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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00:25:31

4.12 상하이 쿠데타

상하이 쿠데타에서 넘어옴
上海政變[1]
Shanghai Coup
파일:external/cpc.people.com.cn/F200704030909182147925206.jpg
체포되는 공산당원

1. 개요2. 배경
2.1. 국민당의 분열2.2. 상하이 폭동2.3. 장제스의 위기2.4. 왕징웨이의 귀국2.5. 장제스와 청방의 결탁
3. 전개
3.1. 난징 점령과 우한의 대응3.2. 쿠데타의 거행
4. 결과
4.1. 난징 국민정부의 수립4.2. 사상자 수
5. 여담6. 매체에서7. 참고문헌
7.1. 저서7.2. 논문
8. 관련 문서
8.1. 인물8.2. 사건

1. 개요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중국국민당 우파가 중국국민당 좌파 중국공산당을 대상으로 일으킨 군사쿠데타.

국민당 좌파의 계속된 공세로 붕괴 직전에 이르렀던 국민당 우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좌파와 공산당을 위시로 하는 반대파들을 분쇄하고 독자적인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하면서 국민당의 주도권을 휘어잡았고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과 완전히 결별하고 난징 국민정부의 수장이 된다. 이 사건으로 1차 국공합작의 붕괴가 시작되었으며[2]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기나긴 국공내전이 시작된다.

2. 배경

2.1. 국민당의 분열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질 당시, 중국 공산당은 당원이 불과 200명도 못되는 군소 정당이었다. 그러나 국공합작 이후로 국민당 명의로 여러 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발언력을 확장해 나갔고 이 과정에서 국민당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국민당 일부 세력이 국공합작을 끝내고 공산당을 추방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쑨원이 이에 반대하였기에 쑨원이 살아있을 때는 이에 대한 반발이 터져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하자 다이지타오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에서 공산당이 국민당에 기생하고 있다면서 공산당에 대한 반발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쑨원 사후 왕징웨이의 국민당 좌파[3] 후한민을 비롯한 국민당 우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공산당과 연합했고,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이 국민당 안에 침투하여 국민당을 적화하려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부인하면서도 좌파의 힘을 빌어 물밑에서 국민당을 완전히 공산화하고자 했다.

1925년 8월 20일, 국민당 좌파의 거두인 재정부장 랴오중카이 암살되자,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이 사건의 범인을 우파의 영수인 외교부장 후한민의 사촌동생 후이성으로 증거없이 결정짓고 이를 빌미로 후한민을 소련으로 사실상 추방하였으며 월군 사령관 겸 군정부장 쉬충즈 역시 천중밍과 내통하였다고 주장하여 숙청하였다. 이어 국민당의 혁명원로 린썬, 쩌우루 등의 거물들도 화북으로 국민혁명을 전파하라는 구실로 추방하여 광저우 중앙은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국민당 우파 40여명이 베이징의 서산 벽운사에 모여서 국공합작을 끝내기로 결정짓는데 이들을 서산회의파라고 한다. 그러나 광동의 국민당 본부는 이미 공산당이 과반수를 차지한 상황이라 그들을 오히려 당에서 제명하기로 결정지었다. 이에 국민당 우파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던 상황이었다.

1926년 3월 20일, 중산함 사건이 터지면서 공산당의 독주는 잠시 저지되고 장제스의 주도 하에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면서 공산당은 북벌이 시기상조라는 기존의 노선을 수정하여 국민당의 북벌에 협조했으나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 측은 우한 점령 이후 외유 중인 왕징웨이를 옹립하여(영왕운동) 장제스를 견제하고자 했다. 국민당 우파 중에 후한민 등 상당수의 거물들은 제거되거나 서산회의파로 아예 따로 분리해서 나가거나 실각된 상태였지만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인 장제스는 아직도 좌파의 입장에서 가장 위협적인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중산함 사건 이후 그가 공산당에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님이 드러났으니 공산당 입장에서 장제스는 매우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1926년 11월 광저우의 국민당 중앙은 우한 천도를 선포하고 12월에 사법부장 쉬첸, 교통부장 쑨커, 외교부장 천유런, 미하일 보로딘 등이 중심이 되어 당 중앙과 임시연석회의를 조직, 1927년 1월 1일 우한 국민정부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는데, 이들은 1월 3일 열린 2기 3중전회에서 장제스의 권력을 축소시키고자 했다. 이에 난창에 북벌군 총사령부를 설치한 장제스는 임시연석회의가 당의 규약에 없다고 그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난창 천도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난창을 지지하는 사람은 주석대리 탄옌카이와 당 중앙 상무위원회 주석 대리 장징장 정도였고 대다수의 위원들이 우한을 지지해서 장제스의 주장은 먹히지 않았다.[4] 결국 국민당 좌파들이 당과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우파에 대하여 칼날을 겨누게 된다.

2.2. 상하이 폭동

한편 중국공산당 저우언라이의 주도 아래에 상하이에서 쑨촨팡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2차례의 봉기는 실패했으나 1927년 3월의 봉기는 대성공을 거두어 필서징이 지휘하는 쑨촨팡의 상하이 방어군은 붕괴 상태에 이르렀고 무정부 상태를 틈타 3월 19일 오송을 점령하여 상하이 남부 방어선을 돌파했던 국민혁명군은 3월 22일 상하이에 입성했다. 3월 25일에는 국민혁명군이 난징을 함락했고, 3월 26일 아침에는 장제스가 군함을 타고 상하이에 입성했다.

3월 27일 북벌군 환영대회가 열려 국민혁명군을 환영했다. 같은 날 바이충시는 상하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불법적인 무리들이 무장단체를 조직하고 선동과 폭력으로 조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을 금지한다는 포고를 공포함으로싸 공인규찰대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3월 28일 총공회는 장제스에게 규찰대 해산 계획이 있는지를 물었는데, 장제스는 규찰대는 원래 무장하는 것이고 깡패들이 기회를 타서 규찰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도 자신이 엄히 다스릴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물론 이는 믿기 힘든 대답이었기 때문에,[5] 공산당은 규찰대와 장제스의 정면 충돌을 피하고 시정부의 장악을 통해 장제스를 견제하는 노선을 취했다.

