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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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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교조적이었다?3. 인간성 문제
3.1. 수이강 사건3.2. 술이부작 사건
4. 허목 윤휴와 의견 대립

1. 개요

송시열의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교조적이었다?

사대와 소중화는 당시 포악한 불의에 대한 의로운 저항이자 미개한 오랑캐와 구분되기 위한 사상적 정통성을 의미하는 중대한 것이었다. 국가 이념의 기초로 세운 성리학은 명말청초에 이르러서는 오랑캐에 대한 원한과 혈맹으로 맺어진 명나라와의 관계등이 융합되어 단순히 그 이전의 사상적 학문적 성격만의 성리학으로만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본래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일갈했던 당시 송시열이 문제시했던 것은 윤휴의 중용장구에 대한 해석 그 자체였다기 보다는 주자라는 인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송시열에게 주자는 공자의 도통을 이은 것으로 여기고 칭송해 마지않는 존재였다. 반면 윤휴는 주자를 유교의 도통(道統)을 이은 성인이라기 보다는 학인의 한 사람으로 간주했고, 이는 당시 조선의 현실을 남송에 겹쳐 보던 송시열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오활(迂闊)한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원나라와 명나라의 성리학 영향이 강해서 육상산의 학설까지 받아들이는 혼합된 양상을 띄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주륙화회론에 입각한 이기일물론이다. 그런데 이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나온 인물이 바로 이황 이이다. 이 둘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옹호하여 이기일물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이이는 《율곡전서》에서 볼 수 있듯이, 서경덕의 이기일물론을 비판하고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옹호하였다. 또한 이 둘은 남인과 서인의 사상적인 뿌리가 되는 조선 후기 사상계를 지배하는 거두였다.

또한 이단과 관련된 논쟁은 붕당의 대립 과정에서 명확하게 나타났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이이와 성혼 문묘 종사 운동이 숙종 때 마무리 될 때까지 남인은 이황의 적통이자 성리학의 주류로 자부하면서 이이의 학통을 이단으로 치부하였다. 특히《효종실록》에 나와있는 것처럼 영님남인이 서인의 문묘 종사 운동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이이의 주장이 육상산과 같고 폐해가 불교와 같다고 강하게 비판하여 서인의 학통을 사실상 부정하였다. 게다가 숙종 초기 영남남인의 산림인 이현일이 이이를 공세적으로 비판한 것은 기존 영남남인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형태였다.

송시열이 교조적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조선의 사상계가 교조화되고 상대의 학설과 학통을 이단으로 부정하는 흐름이었음을 봐야한다. 이는 송시열 이전부터 있었고, 송시열과 대립하던 남인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를 온전히 송시열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비역사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송시열이 교조적이었다면 과연 송시열만 그랬는지, 당대의 흐름이 어땠는지 실증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송자대전》을 보다보면 송시열이 성리학을 절대화한 수구 꼴통, 반개혁적 인물이라는 대중의 생각과는 다른 멘트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아내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썼으며 출근, 외출과 집에 왔을 때는 아내에게 서로 맞절로 큰절을 했다 한다.

여성의 교육을 중요시하고 당연하게 생각하여 여자도 사람답게 살려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통해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야 된다며 여성 교육을 주장하기도 한다. 주자학을 가르치고자 했는데 송시열이 남자들에게 주자학을 가르치고 주자의 말을 따르라고 했으니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고 오히려 남자들에게 가르치는 주자학을 여자들에게도 가르친, 꽤나 선구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동아시아권에서 '여자는 무학이 상덕'이라는 것이 사대부들의 보편적인 인식이었고, 이는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 심화되었을망정 약화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참작해 볼 때 당대 송시열의 사상은 상당히 혁신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671년 송시열이 맏 손자 며느리인 박씨에게 써 준 글과 시집간 딸에게 한글로 손수 지어준 계녀서도 있다. # 그는 시집간 딸들과 손녀딸들, 며느리, 손자 며느리, 조카 며느리 등에게도 이러한 책을. 그것도 읽기 쉬우라고 한글로 손수 써서 보냈다.[1]

심지어 "서북 지방의 여자들은 매우 건강하고 민첩하니, 이들에게 포를 쏘는 연습을 시켜... 성을 지키게 한다면 남자 병사만 못지 않을 것이다"[2]라며 여군 창설을 주장했는데, 이는 단순히 주장 수준이 아니었고 현종 대에는 실제로 여포수 제도가 실제로 존재했다.[3][4]

송자대전을 보면 송시열은 서북 지방의 백성들이 다른 지방의 백성들보다 군사적으로 뛰어났다고 생각했고, 게다가 당시 서북 지방은 징병을 폐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을 군사적으로 다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다시한번 말하지만 송시열은 여인들이 문 밖으로 나와서 그것도 전투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물론 이를 현대적인 남녀 평등의 기준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송시열이 남녀 유별로 인해 일어난 당시 조선의 사회적인 통념, 즉 이러한 당시 유학자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넘어서는 제안을 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또한 서얼들에게도 관직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과부의 재혼을 법으로 막아놓는 건 너무 잔인한 처사이므로 부녀자들의 재혼을 허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5] #

또한 송시열은 동시에 이이, 김육으로 내려오는 제도 개혁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내수사[6]를 혁파하기를 주장하고, 노비 제도를 노비 종모법으로 완화(적어도 당시엔 완화다.)를 주장했다.[7] 송시열의 이미지로 흔히 알려진 "대동법 반대"도 초기엔 스승( 김집)의 영향으로 반대하던 입장이었지만[8] 실질적 효과를 보고는 적극 찬성하게 되었다. 더구나 김집이나 다른 관료들의 반대론도 지주층의 이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기 상조론이나 징세액이 오히려 늘 수가 있다거나, 쌀이 잘 나지 않는 지역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9] 그리고 송시열은 대동법보다는 내수사 폐지와 공납의 양을 축소하는 등을 통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라고 권고했다. 쉽게 말해서 송시열은 작은 정부, 세금을 줄이고, 정부의 규모를 축소를 주장했다. 그리고 대동법의 시행되고 효과가 좋자 가장 찬성한 사람도 송시열이었다. 개인적으로도 김집은 김육이랑 무척 잘 교류하는 사이였다.

또한 관리의 녹봉을 금전으로 지급하자는 의견도 앞장서서 찬성했으며, 관리의 녹봉이 지나치게 적은 것이 수탈의 원인이 된다는 말을 남긴 적도 있다.[10] 게다가 호포제를 주장, 사실상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자고까지 주장하였다.

송시열의 호포제 시행에 대해서는 흔히 부정적이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조금 좋게 봐주어도 '처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본래는 찬성론자는 아니었으나 다만 자신의 라이벌 윤휴가 호포법을 적극 관철하자 이에 영향을 받아선지, 그 이후 자신의 제자 김수항을 필두로 하여 호포법 실시를 관철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족들의 끊임없는 반발로 실현시키지 못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단 호포제 시행론은 서인 산림이 먼저다. 산림의 유계 등이 사족출포론을 처음으로 논의 제안한 것은 효종 10년 무렵이었고, 김수항과 박세당, 유계 등이 호포론 등 군역제 대변통론을 제시했으나 논의 미숙과 대사헌 강백년 등 대간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한 것 또한 이 무렵이었다.

