 장남 귀무슈테킨 계승. 동생 산쿠르는 말라티야 (멜리테네) 계승. 봄, 보에몽과 조슬랭이 마라쉬 점령. 이후 알레포 침공하였으나 그 동맹인 아사신이 지키는 카파르 라탑 공격은 실패 [153] 도중에 란둘프의 동로마 함대와 격돌. 18대 남은 동로마 함대와 함께 라타키아 입항. 육지에서도 칸타쿠제노스의 동로마 군대가 제노바인 방해, 모나스트라스와 함께 킬리키아의 십자군 몰아냄 [154] 무함마드 역시 쿠데타로 축출되고 자왈리가 집권한 상태 [155] 에데사 주인 놓고 보두앵과 보에몽이 욕심 부리며 지연되는 사이에 튀르크 군대 도달. 본래 에데사 군대가 적을 유인하고 언덕의 안티오크 군대와 공격하는 거였는데 적이 생각보다 약하다고 판단되자 보두앵이 강건너 튀르크군 추격하다가 되려 격파됨. 이에 보에몽이 구원 시도하나 에데사 대주교 베네딕트 구하는거에 그침. 하란 수비대까지 싸움 가세하자 철수. 이후 탕크레드가 에데사 백국 섭정. [156] 보두앵은 학살을 명하지 않았으나 부유한 상인들의 행렬에 눈이 먼 제노바 인들이 습격. 이에 보두앵이 그들을 처벌하려 했으나 대주교의 설득으로 무산. 오히려 도시의 1/3을 그들에게 내어줌 [157] 7-8월이라는 기록도 [158] 이후 투투쉬 2세 폐위시키고 다쿠크의 동생 이르타쉬 옹립 [159] 제케르미슈, 하란 전투 이후 소크만으로부터 보두앵 가로채며 동맹 결렬. 혼자 에데사 공격했다가 보에몽의 반격으로 실패. 한편 탕크레드는 에데사를 자신의 친척인 리샤르 드 살레르노에게 맡김. 같은 십자군 동지보다 돈이 앞선다는;; 6월이라는 기록도 [160] 12월 22일이라는 기록도 [161] 한편 동로마 조정은 임박하다고 여긴 보에몽의 에피로스 침공에 앞서 킬리키아의 모나스트라스와 칸타쿠제노스 소환. 램프론의 오신에게 킬리키아 자치 맡김. 갈릴리 공 위그가 토론 요새 완공. 하지만 약탈 후 복귀하다가 다마스쿠스 군대의 매복에 당해 중상입음. 동생 제라르도 곧 사망. 보두앵, 갈릴리 공국을 제르바시오 바소쉬에게 봉함. 한편 다마스쿠스의 이론가 알리 이븐 타히르 앗 살라미가 '키타브 알 지하드' 완성. 1085년 톨레도 함락부터 십자군 인식. 선지자 말대로 예루살렘은 잠깐 잃을 것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정복될 것이라고 확신. 이듬해 사망 [162] 이후 혼전이 이어져 십자군과 튀르크 군대가 섞였고 주민들이 셀주크 군대의 입성을 막기 위해 리샤르가 돌아오기도 전에 성문 닫아버림 [163] 아랍인들은 그를 알 세르다니로 부름. 섭정 되자마자 키프로스의 알렉시오스 대리인 에우마티오스 필로칼레스에게 봉신 서약 [164] 12세. 이후 다마스쿠스 남쪽 하우란 지역으로 도주하여 보스라의 아미르 알 아이테킨의 진영으로 망명. 그의 도움으로도 복위 실패하자 보두앵 궁정으로 망명 [165] 호전적인 장군 사와바의 뜻대로 파병 [166] 다마스쿠스의 툭테긴은 부관 사바와에게 1천 3백 군대 주어 합류시킴 [167] 1099년 이후 최대규모. 5백 기병과 2천 보병 [168] 이집트 군대의 좌익이 전투 직전 하이파 습격 위해 이탈한 상태였음. 전투 이후 이르타쉬, 십자군의 도움 포기하고 자지라로 향함 [169] 이에 알렉시오스는 이집트에 포로로 잡혀있는 십자군 포로 3백명의 몸값 지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데려오며 배신 논리에 맞섬. 그리고 테살로니카에 사령부 차리고 보에몽 기다림. 디라키움 총독 요안니스는 제타의 반란군 볼칸 격파하지만 그가 반격하자 인질 바침 [170] 그리고 보두앵에게 그의 해임에 대한 해명 요구하나 무응답. 에베르마르가 대주교 자리 지킴 [171] 이후 두 도시 국가의 상인들이 상인 구역 얻음 [172] 아사신들이 리드완에게 도움 청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은 탕크레드에게 도움 청함. 하지만 샤이자르와 하마의 개입 위협에 탕크레드 철수 [173] 또한 탕크레드와 그녀의 이복동생 세실리아 약혼시킴 [174] 1004년이라는 기록도 [175] 8월이라는 기록도 [176] 토론 요새와 티베리아스 노린 것. 이때 보두앵이 환대해줘 사절들 감탄 [177] 제케르미슈 죽음 의심한 모술 유력자들이 에데사 포위하던 클르츠 아르슬란에게 제케르미슈의 양자 장기를 도와달라 청함. 한편 클르츠 아르슬란은 과거 협약에 따라 동로마에 보에몽과 맞설 원군 파병 [178]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요새 [179] 마르딘의 조카 이브라힘과 싸울 군자금 필요했던 일가지, 조슬랭 석방. 조슬랭, 모술로 향해 자왈리와 보두앵 석방 논의 [180] 다만 클르츠 아르슬란의 다른 아들이자 말리크샤의 이복동생 토그릴 아르슬란이 모후와 함께 말라티야에서 자왈리의 군대 저지. 한편 그 친척인 하산이 콘야에서 룸 셀주크의 섭정으로 등극 [181] 니키포로스 데카누스와 에우스타티우스 치미네라노스 섭정으로 [182] 봄. 교황 특사인 아를 대주교 기벨링이 예루살렘 도달, 아르눌프와 대주교 에브라마르의 분쟁 조정. 결국 대주교 폐위시키고 공석 선포. 보두앵, 기벨링 추천. 그가 대주교로 선출됨. 에브라마르는 카이사레아 주교 부임. 한편 마르딘의 태수 이브라힘 사망. 동생 다우드 계승. 가을. 레몽의 장남이자 서자 베르트랑, 계모 일비라에게 툴루즈 내주고 4천 군대와 40척의 함대로 트리폴리 향함. 제노바에서 그 지지 얻고 풍랑으로 테살리아 정박. 주민들에게 잘 대해줌. 알렉시오스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초대받고 트리폴리 백국을 봉신으로서 다스리겠다고 서약 [183] 5백 기병대 대동. 사촌 아불 마나킵이 섭정. 트리폴리 포위 중이던 기욤은 성내의 사기 하락을 기대하며 지나가게 해줌 [184] 정확힌 제르바제나 보두앵이 돈을 줄 수 있다고 하자 계약 파기로 여기고 처형해버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말 휴전 체결됨 [185] 시돈, 본래 3만 베잔트 대가로 다마스쿠스로부터 튀르크 지원군 부름. 해결된 후 도착. 이에 도시 툭테긴이나 십자군에게 바치지 않고 돌려보내는 대가로 9천 베잔트 지불 [186] 소득 없는 바그다드 방문 후 다마스쿠스에 와있던 파크르 알 물크, 자블라로 은퇴. 한편 아르카의 수비대장은 파티마조 대신 다마스쿠스의 툭테긴 선택 [187] 콘토스테파노스, 마리아노스, 마브로카타칼론 등이 지휘 [188] 몸값 6만 디나르. 조슬랭이 일부 지급 후 나머지 모일 때까지 자왈리 수중 남음. 자왈리, 그를 믿고 석방. 조슬랭과 보두앵, 에데사 향하나 리샤르에게 입성 거부당함. 탕크레드는 보두앵에게 3만 디나르만 제공. [189] 리드완이 자왈리에게 향하는 보두앵의 몸값 가로챔. 이에 자왈리가 발리스 점령한 것 [190] 보두앵은 500 기사, 탕크레드는 1500 군대 이끌고옴. 자왈리의 베두인 동맹 바누 마즈야드가 보두앵측 예비 군마를 약탈하러 이탈하자 탕크레드-리드완이 승리. 보두앵은 둘라크로 후퇴. 탕크레드가 둘라크 포위하자 에데사로 회군. 이후 탕크레드는 스스로를 '위대한 아미르'로 칭함. 보두앵, 아르메니아의 코그 바실과 동로마의 킬리키아 총독에게 도움 요청. 후자는 3백 페체네그 용병 보내줌. [191] 그외에 안티오크 대주교 그리스인 선임. 탕크레드에게 이를 실행시키지 못하면 보에몽 폐위. 허나 이후 보에몽이 잠적, 탕크레드는 이 조약 모름 [192] 혹은 안티오크 주교의 압력으로 탕크레드가 보두앵에게 에데사 돌려주었다고 함. 투르베셀 전투 직후 에데사에 설치된 아르메니아 자치 기구의 지도부를 체포, 눈을 뽑음 [193] 툭테긴이 부카이아 방문하던 틈에 매복하여 다마스쿠스 군대 격파, 샤이자르 군대 역시 격파. 다마스쿠스 영토인 아르카 점령. 한편 동로마의 키프로스 총독 에우마티오스 필로칼레스가 안탈리야 총독으로 보직 이동. 아드라미티움 요새 복원하고 람페 전투에서 튀르크 군대 격파 [194] 아랍인들은 그를 이븐 생 질로 부름. 탕크레드에게 그가 뺏은 트리폴리 백작령 반환 요구. 탕크레드, 동로마령 트리폴리 원정 돕는 조건 내세움. 이에 베르트랑이 자블라 공격 합세 제안하자 거부, 식량 끊음 [195] 파크르 알 물크, 안티오크의 봉신으로서 도시 지배한다는 조건에 항복. 탕크레드, 약속 어기고 그를 축출. 다마스쿠스로 향함 [196] 보에몽 2세가 에데사를 탈환한 후에도 탕크레드가 끝까지 내놓지 않음. 이때 반환하여 그 대가로 당시 공석이던 갈릴리 공으로 다시 봉해졌지만 안티오크에 머무름. 한편 베르트랑은 트리폴리 일대, 기욤은 타르투스와 아르카 통치. 아직 툴루즈에 있는 어린 알퐁스는 프랑스 영토 주어짐. 하지만 트리폴리 함락 때에 기욤이 '미지의 궁수'에게 살해됨. 베르트랑이 트리폴리 백작령 독차지. 세간의 의혹과 비난 [197] 1109년 술탄 무함마드가 불신자들과의 전쟁 이끌게 하라는 하나피 학자들의 조언에 클르츠 아르슬란의 아들 말리크샤 풀어줌. 말리크샤, 콘야로 향하어 섭정인 친척 하산을 죽이고 정권 장악. 한편 탕크레드는 오신의 킬리키아를 공격, 타르수스를 재점령 / 두카크, 십자군에게 항복하려 하던 귀무슈테킨의 바알벡에 아들 타즈 알 물크 부리 보내 장악하게 함 / 시아파 학자가 이끄는 일단의 시리아 인들이 바그다드 도착. 대사원에서 시위하며 현지 시아파와 연대해 대십자군 원정 여론 조성. 칼리파의 부인 행렬의 입성 방해 [198] 풀케르 드 샤르트르에 의하면. 알베르 드 엑스는 5월 27일로 기록. 이후 아크레 도착한 노르웨이 국왕 시구르 1세와 예루살렘 동행 [199] 그러려고 배를 준비한 상태에서 마우두드와 두카크가 재차 공격, 많은 기독교도 죽임. 이후 재차 에데사 포위했으나 실패. 다만 이로써 에데사 백국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 입음. [200] 성지를 방문한 첫 국왕. 1차 십자군 당시 하인리히 4세, 필리프 1세 모두 파문에 처해진 상태였음. 덴마크왕 에릭은 키프로스에서 병사. 왕비만 성지 도달. 한편 시돈의 수비대가 보두앵 암살 시도했으나 성내의 기독교도 수비대가 화살 편지로 이를 알려 대비함. [201] 1104년 리드완이 회복한 마라트 알 누만이 이때 다시 십자군 영토가 된 듯 하다. [202] 이후 카이사레아의 영주 외스타슈 가르니어가 시돈 지배. 보두앵은 아슈켈론으로 진군. 총독 샴스 앗 딘 칼리파가 재물 바쳐 무마시킴. 한편 시돈 함락 이후 시구르 1세와 노르웨이 십자군은 키프로스에서 월동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함 [203] 이해에 룸 셀주크 군대가 헬레스폰트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동로마의 트라키아 지방을 약탈. 한편 알렉시오스는 안티오크 원정 위하 부투미타스를 키프로스로 파견. 부투미타스, 트리폴리 향하여 베르트랑과 협상. 돈과 보급 약속 [204] 이에 시구르 1세는 선의의 표시로 금으로 된 바이킹 뱃머리 장식을 바침 [205] 이때 동로마 사절단이 바그다드 도착. 군중, 칼리파가 이슬람의 배신자라 여김 [206] 모술-마르딘-다마스쿠스-하마단의 연합군 [207] 사실 무슬림 연합군중 마라가의 아흐마드 2세는 조슬랭의 비밀 동맹이었고 에데사 대신 알레포 행군을 주장해 관철시킴 [208] 트리폴리 백작 베르트랑, 에데사 백작 보두앵, 조슬랭이 데려온 타르수스 영주 기, 마라쉬 영주 리샤르, 사루즈 영주 파간, 그리고 아르메니아 왕공 헤토움과 코그 바실의 지원군 [209] 이미 마야파리킨의 소크만 병사, 일가지 및 아흐마드 2세 철수 [210] 본래 레이날드라는 십자군 기사를 매수하여 십자군 영토 안전히 통과할 계획이었는데 그가 보두앵에게 폭로해버림 [211] 12척, 부투미타스 지휘. 하지만 티레가 제국의 동맹인 파티마 영토여서 형식상에 불과 [212] 한편 다마스쿠스의 툭테긴이 (아사신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암살 시도하는) 알레포의 리드완과 동맹. 말리크샤는 패배 후 알렉시오스의 사절 공손히 맞음 [213] 부투미타스의 동로마 함대가 보두앵을 아크레로 데려다줌. 보두앵, 동로마의 소극성에 불만. 부투미타스, 돈을 줌 [214] 부친과 달리 탕크레드와 허락. 그의 허락으로 베르트랑이 소유한 안티오크의 성채들까지 물려받음. 이후 토르토사는 트리폴리령으로 남음. 한편 부투미타스는 탕크레드와 싸우라고 베르트랑에게 지급한 군자금 중 남은 것 반환 요청. 퐁스의 수용, 선물로 화답 [215] 2월이라는 기록도 [216] 모후이자 코그 바실의 과부는 십자군에게 조공 바쳐 안정을 꾀하나 탕크레드는 공격 준비. 하지만 곧 사망 [217] 12월 5일이라 하기도함, 36세. 과부 세실리아는 퐁스와 재혼 [218] 1112년 가을, 에데사 백작 보두앵이 와병 이유로 후계위 논하자며 투르베셀의 조슬랭 초청. 현지 아르메니아 인들과 공모하여 (실제로 명망 높음) 찬탈 꾀했고 마우두드의 에데사 포위 때에 충분한 물자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르베셀 뺏기고 추방됨 이후 조슬랭은 예루살렘 왕국으로 망명. 한편 1113년 알렉시오스는 룸 셀주크 원정 나서나 칼케돈 인근 다말리스에서 와병. 이에 니케아 총독 에우스타티오스 카미체스가 지휘. 한편 말리크샤는 페르가몬 점령하고 아미르 무함마드는 포이마메온 점령. 튀르크 대군이 비티니아 침공, 에우스타이오스가 니케아에서 포위됨. 라포디온도 포위되고 튀르크 아미르 마나로그가 아비도스 약탈. 한편 에우스타티오스가 반격, 아미르 무함마드 격파하고 튀르크 군 추격. 하지만 매복에 포로가 됨. 그동안 회복한 알렉시오스, 부르사 인근 올림포스 산 우회하여 튀르크 군 습격, 프리기아로 몰아내고 쿼타히야에서 패배시킴. 알렉시오스, 모나스트라스와 가브라스와 튀르크 군 추격. 아미르 무함마드가 후위 기습해왔으나 격퇴됨. 많은 약탈물 회복하고 에우스타티오스도 탈출해 돌아옴. 알렉시오스 회군. 한편, 봄. 보두앵이 다마스쿠스 영토 공격. 이에 툭테긴이 마우두드와 일가지에게 도움 요청. 후자는 아들 아야즈 파견 [219] 이후 밀라노 대주교 피에르가 교회 문제 논의 위해 교황 특사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됨. 니케아 주교 에우스타티오스와 논의, 어느정도 합의 도달 [220] 이때 보두앵이 낙오되었는데 셀주크 병사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검만 빼앗고 살려주었다고 함 [221] 시칠리아 왕국의 재산을 원했던 보두앵은 그녀의 아들 로제르 2세를 후계자로 인정하기까지 함 [222] 총 420척. 프로방스 백작 레몽 베렝게르 3세와 몽펠리에 백작 기욤, 제노바 제독 위고 다 팔라시오 엠브리아코, 피사 주교 피에트로 모리사니 등이 지휘 [223] 10월 10일로 표기된 자료도 있고 이때 죽었다는 기록도 있음 [224] 12월 10일이라고도 함 [225] 술탄 무함마드의 명령. 한편 알레포의 알프 아르슬란은 툭테긴과의 동맹 확정을 위해 다마스쿠스 방문. 교황 특사인 오헝쥬 주교 베렝게르 예루살렘 당도. 성직 매매로 고발당하였고 또한 보두앵의 이혼 사실 확인 없이 아들리아데와 혼인시킨 주교 아르눌프 폐위. 하지만 아르눌프의 입김 하에 추후 선거는 열리지 않음. 그리고 아라곤의 알폰소 1세와 레온-카스티야 여왕 우라카 이혼. 일시적 연합 해체 / 수아송의 군중들이 감옥의 카타리파 등의 이단 끌어내 화형시킴 [226] 한편 에데사 백작 보두앵의 의심받아 추방되었다가 돌아온 아르메니아인들이 바실 두가에게 도움 청함. 바실 드가, 알 보르소키와 동맹. 보르소키, 부관 순쿠르 the long 휘하의 군대 파견 [227] 그해 봄 알레포에서 축출된 아사신들이 시리아 중북부로 유입된 것. 황급히 돌아온 술탄 이븐 문키드는 왕실 여인들까지 동원해 시타델을 공격함 [228] 신자르의 아미르 테무레크와 미래의 이마드 앗 딘 장기도 장교로 참가. 장기의 첫 군사원정. 한편 일가지는 파병 거부했는데 이에 알 보르소키가 행군 도중에 마르딘 공격하자 아들 아야즈에게 군대 주어 참가시킴 [229] 이때 셀주크 왕자 마수드가 체포되었는데 곧 풀려남. 그럼에도 술탄이 노하자 일가지는 다마스쿠스의 툭테긴과 동맹 [230] 이로써 정복 완료. 다만 그해 말 철수. 한편 에데사 백작 보두앵이 아르메니아 왕공 바실 드가의 수도 라반 포위. 바실, 경쟁자인 루펜 왕조의 토로스에게 도움 요청. 토로스 당도, 십자군 철수. 하지만 바실은 토로스 감금하며 은혜를 져버림. 가을, 예루살렘 대주교 아르눌프 로마 도달. 교황 파스칼 2세 설득해 보두앵과 아들리아데 결혼 무효화시키는 조건으로 복권됨. 겨울, 시리아 원정 실패한 하마단의 아미르 부르수크, 자지라에서 사망. 사기 저하된 연합군 해체되어 흩어짐 [231] 셀주크 왕자 마수드, 신자르의 테무레크 참가. 홈스의 키르한, 샤이자르의 문키드 가문 호응 [232] 이에 각각 5백 기사와 4천 보병, 2백 기사와 2천 보병 이끌고옴 [233] 룰루가 수비대 파견 요청해 이전 모술 총독이던 주유쉬 베그 파견됨 [234] 당시 셀주크 군대의 상당수는 수렵 위해 흩어진 상태라 제대로 대응 못함. 부르수크는 언덕에서 항전, 하렌크의 영주 기 프렌넬이 신자르 부대 격파. 부르수크는 끝까지 싸우지 말라는 참모들 의견에 후퇴. 이후 로제르는 카파르탑 수복. 술탄 무함마드는 더이상 시리아에 개입 안하기로. [235] 주민들이 도주. 보두앵은 육지인 에일랏과 그라이아 섬 양쪽에 성을 쌓고 수비대 배치. 그외에 스칸델리온 [236] 알렉시오스가 재차 다말리스에서 와병. 그틈에 튀르크 군대가 비티니아 침공해 니케아 포위하나 라파디온의 동로마 군대에 격퇴됨. 회복된 알렉시오스, 대군 이끌고 추격 나서 도릴라리움 당도, 필로멜리온 구원. 튀르크 군 산지로 흩어짐. 알렉시오스, 기독교도 주민들 서쪽으로 옮김. 암포운 인근에서 룸 셀주크 군 격파. 다만 차남 안드로니코스 전사. 말리크샤, 휴전 제안하고 개인 면담. 동맹이자 봉신 서약. 1071년 이후 튀르크인이 점령한 제국령 대한 알렉시오스의 종주권 인정. 안나 콤니니에 따르면 그 영토 반환까지 합의했다고. 알렉시오스는 그의 동생 마수드의 역심 경고하고 회군. 그러자 마수드가 반란, 군대 역시 동참. 말리크샤, 동로마 요새인 티라기온으로 피신하나 마수드의 군대가 포위, 이에 수비대가 말리크샤 넘겨줌. 이후 실명되고 감금됨. 마수드가 술탄 즉위. 그외에 로제르와 퐁스가 트리폴리 인근의 마르캅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함. 에데사 백작 보두앵 2세가 토로스에게서 바실 드가를 넘겨받아 고문하여 라반을 탈취. 이후 바실 드가는 동로마 조정으로 망명. [237] 바그다드 도달, 술탄에 의해 다마스쿠스, 하마, 홈스의 지배자로 책봉됨 [238] 1116년의 일이라는 기록도. 1100년부터 에데사 백국에 복속하던 영주 아부 이가립을 폐하고 측근인 발레랑 드 르 퓌세를 영주로 임명. 발레랑, 아부 이가립의 딸과 결혼. 이후 보두앵은 1099년부터 에데사 백국의 속구이던 바그라트의 코로스 공국도 병합. 다른 아르메니아인 왕공 가르가르의 콘스탄티노스 감금. 이로써 유프라테스 상류 일대의 아르메니아 소왕국들이 소멸하고 루펜 왕조만이 남게됨 [239] 아르눌프, 와병 중인 보두앵에게 죽음 앞두고 죄 짓지 말라고 설득. 하지만 아들리아데가 가져온 지참금은 이미 병사들 월급과 요새 건설로 탕진한 상태. 이후 시칠리아 국왕 로제르 2세는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도움을 일체 거절.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보두앵의 전 아르메니아인 부인도 아르눌프의 설득에도 귀환 거부. [240] 하지만 그럼에도 별 효과가 없고 튀르크 장수들의 설득에 술탄샤가 그에 대한 지지 철회하자 마르딘의 일가지에게 도움 청함. 하지만 일가지의 군대 도착하기 전에 쿠데타 일어나 이븐 미힐이 집권, 일가지의 입성 거부. 다만 그의 아들 키질이 그의 대리인이자 동맹의 상징으로 성 내에 상주하는 것 허락. 한편 술탄 무함마드가 알레포 총독으로 지정한 알 보르소키가 공격해올 때에 도와준다는 조건 하에 발리스를 일가지에게 할양. 하지만 가을 무렵 일가지의 아들 키질을 홈스의 키르한에게 넘기며 그와 동맹해버림. [241] 1103년 아크레 공성전 당시 입은 상처가 재발했다고 한다 [242] 친형 외스타슈, 친척 보두앵 2세를 1,2순위 후계자로 지명. 사후 그의 요리사가 내장을 제거하고 염장하여 예루살렘으로 운송 [243] 8월 5일이라는 기록도. 마흐무드의 동생들도 영지 받음. 마수드는 파르스와 이스파한, 토그릴은 카즈빈, 산자르는 호라산 [244] 그외에 마르캅, 사흐윤 (살라딘 요새) 등도 비슷한 시기에 함락됨 [245] 1117년 가을이라는 기록도 [246] 이븐 미힐 몰아내고 집권한 흑인 환관 [247] 툭테긴이 요단강 동쪽 영토 할양을 대가로 평화 제안하나 보두앵이 거부 [248] 소조폴리스 점령하고 라오디케아 도달했을 때에 여동생 안나 콤니니의 궁정 쿠데타 소식 듣고 귀환, 그녀를 은퇴시킴. 이후 그녀는 알렉시아드 저술. 다시 전선으로 복귀, 팜필리야까지 진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안탈리야 간 육상 연결로 확보. 하지만 카리아 지방엔 튀르크인 잔존, 2차 십자군 때 불신 유발 [249] 2월 1일이라는 기록도 [250] 보두앵, 갈릴리의 조슬랭 돕고 북상 준비 [251] 이후 사르마다로 도주한 귀족 레이날드가 항복. 레이날드 제외한 십자군 포로들 알레포에서 처형됨. [252] 안티오크 대주교 베르나르는 성내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무장해제시킴. 보두앵의 안티오크 도착 다음날 퐁스, 조슬랭 도달 [253] 한편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산자르의 종주권 인정하며 내전 종결 [254] 한편 무슬림 측도 자르다나의 영주인 '나병자' 로베르 등 많은 포로 얻음. 일가지, 로베르 몸값 받고 풀어주려 했으나 툭테긴이 직접 죽임. 같은날 셀주크 내전. 사와 전투. 산자르가 마흐무드 2세를 사로잡음. 술탄 칭호 쓰게 해주는 대신에 라이, 마잔다란 등을 차지함. [255] 조슬랭 도착 전까지는 보두앵 2세의 아내 모르피아가 섭정 [256] 이해에 구호기사단 창립자 제라르 사망. 레몽 드 레 퓌가 기사단장 계승. 군사적 목적 강조 [257] 이 회의에서 기독교도와 무슬림 간의 성적 접촉을 금지하였고 템플 기사단 승인 [258] 이때 카파르탑에 대한 십자군 점유가 인정됨. 이번에도 역시 참십자가 대동. 이번 휴전 조약에서 십자군 국경 확실해짐. 자르다나 허물어짐 [259] 사로잡힌 마수드 역시 사면됨. 이해에 요안니스 2세는 발칸의 페체네그 침공군에 맞섬. 스타라 자고라에서 월동 [260] 12월 18일로 기록된 것도 있음 [261] 이해 지리 왕조 함대가 칼라브리아의 니코테라 습격, 주민 노예로 데려감. 에스키 자그라에서 요안니스 2세가 바랑인들의 활약으로 페체네그 군대 격파. 발칸은 페체네그 위협에서 해방됨 [262] 약 60여명의 기사들 생포됨. 발라크는 조슬랭에게 에데사의 항복 종용하면 풀어주겠다고 제안하나 조슬랭은 거절, 카르푸르트 (카르트발트)에 감금됨 [263] 장남 쉴레이만은 마르딘, 차남 티무르타슈는 마야파리킨, 조카 바드르 앗 딘 쉴레이만은 알레포, 조카 발라크는 하란, 다른 조카이자 소크만의 아들 다우드는 디야르바크르 (아미다) 계승 [264] 이해에 시칠리아 함대가 판텔레리아 섬을 점령, 조지아의 다비트 3세는 아니 점령 [265] 4월 23일이라는 기록도 [266] 아크레에서 열린 귀족 회의에서 결정됨 [267] 이때 4천에 달하는 무슬림 군사들이 죽었다고 한다. 4척을 나포한 베네치아 함대는 이집트 해안에서 10척의 상선을 추가로 나포한 후 아크레로 복귀 [268] 루이 6세에게 반란 일으켜 영지 압수당한 후 1119년 성지 당도한 보두앵 2세의 사촌 위그 1세의 아들. 엠마와 결혼 후 외스타슈의 어린 아들들인 고티에와 외스타슈의 섭정으로서 카이사레아와 시돈 통치, 영향력 급부상 [269] 크리스토돌루스의 부관인 안티오크의 게오르그 (조르주)가 알 마디야 외곽의 앗 디마스 성채를 함락했으나 지리 왕조의 14세 아미르 하산이 지하드를 선포, 지리 군대가 반격하자 게오르그 철수. 남겨진 디마스의 시칠리아 수비대는 봉쇄되어 아사하거나 마지막 돌격에서 전사 [270] 성내의 기독교도들이 합세하여 시타델을 점거. 이후 보두앵은 남고 조슬랭은 성을 나섬. 조슬랭, 수영 못함. 유프라테스 강에서 공기 넣은 가죽 튜브 타고 도하. 안티오크 향함. 주교 베르나르, 충분한 병력 없다고 하여 예루살렘으로 남하 [271] 비보를 듣고 하루만에 카르트발트로 진군 [272] 그중엔 대성당도 포함되어 있었다 [273] 그외에도 십자군이 요르단 일대 약탈 [274] 베네치아는 예루살렘 왕국의 각 도시의 거리 하나씩을 할당받고 티레와 아슈켈론은 1/3 영유. 또 1년에 300 베잔트씩 받음. 그리고 베네치아는 예루살렘 왕국에게 베네치아 선박을 통해 성지 향하는 순례객들의 운임 1/3 지공. 다른 국가의 관세 변경 시 반드시 서로 상의 [275] 다만 그 직전 충분한 비가 내려 시민들에게 충분한 식수 확보. 한편 1123년의 패배 이후 파티마 측은 해군 미비. 칼리카 알 아미르의 요청으로 다마스쿠스의 툭테긴이 700 튀르크 용병 파견함 [276] 반란 일으키자 마야파리킨의 티무르타슈가 도시를 점령했는데 총독의 동생 이사가 시타델에서 버티며 조슬랭 부른 것. 한편 이어진 조슬랭과 발라크 간의 전투에서 템플러 창립 멤버 중 한명인 '수도사' 지오프리 전사 [277] 사촌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일가지의 아들 [278] 바니야스까지 진군하여 상황을 지켜봄. 허나 이집트 함대가 다가오기 전까진 안움직임. 결국 가만히 있다가 예루살렘 대주교 고르몽이 파견한 기욤 드 뷔르와 퐁스의 군대가 다가오자 다마스쿠스로 철수. 