한편 난징사건의 발생으로 분노한 열강은 상하이 지역에 1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파견하고 자국민 피해에 대한 보복으로 난징 시내에 포격을 가했다. 하지만 극도로 분노하여 무력 행위를 주저하지 않던 영미와 달리 의외로 일본 제국은 이때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수상 시데하라 기주로가 소위 시데하라 외교란 것을 내세우면서 중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방침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데하라는 이미 국민당의 북벌을 막을 수는 없다고 판단, 그렇게 된다면 무리하게 북벌을 방해할 것이 아니라 국민당 내부에 장제스같은 우파, 온건파들을 포섭하여 공산당과 단절하게 하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만약 난징 사건을 통해서 장제스를 열강이 지나치게 핍박하여 장제스가 몰락하게 된다면 국민당은 좌파들의 손에 완전히 떨어져 열강의 입장에서 말이 통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일본은 3월 말부터 장제스와 접촉하여 장제스에게 공산당과 단절하고 난징 사건 처리에 성의를 보여 열강을 달래라는 충고를 계속하였다. 장제스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문제를 해결하겠으며 4월 초에 국민정부 내부 과격파를 처리하겠다고 대답했다. 난징 사건에 대해 장제스가 열강과 접촉하면서 국민정부를 대표하는 입장을 취했던 것은 이후 장제스가 국민정부 내부 패권을 쥐게 되는 데 한가지 큰 도움과 계기가 되었다.

2.3. 장제스의 위기

앞서 말했듯이 우한에서는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일선 부대들에 대한 선무공작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상하이와 그 주변에 주둔한 군대는 1군 1사단, 1군 2사단, 1군 21사단, 26군이었는데, 이 중에서 1사단과 21사단은 좌경화가 뚜렷하여 장제스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우익 성향이 강한 2사단에 대해서는 공산당이 연일 비난 공세를 퍼붓거나 아예 저우언라이 주도로 대회를 열어 포섭에 나서고 있었다. 우한에서는 심지어 허잉친과 리쭝런에 대해서도 장제스와 단절하라고 접근해 오고 있었다.

우한의 선무공작에는 황푸군관학교동학회와 청년군인연합회 등이 동원되었다. 이 때문에 장제스의 정치적 기반인 황푸군관학교 출신 청년 장교들까지도 반장, 친공으로 돌아서서 장제스에게 과거 황푸군관학교에서 자신들에게 가르친 "코민테른에 복종하겠다." "반공이 반혁명이다."[6] 라는 발언이 진실이냐고 질의하는 등 장제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때 청년 장교들의 반장 분위기가 너무 심해서, 리쭝런 회고록에 따르면 허잉친이 "제1군도 장악하지 못하는 처지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사표를 제출하기까지 했다.

거기에 친공은 아니더라도 장제스와의 이해관계 충돌 때문에 전략적으로 장제스를 배척하면서 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부대들도 있었다. 바이충시는 임조함 등 공산당원들이 당대표로 있는 루디핑의 2군과 청첸 휘하의 6군을 그런 예시로 지목했다. 6군의 경우에는 아예 우한의 비밀지령에 따라 장제스를 체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제스가 정치적 압살을 피하기 위해서는 상황의 재편이 필수적이었다. 난징 주변에는 2군, 6군, 27군, 37군, 40군이 있었는데, 2군과 6군은 명백히 친공, 반장 측이었고, 40군만이 믿을만하여 장제스는 40군에게 난징 수비를 맡겼다.

장제스는 쑨촨팡으로부터 무력으로 도시를 점령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폭동에 타격을 입은 쑨촨팡이 버린 상하이를 주은 것이나 다름 없어서 입지가 좁았다. 상하이의 대중은 반장, 반외세, 공산주의 성향을 매우 강하게 띄고 있었고 이들은 상하이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독자적인 실력 행사에 나서고 있었다.

장제스는 외국인들을 보호하는 한편 상하이의 통제권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장제스가 당장 활용할 수 있는 힘은 부족했다. 특히 초공회 산하의 고순장의 지휘를 받는 3천 규모의 규찰대는 장제스에게 굉장한 위협이었다. 이들의 기세는 실로 대단하여 저우언라이는 혁명군이 선포한 통금령을 통과할 수 있는 암호를 이들에게 제공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여기에 상하이의 노조 조직은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연일 확장되고 있었다. 4월 초에 이르러선 산업별 노조가 조직되었고, 이 시기 중국공산당 상하이 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상하이 전역에 걸쳐 100개가 넘는 노조와 35만명의 노조원이 확보되었는데, 노조가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된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이 노조는 100개가 넘었으나 공산당의 일률적인 쟁의 지도에 따라서 상하이임시시정부의 강령과 일치되는, 매우 일관된 목소리[7]를 내고 있었다. 다만 주석에 달린 이들의 주요 요구를 보듯이, 노조는 중국 공산당이나 우한의 기대만큼 반장으로 나가지는 않고 경제적인 투쟁에 집중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총공회에 상하이의 공인규찰대가 반동파 소탕을 명목으로 상하이 시민을 불안하게 한다면서 해산하고 무장해제 후 바이충시의 통제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총공회는 규찰대는 군대가 아니라 자위조직이라고 거부했고, 오옥장은 이를 구실로 장제스가 반혁명적이니 조사하라고 요구했다.

4월 1일 장제스에 대한 강경파인 미하일 보로딘이 주도하던 우한의 중앙정치위원회는 "혁명의 질서를 유지할 헌병대가 아직 조직되어 있지 않은 동안은 규찰대를 혁명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합법적 무력으로 승인한다. 군정의 장관으로서 이것을 함부로 해산하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반혁명이다."라고 결의했다. 또한 4월 1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직에서 면직되었다. 4월 2일에는 난징 사건 처리를 두고 열강과 접촉하던 장제스에게 상하이에서 퇴거하라는 훈령이 내려졌다. 이는 북벌을 통해 위신이 높아진 장제스가 부유한 난징-상하이 일대를 지배하는 것도, 열강과의 외교적 교섭을 처리하면서 우한을 배제하고 발언력을 높이는 것도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각 상하이를 떠나 난징으로 가서 군사에 전념하라. 외교에 관한 것은 중앙의 명령이 없는 한, 상하이에서 어떤 발표도 해서는 안된다. 또 제국주의로부터의 통첩을 받아서도 안된다. 구두로 하든 문서로 하든 마찬가지다."

면직 이유가 장제스가 군사독재를 막기 위해서라는 허샹닝의 설명을 들은 장제스는 집기를 파괴하며 울부짖었고 "없는 사실을 왈가왈부한 이번 해직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북벌 완성의 중책을 질 것을 서약하는 바이다!"라고 공언했다. 이때 공산당의 의도에 대해서는, 중화민국 측에서 천두슈, 나역농 등의 공산당이 무력으로 장제스를 공격하는 한편 상하이에서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켜 열강과 국민혁명군의 충돌을 야기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국공합작 유지 노선을 지지하던 코민테른의 저지를 받아 실행에 옮겨지진 못했다고 한다.

3월 28일 감찰위원회회의에서 차이위안페이 우징헝은 공산당이 삼민주의를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 전정을 주장하며 불법적으로 국민당을 차지하려 든다고 비판하며 공산당원들을 제명할 것을 제안했다. 4월 1일 우징헝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반역의 증거가 있는 공산당원들을 심사하여 직권을 정지시키자는 안을 감찰위원회에 제출했다.

