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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00:52:55

석박(후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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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石樸
(? ~ 351)

후조의 인물. 자는 현진(玄眞). 기주 발해군(勃海郡) 남피현(南皮縣) 출신. 서진의 낙릉무공 석포의 증손자.

2. 생애

사람됨이 성실하고 후덕하였으나 별다른 재주가 없었고, 조한(趙漢)의 소무제 유총 낙양을 함락시켰을 때 흉노족에게 사로잡혔다. 당시 한군의 장수로 활동하던 석륵은 자신과 성씨가 같은데다 출신 지역 또한 하북인 석박을 종친처럼 친근히 여겼고, 특별히 총애하여 나중에 후조를 건국했을 때는 사도로 임명하였다.

건평 4년(333년) 7월, 명제 석륵이 붕어하고 승상 석호가 정권을 잡자, 석박은 누차 승진해 시중에 올랐다.

건무 6년(340년) 10월, 전량의 양왕(涼王) 장준이 별가 마선(馬詵)을 보내 조공을 바쳤는데, 무척 불경한 마선의 언사에 분노한 천왕 석호가 장차 그를 참하려 하였다. 이때 석박이 굳게 간했다.
"지금 우리나라가 먼저 제거해야할 적은 강남(중국)에 있는 진(晉)의 잔당이지, 저 하우(河右)의 무리는 신경쓸 것도 없습니다. 당장 마선을 죽인다면 장준을 정벌할 수밖에 없는데, 한 갈래의 군사를 둘로 가른다면 건강(建康)의 수명을 늘려주는 일밖에 안 됩니다. 무엇보다 장준의 무리를 상대로 승리한다 하여도 얻는 것이 적고, 힘으로 제압하지 못한다면 사방의 오랑캐의 웃음거리만 될 뿐입니다. 그러니 저들을 후히 대접해 돌려보내십시오. 만약 저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신하들과 함께 사죄한다면 우리가 저들에게서 무엇을 더 구하겠습니까? 저들이 망설이다가 사죄할 시기를 놓쳤을 때 토벌해 꾸짖어도 늦지 않습니다."
석호는 이를 듣고 그만두었다.

건무 13년(347년) 8월, 무제 석호는 토목공사를 자주 벌여 백성들이 고역에 시달렸다. 한번은 석호가 궁궐 북쪽으로 화림원(華林苑)을 조성한답시고 수도 인근 군에서 남녀 160,000명과 수레 100,000승을 징발해 흙을 운반하게 하였다. 이에 석박은 대신 조람(趙攬), 신종과 더불어 상소를 올려, 안그래도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을 불쌍히 여겨달라 탄원하였다. 이들의 상소는 매우 정직한 말이었으나 석호는 "정원을 위해서라면 백성이 얼마나 죽어도 상관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흥 원년(350년) 2월, 후조의 대장군 염민이 정변을 일으켜 염위를 건국하고 갈족들을 대거 학살하였다. 이때 석박은 한족이라 죽음을 피할 수 있었고, 오히려 승진하여 사공이 되었다.

영흥 원년(350년) 11월, 염민이 100,000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할 때 종군하여 후조의 황제 석지가 지키고 있는 양국(襄國)을 쳤다.

영흥 2년(351년) 3월, 염민이 양국을 포위한지 100여 일 정도 지났을 무렵, 전연의 어난장군 열관, 강족 수령 요익중의 아들 요양, 후조의 상국 석곤(石琨) 등의 구원병이 이르렀다. 염위군이 이들로부터 일제히 공격받아 전멸하니, 죽은 염위군 장수와 병사만 100,000명을 헤아렸고, 석박 역시 난전 중에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