협상으로 전환. 한편 6월, 요안니스 2세가 교황 칼리스토 2세에게 교회 통합 문제 논의 제안 [279] 이후 베네치아 함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향하며 로도스 약탈, 키오스에서 월동 [280] 6월이라는 기록도. 그외에 보두앵은 베두인 부족장 두바이스와의 동맹을 끊고 알레포와 함께 그와 싸울 것을 약속. 한편 보두앵의 부인 모르피아가 협상 돕기 위해 안티오크 당도 [281] 다른 기록에 따르면 6월에 하란에서 샤이자르로 향하여 아미르 술탄에게 감사를 표한 후 8월 경 안티오크로 돌아갔다고 한다 [282] 보에몽은 티무르타슈에게 안티오크 공국의 주인은 보에몽 2세이고 자신은 그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영토 인도할 수 없다고 둘러댐; [283] 그 통치자인 형 쉴레이만의 죽어가고 있었으므로 그 영토 차지하려함. 한편 두카크의 아들인 술탄샤가 돌아와 왕위 요구하는 혼란기 [284] 10월 6일 혹은 29일이라는 기록도 있다 [285] 이후 토그릴은 보두앵과 함께 알레포 포위 동참 [286] 동생 아랍이 콘야를 포위, 이에 요안니스 2세 궁정으로 피신 [287] 알레포 시민들은 십자군에 대한 추격을 원했지만 알 보르소키는 도시 둘러보는 것을 선택 [288] 처음엔 마흐무드 2세의 경쟁자인 토그릴과 싸우며 그의 감사 인사 받음. 한편 3월, 알 보르소키가 샤이자르 방문해 아미르 술탄에게 예루살렘-에데사의 인질 넘길 것 강하게 제안. [289] 1천 1백의 기사, 2천의 보병 [290]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 에데사의 조슬랭 1세, 트리폴리의 퐁스, 아르메니아의 레오 1세 [291] 이때의 수확물로 조슬랭의 아들 조슬랭 2세 등의 십자군 포로들의 몸값 마련 [292] 다만 카파르탑은 보르소키의 영토로 유지됨 [293]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 우투르메르의 기사단 본떠 몽레알 델 캉포 기사단 설립. 4년 후 현지 템플 기사단에게 흡수됨 / 유아세례, 미사, 성당 건물, 망자 위한 기도, 십자가 숭경, 교회의 권위, 성서의 상당부분을 배척하던 피에르 드 뷔르스, 툴루즈 백작령에서 설교하던 도중 생 질에서 십자가 모아 불태우다가 군중에 의해 화형됨 [294] 다만 전투 중 툭테긴이 낙마하자 그가 전사했다는 소문이 퍼져 다마스쿠스 군대가 후퇴하며 승리는 못거둠. 이후로 아사신과 부리 왕조의 동맹. 보두앵은 많은 약탈품과 귀환 [295] 본래 파티마 해군과 합동 작전하려 했는데 파티마측이 그냥 철수해버리자 보두앵과 평화조약 맺음 [296] 아랍이 다니슈멘드 침공해 귀무슈테킨의 아들 무함마드 사로잡음, 이에 귀무슈테긴이 반격하여 코마나 전투에서 아랍 격파하고 무함마드 구출. 이후 동로마령 폰투스, 파플라고니아 침공. 총독 알렉시오스 카시아노스 항복. 콤니노스 가문의 본래 영지인 카스타모나 역시 점령됨. 그해 시리아의 아사신 지도자 바흐람 살해됨. 이스마일이 계승 [297] 독살로 추정됨 [298] 조슬랭 1세가 로제르 드 살레르노의 누이 마리아와 결혼, 그녀의 지참금으로 아자즈. 근데 보두앵 2세가 그는 군주가 아닌 섭정이었음으로 지참금에 영토 가져갈 수 없다고 주장. 아자즈 점령. 이후 서로 습격함. 이로써 함께 알레포를 공격하려던 보두앵 2세의 계획이 틀어짐 [299] 보두앵 2세와 베르나르 주교의 중재 [300] 아르투크 왕조의 바드르 앗 딘 쉴레이만. 일가지의 조카 [301] 한편 바니아스의 아사신 지도자 바흐람 전사 (1127년이라고도 함). [302] 고드프루아가 다임베르트에게 약속한 것 끌고온것. 우선 하이파 내주고 아슈켈론 점령 시 예루살렘 넘겨주겠다는 것. [303] 기 드 브리스바는 베이루트의 영주. 장녀 멜리장드의 남편감은 곧 보두앵 2세의 후계자를 의미 [304] 안티오크 대주교 베르나르가 알레포 포위 때 제대로 안싸웠다며 조슬랭 파문. 이후 조슬랭 병에 걸림. 보두앵의 설득에 보에몽에게 봉신 서약하고나서야 아자즈 얻음. 비슷한 시기 위그가 르 망스에서 풀크와 면담 [305] 1120년 우투르메르 방문하였고 잠깐 템플러 평수사로 활동함. 이에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추천. 템플 기사단장 위그도 호의적으로 평가 [306] 6월 18일로 기록된 것도 있다 [307] 다만 샤이자르 인근 하마는 장기에게 복속 안함. 에데사와의 휴전은 1127년의 일이라 기록된 것도 있다. [308] 산자르의 딸이자 마흐무드의 부인의 지원을 받았다 [309] 직접 종군 외에도 금전적 후원을 제시, 종군까지는 무리라 여기는 제후들과 평민들에게도 십자군의 기회를 확산시켰다. 한편 이때 런던 외곽의 홀번에서 잉글랜드 첫 템플러 거점 마련 [310] 하지만 곧 암살됨. 다른 아들이자 콘스탄티노스의 동생인 레오 계승. 혼란을 틈태 다니슈멘드의 귀무슈테킨이 폰투스 원정 그만두고 킬리키아로 남하. / 베네치아의 도제 도미니코 미카일 사망. 피에르 폴라니 계승 [311] 이때 알 가랍 쿨루후, 즉 서쪽 전체의 영토가 주어졌는데 애매한 표현ㅋ [312] 그와 아사신이 바니아스를 십자군에게 넘겨준다는 음모가 발각된 것이 계기인듯 하다 [313] 망명과 목숨 보장을 대가로 요새 넘김 [314] 기욤 포함한 45명만 살아 돌아감 [315] 당시 부리는 승리를 자축하며 연회를 연 상태라 십자군에게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비바람으로 땅이 진창으로 변하고 십자군이 폭풍을 신의 징벌로 여겨 사기가 저하되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기욤 드 티레는 '신의 의지 앞에 인간의 의도는 별 효과를 낼 수 없다'고 평가. 한편 첫 전투에서 패배한 십자군은 풀이 죽은 채로 대부분 귀국. [316] 보에몽이 아나자르부스 포위하자 아르메니아 왕 레오가 도움요청. 이에 귀무슈테킨이 지한 강 지나는 보에몽 군대 기습해 격파. 그의 목은 소금에 절여져 바그다드로 보내짐. 이후 동로마 군대가 개입해 다니슈멘드 철수 [317] 개종한 유대인 가문. 부유하였고 독일과 대립 [318]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가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 비판하고 인노첸시오 2세 지지. 한편 아나클레토 2세는 이탈리아 남부의 아벨리노로 향해 로제르 2세에게 의탁 [319] 같은날 모로코에선 무와히드 왕조의 창건자 무함마드 이븐 투마르트 사망 [320] 이후 알릭스는 섭정직에서 해지되어 지참금이던 라타키아와 자블라의 영지로 은퇴. 10월 1일이라는 기록도 있음 [321] 이에 튀르크 기병대가 손쉽게 안티오크 공국 공격? 한편 다니슈멘드 군대가 카스타모나 재점령 [322] 9월 11일로 기록된 것도 있다 [323] 1130년 알레포 인근 요새를 포위하다가 낙마하여 해자에 떨어지며 입은 상처가 도짐. 이후 다니슈멘드가 카이순 공격하자 아들 조슬랭 2세에게 구원 명령. 하지만 그가 병력 적다고 거절하자 9월 말엽 직접 출정. 이에 다니슈멘드 군대 철수. 조슬랭 1세, 카이순 안전하다는 소식 듣곤 영면 [324] 한편 자르다나의 영주 기욤이 알레포 군대의 습격으로 전사. 과부 베아트리스,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와 재혼. 이에 자르다나가 에데사령으로 편입됨. /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가 파플라고니아 원정. 다니슈멘드로부터 카스타모나 수복. 1070년대 상실한 할리스 협곡 일대 진격. 한편 요안니스가 다니슈멘드랑 싸우는 틈에 룸 셀주크 군이 피시디아의 소조폴리스 점령. 그리고 이사키오스 일당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음모 꾸밈 [325] 이로써 1058년 이후 처음으로 셀주크 왕가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압바스 왕조의 쿠트바가 낭송됨. [326] 여름. 정확한 달은 아닐 수 있음. 연도 역시 1134년일수도. 위그의 의붓 아들들인 외스타슈 (시돈 영주)와 고티에 (카이사레아 영주)는 어린 계부 싫어함. 소문을 부채질하며 풀크의 질투심 유발. 그리고 발터, 풀크에게 위그의 역모 고발. 이에 위그가 반발하자 고티에가 '아버지에게' 결투재판 신청. 하지만 위그가 결투장 나타나지 않아 패소. 이후 위그는 아슈켈론으로 향하여 파티마 지원군 얻어 하이파로 돌아와 '정말로' 반란 일으킴. 샤론 들판 습격하나 가장 인지도 있는 봉신인 이벨린 영주 발리앙 1세의 군대에게 저지됨. [327] 성유물?! 앞에 장기의 군대의 상당수가 전투를 거부해버려 대패하고 혈혈단신으로 도주. 한편 같은 시기 신성 로마 제국의 로타르 황제가 교황 돕기 위해 이탈리아의 피아첸차로 당도. 인노첸시오 2세 가담. 이에 로제르 2세는 아나클레토 2세 돕기 위해 로마에 파병 [328] 자르다나 영주 기욤과 사흐윤 영주 가랑탕 형제의 지지, 나머지 알레포 영주들은 예루살렘 측에 도움 요청. 한편 퐁스와 조슬랭은 부왕들은 보두앵 1,2세와 개인적으로 주종관계 약속한거라며 풀크에 충성 거부. 독립 시도 [329] 트리폴리 백국의 반발이 두려워 육로 대신 해로 택한 것 [330] 퐁스는 탕크레드의 과부였던 세실리아와의 결혼 때 그녀가 가져온 지참금은 알 루즈 (샤텔 로그)와 아르즈간의 두 요새를 지배하며 안티오크 공국에 영향력 행사. 살라미야를 공국령에 포함시키기도. 한편 다른 기록에 의하면 원수 레몽 드 마조이르가 풀크의 이름으로 안티오크 섭정 되었다고 함. 알릭스의 반란은 1131년이라고도 한다. 확실치 않음 [331] 바니야스 함락 며칠 후의 일. 위그의 부인 엠마 역시 풀크에게 선처 부탁했으나 효과 미미. 엠마는 첫 예루살렘 대주교 아르눌프의 조카. [332] 트리폴리 문제 해결하고 킨나스린 향함. 밤에 습격 가해 격퇴함. 하지만 그가 돌아간 후 습격 재개됨. 이때 안티오크 공국에 알 쿠사이르 (쿠르사트) 성채 추가됨 [333] 요안니스 2세가 파플라고니아 원정 마치고 돌아가자마자 반격한 것. 이에 요안니스는 대규모 원정 준비함. 한편 예루살렘에서 추방을 위한 배를 기다리던 위그가 한 저녁에 '길거리 모피 장사꾼'에게 습격을 당해 중상 입음. 이에 여론은 풀크의 복수라고 의심. 풀크, 전격 조사에 착수해 한 브르타뉴인 기사를 용의자로 잡아 심문. 이후 오체분시되어 처형됨. 처형 중 왕의 호감을 사기 위해 저질렀다고 실토. 하지만 멜리장드의 의심은 깊어가고 위그의 적들은 호위 대동해야함. 이후 시칠리아로 향하여 먼 친척인 로제르 2세로부터 가르가노의 영지 하사받았으나 후유증으로 사망 (1134년) [334] 토그릴과 함께 봄에 북상했다는 기록도 있음 [335] 킨나스린의 사와르 대처하기 위해 안티오크로 향하던 중 시돈에서 트리폴리 백작부인 세실리아의 급보를 받고 몽페랑드 (바린)에서 튀르크 군에게 포위된 퐁스 구원. 이로써 트리폴리-예루살렘 관계 회복. 퐁스 아들 레몽과 멜리장드 여동생 헤로디나 결혼 합의 [336] 재차 파플라고니아 향하던 요안니스 2세, 이 소식 듣고 신속히 강그라 포위 합류. 하지만 수비대가 버텨냄. 제국군은 린다코스 협곡에서 월동 [337] 성전 후원한다는 이유 물론 지켜지지 않음 [338] 강그라 함락은 1135년 초 겨울의 일. 요안니스 2세 지휘. 한편 요안니스 2세가 독일로 사절 파견해 로타르 3세에게 로제르 2세 공격 부탁. 이에 로타르 3세도 하벨부르크 주교를 콘스탄티노폴리스 파견해 논의 [339] 보호를 대가로 도시 넘겨주겠다함. 만약 도와주지 않는다면 십자군에게 도시 넘겨주겠다고 협박 [340] 에메랄드란 뜻. 부리 사망한 후 그 와지르였던 유수프와 애인관계. 이에 아들 이스마일이 그를 죽이려 하나 주무르드에 의해 저지됨 [341] 2월 1일이란 기록도 있음 [342] 군대 지닌 강력한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가 특사 파견해 다마스쿠스의 독립을 존중해 달라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 결정적이었음 [343] 정확한 달은 아님. 추측; 투르베셀에는 조슬랭 2세의 가족들이 머물고 있었음. 이에 백작은 풀크에게 도움 청함. 풀크, 구원병과 안티오크로 북상 [344] 이때 바스라 총독 베그 아바, 마수드 편으로 전향 [345] 라울, 안티오크 주교구는 사도 베드로가 직접 세웠으므로 교황 승인 필요 없다고 주장. 풀크의 지배권도 부정 [346] 그리고 베그 아바가 바그다드 총독으로 임명됨. 이에 시민들 반발하자 성벽 일부 부숨. 6월 14일이라는 기록도 [347] 하지만 이에 동로마 입김으로 가톨릭인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라 판단한 라울은 변심하여 제후들에게 경고. 풀크에게 하루속히 콩스탕스의 남편감 찾길 권유. 당시 잉글랜드의 헨리 1세 궁정에 있던 기욤 9세의 막내 아들 레몽 드 푸아티에 소환. 주교 라울이 그녀에게 푸아티에의 레몽이 그녀와 결혼하러 온다하고 무마시킴. 하지만 라울은 직접 레몽과 콩스탕스 결혼 주선. 망신당한 알리스 은퇴. 레몽, 시칠리아 측의 방해를 받으며 우투르메르 향함 [348] 산자르의 군대를 환영하는 자리였다고. 8월 29일이라는 기록도 [349] 마라쉬 영주 보두앵도 참가. 다만 레오와 인척관계인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는 불참 [350] 이후 레오의 아들들이 다투는 동안 다니슈멘드 군대가 킬리키아 북부의 여러 도시 점령. 레오, 레몽에게 봉신 서약하고 킬리키아의 여러 요새 할양 약속 후 풀려남. 약속 불이행. 한편 요안니스 2세는 안티오크로의 진격로 확보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의 킬리키아 대한 대규모 원정 준비. 가을, 안탈리야에서 서부 킬리키아로 진군. 다니슈멘드, 점령지 그에게 넘기고 도주. 그해 안티오크의 제후 레몽 드 마조이르가 튀르크 군벌이 일시적으로 장악했던 안티오크 남쪽의 비시크라일 성채 수복. / 한편 그해 다마스쿠스에선 맘루크 장군이던 바르자와쉬 (바즈와지)가 대낮의 광장에서 주무르드의 애인 유수프를 살해하고 실권 장악. 정권 정당화 위해 반십자군 노선 취함. / 템플러 초대 기사단장 위그 드 파앵 사망 / 예루살렘 왕국의 헤브론과 아슈켈론 사이의 베스기벨린 성채가 구호 기사단 (병원 기사단)에게 주어짐. 군사 기사단에게 맡겨진 첫 십자군 성채 [351] 알릭스는 성당에서 딸 콩스탕스와 함께 있었는데 레몽의 일당이 들이닥쳐 콩스탕스 데려감. 충격 입은 알릭스는 재차 라타키야로 은퇴. 레몽, 주교 라울에게 복종 표함. [352] 알레포의 사와르가 파견한 아프신의 군대가 안티오크 공국 침공해 라타키아까지 약탈하고 마라쉬의 영주 보두앵의 영토 습격하여 카이순까지 이름. 많은 포로, 약탈물과 귀환 [353] 한편 퐁스와 함께 포로로 잡힌 트리폴리 주교 제라르는 신분 숨기고 있다가 포로 교환 때에 석방되어 무사히 귀환 [354] 현지 기독교도들이 바르자와쉬의 길잡이 역할. 부친의 복수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 생존자는 노예로 팔아버림. 기욤 드 티레는 이 사건이 레몽의 '전투적 용기'가 드러난 첫 사례였다고 평가함.. [355] 이에 셀레우키아 포위하던 아르메니아의 왕 레오, 포위 풀고 동쪽으로 철수 [356] 이때 선발대 이끈 장수 이름이 살라흐 앗 딘 야기 시얀. 6월 말엽 포위 시작 [357] 7월 말이라는 기록도. 몽페랑드는 부카이아 고개 관장하는 중요한 요세. 장기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선발대가 패해주며 후퇴하고 이에 십자군이 추격해오자 후발대로 포위 섬멸하였다. 수천의 십자군 전사. 이후 이어진 포위전에서 장기는 본래 모든 항복 협상을 거절했으나 조슬랭이 온다는 소식에 협상 수용. 완전히 포위된 풀크는 그 소식 모름. 비둘기가 없어서 풀크-레몽의 몸값 5만 디나르와 성채 넘기기로 합의. 기록에 따라 그냥 성채만 내주고 풀려났다고도 함. 한편 예루살렘 대주교 기욤이 남은 군대와 참십자가 대동하고 북상. 그 틈에 다마스쿠스의 바즈와쉬는 유대 지방 습격. 성벽 없는 나블루스 습격, 약탈 [358] 레몽, 처음엔 동로마 봉신으로 도시 다스리겠다고 했으나 요안니스가 거절. 무조건적인 항복 요구. 풀크가 도움 거절하자 레몽 결국 항복. 직접 동로마 진영에 출두하여 시리아의 새 영지 대가로 안티오크 포기. 동로마 휘장이 시타델에 계양 [359] 레오와 그 아들들인 루펜, 토로스 사로잡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됨. 루펜은 본보기로 처형됨. 다른 왕자들인 미에, 스테파노스, 콘스탄티노스는 친척인 에데사의 조슬랭 2세의 궁정으로 망명. 이후 요안니스 2세는 킬리키아에서 월동 [360] 아라곤-카탈루냐 동군연합의 시작 [361] 우누르는 예루살렘으로 친구 우사마 이븐 문키드 파견. 한편 이해 티크리트에 있던 아이유브의 동생 시르쿠가 시비 붙은 한 기독교도 살해. 이에 도시에서 온가족이 쫓겨나 장기 진영 합류. 동로마 군대 물러간 후 안티오크 측은 템플 기사단에게 '시리아 관문' 요새를 관장하는 바그라스 요새 맡김. 이후 인근의 다르브사크, 라 로쉐 드 루셀 등의 성채도 추가 [362] 정보 통제 위한 것. 1월 혹 3월로 기록된 자료도 있다 [363] 4월 3일 혹은 17일로 표기된 자료도 있음. [364] 이때 카말 앗 딘이 바그다드로 파견되었다. 그는 신도들을 매수하여 금요 예배 때 시위를 벌이도록 하였고 결국 술탄은 군대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후 동로마 군이 철수하자 장기는 카말에게 이를 무산시킬 것을 지시했고 그는 이역시 수행하여 술탄의 군대는 결국 회군하였다. 5월 2일에 알레포 포위했다는 기록도 [365] 4월 25일이라는 기록도 [366] 4월 21일이라는 기록도 있음 [367] 4월 21일 혹은 27 혹은 28일이라는 기록도 있다. 레몽과 조슬랭은 진영에서 주사위 놀이 (아자르) 하며 방관 [368] 이때 요안니스 2세는 장기를 회전으로 유도하려 했으나 실패함. 안티오크 입성할 때 요안니스는 말을 타고 레몽과 조슬랭은 옆에서 시종처럼 걸어오게함 [369] 레몽은 시타델 넘기라는 요안니스에게 불복종. 조슬랭은 궁전에서 빠져나와 시내의 라틴(프랑크) 거주민들은 추방당할 것이라 선동해 군중과 궁전 포위. 이에 신변의 불안 느낀 요안니스가 떠남. 장기의 사주로 룸 셀주크가 킬리키아 공격하자 퇴로 차단되어 고립될 것을 우려한 요안니스 회군. 콘스탄티노폴리스 돌아감. 그틈에 룸 셀주크가 프리기아 공격. 요안니스가 남겨둔 자신 조카이자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안나 콤니니의 아들 알렉시오스 브리엔니오스가 반격. 프리기아 북부의 상가리오스 협곡에서 튀르크군 격파. [370] 마라트 알 누만도 비슷한 시기 수복됨 [371] 여름. 풀크, 사위인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와 함께 길르아드 (사해와 갈릴리호 사이의 요단강 동쪽 평지) 습격. 아즈룬 인근 성채 점령. 하지만 비슷한 시기 무슬림 군대가 사해 북쪽을 우회에 침공. 반격해온 템플러 부대 격파. 이후 십자군이 요르단 방면에 성채 추가 건설. 한편 교황 인노첸시오 2세, Omne datum optimum 칙령으로 템플 기사단에게 교황에게만 충성하도록 설정 [372] 6월 22일이라는 기록도. 침대에서 3명의 하인 혹은 견습생에게 살해됨. 당시 시내에 있던 홈스의 전 아타베그 우누르, 정권 장악하고 마흐무드의 이복동생인 바알벡 태수 무함마드 불러 옹립. 이후 그의 어머니이자 부리의 첩과 결혼. 바알벡은 우누르에게 넘겨짐. 이후 우누르는 우사마 이븐 문키드를 예루살렘 파견해 동맹 논의 (확실한 연도인지 모르겠음) [373] 혹은 9월 초 [374] 10월 21일이라는 기록도. 이 잔인함으로 다마스쿠스 주민들은 결사항전 결의. [375] 그리고 군사작전시 우누르가 2만 디나르 부담, 예루살렘에 볼모 파견 [376] 우사마 이븐 문키드 파견됨 [교황] 특사 알베릭도 포위 참가. 수비대는 다마스쿠스 측에 항복, 우누르, 그들과 떠남. 십자군이 도시 장악, 레이니어 드 부스가 영주로 봉해짐 [378] 이후 재차 남하. 이때 아이유브를 바알벡에 봉했다고도 한다. 1139년 점령 직후 혹은 1140년 [379] 돌아가며 하산 케이프의 아르투크 왕조가 지배하는 바흐마르드 빼앗음 [380] 6월이라는 기록도 있고 가을이라고도 함. 이전에 사절로 가본 우사마 이븐 문키드 동행. 알 아크사에서 예배 일화 ('내 벗들'로 묘사된 성전기사단이 그의 예배 방해한 기독교도 단죄). 이후 몇년간 머물며 티베리아스에서의 노파 달리기 대회, 나블루스 결투 & 신명 재판, 무나이트라의 프랑크 의사와 타비트 등 기록 [381] 아르메니아의 왕 레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감옥에서 사망. 역시 감옥에 있는 차남 토로스가 제위 주장 / 독일 왕 콘라트 3세가 비서 알베르트와 그라비나 백작 알렉산더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 동맹 및 요안니스의 4남이자 킬리키아-안티오크 공인 마누일과 콘라트의 처제 베르타 드 줄프바흐 간의 결혼 주선, 성공 / 요안니스 2세, 킬리키아로의 육상 교통로 확보 위해 출정. 소조폴리스 점령하고 카랄리스 호수 일대 평정 / 아슈켈론의 파티마 군대가 샤론 들판 약탈. 반격 나선 소규모의 십자군 격파 / 교황 특사 알베릭, 예루살렘의 교회 총회 참가. 바위의 돔 부지에 새로운 교회 건설 제안 / 이해 (혹은 1142년) 다니슈멘드의 왕 무함마드 사망. 아들 둘 눈 계승. 하지만 숙부들인 세바스티아의 야기 바산 야쿱 아르슬란과 말라티야의 아인 앗 다울라가 반란. 룸 셀주크의 마수도는 둘 눈 지지. [382] 이해 요르단의 영주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수석 궁중 집사인 파간이 자신의 새로운 치소로 페트라 인근에 케라크 성채 건설. 사해 동남쪽의 영토와 아라비아-이집트 교통로 통제. / 한편 마누일의 약혼녀인 베르타가 콘스탄티노폴리스 당도. 봄. 요안니스 2세, 네 아들과 원정 나섬. 프리기아의 튀르크인 몰아내고 안탈리야 당도. 그곳에서 요안니스의 장남 알렉시오스가 딸 하나만 남긴채 사망, 차남 안드로니코스가 후계자 지명됨. 요안니스, 안드로니코스와 삼남 이사키오스에게 알렉시오스 시신과 함께 수도 귀환 명령. 하지만 도중에 안드로니코스 역시 사망. 요안니스, 다니슈멘드 원정한다고 선포하며 킬리키아 진입. 타우루스 산지 거치더니 남쪽으로 진로를 틀어 에데사 백국 향함 [383] 레몽이 파견한 자블라 주교가 요안니스에게 레몽의 주군으로 안티오크 입성할 수는 있으나 도시의 주인으로서는 불가하다는 입장 전달. 요안니스 분노 [384] 킬리키아의 요안니스, 예루살렘 국왕 풀크에서 서신을 보내 자신이 예루살렘 순례하고 무슬림 대한 전쟁 지휘하고 싶다는 의사 밝힘. 이에 풀크는 베들레헴 주교, 예루살렘 성주 로라드, 성 요한 성당의 수도원장 지오프리 등을 파견해 팔레스타인에는 요안니스의 대군을 감당할 물자가 부족해 부득이하게 초대하기 힘들다는 의사 밝힘 [385] 한편 예루살렘의 멜리장드, 성묘교회로부터 베다니 마을 구입. 성모 마리아, 라자루스, 마르타에 봉헌된 수도원 건립. 예리코 (여리고) 마을을 그에 귀속시킴. 멜리장드의 개인 관할로서 초대 수도원장이 몇달만에 사망하자 결혼하지 않은 24세의 딸 요비에타를 수녀원장으로 임명. 예루살렘 왕가의 주요 종교 시설로 자리매김. / 한편 이해 아라곤의 공동 군주 라몬 베렝게르 4세가 템플 기사단에게 몬존, 몬조이, 바르베라 성채 하사. 또한 재정복된 모든 영토의 토지세 및 약탈의 1/5 (사라고사는 1/10) 제공. 라몬은 1131년부터 템플 기사단과 친교 맺음 [386] 이후 상처가 감염되어 (패혈) 악화됨. 악수흐 등의 장군들이 삼남 이사키오스를 제안했으나 요안니스는 막내 마누일 지목. 장군들과의 회의에서 공표하고 친히 왕관 씌워줌 [387] 한편 그틈에 아르메니아 왕자 토로스가 탈출, 토로스 2세로서 킬리키아에 왕국 재건, 동로마 요새들 공격 [388] 이때의 배신감이 1년 후 에데사 구원에 제대로 나서지 않는 이유가 된 듯. 가을. 레몽 수륙 양면으로 킬리키아 원정 나서나 콘토스테판스 형제의 동로마 육군과 튀르크 장군 부르수크, 그리고 동로마 해군 제독 데메트리오스 브라나스의 반격에 대패, 동로마 군대가 안티오크 성문까지 추격해옴 [389] 분쟁에서 티볼리 편들어 시민들이 봉기, 로마에서 쫓겨난 상태. [390] 토끼 쫓던 중 말이 넘어졌고 풀크가 떨어져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안장에 머리를 부딪혀 의식 잃음 [391] 11월 10일라고도 함 [392] 보두앵 2세의 누이 호디에르나의 아들. 멜리장드와도 친인척 [393] 아들 사이프 앗 딘. 한편 그해 아르메니아의 토로스 2세, 동로마의 신임 킬리키아 총독 안드로니코스 (마누일 1세의 사촌)로부터 타르수스, 아다나, 아나자르부스, 마미스트라 등 빼앗음 / 교황 첼레스티노 2세, 미그냐노 조약 비준 거부. 로제르 2세, 베네벤토 공격. / 부카이아 고개 관장하는 크락 데 슈발리에 외에 그 인근 요새들도 구호 기사단에게 / 아르투크 왕조의 디야르바크르 아미르 다우드 사망. 아들 카라 아르슬란 계승 [394] 10월이라는 기록도 있음 [395] 아나클레토 2세의 동생이 로마 코뮌 주도 [396] 정확힌 장기가 먼저 아르투크 영토 침공. 