이 당시 윤휴는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상태였고,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유계의 호포론 논의에 비해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그의 호포론 논의는 숙종 초년에 출사한 그가 북벌론을 적극적으로 부르짖으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건의 전후 관계를 통해 라이벌 의식에 기인, 자극을 받았다는 식의 설명이 이루어진다면 도리어 윤휴가 서인계 산림에게 자극을 받았다는 식의 설명이 더 적합할 것이다. #관련글 다만 유계와 산림의 호포론이 송시열, 송준길의 적극적인 지원 사격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아쉬워 하는 견해도 있다. 송시열이 적극 호포제 도입에 나섰다면 김육의 대동법처럼 얼마든지 자리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호포제는 일단락하고, 이외에도 송시열은 청나라를 본받아 수차(물레방아)를 활성화 하자는 말도 있었고,[11] 일본과의 무역을 활발히 하여 포를 많이 구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무과의 궁술 시험을 포병 시험으로 바꾸자고 주장했으니, 이완보다도 시대를 앞서 본 셈.

또 그는 스스로를 벌레라고 자학하면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차피 이 말은 성리학의 거두인 정자가 한 말을 그대로 읊은 것이므로 그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발언으로 어떤 이의 성향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 맥락을 깊게 살펴야 한다.
신은 듣건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기한(祁寒)과 서우(暑雨)를 무릅쓰고 농부들이 농사지은 곡식을 내가 얻어 먹고 있는데, 이처럼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니 그야말로 이 천지간에 하나의 좀벌레라 하겠다.’ 하였다 합니다. 신처럼 쓸모없는 자가 천지 가운데 헛되이 살면서 한 가지도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 농민이 생산한 곡식을 먹으니, 이미 좀벌레 중에서도 더욱 심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당시 조선은 전염병과 기근으로 10명 중 1명이 죽어나가는 시절이 있을만큼 사회 경제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정부와 지식인 등 실제 정치 영역에서 지배 계층의 역할은 세금 제도를 개혁하거나 적극적인 진휼을 통해 백성의 삶을 구제해 주는 영역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즉 이런 맥락에서 송시열은 '외양', 즉 북벌의 전제로서의 '내수', 그리고 그 내수의 전제로서의 '정심'을 강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송시열의 행보 가운데에서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에 대한 추앙, 삼전도의 굴욕과 관련된 최명길[12]과 이경석에 대한 비판, 반청사상을 근거로 한 북벌 등을 두고 송시열을 수구적인 친명사대주의자라는 주장도 있다.

옹호 측에서는 당시 반청사상의 보편성을 들어 송시열을 옹호한다. 효종대의 북벌론 기조는 숙종 때도 여전히 살아있었다. 실제로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당위적으로 언젠가는 행해야 하는 것이었고, 청은 그로 인해 어쨌든 운명적으로 망해야 마땅한 나라였다. 그만큼 조선 지식인들에게 중화라는 가치는 소중했다.

숭정제에 대한 추앙은 당시 유별날 것 없는 행보였다. 명이 사라진 후 당파불문하고 조선 지식인들에게 깊숙히 자리잡은 '조선중화 사상'에서 중국, 중화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요순의 정치와 공맹의 학문이 자리한 문명에 가까운 개념이다. 조선에게 명은 중화의 원류인 중국땅의 마지막 문명국이었고 멸망 후 중화를 대표하는 기제로 남았다. 망한 명의 후광을 사용해서 청은 야만이자 오랑캐의 나라로, 조선은 문명이자 중화의 나라로 보는건 어느 사대부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중화의 마지막 황제가 숭정제다. 실학자들도 반청사상을 강하게 드러낸 경우가 많다.

비판 측에서는 "당대의 분위기가 그러했다. 당대의 일반인의 수준이 그러하다. 그렇기에 평가대상의 과로 볼 수 없다"는 식의 잣대는 전혀 변호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당대의 반청사상과 북벌론을 주장하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이용한 것은 분명 서인과 그 필두 송시열이고 이것은 심각하게 비합리적이고 시대착오적 과오로 조선의 발전에 심각한 저해를 가져온 사실을 비판하고 있다.

실학자라고 해서 유학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애초에 실학자도 유학자이다. 다만 실학이 등장하게 된 시초를 따져보면 서인 위주의 일당 독재에서 소외된 남인 계열의 유학자들이 서인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인 송시열 중심의 주자 성리학 교조주의에 대한 반성을 하면서부터이다.

지나치게 경직된 성리학자 이미지는 송시열의 생전 시기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조 실록에 따르길 송시열이 상경하자 송시열이 화폐와 돼지 사육을 폐지한다누 소문이 파다했다고 했다. 그때 송시열은 상경해서 그것은 오해이며, 오히려 상업을 발전을 위해 화폐 유통을 촉진해야 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조세의 금납화를 제시했다. 거기에 더해, 돼지 사육 역시 소를 죽이는 폐단을 감소시키므로 오히려 권장해 마땅하다는 주장을 했다. #

위에서 언급된 여성에 대한 교육은 분명 당시 사대부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논어나 맹자에 여자를 교육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없다.[13]

또한 송시열이 조선 조정에서 했던 말의 상당수가 수신을 강조했다. 대표적으로 대동법 도입에 대해서 논의했을 때, 송시열은 왕이 덜먹고 덜쓰면 된다고 말하면서 내수사 폐지를 건의했다. 내수사는 왕의 금고이다. 왕의 금고를 폐지하자고 당당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보고 '오, 송시열도 사실은 진보적이었구나!'라고 감탄하는 것은 무리다. '왕이 아껴쓰면 된다'는 조선시대 내내 유학자들이 입에 달고 살아온 소리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재정과 불산공물(不産貢物) 문제는 단순히 왕실이 절약하고 내수사를 없앤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당시 대동법 도입 논의가 나온 것은 조선 후기의 사회변화로 더 이상 과거의 법제도가 유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감안하지 않고, 왕이 덜 먹고 덜 쓰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니다.

3. 인간성 문제

정치적, 학문적 위치와 별개로 당시의 대유학자라는 지위를 가졌지만 처신에 있어서는 졸렬하고 옹색했다. 이경석에게 저지른 수이강 사건과 윤선거 묘갈명의 술이부작 사건이 대표적이다.[14][15] 두 사건 모두 타인을 비난하는 데서 비롯되었는데 그 비난을 대놓고 한 게 아니라, 치졸하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돌려 까거나 아예 죽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실상 욕설 비문을 써줘서 문제가 되었다. 번번히 이렇게 행동하였기에 생전의 송시열은 자신과 뜻이 맞지 않은 사람들을 대부분 적으로 돌렸고, 갈등은 봉합되지 아니하여 항상 조정을 양분시켰다.