여기에 4월 2일 난창에서 주더 등이 폭동을 일으켜 국민당 강서성 당부를 습격하고 국민당 간부들을 체포하는 난창 기의를 일으키자, 4월 2일 우징헝, 차이위안페이, 장런제, 천궈푸 등이 참여한 국민당 감찰위원회가 상하이에서 다시 정식으로 소집되었다. 우징헝은 단호한 조치를 감찰위원회에 주문했다.
"공산당의 결의에 따르면, 그들은 당단으로써 정치를 감독하고 정치로써 군을 감독하는 방법으로 '새 군벌'을 억압하려고 하고 있다. 필요하면 쾌도난마의 수단을 취해야 한다고도 말하고 있다. 난마란 국민당이요, 쾌도란 무산계급의 실력행사를 뜻한다. 공산당은 항상 <차을타갑, 차병타을>의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현재는 왕징웨이를 옹립하여 장제스를 타도하려 하고 있지만, 이 일에 성공하면 다음에는 미하일 보로딘을 옹립하여 왕징웨이를 타도한다. 최후에는 레닌을 옹립하여 쑨원이 타도당한다. 쾌도의 무산계급도 당장의 차용물에 불과하고 최후에는 타도당한다. 중국 인민 모두가 타도되고, 공산주의 일색이 될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장차 중국이 공산당에게 넘어간다면, 어떻게 소련의 직접적인 지배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형태를 바꾼 제국주의 국가 하에서, 형태를 바꾼 속국이 되는 것이다. 망당매국의 사태가 절박하다."

결국 중앙감찰위원회는 우징헝의 요구를 수용해 공산당원을 위험분자로 단정하고 감시할 것을 통고하고, 중집위에 반역한 공산당원들을 심사하여 직권 정지시키자는 요구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한편 공산당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은 비단 국민당 우파 뿐만은 아니었다. 1927년 4월 소련 대사관을 공격해 리다자오 등을 처형한 장쭤린 같은 군벌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시민과 지식인들도 공산당을 크게 두려워하였다. 당장 젱치의 중국 청년당은 국민당이 이기고 군벌이 몰락하면 중국은 소련의 신하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북양정부의 존속을 옹호했고 톈진에 거주하던 량치차오는 국민당의 북벌에 대해서 북방 군벌들에게 이제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다면서도 국민당에 대해서도 일당독재의 국면에서는 누구도 그 앞에 광명을 볼 수 없다고 논평하면서 국민당의 집권이 공산독재를 가져올 것이라 두려워했다. 그러다가 난징 사건 발발 이후 장제스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란 것이 밝혀지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제스가 공산당이 아닌 것은 현재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공산당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얼마만큼 있는지는 그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현재 상하이에서는 두 쪽이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어 참담한 상황에 이르렀다. 만약 공산당 일파가 승리한다면 전 국민은 정말 죽을 곳마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다.(...) 아마도 나는 망명해야만 할 것이다."

일본의 중국 연구자 다치바나 시라키는 당시 민중에게 '공적병'이라고 부를 만큼의 공산당에 대한 두려움이 퍼져 있었다고까지 평가한다. 흔히 중국 내부의 반공을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의 '반동적 행위'로 인식하는 경우가 잦지만 공산당의 주장과 달리 당시 중국의 대다수 농민들은 물론이고 지식인 사회에서도 공산당이 주장하는 과격한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전정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이를 경계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2.4. 왕징웨이의 귀국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던 왕징웨이가 4월 1일 상하이를 통해 귀국했다. 왕징웨이는 중산함 사건 이후인 1926년 5월 10일 출국했다가 거의 1년 만에 귀국한 상태였는데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진작부터 국민당 좌파 측에서는 왕징웨이의 귀국을 촉구하는 영왕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왕징웨이의 귀국도 이러한 영왕운동의 결실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8] 쑹쯔원, 우징헝 등이 왕징웨이를 맞이했는데 왕징웨이는 전보다 공산당에 대해 좀 더 경계심을 드러내는 발언을 했다.
"공산당은 최초의 정책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민당을 이용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공산당의 계급혁명과 프롤레타리아 전제에는 찬성할 수 없다. 내가 본 바로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원만히 해나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분간은 협력관계를 유지시키고 싶다. 책임을 지고 양당의 조화를 꾀하도록 할 생각이다."[9]

이날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수차례 회담을 가지고 국민당을 공산당의 손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청당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상하이에 머물러 달라고 요청했다. 만약 보로딘 추방과 분공을 이뤄낸다면 자신은 정치에서 은퇴하여 군사업무만 보면서 왕징웨이의 국민당 장악을 지지하겠다는 것이었다.[10] 왕징웨이는 우한 측에서 장제스의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직을 박탈한 것 등에 대해서는 심한 처사라고 같이 분노해 주었으며 상하이의 전면적인 폭동을 막는 데는 동참하겠다고 했으나 청당 요구에는 크게 당황했다. 둘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왕징웨이:"동남과 우한이 싸워서 만일 자네 쪽이 지면 우리 국민당은 소멸하고 공산당이 흥륭할 것이다. 만일 자네가 이기고 우한이 타도되면, 국민당은 민국 13년의 <연소용공>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만다. 그렇게 되면 우파의 군대이든 좌파의 당원이든, 자네와는 합작할 수 없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자네의 당내에서 생명은 소멸해 버리지 않겠는가."
장제스:"지금은 그런 일보다 국민당의 존망 자체가 문제이다. 만일 국민당이 살아남을 수 없을 그때에는, 어떤 책임이라도 내가 지겠다. 책임을 지지 않고 멋지게 해서 혼자 잘 되려고 하지 않는다. 성패와 이해문제는 차치하고 지금은 공산당과 갈라서는 것만이 필요하다. 공산당을 숙청한 날에는, 순수한 국민당원이고 본당을 위해 분투하고 굴복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하고도 합작한다. 모든 일은 공산당을 숙청하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지 않겠는가? (...) 당신은 절대로 우한에 가서는 안 된다. 가면 절대로 나올 수 없다. 그때 당신이 공산당의 도구가 안 되겠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만일 정말 본당을 위한다면 지금부터 난징으로 가서 우한의 중앙집행위원에게 난징으로 오도록 요청해야 한다. 만약 우한으로 가버리면, 국민당의 단결은 상실되고 당신은 본당의 죄인이 된다."