이에 조슬랭이 도와주러 간 것. (장기를 디야르바크르에서 철수시키기 위해 알레포와의 보급로 차단하러) 카라 아르슬란은 다우드의 아들 [397] 이에 멜리장드가 군사회의 열고 전 원수 마나세 드 히에르제, 원수이자 나브루스 영주인 필리프, 갈릴리 공 엘리낭드 드 뷔르 등이 이끄는 구원병 파견 [398] 땅굴과 공성탑에 의해 시간의 문 인근 성벽 붕괴. 약탈에 정신이 팔린 튀르크 병사들이 6천에 달하는 시민 학살, 시민들 시타델로 대피하며 (주교 아불 파라지에 의하면) 5천명 압사당함. 그중엔 자신 보기 전엔 시타델 개방하지 말라고 한 대주교 위그도 포함. 야곱파 주교 바르사우마가 시타델 지킴 [399] 하지만 백여명의 십자군 포로들을 처형함. 동방 기독교도들은 풀려남 [400] 레몽이 찾아오자 마누일 1세는 그의 약속 위반을 회개하라는 의미로 부황 요안니스 2세 무덤 앞에서 무릎 꿇게함. 한편 마누일, 독일 왕 콘라트 3세에게 베르타와의 결혼에 앞서 더 좋은 조건 요구. 콘라트 3세, 로제르 2세 몰아내면 아풀리아를 제국에게 돌려주겠다고 제안. [401] 예루살렘의 지원군 당도 소식 및 모술의 아미르 알프 아르슬란의 친위 쿠데타 소식. 알프 아르슬란, 장기의 부관 샤자르 살해. 돌아온 장기, 모두 숙청, 알프 아르슬란 감금. 이후 완전한 주권자로서 아미르 칭하고 에데사에서의 승리로 칼리파의 승인도 받음 [402] 이후 장기는 에데사 함락의 공로로 칼리파로부터 '알 말리크 알 만수르' (승리의 왕), '자이나트 알 이슬람' (이슬람의 자랑), '나시르 아미르 알 무민' (신도들의 왕자, 즉 칼리파가 지지하는 자) 등의 칭호를 받음 [403] 그외에 아르메니아 주교들이 동로마 정교회 측의 탄압에 대한 대책 호소함. 아르메니아 사도교회가 교황의 권위 하에 가톨릭과 연대 [404] 마누일, 이코니움 포위 도중 프랑스 사절로부터 2차 십자군 통보받음 / 포르투갈에서 성 베네딕트의 규율을 따르고 템플러 모방한 아비즈 기사단 창단. 1160년경 아비즈 점령하고 붙여진 이름 / 모술의 전 아미르 알프 아르슬란 사망 [405] 알레포의 사와르가 아르메니아 인들의 음모 진압한 후 조치 [406] 마리아 막달레나의 성지 [407]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 툴루즈 백작 알퐁스, 느베르 백작 기욤, 부르봉 백작 아흐심보 [408] 레콘키스타 역시 다른 십자군과 차별 없이 동등함 명시. 다음해 4/11로 표시한 기록도 있음 [409] 알레포-모술의 요충지. 우카일 왕조가 통치 [410] 암살 후 자바르 성채를 거쳐 다마스쿠스로 도주. 하지만 우누르는 그를 잡아 누르 앗 딘에게 보냈고 그는 형 사이프 앗 딘에게 보냄. 모술에서 처형됨 [411] 하마의 아미르 야기 시얀이 다마스쿠스에 복속. 그외에 마르딘과 마야파리킨의 아르투크 왕조가 장기 왕조에 반기 듦. 사이프 앗 딘은 자바르 포위 버리고 모술로 돌아감. 누르 앗 딘이 남아 장례 치른 후 시르쿠의 추대로 알레포 장악 [412] 누르 앗 딘, 남은 조슬랭 병사들 포위해 학살. 십자군과 협조한 아르메니아인들도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림. 에데사 일대 기독교도 추방됨 [413] 콘라트 3세는 즉위 전인 1124년 성지 다녀옴 [414] 한편 교황 에우제니오는 베르나르가 독일의 콘라트에게도 십자군 권했다는거 맘에 안듦. 루이 7세 하의 통합된 지휘 원함. 콘라트는 로마와 로제르 2세 대한 이탈리아 원정 해주길 바람 [415] 시칠리아 제독 게오르그가 코린트 만으로 향하여 테베에 육상 분견대 파견, 로제르 궁정에서 일하게될 비단 직공들 납치. 또한 코린트와 아테네 점령, 약탈.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 떠나자 그 인근 프로폰티스 상륙, 노르만 병사들이 마누엘의 궁전 벽 허물고 정원에서 과일 훔침. 이해에 르노 드 샤티용 (브린스 아르나트)가 성지 당도 [416] 1147년 초엽. 정확한 달은 아님. 알툰타쉬, 도움 대가로 성채 2개 할양 제안. 십자군, 회의 끝에 하우란 지역에 야곱파 기독교도 많다는 것에 기인해 출병 결정. 출정하며 우누르에게 알툰타쉬 복권 알림. 이에 우누르는 협정 위반이라고 반발. [417] 2월 17일이라고도 [418] 템플러의 파리 재정 관리인 아이마르에게 십자군 위해 쓰이는 교회의 1/20 수입 관리 맡김 [419] 멜리장드, 베르나르 바셰를 다마스쿠스로 파견해 그 재산에 피해끼치지 않을 것이라 당부. 헌데 베르나르가 우누르에게 설득된 후 보두앵 3세 역시 설득시킴. 보두앵, 다음 회의에서 원정 철회시킴. 이에 강경파 병사들이 분노, 결국 보스라 점령 나서기로 [420] 아담 드 에브라하의 설교. 본래 부활절 출병 예정이었음 [421] 5/19라는 기록도 [422] 정확힌 누르 앗 딘 도착하자 보스라 지키던 알툰타쉬의 아내가 항복. 보스라 접근했던 십자군, 무슬림 연합군과 맞서지 않고 퇴각. 우누르는 누르 앗 딘이 승리하여 명성 얻고 십자군과의 동맹 잃을까봐 추격 안함. 이후 누르 앗 딘이 나머지 하우란 지역 습격. 알툰타쉬 잡힘 [423] 6월 11일이란 기록도 있음. [424] 6월 1일이라는 기록도 [425] 약탈물 공유, 점령된 도시의 1/4 할당 [426] 이후 소피아에서 총독 미카일 팔라이올로고스의 환영 받음. 콘라트의 쿠만 용병들이 마리차강 유역 약탈, 동로마 군대의 반격.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선 농민들이 병든 남작 등 낙오병 살해. 콘라트의 조카 프리드리히가 보복으로 수도원 방화. 필리포폴리스와 아드리아노폴리스의 동로마 사령관 부르수크, 프리드리히와 소규모 전투, 결국 화해하고 질서 회복. 마누일 1세,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 오지 말고 다르다넬스로 직행 요구, 무시됨 [427] 콘라트 3세와 마찬가지로 헬레스폰트 직행하라는 마누일 1세 부탁 무시하고 콘라트를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함. 한편 헝가리 지나며 게저 2세의 아들 이슈트반 탄생 소식에 그의 대부 됨 [428] 가을. 정확한 달은 아님. 이로써 '누레딘'은 십자군의 가장 위협적인 적수로 공인되었고 안티오크 공 레몽은 십자군에게 알레포 대한 원정 주장 [429] 베르타가 중재한 결과 [430] 루이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체류 중에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가 사절 보내 동로마 협공 제안하나 거절됨 [431] 한편 프랑스인이 식량 구매 때 사기쳤다는 의혹. 마누일 1세, 식량 공급 중단. 루이 7세가 점령지 반환 서약한 후에야 식량 제공 재개 [432] 십자군이 성벽 밑에 굴을 파고 나무 채워넣은 후 불 붙여 무너뜨림 [433] 많은 스페인 십자군이 계약 만료를 이유로 중간에 이탈했음에도 이루어낸 성과. 제노바 인들이 도시 1/4 얻음 [434] 공성탑이 성문 옆의 탑을 공격하다가 갑자기 원을 그리며 문쪽으로 다가감. 이에 수비대가 출격하여 파괴하려 함. 하지만 로타링기아 기사들이 버텨내고 지원군 당도하자 수비대 철수 [435] 십자군은 약탈을 통해 자신들의 도움에 대한 대가 원함. 이에 아폰수가 상류층 시민들만 재산 보장하는 것으로 조건 수정했음에도 벌어진 일. 아폰수, 같은편끼리의 충돌 막고자 협상. 140명의 잉글랜드-노르만 십자군과 160명의 플랑드르-라인란트 십자군이 휴전 기간 시타델에 배치, 시민들이 재산을 그곳에 가져오게 해서 분배하는 것으로 합의. 이후 병사들이 남은 약탈물 찾아 도시 확인. 하지만 [436] 10월 25일이라는 기록도 [437] 기사 2천만 생존. 이에 프랑스 십자군은 해안 루트 선택. 그러나.. / 한편 리스본의 생존자들 도시 떠남 [438] 한편 루이 7세는 콘라트의 상황을 마누일에게 물어봤는데 그는 콘라트가 튀르크인을 격파했다고 들었다 말함. 이에 안심하고 출병. [439] 혹은 니케아에서 합류했다고 함. 루이, 콘라트의 패배 확인 후 충격 (콘라트가 직접 자신 머리의 부상 보여줌) 길 안전하다고 속이고 도움 주지 않은 마누일 비난. 독일 십자군 상당수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 나머지는 루이, 콘라트와 함께 해안길 따라 진군. 아드라미티움, 페르가몬 지남 [440] 콘라트 3세는 에페수스에서 와병, 해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해 치료 받음. 마누일 1세와 화해. 마누일, 직접 콘라트 의사 자칭. 콘라트 동생인 오스트리아 공 하인리히와 자신의 조카 테오도라의 결혼 제안. 한편 퐁티외 백작 기, 에페소스에서 병사 [441] 십자군 연대기 작가 외드에 따르면 튀르크 기병대의 지휘관이 그리스 인들이었다고 한다 [442] 동로마-베네치아 vs 시칠리아. 동로마 함대 이끌고 코르푸 포위 합류한 콘토스테파노스, 시타델의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 맞아 사망. 한편 쿠만족 대한 원정 이후 테살로니카에서 월동하던 마누일 1세는 오스트리아 공 하인리히와 조카 테오도라 결혼시킴 [443] 루이 7세가 튀르크군의 히트 앤 런 작전에 대비해 전방에 정예병 배치. 한편 십자군은 제국령인데도 튀르크인이 득실거리자 이를 마누일의 배신에 의한 것으로 여김 [444] 모리엔의 영주임으로 아키텐 공작부인 엘레오노르의 봉신. 본래 루이 7세가 본대와 자주 연락하며 정상에 머물러 있으라 했는데 명을 어기고 먼저 산 밑으로 내려가버림 하산한 마속 [445] 루이 7세 본인도 나무에 의지하여 적들과 백병전을 벌이는 등 혈투 끝에 생존. 몇시간 후 고드프루아가 본대가 왜이리 안올까 하며 돌아와 합류. 루이 7세, 그를 비난 [446] 애초에 물자와 선박 부족한 상태에서 십자군에게 1인당 4마르크 은화의 배값 요구. 이에 십자군이 착취라며 반발. 실랑이하는 동안 폭풍으로 프랑스 진영 물난리 재발. 그 틈에 튀르크 군대가 습격. 그럼에도 안탈리야의 수비대는 도우러 오지 않고 방관 [447] 우선 루이 7세 일행이 출항하고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와 부르봉 백작 아흐심보는 성밖 진영에 남음. 하지만 다음날 튀르크 군이 재차 습격해와 성 안으로 피신. 이후 배가 준비되자 그들도 시리아로 향함. 한편 남겨진 보병들과 민중들은 굶주림에 고통받으며 나아가다 튀르크 군대와 마주. 식량 지급 대가로 개종 제안받자 3천여명의 십자군이 그에 따라 무슬림으로 개종 [448] 콘토스테파노스가 함대, '대원수' 요안니스 악수흐 (악수흐의 아들)가 에그나티아 가도따라 육군 지휘. 마누일 1세, 베네치아에게 지원 요청. 한편 콘라트 3세는동로마 선박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아크레 향함 [449] 3월 19일이라고도 [450] 레몽과 조슬랭의 제안이었는데 루이는 서약대로 예루살렘 가길 원하고 그렇게 결정됨. 이에 에데사 공격 주장한 엘레오노르의 반발, 차라리 안티오크 머물기를 원함. 그녀의 삼촌 레몽과의 염문설에 루이 7세가 그녀를 체포하여 남하함. 한편 루이 7세 동행한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 오도 드 더이예의 기록이 멈춤. 레몽과의 염문설 확산 방지 때문으로 추정 [451] 엘레오노르 납치 사건. 이는 '여인'에게 순종을 가르치려는 루이 7세의 환관 티에리 갈롱의 조언이었음. 이후 엘레오노르는 루이와 8촌 관계임으로 불법 결혼임을 제시 [452] 다만 그 지도자인 툴루즈 백작 알퐁스는 예루살렘 가지 못하고 카이사레아에서 병사. 조카인 트리폴리의 레몽 2세의 독살 의혹. 이에 상당수의 프로방스 십자군 귀국. 한편 예루살렘 대주교는 루이 7세에게 사절 파견해 아크레에서 모일 것 제안. 수용됨 [453] 그 설교단에 프랑스 왕실 문장 둔채로. 한편 안티오크의 레몽, 에데사의 조슬랭은 루이와 동행 안하고 각자 영지에 남음. 트리폴리 백작 레몽 2세는 작은 할아버지 알퐁스와 합류하나 트리폴리 두고 다투느라 불참 [454] 정확한 달은 아님. 초여름 [455] 그외에 알레포의 누르 앗 딘이 먼저 차지할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 알레포를 공격했어야지 [456] 그외에 몽펠리에 백작 기욤, 우르헬 백작, 툴루즈 군대 참여. 에브로강 하류 공격. 타라고나 대주교가 교회 대표로 종군 [457] 우누르에게 도움 대가로 다마스쿠스 내부에 군대 주둔시킬 권리 요구 [458] 과수원의 나무 베어 사다리 만듦. 자신감 넘쳐 공성탑은 안가져옴. 서쪽 성벽을 15일 정도 공격하면 항복할거라 판단. 콘라트, 라드와 쪽에서 공격. 다마스쿠스 시민들이 두려움에 떨며 시내 길가에 바리케이드 설치 [459] 과수원의 궁수들 피하려 이동. 한편 동쪽 성벽 쪽은 황무지. 십자군, 곧 갈증으로 시달림. 동쪽 성벽 역시 잘 방비됨. 십자군, 버려진 과수원 접수. 한편 십자군 지도부는 김칫국 마시며 다마스쿠스 주인 두고 논쟁. 예루살렘 왕국의 제후들과 멜리장드는 베이루트 영주 기 드 브리스바레 지지. 하지만 콘라트, 루이, 그리고 보두앵 3세는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 지지. 후자 쪽이 득세하자 분노한 팔레스타인 영주들이 우누르와 접촉하여 티에리가 도시 수중에 넣지 못하도록 동쪽 성벽으로 옮기게 했다는 소문. [460] 루이와 콘라트는 내키지 않았으나 파레스타인 영주들의 주장으로 후퇴. (누르 앗 딘 오기 전에) 서유럽 출신 십자군은 현지 영주들을 우누르에게 임무를 버린 겁쟁이라 비난. 이후 그들이 우누르에게 매수되었다는 의혹 제기 [461] 알퐁스가 레몽 2세와 트리폴리 지나가며 백작위를 아들 베르트랑 것이라며 주장. 한편 연대기 작가 기욤 드 낭지스는 레몽 2세의 처제인 멜리장드의 소행으로 기록. 혹은 엘레오노르의 소행이라고도 한다 [462] 루이 7세는 예루살렘에서 부활절 쇠기 위해 남음. 독일과 프랑스 십자군 중 누가 먼저 떠났는지는 불분명 [463] 12월 30일이라는 기록도 [464] 이해 템플 기사단장 로베르 드 크라농 사망. 에베라르트 드 바르스가 기사단장 선출됨. 한편 로제르 2세의 지원으로 발칸의 세르비아 인들이 대주판 라스키아의 지휘 하에 반란. 마누일 1세, 이탈리아 원정 중단하고 관심을 돌려 세르비아 군대 격파. 이에 반란군은 험지의 요새로 패주. 마누일 1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선식 [465] 111월경 프랑스 돌아온 루이의 폭로 듣고 나섬. '그리스 인들에 대한 신의 징벌' 외침. 한편 추기경 테오윈의 부탁으로 클뤼니 수도원장 피에르 역시 이에 동참하여 새로운 십자군 (새로운 십자군이 동로마 대한 것인지는 확실친 않지만..) 제창. 하지만 교회의 요구에도 마누일과 대시칠리아 동맹 맺은 콘라트 3세는 도움 거부 [466] 이후 물자 바닥난 수비대가 시칠리아로의 안전 귀환 보장을 대가로 항복. 마누일, 로제르 2세 징벌 위해 아풀리아 침공 준비. 요안니스 악수흐에게 군대 주어 블로러로 파견. 안코나 상륙 지시 [467] 루이 7세 떠난 이후. 정확한 달은 아님. 카이사레아에서 알퐁스 독살된 후 복수 다지던 아들 베르트랑, 군대 모아 북상. 안티오크 향하는척 하며 트리폴리와 부카이아 고개 (크락 데 슈발리에 쪽) 사이의 거점인 아미라 성채 점령. 트리폴리 백작위 노림. 이에 레몽 2세가 포위에 나섰으나 베르트랑이 버티자 다마스쿠스의 우누르에게 도움 요청. 여력이 없던 우누르, 얄밉지만 누르 앗 딘에게 대신 지원 맡김. 누르 앗 딘이 아미라 함락하고 베르트랑을 잡아 알레포로 데려감. 레몽 2세, 경쟁자 귀환이 싫어 당숙의 석방이나 몸값 협상 시도 안함 [468] 엘레오노르 신분 확인하고 풀어줌; 루이 7세가 탄 배는 프랑스 왕실 문장을 내걸어 모욕 면함. 다만 루이의 배 한척 역시 나포됨. 이를 마누일 1세에게 보고하고 돌려받는데 몇달 걸림; 루이, 재차 마누일 원망. 한편 이후 엘레오노르의 선단이 폭풍으로 루이와 떨어져 아프리카 해안으로 밀려남. 로제르 2세가 루이에게 그녀 위치 확인해줌 [469] 봄에 바그라스에서 승리 거둔 누르 앗 딘, 이후 오론테스 강 동안의 이나브 요새를 포위하는데 레몽이 자신의 아사신 동맹인 알리 이븐 와파와 함께 진군하자 철수. 이에 자신이 군사적으로 우세하다고 판단한 레몽은 알리의 반대에도 이나브로 진군. 사실 그의 군대는 5천, 누르 앗 딘의 군대는 6천이었음; 이에 누르 앗 딘, 이나브 향하는 길목인 '무라드의 분수'에서 매복, 레몽이 반격하려 할 때에 모래 폭풍이 십자군을 덮침. 레몽 외에도 알리와 마라쉬 영주 레이날드 (조슬랭 2세의 딸 아그네스의 남편) 등 전사. 시르쿠가 직접 레몽을 죽이는 등 활약. 레몽의 목은 소금에 절여져 바그다드로 보내짐 [470] 정확한 달은 아님. 누르 앗 딘은 우선 아르즈간과 텔 카쉬파한 점령하고 다음으로 아르타와 하림 점령. [471] 정확한 달 아님. 안티오크 지켜야 하는 투르베셀의 조슬랭 2세는 레이날드 사망한 후 튀르크 군에 포위되어 있던 자신의 영토 마라쉬 구원 나선 상태. 이후 안티오크 항복. 투르베셀로 도주하던 십자군은 룸 셀주크 군에게 포위되어 학살됨. 이후 마수드는 조슬랭을 추격하나 조슬랭의 동맹?인 누르 앗 딘이 당도하자 철수 [472] 보두앵 3세, 안티오크의 섭정으로 대주교 아모리 선임. 하지만 군대 이끌 사람이 필요하므로 과부 콩스탕스의 새 남편감 모색. [473] 10월 8일이라는 기록도 [474] 아슈켈론은 예루살렘 왕국의 섬처럼 고립되어 있음. 가자는 그 남쪽에 위치. 파티마 와지르 이븐 살라흐는 우사마 이븐 문키드 (이젠 파티마 측에서 일함) 포함한 사절단을 누르 앗 딘에게 파견하여 갈릴리 공격 부탁함. 하지만 거절당함. 그리고 우사마는 이집트로 돌아가지 않고 아슈켈론으로 향하여 방어 돕기로 [475] 조슬랭 2세가 사로잡히자 남은 부인 베아트리스는 영토 지킬 군대 부족. 현지 야곱파 기독교도들은 조슬랭의 탄압을 받은터라 부정적. 베아트리스, 안티오크 측에 도움 청하나 거기도 여의치 않음. 한편 안티오크 당도한 마누일 1세의 사절이 유프라테스 서안 지역에 남은 에데사 백국령 매입 제안, 수용됨. 동로마의 킬리키아 총독 토마스가 사모사타, 아인탑 (안테프), 비레칙 등 남은 6개의 성 매입. 베아트리스는 사모사타 인근 칼라트 룸 주어짐. 그마저도 아르메니아인 카톨리코스에게 맡기고 조슬랭 3세, 아그네스와 함께 안티오크로 이주. 한편 안티오크의 콩스탕스는 보두앵이 주선한 남편감들 (이브 드 네슬레, 고티에 드 팔콘베르크, 트리폴리의 제후인 라울 드 메흘르) 거부. 마누일 1세에게 남편감 부탁함. / 누르 앗 딘이 셀주크 술탄 마수드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고 남은 에데사 백국 영토를 점령하면 함께 나눠 가지기로함 / 플랑드르 백 티에리 본국 귀환 [476] 아슈켈론 공격하기 위해 그 기지로써 남쪽의 가자를 재차 요새화하고 있던 보두앵 3세 북상함. 누르 앗 딘, 쿠트바와 동전에 칼리파 다음으로 자신 이름 들어가는 것 등 사실상 복속 대가로 회군 [477] 떠돌이 도적떼였던 그 튀르크 인들은 몸값 챙기려 했으나 그전에 누르 앗 딘이 파견한 기병대가 그들로부터 조슬랭 2세를 빼앗아 알레포로 귀환. 이후 조슬랭 2세는 실명되고 투옥됨. 투르베셀은 아들 조슬랭 3세 계승. 안티오크 주교 아모리가 방어 지휘. 누르 앗 딘에게 보두앵이 정해진 날 도착하지 않으면 항복하겠다고 약속. 동시에 보두앵에게 빨리 올 것 독촉. 한편, 누르 앗 딘이 아파메아 포위에 묶여있는 동안 보두앵 3세가 적은 군대만 데려옴 (빨리 오느라 그런듯). 누르 앗 딘, 결국 아파메아 함락시키지 못하자 휴전 체결. 한편 튀르크 군이 투르베셀 공격했으나 조슬랭 3세와 모후 베아트리스가 방어 성공 [478] 아인탑에 피난민 두고 누르 앗 딘과 맞섬. 튀르크 군대가 화살 퍼붓고 돌격해왔으나 보두앵과 5백여 십자군이 버티자 해질녘 후퇴. 보두앵, 동로마 군대 도달하기 전에 아인탑 접수하라는 귀족들의 제안 거부하고 동로마 군대의 접수 동행. [479] 교황 에우제니오 3세가 콘라트 3세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로제르 2세에 대한 동로마와의 동맹 지지 표명. 한편 마누일 1세가 부인과 사별한 처남 '노르만인' 요안니스 로제르를 남편감으로 안티오크에 파견하나 콩스탕스는 그역시 내침 / 여름, 파티마 함대가 트리폴리 습격. 선박 방화, 수백명 죽이거나 납치. [480] 누르 앗 딘 철수 후 아바크는 보두앵과 보스라 포위했는데 장기화되자 보두앵 철수. 근데 사르카크가 이번엔 보두앵과 동맹하고 다마스쿠스 대한 보호 요청. 이에 아바크는 누르 앗 딘에게 도움 청한 것. 알레포 군대의 위협에 사르카크, 다시 다마스쿠스에 복속. 사태 종결. 이에 아바크가 알레포로 찾아가 누르 앗 딘과의 동맹 확인함 [481] 투르베셀의 동로마 수비대장의 항복. 조슬랭 3세는 명목상의 작위 유지하며 예루살렘 왕국의 원로로서 1190년까지 활동 [482] 마미스트라 바깥에서의 전투. 이에 마누일 1세가 사촌 안드로니코스 파견하지만 마미스트라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 [483] 한편 바니야스 수비대가 튀르크 습격대를 방관 내지 협조한 것으로 판단되는 아이유브의 바알벡 약탈 [484] 대원수 마나세와 이벨린 가문 등의 지지를 기반으로 멜리장드는 보두앵의 권력 포기 위협에 맞섬. 한편 갈릴리 제후들은 보두앵 지지. 이에 '대회의'가 소집됨. 종교계가 멜리장드는 수도 예루살렘과 그녀의 지참 도시인 나블루스를 지배하고 차남 아모리 소유인 자파를 그 휘하에 두는 것과 보두앵은 갈릴리 등의 북부를 통치하는 중재안을 제안. [485] 나블루스에서 보두앵의 친위 쿠데타 이후의 정국 논의하는 회의가 열리던 중에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 아미르 티무르타쉬가 튀르크 기병대를 이끌고 다마스쿠스에 당도. 아바크에게 예루살렘 공격 제안. 아바크, 보급품 팔고 말림. 결국 군대 제공 거절. 티무르타쉬, 요르단을 가로질러 예루살렘 외곽 올리브 산에 진영 설치. 수비대가 기습하여 패배시킴. 티무르타쉬, 요르단으로 철수. 한편 나블루스의 십자군이 당도하여 튀르크 군대를 대파. 티무르타쉬 패주. 그해 사망 / 템플 기사단장 에베라르드가 수도사 되어 클레르보로 은퇴. 부르고뉴 출신의 베르나르 드 트레믈레가 선출됨 [486] 보두앵 3세와 콩스탕스 등도 참여. 멜리장드, 조카 콩스탕스에게 재혼 종용하나 거절됨. [487] 가족회의 끝나고 남문을 통해 예루살렘 향하는 멜리장드와 호디에르나 배웅하던 레몽 2세를 아사신이 덮침. 이를 막아선 라울 드 메흘러 등의 기사들 역시 살해됨. 한편 트리폴리 머물기로 한 보두앵, 시타델에서 비보 듣고 달려왔으나 이미 늦음. 분노한 군중이 시내의 무슬림들 분풀이로 기습. 보두앵이 트리폴리 군대 지휘. / 비슷한 시기 마누일 1세와 베르타 (이레네) 사이에서 딸 마리아 탄생 [488] 성벽 재건비용을 부담할 수 없어서 그 주교에게 넘겼다가 결국 템플러에게. 템플 기사단은 토르토사를 요새화하고 가장 중요한 거점 중 하나로 삼음 [489] 늦여름, 달은 확실치 않음. 보두앵의 군대가 마나세를 그의 성채인 미라벨에서 사로잡음. 보두앵, 그에게 왕국을 영영 떠날 것을 명함. 이후 나블루스가 보두앵에게 항복. 멜리장드, 본래 대주교의 지지와 함께 예루살렘 요새화하고 버틸 작정이었으나 장성한 아들이 있음에도 여성이 통치하는 것에 반발한 시민들이 봉기. (중세 마인드) 멜리장드로 하여금 며칠내로 보두앵과 협상하게 강요. 멜리장드, 보두앵 군대에게 성문 열어주고 자신의 소유인 나블루스로 은퇴. 보두앵, 왕국 전체 장악하고 주요 지지자인 갈릴리의 제후인 토론 영주 음프헤 (험프리) 2세를 새 원수로 임명. [490] 아르투크 왕조의 티무르타쉬 사망. 아들 나짐 앗 딘 알리 계승 / 그라비나 백작 알렉산데르와 안셀무스 드 하렐비가 마누일 1세의 협상단으로서 교황 측과 시칠리아 문제 논의 [491] 칼리파 앗 자히르의 지지. 하지만 압바스 이븐 아비 알 푸투흐 역시 얼마 안가 살해됨. 이로써 수륙 양면으로 아슈켈론을 구원하려는 의도가 좌절되고 오직 해군만 출정 [492] 6월이라는 기록도. 십자군 함대는 20척이었다고 한다. 한편 아슈켈론 항구는 대규모 함대가 머물만하지 않아 결국 철수 [493] 1149년 처음 우투르메르 당도한 지앵 백작의 막내 아들. 1151년 보두앵과 안티오크 방문했을 때에 콩스탕스와 처음 만남. 현지 제후들은 그를 싫어함. 르노, 아슈켈론 향해 보두앵의 동의 얻고 돌아와 결혼식 치름. 이후 마누일 1세의 사절 접견,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대한 동맹 체결. 르노, 킬리키아 침공해 알렉산드레타 점령. 템플 기사단에게 넘김. 그 보답으로 템플 기사단은 바그라스 성채 재건하고 아마누스 산지 제어 [494] 죽기 전 독일의 프리드리히 1세와 서로의 영토 존중하고 동로마에게 영토 양보하지 말자는 협정 체결 [495] 공성탑을 높게 지어 시내 내려다보며 저자 거리에 폭격. 한편 열로 인해 성벽에 틈이 생겼는데 하필이면 포위망의 그 부분을 맡고 있던 템플 기사단장 베르나르가 업적을 독차지하기 위해 다른 십자군에게 알리지 않고 기사단원들만 이끌고 성 내부로 돌격하나 수비대에게 포위되어 전멸됨. 베르나르 역시 사망. 수비대는 다른 십자군이 알아차리기 전에 성벽을 보수하는데 성공, 템플러 시체 성벽에 걸고 목은 카이로 궁정으로 보냄. 이후 성 베르나르의 숙부이기도 한 앙드레 드 몽바르가 기사단장 계승 [496] 다른 기록에 따르면 작전 회의 3일 후 다시 성벽에 틈이 생겼고 십자군이 돌격, 며칠간의 혈전 끝에 8월 19일 시내가 점령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2일 시타델이 항복하였다고 한다 과연 그랬다면 안전한 항복이 될 수 있었을지? 