하지만 송시열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숙종한테 저지른 비난. 숙종이 태어날 때는 그의 탄생을 신하들 중 혼자서만 축하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오죽하면 숙종의 아버지 현종이 '송시열은 숙종이 종묘에 제향되고 자손이 보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이 있다.'하며 # 대놓고 그를 깔 지경이었다.[16] 급기야 경종이 태어났을 때는 같은 서인들조차 몸을 사리는 가운데 그의 원자책봉을 혼자서만 반대하며, 이미 숙종이 종묘에 고한 일을 뒤집어 엎으려 할 정도로 날뛰다가 결국 사사당했다.[17][18] 그나마 경종은 장자라고는 하나 후궁 소생으로 트집을 잡을 명분이 있었다지만, 숙종은 현종의 적장남이자 유일한 아들로 조선 역사상 손꼽히는 정통성을 가진 임금이었다. 그런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지 못할망정 사소한 트집을 잡은 건 확실히 신하로서 오만하다.

3.1. 수이강 사건

이경석은 본래 송시열과 잘 지냈었고, 애시당초 송시열을 조정에 추천한 게 이경석이었다.[19] 송준길과 송시열이 재야 시절에 서울에 오면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경석의 집을 찾아 서로 즐겁게 담소하는 것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관련기사

그런데 이후 송시열은 이경석과 윤선도 처벌에 이론이 생겼다 하여 자신의 은인이었던 이경석을 비방하려는 마음을 몰래 가졌고, 한편으로는 삼전도 비문을 적은 일을 고깝게 생각하여[20] 이경석이 궤장(几杖)을 받을 때 글을 구하니 "오래 살고 건강했다(壽而康)"라고 써주었다.
공이 관직에 있는 동안의 시말(始末)에 대해서는 성상(聖上)의 교서(敎書)에 이미 갖추어져 있지만, 오직 경인년(1650년, 효종 1년) 2월에 있었던 일은 은미(隱微)하여 명확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때는 종사(宗社)의 존망(存亡)이 순간에 결정되는 판이라, 비록 임시로 국란을 모면하는 방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이해(利害)를 따지는 사람들은 모두가 수수방관하여 아무런 상관도 하지도 않았으니 그 표정이 마치 진(秦) 나라 사람이 월(越) 나라 사람 보기보다 더 심하였다. 그런데 오직 공만이 한 몸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두려움도 흔들림도 없이 꿋꿋하게 소신을 수행함으로써 나라가 끝내 무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주상(主上)께서 공을 알아주는 마음이 더욱 융숭해졌고, 선비들의 마음이 더욱 공을 붙따르게 된 것이니, 그 하늘의 도움을 받아 장수하고 또 건강하고(壽而康) 마침내는 우리 성상에게 그런 융숭한 은례(恩禮)를 받은 것이 이유가 있다 하겠다. 내가 이 때문에 앞에서 이미 성덕(聖德)을 칭송하고 끝에 와서는 곧 훌륭함을 공에게 돌렸으니, 아, 여기에서 군신(君臣)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 훌륭하다.
숭정 무신년(1668년, 현종 9년) 계동일(季冬日)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그냥 좋은 표현으로 생각 되었던 이 문구의 진상이 드러나게 된 일도 송시열의 좋지 않은 인간성에서 비롯되었다. 현종이 온천 여행 갈 때 조정 중신 중에서 아무도 환송을 하지 않자 낙향해 있던 이경석이 이들을 까는 상소를 올린다.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이를 본 송시열은 이경석이 자기를 저격한다고 여겨 반박 상소를 올리면서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수이강'의 정체를 까발린다. 실록 수이강은 송나라 금나라에 끌려가서 아첨한 후에 살아남은 손적이란 자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정강의 변 당시 손적은 금태종에게 항복문을 지어 바치면서 "3리 되는 성이 결국 울타리 같은 수비마저 잃고, 10세를 전해 내려온 태묘도 기어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이제 말이 땀 뻘뻘 흘리며 달리는 수고를 다하려 하는데, 어찌 견양(牽羊)[21]의 요청을 늦추리까(三里之城,遂失籬藩之守;十世之廟,幾為灰燼之餘。既干汗馬之勞,敢緩牽羊之請), "상황께서 죄를 지고 파천하셨으니, 미천한 이 신하가 죽기를 각오하고 명을 청하옵니다(上皇負罪以播遷,微臣捐軀而聽命)"라고, 온갖 미사여구로 금을 찬양하고 송을 깎아 내렸는데, 이를 주자가 비난했다. 손적 이 사람은 평소에 "천명을 따르는 자는 오래 살고, 천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닌 사람인지라 이를 들은 주위 사람이 "그러게, 자네가 오랑캐 조정에서 그토록 '천명'을 따른 것이 지극했으니 이리도 오래 살고 건강한 거지(壽而康)"라고 비아냥거렸고, 손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북송으로 쳐들어와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황제와 황족들을 모조리 포로로 잡아간 금나라 황제에게 항복문을 지어바치면서 온갖 미사여구로 금을 찬양하고 송을 깎아 내렸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너는 그렇게 아첨을 하니 참 오래 살고 건강하겠구나(壽而康)"라고 비아냥을 들었다는 손적이라는 인물의 고사를 가져다[22] 이경석이 삼전도비의 비문을 쓴 것이 손적과 같은 아첨행위라고 매도한 것이다. 삼전도비 항목에 나와있지만 당시 청 태종은 비문 내용을 조선이 어떻게 짓는지 봐서 조선을 다시 손봐줄 꼬투리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비문을 써야 했던 것이니, 절대 손적과 이경석이 같은 평가를 받을수는 없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런 조롱을 받으면서도 이경석은 별 다른 반응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당시 형 이경직에게 '문자를 배운 것이 후회스럽다'는 편지를 쓰기도 하고, '부끄럽게도 오계(浯溪)의 백 길 절벽을 저버렸구나'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음에서 미루어보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유학자로써 수치스러운 일을 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자결이라도 할 수있으면 모르겠지만 기껏 총대매고 청나라에 글을 지어바친 사신이 귀국해서 자결해버리면 사실은 청나라에 반항하는거 아니냐는 의심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고 따라서 청나라가 외교적으로 무슨 트집을 잡아 침공할 지 알수 없는 판국에 '오랑캐 후빨하는 글이나 쓴 종자는 살아있는 거 자체가 죄악인데 안죽었으니 깐다'는 핑계로 그런 인격모독을 당하고도 이경석이 얼마나 대인군자의 자세를 보였는지는 이경석의 이후 대처에도 나오는데 이경석의 문집 백헌집 52권의 내용중 하나인 사궤장식감록(謝几杖識感錄)에 따르면 1668년 11월 27일 백헌이 궤장을 하사받는 그림을 그리고 교서(敎書)와 제가(諸家)들의 축시(祝詩), 화시(和詩)를 모아 첩(帖)으로 만들어서 잔치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보내고 한 부는 집안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는 주석이 있다. 이때 은인을 수이강으로 조롱한 송시열의 비방문은 주변 사람들이 넣지 않으려 했는데 이경석이 특별히 없애지 말라고 하여 붙여두었다고 한다. 참으로 군자의 자세였다. 그의 문집인 백헌집에 송시열의 비방문이 그대로 남은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이런 이경석의 대처가 송시열을 비판하던 이들이 이경석을 동정하는 여론에 더욱 불을 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송시열의 이런 졸렬한 짓거리는 그와 평소 친분이 있던 송준길 등의 문인들조차 "거 말씀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라고 한 마디씩 할 정도였는데, 웃긴 건 송시열 본인도 당대에 어떤 논란을 가져올지 잘 알고 있었다.[23] 송준길의 문인으로 평소 송시열과도 친분이 있던 송규렴도 편지로 송시열이 지나쳤다고 한 마디 했는데, 이에 대한 송시열의 답장이다.
일전에 산중에서 자네의 편지와 나를 대신하여 지은 글을 전해 받으니 위로되는 마음 한량없네. 나는 어제 겨우 돌아왔으나 몸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피곤한 중에, 또 여러 친구의 부고(訃告)가 사방에서 이르니, 이는 늘그막에 더더욱 견디지 못할 일이네. 어찌하면 좋겠는가?
요전 편지에서 경계한 바는 모두 알겠네. 그 소(疏)[24]를 올리려 할 적에, 친구 중에도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네. 내가 아무리 어두운 사람이지만 어찌 오늘 같은 시끄러운 일이 일어날 줄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다만 그 사람(이경석)의 처신이 너무나도 치사하고 잘못되었는데도 그때 사람들이 함부로 존중하고 숭앙(崇仰)하여 세상의 의로운 도가 날로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네. 그러므로 부득이 일을 따라 지적하고 배척하여 한 가닥 세도의 명맥을 부지함으로써 마음으로 주자(朱子)가 손적(孫覿)의 일을 기록한 의리에 따르려고 했던 것이네.
대체로 당시의 일이 어쩔 수 없이 몰린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알맞게 대처할 방도가 없었겠는가. 그렇건만 저들의 환심을 사려고 마음껏 아첨하여 미리 지어 놓은 글처럼, 조금도 고통을 참고 원통함을 삼키며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말하는 뜻이 없었네. 참으로 털끝만큼이라도 사람의 본성이 있다면 어떻게 차마 이처럼 하였겠는가.
이는 계곡(谿谷)이 말한, “내가 이 글을 짓지 않는다면, 만세에 더욱 변명할 말이 없을 것이다.”라는 것일세. 그러나 계곡도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난번에 청음(淸陰)께 사뢰어 계곡이 지은 우계(牛溪)의 비문을 깎아 버리었으나, 이 사람의 글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므로 마음에 항상 맺혀 있었네. 지금 이 일로 인하여 그 맺혔던 생각을 발명(發明)하니 세도(世道)를 맡은 사람에게 도움이 없다고는 못할 것이네.
그러나 그 사람(이경석)은 본시 향원(鄕原)[25]이네.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모두에게 아첨하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당시에 명망이 대단하여 잘못되고 틀린 말일지라도 사람들은 그 말을 신복(信服)하여 쳐 깨뜨리지 않으니, 석가(釋迦)의 해독이라도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네.
오늘 나의 소(疏)를 보고, 그를 존숭(尊崇)하고 열복(悅服)하는 사람들이 성내어 꾸짖고 분하게 여기며 배척하는 것은 실로 괴이한 일이 아니나 온 세상에 쑥덕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나를 마치 자신들의 원수처럼 보네. 동춘까지도 ‘놀랍고 탄식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 하였으니, 다른 사람이야 더 할 말이 있겠는가.
대체로 그 사람이 향원(鄕原)의 마음으로 오랑캐의 세력을 끼고서 일생 동안 행신(行身)하는 방법을 삼으니, 만일에 경인년 봄의 한 가지 일[26]이 아니었다면, 개도 그가 남긴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네. 그러나 그때에 죽지 않았던 것도 대종성(大宗城)에서 노획한 여자를 선물로 준 때문은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27] 대저 퇴지(退之)의 이른바 ‘끝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는 말이 진정 오늘의 나를 두고 한 말인가 보네. 그러나 후회스러운 점은 없네. 링크
송도원(宋道源)에게 답함 - 기유년(1669) 5월, 송자대전 제70권 서(書)