결국 왕징웨이는 국공합작의 지속을 원하며 이를 위해 중재에 나서겠다는 원론적인 입장 표명에서 끝났고, 장제스의 통전에 대해서도 병이 낫지 않아 일반당원 자격에서 종사하고자 할 뿐이라고 대답하면서 장제스의 요구에 승낙하지 않았다. 왕징웨이는 중산함 사건 이후로 장제스와 관계가 매우 껄끄러웠으며, 왕징웨이 지지 세력도 장제스와 적대적인 우한의 국민당 좌파였다는 점에서, 왕징웨이의 선택지는 우한의 입장을 추종하는 쪽으로 이미 좁혀져 있었다.

결국 1927년 4월 4일 저우언라이와 회담한 왕징웨이는 왕징웨이- 천두슈 연합성명을 4월 5일 발표하여 국민당 우파를 비난하며 공산당을 옹호함으로 장제스의 제안에 대한 확고한 거절을 드러냈다. 다만 이 공동선언에서 왕징웨이는 중국에서 무산계급 독재가 이뤄지진 않을 것이며 공산당이 국민당을 타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군대가 노조를 탄압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 천명했다. 또한 공인규찰대가 조계로 난입해서 북벌을 방해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장제스의 제안은 거절했지만 그렇다고 장제스와 완전히 돌아서진 않은 것이다.[11] 이에 우징헝 등의 우파 인사들이 격노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의 공치를 인정한 것이냐고 질의했으나, 왕징웨이는 공치를 말한 적이 없다고만 대답한 다음에 그들의 상하이 체류 권고를 거부하고 우한에 가서 확대회의를 개최하도록 주선하여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통전을 발표한 다음에 4월 6일 밤에 기선을 타고 비밀리에 우한으로 떠났다. 장제스는 왕징웨이가 자신과 합작하기로 해놓고 그것을 깨뜨렸다면서 그의 태도에 놀라움을 표했다.[12]

우한에 도착한 직후 왕징웨이는 다시 연설을 통해서 국공합작의 3대 노선인 연소,용공,부조농공이 깨지는 것은 모든 것이 깨지는 것이라 연설하며 국공합작을 옹호했다. 다만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회유는 거절했으나 상하이에서의 발언에서도 그렇고 공산당이 국민당을 장악해나가는 현실에 대해서 불편해 하면서 공산당에 대해서 계속 회의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이후 왕징웨이는 자신의 통전대로 정말로 상하이와 우한이 모두 참석하는 확대회의를 제안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어쨌거나 상황의 중대함을 인지한 장제스는 3월 말부터 모종의 결심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리지선에게 상하이로 와서 중대한 일에 대해 상의하자고 전보를 보내고 리쭝런 등에게 '거사'에 대한 의견을 타진하기 시작한 정황 등으로 뒷받침된다. 이때 리지선은 적극적 찬성을, 리쭝런은 소극적 찬성을, 청첸은 탕성즈가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보적인 반대 의사를 표출했다. 청첸은 아예 4월 1일 우한으로 가서 4월 4일에 장제스의 거사 계획에 대해 고변하기에 이른다.

2.5. 장제스와 청방의 결탁

그러던 중 3월 26일 상하이 암흑가의 3대 거두 중 한 사람인 황진룽(黃金榮)이 장제스를 찾아왔다. 그는 이미 천치메이의 소개에 따라 1926년 장제스와 만난 적이 있었는데[13] 황진룽은 장제스에게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곧 이어 상하이 암흑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큰 귀’ 두웨성(두월생)이 장제스를 찾아왔다. 두웨성은 상하이 내부의 공산당을 경계한 프랑스의 법적,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아 공진회라는 민병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두웨성은 프랑스 경찰국장 피오리와 영미 공동조계지 공부국장 스털링 페선든과 회동하여 만약 더 많은 무기를 준다면 공산당을 제압해 주겠다고 제안하여 양국의 승낙을 받은 바가 있었다. 두웨성 역시 장제스에게 협력을 약속했다.

한편 4월 초부터 공산당과 공인규찰대에 대한 각종 유언비어가 돌면서 상하이 시민들의 불안은 가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유언비어에는 공인규찰대가 조계를 공격하여 무력으로 회수할 것이라거나, 총공회가 총파업을 실시할 예정이라는 것이나, 동로군이 규찰대를 무장해제할 예정이라는 것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3월 24일의 난징 사건의 영향으로 인해 규찰대가 조계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게다가 규찰대의 조직과 기율이 엉망이었다는 점에서 불안은 가중되었다.[14]

4월 4일에는 총공회 명의로 4월 10일에 규찰대가 조계를 공격할 것이니 조계지 내부 중국인들은 모두 그전에 대피하라는 가짜 공고문이 각 신문사에 보내지기도 했다. 이에 총공회는 무력 탄압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조계지 무력회수 루머에 대해서 반동파들이 조작한 유언비어라고 주장하고 자신들 단독으로 조계에 진입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선언을 4월 6일 상하이의 각 신문을 통해 발표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계지 무력회수 계획이 단순한 유언비어는 아니어서, 우한에서는 조계지의 평화회수가 기본 방침이었으나, 중국 공산당은 총파업과 더불어 조계지로 쳐들어가자는 계획을 실제로 검토하고 있었다. 오히려 저우언라이는 상하이 쿠데타 이후에 총공회가 스스로 조계지 무력회수를 부인한 것은 반제국주의 정신이 결핍된 모습이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장제스 바이충시를 비롯한 군부의 규찰대나 총공회에 대한 입장은 이미 명확한 상태였다. 4월 4일 바이충시가 담화를 발표했는데, 이 담화에는 노조운동이 질서를 파괴해 군사진행을 방해해선 안 되며, 관세자주권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자와 점원들이 지나친 경제요구를 하면 공장과 상점이 파산할 것이기 때문에 공장주, 상점주, 노동자, 점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쟁의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이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후방의 안정과 노사갈등을 중재로 평화롭게 풀자는 것에 있었지만, 장제스에 위협적인 세력이었던 노조 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큰그림이었다는 분석이 강력하다. 장제스 본인도 이날 공산당에 경고를 보냈다.
"현재 중공 분자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우리들의 단결을 훼손하고 있다.(...) 더 이상 교란 행위를 계속하면 어떤 당, 어떤 정파라도 반혁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장제스를 크게 견제하고 있던 우한 중앙 및 보로딘과는 달리, 코민테른과 소련은 장제스에 대해 낙관하고 있었다, 이는 장제스가 심복 사오리쯔를 보내서 소련과의 우호 관계를 돈독하게 하려 한 것도 있었고[15] 국민당 좌파가 주도하는 반제운동이 너무 과격하기 때문에 제국주의 열강의 무력간섭을 불러와 국민혁명을 무산으로 돌릴 가능성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4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장제스 제거를 요구하는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에게 다음과 같이 교시했다.
"우파 사람들은 장쭤린 지배 하의 장군들과도 관계를 갖고 있어,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또 타격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을 비밀리에 혁명 속에 끌어들일 수 있는가를 비상히 잘 이해하고 있다. 또 우파 사람들은 돈 많은 상인들과도 관계가 있어 그들로부터 돈을 모아올 수가 있다. 우리에게 복종하고 있는 우파와 왜 지금 갈라서야 하는가?(...) 어찌되었든 장제스는 제국주의자와 싸우고 있지 않은가?(...) 혁명을 위해 그를 마지막까지 이용해야 한다. 레몬처럼 고갈할 때까지 즙을 짜내고, 그 후 집어던지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스탈린도 우한도 장제스를 너무 얕잡아 보고 있었다.