한편 기존에 아슈켈론은 베들레헴 주교구에 속했지만 함락 이후 예루살렘 대주교의 직할 교구로 편입되었다 [497] 굴리에모 1세 즉위하고 태후 베아트리스가 마누일에게 그리스에서의 약탈과 테베의 직공들 등의 포로 돌려줄테니 평화 제안하나 거절됨. 잉글랜드인 재상 윌리엄 브라운 파면되고 대제독 바리의 마이오가 임명됨. 한편 베아트리스는 로제르의 사생아 콩스탕츠 낳음. 동로마 제독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가 모넴바시아의 함대를 모아 시칠리아 원정 준비.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는 마누일 지시 어기고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시칠리아 상선 나포. 한편 마누일이 로마에 파견했던 알렉산데르와 안셀무스가 돌아와 교황의 뜻 전달 [498] 그가 이슬람 배신했다는 프레임 씌움으로써 주군 누르 앗 딘의 다마스쿠스 장악 도움. 누르 앗 딘의 봉쇄에 의한 물가 상승도 아바크의 탓으로 돌림. 한편 반간계로 그의 충복들의 반역 소문을 내서 아바크가 자신의 수족들을 스스로 숙청하게 함. 이에 나머지 아미르들 분노. [499] 알레포에서 다마스쿠스로의 사절로 파견된 시르쿠, 사절답지 않게 대군 이끌고 옴. 아바크는 그의 입성을 거절하였고 이를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 판단한 누르 앗 딘이 친히 남하 [500] 한 유대인 여인이 밧줄을 내려보내 병사들 유대인 구역에 들어오게 해줌. 야 만수르 (이겼다) 환호. 무슬림 시민들은 동문 열어 누르 앗 딘 맞음 [501] 베네치아 도제 도미니코 모로시니 사망. 비탈레 2세 미카일 계승. [502] 한편 교황령과 시칠리아 왕국 간의 국경 충돌 발생 [503] 그들은 돌아가던 프리드리히와 안코나에서 만나 시칠리아 대한 협공 제안하나 거절당함. 그가 떠난 이후 안코나 점령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아풀리아에 사절 파견, 반란 선동하고 귀족들에게 자금 전달. 전 카푸아 공 로베르가 반란 주도. 동로마 제국군이 파노 점령하자 로베르 합류, 그의 작위 재차 주장하며 동로마 군대 도와 트라니 점령. [504] 이후 굴리에모의 사촌인 로베르토 드 로리텔로도 반란 가담. 미카일 팔라이올로고스가 시민들이 봉기 일으킨 바리 접수하자 그 시타델 주어짐. [505] 대주교 아모리에게 숨긴 재산 (성유물) 내놓으라며 꿀 바르고 탑 꼭대기에 묶어놓은 등의 기행. 아르메니아의 토로스가 동참, 해안의 침공군 진영 공격한 키프로스 총독 미카일 브란나스와 마누일의 조카 요안니스 사로잡힘. 키프로스 동부 해안 도시들은 방화와 약탈당함.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주요 인사들은 몸값 얻어내기 위해 안티오크로 끌려감 [506] 정확히는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 간의 평화조약. 아바크가 맺은 것을 후임자인 누르 앗 딘이 갓 정복된 다마스쿠스의 안정을 위해 연장한 것. / 이해 베르나르 드 블랑슈포르가 신임 템플 기사단장 취임 / 플랑드르 백작 티에리, 재차 십자군 종군. 아크레로 향함 [507] 굴리에모는 시민들을 추방하고 도시를 초토화시킴. 아풀리아 귀족들, 대부분 항복하거나 도주. 교황군 홀로 남겨짐. 카푸아 공 로베르는 사로잡혀 실명됨 [508] 토그릴 2세의 아들 아르슬란 샤의 아타베그 [509] 이해 시토 수도회의 피에트로 수도원의 수사들이 그들 중 한명인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주도로 칼라트라바의 특별 지휘권 얻음. (알폰소 7세가 그누구든 무슬림들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사람이 가지라한 상태) 칼라트라바 기사단 창단. 다만 평화 중시여기는 다른 시토회 수사들과 갈등. 1163년 그 지도자인 피에트로 수도원장이 사망하자 대부분의 '무장 수사'들은 본업으로 돌아감 / 한편 보두앵의 동생이자 자파-아슈켈론의 영주 아모리가 조슬랭 3세의 누이 아그네스 (8촌지간이라 성직자들은 그 정당성의 의문을 품었지만)와 결혼. 추후 분쟁의 발단 [510] 티그리스 강 동안으로 철수하고 양쪽을 잇는 다리 파괴함 [511] 누르 앗 딘, 부카이아 고개를 넘어 베카 협곡 따라 남하함. 바알벡 총독 (아이유브의 후임자)이 왜 반기를 들었는지는 미상 [512] 갈릴리 호 북안에 위치한 Jacob's ford. 다만 훌레 호수에서 싸웠다고도 함. 이때 보두앵 낙마. 87명의 템플러와 3백여명의 기사들이 희생해가며 (죽거나 포로됨) 시간 벌어주는 동안 보두앵은 사페드로 피신. 대주교 아샤르 드 나자렛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해 마누일에게 황실 신붓감 요청. 마누일, 조카 테오도라 (이사키오스의 딸)와 지참금으로 10만 히피르피론과 결혼식 비용 1만 히피르피론 제안. 그리고 그녀의 지참금으로는 아크레가 주어지는 것으로 합의. (과부될시 소유). 사절단 귀환, 보두앵 역시 동의 [513] 이로써 셀주크-장기 왕조의 동맹 결렬됨 [514] 정확한 달은 아님. 다만 6월 말엽 가능성. [515] 7월 3일이라는 기록도 [516] 하란에선 땅이 갈라져 고대 유적이 솟아오르기도 했다고. 십자군 무슬림 모두 부서진 성벽 복구에 집중해야함. 특히 알레포, 홈스, 하마 등 오론테스 강가 피해 막심 [517] 시타델에서 왕자의 할례 축하 잔치 도중 몰살됨. 공주 한명과 외지에 있던 우사마 이븐 문키드만 생존. 하마에서도 선생이 화장실 갔다가 교실 와보니 학생들 다 죽어있어 부모들에게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며 마을 향했는데 그 부모들 역시 대부분 사망한 상태였다는 이야기도 있음 [518] 본래 보두앵은 샤이자르를 티에리에게 주려함. 근데 포위 도중에 도착한 안티오크의 르노가 샤이자르의 문키드 왕조가 안티오크 공국에 조공했으므로 티에리 역시 자신의 봉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 (아니면 도시를 넘기거나) 이에 티에리는 비천한 태생의 모험가에 대한 조공 거부. [519] 동시에 부관 시르쿠를 다마스쿠스에 봉하였음. 나스르 앗 딘이 알레포를 넘겨받기 위해 도착하자 시타델 지휘관 이븐 앗 다야가 인계 거부. 시민들이 폭동, 누르 앗 딘이 시내 유력자들을 불러 자신의 건재함을 보이고 진정할 것을 요구. 이후 서서히 회복 [520] 교황 아드리아노 4세의 중재, 시칠리아 측이 요안니스 두카스와 알렉시오스 브리엔니오스 등의 포로 석방. 한편 마누일 1세는 1156년 르노의 키프로스 점령에 대한 응징으로 원정 준비. 늦여름 무렵 출정, 빠른 속도로 남진. 우선 제국으로부터 자립하고 르노의 키프로스 정복을 도왔던 킬리키아의 토로스 2세가 목표 [521] 요단강 동안은 길르아드 지역이라 불림. 하비스 얄두크의 라틴 명칭은 cave de sueth. 말그대로 동굴 성채임. 한편 보두앵의 양동작전에 누르 앗 딘은 포위 풀고 다마스쿠스로 향함 [522] 십자군은 적군이 더 적다고 판단해 진격했는데 한 십자군 귀족이 보두앵이 누르 앗 딘에게 선물해준 노새를 알아보고 누르 앗 딘의 본군이었음을 알아차림. 그럼에도 전투 나섰고 아픈 누르 앗 딘이 먼저 철수하자 사기가 저하된 무슬림 군대 무너짐 [523] 처음엔 다른 십자군 국가들과 연대해 맞서려 했으나 동로마와 인척 맺은 보두앵이 반대하자 황제는 정복이 아닌 복속으로 만족할 것이라는 라타키아 주교 제라르의 조언대로 싸움 포기하고 안티오크 열쇠 보내고 동로마 주둔 허용. 그리고 항복 요구하자 르노는 마미스트라 (모프수에스티아) 밖의 동로마 군영으로 찾아가 무릎 꿇음. 키프로스 주교 아모리, 복수로 그의 폐위 주장하나 마누일은 (요안니스와 달리) 복속과 안티오크의 정교회 대주교 선임으로 만족 [524] 알레포에는 가톨릭 사제가 없어 야곱파 사제에게 고해성사 / 플랑드르 백 티에리, 재차 본국 귀환. 아내 시빌라는 멜리장드의 베타니 수도원 들어감 [525] 정확한 달은 아님. 토로스, 맨발과 맨머리로 찾아와 먼지 속에서 제국 문장이 휘날리는 연단 앞에 엎드려 사과. 마누일, 그를 사면하고 킬리키아 일부 통치 허락. 그밖에 보두앵은 키프로스의 아모리를 안티오크 대주교로 선임 제안, 수용됨 [526] 보두앵, 안티오크 귀족들의 마누일 암살 계획 거부, 마누일과 함께 성당에서 미사 드리고 궁전으로 향해 연회와 마상시합 (토너먼트) 즐김 [527] 안티오크의 르노, 아르메니아의 토로스 2세도 파병 [528] 이후 혼란 이어져 알렉산데르 3세는 9월 18일에야 자주색 도포를 받을 수 있었고 9월 20일에야 즉위. 9월 27일 빅토르 파문.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기경들 파견해 마누일 1세에게 도움 청함 [529] 이해 템플 기사단은 포르투갈의 본부로서 토마르 성채 건설. 우쥐 드 발벵이 구호기사단장 취임 [530] 총회는 2월 11일 종결. 파비아 성당 주변 행진하고 프리드리히가 교황의 대한 예를 갖춤. 한편 마누일 1세의 사절이 파비아에 당도하여 프리드리히와 이탈리아 분할 논함. 안코나-아풀리아 일대 동로마 영토로 요구. 이후 프리드리히도 대시칠리아 동맹 논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사절 파견 [531] 이후 모술의 쿠트브 앗 딘에게 사로잡혀 있다가 1161년 4월 살해되어 하마단에 매장됨, 10월이라는 기록도 [532] 1161년 11월이라는 기록도. 양치기들은 마라쉬 인근의 아마누스 산지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유프라테스 유역으로 이동 중이었다. 마즈드 앗 딘은 누르 앗 딘과 같은 유모를 둔 '젖형제'. 르노의 몸값 협상은 거부되고 (보두앵도 급한 사안으로 여기지 않음) 15세의 보에몽 3세 대신 모후 콩스탕스가 공국 이끔 [533] 정확한 달은 아님. 한편 비슷한 시기 마누일은 안티오크 공가와의 결혼을 통해 영향력 확대 꾀함. 콘토스테파노스와 테오필라크트를 안티오크로 파견해 콩스탕스의 딸 마리아와 자신의 결혼 주선하게함. 보두앵, 동로마의 지나침 영향력을 우려해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의 누이이자 자신의 외사촌인 멜리장드를 대신 추천. 사절단, 트리폴리에서 그녀를 만나지만 출신의 비밀? (친부가 누구인가) 대한 소문 들음. 이에 실망한 마누일은 결혼 취소. 레몽 3세는 이를 알지 못한채 결혼 준비 이어나감 [534] 이때 쓰인 함대 중 하나는 멜리장드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할 20여척의 선단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한편 동로마의 보복이 두려워진 보두앵은 트리폴리로 향하여 레몽 진정시키고 안티오크로 향하여 마리아와 마누일의 결혼 주선. 이해 마누일은 프리드리히가 십자군에 종군, 그 도중에 동로마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 들음.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 등의 무슬림 지도자들에게 편지 보내 경고 [535] 다만 죽기 직전 시트 알 쿠수르와 그녀가 파견한 세명의 흑인 암살자들을 붙잡아 처형시키고 아들들을 불러 샤와르를 상이집트 총독에 봉한 것, 빌바이스에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고도 십자군 대한 원정에 쓰지 않은 것, 카이로 성밖에 후세인 모스크를 세워 도시 공격 시에 기지로 쓰일 수 있게 된 것 등을 털어놓고 후회함. 그 예언들은 모두 적중.. [536] 1157년 남편 티에리를 따라왔다가 베타니 수도원에 들어가서 멜리장드의 수양딸이됨. 그녀는 1165년 사망 [537] 정확한 달은 아님. 황제의 최종 결정을 알린 것. 보두앵, 제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결국 그녀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냄 [538] 그외에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소프로니오스, 안티오크의 명목상 대주교 아타나시오스가 소집되어 동방에 대한 마누일 1세의 의지를 상징 [539] 기욤 드 티레에 의하면 레몽 3세가 파견한 시리아 정교도인 의사 바라크가 준 약을 먹고 악화되었다고 한다 [540] 감옥에서 석방된 안드로니코스가 킬리키아로 향하여 토로스의 동생 스테파노스를 연회장으로 불렀는데 도중에 살해되자 안드로니코스의 사주라 여긴 토로스가 반란. 마미스트라 장악하고 아나자르부스 점령, 동로마 수비대 학살. 이에 마누일이 안드로니코스 대신 콘스탄티노스 칼라마노스 파견. 토로스와 평화조약 [541] 섭정권 주장하기 위해서였으나 이미 장성한 보에몽 3세를 지지하는 귀족들에 의해 라타키아로 추방되어 이듬해 사망 [542] 누르 앗 딘, 정권 교체기에 공격하자는 가신들의 요구에 향후 관계를 고려하여 거부 [543] 친족혼이라는 이유. 당시 아모리는 26세. 이미 아그네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시빌라와 2살 아들 보두앵의 후계자 지위 인정하고 아그네스는 백작 부인으로써 자파와 아슈켈론의 세금 일부를 받는다는 조건 [544] 그외에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는 토마스 베켓의 시성 요청. 성직자들의 법학 및 자연 물리 탐구 금지됨 [545] 파티마 왕조가 조공 16만 디나르의 납부하지 않은 것이 빌미. 디르감, 빌비아스에 당도. 관개 시설의 둑 하나 파괴해 홍수 내자 십자군 철수 [546] 아모리가 이집트 원정에 나선 틈을 타 트리폴리 백국 침공, 크락 데 슈발리에 포위. 이에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안티오크 공 보에몽 3세에 도움 청함. 킬리키아 총독 칼라마노스와 순례 후 돌아가던 위그 드 뤼지냥, 지오프리 드 앙굴렘이 이끈느 무장 순례단도 동참. 포위 중이던 누르 앗 딘의 진영 습격. 알레포 군대의 공격 격파하고 일단의 십자군은 누르 앗 딘의 막사를 향함. 누르 앗 딘, 뒷문으로 나와 말을 타고 도주하려 했는데 급하게 나온 틈에 아직 말이 매여 있는 것을 못봄. 옆에 있던 쿠르드 병사가 그 줄을 잘라 탈출 성공. 그 병사는 살해됨. 홈스로 피신한 누르 앗 딘은 후에 그 쿠르드 인의 가족들을 찾아내어 후하게 보상. 한편 홈스에서 한 아미르가 십자군이 공격해올 수 있으니 이동을 제안하자 누르 앗 딘은 병사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며 복수하기 전까지는 그늘에 앉지 않겠다고 신에게 맹세. 이후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로 수하들을 보내 보급과 물자를 공수해와 생존자들에게 나눠줌. 죽은 병사들의 몫은 유가족들에게 분배. (직계 없다면 친척에게라도) 이후 십자군 측이 누르 앗 딘에게 휴전 제안했으나 거부. 이후 십자군은 크락 데 슈발리에의 수비대 보충하고 퇴각 [547] 그외에 기사단까지 참전하면 추가로 선물 주겠다고함 [548] 8월 12일이라는 기록도. 누르 앗 딘, 연합군 다가오자 포위 풀고 철수. 이후 하림 성주 르노 드 생 발레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보에몽 3세의 주도로 추격. 토로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돌격했다가 튀르크 군의 거짓 후퇴에 당해 포위되고 대패. 누르 앗 딘, 완벽한 기회임에도 동로마의 속령인 안티오크 공격안하고 오히려 칼라마노스 풀어줌. 누르 앗 딘에겐 보에몽 3세가 더 쉬운 적수. [549] 특히 이집트 대한 협공 제안. 한편 그에 앞서 동로마 사절이 안티오크 당도해 아모리에게 황제의 허락도 없이 제국령 도시에서 뭐하는 거냐고 추궁. 이에 아모리가 해명하는 겸 사절 보내 결혼 동맹 물색. 한편 마누일의 몸값 지불로 풀려난 보에몽 3세는 황제에게 감사와 돈을 되갚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향함. 마누일 명대로 아타나시오스 2세를 안티오크의 대주교로 봉하고 대성당의 라틴 사제들을 정교회 사제들로 교체. 이에 대주교 애므리는 안티오크 남쪽 쿠사이르 성채 (1155년부터 카스트룸 파트리아르케, 금고 및 피난처)에 들어가 농성 / 한편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새로운 십자군 제창했으나 호응 저조함 [550] 이해 '포르투갈의 엘 시드' 기랄두가 이보라 점령. 이후 아비즈 기사단의 본부됨. / 마누일 1세가 킬리키아 총독 요안니스 악수흐 해임. 사촌 안드로니코스 봉함 / 플랑드르 백 티에리, 본국 귀환 [551] 마누일, 교황에게 사절 보내 시칠리아 대한 동맹 확인하고 굴리에모 1세의 동생 옹립할까 고민 [552] 십자군측 기록엔 1166년이라함. 무이에트라는 바알벡과 비블로스의 교통로 상에 위치한 요새. 시르쿠는 그 외에도 동굴 성채인 샤키프 티툰과 시돈 인근의 칼라트 알 닌하 점령. / 아모리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낸 사절단이 2년만에 동로마 황실의 마리아 (마누일의 형 이사키오스의 손녀)와 귀환 / 보에몽 3세, 마누일에게 키프로스 총독 안드로니코스가 임지 버리고 안티오크에서 아내 필리파와 꾸물거린다고 불평. 마누일, 안드로니코스 해임하고 칼라마노스 재선임. 안드로니코스, 귀환 명령 어기고 예루살렘으로 망명. 아모리, 그에게 베이루트 영지 하사 / 한편 프랑스의 생 펠릭스 드 카라망에선 카타리파 공의회 열림. 알비, 카르카손, 툴루즈, 롬바르디아 등지의 주교들이 불가리아인 주교 니케타스의 주재 하에 모여 조직과 교리 등 논의. 비슷한 시기 베즐레에선 7명의 카타리파 화형됨 [553] 샤와르가 아모리 진영 찾아와 시르쿠 떠날 때까지 머물러 달라며 40만 베잔트 바침. 카이사레아 영주 위그와 템플러 지오프리가 카이로 궁정 방문, 칼리파 알 아디드에게서 동맹 확인받음. '불신자'들과의 맨손 악수 일화 [554] 한편 위그 드 이벨린이 샤와르의 아들 카밀을 돕기 위해 카이로에 있게 되었는데 시민들 공포에 질림 [555] 이후 '살라흐 앗 딘' 유수프는 1천의 병력과 함께 투석기 폭격이 이어지고 식량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도시를 몇달간 떠맡게됨. 그에게도 트라우마가 된 듯 [556] 시르쿠가 조카에게 포위 풀만한 병력 데려가기 힘들 것 같다고 한 편지 당도하자 협상에 나선 것. 카이사레아의 위그는 협조 거부, 투르베셀의 아르눌프가 협상 맡음 [557] 파티마 조가 예루살렘 왕국 속국 되는 것 승인 [558] 이후 동로마 사절인 기오르크 팔라이올로고스와 마누일 콤니노스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긴밀한 동맹 논의 [559] 토마스는 토로스의 누이가 프랑크인과 결혼해 낳은 아들. 한편 토로스의 동생 믈레는 누르 앗 딘에게 망명. 한편 아모리가 이집트 협공 제안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던 콘베르사노 백작 알렉산데르, 미카일 디 오트란토, 그라비나 백작 등이 예루살렘 귀환. 해군 파견 대가로 안티오크 대한 제국의 직접 지배 승인 조건. 아모리, 사제 기욤 드 티레를 재차 파견. 펠라고니아에서 세르비아 원정 중인 마누일 알현. 한편 베이루트의 안드로니코스는 아내 필리파 버리고 친척인 보두앵 3세의 과부 테오도라와 바람나서 그녀를 아크레에서 불러들임. 분노한 마누일이 즉시 귀환 명령. 안드로니코스, 아모리 역시 그 명에 따를 것으로 보이자 순응하는척 하며 혼자 아크레로 옴. 테오도라가 갑자기 당도, 둘은 다마스쿠스의 누르 앗 딘에게 망명. 제국의 망신 [560] 샤와르의 아들 카밀이 시르쿠와 접촉하고 유수프의 여동생과의 결혼까지 제안하는 등 반십자군 노선 견지하고 카이로 주민들이 주둔군 대한 폭동 일으킬 것 같자 개입 결정. 다만 이어진 전략회의에서 구호 기사단장 길베르는 속전속결 주장, 템플러는 펠루시움을 구호 기사단에게 준다는 것에 불만 품어 종군 거부. 아모리는 동로마 지원군 당도 후 원정할 것을 주장하나 투표 패배. 한편 느베르 백작 사망, 그 기사들의 사기 저하 [561] 십자군에게 철수 요구하기 위해 사절을 두번 보냄. 첫 사절인 베드란은 십자군측 뇌물 받고 돌아감. 두번째 사절인 샴스 앗 딘 칼리파가 아모리의 배신을 거론하자 아모리는 카밀이 시르쿠와 연락한게 먼저 배신이고 2백만 디나르 배상금 요구 (사실상 싸우자는 것..) [562] 아모리는 포로로 잡힌 주민들의 몸값 대주며 민심 진정시키려 했으나 이미 늦음. 이후 곧바로 풀이 죽은 카이로 공격하는 대신 빌바이스에서 함대 기다림. 시기 놓침 [563] 한편 십자군 함대는 파티마 측이 나일 강 하구에 설치한 방해물 제거하며 나아가느라 지연됨. 샤와르는 누르 앗 딘에게 편지보내 십자군에게 항복하느니 카이로마저 태워버리겠다고 장담 자랑이다 [564] 아모리, 함대 없이 카이로 포위할 수 없자 집사 밀레 드 플랑시의 조언대로 비공식 사절을 샤와르에게 보내 '막대한 뇌물'에 철수할 것을 시사. 샤와르, 아들 타이의 석방까지 포함하여 10만 디나르 제안함. 다만 더 큰 금액 줄 수 있음을 시사하며 협상 지연시키고 누르 앗 딘의 군대 기다림. 이젠 확실히 십자군 보단 누르 앗 딘의 지배를 택한듯, 그러면서도 시르쿠 군대가 다가오자 아모리에게 그 사실 알림. 이에 아모리가 시나이 반도의 이스트무스에서 공격하려 했으나 시르쿠는 그보다 남쪽으로 우회하여 나일 강 유역 당도. 한편 협상 중 아모리는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어린 예수와 헤롯 왕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했을 때에 묵었다고 전해지는 마타라의 시카모어 숲에 주둔 [565] 기사단 내부에서 제기됨. 한편 협상 제안한 밀레 역시 비난받음 [566] 본래 총대주교 애므리, 카이사레아 대주교가 잉글랜드의 헨리 2세, 프랑스의 루이 7세, 시칠리아의 마가렛, 그리고 플랑드르, 블루아, 트루아 백작등에게의 사절단과 함께 출항했으나 풍랑으로 회항. 사기 저하되자 티레 대주교 프리드리히가 바니아스 주교 장, 구호 기사단의 기베르를 대동하고 대신 나선 것. 등에게 사절단 파견됨. 하지만 호응 저조 / 아그네스의 남편 위그 드 이벨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 중 사망 [567] 이렇듯 시르쿠는 음모에 종교를 이용할만큼 현실적이었다. 영묘의 순례객으로 오려면 군대 대동하지 못하는 것 노림. 칼리파만 믿고 소수의 호위대와 향하던 샤와르를 유수프가 무장 해제시킴. 이후 칼리파 앞에 데려감. 시르쿠의 뜻대로 사형 판결. 이후 시르쿠는 군중들에게 샤와르의 관저 습격하게 하고 그 틈에 궁전을 장악양동작전 기록에 따라 유수프가 샤와르 처형 주도했다고도 함 [568] 당시 31세. 유수프의 경험 미숙과 튀르크-쿠르드의 분열 조장 가능성 등을 주목한 파티마 대신들의 지지로 선임됨. 다만 대부분의 시리아 아미르들도 그의 공로를 인정, 자신들의 대표로 승인. 살라흐 앗 딘, 포도주 마신거 등 회개하고 종교적인 모습 보이겠다고 선언 [569] 이후 교황의 지지 편지와 프랑스 향함. 루이 7세, 빠른 답변 회피. 한편 파티마 칼리파 알 아디드의 대내관 알 무타민이 예루살렘에 편지 보내 아모리에게 도움 청함. 그리고 누르 앗 딘은 동생 쿠트브 앗 딘이 죽어가는 모술의 상황 주시하느라 살라딘 돕지 못함 [570] 동로마 제독 콘토스테파노스, 킬리키아에 정박. 아모리에게 사절 보내 그의 군대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음을 밝힘 [571] 누비아 군대가 봉기하여 알 아딜 (사이프 앗 딘)을 묶어둠. 이에 살라흐 앗 딘이 푸스타트의 누비아 병영에 방화. 이에 누비아 인들이 불길로부터 가족과 재산 구하기 위해 돌아가자 알 아딜이 추격하여 학살함. 칼리파는 살라흐 앗 딘 지지. 한편 누비아 측과 공모했던 아르메니아 용병들은 그들을 돕지 못함. 살라흐 앗 딘, 어쨋거나 그들 병영 역시 방화하여 숙청. [572] 한편 다미에타 수비대의 방해물로 동로마 함대는 나일 강 진입 못함. 이에 아모리는 팔레스타인에서의 지연 이후로 자신의 식량이 부족해지고 있다는 콘토스테파노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미에타 공격 연기함. 한편 십자군은 공성탑을 만들어 다미에타 성벽의 강력한 부분..에 배치. 몰랐겠지 근데 그방면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 (헤롯의 위협 피해 요셉, 예수와 이집트로 피신하던 중 휴식 취했다고 전해지는 장소)이 위치한 곳이라 현지 콥트교도들과 동로마 군대의 정교도들이 분노함. 흥미로운 일화 [573] 함대 일부가 침몰하거나 해안가로 쓸려가버림 [574] 이후 마누일에게 십자군의 행실 보고 [575] 누르 앗 딘에게 망명했던 아르메니아 왕공 루펜 2세의 숙부 믈레가 시리아 군대를 이끌고 복귀하여 '프랑크' 혈통의 섭정인 사촌 토마스를 축출하고 조카 루펜마저 살해한 후 자신이 즉위. 이후 동로마령 킬리키아 침공하여 아다나, 마미스트라, 타르수스 점령. 동시에 템플러 성채인 바그라스 성채 포위. 이에 안티오크 공 보에몽 3세가 아모리의 도움으로 개입. 아모리, 킬리키아 영토를 수복하고 동로마 총독 칼라마노스에게 돌려줌. 