송시열의 편지에는 "이게 진짜 한 시대의 대학자라 평가될 만한 인간의 됨됨이냐" 싶을 정도로 헛웃음이 나오는 부분이 많다. 이경석을 두고 말만 그럴 듯한 위선자라느니, "어쩔 수 없이 썼다는 글 치고는 잘만 썼던데 진짜 어쩔 수 없이 쓴 거 맞아?", "어쩔 수 없이 쓰더라도 다른 식으로 저항하든 다른 방법도 많은데 지가 그런 방법 게을러서 제대로 안 찾아 놓고 어디서 핑계를 대고 있냐?" 같은 꼰대 기질은 물론, "죽겠다 죽겠다 말만 하더니 결국 안 죽었잖아. 지도 뭐 받아먹은 게 있으니 입으로만 떠들고 안 죽었겠지"라는 인신공격에, 자신의 발언에 대한 조야의 비판에는 "내가 팩트만 가지고 말했더니 뒤가 켕기는 것들끼리 뭉쳐서 나 하나 공격하기 바쁘네?", "아니, 난 맞는 말만 했는데 뭐가 문제야?" 식의 뻔뻔함까지 드러나 있다. 말만 현대어로 바꾸면 어디 극좌/극우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흔한 인성미달의 유저가 썼다고 보기 충분할 정도로.[28]

피해자인 백헌은 이 사건에 대해 대인배의 모습을 보였는데, 그의 문집인 백헌집 52권의 내용중 하나인 사궤장식감록(謝几杖識感錄)에 따르면 1668년 11월 27일 백헌이 궤장을 하사받는 그림을 그리고 교서(敎書)와 제가(諸家)들의 축시(祝詩), 화시(和詩)를 모아 첩(帖)으로 만들어서 잔치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보내고 한 부는 집안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는 주석이 있다. 이때 은인을 수이강으로 조롱한 송시열의 비방문은 주변 사람들이 넣지 않으려 했는데 백헌 본인이 특별히 없애지 말라고 하여 붙여두었다고 한다. 그의 문집인 백헌집에 송시열의 비방문이 그대로 남은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이런 백헌의 대처가 송시열을 비판하던 이들이 백헌을 동정하는 여론에 더욱 불을 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다.[29] 그래서인지 그의 형인 이경직의 현손인 이진유는 김일경과 대노론 강경파였고 신임사화를 주도했다. 너무 강경하게 노론을 공격하다 그 보복으로 영조가 즉위후 노론 준론을 숙청하는데 매타작 맞아 장독으로 죽었고 그 조카인 이광사 또한 벼슬도 못하고 노론의 탄핵으로 유배를 왔다 갔다하였다.