3. 전개

3.1. 난징 점령과 우한의 대응

"공산주의자들과 반란의 무리들은 너무나 무정하고 잔인하다. 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1927년 4월 10일 장제스의 일기.

장제스는 총사령관 명의로 동로군 1사단과 2사단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당시 이들은 공산당원 총정치부 주임인 덩옌다가 장악하고 반장제스·반 선전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로군 2개 사단을 잃으면서 공산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공산당은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총정치부 상하이 판사처에 응원을 요청하여 4월 5일부터 무장봉기를 논의하였다. 이에 장제스는 3일 정도가 걸릴 것이라던 바이충시의 발언보다도 더욱 신속하고 과감한 행동에 나섰다.

4월 6일 장제스는 바이충시를 전선 총지휘관에 임명하고 리쭝런에게 명령하여 7군을 난징으로 이동시키고 난징에 주둔한 2군과 6군은 강북으로 이동시켰다. 일부 하급군관들이 장제스의 이동명령에 반대하여 우한의 청첸에게 전보를 쳐서 문의하였으나, 장제스의 특무대가 전보를 가로채서 전보가 전달되지 못했고, 상부와 연락을 하지 못한 2군과 6군은 장제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4월 7일과 8일에 걸쳐 2군과 6군이 난징을 떠나 도강했다. 그리고 장제스는 상하이의 1군 1사단과 21사단을 재배치시키고, 26군과 1군 2사단을 상하이로 진입시켰다. 이때도 일부의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순조롭게 강행되었다. 8일부터는 신문에 대한 검열을 시작했다. 4월 9일에는 상하이에 계엄령을 선포, 총정치부가 원래 목적과 달리 소수 공산당과 친소분자들의 독점물이 되어 국민혁명을 방해하고 있다는 이유로 총정치부를 폐쇄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바이충시를 계엄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4월 8일 밤 군대를 이끌고 난징으로 향했다. 그리고 충성심이 의심스럽던 난징 주둔군 3개 사단을 포위하고 숙청을 감행한 후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난징 사건을 주도한 제6군 정치부 주임 임조함은 체포를 피해 탈출했다.

9일 오후, 난징 시내의 쑨원주의학회 소속 청년[16]들이 호응하여 공산당원들을 공격, 20여명의 주요 간부들을 체포하여 장제스에게 인계했다. 당황한 공산주의자들은 난징시내 체육관에서 준비하고 있던 영왕 대회를 영장 대회로 바꾸어 사태를 모면하려고 했지만 장제스는 단호했다. 난징을 장악한 장제스는 왕징웨이, 탄옌카이, 청첸, 허잉친, 후한민, 주페이더 등에게 전보를 보내 알렸다.
"나는 오늘 난징에 진주했다. 동남 각지는 이미 평정했으나, 북벌은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다. 긴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다. 동지 제위가 4월 14일 이전에 난징에 와서 일체의 일을 협의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공산당은 4월 10일 반혁명파 숙청 난징 시민 대회를 열어 반동분자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하도록 요구하는 결의를 통과시킨 후 총사령부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그날 밤 난징 사모항의 민가에서 열린 공산당 간부회의를 국민당이 습격해 총파업을 꾸미던 이들을 일망타진함으로써 난징의 공산당 세력은 거세되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난징을 장악한 장제스의 다음 목표는 상하이였다.

한편 3월까지 우한에서는 장제스에 대해 대단히 낙관하고 있었다. 이들이 장제스를 크게 핍박하긴 했지만 장제스와의 합작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아니었고,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국공합작 기조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가 군사정변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취할 것으로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우한에서는 장제스가 극단적인 반대는 하지 않고 북벌을 보이콧하는 수준의 저항을 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3월 30일 장제스와 허잉친이 신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것 같다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도 그저 강소성 정부 조직에 관한 지역적인 문제라고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하지만 4월부터 장제스가 공인규찰대를 해산하려 들자 이에 경계심을 가지고 당에서 제명시키겠다고 위협하고 장제스에 호응하여 상하이로 간 리지선 등을 징계하는 등 강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보로딘은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반동파의 중심이 되고 있다고 비난하며 상하이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러면서도 정작 장제스가 정변을 일으킬 때를 대비한 논의는 없었다. 그나마 이런 위협적인 인식도 어디까지나 우한의 얘기고 상하이, 난징 현지에서는 난징이 장제스에게 장악되는 4월 9일까지도 돌발적인 사태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4월 4일 이후로 장제스가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청첸 등의 정보가 들어오자, 우한은 4월 4일로 예정된 북벌 출사 행사를 연기하고, 4월 5일 국민혁명군 편제를 개편,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직을 폐지하고 장제스를 1집단군 사령관으로, 펑위샹을 2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4월 7일의 중앙정치위원회 긴급회의에서는 오옥장이 6군을 난징 방어에 투입하고, 2군도 난징으로 돌아가게 하여 장제스를 견제하게 해야 하며, 4군과 11군을 파견해 장제스를 무장해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랬다간 열강과의 충돌이 예상된다는 반대와 왕징웨이가 우한에 오도록 기다리자는 반대 의견이 지배적이라서 난징 사건의 해결을 기다려보자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후 우한에서는 난징-상하이에 대한 선제적 군사공격 옵션과 북벌 재개를 놓고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진 않았다.

3.2. 쿠데타의 거행

파일:1927년장개석.jpg
1927년 4월 타임지 모델을 장식한 장제스
"4월 12일 공산당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국민혁명군은 현지의 노동조합 및 상공회의소와 힘을 합쳐 적색 노동자규찰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공산당의 파괴활동을 감시했다. 상하이는 비로소 평정을 되찾았다."
장제스의 일기.

4월 11일 밤 8시 두웨성은 규찰대 지도자인 왕숴화를 초대했다. 암흑가를 거스르기 부담스러웠던 왕숴화는 이 초대에 응했다. 그날 밤의 모임에는 두웨성 뿐만 아니라 상하이 암흑가의 3대 거물 중 또 다른 한 사람인 장샤오린[17]도 참석했다. 장샤오린은 왕숴화에게 규찰대를 해산하고 전향할 것을 요구했다. 왕숴화가 거절하자 청방 조직원들이 왕숴화를 구타한 다음에 생매장해버렸다.[18] 이후 프랑스 조계지에 청방 조직원들이 모여 일당을 지급받고 무장을 시작했다.