동로마와의 신의 강화. / 아모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보두앵의 개인교사 기욤 드 티레가 그의 나병 기질 발견 (보두앵이 친구들과 피부에 못 넣는 게임?! 하는데 고통 무감각한 것 보고 판단) 이후 그렇게 진단됨. 요절하거나 통치에 적합하지 않을 가능성. 이에 아모리가 교회법 어기고 친족 결혼 강행한 것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소문 퍼짐. 한편 아모리는 서유럽에 도움 청하러 간 티레 대주교 프리드리히에게 상세르 (루아르 지방) 백작 에티엔을 초대할 것을 부탁. 딸 시빌라의 남편과 자신의 사위이며 동시에 아픈 보두앵의 후계자 될 인물에 대한 물색에 나선 것. / 마누일 1세의 조카 에우도키아가 로마의 귀족 오도 프랑기파니와 결혼. 교황 알렉산데르, 베롤리에서 열린 결혼식 참석. 이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에게 편지 보내 그의 딸 아그네스를 프리드리히 1세 대신 '더 나은' 동맹인 마누일 1세의 아들과 혼인시킬 것을 권고 / 카스트 드 뮈롤이 쥘베르 다쌀리에 이어 구호기사단장 취임 / 아모리와 위그 드 이벨린의 과부 아그네스, 시돈 영주 르노와 재혼 [576] 살라흐 앗 딘과 칼리파의 요청. (살라흐 앗 딘으로 하여금 파티마 칼리파 폐위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누르 앗 딘의 대리자로 파견됨. 군대와 함께 카라반 무역상들까지 대동. 도중에 요르단의 카라크 성채 잠시 공격. 이후 카라반은 다마스쿠스로 돌아감 [577]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장 바실리오스 카마테로스가 제노바 구역 설정하자 베네치아 인들이 반발. 그러자 마누일이 도시 내의 베네치아 재산 압류. 그러자 베네치아가 동로마 제품 불매운동. 결국 도제가 마누일의 사절단의 설득으로 세바스티아노 지아니와 오노 마스트로피에트로를 파견해 협상하게 함 [578] 대지진으로 알레포, 하마, 홈스, 그리고 트리폴리, 비블로스, 크락 데 슈발리에 등지의 성벽 붕괴됨. 복구 공사위해 세력권 막론하고 휴전. 이때 안티오크 성당에서 미사 드리던 정교회 신도들도 사망. 안티오크 공 보에몽 3세, 쿠사이르 (코사르) 성채에서 대주교위 주장하던 애므리 찾아가 용서 구하고 대주교로 복권시킴. 라틴 교회 복원됨 [579] 정확한 달은 아님. 늦가을. 모술은 두고 자지라 원정하여 신자르를 마우두드에게 떼어주고 나머지 자신의 영토에 편입시킨 것 [580] 다론 성채는 예루살렘 왕국 남쪽 국경을 방위하는 중요한 요새임. 따라서 아모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방문하려던 계획 연기하고 급히 구원에 나선 것 [581] 당시 가자는 템플 기사단이 수비. 아모리가 그들 대부분 데리고 남하하여 다론 구원. 한편 살라흐 앗 딘이 다론 포기하고 수비대 거의 없는 가자 공격하자 간단히 함락됨. 시타델 버팀. 살라흐 앗 딘, 아모리가 다가오자 동쪽으로 철수. 이후 네게브 사막 건너 시나이 반도 종단 [582] 교황 특사 자킨토 (미래의 첼레스티노 2세)의 주재 하에. 초대 단장은 페드로 페르난데즈. (1184년 사망) 4대조까지 귀족이어야 입단 가능. 단일 기사단장 휘하에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각지에 군사 지휘관 둠 [583] 바알벡의 시타델 (옛 유피테르 신전)은 누르 앗 딘의 십자군 포로 수용소. 포로들이 봉기, 간수들 제압하고 성채 장악함. 하지만 주변 무슬림들이 포위, 현지인이 알려준 비밀 통로로 들어와 진압함 / 마누일, 프리드리히 1세에게 자신의 딸 마리아와 그의 아들 하인리히의 결혼 제안. 한편 오도 드 생타망이 필리프 드 밀리의 뒤를 이어 템플 기사단장 취임 / 폰투스 지방 기근. 마누일,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와 다니슈멘드 대한 동맹 체결 / 마누일, 루이 7세에게 사절 보내 자신의 아들 알렉시오스와 그의 딸 아그네스 결혼 제안. 한편 상세르 백작 에티엔이 루이 7세의 대표자인 부르고뉴 공 위그 3세와 우투르메르 당도했으나 시빌라와 결혼하지 않고 돌아감 [584] 한편 살라딘은 쿠르드인 알 파질을 이집트의 카디로 임명 [585] 아모리, 아크레 주교, '궁정 원수' 제라르 드 퐁기, 그리고 근래 은퇴한 템플기사단장 필리프 드 밀리 등의 사절단이 갈리폴리 당도. 아모리의 장인이자 마누일의 사촌 요안니스 콤니노스의 환대. 헤라클레아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보우콜레온 항구 입항. 환영식, 연회, 경기, 무용 공연 등을 즐기고 보스포루스를 따라 마누일에 의해 더 큰규모로 증축된,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블라케르나이 황궁에서 환대 받음. 여기서 아모리가 봉신 서약하자 형식상으로나마 시리아 해안이 동로마 제국에 수복됨 [586] 파티마 칼리파 알 아디드의 이름 대신 압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디의 이름을 예배에 넣으라는 것 [587] 동시에 이집트의 아미르들 중 그에 반발하는 이들 숙청. 칼리파 알 아디드에게는 그들이 그에 대한 반란 꾀했다고 고함 [588] 몽레알은 시리아와 이집트 교통로 상에 위치. 누르 앗 딘은 카라크 공격하려 남하하던 것; 살라흐 앗 딘, 동생들의 누비아 기독교 왕국 대한 공격 도와야 한다며 합류 못하고 후퇴한다고 전함. 누르 앗 딘의 의심 증폭됨. 이에 아이유브의 조언대로 간곡한 편지 보냈더니 누르 앗 딘이 용서. 아마 압바스 칼리파로 예배 드리겠다고 약속한 듯 [589] 그랬는데도 아무런 제지 안받음. 살라딘은 죽어가는 칼리파에게 이를 알리지 말라고 함 [590] 향년 21세. 임종 전 어린 자녀들 부탁하기 위해 살라흐 앗 딘 불렀으나 그는 왕당파의 음모가 있을까 두려워 응하지 않음. 살라흐 앗 딘의 무리가 칼리파 독살했다는 소문. 아사신 분노 [591] 9월이긴 한데 파티마 칼리파의 사망으로 살라흐 앗 딘과 누르 앗 딘의 오해가 어느정도 풀린 이후로 추정해 '말'로 추정. 1172년이라고도. [592] 누르 앗 딘은 레몽의 몸값 중 5만 디나르 납부되자 풀어줌. 하지만 복귀한 레몽은 나머지 3만 디나르 모으는데 실패. 한편 마누일 1세은 자신의 딸 마리아와 시칠리아 국왕 굴리에모 2세와의 결혼을 직전에 파토냄. 타란토에서 신부 기다리던 굴리에모 2세는 복수 다짐 / 이해 잉글랜드의 왕자 리처드 (리샤르)가 아키텐 공에 봉해짐 / 베네치아의 폭동. 도제 미카일이 군중에게 살해됨. 세바스티아노 지아니 계승 / 시리아의 조베르가 카스트 드 뮈롤의 뒤를 이어 구호기사단장 취임 / 카타리파 의혹의 사제가 아라스에서 화형됨 [593] 1171년이라는 기록도. 다뉴브 강의 선박 난파와 동로마 영토에서의 비적떼 습격 견딤 [594] 한편 프리드리히 1세의 사절인 보름스 주교 콘라트도 합류해 삼자회담. [595] 아모리가 자신의 딸 시빌라와의 결혼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귀로에 오름. 이후 아르메니아 측의 안전 보장에도 안티오크에서 보에몽 3세의 선박 제공받아 타르수스 상륙. 이후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초대를 받아 튀르크 군의 호위로 콘야 향함. 극진한 대접과 선물. 3차 십자군 당시 프리드리히 1세의 협상에 선례로써 도움됨 [596] 누르 앗 딘이 침공에 대비한 피난처 찾기 위함. 여름. 누비아 군대가 카이로에서 피신해온 아르메니아 용병들과 함께 아스완 공격. 그 아미르는 살라흐 앗 딘에게 도움 청함 이에 살라딘 동생 동생 투란 샤가 파견됨. 누비아인 철수, 이후 재차 공격해왔으나 격퇴됨. 이후 투란 샤는 누비아 마을 이브림 점령. 콥트교도 학살. 한편 살라딘의 조카 타키 앗 딘이 트리폴리 정복. 무와히드 조와 국경 맞댐 / 1169년 시리아 아사신들의 새 지도자 된 라시드 앗 딘이 파티마 조의 멸망에 의지를 잃고 (혹은 복수를 위해) 아모리와의 동맹 제안한 것. 아모리, 이에 동의하고 타르투스의 템플러들에게 현지의 친아사신 (누사이리파) 마을의 조공 면제해 줄 것을 요청. 하지만 수입 감소에 불만 품은 템플러들이 동맹 결렬시키기 위해 왈터 드 메스니의 주도로 돌아가던 아사신 사절단을 시리아 산지에서 매복하여 학살. (기사단장 지시였을 수도) 아모리, 재판 위해 템플기사단장 오도에게 왈터 넘길 것을 요구하나 오도는 기사단 규율에 따르면 교황만이 심판할 수 있다며 거절. 아모리, 시돈에서 열린 템플러 모임에 군대 이끌고 나타나 오도가 머무는 건물 진입. 왈터에게 칼 겨눈채로 납치해 데려옴. 이후 아사신은 아모리의 사과 수용 (개종은 무산). 아모리, 교황 알렉산데르에게 오만하고 독립적인 템플러 대한 해체 요구하기로. /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가 누르 앗 딘에게 사절 파견해 동로마 대한 동맹 제의. 다니슈멘드에게 세바스테아 (시바스) 반환 약속 [597] 동로마-독일 협상 결렬된 후에 벌어진 일. 이탈리아 주둔 동로마 군은 로마의 프랑기파니 가문과 함께 구원 나섬 [598] 아모리가 동로마 대신하여 킬리키아 침공. 아르메니아의 믈레와 맞섰으나 별 성과 못거둠. 한편 아모리의 부재에 누르 앗 딘이 요르단 침공, 살라흐 앗 딘 소환. 카라크의 영주인 에티에네트의 둘째 남편 밀레 드 플랑시가 부재한 틈에 성채 포위. 이후 갈릴리의 음프헤 2세가 구원 나서자 병을 핑계로 (누르 앗 딘 오기 전에) 철수. 이후 누르 앗 딘이 당도하여 포위 이어나갔으나 역시 철수, 원정 실패의 이유로 합류하지 않고 가버린 살라흐 앗 딘 비난하며 이집트 침공 계획. 이에 살라흐 앗 딘, 주군에게 6만 디나르와 직물, 코키리 한마리 바침. 그 사이에 예루살렘 왕국 변경 습격해 십자군의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는 베두인들 축출함. 한편 조공에도 누르 앗 딘이 양이 적다며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자 새로운 도피처 물색 [599] 토로스 2세의 동생 스테파노스의 아들이자 믈레의 조카인 루펜 3세가 그를 폐위시키고 아르메니아 왕공으로 등극 (누르 앗 딘이 사망하자 믈레의 입지 축소. 이후 수도 시스에서 수하에게 살해됨) / 마누일의 조카 에우도키아 (이사키오스의 딸), 아라곤 왕실과의 결혼 위해 티레니아해로 향해. 그녀는 알폰소 2세 대신 그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 선택해 약혼. 하지만 그의 명목상 주군인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약혼 파기됨 [600] 한편 살라흐 앗 딘은 예멘 망명까지 고려. 이후 다마스쿠스 총독 이븐 알 무카담이 앗 살리흐를 '보호'. 도시에 잡아둠. 한편 누르 앗 딘의 이집트 원정 도울 준비하던 모술의 사이프 앗 딘은 그의 죽음 틈타 니시비스 일대 수복하고 우르파 (에데사) 접수. 그후 누르 앗 딘의 측근이던 이븐 앗 다야의 아들들이 장악한 알레포에 부관 귀무슈테킨을 파견해 장악, 그를 총독으로 봉함. 귀무슈테킨은 다마스쿠스의 이븐 알 무카담과 섭정권 두고 다툼 [601] 대략적인 시기. 6월은 확실 [602] 이후 밀레의 정적인 원수 음프헤 2세와 시돈의 르노가 그들이 지지하는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를 섭정으로 주장. 레몽은 보두앵의 사촌이고 최근 갈릴리의 에시브 (음프헤 2세의 친족인 것으로 보임)와 결혼한 상태. 한편 지참 영토인 나블루스로 은퇴한 아모리의 과부 마리아 콤니니는 라믈라의 영주 위그의 동생인 발리앙 드 이벨린과 결혼. 위그와 발리앙은 마리아와 아모리의 4살 딸 이사벨라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보두앵의 모후인 아그네스와 장녀 시빌라와 대립. 예루살렘 왕국의 두 파벌 성립 [603] 어떤 기록은 가을, 다른 기록은 8월이라 함 [604] 이들은 본래 시칠리아 함대와 협공 시도했으나 한발 늦게 봉기함 [605] 본래 이븐 알 무카담은 모술의 사이프 앗 딘과 연대하려 했으나 그가 거절하자 살라흐 앗 딘에게 도움 청한것 [606] 이후 밀레는 아크레의 좁은 골목길에서 암살됨. 요르단의 에티에네트는 재차 과부됨 [607] 11월 26일에 당도, 27일 입성했다는 기록도. 또 10월 28일 당도했다는 기록도 있다 [608] 하마의 아미르는 살라흐 앗 딘의 편에 선다는 뜻을 밝혔지만 하마 다다르자 살라흐 앗 딘은 그를 사로잡음. 아미르의 동생이 도시 넘기고 항복 [609] 이때 수블라에움 성채 신축되고 도릴라리움 성채 재건됨. 니카사르와 아마시아 대한 공격은 튀르크 인들의 강한 저항으로 실패. 이후 아나톨리아에서 룸 셀주크 축출 위해 교황에게 자신이 지휘하는 새 십자군 관한 편지 보냄 / 한편 안드로니코스와 테오도라는 후원자인 누르 앗 딘이 사망한 후 다마스쿠스를 떠나 폰투스로 향해 현지 튀르크 인들로부터 트라브존 인근 성채 주어짐 / 한편 셀주크 술탄 아르슬란 2세 사망. 아들 토그릴 3세 계승 [610] 5월 11일이라고도 함. 아사신은 시아파 칼리파국을 없앤 살라흐 앗 딘에 대한 원한이 깊었음, 알레포 포위 중이던 살라흐 앗 딘 막사에 13명의 아사신 암살자가 침투. 이전에 그들과 대면해봤던 아부 쿠바이스 (이전 아시신 요새) 성주 나시흐 앗 딘 쿠마르테킨이 암살자 발견하고 경보 울림. 다만 나시흐 앗 딘은 그들과 싸우다가 사망. 이후 호위대 모임. 암살자들 중 한명은 호위대에게, 나머지는 도주 중 잡혀 살해됨. 다만 그 과정에서 병사들 역시 꽤 희생됨. 살라흐 앗 딘은 다치지 않음 [611] 이후에 살라흐 앗 딘은 이를 '민중의 마음을 여는 승리였다'고 평가 [612] 이후 르노는 요르단의 에티에네트와 결혼하고 주전파 제후들 주도. 보두앵의 외숙 조슬랭 3세가 연대하여 발리앙 드 이벨린의 당파와 맞섬 [613] 군대 양분, 본인은 살라흐 앗 딘에 동맹한 신자르의 동생 마우두드 공격하러 대군 이끌고 향함 [614] 다마스쿠스와 이집트만 지키려 한 것. 하지만 살라딘을 과소평가한 사이프 앗 딘은 이집트로 돌아가라고 답변 [615] 살라딘, 병력 열세인 것을 파악하고 영토 할양 협상하며 조카 파루크샤와 타키 앗 딘의 지원군 기다림. 전투 시작되고 언덕 위의 살라딘 진영을 이즈 앗 딘이 공격. 살라딘 측이 열세일 때 조카들의 지원군이 언덕 아래 당도. 연합군 포위, 섬멸됨. 살라딘 : '용감하나 전쟁에 대해 무지한 자' 이후 사촌 무함마드 이븐 시르쿠를 홈스-팔미라-라흐바에, 시하브 앗 딘 알 하리미를 하마에, 그리고 이븐 알 무카담을 바알벡 총독에 봉함 [616] 마라트 알 누만 포함. 이후 동전과 쿠트바 앗 살리흐 대신 자신 이름 넣음. 한편 살라흐 앗 딘은 칼리파에게 누르 앗 딘과 같은 책봉 청했으나 현재 지배 영토에 대한 영주 (아미르) 칭호와 예루살렘 공격 열중하라는 답변 [617] 시토회 규범 따르는 다른 기사단들과 달리 덜 엄격한 아우구스티노회 규범 따름 [618] 봄. 동로마와 혼사 거절당한 굴리에모 1세, 그전에 제안했었던 잉글랜드의 공주 조앤과의 결혼 약속함 [619] 그리고 1년 내로 예루살렘 탈환할 것이라는 덕담?도 해줌. 실제로 그렇게 될 뻔 [620] 이날은 살라딘에 강력히 반대한 인물이라 함. 만비즈 포위 전에 비자아 점령. 점점 알레포 주변 하나씩 점령 [621] 5월 11일이라고도. 첫 암살자가 살라흐 앗 딘의 목을 노렸으나 갑옷에 막힘 [622] '산의 장로' 라시드 앗 딘이 직접 살라딘의 막사에 들아와 '너는 우리 수중에 있다'라는 글귀 남기자 기겁하여 철수, 이후로 아사신 영토 건들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623] 이후 그의 목은 술탄에게 보내짐. 마누일은 복수를 위해 수블라에움에서 콘야 향해 진군. 트지브리체 고개 끝의 미리오케팔론 성채에서 튀르크 군과 대치. / 살라딘, 동생 투란 샤에게 시리아 맡기고 최측근만 대동하고 이집트 향함 [624] 이후 마누일은 굴욕적이게도 튀르크 군의 호위 받으며 귀환. 수블라에움은 파괴하나 도릴라리움은 비티니아 방위에 필수적이라 여겨 그대로 둠 [625] 루이 7세의 6촌뻘 친척. (루이의 외조모 지젤라가 기욤의 친조모. 루이의 추천으로 결혼 성사되었을 가능성. [626] 이해 교황 알렉산데르가 자신의 주치의 필리프를 필두로 인도 방면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프레스터 존에게 사절단 파견, 무슬림 대해 십자군 국가 원조 부탁하는 자신의 친서 전달하게함. 사절단, 예루살렘 당도. 프레스터 존이 아시아가 아닌 아프리카에 있다고 판단, 이집트로 향함. (에티오피아 사제와 만나거나 소문 들은 것으로 추정됨) 나일강 거슬러 올라갔다는 것이 마지막 소식 / 연초. 마누일, 메안데르 협곡 따라 반격. 튀르크 군 철수. 마누일의 사촌 안드로니코스 앙겔로스 (마누일의 이모 테오도라의 아들)와 마누일 칸타쿠제노스가 차락스로 파견되어 추격 맡음. 후자는 협곡의 주요 성채인 콜로사이 (차오나이) 점령. 전자는 후자와 떨어지자 당황, 튀르크 분견대를 본대로 착각해 추격. 마누일, 안드로니코스 여장시켜 수도 행진시킨다고 협박 / 마누일, 예루살렘 왕국에게 재차 이집트 원정 함대 지원 약속 / 로제르 드 물렝이 조베르에 이어 구호기사단장 취임 [627] 필리프의 외조부가 보두앵의 친조부인 풀크로 같음. 다만 외조모와 친조모는 서로 다름 [628] 보두앵, 필리프에게 이집트 원정 이끈다면 섭정 맡기겠다고 제안하나 필리프는 어려운 전쟁 홀로 이끌러 온게 아닌 순례 목적이라며 사양. 보두앵, (혼자 책임지는게 부담이라면) 르노 드 샤티용과 공동 지휘 제안. 하지만 필리프는 (천한 출신의) 르노 불신해 역시 거절. 이에 제후들이 그를 둘러댄다며 고발하고 진의 추궁. 필리프, 참사회에서 로베르 드 베튄의 아들들 (필리프가 그들의 후견인)과 보두앵의 여동생들 (아모리의 딸들) 결혼 제안. 발리앙 드 이벨린의 주도로 부결됨. 한편 당대인들은 레몽과 보에몽이 플랑드르 십자군을 자신들의 영토에서 쓰기 위해 필리프에게 이집트 원정 나서지 말도록 설득했다고 비난 [629] 그 전에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에게 군사 개입 청함. 군대 대신 피에르 드 생 크리스고노와 부르주, 푸아티에, 나르본, 바스 등의 주교들과 연대기 작가 로제르 등의 선교단 파견됨. 이후 시토회 수도원장 총회에 카타리파 이단의 확산 경고. 시토회의 클레르보 수도원장 앙리 드 마시에게 선교단 동참, 그 공과로 1179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추기경 겸 알바노 주교로 서임됨 [630] 추정 시기. 9월일 가능성. 동로마 사절들, 십자군의 저조한 의지에 분노. 이후 아모리가 겨우 성사시킨 동로마-십자군 연대 사실상 와해됨 [631] 홈스 주변 약탈하였으나 회군 도중 반격을 받아 다 빼앗김 [632] 십자군이 홈스, 하림 등 북쪽에 있는 틈에 남부 유대 지방 공격한 것. [633] 이에 살라딘은 안심하고 분견대 파견해 예루살렘 왕국의 각지를 공격하게 함. 그중 일부는 예루살렘 성문 앞까지 당도. 2만의 아이유브 군대에 비해 보두앵은 375명의 기사들과 수천의 보병이 전부. 아이유브 군대가 템플러의 가자를 포위한 덕에 단지 84명의 템플러만 합류. [634] 라말라 부근인 텔 앗 사피 인근의 시내를 건너는데 10일간의 폭우로 불어난 물에 아이유브 군대의 보급이 지체됨. 그리고 보두앵, 르노, 조슬랭 3세의 십자군이 참십자가 내세우고 (보두앵은 아픈 몸에도 부축 받아 말에서 내려 참십자가 앞에서 기도) 기습해오자 그렇지 않아도 분산된 아이유브 군대 혼란. 일부는 보급품의 무기 찾으러 가기도. 말 역시 긴 여정에 지친 상태. 혼전 와중에 타키 앗 딘의 아들 전사. 살라딘, 반격 나섰으나 맘루크 호위대마저 괴멸되자 도주. 보두앵, 해질녘까지 살라딘 추격하다가 아슈켈론 귀환. 아이유브 군대는 텔 앗 사피에서 7km 떨어진 텔 알 헤시에서 재집결, 살라딘과 이집트 귀환. 베두인들의 습격 당하며 행군한 결과 카이로 와보니 오직 1/10만 모임. 그럼에도 12월 초 카이로에는 승전보가 먼저 도착; 한편 보두앵은 전승 기념 위해 전장에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트린느에 봉헌된 베네딕토회 수도원 건립. 축일은 역시 11월 25일. 한편 전투 중 아이유브 군대의 저항으로 십자군 측도 1100명 전사, 850명 부상. 템플기사단장 로제르 드 물랭 역시 전사. 전투 직후 십자군이 하림 포위함, 살라딘은 패전 직후라 구원 못함. 알레포의 앗 살리흐가 나섬 [635] 그 수비대는 앗 살리흐가 알레포 총독 귀무슈테킨을 처형했다는 것에 반발. 사기가 떨어짐 혹은 반란 일으켰다고도함 [636] 그리고 '그들 공통의 적' 살라흐 앗 딘이 시리아로 진격해온다는 정보가 제공된 것도 한몫 했다. 한편 군대 이끌고 온 앗 나시르가 하림을 확고히 장악하고 돌아간 것인지는 의문. 다른 기록에 의하면 앗 살리흐가 진격해오자 십자군이 포위 풀고 철수했다고도 함 [637] 노는거 좋아하고 동시에 관대한 동생 투란 샤가 다마스쿠스 총독으로써 흉작과 채무에 직면하자 살라딘은 그에게 다른 곳으로 전임 요구. 투란 샤, 바알벡 청함. 하지만 현직 총독인 이븐 알 무카담이 자신을 봉한 것은 살라딘이라며 거부. 6개월 넘게 바알벡 성벽 앞에서 살라딘과 대치. [638] 이때 3백여명이 살해되고 많은 수가 포로가 되어 마요르카 (알 마유르카)로 끌려감. 1185년에 석방됨 [639] 신자들의 땅을 약탈했다는 이유로. 항상 관대한건 아님.. 지하드 전사 이미지 강조하려는 의도였다고도 [640] 1178년 10월과 1179년 4월 사이. 이에 살라흐 앗 딘이 건설 중단 대가로 6만 디나르 제안, 보두앵이 거절하자 10만 디나르로 액수 올렸으나 역시 퇴짜맞음 [641] 프리드리히 1세, 프로방스 백작 라몬과 마누일의 조카 에우도키아의 약혼 취소시킨 후 그녀와 몽펠리에 영주 기욤 8세 맺어줌. 라몬은 1181년 4월 5일 몽펠리에 인근 지나다 암살됨. 한편 몽펠리에로 파견된 동로마 사절이 시빌라의 장인인 몽페라토 후작 기욤과 만나 그의 다른 아들 르니에와 마누일의 딸 황녀 마리아와의 약혼 합의. 프랑스와의 결혼 협상 성공. 가을, 몽펠리에의 전함 23척이 루이 7세의 딸 아그네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당도. 마누일의 아들 알렉시오스와 약혼, '안나, 개명 [642] 보두앵이 모후인 아그네스의 연인이라고 한다. 한편 살라딘은 이집트의 알 아딜에게 기병 1500 파견 요청 [643] 십자군이 파루크샤의 습격대를 따라잡아 패배시킴. 이후 레몽과 템플러들이 더 진격하다가 요단강에서 살라딘의 본대와 마주침. 템플러들이 돌격하나 실패 후 퇴각. 남겨진 레몽 군대 붕괴. 십자군은 보포르 성으로 도주. 그 과정에서 템플기사단장, 발리앙의 동생 보두앵, 위그 드 티베리아스 사로잡힘. '바가지 몸값' 책정됨. 패잔병들이 구원 나선 시돈 영주 르노 만류. [644] 보두앵 4세의 여동생 시빌라와 결혼하려 했으나 그녀는 일단 몸값 마련될 때까지 결혼할 수 없다고 통보. 한편 기사단장 오도는 기사단 약화시킬 것 우려해 석방 협상 거부, 다마스쿠스에서 옥사 [645] 이후 마누일 도와 셀주크 원정 나섬. 이에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1세게에 사절 파견해 자신의 딸과 그의 아들 결혼시키는 대가로 대동로마 동맹 제안 [646] 이후 살라딘의 명으로 성벽 허물어짐. 석공들과 노동자들은 포로. 이후 살라딘이 십자군 대한 군사 원정 할때마다 이곳을 통해 아크레와 예루살렘 방향 진출 [647] 아놀드 드 토레이라가 템플기사단장으로 취임 / 가을. 안티오크의 보에몽 3세, 마누일 1세 사망하자 그의 조카인 아내 마리아 콤니니 쫓아냄. 이에 파문당함 / 교황 알렉산데르 3세, 추기경이자 알바노 주교인 앙리 드 마씨에게 프랑스 중남부의 이단들에 대한 십자군 설교 지시 [648] 한편 비슷한 시기 보두앵 드 발리앙은 시빌라와 결혼하기 위해 마누일에게 몸값 부탁하기 위해 북상 [649] 한편 그의 형 몽페라토의 코라도가 동생의 결혼식 참석 [650] 한편 애므리는 발리앙의 조카이자 보두앵 드 이벨린의 딸인 에시브와 결혼한 상태. 그의 연인인 태후 아그네스는 기를 자신의 딸 시빌라와 결혼시켜 이벨린 가문과 맞서고자 함. 이에 시빌라 역시 보두앵 돌아오기 전에 기와의 혼인 합의. 르노-뤼지냥-쿠르트네 (조슬랭) 파벌의 레몽-이벨린 파벌에 대한 승리. [651] 이때 군대 데려오자 보두앵은 자신을 폐위하려 한다 여기고 본래 생각하던 부르고뉴 공 위그 3세 (그 역시 쿠르트네 가문의 인척이라 레몽이 반대) 대신 서둘러 기 드 뤼지냥과 시빌라의 결혼 추진함 [652] 아이유브 군대의 갈릴리 습격 이후 제안. 살라딘, 겨울의 기근 겪던 터라 합의. [653] 살라딘 본인은 부카이아 고개 넘어 타르투스 공격. 레몽, 허를 찔려 군대 모을 수 없자 아르카 성채로 피신. 이집트 함대는 해상으로 타르투스 앞 루아드 섬 점령. 휴전 성립 후 철수 [654] 안드로니코스의 애인 테오도라를 납치하자 그 역시 항복한 것. 미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로 과장된 연기를 보이며 마누일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고 참회. 마누일, 용서하고 폰투스의 오이노이 총독으로 파견 [655] 하지만 섭정 알렉시오스가 '프랑크인' 모후 마리아가 친서방인 정책을 펴고 권력을 집중시키자 마누일의 딸인 마리아와 남편 요안니스 (르니에르) 부부가 반발. 