한국외대 교수 이은순은 "현실론으로 나라를 구한 백헌이나, 주자학적인 숭명 의리론으로 국가를 재건하고 민생을 회복하자는 송시열이나 모두 평가돼야 한다"고 자신의 논문에서 주장하였다. 즉 이 싸움은 양란 이후 새로운 질서 수립을 위한 이념 투쟁이자 시국 인식 차이에 따른 정론 대립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어떤 '논쟁'이나 '노선 차이'로 인한 비판이 아니라 송시열의 돌려까기에서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은순의 주장은 기계적 중립에서 비롯된 말 같지도 않은 어폐일 뿐이다. 논리적인 비판도 아니고 '수이강'이라는 말을 쓴 것부터 단지 인격 모독에 불과하며, 그 방법도 공식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치졸한 뒷담화에 가깝기 때문에 단순한 시국 인식 차이로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니다. 정 이념이 맞지 않았다면 공식 석상에서 비판하는 방법도 있다. 척화파인 김상헌, 조온, 그리고 삼학사 등도 최명길 등을 조정에서 직접 탄핵하고 비판할지언정 뒤에서 까진 않았다. 게다가 백헌은 송시열보다 나이가 12세나 많았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친교를 다진 지가 오래였는데 그런 사람을 상대로 이런 짓을 한 것이다. 그를 찬양하는 이들에게 송자라고까지 불리는 것과 비교해 보면 지극히 치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또한 당시 상황에서 당장 백헌이 청의 비위에 맞는 글을 바치지 않았다면 어떤 화를 불러왔을지 알 수 없으며,[30]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책임을 떠맡아서 국왕과 조정 중신을 보호한 적도 있다. 이런데도 교묘히 폄하하는 글을 썼으니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 송시열은 정치적, 학문적 성과와 별개로 대인 관계에선 상당히 속좁은 처신을 왕왕해서 빈축을 사고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될 적을 만들었는데 수이강 사건이 송시열의 그러한 대인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당시 실록의 기록들은 다음과 같은데, 남인시기 편찬된 현종실록이나 경신환국 이후 서인집권 시기 새로 편찬된 현종개수실록 모두 똑같이 수이강 사건을 두고 같은 의견을 냈으니 서인쪽에서도 해당 행위를 그렇게 좋게 보지는 않았다.
상이 이에 궤장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이·김 양공(兩公)은 모두 원로 숙덕(宿德)으로서 조야가 중히 여겼고 양 조정에서 예우함이 특별하여 이같이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 그러므로 시열은 경석이 이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경석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箋)을 올리고, 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시열에게 글을 구하자, 시열이 송나라 손적(孫覿)이 오래 살며 강건했던 일을 인용하여 기롱하니, 식자들은 그르게 여겼다.

삼가 살피건대, 이경석이 여러 해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볼 만한 사업이 없는데다 일컬을 만한 건의도 없어 단지 대신의 숫자만 채웠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조정에서 남다른 예로서 대우하고 궤장을 하사하는 것은 진실로 지나치다. 시열이 임금 앞에서 대답한 말을 보면 경석에 대해 부족하게 여기는 뜻이 있는 듯하다. 그의 뜻이 이와 같다면 상의 물음에 곧이곧대로 대답했어야 할 것인데 단지 이원익과 김상헌의 일로 말 뜻을 모호하게 하여 대답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곧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의리이겠는가. 더구나 경석은 세상에서 드문 은전을 입고 시열의 말 한 마디를 얻고자 하여 글을 구하였으니, 시열은 참으로 경석을 적합지 않다고 여겼다면 그 구함에 응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 기록한 글 가운데다 심지어 손적의 일을 인용하면서 그 성명은 쓰지 않고, 단지 ‘오래살며 강건했다.[壽而康]’는 서너 자를 써서 기롱 폄하함으로써 경석이 깨닫지 못하게 하였으니, 또한 어찌 정인 길사(正人吉士)의 마음씀이겠는가.
현종 9년 11월 27일, 현종실록
대체로 이·김 양공(兩公)은, 혹은 훈덕(勳德)으로 혹은 절의(節義)로 세상의 존경받는 인사가 되었기 때문에, 양 조정에서 예우가 특별하여 이같은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 그래서 시열은 경석이 이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었다. 경석은 시열의 뜻을 몰랐으므로, 힘껏 사양하지 못하고 끝내 성대한 예전을 받아들였다.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을 올리고 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시열에게 글을 청하자, 시열이 서문을 지어 주었는데, 대체로 비꼬는 뜻이 없지 않았다.
현종 9년 11월 27일, 현종개수실록
당시에 이경석은 이상진 등 몇몇 사람 때문에 차자를 올린 것이었는데, 시열은 자기를 공격하는 줄 알고 소를 올려 오지 않으면서 손적(孫覿)에 빗대어 경석을 모욕했다. 경석이 일찍이 인조 때에 대제학으로서 명에 따라 삼전도의 비문을 지었기 때문에 시열이 소에서 언급한 것이었는데, 말이 너무 박절했으므로 논자들이 병되이 여겼다.
현종 10년 4월 14일,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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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술이부작 사건

평생지기였던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갈라서게 된 일을 두고 그가 남한산성에서 자결하겠다고 해놓고 홀로 살아나온 일을 꽁하게 여겨서라고 알려져 있는데 송시열의 행보를 보면 사실로 보긴 힘들다. 송시열의 생애를 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은 꽁한 걸 마음속에 오래 담아두고 있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다.

송시열은 자기 가족들은 청 때문에 죽었는데 윤선거가 다른 선비와 아내까지 자결하는 와중에 홀로 살아나와서 싫어한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친구인 윤선거가 윤휴랑 다툴 때 자기 편을 안 들어주고 윤휴랑 절교하지 않아 졸렬하게 삐친 것이다. 서로의 가족사는 전혀 신경 안 썼을 가능성이 높다.