4월 12일 새벽 2시, 상하이 계엄사령관 바이충시 휘하의 26군이 행동에 돌입했다. 26군은 공인규찰대 본부인 갑북의 상무구락부와 갑북총공회 본부 등을 공격했다. 새벽 4시, 무장을 마친 두웨성의 민병대 2천명이 백색 바탕에 검은색 공(工)자가 씌여진 완장을 두르고 군경의 협조를 받으며 상해총공회 본부를 포위했다. 공격을 알리는 나팔과 군함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남색 옷을 입은 자들이 노동조합 지부와 노동자들의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규찰대는 나름 열심히 저항했으나 아침 8시가 되자 모두 제압되었다. 청방과 홍방은 사로잡은 공산당원과 노조 조직원들을 참살하고 기관차의 화구에 집어넣는 등 잔혹하게 처형했다. 4월 12일~13일 간의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에서는 여러 기록이 교차되고 있는데 배경한 교수는 군인, 시민을 합쳐 42명이 사망하고 60여명이 부상당해 총 피해는 103명 정도였다는 1927년 4월 18일자 시사신보의 보도를 따르고 있다. 레이 황 교수는 4월 12일에 300명 정도가 사망했을 것이라 보았다. 이날 국민당은 규찰대가 가지고 있던 소총 3천정과 기관총 20정 등 막대한 양의 무기를 압수했다.

이외에도 오송의 성공회, 국립정치대학 숙사 등의 공산당 아지트가 함락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운좋은 인물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산당 간부들이 체포되었다. 왕숴화와 더불어 대표적 노조 지도자였던 나역농도 체포되어 총살되었고 목에 8만 위안[19]이나 되는 현상금이 걸린 저우언라이도 상무인서관의 종업원 클럽에서 체포되었지만 가까스로 탈출했다.[20]

날이 밝자 경찰은 400명이 죽고 300명이 체포되었다고 발표했는데 국민당 측은 후일 이 때 사망자는 90여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일본 외무성 또한 국민당의 주장을 수용했다. 장샤오린의 비서 진군이 새로운 상하이 공해 연합총회를 설립하여 기존 노조를 대체했고[21] 상하이의 60여개 상업 단체가 장제스와 바이충시에게 축하 전보를 보냈다. 혁명군 측은 새로 조직된 노조를 중심으로 노조 합법화, 최저임금제 실시, 재해보상금 지급, 노사위원회 설치 등을 약속하며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하고 노동자, 농민을 위한 정책을 옹호하겠으며 공장주와 자본가가 노동자를 억압할 수 없게 하겠다고 선전했다. 다만 노사분규는 따로 정당한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총공회는 규찰대의 무장해제에 대응하기 위해 13일부터 총파업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군대의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수많은 간부들이 체포되는 공포 분위기와 더불어 애초에 공산당을 열렬히 추종하고 장제스를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라 경제적인 투쟁에 집중하던 노조들이 군부의 약속에 포섭됨에 따라 수많은 노조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결국 전과 같이 총파업을 실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13일의 노조의 저항은 생각보다 매우 허약한 것이었다. 갑북 청운로 광장에서 시민대회가 열러 공산당원들이 "새 군벌과 제국주의자가 우리들 노동자를 무장해제 했다. 우리들 노동자를 죽였다. 우리의 위원장 왕숴화도 살해되었다."고 연설한 다음에 26군 2사단 사령부로 몰려가서 무기 반환을 요구하며 26군과 충돌했으나, 군대가 기관총을 발사하자 300명의 사망자를 내고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두웨성의 조직원들과 장제스의 병사들이 온 상하이를 수색하여 공산당원들을 색출, 다섯개 좌익 조직이 공격 당해 1천 명이 체포되었고 집회와 행진이 금지되었다. 14일에는 상하이 임시 시정부와 상하이 당부, 상하이 학생연합회 등 기존에 공산당이 장악하던 여러 조직이 철저히 소탕되었고 15일에 노조는 스스로 파업을 취소하였다.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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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군에 의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공산당원

4.1. 난징 국민정부의 수립

이후 4월 15일 항저우와 광저우에서도 이에 부응한 반공 쿠데타가 일어나 공산당원들이 체포, 숙청되었다. 당연하지만 열강은 이를 크게 환영하면서 상하이에 주둔한 육전대 병력을 제공하여 수색을 돕는 등 협조했다. 상하이 쿠데타에 대해서는 잔학한 쿠데타라는 비판과 공산당에 대한 승리라는 찬반 평가가 격렬했다.

이후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는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우한에서는 4월 17일 장제스에게 출당 조치를 내린 다음에 모든 직위에서 해임시키고 인민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장쭤린이라는 공동의 적 때문에 실질적인 군사행위는 신속히 이뤄지지 않았다. 장제스는 후한민 등 국민당 우파와 합작하여 4월 18일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자세한 것은 국민당의 1차 북벌 문서의 해당 단락을 참조.

4.2. 사상자 수

상하이에서의 총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는데, 낙전화는 2천명설을, 장개석비록은 5천명설을, 당시 상하이에 있었던 에드거 스노우는 오천명에서 만명이 죽었다고 추정했고 작가 한쑤인은 8천명이 죽고 노동자들의 딸과 아내 6천명이 매음굴에 팔려나갔다고 보았다. 조너선 펜비는 3만 4천명이 죽고 4만명이 부상당했으며 2만 5천명이 사로잡힌 것으로 판정되었다는 수치를 인용하고 있다. 다만 펜비의 이러한 서술은 상하이 쿠데타에 관한 소련 정보부의 보고서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상하이 쿠데타 당시 공산당원들이 많이 처형된 상하이 전 육군감옥 부지의 4.12 석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고 한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깡패들을 동원해 자베이(閘北)와 난스(南市) 등에서 노동자 규찰대를 습격하게 했다. 군대를 동원해 노동자 규찰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는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다음날 국부군은 바오산로(寶山路)에서 시위 군중을 도살했다. 중국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이 4·12 쿠데타에서 공산당원과 혁명군중 300여 명이 살해됐고, 500여 명은 체포되었으며 5천여 명은 실종됐다.

장제스의 비서 천리푸조차도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시인했고 상하이 쿠데타와 연동되어 일어난 중국 각지의 반공 군사행위로 인하여 총 사망자는 30만 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때문에 상하이 학살로도 불린다.