마리아와 알렉시오스 간의 염문설까지. 음모자들은 알렉시오스 암살 꾀했으나 일당 중 한명이 불어 무산됨. 이후 그들은 하기아 소피아로 도주해 총대주교의 보호 받고 이탈리아, 조지아 병사들 고용 [656] 6월이라고도.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와 그의 사위인 마르딘의 아미르 누르 앗 딘간의 분쟁 조정 [657] 헤라클리우스가 아그네스의 연인이라는 설. [658] 르노, 순례로 상에 위치한 타이마 오아시스까지 약탈. 살라딘, 조카 파루크 샤에게 요르단 약탈하게 하고 보두앵에게 협정 위반 항의했으나 그는 르노에게 약탈물 반납하도록 하지 못함. 이에 살라딘은 풍랑으로 다미에타 부근에 좌초한 1500명의 기독교 순례자들을 체포하여 보상 받을 때까지 인질로 구류. 한편 명령 불복에 분노한 보두앵은 레몽의 영향력 복구시킴. / 봄. 아르메니아 왕공 루펜 3세, 예루살렘 순례. 음프헤 2세와 에티에네트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 / 가을. 십자군-아이유브 왕조 휴전 [659] 이후 6월, 황녀 마리아는 당숙 안드로니코스에게 개입 청하는 편지 보내어 분란 재개의 불씨를 제공 [660] 봄에 교황의 명으로 (Cor Nostrum) 십자군 조직. 알비 자작 로제르 2세의 부인 아들리아데가 수비 맡음 [661] 향년 18세. 독살로 추정됨. [662] 다만 하마의 아미르가 제안한 대살라딘 동맹은 거절. 휴전을 먼저 깰만큼 (전쟁의 빌미 제공) 자신은 없었던듯 [663] 안드로니코스 앙겔로스와 해군 제독 콘토스테파노스가 반군 가담해 성공. 섭정 알렉시오스 실명되어 수도원행. 여자와 아이들까지 학살당함. 살아남은 라틴인들은 선박으로 도주, 도중에 보복으로 프린스 제도 습격. 이탈리아의 반동로마 정서 강화됨 [664] 아그네스와 조슬랭 3세가 거절하도록 보두앵 설득. 이에 레몽은 베이루트에 머뭄. 다만 다른 귀족들의 설득으로 결국 레몽 예루살렘 진입. 이어진 회의에서 르노 드 샤티용이 이집트에서 북상하는 살라딘 습격 주장. 레몽은 왕국 방어병력 부족해진다고 반대했으나 결국 강경파가 득세. [665] 알레포의 사령관 쿠크부리의 압박에 의한 것. 모술로 돌아감. 한편 마우두드가 자신을 경계하자 쿠크부리는 히신 카이파, 비르칙의 아르투크 왕조와 동맹하고 비밀리에 살라딘과 결탁 [666] 이후 이집트로 돌아오지 못함. [667] 십자군이 요단강 건너편 (몽레알-카라크)에 묶여 있는 틈에 홈스, 보스라, 바알벡 군대와 함께 공격한 것. 5백여 여인 사로잡힘. 티베리아스 인근의 동굴 성채인 하비스 잘두크의 현지 기독교도들로 구성된 수비대는 별 저항 없이 항복. 한편 티베리아스에 당도한 레몽은 와병 [668] 보두앵이 성채 근처이 진영 세우자 다음날 살라딘이 접근해 전투. 십자군이 방어 태세 취하면 튀르크 군대가 뚫을 수 없다는 것을 재차 증명. [669] 이집트의 무슬림들이 성지 순례할 때에 출항하던 항구 [670] 다마스쿠스 외곽의 모스크를 파괴하려 했으나 현지 기독교도들이 그런다면 바알벡 총독 이븐 알 무카담이 시내 교회 파괴할 것이라 만류 [671] 10월이라는 기록도. 봄 무렵 나사렛에서 크게 아픈 후 겨우 회복했음에도 반신불구 면치 못함. 예루살렘만 직접 지배하고 나머지 기에게 넘김. 제후들 승인. 한편 기욤 드 티레, 교황에게 복권 청하러 로마 향함 / 아르메니아의 루펜 3세, 경쟁자인 램프론의 하이톤 가문의 영토 병합 / 알레포의 마우두드, 십자군과 동맹 /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아들 헨리, 십자군 종군 서약. 다만 부왕의 불허와 요절로 무산됨 / 자라, 헝가리의 도움으로 베네치아에 반란 [672] 알 하우라, 얌바 등 메디나의 항구 도시들 습격당함. 메카의 항구인 아르 라깁 (제다?) 역시. 순례자 대상 행렬 마주치자 학살 자행. / 보두앵, 왕국 제후들에게 2% 세금 거둠 [673] 그외에 마르딘 측의 자금 지원, 아르메니아 샤의 지원군까지 합세 [674] 이집트 총독 알 아딜이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의 함대를 홍해로 옮겨놓음. 메디나에서 하루 거리인 알 하우라의 산지에서 생포된 두 장교들은 핫지 기간 메카의 희생제 장소 미나에서 공개 처형됨. 살라딘, 나머지도 모두 처형할 것 명령 [675] 살라딘의 동생 타즈 알 물크가 포위 중이었으나 살라딘 본인이 오고나서야 항복 [676] 이에 요안니스 (르니에르)의 형제들인 몽페라토의 코라도, 보니파시오는 동로마 대한 반감 가짐. 4차 십자군 이후 르니에르에게 주어졌던 테살로니카 주장 [677] 9월 29일이라는 기록도 [678] 10월 1일이라는 기록도. 당시 고드프루아 드 브라반트, 라울 드 물랭 등의 귀족들이 예루살렘 방문 중이었음. 그외에 르노 드 시돈 등도 참전. [679] 그리고 보두앵이 티레와 예루살렘 바꾸자는 제안 해오자 거절 [680] 르노의 부인 에티에네트가 음프헤 3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681] 1184년이라는 설도. (결혼, 포위 모두). 결혼을 주관하는 에티에네트가 살라딘에게도 음식 보내자 살라딘이 위치 알아내고는 그 방면은 공격 중단시킴. 한편 르노는 기사 한명이 해자 위의 다리 막는 동안 입성 [682] 발리앙 드 이벨린이 보두앵 5세와 성묘교회로 동행,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가 대관식 주관 [683] 보두앵은 가마를 타고서라도 출정. 귀족 회의에서 섭정직 박탈 의결됨. 이후 기는 아내 시빌라와 다툰 후 아슈켈론의 영지로 귀환 [684] 기사단장들과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가 기를 위해 탄원하였으나 보두앵은 그들을 궁정에서 쫓아냄. 이후 그들은 십자군 청하러 서유럽으로 향함 / 마누일의 조카 요안니스 두카스의 아들 알렉시오스 등이 시칠리아 왕국에 당도. 굴리에모 2세에게 동로마 원정 부탁 [685] 그럼에도 기는 아슈켈론에서 버팀 [686]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의 막내 아들. 라틴 제국 황제 피에르 1세의 부친 [687] 이후 6월 8일 함께 출발해 6월 20일 군영의 살라딘 알현 [688] 8월 13일이라는 기록도 [689] 진영과 투석기 불태우고 60km 북쪽의 히스반으로 향하여 십자군의 동태 파악. 십자군은 전투 회피, 카라크 입성. 살라딘, 나블루스 습격, 약탈하고 방화. 주민들 학살 혹은 노예화. 이후 자카리야의 성지인 세바스테아 당도. 그곳에 갇혀 있던 무슬림 포로들 풀어줌. 그후 제닌 습격, 파괴하고 떠남 [690] 정확히 말하면 속죄 더는 것. 빈자들은 기도로 대신 [691] 요안니스 2세의 장남 이사키오스의 외손자,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와 템플러의 몸값 지불로 아르메니아로부터 석방되었지만 두려운 나머지 킬리키아로 향함, 위조된 칙령 내밀며 총독 자칭. / 시칠리아 국왕 굴리에모 2세의 사촌 탕크레드 디 레체가 이끄는 350척의 함대가 출항. 안드로니코스 1세, 다비드 콤니노스에게 테살로니카 방어 맡기고 사위 로마노스와 요안니스 브라나스를 디라키움으로 파견. 하지만 탈영자 속출 [692] 헨리 2세는 예루살렘 국왕을 지냈던 풀크의 증손자. [693] 다만 레몽은 보두앵이 사망하면 자신이 사주했다고 여겨질까봐 후견인은 사양, 조슬랭 3세가 임명됨. 만약 후계자 보두앵이 10세 이전에 사망할 경우 후계는 헨리 2세, 필리프 2세, 프리드리히 1세, 교황의 중재 (시빌라 vs 이사벨라)에 맡기고 그동안은 레몽이 섭정. 기사단장들과 총대주교도 동의 [694] 귀족들은 헨리가 대관식 때 봉신들 보호하겠다는 서약 일깨우며 양위 반대. 한편 헨리의 막내인 존이 후보로 고려되었으나 제후들과 부왕의 반대로 무산됨 [695] 이에 요안니스 두카스의 동로마 군대가 파견되나 탈영자 속출해 무산됨. 이에 대원수 알렉시오스 기두스가 파견되나 포위 풀지 못함 [696] 알레포의 알 아딜이 의사들 파견하나 유서까지 작성. 이후 아흘라트 태수는 팔라반과 결혼 동맹 맺음. [697] 이후 시칠리아 함대 이끌고 마르마라 해 진입한 탕크레드 디 레체, 프린스 제도의 프린키포 섬 습격했으나 격퇴됨. 그후 니코메디아만 습격. 동로마 해군의 반격으로 철수 [698] 1185년 가을 살라딘이 아팠을 때에 그가 사망하면 그 가문을 제거하고 자신이 시리아 장악하려 했음. 살라딘이 암살했다는 설이 유력 [699] 레몽에게 티베리아스에서 귀족 회의 소집하라고 보낸 후 베이루트와 티레 장악. 한편 템플러들은 보두앵 5세의 시신을 예루살렘으로 호위. 르노 드 샤티용도 가세. 한편 레몽은 이벨린 가문과 나블루스에서 제후 소집해 쿠데타에 반발. 이사벨라, 라말라의 보두앵 드 이벨린, 시돈의 르노, 카이사레아의 고티에, 음프헤 4세 등 모임. [700] 레몽, 예루살렘에 시토회 수도사 둘을 파견해 참사회의 승인 없는 대관식은 보두앵 4세의 뜻에 위배된다고 항의. 그럼에도 총대주교 헤라클리오스의 여론 몰이로 시빌라 대관식 거행. 구호기사단장 로제르는 대관식 예복함 열쇠 제공 거부, 템플기사단장 제라르가 제공. 한편 시빌라의 대관식 전에 시빌라는 총대주교와 남편 기에게 왕관 수여. 이에 레몽은 살라딘의 도움으로 이사벨라 옹립하려 함. 그러자 내전 두려워한 음프헤 4세는 예루살렘 향해 시빌라에게 충성 서약. 이후 레몽은 보두앵 2세의 외손이라는 점을 들어 왕위 칭할까 생각. 기 드 뤼지냥, 아크레의 귀족 회의에서 레몽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베이루트 영지 압수. 이에 레몽은 아내 에시브의 갈릴리 영지로 은퇴. 발리앙 드 이벨린도 충성 서약 거부, 아들 토마스에게 영지 물려주고 안티오크 향함 [701] 9월 혹은 1187년 1월이라는 기록도. 한 포로가 휴전 기간 상기시키자 르노는 '너희의 무함마드한테나 와서 풀어달라 그래라'라는 망언 [702] 다만 기 드 뤼지냥은 예법대로 사절 맞이하고 르노에게 포로 석방 명하나 르노는 불입권 내세우며 거부. 이에 살라딘은 휴전 종료 선포 [703] 1183 ~ 1186년간 알레포 총독 맡았다가 다시 이집트 맡음. 치열한 전투 끝에 자파 점령. 저항 대가로 주민들 노예로 끌고감 / 아르멩가드 드 아스페가 구호기사단장 취임 [704] 기의 의붓 장인? 발리앙 드 이벨린이 티베리아스 공격은 십자군을 분열시켜 살라딘의 개입 초래할 것이고 레몽의 군대가 더 우세하다고 중재 시도. 하지만 레몽이 베이루트 돌려줘야 협상 응한다고 하자 기가 거부하며 결렬됨. 한편 레몽과 보에몽 3세는 살라딘과 휴전 체결. [705] 사절단이 늦게 출발했는지 나블루스에서 하루 묵음. 한편 이미 살라딘의 장남 알 아프달의 선발대는 바니야스에 주둔 [706] 발리앙은 다른 일로 나블루스 남고 나머지 사절은 갈릴리 향해 떠남. 기사단장들은 라 페브 성채 당도. 하지만 이미 알 아프달의 선발대가 야곱의 여울에서 요단강 건너 진군. 레몽, 해를 끼치지 않는 대가로 다음날 갈릴리 통과 허용. 레몽, 기사단장들에게 경고. 발리앙, 다음날 성 야고보의 날 미사 위해 세바스테아로 향하여 그 주교 소환. 저녁, 레몽의 사절이 라 페브 당도. 템플기사단장 제라르, 현지 템플러 소환. 카쿤의 자크 드 마일리가 90여명의 기사들과 합류 [707] 발리앙, 예배 후 라 페브 향함. 한편 레몽의 경고에도 출정한 기사들은 나사렛 인근 사푸리야의 크레송 샘에서 말들의 목을 축이던 아이유브 군대 발견. 구호기사단장 로제르와 템플기사단의 지휘관 자크의 만류에도 기사단장 제라르는 공격 결정. 그리고 제라르가 비겁하다고 놀리자 자크 역시 돌격 동참. 하지만 아이유브 군대가 버티며 우세한 숫자와 궁병들로 반격해오자 패배. 아이유브 군대가 추격해 사상자 늘어남. 제라르와 2명의 템플러 만이 나자렛 당도. 이븐 알 아시르에 의하면 기사들은 몰살당하고 템플러 지휘관 한명만 겨우 도주했다고. 기사들의 수급은 살라딘에게 보내짐. 나머지 템플러들은 사로잡힘. 한편 라 페브 당도해 패전보 접한 발리앙은 부상당한 제라르의 치료 지원하고 대주교와 티베리아스 당도. 레몽에게 기독교 지도부 통일을 위해 기에게 용서 구하자고 설득, 수용됨. 한편 아이유브 군대는 별 저항받지 않고 갈릴리 횡단해 살라딘의 본진과 합류 [708] 한편 템플러들은 기에게 헨리 2세가 토마스 베켓 살해의 속죄금으로 지불한 돈 전달. 안티오크 공 보에몽 3세의 아들이 50여명의 기사들과 합류 [709] 한편 그 전에 살라딘은 페트라 방면으로 향하여 메카 순례 마치고 돌아오는 누이 및 조카들의 카라반 마중나감 [710] 총대주교 헤라클리오스가 갑자기 와병 호소하여 성묘 교회의 원장이 대신 가져옴 [711] 다마스쿠스에서 서남쪽으로 40여 km 떨어진 곳. 조카 타키 앗 딘이 우군, 쿠크부리가 좌군, 본인이 중군 맡음 [712] 시빌라의 전남편인 기욤의 동생. 아랍인들은 그를 알 마르키슈로 부름 [713] 벨부아 성채의 구호기사단이 포착했으나 소수라 그냥 지켜봄 [714] 르노 왈, 레몽의 영토를 구하려는 것을 레몽은 막지 마라. 레몽이 살라딘 뇌물 받았다고 주장. 저녁 때 레몽의 아내 에시브의 편지 당도하자 재차 회의. 레몽, 성채 버틸 수 있으니 안티오크 지원군 기다리며 살라딘 군대 땡볕에 놓아두어야 한다고 주장. 이에 기도 동의. 하지만 템플기사단장 로제르가 사석에서 재차 설득. 결국 기는 다음날 전투 결정 [715] 레몽이 선발대, 기가 중군, 르노와 기사단이 후군. 튀르크 기병대 및 궁수들의 소규모 공격. 한편 언덕 아래에서 올라오는 연기에 시야 방해. 하틴 앞두고 템플러들이 중무장 갑옷 호버크 때문에 지쳐 멈춤. 하틴에서 3km 떨어진 루비에 (marescalcia) 일대에 진영 세움. 기대와 달리 수자원 전무. 샘 있다는 레몽 주장대로 그곳까지 왔다는 기록도. 레몽, 호수까지 진격 주장 [716] 갈증에 시달리던 십자군, 다음날 기의 결정으로 포위 뚫고 호수 향함. 하지만 기병대는 불길 때문에 우회하다가 아이유브 군대에 막힘. 한편 보병대는 명령 어기고 언덕 위로 향했다가 아이유브 군대에게 포위되어 학살됨. 십자군은 이를 구하지 못함 [717] 패색이 짙어지자 레몽은 기의 명령도 없이 휘하의 트리폴리, 갈릴리 기사들과 포위망 향해 돌격. 그를 알아본 타키 앗 딘이 퇴로를 열어주었다함. 한편 발리앙과 이벨린 군대도 탈주 성공. 다만 기, 르노, 기사단은 하틴 언덕으로 밀려남. 아이유브 군대, 십자군 진영 진입. 아크레 주교 등 전사. 기, 애므리 드 뤼지냥, 르노 드 샤티용, 템플기사단장 제라르 등 포로. 구호기사단에 의하면 1천 기사들 전사, 2백 도주. [718] 살라딘, 기를 자신의 막사에서 공손히 맞음. 다만 르노에게 물 건내려 하자 제지. 손수 르노의 어깨 내리침. 이후 처형됨. 기사단원들은 무슬림 광신도들에 의해 학살됨. 포로들은 다마스쿠스로 운송됨. 몸값 낼 수 없다고 판단되는 가난한 기사들은 노예 전락 [719] 7월 7일 혹은 9일이라는 기록도. 상인들 떠난 후 무슬림 병사들이 상점 약탈 [720] 피신해 있던 발리앙의 병사들은 며칠간의 협상 후 항복. 이벨린 성채는 하루간의 저항 후 항복 [721] 본래 목적지인 아크레 당도하자 이상한 낌새 느끼고 하선 거부. 무슬림 상인으로 가장한 채로 사실 파악하곤 티레로 향함. 그의 당도에 힘을 얻은 시민들은 살라딘의 르노에게 성벽에 내걸라고 보낸 문장 2개를 해자에 내던짐. 이후 르노는 영지인 시돈 방어 위해 떠나고 발리앙이 당도해 코라도 도움. 살라딘, 하틴 전투에서 사로잡은 코라도의 부친 기욤 5세 인질로 항복 요구하나 코라도가 화살 (혹은 석궁 들고 겨냥하며)로 응수하자 티레 공격 대신 북상 [722] 살라딘, 자신의 포로인 위그로 그 영지인 비블로스 항복 얻음. 이후 약속대로 위그 석방함. [723] 8월 9일이라는 기록도 [724] 그의 아내가 동로마 황녀 마리아 콤니니 (아모리의 과부)였기에 동로마 건드리지 않으려는 살라딘의 호의. 이후 약속 어기고 나블루스에서 예루살렘 들어가지만 살라딘은 이역시 허용. 예루살렘에는 겨우 2명의 기사만이 남아있는 절망적 상황. 성안의 16세 이상의 남자들과 30명의 상인들 기사로 서훈. 여왕 시빌라는 살라딘의 허가 하에 예루살렘 떠나 나블루스에서 기 기다림 한편 안티오크 대주교 애므리는 바그라스 주교를 파견해 헨리 2세에게 친서 보냄 (예루살렘 왕가와 가까운 친척) 그리고 티레 대주교 요시야스는 안티오크에서 시칠리아 거쳐 프랑스 향해 하틴의 비보 전하러 감 [725] 8월 10일이라는 기록도. 이때 아이유브 군대가 호위. 한편 그날 밤 예루살렘에서 아슈켈론으로 사절 당도. 살라딘과 협상하나 항복 거부 [726] 협상 도중에도 더 유리한 조건 위해 양측간 접전 이어짐. 결국 1인당 성인 남성은 10 디나르, 여성은 5 디나르, 아이는 1 디나르의 몸값 책정. 제대로 하면 3만 디나르인데 발리앙의 요청에 7천 디나르로 대폭 할인 [727] 시칠리아 사절단과 함께. 하틴 전투의 비보도 전하지만 더 중요하게도 참십자가 상실이 더 큰 소식 [728] 남은 두 성채인 카라크와 몽레알의 항복 대가로 살라딘과 협상해 음프헤 석방시킴. 하지만 그의 항복 요청에도 기사단이 거부하자 음프헤는 다시 살라딘 군영으로 되돌아감. [729] 몸값 지불 혹은 면제된 자들은 서쪽 성문으로, 몸값 못내고 노예된 자들은 동쪽 성문으로 향함. 기사단은 자신 멤버 아닌자들 대한 몸값 지불 거부.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 역시 재산 다 챙겨감. 알 아딜, 1천 포로 석방. 헤라클리우스는 7백, 발리앙은 5백 포로 선별해 몸값 없이 데려감. 살라딘의 관용과 반대로 일부 아이유브 병사들이 몸값 바가지 씌우기도. 피난민 무리는 안전히 티레 당도. 입을 덜기 위해 일부는 트리폴리 향함. [730] 일부 주장에도 살라딘은 성묘교회 보존. 예루살렘의 정교도들은 몸값 및 지즈야 납부 대가로 남아있을 수 있음. 한편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는 살라딘과 협상하여 예루살렘의 기독교 성지 대한 동방 정교회의 관할권 인정받음. / 티레와 트리폴리 시민들이 예루살렘의 낙오자들 입성 거부. 이에 그들은 안티오크로 향함 [731] 9월 혹은 12월이라는 기록도. 향년 47세. 레몽 3세의 외조부와 레몽 4세의 외고조부는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로 같음. 따라서 6-7촌뻘 [732] 29일이라는 기록도. 십자군 떠나는 이들의 재산은 교회의 보호 하에 놓이고 5년간 매주 금요일마다 단식, 수요일과 토요일에 육식 금함. 기독교권에 7년간 평화 제안됨. 한편 우르바노 3세 이후 유력한 교황 후보였지만 사양한 앙리 드 마시가 십자군 설교 맡게됨 [733] 12월이라는 기록도 [734] 포위군은 17개 공성탑 주조하여 성벽 공격. 이에 십자군 함대의 궁수들과 투석기들이 포위군 폭격하며 대응. 이에 살라딘은 아브드 앗 살람 알 마그리비 휘하 10척의 이집트 함대 소환 [735] 포위군의 공세 모두 실패하고 포위 장기화되었는데 수비대 중 스페인 출신의 '녹색 기사' 산초 마르틴이 수차례 포위망 습격해 성과 올림. 그의 용기와 능력을 가상히 여긴 살라딘은 그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자신의 편에서 싸운다면 큰 보상을 내어주겠다고 제안하나 그는 거절하고 습격 이어감 [736] 필리프가 헨리 2세와 전쟁 중이어서 [737] 봄. 리처드, 아키텐 동쪽의 툴루즈 백국 공격. 프랑스에서의 십자군 평화 깨짐. 이에 툴루즈 백작 레몽이 필리프 2세에게 도움 요청. 필리프, 헨리 2세에게 항의하나 헨리는 자신과 무관하다고 답변. 이에 필리프는 아키텐 북부의 베리 공격. 샤토루 점령. 리처드, 필리프 회군 후 샤토루 공격하나 함락 실패 [738] 이집트 함대의 패배 이후 마지막 총공세 가하나 역시 많은 사상자 내며 실패하자 철수한 것 [739] 양국의 분쟁 지역인 벡셍 지방의 지소르에서 열린 휴전 회담에서 대다수 귀족들 호응 [740] 3년간 소득 10%, 종군 시 면제. 강력한 지원 동기됨 [741] 기 드 뤼지냥의 동생. 반란 실패 후 성지 향함 [742] 교황이 파견한 알바노 주교 앞에서. 1188년 4월 17일부터 1189년 4월 8일까지 준비기간 명시. 기사들의 수호성인 성 기오르그 축일인 4월 23일 레겐스부르크에서 모이기로. 십자군의 폭도화 막기 위해 참여자는 최소 3마르크 대동 요구됨. 유대인 부상 입히거나 죽이는 자에겐 같은 형벌 내린다는 칙령. 이후 헝가리, 동로마, 룸 셀주크 등에 안전 여정 보장 요청. 헝가리에는 마인츠 대주교 콘라트, 룸 셀주크에는 고드프루아 폰 비센바흐 파견. [743] 남부 웨일즈의 그루필드가 아내의 설득으로 종군 서약. 동행한 연대기 작가 제랄드 드 바리가 자세한 여정기 기록 [744] 정확한 달 아님. 늦봄 [745] 1175년의 평화 종료를 알리며 살라딘에게 1189년 11월 소안 (타니스)에서 겨루자고 편지 보냄. 살라딘, 십자군 포로 석방하고 팔레스타인의 라틴 수도원 반환할 것이라 답변 [746] 포위 도중 수복된 예루살렘 순례 마친 연대기 작가 바하 앗 딘 이븐 샤하드가 살라딘에게 '지하드의 덕목' 책을 헌정하고 그의 관료가 됨. 기 석방한 이후라 하기도 [747] 7월이라고도 함. 무슬림 대해 무기 들지 않는다는 조건. 기는 곧바로 사제 찾아가 이교도와의 약속 무효 인정받음. 기, 기욤 5세를 티레로 파견해 아들 코라도에게 자신에게 복속하게 하나 거부당함. 코라도, 발리앙의 지지로 예루살렘 국왕 칭함. 다만 전시인 관계로 싸우기 보다 서유럽 군주들이 당도해 결정 내려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편 기는 아모리와 트리폴리 향함. 시칠리아 함대의 2백 기사들의 지지 얻음 [748] 혹은 21일이라고도, 1189년 7월 15일이라는 기록도 [749] 22일이라고도. 이후 트리폴리 공격 고려하나 시칠리아 함대가 티레에 수비대 보강하고 당도하자 포기 [750] 기사단은 지하 감옥에서 계속 항전하다가 저녁 때 쯔음 협상하여 몸값 지불하고 풀려남 [751] 8월 19일이라는 기록도. 성주 부부는 살라딘과 몰래 동맹 맺은 상태였음. 따라서 몸값도 없이 떠날 수 있었음. 이후 살라딘의 안티오크 공략 위해 그 주변 성채들 공격 [752] 9월 26일이라는 기록도 [753] 안티오크와 그 항구인 성 시메온 만이 보에몽의 수중에 남음. 구호기사단의 마르가트 & 크락 데 슈발리에, 템플러의 타르투스 굳건. 레몽 4세는 트리폴리. [754] 국경 분쟁 시 필리프 2세 말 따르기로. 앙주 제국의 자치권 줄이고 존의 상속에 대한 필리프의 거부 이끌어냄 [755] 이사키오스 2세가 요안니스 두카스 카마테로스와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 파견 [756] 심지어 잉글랜드까지 서약했다는 주장도. 한편 필리프는 헨리 2세가 막는 프랑스의 알리스 (필리프의 이복누이)와 리처드간의 결혼 추진 요구. 알리스와 헨리 간의 염문설까지 [757] 헝가리, 룸 셀주크 측은 안전과 식량 제공하기로. 세르비아 사절은 니시에서 스테판과의 면담 제의. 동로마 사절 요안니스 카마테로스는 뷔르츠부르크 주교 고드프루아, 슈바벤 공 프리드리히, 오스트리아 공 레오폴드 등이 얌전히 지나가겠다는 서약을 본 후에야 약속. 이후 뮌스터 주교 헤르만, 나사우 백작 루퍼트 3세, 미래의 디츠 백작 하인리히, 제국 장관 마르카바르트 폰 뉘렌베르크 등이 5백의 기사와 많은 수행원들과 동로마로 파견되어 준비. 한편 동로마 측은 프리드리히 의심 [758] 독일 사절단을 살라딘의 사절 앞에서 박대하고 소지품을 압수하기도 하였다고. 마인츠의 사제 베르너와 고트프리트 폰 비센바흐 등의 2차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착하자마자 체포됨 [759] 추정 날짜. 코라도, 여전히 기 입성 거부 [760] 4월 23일 모래톱에 후미의 배 한 척 상실. 24일 잉글랜드의 로스토프트 당도 [761] 세 척중 두 척 파손, 하나는 수리. 런던에서 선박 구입 [762] 2년여간의 포위 끝에 아사자 속출하자 항복. 티레까지 안전 보장됨 [763] 산초 1세의 요청. 주민 5600명 모두 학살됨. 심지어 십자군 연대기 작가도 남녀노소 모두 살해하는 잔혹함에 놀라 신에게 자비를 구한다고 기록 [764] 생각보다 적은 수 모임. 다만 상당수의 다국적 십자군은 이미 헝가리 국경에서 제국군 기다림. 이에 안심. 나머지는 해로 택하려 시칠리아 왕국으로 남하. 프리드리히, 교황은 살라딘이 나머지 항구 장악할까 두려워 해로 반대. 시칠리아의 굴리에모 2세에게 그들 승선 거부할 것 부탁. 1187년 12월 뷔르츠부르크 주교의 조언에도 육로 고집 [765] 그중 기사는 2천 ~ 4천 남짓. 본인은 다뉴브 따라 항해, 나머지는 육로로 먼저 출발함. 사자공 하인리히에게 종군 혹은 추방을 제안. 그는 후자를 택하여 처가인 잉글랜드에 망명 [766] 근데 마우트 라는 의미 자체가 관세란 뜻이다.. 이후 빈에서는 5백여명을 규율 위반으로 퇴출시킴. 오스트리아 공 레오폴트, 헝가리와의 국경 분쟁으로 종군 안함. 대신 브라티슬라바까지 동행. 한편 비슷한 시기 헝가리 왕 벨라 3세의 동생 게저의 2천 병력 및 카사크 주교와 합세. [767] 라 페르테 베르나르 회의. 랭스, 루앙, 부르주, 캔터베리 대주교 참석. 리처드와 필리프, 알리스 반환과 리처드의 계승, 그리고 존의 십자군 동참 (리처드 부재 동안 반란 방지) 요구. 헨리, 모두 거부. 요한, 평화 거부한다면 성무금지령으로 위협. 이에 필리프, 요한이 헨리에게 뇌물 받았다고 주장. 한편 프리드리히는 프라하에서 4일간 성령강림절 기념하며 좋은 행위 강조하는 칙령. 괜찮게 지켜짐 [768] 선박, 포도주, 빵, 보리 등의 물자 지원받음. 이때 벨라 3세는 상아 옥좌가 놓인 거대한 천막 선물하고 2층 규모의 창고 열어 식량 배급. 북새통 이루며 3명의 순례객 압사. 이후로도 벨라 3세는 프리드리히와 동행하며 부다페스트 인근 다뉴브의 섬에서 2일간 연회 베풀고 사냥. 