윤휴와의 문제에서 송시열이 처음부터 아주 강경하게 나간 것이 아니었음에도 윤휴가 그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커졌다. 이를 윤선거가 중간에서 주재하려고 했으나, 윤휴의 주장이 주자의 견해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었기에 사실 윤선거의 어중간한 태도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다행히 생전에는 잘 숨겼으나, 하필이면 송시열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둘 사이에서의 어중간한 태도와 절교하겠다고 해놓고 실은 교류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송시열이 알게 되면서 문제가 터졌다.[31]

송시열의 제자인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사망하였을 때, 죽은 친부에 대한 묘비문을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다. 윤선거와 송시열이 서로 알고 지낸 세월이 40년이나 되는 데다, 송시열이 윤증 자신의 스승이며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만큼 이런 부탁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송시열은 분명 윤선거를 좋게 생각하지 않음에도 묘비문을 지어주는 것을 허락했다. 망자의 묘비문에는 좋은 말만 써주는 것이 관례였다. 좋지 않은 말을 쓸 정도로 사이가 안 좋거나 망자를 나쁘게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묘비문 짓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를 수락하고서, 박세채가 쓴 윤선거의 행장을 인용했다. 문제는 인용하면서 술이부작(述而不作, 서술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이란 말을 썼다는 것이다.[32] 이는 "망자의 묘비문인 만큼 박세채의 글이 참 좋으니 옮겨서 인용은 해주겠지만(述而) 내 생각으로 지은 글은 아니다(不作)." 라는 뜻이 된다. 즉, 내 생각으로는 이 양반은 이런 말을 들을 정도는 못된다라고 망자를 돌려까며 조롱하는 내용을 써 준 것이다. 오늘날에도 죽은 사람 평판 갖고 장난치는 건 욕먹을 짓인데, 하물며 유교 윤리가 최고로 교조화(그것도 송시열 본인이 주도한)되는 조선 후기 기준으로는 패륜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아버지의 묘비문에 이런 표현이 들어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윤증은 이후 몇 번이고 송시열에게 묘비문을 고쳐줄 것을 요청했다. 지은 사람만이 수정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시열은 결국 이를 수정해주지 않았다. 이는 송시열과 윤증의 사이가 틀어지는 이유가 되었고, 회니시비의 단초가 되었으며, 장차 서인 노론 소론으로 갈라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송시열과 윤증이 절연하게 된 전말을 아뢰고 스승인 윤증을 옹호한 최석문 등의 상소문
비문(碑文)을 지을 때에 평생을 두루 서술하였으나 총론(總論)하는 말에 있어서는 평소에 칭찬하던 것으로 하지 않았고, 논저(論著)한 것은 단지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행장의 말을 빌려서는 박화숙(朴和叔)이 말하였다고 끝맺었습니다. 화숙은 박세채의 자(字)입니다. 명(銘)에 있어서는 다시 구설(舊說)을 전하여 기술할 뿐이고 새로 짓지 않은 채 질질 끌었습니다. 진실로 그 마음에 불평을 품은 자가 아니라면 그 말이 소략하고 성실하지 않은 것이 어찌 이러하겠습니까? 신의 스승이 여러 번 왕복하여 고쳐주기를 바랐더니 송시열은 단지 두세 자를 점철(點綴)하고 말 뿐이었으므로, 신의 스승이 비로소 다시 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내버려 두었습니다.
숙종 42년 3월 3일, 숙종실록
윤증의 문인인 전 세마 최석문의 상소에 대한 논평
윤증(尹拯)의 문인(門人)인 전(前) 세마(洗馬) 최석문(崔錫文)이 상소하여 운운 【위에 보인다.】 하였다. 최석문 등이 제 스승이 무함받는 것을 목격하고 망극(罔極)하여 임금에게 신리(伸理)를 호소한 것은 비록 고도(古道)가 아니기는 하나 근세의 관례를 따라서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만을 말하지 않고 신유년의 의서(擬書)를 곧바로 발론한 것은 제 스승의 마음과 어그러진다. 왜냐하면 그때에 있어서 윤증은 스승·제자의 본분을 아직 끊지 않았으나 송시열(宋時烈)은 혈기(血氣)의 흠이 점점 심술(心術)의 병통이 되어 도(道)가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없으면서도 다만 범하지 않는다는 의리만 지켰고, 또 그가 쓴 묘문(墓文)에서 조종(操縱)한 것도 하나의 음양(陰陽)의 수단이므로 중간의 곡절이 상정(常情)이 미치는 바가 아니었다. 윤증이 이미 경험으로 겪어서 깨달은 것이 더욱이 몸소 간절하였기 때문에 의혹이 더욱 심하여졌고, 그래서 진실로 차마 그가 속여 그릇되게 인도하는 것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의서(擬書)를 지어서 충고(忠告)하고 스스로 비간(比干) 이 간쟁(諫諍)하다가 죽은 일을 좇아 따랐다. 비록 그 처지로서는 경계하는 듯한 혐의가 있고 그 입설(立說)은 절박한 흠이 있기는 하나, 원래 그 뜻은 또한 아닌게 아니라 충애(忠愛)에서 나왔으니, 정녕 반복하여 다행히 한 번 깨닫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을 도의(道義)의 교분에서 헤아려 생각하면서 그 시의(時義)를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무명 상자 가운데에 숨겨둔 채 일찍이 자제나 문생에게 널리 퍼뜨리지 않았으니, 윤증의 뜻을 또한 알 만하다.

최석문으로서는 변명하여야 할 무함만을 변명하고 이것에까지는 소급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임금이 바야흐로 우리를 편들고 저들을 배척한다고 생각하여 이 기회를 타서 이 글을 드러내서 임금이 송시열의 병폐를 환히 알게는 하였으나 그것이 제 스승이 평소에 숨겨둔 깊은 뜻에 어그러짐은 깨닫지 못하였으니 마침내는 임금의 마음이 따라서 변하게 되고 국시(國是)가 전도되어 장래의 화(禍)가 저승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 일을 헤아리는 것이 사정(事情)에 어둡고 말을 내는 것이 망령됨이 심하구나. 아! 이 글을 소 가운데에 베껴서 아뢴 것이 본디 큰 잘못이거니와, 그 남겨 간직했던 것을 드러내어 끝내 숨기지 않은 것은 또한 윤가(尹家) 자제의 허물이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숙종 42년 3월 3일, 숙종실록보궐정오

다만 술이부작 사건으로 서인이 분열되는 계기를 만들었지만 소론 쪽에서는 윤증 같은 일부를 빼면 대체적으로 애증의 대상이었는지 소론에 의해 편찬된 숙종실록보궐정오에서는 유림의 종주이자 문하에서 재상과 어진 선비를 많이 냈다는 극찬과 학문이 허술하고 패도에 치우쳤다는 혹평이 뒤섞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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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허목 윤휴와 의견 대립

일단 예송논쟁 초기에 송시열은 허목과 윤휴의 주장을 이견으로 접수는 했다.[33] 그러나 윤선도가 자신을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 역적으로 규탄한 뒤, 윤휴가 이에 동조하거나 묵인하고, 허목은 아예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라는 여론을 조성한뒤 허목 자신도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자는 상소를 여러번 올리게 되면서 송시열의 태도와 행동은 경직되고 만다.

