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학(西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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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들어온 서양 학문으로, 좁은 의미로는 그리스도교[1], 넓은 의미로는 서양의 학문을 의미한다.
원래 서학이라는 단어는 적어도 통일신라 때부터 사용되었는데, 최초로 확인되는 사용자는 최치원이다.[2] 당시에는 서양이 아니라, 한국의 서쪽에 있는 중국의 학문 내지는 중국에 유학하는 것을 뜻하는 의미였다. 고려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고, 조선 후기에 의미가 변화되어 서양의 학문을 뜻하게 되었다.
1.1. 유입
초기에는 서양의 문물이나 서적을 중국에서 가져오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1631년에 정두원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방문하여 화포, 지도, 천리경 등을 들여왔고, 1645년에 소현세자가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 신부와 교류하면서 천문, 산학책 등을 가져왔으며, 이 과정에서 가톨릭 서적도 같이 전파되었다.1.2. 발전
실학자들은 서학 서적을 읽는 식으로 서학을 살펴보았는데, 기술, 과학 부분은 이용후생의 목적으로 긍정하기도 하였다. 한편 천주교는 보유론(補儒論)적 관점에서 긍정하기도 하고, 혹은 허황되었다 하여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기도 하였다. 한편 천주교를 학문이 아닌 신앙의 관점에서 믿는 사람도 생겼는데, 이벽 세례자 요한, 정약종[3] 아우구스티노 같은 사람이 있었다.1.3. 쇠퇴
서학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종교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실용적인 학문에 대한 관심도 수그러들게 되었다. 또한 천주교 신앙은 양반에서 서민으로 옮겨갔다.이후에는 '서학'이 미국이나 서양의 무언가를 가리키는 인터넷 용어로 변했는데, 탕수육으로 본 조선시대 붕당의 이해에서는 ' 논쟁의 범위를 벗어난 새로운 발상'을 의미하고 2020년 서학개미운동 등 개인 투자자 열풍이 불면서 서학은 인터넷상에서 미국 주식을 뜻하는 말로도 변질되었다(…). 재미있게도 미국천주교주교회의(USCCB)[4]는 주교회의 차원에서 사회책임투자 가이드라인을 정해 놨으며 이를 별도의 사이트를 만들어 홍보하고 있다. 또한 미래에셋에서는 S&P 500 상장 종목 중 천주교의 투자 가치를 대변하는 종목들을 별도의 ETF로 묶어서 거래할 수 있도록 했다.
1.4. 관련 문서
2. 대한민국의 배우
자세한 내용은 서학(배우) 문서 참고하십시오.3. 명나라 장수
자세한 내용은 서학(명나라)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정확히는
가톨릭(천주교)
[2]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대한민국의 국보 8호) 비문에서
당나라의 학문을 서학으로 칭했다.
[3]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의
아내 유 체칠리아,
아들
정하상 바오로,
딸 정정혜 엘리사벳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시성되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아들 정철상 가롤로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되었다.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항목 참조.
[4]
각 나라마다 천주교 주교회의가 있으며, 한국에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있다.
[5]
이름부터가 서학과 반대되는
동쪽 학문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