하지만 국민정부의 공식 발표나 열강의 외교부 조사를 보면 소련이나 여러 작가들의 주장에 비해 판이하게 적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장제스의 군사행위로 사망한 숫자로만 국한한다면, 그 숫자는 학계에서의 논의가 수천~수백 단위로 줄어들고 있다. 신상초의 중국공산주의운동사는 최소 1천에서 최대 3천으로 추정하고 있다. 혁명사관을 따르는 일부 서적의 30만 운운은 4.12 정변 이후 영한분열, 국공결렬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적색 테러, 백색테러에 의한 사망자를 일방적으로 4.12 사건의 사망자로 분류하는 감정적이고 비학술적인 태도다. 상하이 학살을 주장하는 쪽은 공산당이나 좌파에 편중되어 상하이 쿠데타를 열강의 사주로 일어난 반동 행위 정도로 폄하하며 그런 주장을 하는 일이 많다.

5. 여담

"한 사람을 만들려면 아홉 달이 필요하지만 죽이는 데는 단 하루로 족해. 우리는 그걸 뼈저리게 깨달은 셈이지. 그러나 메이,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는 아홉 달이 아니라 6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해. 그런데 그 인간이 다 만들어졌을 때, 이미 유년기도 청년기도 다 지난 한 인간이 되었을 때, 그때는 이미 죽는 것밖에 남지 않은 거란다."
- 인간의 조건 에서
“우리의 모든 세계가 무너졌다”
- 독립운동가 김산 [22][23]

조너선 펜비는 상하이의 자본가들을 상하이 쿠데타의 '두번째 희생양'으로 묘사하며 장제스에게 그들은 그저 유용한 자금 출처로만 보였다고 쓰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그의 기술로는 동시대 작가 오언 채프먼의 기록이 있는데 채프먼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부유한 중국인도 자신들의 집에서 체포되거나, 거리에서 묘연히 실종되었다가 가난뱅이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압제자들을 밀고하기 위해 입을 여는 사람은 결코 없었다. 백만장자도 공산당원으로 간주되어 체포되었다."

실제로 장제스는 금융위원회를 설립하여 상하이의 자본가들로부터 막대한 양의 자금을 조달했는데, 이는 연간 2000만원에 달하는 금액으로 이후 장제스가 빠진 우한정부가 거둬들이는 세입의 2배가 훨씬 넘는 금액이었다. 조너선 펜비는 장제스가 상하이의 거물 자본가들의 자식들을 상대로 유괴까지 감행했다고 기술한다.

중국 공산당의 선전에선 이 공산당원과 규찰대들을 장제스에게 곱게 바쳤음에도 권력욕에 찬 장제스에게 배신당한 순진무구한 인물들로 묘사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레이 황 교수는 이러한 기존 시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러나 무장한 노동자들이 그렇게 미숙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들이 잘못된 지도를 받아 경계심을 완전히 풀어놓았기 때문에 희생되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며칠 전부터 긴장 상황은 이미 폭발 지경에 다다라 있었다. 4월 12일까지 급진주의자들의 행동과 그에 반대하는 행동이 여러 도시에서 폭발했다. (장제스의 대응 조치를 설명) 이런 조치는 최후의 행동이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77페이지.

황푸군관학교 제5기 졸업생들은 참으로 혼란을 겪었는데 우한에서 졸업을 맞이한 3,4,5 중대 소속 800명의 생도들은 군벌 장제스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윈다이잉의 졸업 연설을 들은 반면 난징에서 졸업을 맞이한 1,2,6중대 소속 1480명의 생도들은 공산주의자들을 토벌해야 한다는 장제스의 메시지를 허잉친을 통해 들었다.

이원복은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현대사 편에서 이 쿠데타가 서구 열강의 사주란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현대사편은 사실관계 자체는 그럭저럭 잘 서술했어도 해석에 있어서 80년대에 최고조를 달렸던 혁명사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한계가 있다.[24] 하지만 상하이에 이권을 가진 서구 열강이 사주까지는 몰라도 방조내지 묵인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편 이 쿠데타는 장제스가 자신의 대가 끊어질 것을 각오하고 벌인 쿠데타였다. 왜냐하면 장제스의 유일한 아들인 장징궈가 당시 소련 유학 중이었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공산당을 쓸어버린 후에 소련에서 당연히 보복으로 장징궈를 처형할 것으로 알고 자신의 대가 끊어졌다고 한탄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자신의 일기에 "(물론 가족의 대를 잇는 건은 중요하지만) 국가에 해가 되는 자식이라면 없는 편이 더 낫다."라고 서술하였는데, 고자인 탓에 유일한 자식이었지만 (장제스 입장에서는) 국가를 위해 자식을 위험에 빠뜨리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장제스는 얼마 후 이즈베스티야와 프라우다에 장징궈가 장제스를 맹비난하는 편지를 올린 것을 보고 "소련이 장징궈를 죽이진 않겠구나"하고 매우 기뻐했다.

이 쿠데타 소식들을 들은 스탈린은 그제야 장제스가 '즙을 다 짜 낸 레몬'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국공합작과 중국의 적화에 열심이었던 카를 라데크, 아돌프 요페, 안드레이 부브노프, 게오르기 퍄타코프 등은 이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이들 파벌의 수장 레프 트로츠키도 결국 스탈린을 이기지 못하고 몰락한다. 후일 트로츠키는 코민테른을 이끈 니콜라이 부하린과 그리고리 지노비에프를 크게 비판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또한 항일운동을 위해 국민당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한인 역시 이 사건에 휘말려 많은 피해를 보았는데, 김산에 의하면 4.12 상하이 쿠데타에 이은 4.15 광저우 쿠데타 때 한인 20여명이 좌경혐의자로 체포되어 14명이 육군감옥에서 처형되었다고 증언하였다.(아리랑, 132면)