그래서 송시열의 후학들은 윤휴를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 불렀고,[34] 허목은 독물(毒物), 독극물, 연인(漣人), 또는 연한(漣漢), 지비공(紙鼻公) 또는 지비옹(紙鼻翁)이라 불렀다.[35]


[1] 다만 당대에 한글이 상층 사대부 사회에서 부녀자들의 소통 수단으로 널리 쓰이고 있었고 남편이 부인이나 딸에게 편지를 쓰거나 소설을 지어줄 때도 한글을 쓴 것을 고려하면, 한글로 편지를 쓴 것 자체가 특출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송시열이 한글로 쓴 건 일종의 여성용 교육서인만큼 당대 기준으로 상당히 앞선 행보긴 하다. [2] 송자대전 제131권 [3] 현종개수실록 12권 5년 12월 30일 1번째 기사 [4] 실록의 기사를 보면 과거 야인들이 침공할 때 남녀노소가 모두 성에 모여 주둔지를 지켰다면서 그때의 제도가 남은거라 적혀있다. 그로 볼 때 광해군 시기 난정과 사르후 전투 파병, 인조 시기 이괄의 난과 호란을 거치면서 서북 지방 방위 상태가 무너져 이를 보완하기 위해 현종 시기 에도 여포수 제도가 남은 것으로 보인다. [5] 과부들의 재혼은 허용은 되어있다시피 하나 재가녀자손금고법(재가한 여자의 자손을 등용하지 않는 법)에 의해서 거의 불가능했다. [6] 왕실 재산을 따로 관리하는 기관으로, 내수사는 기본적으로 조선왕실의 핵심적인 기관이었다. 그래서 국고는 메말라가도 내수사는 메마르지 않았을 정도. 송시열은 대동법 관련 논쟁이 발생했을 때, 주장했던 것 중 하나가 내수사 폐지이다. 당연히 현실정치 논리상 폐지되지는 않았다. [7] 원래 노비 제도는 종종 바뀌긴 했지만 대체로 조선 세조때 확립된 일천즉천이 대세였다. 즉, 부모 중 어느 한쪽만 노비여도 그 자식들은 노비로 취급하는 것. [8] 다만 송시열 본인이 반대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다른 김집의 문하생인 유계와 송준길은 대동법에 찬성하였다. [9] 공납을 쌀과 무명으로 걷는것이 대동법인데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수송이다. 당시에는 세금 납부란 서울로 수송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그냥 관아에 쌀냈다고 끝이 아니다. 그래서 쌀과 무명을 걷는 대동법은 백성을 더 힘들게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한 지역의 공납품이 꿩 5마리라 하고 토지가 100결이 있다고 하자. 공납제에 의하면 꿩 5마리를 수송할 사람 한명이면 되지만 대동법을 시행하면 200말(=20가마)을 수송할 사람 네다섯 명은 필요해지고 백성들의 수송부담이 높아진다. [10] 일차적으로 녹봉이 늘어나면 수탈이나 부정부패에 대한 유혹에 덜 흔들릴 것이고, 또 걸렸다가는 좋은 보수를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덜 감수하려 할 것이므로. 이는 훗날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한 주장과 똑같다. [11] 이는 훗날 박제가도 주장하게 된다. [12] 숙종실록 7권, 숙종 4년 윤3월 16일 병진 3번째기사 [13] 논어에 여자와 소인을 양육하는 것은 어렵다.(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라고 적혔지만 양육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 가르치지 말아라가 아니다. [14] 회니시비 문서를 참고할 것. [15] 이 밖에도 자신의 고향인 옥천이 자신의 세력이 아닌 동인이 주도하는 지역이자 이 지역을 서인이 강성한 지역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지역 동인이 추앙하는 인물을 비난하며 인신공격까지 하기에 이르는데 심지어 그 근거는 거짓이었다. 즉 목표를 이루기 위해 대학자라는 지위의 사람이 자신의 세력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거짓말까지 하며 비난을 한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삼계서원 문서 참고 [16] 현종은 본래 성정이 온화하고 양순하였다. 부왕의 정통성을 깎아내리는 두 번의 극렬한 예송 속에서 그 누구도 사문난적으로 몰거나 죽인 일이 없을 정도. [17] 물론 경종의 원자책봉은 원칙상 송시열에게도 명분이 있었다. 오늘날에야 숙종이 인현왕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 못한걸 알지만 이 당시 숙종의 나이는 27세였고 인현왕후는 21세였다. 시대기준으로는 경종이 숙종의 늦둥이 아들 격이긴 했어도 나이상 숙종과 인현왕후의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날 가능성은 아주 많이 있었고 이 상황에 인현왕후가 아들을 낳아버리면 인현왕후 소생의 적자와 장희빈 소생의 원자가 대립하여 왕위 계승 구도를 크게 꼬이게 만든다. 적어도 전례대로 몇 년쯤 지났다가 책봉한다면 숙종에게도 할 말은 있겠지만 27세밖에 안 되었는데도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갓난아기를 원자로 책봉하라 함은 억지다. 이와 비슷하지만 납득가는 케이스는 영조인데 영조는 사도세자를 태어난 그날로 원자에 봉하고 다음 해에 세자에 봉했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태어난 당시 영조는 무려 42세였고 첫아들인 효장세자를 25세 때 얻은데다 그마저도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전에 죽어서 아들을 더 볼 가능성은 낮았다. 당시에는 설마 영조가 그로부터 40년 넘게 살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당장에 숙종 이전까지 왕이 18명이 지나갔지만 42세를 넘긴 왕은 태조, 정종, 태종, 세종, 세조, 중종, 선조, 광해군, 인조 총 9명뿐이었다. 반면 27세를 못 넘긴 왕은 고작해야 단종과 예종뿐이었다. 이러니 송시열로서도 할 말이 있는 것. [18] 그나마 숙종 입장에서 반론해볼 것이 있다면 숙종이 느끼기에는 자신이 이후에 아들을 볼 가능성이 낮다고 여겼을 거라는 것이다. 일단 본인이 2대 독자였고 할아버지인 효종이 40 못되어서, 아버지인 현종은 30대 중반에 사망했다. 즉 2대 독자 출신으로서 자기가 둘째 아들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것이고 거기다가 윗선조 2명이 단명한 상황이니 자기도 단명할 거라는 우려가 컸을 것이다. 심지어 효종은 22세에 현종을 얻었고 현종은 20세에 숙종을 보았는데 본인은 무려 27세나 되어서야 아들을 보았으니 더 그렇다. 기껏 신하들 요구를 들어줘 아무 조치도 안 취해놨다가 딸만 줄줄이 낳은 상태에서 갑자기 죽어버리면 뒤를 이을 아들은 선왕의 유일한 아들이라 즉위하긴 했지만 그거 말고 아무것도 없는 신세니 정통성에서 뭔가 부족한 감이 없잖아 보인다. 효종이 정통성 때문에 고생한걸 감안하면 숙종 입장에서도 고민될 부분. 물론 전례를 비추어보면 그렇다고 해도 너무 성급하긴 했다. [19] 일찍부터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던 김집이나 십여세나 아래인 서인 산림들인 송시열, 송준길 등을 만나 나이를 떠나 고담준론을 펼쳤던 이경석은 인조 반정 이후 자신들이 임금을 세웠다는 말을 공공연히 입에 담는 등 공신들의 특권과 전횡을 보고 분개하여, 김집, 송시열,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인조에게 알리고 적극 천거하여 관직에 등용하게 했다. 