딸 콩스탕스와 프리드리히의 아들 슈바벤 공 프리드리히 간의 약혼. 십자군 마치고 오면 결혼하기로. 이때 성대한 연회 추억하며 프리드리히의 아들 하인리히는 후에 시칠리아 정복 후 팔레르모 대성당에 헝가리 방문 프레스코 벽화 추가 / 한편 성 야고보 축일을 맞아 북독일-잉글랜드 십자군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미사 [769] 병든 헨리 2세는 고향인 르망이 불타는걸 보며 앙주로 도주. 한편 6월 17일 살라딘의 카디 알 파질로부터 손자 탄생 소식 들음 [770] 드라바 강 등을 건널 때에는 인마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고 발생. 이번엔 무사 [771] 프리드리히, 토너먼트 경기 열고 궁정 차리고 4일간 머뭄. 다음날 베드로, 바울 성인 축일. 60명의 종자들 기사 서훈. 2명의 알자스 귀족과 2명의 상인들 규율 위반으로 처형. 군대 숫자 통계 내어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에게 곧 동로마 영토 진입함을 통보 [772] 브라니체보는 최근 세르비아와의 전쟁으로 파괴된 베오그라드 대신 주도 맡음. 벨라 3세, 십자군에게 밀 가득 실은 짐마차와 5천 마르크 어치 선물 실은 4마리의 낙타 제공. 프리드리히 더이상 다뉴브 따라 해군할 필요 없음으로 선박 반환. 한편 프리드리히와 재회한 동로마 사절 요안니스 두카스와 콘스탄티노스 콘토스테파노스는 주군 이사키오스 대해 험담 [773] 전자는 타랑테즈 대주교 이모가 지휘. 후자는 메츠 시민들이 출정해 뒤따라오다가 만난 것. 한편 동로마 둑스는 십자군에게 8일치 식량 제공. [774] 티레의 십자군이 시돈과의 경계인 리타니 다리 건너자 살라딘이 요격 나선 것인데 십자군이 살라딘 접근 전에 철수하자 살라딘 역시 회군 [775] 그리고 헨리의 모든 제후들은 리처드에게 충성 서약하는 것으로. 다만 존에게도 노르망디 일부 영지 확보해 주는 대가 [776] 공격이 임박했다 여겨 약탈 한몫 챙기기 위해 살라딘의 명령에도 불복하고 남아있다가 수비대의 기사들이 돌격해오자 그들 중 상당수 전사하고 흩어짐 [777] 기 드 뤼지냥이 리타니 다리 건넜으나 곧 후퇴. 이를 정찰대가 보고해 오자 살라딘 역시 회군. 한편 트리폴리 측과 티레 간의 연락망 두절됨 [778] 지소르에서 재차 회동 [779] 새벽 일찍 출정, 티브닌 수비대와 함께 공격, 적이 추격해오면 성 내로 피신 당부. 그리고 군대를 8개 분대로 나눠 각각 20명의 정예병과 준마를 선별해 '티나게' 매복시킴. 이후 적이 알아채고 추격해오면 거짓 후퇴 전술로 나설 계획. 하지만 매복조가 철수하기엔 너무 자존심이 높고 '혈기에 넘쳐' 명령 어기고 십자군과 응전, 살라딘에게 알리지 않음 (혹은 못함). 해질녘까지 전투 계속되는 와중에 살라딘이 지원병 파견. 전투하기에 늦은터라 회군. 십자군 측도 살라딘의 대군 존재 알아차리자 티레로 회군 [780] 전자는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가 아나톨리아의 반란 진압하느라 회신 못하였고 툴 주교 피에르가 이끄는 로렌 십자군이 헝가리 지난다고 보고. 동로마 대신 요안니스 두카스가 파견한 후자는 소식을 듣지 못해 좋은 대접 못해주었다고 변명하고 세르디카에서 황제 사절이 기다릴 것이라고 통보 / 이날 살라딘은 정예 맘루크 장교 아이바크가 사라진 것을 발견. 전투 현장의 시신들 사이에서 중상 입은채로 발견됨. 바하 앗 딘에 따르면 진영으로 옮겨졌는데 신의 도움으로 곧 완전히 회복하였다고 함 [781] 7월 24일이라는 기록도. 당시 니시 ~ 소피아 일대는 동로마-헝가리 전쟁의 어부지리로 세르비아가 차지.그밖에 불가리아 반군 지도자인 아센, 페트로 형제가 찾아와 스테판과 함께 복종 표하고 왕위 제안하기도. 한편 이사키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파견해 브라니페보 둑스가 명령 어겼다며 사죄. 한편 이사키오스는 헝가리 공주 마가렛과 결혼. 지참금 마련하느라 불가리아에 대해 증세했다가 반란 커진 것 [782] 이후 땅굴 팠으나 수비대가 반격해 무너뜨리자 포위 장기화됨. 십자군 측이 성벽 앞에서 무슬림 포로 처형하자 수비대는 기독교도들 성벽에 메달고 칼과 창으로 죽을 때까지 찌르기도. 봉쇄된 도시는 갈증에 시달림. 산초 1세, 승리 확신하고 전선 이탈. 이에 위기 느낀 십자군이 그에 더 복종하게 됨. [783] 보포르 성채 포위 중이던 살라딘은 '티레의 사다리' 해안가에서 기습하려 했으나 참모들이 아크레 밖에 진을 치면 공격하자고 제안. 하지만 그 사이에 십자군 당도하며 점점 수가 불어남 [784] 동로마의 서방 도메스티코스 알렉시오스 기두스가 500 병력과 십자군 가로막고 있다가 프리드리히 당도하자 도주. [785] 아시아로 건너가려면 함선이 필요했는데 동로마 측과의 협상 결렬되자 계속 머물며 주변 약탈 [786] 9월 6일이라는 기록도 [787] 특히 기독교도 포로들이 수용된 감옥의 경우는 더욱 심각해 4일간 물 한모금만을 받은 포로들은 바닥에 누워 수분 흡수하려 함. 4백여명 중 절반만 생존 [788] 9월 3일이라는 기록도. 유대인 대표단이 공물 바치러 왔는데 군중이 습격하여 탈취하고 살해함. 이에 리처드가 그 주모자 3명 교수형 처하고 유대인 보호 칙령 내렸으나 출정 후 잘 지켜지지 않음. 린, 노위치, 스탬포드, 요크 등지에서의 학살 [789] 루트비히, 코라도에게 기 드 뤼지냥에 굽힐 필요 없다고 조언 [790] 1190년이라고도. 십자군 진영 지키던 기의 형 지오프리 드 뤼지냥이 기 드 뤼지냥 구함 [791] 독일 준마를 살라딘 사절에게 주고 그들이 사절단 주위를 돌며 모욕한 것, 정교회 사제가 십자군 죽이는 그리스인은 사면 받는다고 설교하는 것, 이사키오스 2세가 2천 마르크 상당의 재물 압수한 것 등. 이후 그들과 동행한 동로마 대신 요안니스 두카스가 이사키오스의 서신 전달했는데 프리드리히는 불신, 황실 가족 (이사키오스의 아들, 동생 등) 인질 요구 [792] 1190년이라고도. 템플기사단도 활약, 40여 수비대 전사 [793] 프리드리히, 돌아가는 귀족들에게 벨라 3세와 하인리히 6세에게 보내는 사절 동행시킴. 하인리히에게 제노바, 안코나, 베네치아, 피사에서 선박 보내줄 것을 청함. 3월 중순 경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할 것을 제안. 교황에게도 반그리스 설교 부탁 [794] 아드리오노폴리스는 다르다넬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향하는 길이 만나는 곳. 한편 동로마 측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비대 배치 [795] 그리스-쿠만 수비대의 저항. 독일 기사는 3명 전사 [796] 도중에 동로마 군대가 습격해 14명의 십자군이 전사하자 추격해 3백의 그리스 군 살상. 이후 필리포폴리스와 테살로니카 사이 약탈. 보급품 확보. 성당들에 그리스인이 라틴 순례객 목 위에 앉아있는 성화 발견하자 방화 [797] 이에 흥분한 독일 십자군이 전쟁 선포하기도. 이후 이듬해 1월까지 슈바벤 공 프리드리히가 마케도니아 일대 약탈해 막대한 보급품 가져옴. 이에 농담으로 군대의 보급관으로 불리기도. 다만 이로 인해 기강이 해이해져 음주와 음탕함이 만연해졌다고 [798] 다만 그의 이복여동생 알리스와의 결혼에 대해선 얼버무림 [799] 가을 무렵, 살라딘의 동생이자 부관인 타키 앗 딘 사망. 하마의 영지는 아들 알 만수르 무함마드가 계승 / 나폴리의 그라니어가 구호기사단장으로 취임 [800] 동로마 사절은 에우마티오스 필라켈라스와 피사의 자코모. 이에 프리드리히는 베르톨드 폰 쾨니히스베르크, 마르크카바르트 폰 아리크바일러와 대신 폰 뉘른베르크 등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 [801] 한편 프리드리히가 헝가리로 파견했던 에베르하르트가 돌아와 벨라 3세의 이사키오스 대한 항의와 시칠리아의 굴리에모 2세, 잉글랜드의 헨리 2세 사망 소식과 리처드, 필리프의 십자군 준비 소식 전함. 한편 사제들은 불가리아 인들이 순례자들 무덤 파헤쳤다는 비보 전함 [802] 다른 독일 십자군 분견대도 아드리아노플 남쪽에서 '십자가의 적' 다수 학살 [803] 11월 5일 이후 전병력 모인 것 [804] 동로마 측은 십자군의 공격으로 피폐. 십자군 측은 기강 해이해진 것이 협상 가속화. 프리드리히, 동로마 포로 대부분 석방. 이사키오스, 배상금 요구 안하고 사면. 220척 선박 제공. 아시아 방면 2개 마을에서 휴식 제공. 이후 동로마 군대가 4일 간격 두고 따라가며 십자군 호위. 동로마령 마을들은 식량 판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5백여 인사들이 성 소피아 성당에서 대중의 참관 하에 서약. 총대주교 역시 협정문 서명. 또 22명의 엄선된 황실/고위층 인질 제공. 필라델피아까지 동행 [805] 이사키오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8주간 억류되었다가 온 것. 하지만 콘야의 쿠트브 앗 딘은 살라딘의 딸과 결혼한 상태 [806] 이때 아이유브 측이 그리스의 불을 썼음에도 패했다고 함 [807] 하지만 필리프의 왕비 이사벨라가 사망, 더 연기됨 [808] 한편 프리드리히는 곡식 싣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향하던 베네치아 선박들에게 갈리폴리에 정박해 십자군 도우라고 명령. 베네치아인들은 무시하고 항해하다 풍랑으로 갈리폴리 입항. 곡식 하역.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 위해 소집되었던 피사 함대 역시 당도 [809] 이무렵 프리드리히는 하인리히에게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를 형제인 '로마 황제'로 칭하며 화해 분위기 전함 [810] 동로마 지배력 약함. 행군 도중 '그리스인'들의 습격 당하자 반격해 60여명 살상 [811] 7월이라는 기록도 [812] 밤새 십자군 납치되거나 도둑질 당하자 십자군이 성벽에 화살 날려 수비대 부상 입힘. 이에 총독이 사과, 보상해줌. 기독교권의 방패임을 명시. 한편그곳의 동로마 용병인 이탈리아 궁수들 십자군 대열 합류 [813] 시장에 좋은 물건 놓아 팔고 술탄의 사절 기다림. [814] 메마른 지대 지나며 지친 이들. 튀르크 인이 습격해오자 연기를 피워 그들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한다 [815] 튀르크인 포로에 의하면 3만여 군대가 있다고 함. 염소들 다니는 우회로 알려줌. 화살 세례에 슈바벤 공 프리드리히 치아 한두개 잃음. 한편 십자군이 산타고 올라가 최소 60여명의 궁수들 살상. 이후 십자군 행군하며 보이는 튀르크인 학살. 노약자 어린이까지. 한편 십자군 동행하던 룸 셀주크 사절단, 고드프루아 폰 비센바흐 사로잡아 도주 [816] 룸 셀주크 측 기록에 의하면 4174명의 튀르크 병력이 전사하였다고 한다. 다만 추격 도중 독일 귀족 프리드리히 폰 하우젠 낙마하여 전사 [817] 18일이라는 기록도. 쿠트브 앗 딘 본인도 도주 중 낙마. 뷔르츠부르크 주교 고드프루아, 백마 타고 튀르크 군 무찌르는 성 기오르기오스 봤다고 기록 [818] 안전 진군로 및 시장 개방 제안한 것. 십자가 군주의 도리가 아니라 여김. 이에 튀르크 사절은 다음날 전투 선언. 기록에 의하면 프리드리히 본인도 두려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고 [819] 이때 십자군 중 말 가진 기사는 5백여에 불과. 성벽 다가오자 인질 고드프루아 폰 비스바흐 석방해 내보냄. 이후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6백 기병대와 콘야 나왔다가 십자군 규모에 시타델로 철수. 독일측, 쾰른과 비슷한 규모의 도시라고 기록 [820] 성밖 정원에 있다가 튀르크 군이 포위해 왔으나 미사 드린후 돌격 이끌어 승리.3천의 룸 셀주크 군 전사. 전투 직전 미사 도중 프리드리히, 울먹이며 기독교 군대의 안티오크 당도를 이끌 수 있다면 죽음 불사하겠다고함. 이후 콘야 입성, 10만 마르크 상당 보물과 충분한 식량 찾음. 다음날 감사 미사. 한편 시타델의 술탄이 안전과 시장 보장할테니 평화 제안. 수용됨 [821] 한편 술탄이 개방한 시장에서 6천 마리의 말과 다수의 노새, 당나귀, 식량 매입 [822] 룸 셀주크 군대가 지속적으로 괴롭힘. 이에 인질 처형하겠다고 위협하자 멈춤 [823] 십자군 선발대가 시필리케 (셀레우키아)에서 8km 떨어진 곳 이르렀을 무렵. 차가운 급류에서 수영 중 심장마비로 쓰러진 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강 하구인 시필리케로 옮겨져 방부처리됨 [824] 따라서 그녀의 남편 음프헤 4세에게 이혼 종용. 음프헤는 1186년 아내와 달리 시빌라 지지하지 않았던 점 때문에 제후들 간의 명망 낮음. 이후 이사벨라는 이혼 반대했으나 모친 마리아는 제후 회의에서 음프헤와의 결혼 당시 그녀는 8살이었음으로 확실한 의사 전달하지 못했다고 언급. 한편 이혼 대해 성직자들 회의.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 와병 이유로 그가 지목한 캔터베리 대주교 보두앵이 회의 맡음. 이혼 정당하다는 결론. 이에 보두앵은 코라도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두고온 아내가 있다는 소문을 이유로 동의 거부. 기 역시 동참. 필리프 2세의 대표인 보베 주교 필리프와 피사 대주교는 이혼 적극 지지하며 대립. 리처드는 과거의 자신의 봉신이었던 기와 친하고 캔터베리 대주교 역시 그의 입장 대변. (리처드는 이사벨라와 할머니 다른 사촌관계) [825] 6월 24일이라는 기록도. 리옹에서 잉글랜드 십자군의 무게로 다리 붕괴하기도. 후발대는 론 강 서쪽에서 3일간 기다림 [826] 랄프는 1189년 잉글랜드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 앙리는 필리프 2세의 조카이며 그의 대표이고 동시에 리처드의 조카이기도 하여 적당함. 앙리의 모친인 마리는 필리프 2세와 아버지 루이 7세를 공유하고 리처드 1세와는 어머니 엘레오노르를 공유하기에 그녀의 아들인 앙리는 두 왕가의 인척이 된 것. 한편 그 외에도 필리프 2세에 앞서 아크레 당도한 프랑스 제후들은 블루아 백작 테오발드와 그의 동생 상세르 백작 에티엔, 라울 드 클레르몽 등이 있음. 성직자 중에는 브장송 대주교 블루아 주교들 등. 한편 기존에 지휘권 맡고 있던 장 드 아벤느와 튀링겐 변경백 중 후자는 병을 이유로 귀로에 오름 [827] 캉빌의 리처드, 로베르 드 사브르 등의 함대는 리스본에서 현지 무슬림, 유대인 공격했다가 시민들과 충돌한 후 지브롤터 지나는 중 [828] 리처드는 함대 당도 직전에 이탈리아 해안따라 남하. 일부 십자군은 캔터베리 대주교 보두앵과 법무관인 란눌프 드 글라빌라의 인솔 하에 아크레로 직행, 나머지는 누이 조앤 문제 해결하러 가는 리처드와 나란히 시칠리아 향함. [829] 이무렵 살레르노 당도한 리처드는 대부분의 병력을 메시나로 보내고 자신은 한명의 호위와 칼라브리아 남하 [830] 영국-프랑스 관습에서는 기사들의 전유물 [831] 탕크레드, 자금과 영토가 부족. 선왕의 과부인 조앤을 연금시키고 그녀의 지참금 영토인 몬테 산 안젤로 백국과 금접시 등을 주지 않음. 또한 헨리 2세 때 십자군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2척의 잉글랜드 보급선을 압류. 리처드는 조앤 석방 및 보상 요구했으나 탕크레드는 조앤 석방은 동의, 보급선 문제는 이미 헨리 2세가 사망했음으로 무효라고 선언. 조앤과 백만 타리스의 선물을 리처드에게 보냄 [832] 필리프 2세가 호감을 보여 결혼설 돌기도. 필리프, 리처드에게 탕크레드와의 중재 제안했으나 거절됨 [833] 이후 메시나 돌아와 주변 섬에 위치한 정교회 수도원 점령하곤 막사로 사용하여 그리스 주민들의 공분 삼 [834] 리처드가 시칠리아 왕국 정복하려 한다는 소문이 돈 결과 [835] 필리프가 푸아티에 백작과 부르고뉴 공 위그 3세, 시칠리아 제독 마르가리티온, 메시나-레조-몽레알 대주교 등을 대동하고 메시나 측과 리처드의 협상 중재 나섰으나 그 도중에 일부 시민들이 성을 나서 잉글랜드와 리처드에 모욕적 욕설. 리처드, 창밖으로 이를 듣자 공격 명령.이에 잉글랜드 군대가 시민들을 쫓아 입성해 성문 모두 장악한 후 시내 약탈. 리처드, 약탈 말리지 않고 항구의 시칠리아 함대에 방화. 필리프와 프랑스 십자군 머무는 왕궁 일대는 건들지 않음. 필리프도 간섭하지 않고 지켜봄. 리처드, 성벽 위에 자신의 문장 내검. 필리프가 왕국 공격하겠다며 항의하자 그의 것도 같이 계양 [836] 장기는 키프로스에, 뼈는 튀링겐에 매장됨 [837] 필리프는 카타니야 머물던 탕크레드에게 부르고뉴 공 위그를 파견해 군사 지원 제안. 그러나 탕크레드는 그가 시칠리아 노리는 독일의 하인리히와 동맹이라 믿지 않음. 대신 리처드에게 사절 보내 4만 타리스 (2만 금화)를 배상금 겸 자신의 딸과 리처드의 조카이자 후계자 브르타뉴 백작 아서의 결혼 지참금으로 보냄. 이에 리처드 수용, 루앙 대주교의 설득에 시민들에게 약탈물 반환. 탕크레드에게 자신이 머무는 동안 외침 방어 약속. 향후 하인리히 6세의 반감에 일조한 듯. 한편 리처드, 받은 돈 중 1/3을 필리프에게 줌 [838] 다만 필리프와 리처드 간의 불신 격화. 리처드, 모후 엘레오노르에게 신부 데리고 속히 와줄 것을 청함 [839] 아크레 포위망으로 보급품 나르다 본대와 분리됨. 불과 5명의 기사들과 다우크 다리 가로막는 아이유브 군에 돌격해 30여명 전사시키며 길 열어줌 [840] 이사벨라와 음프헤 간의 이혼 찬성하는 이들에 대한 파문 위협하며 반대 [841] 이로써 기는 왕위만 유지하고 코라도가 티레, 시돈, 베이루트 영토 지닌다는 협정 체결됨 [842] 프리드리히의 십자군에게 쓰일까 두려워 하여 시리아 북부의 여러 성채 파괴. 이후 아르메니아의 왕공 레오 2세가 접수. 동맹인 안티오크의 보에몽 3세에게 반환 거부 [843] 샹파뉴 백작 앙리 2세 역시 와병하였으나 회복. 보금품 가져오지 않는 코라도 비난 대상 [844] 리처드의 명으로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의 십자군 도착해 복잡한 메시나 직행 대신 브린디시 향함 [845] 이에 의심쩍은 필리프는 메시나와 카타니야의 중간 지점인 타오르미나로 남하하여 합류. 현실적 불가피함 깨닫고 리처드의 알리스와의 결혼 약속 없던 일로 해줌 [846] 잉글랜드 측 시각에 의하면 프랑스-몽페라토-이벨린 동맹을 맺어 잉글랜드 견제하려는 의도였다고 함 [847] 5월 20일이라는 기록도. 도착 직후부터 공성탑 제조하고 수비대 공격 [848] 8일이라는 기록도. 크레타, 로도스 거쳐 당도. 대부분의 선박은 로도스에 모였지만 베렝가리아와 조앤 등의 선박이 키프로스로 표류, 1척 난파.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가 난파한 잉글랜드 선박 재물 탈취하고 잉글랜드 왕가의 갤리선 입항 막음. 조앤 본인의 상륙만 허가, 그녀는 인질될까 두려워 거부. 이에 리처드가 향한 것. 늦은 오후경 상륙하며 이사키오스 군대 격파. 잉글랜드측, 어둠깔리지만 않았어도 사로잡았을거라 기록 [849] 수면 중이던 이사키오스는 나체로 도주했다고.. [850] 이사키오스, 봉신들이 이탈하자 리처드에게 사절 파견해 2만 마르크 금화의 보상과 인질 및 재물 반환, 백명의 전사와 4백 기병대와 함께 리처드의 십자군 끝까지 동행하며 유일한 딸을 리처드에게 맡겨 그가 원하는 이와 결혼시켜 키프로스의 주인으로 삼는다는 조건. 또 조약의 확실한 준수에 대한 서약으로 영토 내의 성채들을 리처드에게 넘긴다는 제안. 수용됨. 콜로시에 주둔하던 리처드와 십자군 제후들 앞에서 잉글랜드 왕가에 봉신 서약. 병력이 생각보다 적다고 판단해 점심시간 주변의 기사들이 낮잠 자는 틈을 타 도주. 군대 재규합하고 리처드에게 조약 파기 선언. [851] 그리고 같은날 에베르뉴 주교 장이 베렝가리아를 잉글랜드의 왕비로 대관식 거행 [852] 기, 카이레니아 점령하고 이사키오스의 가족들 사로잡음. 성 힐라리온과 부카벤토 성채 포위. 이사키오스는 섬 동북쪽 끄트머리로 도주 [853] 안드레아 곶의 수도원에서 은둔하다가 나와 리처드 앞에 엎드리며 쇠고랑만은 면해달라고 간청한 결과, 리처드는 보좌관에게 금과 은으로 만든 쇠고랑을 만들어 손과 발에 채우게함 [854] 6월 1일이라는 기록도. 이후 리처드, 필리프와 후계자 놓고 분쟁. 같은날 베렝가리아와 조앤 등은 대다수의 잉글랜드 십자군과 아크레 향함 [855] 그 직전 키프로스 제후들이 재산 절반씩 바치며 동로마식 통치 부탁하자 칙령을 통해 그 체제 승인. 다만 성채는 라틴인의 수중에. 이후 우선 고드프루아의 아들 라울에게 이사키오스 데리고 트리폴리로 파견. 하지만 라울이 이사키오스와 결탁했다는 소문에 후자를 트리폴리 인근 구호기사단 성채인 마르가트에 감금시킴. 이사키오스의 딸은 조앤이 맡음 [856] 한편 리처드의 키프로스 총독 캠빌의 리처드가 와병, 아크레로 당도해 사망. 이후 그리스와 아르메니아 인들이 이사키오스의 친척인 한 사제를 옹립하여 봉기하였으나 다른 총독 로버트에게 진압됨. 황제로 옹립되었던 이는 교수형당함. 한편 살라딘에게 신자르, 샤이자르, 모술, 하마, 이집트 등지의 지원군 당도. 한편 예루살렘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 사망. 리처드와 필리프는 예루살렘 왕위와 플랑드르 계승 놓고 논쟁. 필리프, 리처드에게 플랑드르 조금이라도 원하며 키프로스 절반 내놓으라고 요구 [857] 경쟁 도시인 피사가 잉글랜드의 리처드 지원. [858] 도끼 들고 10여명 베어 넘기고 상당수 포로 획득 [859] 추정 달. 아크레 당도 얼마 되지 않았고 반란 직후. 4만 베잔트 즉시 지불, 나머지는 정착 후 납부 [860] 리처드, 살라딘에게 아크레 항복 조건 제시하라며 사절 파견. 동시에 내륙 산지에서 얼음 갖다줄 것 부탁 [861] 때가 되었다 여기고 프랑스 진영이 저녁 식사 중인 틈을 타 자신이 독차지 하려는 시도 [862] 십자군, 2년간의 포위 동안 6명의 대주교, 12명의 주교, 40명의 제후, 500여 귀족과 '30만'의 병력 상실했다고 함. 금화 중 450닢은 코라도에게 할당됨. 1500명 포로들 중 100명이 이름 있는 자들. 이후 무슬림 포로들은 십자군 진영에 수용되고 십자군이 아크레 입성. 리처드는 왕궁을, 필리프는 템플 기사단 본부를 차지. 이때 레오폴트 5세의 사촌인 코라도가 오스트리아 문장을 프랑스, 잉글랜드, 예루살렘 왕국기와 함께 성벽 위에 내걸음. 근데 이를 리처드 치워버리자 분노한 레오폴트 5세는 곧 귀국해버림. 연말 본국 당도. 필리프, 기독교도 주민들의 요청에 그들의 집 장악한 십자군들에게 반환시킴. 교황특사 아델라르드 디 베로나는 성당을 재정비하고 제후들의 회의를 주도. 기는 사망 시까지 왕위 유지하되 코라도는 티레, 베이루트, 시돈 유지하며 기가 사망하면 왕위 승계하는 것으로 합의 [863] 8월 3일이라는 기록도. 리처드, 필리프에게 예루살렘 왕국 영토 수복 위해 3년간 머문다는 맹세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 필리프, 서유럽에서 1년간 휴전하겠다 약속하고 떠남 [864] 리처드는 살라딘과 협상하여 몸값의 1/3이 지불되면 무슬림 포로 석방하기로 약속. 이에 살라딘은 자신 진영에 참십자가 있으며 반환 준비 중이라 답변. 다만 몸값 납부 되었는데도 십자군 측은 석방된 포로 숫자가 적다며 보복으로 무슬림 포로 석방 거부. 이에 살라딘은 나머지 십자군 포로 석방될 때까지 인질 맡길테니 즉시 무슬림 포로 석방 요구하나 거절됨. 한편 살라딘은 자파, 카이사레아, 아슈켈론, 가자의 방어시설 파괴 [865] 눈에 띄지 않게 십자군보다 앞서 행군 [866] 궁병과 기병들의 전초전으로 대열 이탈한 십자군을 중심으로 다수 살상. 당시 십자군은 일사병으로 고생하며 약화된 상태. 부르고뉴 공의 진영 무너졌으나 프랑스 기사들이 리처드의 도움 받아 격퇴해냄. 이후 십자군은 초조히 아르수프 숲을 지났고 매복 없었음. 그리고 숲 지나오자 살라딘의 진영과 마주함. 이미 살라딘은 전투 장소 선점. 십자군, 살라딘 진영 부근에 주둔 [867] 본인이 뤼지냥, 플랑드르, 프랑스, 구호기사단과 중앙 맡고 템플 기사단이 우익, 샹파뉴 백작 앙리가 후위 맡음. 튀르크 경기병대의 화살 공격을 중앙의 기사들이 돌격해 격퇴. 이후 살라딘의 중장기병이 돌격해왔으나 역시 격퇴됨. 이후 리처드는 적이 지칠 때까지 수비적으로 버팀. 구호기사단 지휘관이 참지 못하고 보두앵 캐러우와 명령도 없이 돌격, 성공적으로 돌파하여 승리. 살라딘 철수 [868] 한편 리처드는 아크레로 돌아가는 낙오 병력을 기에게 데려오도록 했는데 그들이 기의 명령 따르지 않자 직접 나섬. 한편 키프로스 반란 소식 접하고 템플 기사단에게 섬 매각. 한편 아랍어 가능자인 음프헤 4세를 살라딘에게 파견해 요단강 서쪽 영토와 참십자가 반환 요구 [869] 엘리 주교인 롱챔프는 천한 출신에 착취를 일삼아 악명 높음. 결국 국외 도피. 리처드의 이복동생인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롱챔프는 요크 대주교 예정자인 제프리를 사로잡기 위해 도버의 종교 시절에 난입. 이에 제후들이 봉기하자 여장한채 국외 도피 [870] 클레르보 수도원장을 십자군 영토의 정착민 모집 위한 설교를 목적으로 서유럽으로 파견 [871] 알 아딜이 살라딘의 팔레스타인 총독으로서 예루살렘 상주, 아크레에 머물던 리처드의 누이 조앤과 결혼 제안. 다만 조앤과 알 아딜 모두 개종 거부하며 무산됨. 