6. 매체에서

7. 참고문헌

7.1. 저서

7.2. 논문

8. 관련 문서

8.1. 인물

8.2. 사건

8.2.1. 국민혁명



[1] 해석하면 '상해( 상하이시)정변'이다 [2] 흔한 오해 중 하나로 4.12 쿠데타로 국공합작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것이지만 왕징웨이와 우한 정부의 국공합작은 3개월 정도 더 유지되었다. 하지만 코민테른의 국민당 적화 의지가 폭로되고 우한 정부가 신뢰했던 펑위샹도 반공 성향을 드러내면서 왕징웨이도 분공을 선택해 난징 정부와 합쳤고, 잠시 더 국민당 혁명위원회의 명의를 취했던 공산당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 명의를 완전히 버림에 따라 이로써 국공합작은 완전히 붕괴된다. [3] 부연설명을 하자면 국민당 좌파, 우파는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이 임의로 지칭한 것으로 당사자들은 자신들을 좌파, 우파라고 한 적이 없다. [4] 장제스도 불과 얼마 전까진 우한 천도를 지지했다가 정치적 입장 때문에 갑자기 말을 바꾼 것이라 궁색한 면도 있었다. 자세한 것은 천도논쟁 문서 참조. [5] 장제스는 3월 30일에는 불법노조운동을 국민혁명군이 책임지고 진압하겠다고 발언하였다. [6] 아마도 중산함 사건 이전, 장제스가 친소용공의 입장을 추종하던 시기의 발언으로 추정. [7] 노조 합법화, 임금 인상, 8시간 노동제 실시, 시간 외 노동 수당 지급, 파업의 자유, 임의 해고 금지, 재해 보상, 작업 환경 개선 등등. [8] 왕징웨이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1926년 10월 하순부터 귀국하려 했으나 몸이 아파 자꾸 몸져눕는 바람에 몇 번이나 연기되었다 한다. 10월 하순에 한번 병에 걸렸고 11월 하순에 다시 베를린까지 갔을 때 또 병에 걸려 파리로 돌아와 와병했다고 한다. 1927년 2월 말에야 건강을 회복하여 독일, 폴란드, 소련을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온 다음 거기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갔다는 것이 왕징웨이의 주장이다. 그나마도 모스크바에서 늑장 부리다가 우한 정부와 장제스의 독촉에 5일만 머무르고 달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소련 정보부에서는 장제스가 왕징웨이 귀국을 저지하기 위해 그에게 전보를 보내 오지 말라고 요구했고 이 때문에 왕징웨이가 귀국을 그만두었다는 보고서를 작성한 적이 있는데 왕징웨이의 병환설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설명이 가능한 가설이긴 하다. [9] 공산당을 불신하면서도 협력관계를 유지하고자 한 이유는 당시까지만 해도 국민당에게는 소련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0] 이 제안은 4월 3일 장제스의 통전을 통해 공개되었다. [11] 왕징웨이는 훗날 이것이 우한 중앙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했는데, 코민테른과 우한 중앙의 장제스와의 합작 유지 방침을 보면 거짓말로 보이진 않는다. [12] 장제스의 주장을 따르면,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합작 요구에 응했다는 것이지만, 리쭝런 등은 왕징웨이는 일관적으로 국공합작을 옹호하며 우한 측의 입장을 대변했다고 한다. 배경한 교수는 왕징웨이의 일부 발언을 장제스가 편파적으로 해석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13] 장제스가 처음으로 따랐던 천치메이는 혁명가인 동시에 상하이 암흑가의 거물이라서 장제스에게 청방의 조직원들을 많이 소개시켜주었다. [14] 이는 공산당 역시 인정한 것이라서 공산당 내부에서 규찰대 개조의 움직임이 있었다. [15] 1926년 사오리쯔는 소련을 방문해 "국민당은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그 역사적 역할을 완수한다."라고 까지 했다. [16] 일각에서는 이들을 그저 청방과 홍방의 깡패들로 보기도 한다. [17] 황진룽, 두웨성, 장샤오린 이 세 사람이 상하이 암흑가의 3대 거물이었다. 장샤오린은 이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본군 붙었다가 두웨성에게 암살되고 49년 상하이가 공산군에게 점령되자 두웨성은 홍콩으로 탈출한다. 황진룽의 경우 공산당 점령 후에도 상하이에 남아 있었는데, 상하이 인민정부는 황진룽의 사업 중 도박장과 사창가를 제외하고는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시민들의 불만은 컸지만 인민정부는 모른 체했다. 1951년 반혁명 소탕운동이 시작되자 집 앞에 군중이 몰려와 ‘비판대회에 나오라’ 외쳤으며 황의 악행을 고발하는 고발장이 산처럼 쌓여 갔다. 다급해진 황진룽은 반성문과 함께 청방 간부들의 명단을 공안국에 제출했고 사회봉사를 하겠다며 그의 영화가 서린 대세게의 문 앞을 빗자루를 들고 쓸기 시작했다. 인민정부는 그 모습을 공개했다. 이로써 인민정부의 골칫거리인 청방이 몰락했다. 그는 그렇게 3년을 살다가 85세의 나이로 저 세상으로 갔다. [18] 교살했다고 묘사한 자료도 있다. [19] 장개석비록에서는 위안이 아니라 달러였다고 한다. [20] 체포된 것까지는 여러 기록이 일치하고 있으나 어떻게 탈출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산케이 신문이 중화민국 비밀문서를 바탕으로 내놓은 <장개석비록>에 따르면, 저우언라이는 사형선고를 받고 상하이의 주요 신문인 신보와 신문보에 공산당 탈당 광고를 실은 후 풀려났다고 적혀 있으며, 조너선 펜비의 장제스 평전에서는 장제스가 옛정을 생각하여 풀어주라고 했다 한다. 바르바라 바르누앙의 저우언라이 평전에는 왕숴화처럼 청방의 계략에 넘어가 체포되었으나, 저우언라이 체포 지시를 받지 못했던 현장 지휘관이 석방했다는 설을 따른다. 당연하겠지만 저우언라이는 자신이 거짓전향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부정했다. [21] 그는 또한 상하이의 국민혁명군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22] 당시 북벌에 참여했던 한인들은 북벌이 끝나면 한반도로 진군해서 일본을 몰아 낼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알수 있는데 국민당 입장에선 굳이 지금 중국내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들을 상대하는것도 벅찬데 그리고 미국, 영국 과 같은 열강들의 비판까지 받는 상황에서 굳이 일본까지 확전할 이유도, 여유도 뭐도 없는 것이다. 그때 당시 한반도 독립운동가들의 세계사적 국제정치역학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제한적이었을 수도 있음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23] 그러나 이건 중국 측에서 확전을 실행한다는 전제 하의 비판이고 실제로는 일본이 한반도 다음으로 만주를 노리고 있음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즉 북벌이 완수되면 만주를 안정화하려는 중국과 만주를 침략하려는 일본의 대결은 (실제 역사에서 그랬듯이) 필연이고 중국에 거대한 시장과 이권을 확보한 열강으로서는 기존의 분할을 무시하고 만주, 나아가 중국 대륙까지 독점하려는 일본 편을 언제까지 마냥 들어줄 수는 없다는 것. 실제로 태평양 전쟁의 경제적 원인인 ABCD 포위망은 중일전쟁을 배경으로 형성되었으니. 재중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국민혁명에 투신한 것을 국제관계에 대한 무지로 치부하기보다는 나름대로 장기적인 안목이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 시점에 대한 예측 그리고 정작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의 분열이 문제였던 거지. [24] 가령, 4.12 정변에 대해서는 상하이 자본가들과 열강의 작품이라는 기존 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