이로써 송시열, 송준길 등은 반정 공신들의 전횡과, 인조의 뜻에 영합하려는 일( 정원군의 원종 추숭론 등)에 적극 반대하고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의 복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반정 공신들의 반격과 반발에 대비해 백헌은 산림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견해주었다. [20] 송시열은 호란 때 가족을 잃어 청나라를 증오하는 마음이 강했다. [21]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웃옷을 벗고 양을 끌고 간다'라는 육단견양(肉袒牽羊)의 준말로, 쉽게 말해서 항복한다는 뜻이다. 웃옷을 벗었으니 나를 죄인처럼 채찍으로 때려 달라는 뜻이고, 양을 끌고 왔으니 나 때문에 먼 길 오신 장병들 양고기라도 드시라는 뜻이다. 금나라의 수도 상경회령부에 끌려간 북송의 휘종, 흠종 부자 및 황족들은 남녀 불문하고 금나라 황족 앞에서 견양례를 행했고, 수치를 참지 못한 인회황후는 결국 자결했다. 중국 쪽 박물관이나 사극에서는 실제로 '육단견양'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웃옷 벗고 양 가죽 걸치고 금나라 황제와 그 신하들 앞에서 개처럼 기며 굴욕적으로 항복하는 모습으로 그렸지만, 명색이 한 나라의 황제인데 실제로 그 정도까지 가혹하게 대했을 리는 없고 송사에는 또 처음에는 모욕적인 중혼후니 혼덕공이니 하는 칭호를 붙였던 것을 바꿔서 천수군공 같은 정중한 칭호를 붙이고 금나라 수도에서 머물게 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그냥 오래 전부터 써오던 한문 표현을 빌어 '항복했다'는 표현을 예스럽게 적었을 수도 있다. 참고로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이 요 태조에게 항복할 때도 '육단견양'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22] 손적의 입장에서 변호해 보자면 그 글을 쓰라고 명한 것은 송흠종이었고, 그렇게 있는 대로 깎아 내린 글을 받은 금태종이 흡족해 해서 송흠종을 풀어주었다고 하니 아주 무의미한 헛짓거리는 아니었다. 이후 금나라에서는 송과의 협상 끝에 휘종의 유해와 다른 북송 황족들도 송환시켜 주겠다고 했지만, 이 과정에서 당시까지 살아있던 흠종의 신병 인수를 거부한 것은 다름아닌 고종이었다. [23] 참고 - 송혁기, 上疏를 통해 본 조선후기 지식인의 재편 [24] 현종(顯宗) 10년(1669)에 현종에게 올렸던, 이경석을 손적에 빗대며 '수이강' 운운한 것이 그에 대한 돌려까기였음을 스스로 드러낸 문제의 그 상소다. [25] 고을의 신망을 얻기 위하여, 세상에 아첨하면서 거짓으로 근신하는 척하는 사람.(《논어》 양화편). 한 마디로 위선자. [26] 효종(孝宗) 1년(1650)에 김자점(金自點)의 밀고로 청에서 효종의 북벌 계획에 대해 힐문했을 때 이경석이 나서서 "모두 내가 책임질 일"이라고 해서 청나라에 의해 이경석이 의주 백마산성에 구금된 일을 말한다. [27] 손적은 문제의 그 항복문을 짓고 나서 흡족해한 금태종에게 대종성에서 금나라의 포로가 된 여자를 하사받았다. 송시열의 '대종성에서 노획한 여자' 운운한 말은 현대 말로 풀면 "이경석 그 사람, 삼전도비 글을 짓고 나서 주변에 막 '수치스럽다', '죽고 싶다' 이러도 다닌 것도 실은 사람들 동정표 사려고 쇼한 거겠지. 겉으로야 뭐 수치스럽다, 죽고 싶다 떠들어도 그런 글(삼전도비) 썼으니 일단 청나라한테 뭔가 받아먹은 게 있을 텐데? 그러니 말만 죽는다 죽는다 하고 안 죽은 거잖아, 내 말이 틀렸어?" 이 말이다. 현대에도 이런 식으로 사람들한테 뒷담화하고 다니면 상대에 대한 인격 모욕을 넘어서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해도 할 말이 없다. [28] 그리고 이런 류의 인간은 현대에도 흔하다. 자기 생각이 무조건 옳다는 독선은 말할 것도 없고, 팩트니까 말해도 된다고 아무 데서나 지위고하 가리지 않고 막 말을 쏘고 다니며, 자기가 한 말에 누가 뭐라고 반박하거나 지적하면 "니가 감히 나한테 뭐라고 해?" 식으로 받아치거나, "나는 맞는 말했는데 지들끼리 패거리로 뭉쳐서 날 공격하네?"라며 스스로를 순교자처럼 자기포장하는 인간들. [29] 그도 그럴게 송시열이 노답 북벌론자였다면 모를까, 송시열은 이미지와는 달리 현실적이었고 조선이 청을 치는건 현실적으로 불가하다고 생각했다. [30] 가도 정벌과 명 정벌에 필요한 군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고 질책받았는데 글을 바치지 않았다간 청에서 '이것들이 살려준 은혜도 모른다' 하며 또 군사를 끌고 왔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고, 백헌 본인이 한번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직을 지켰다. [31] 물론 윤선거 입장에서는 양쪽 다 친구였고, 잘 지내왔는데 송시열이 윤휴와의 절교를 요구해왔으니 상당히 난처했을 것이다. 이를 '이중적인 태도'라고 봐야할지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봐야할지는 각자 생각해볼 문제다. [32] 망자를 추모하며 쓰는 묘비문의 경우, 다른 사람의 평을 인용할 수는 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더 좋은 평을 인용함으로써 추모와 함께 저자의 겸손을 드러내는, 말 그대로 술이부작의 정신을 드러내는 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망자의 묘비문에 다른 사람의 망자를 찬양하는 아름다운 글을 인용해 놓고, 술이부작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 [33] 계모가 전처 소생의 장자가 죽은 이후에 대우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처 소생의 차자 내외가 사망했을 때에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사례가 거의 처음이였다. 禮曹의 관원들이 몰라서 당시 禮學의 최고권위자라는 송시열에게 물었던 것이고, 송시열은 소현세자를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기에 '체이부정'을 이유로 1년복을 주장하였다. 서인 내에서도 3년복을 주장한 사람들이 여럿이였으니 이견이 많았다. 송시열도 단순히 학문적인 것으로만 이야기했다면 그 주장을 틀리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어 대통을 승계했으니, 남인들이 주장하는 3년복이 말도 안되는 괴이한 것은 아니었다.) [34] 이중 적휴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35] 지비공이나 지비옹이란 송시열과 송시열의 제자들 중 허목을 부를 때 그나마 비교적 온건한 표현이었는데, 이는 허목이 평소에 축농증이나 비염 증세가 있어 코에 종이나 휴지를 붙였던 것을 두고 비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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