이후 아크레 방문, 코라도의 공격 대비 [872] 그는 살라딘에게 기독교도들은 왕국 제대로 지켜내려면 요단강 서쪽 영토가 필요할 것이고 참십자가는 무슬림들에게는 나무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들에게는 필수적이라고 보고. 다만 그와 살라딘 모두 예루살렘은 협상 카드로 쓰기엔 너무 소중하다고 판단 [873] 살라딘이 더많은 성채 파괴하기 위해 시간 끄는 것인가 우려. 한편 코라도는 시돈의 르노를 살라딘에게 파견해 자신은 시돈과 베이루트 지배에 만족하겠다고 통보 [874] 바하 앗 딘에 의하면 리처드는 많은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종교적 대립을 완화하려 한다고 저술 [875] 곧 유럽으로 돌아갈 것이므로 장기적 위협이 되지 않고 조약을 지킬만한 능력이 된다고 주장하며 살라딘에게 리처드와의 동맹을 택하도록 설득. 한편 음프헤의 사절단은 시돈의 르노가 알 아딜과 사냥 나간 것을 보고 코라도에 대한 불신 키움 [876] 이후 폭우로 아이유브측 기병대의 파상 공세 중단되자 계속 행군 [877] 곧 존을 위시하여 리처드의 적들과 음모 꾸밈 [878] 그들이 그려준 예루살렘 지도 연구, 보급선 길어진 상태에서 이집트에서 대규모의 지원군 당도한 예루살렘 포위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조언. [879] 왕국의 남쪽 방어와 에루살렘 공격 거점 [880] 피사는 리처드와 동맹. 제노바, 프랑스 십자군은 기를 폐위시키기 위해 모의했다는 의혹 받음. 피사 십자군은 3일간 코라도의 군대와 대치하며 리처드에게 도움 청함 [881] 리처드, 코라도에게 십자군으로서의 의무 다하여 아슈켈론 지원하지 않으면 영토 압수하겠다고 협박했으나 코라도가 반발. [882] 하람 앗 샤리프와 성전산 일대는 무슬림 소유. 한편 살라딘은 알 아딜에게 합의 이루거나 그러지 못한다면 협상 지연시켜 지원군 당도할 시간 벌도록 지시 [883] 민중 반란, 니코시아 시타델의 템플러 포위. 협상 제안에도 불구하고 포위 이어짐. 궁지에 몰린 템프럴들은 어느날 새벽에 총반격. 거리로 나와 현지인 학살. 힘들게 지배 복구시켰으나 리처드에게 섬 다시 맡아달라고 탄원. 그가 수용하자 일부 해안 거점 남기고 시리아 귀환 [884] 롱챔프 내각이 노르망디의 영지에만 머물겠다는 맹세를 어긴 존의 음모에 흔들리고 필리프 2세가 존의 왕위 야욕 도울 것. 살라딘, 이 소식 접하자 리처드가 머지 않아 귀국할 것임을 확신. 협상의 우위 차지하기 위해 남쪽 성채들 대한 공격 결정 [885] 리처드가 인정한 것은 4월 20일이라는 기록도 [886] 한편 앙리는 아크레로 돌아가 리처드에게 소식 전함. 리처드, 코라도 왕위 인정 [887] 그들은 두 달 전부터 수도사 행새 하며 잠복. 한편 1191년경 아사신 보물 운반 중인 선박 나포한 상태었던 코라도는 보베 주교와의 저녁 식사 후 왕궁 돌아가던 중 습격당함. 아사신 둘 중 하나는 살해되고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는 라시드 앗 딘 시난의 명령이었다고 자백. (코라도의 선박 탈취에 대한 복수) 한편 리처드와 살라딘 모두 경쟁자 제거 사주했다는 의심 받음. 아랍측 기록에 따르면 잡힌 아사신이 리처드의 사주였음을 실토했다함. 이븐 알 아시르에 의하면 살라딘이 아사신 측에게 코라도와 리처드 모두의 암살을 의뢰했는데 라시드 앗 딘은 살라딘 견제 위해 리처드 남겨두었다고 함. 보베 주교는 리처드 사주론 주장 이끔. 이후 프랑스 귀국, 필리프 2세 역시 동의. 한편 약혼 발표에 티레는 축하 분위기, 리처드는 이를 승인하고 앙리에게 샹파뉴 귀국 만류 [888] 한편 이사벨라는 코라도 아이 밴채로 리처드 기다리며 시타델에서 버팀. 앙리가 티레 당도하자 시민들이 다음 군주로 환호, 앙리는 리처드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한편 프랑스 측은 어차피 기는 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파악한 리처드가 군중 동원해가며 앙리를 부추긴 것이라 의심 [889] 기독교측 자료는 22일, 무슬림측 자료는 23일. 살라딘이 근래에 임명한 수비대장 알람 앗 딘 카이사르는 저항보다는 철수. 시타델 항복. 다론 성채는 아크레와 아슈켈론 사이에 위치 [890] 사절은 리처드에게 당장 조치 취하지 않으면 잉글랜드 잃을 수 있다고 경고. 이에 고심하던 리처드는 '해야할 일'에 집중하기로 하며 마음 다잡음. 푸아티에 출신의 왕실 사제 기욤이 예루살렘 대한 마지막 공격하라고 설득, 이에 리처드는 1193년 부활절까지 머물 것이라 언급 [891] 하인리히 6세, 부인 인질임에도 탕크레드와의 협상 거부. 이에 탕크레드도 콩스탕스 대한 몸값 거부. 교황 첼레스티노 3세, 하인리히 6세와의 평화 주선 위해 탕크레드 설득해 인질로 잡혀있던 콩스탕스 로마 보내게 한 상태에서 [892] 엠마우스 언덕에서 도시 바라보며 눈에 담아낼 수 없다고 감격, 눈을 가림. 룻다 주교와 현지 수도원장이 1187년 당시 겨우 지켜낸 참십자가 조각이라고 추정되는 것을 리처드에게 보여줌 [893] 헤브론에서 30여 km 떨어진 '둥근 저수조' 일대에서. 한편 살라딘은 예루살렘 주변 우물 막도록 명령 [894] 살라딘의 청야 전술도 한몫. 이후 앙리와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사절 파견. 전자는 요단강 서쪽 영토, 후자는 아슈켈론 제외한 해안 영토 제안. 한편 친리처드 서방 연대기 작가들은 (필리프의 지령으로?) 리처드의 회군 종용했다며 부르고뉴 공 위그 비난 [895] 흥분한 튀르크 군대가 시내 약탈하여 학살 염려한 살라딘의 배려. 한편 리처드는 50척의 함대에 이끌고 나머지 병력은 육로 통해 남하. 역풍으로 함대 지연되자 육군은 함대보다 먼저 발각되지 않기 위해 카이사레아에 멈춤 [896] 다만 그에 앞서 49명의 기사들과 그 가족들은 살라딘의 허가 하에 안전히 대피. 그리고 리처드의 첫 공격이 실패하자 남은 수비대 역시 짐꾸리며 떠날 준비. [897] 자파의 한 사제가 헤엄쳐와 시타델에 아직 병력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리자 리처드는 즉각 함대와 자파 해변가 다가감, 정박할 새도 없이 여울에 뛰어내려 시타델 향함. 이에 수비대 역시 시내로 나와 반격하나 격퇴되고 살라딘에게 재차 항복하겠다는 의사 밝힘. 다만 그때 리처드의 군대가 당도해 수적으로 우세하지만 며칠간의 공성전으로 지친 아이유브 군대를 몰아내고 시내 수복. 살라딘, 진영에 충격받은 공포에 질린 병사들로 가득해 사기 저하되자 내륙으로 후퇴. 이후 평화협상에선 아슈켈론 소유권 두고 분쟁. 리처드, 자파와 아슈켈론을 살라딘의 봉토로서 지배하겠다고 제안 [898] 살라딘, 앙리의 지원군 도착하기 전에 십자군 진영 기습한 것. 이에 리처드는 급조된 말뚝 방어선 뒤에 창병, 뒤에 노수들 배치하여 아이유브 기병대에 큰 타격. 그 사이에 아이유브 군대가 우회하여 수비를 맡은 제노바 인들을 압도하고 자파에 입성하였으나 리처드가 돌아와 반격하자 격퇴됨. 오후, 실패한 아이유브 기병대 공격 이후 리처드가 궁수들 이용해 반격. 이후 자신이 직접 기병대 이끌고 아이유브 기병대 격파. 저녁무렵 살라딘은 공격망 벗어나 예루살렘 향해 후퇴 [899] 역시 아픈 알 아딜에게 한번 더 사절을 파견해 살라딘에게 예루살렘 내어달라는 부탁해보지만 성과가 없자 결국 포기하기로. [900] 이후 알 아딜의 사절이 살라딘의 최종 제안 전달 [901] 2일이라는 기록도. 또한 리처드가 머물던 자파 이름따 자파 조약이라고도. 자파가 십자군 영토의 남쪽 한계로 지정되고 아슈켈론은 파괴되기로. 후대 프랑스 연대기 작가들은 리처드가 살라딘에게 아슈켈론 버리도록 매수되었다고 비난. 협정 성사시키고 예루살렘 돌아온 알 아딜은 땅에 입 맞추며 신께 감사 표함. 한편 카이몽이 발리앙 드 이벨린에게 주어짐 [902] 추정 날짜. 프랑스 십자군 또한 따라가지 못하게함. 한편 참십자가 관람하는 등 살라딘의 환대 받음. 휴버트 월터는 그와 협상하여 성묘교회와 베들레헴, 나사렛에 각각 2명의 라틴 사제가 상주할 수 있도록 허가받음. 한편 조지아 여왕 타마르가 참십자가를 20만 디나르에 구매하려 했으나 살라딘이 거절.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가 성묘교회의 정교회 관할 회복 요구하자 살라딘은 자신의 관리 하에 라틴 측과 공유하라며 셰이크 가님 알 카즈라지를 교회의 관리자로 임명. 그 후손들은 현재까지 그 일대 관할 (누사이베 가문) 리처드는 이후 들것에 실려 아크레 귀환 [903] 한편 필리프 2세는 리처드 대한 음모 꾸밈. 아사신 고용해 코라도 암살했다고 주장. 리처드가 자신의 적수인 탕크레드와 동맹인 것을 껄끄러워 하던 하인리히 6세는 필리프 지지. 베렝가리아와 조앤은 프랑스 통해 귀국하기 위해 팔레르모와 나폴리 거쳐 로마 향하나 독일군에 막힘 [904] 10월이라고도. 확실한건 리처드 떠난 이후 [905] 남프랑스는 툴루즈 백작 레몽 5세가 해안 봉쇄, 마르세유 부근에서 매복 계획한다는 소문. 이탈리아 중북부는 독일군이, 리구리아 해안로는 필리프 2세의 동맹 제노바 측이 막아섬. 지브롤터 통한 대서양 루트는 리처드의 소규모 함대에게는 부적절. 무슬림 해적 있고 초겨울의 역방향 조류 이겨내려면 노 달린 갤리선의 추진력 필요. 따라서 며칠 후 브린디시에서 목격되었으나 탕크레드가 사절단 보내 위험 알리자 상륙하지 않고 북쪽으로 항해. 대장선과 두 척의 갤리선 교환하고 이오니아 해의 해적단이 공격해오자 빠져나옴. [906] 일설에 따르면 라구사 인근 로크룸 섬에서 난파 당하여 기도하던 중 해안 닿을 수 있다면 그곳에 교회 건립할 것이라 맹세했다고 함. 템플러 갤리선 탑승한 채로 템플기사단원이라 주장. 이후 아퀼레이아에서 난파해 하는 수 없이 소수의 측근과 육로 향하며 상인 '휴고 (위그)'라 칭함. 현지 영주인 고리치아의 마인하르트는 코라도의 조카이자 주군 하인리히 6세의 심복. 노르망디에서 자란 조카 로제르 드 아르장탕을 파견해 정체 확인케함. 그는 리처드를 알아보지만 그를 배신하지 않기로 하고 보내줌. 리처드, 서둘러 떠남. 이후 일단의 부하들이 우디네에서 마인하르트 측에 사로잡힘. 리처드 일행 역시 매복 당하지만 현지인들 격퇴하고 카린티아 지나 오스트리아 영토 진입. 템플러 순례자인척 하며 빈 향함. 다만 하우덴의 로저에 의하면 일행의 두드러진 소비가 의심 불러일으킴. 리처드, 프레이사크에서 보두앵 드 베튠에게 일행 맡기고 자신 역시 그와 함께 있는 것으로 가장하며 독일어 구사하는 소년 시종 한 명과 말타고 북상. 기사 기욤 드 레땅이 중간까지 호위 [907] 빈 근처 에드베르크로 추정. 리처드 대동한 시종의 외국스러운 발음과 그가 대동하는 값비싼 장갑이 주목 받음. 리처드가 며칠간 와병하는 동안 시종이 근처 시장에서 장 보던 중 레오폴트의 수하들에게 사로잡힘. 프랑스측 기록에 의하면 리처드는 이를 알지 못한채 여관 부엌에서 고기 굽던 중 사로잡혀 레오폴트 5세 공궁으로 연행됨. [908] 잡힌지 며칠내로. 레오폴트의 봉신 히트마 폰 쿠흔링 소유의 성채. 빈에서 다뉴브 상류 방향의 바위산 위에서 강을 굽어보는 곳에 위치 [909] 필리프, 존이 할양 약속한 벡셍 정복. 기소르 성채 항복. 잉글랜드의 존 군대는 패배, 6개월 휴전 / 가을. 독일군과 시칠리아 왕국의 반란군이 국왕 탕크레드의 와병을 틈타 아풀리아에서 우세 점함. 한편 탕크레드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아풀리아 공 루지에로 사망. 과부인 동로마 황녀 이리니, 후에 하인리히 6세의 포로가 되어 그의 동생인 필립과 결혼.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탈선의 이유 중 하나로 작용 [910] 프랑스 내의 영지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까지! [911] 고리치아의 마인하르트는 북이탈리아에서 사로잡은 리처드의 수하들을 데려옴. 레오폴트 5세, 하리처드로 하여금 탕크레드와의 동맹 버리게 하고 싶은 하인리히 6세에게 그를 넘겨주는 대가로 보상 협상. 한편 잉글랜드 섭정단 측은 십자군 종군자들의 영토, 재산 및 신체에 대한 보장 어긴 것을 들어 교황청 측에 도움 청함 [912] 레오폴트, 하인리히가 돈 주지 않고 리처드 데려갈까봐 귀환한 것. 블론델은 아마 피카르디 지역의 투르바도르 장 드 네슬레. 성탑 밑에서 노래 부르고 리처드가 따라부르자 확신. 1260년대 '랭스의 민스트렐'에 수록됨. 리처드 사라지고 수개월간 그를 찾아 헤메었다고 하는데 현실성 의문. 리처드의 일행 중 한명이었을 가능성. 한편 코르푸에서 리처드와 헤어져 시칠리아에 있던 휴버트 월터는 리처드 행방 소식을 듣자 교황에게 리처드 석방 명하고 레오폴트 파문 요청. 이후 독일로 북상 [913] 18일이라는 기록도. 밤 무렵 악화됨 [914] 맹세 어기면 그 자녀들의 상속권 박탈 [915] 한 원로가 타우히드 (유일신앙) 구절을 읊고 있던 때에 살짝 미소를 짓더니 영면하였다고 한다. 향년 54-5세. 아들들인 아프달, 아지즈는 각각 22, 21세. 한편 어린 아들 키드르는 알 아프달 대리로 하란 통치. 살라딘 동생 알 아딜은 요르단과 자지라 일부, 툭테긴은 예멘 통치. 알 아지즈, 형 아프달 종주권 인정 거부. 모술의 이즈 앗 딘과 아흘라트의 베그티무르가 반란 꾀하나 둘다 사망. 아들들인 누르 앗 딘 아르슬란과 아크순쿠르는 알 아딜의 종주권 인정 [916] 그리고 하인리히의 적인 탕크레드와 동맹해 신의 깨뜨린 것까지. 리처드, 스스로를 변호. 독일 제후들 대부분 그의 무고함 믿음. 리처드가 무릎 꿇자 하인리히는 평화의 키스 해주고 그와 필리프 사이 중재해주겠다고함. 한편 제국회의 열리는 그날 리처드가 하인리히 측으로 인계된 것이었음 [917] 형식상으로는 리처드의 조카 엘레오노르와 레오폴트 5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간의 결혼의 지참금. 하인리히가 절반 얻음. 한편 1125년 리처드의 할머니인 마틸다가 잉글랜드로 가져간 독일 왕관 보석 반납되기로. 이후 라인란트의 트리펠 성채로 옮겨짐. 한편 라인 저지대의 제후들이 하인리히에 반란 일으킴 [918] 한편 잉글랜드 사절단, 24일로 예정된 하인리히와 필리프의 회동 저지 [919] 필리프 2세가 거액 제시하자 5만 마르크 더 내겠다고 한 것. 다만 이는 풀려난 후에 7개월 내로 마련하는 것으로. 이를 하인리히가 수용하며 필리프의 노력 실패, 한편 리처드의 석방 확정 소식 접한 존은 프랑스로 도주. 섭정단 장악한 엘레오노르는 잉글랜드 내의 존 영지 압수하고 몸값 마련 나섬. 한편 리처드는 중재 맡은 하인리히의 설득에 따라 필리프가 존에게 노르망디의 중요한 성채 수여하는 것 동의. (하인리히의 영-프 중재안 중 하나) 존을 잉글랜드 대신 그곳에 묶어두려는 생각 [920] 보에몽의 아내 시빌라가 의붓아들 레몽 대신 자신이 낳은 기욤을 후계자로 정하기 위해 레오와 동맹한 결과. 레오가 1194년 초엽 바그라스 성채를 안티오크 공국 혹은 템플러에게 넘기겠다면 보에몽 초청한 후 그 일행 체포. 보에몽 협박해 안티오크 할양하도록 함. 레오 휘하 사이순의 하이톤, 보에몽이 붙여준 장군 바르톨로메오 티렐의 도움으로 안티오크 진군. 귀족들이 성문 열어 입성. 다만 여론은 귀족들과 달리 아르메니아 지배에 매우 적대적. 한 아르메니아 병사가 궁전 예배당에 봉헌된 프랑스 성인 힐리러를 모욕하자 시민들 봉기. 레몽의 이름으로 아르메니아 군대 축출. 시민들, 성당에 모여 대주교 애므리의 주도로 자치적인 코뮌 성립. 보에몽의 아들인 트리폴리의 레몽을 반아르메니아파의 대표자로서 섭정 추대. 그와 예루살렘 국왕 앙리에게 지원 요청. 레몽, 동생 보에몽과 안티오크 당도.이에 레오는 보에몽 3세를 수도 시스로 데려감 [921] 과부 이레네는 후에 슈바벤 공 필립과 결혼. 4차 십자군의 발단 중 하나? [922] 이후 성묘교회의 사제들이 카이사레아의 수도승 애므리 선출, 로마에서 축성받기 위해 떠남. 하지만 앙리는 자신과 먼저 협의하지 않았다며 일행 체포. 이에 티레 대주교 요시야스가 앙리 설득해 그들 풀어주고 애므리 인정하게함 / 죽음 임박하다고 느낀 사자공 하인리히, 하인리히 6세와 협상.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에 만족하기로 [923] 본래 하인리히는 리처드를 부르고뉴 왕으로 봉하여 자신의 봉신으로 만들려 했는데 실패하자 리처드는 자신의 석방 확실시하기 위해 잉글랜드 대해 봉신 자처하며 충성심을 보인 것. 한편 절박해진 존은 필리프에게 노르망디 중 센강 동쪽 영토를 할양하겠다고 제안 [924] 1195년 초라는 기록도. 앙리가 아르메니아 수도 시스 향해 진군하려 하자 협상 진행됨. 레오, 안티오크 대한 주장 포기하고 보에몽에게 킬리키아 종주권 주장 포기 및 자신의 바그라스 영유 인정할 것 요구. 이후 딸 알리스와 보에몽의 장남이자 트리폴리 백작인 레몽과의 결혼. 알리스의 원래 남편이자 레오의 부관인 하이톤이 마침 사망. 알리스가 외동딸이라 두 국가의 통일까지 가능한 결혼. 한편 남하 도중 아사신의 새 지도자 아부 만수르의 초대로 성채 알 카프 방문. 아사신과 앙리 모두 아이유브 왕조 분열 원함. 이때 아사신 측이 앙리가 그만하라 할 때까지 요원들 자살 명령. 앙리가 지목하는 그 누구도 암살 가능하다고 제안 [925] 3월 25일이라는 기록도. 이후 호라즘 술탄 알라 앗 딘은 토그릴 3세의 수급을 바그다드로 보냄. 칼리파 앗 나시르는 이를 시내에 전시하며 선조들의 넋을 위로 [926] 알 아지즈는 팔레스타인, 알레포의 앗 자히르는 라타키아와 자블라 얻음 [927] 4월 혹은 5월이라는 기록도. 본래 다른 동생 지오프리를 후계자로 유언하였으나 그가 본국 푸아티에에 있어 제후들은 애므리를 추대. 예루살렘 국왕 앙리는 그를 의심하며 승인 거부. 이에 전 베이산 영주이자 키프로스의 원수인 발리앙이 협상하여 앙리는 키프로스 방문해 회담하기로 결정. 앙리, 키프로스 당도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세 공주들과 아모리의 세 아들들을 약혼시키기로 합의. 공주들 중 한명은 코라도 혈통. 모두 영유아들 [928] 아내 콩스탕스는 출산 임박, 다음날 안코나 부근 제시에서 아들 프리드리히 출산 [929] 굴리에모의 모후와 누이는 프랑스로 은퇴함. 하지만 굴리에모는 극심한 고문 (눈 뽑히거나 중성화됨) 받은 후 수도원 보내져 1198년 사망 [930] 시칠리아 왕국의 군주로서. 이에 이사키오스는 금전 보상과 십자군 지원 등을 약속하며 협상 / 여름. 이집트의 알 아지즈, 다마스쿠스 공격. 알 아딜이 남하하여 알 아프달 도와 격퇴. 이에 알 아프달이 이집트 공격하려 하자 알 아딜은 이번엔 다마스쿠스 진군, 이에 알 아프달 회군 / 헝가리 국왕 벨라 3세, 십자군 종군 서약 (1196년 초라는 기록도) [931] 불가리아 향하는 킵셀라에 주둔하고 사냥하고 돌아와 보니 알렉시오스가 자신의 막사에서 황제로 추대되어 군대의 지지 받음. 이사키오스, 측근들과 에그나티아 가도 따라 도주하나 붙잡혀 베라 수도원으로 압송되어 실명됨.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선 알렉시오스의 아내 에우프로시네가 황궁 장악. 알렉시오스 콘토스테파노스가 소피아 대성당에서 황제 칭하려 했으나 수비대가 그의 지지자들 해산시킴. 이후 이사키오스는 보스포루스 연안 궁전에 유폐되고 알렉시오스는 쿠데타가 불만 품은 군대의 소행이라 치부하고 원로원 등 귀족들의 지지 유도하기 위해 후한 선물 하사. 대관식 과정에서 그의 말이 놀라 몸을 비틀자 알렉시오스의 왕관이 떨어짐 [932] 이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 산티아고 및 칼라트라바 기사단 대부분과 함께 과달라하라 강으로 남하 [933] 기사들의 돌격 버티는 동안 그들을 포위하여 섬멸 칸나이 전투 칼라트라바 기사단장 산초 페르난데즈 등 양 기사단장 모두 참전. 이후 야쿱은 몬탄체즈, 탈라베라, 트루히요, 칼라트라바 수복. 칼라트라바 기사단은 이듬해 새 본부로 살바티에라 선택. 다만 카스티야 기사들 대부분 괴멸되어서 아라곤의 기사들이 자신들 중에서 기사단장 선출, 이에 카스티야 기사들이 반발하며 대립. 두 기사단 병립 [934] 마인츠 대주교, 브레멘 대주교, 브라반트 공 하인리히, 오스트리아 공 프리드리히, 튀링겐 변경백 헤르만 등의 4천 기사와 1만 2천 보병. 본래 1195년 크리스마스가 출정일이었으나 1년 미루어짐 [935] 헝가리 국왕 벨라 3세 사망. 아들 애므릭 계승 [936] 내무대신 힐데스하임 주교 콘라트와 원수 하인리히 폰 칼덴 등이 이끔, 알렉시오스가 약속한 십자군 위한 금전 지원 얻어내기 위해 / 툴루즈 백작 레몽 6세, 생 질 수도원 대한 특혜 놓고 분쟁. 파문당했다가 1198년 철회됨 [937] 1198년 3월이라는 기록도. 한편 하인리히 폰 칼덴의 독일 사절단, 콘스탄티노폴리스 연회 참석. 알렉시오스 3세는 화려함으로 그들을 압도하려 했지만 그들은 꿋꿋히 보석보다 칼이 우선이라며 십자군 비용으로 금 2톤 요구, 이에 알렉시오스는 금의 양 협상 위해 주교 에우마티오스 필로칼레스를 하인리히에게 파견 [938] 쿠르드 인 수비대장 매수. (사적인 담판) 트리폴리 백국과 아크레 간 육상 교통로 확보. 하지만 직후 사망, 아들 귀도 1세가 계승 [939] 협상하여 2톤 대신 700kg 납부. 자금 마련 위해 원래 면세 대상인 귀족과 성직자, 길드에까지 알레마니콘 (독일) 세금 납부하게하는 것도 모자라 동로마 황실 무덤까지 도굴. 한편 아르메니아의 레오에게 왕관 보냄 / 봄. 무와히드 칼리파 야쿱, 카스티야 재차 침공. 타호 강 일대 습격하곤 알폰소 8세와 10년 휴전 맺고 모로코 귀환 / 보에몽 3세, 일시적으로 라타키아 점령하나 철수. 이후 알레포 측은 도시 재건하고 시타델 복구 / 헝가리 국왕 임레 1세의 동생 언드라시, 부왕이 이끌도록 지시한 십자군 대신 반란,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 차지함 [940] 연초. 추정 날짜. 레몽의 동생인 보에몽 4세가 트리폴리 주장, 알리스는 아들과 아르메니아 향함 [941] 예루살렘 순례 혹은 무슬림들과 싸우는 것과 같은 사면. 봉신들의 주종관계 무효화. 서유럽 군주 공격에 대해 예루살렘과 같은 사면 준 것은 첫 사례 [942]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금전 지원 얻어낸 후 십자군 이끌기 위해 온 것 [943] 벨프 가문 지지하여 이탈리아 거치지 않고 따로 대서양 루트 따라 항해. 포르투갈 잠시 들러 실베스 탈환, 무슬림 측이 다시 빼앗을까봐 파괴. 알폰소 9세 대한 십자군 도와주고 재차 항해. [944] 지원군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예루살렘 향해 돌격했다가 그 길목에서 반격 맞은 것. 앙리가 지원군 이끌고 나타나 전멸 면함. 이후 알 아딜이 자파 공격 나서자 앙리는 애므리에게 도시 넘김. [945] 플랑드르 십자군 등은 아크레로 직행, 한편 하인리히를 대신한 독일 십자군의 지도자인 힐데스하임의 콘라트와 홀슈타인 백작 아돌프는 바리에서 출항하나 키프로스에서 애므리의 즉위식으로 지연됨 [946] 애므리가 자신의 제후들 중에서 파견한 수비대장 르노 발라리스는 나태함으로 문책됨. 그 전부터 앙리는 그의 나태함을 우려. 앙리 사후 공위 기간에 점령했다는 기록도. [947] 당시 자파 향해 출정하기 위한 궁 앞에 소집된 군대가 모이는 것 보고 있었는데 피사 사절단이 갑자기 들어오자 중심 잃음. 시종이 옷자락 붙잡았으나 결국 같이 추락사. 과부 된 이사벨라의 새로운 결혼 상대이자 국왕으로 현지 제후들은 전 갈릴리 공 고티에와 에시브의 아들 위그 2세 (발리앙의 딸 마가렛과 결혼)를 중심으로 그의 동생 라울을 제안하나 기사단들이 반대. 그는 결국 시돈의 르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 이듬해 애므리 암살 사주했다가 추방되어 트리폴리 향함. 한편 브라반트 공 하인리히는 자파 구원 대신 회군하여 아크레 장악. [948] 바야돌리드에서 혼인. 하지만 교황청은 근친혼이라며 무효화 선언. 자녀 셋 얻은 후 1204년 이혼 [949] 해적 출신 아미르 우사마가 포기. 아이유브 측은 시돈 파괴하고 버림 [950] 십자군 포로 5백명 석방 요구. 하지만 안전 보장 거부해 수비대는 결사 항전. 학살 발생 시 무슬림 측의 보복이 두려운 현지 제후들은 알 아딜에게 십자군 포로 석방하더라도 학살 일어날 가능성 있다고 당부. [951] 동로마 왕관, 독일 왕홀. 그밖에 교황 특사 콘라트, 독일 측의 마인츠 대주교와 힐데스하임의 콘라트 등이 참석 [952] 동로마의 알렉시오스 3세, 요안니스 그레고리오스와 이벨라르드를 로마로 파견해 협상 [953] 장 드 이벨린, 애므리 설득하여 법에 명시된 대로 제후들 앞에서 재심 성사시킴. 라울, 스스로를 변호하여 대다수의 제후들 납득시킴. 다만 주군의 신뢰를 잃었음으로 떠나겠다고 선언. 트리폴리 향함 [954] 3차 십자군 아크레 포위 당시 브레멘과 뤼베크의 상인들이 세운 병원 단체에 남기로 한 독일 기사들이 주축 [955] 7월 1일이라는 기록도. 이후 남아있던 지도부도 귀국 [956] 알렉시오스 3세에게 동서 교회 분열 끝내자고 조언하고 교황 특사 알베르투스와 알베르티누스에게 임무 숙지시킴 [957] 아미르들은 알 아딜의 개입 방지하기 위해 알 아프달 소환 [958] 한편 아르메니아의 레오 1세와 레몽 루벤은 교회일치운동에 열중하는 교황 인노첸시오의 지지 기대함 (레오는 교황에 복종 서약했던 상태)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774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774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