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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1 22:11:46

사마굉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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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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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팽성왕(彭城王)
司馬紘 | 사마굉
작위 당읍현공(堂邑縣公) → 고밀왕(高密王) → 팽성왕(彭城王)
사마(司馬)
이름 굉(紘)
위덕(偉德)
부모 친아버지: 사마석(司馬釋)
양아버지: 사마거(司馬據)
생몰 ? ~ 342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진의 황족으로 자는 위덕(偉德).

2. 생애

팽성강왕(彭城康王) 사마석의 손자였다. 사마석이 훙서한 뒤 사마굉의 형인 사마웅이 작위를 이었는데, 사마웅은 327년 소준의 난에 동조했다가 329년 소준의 난이 평정된 뒤 처형되었다.

사마굉은 처음에 당읍현공(堂邑縣公)에 봉해졌다가 고밀왕(高密王) 사마거(司馬據)가 훙서할 때 후사가 없어서 사마거의 양자로 입적했다. 원제 사마예가 즉위한 뒤 산기시랑(散騎侍郞)으로 임명되고 익군교위(翊軍校尉), 전장군(前將軍)을 역임하였다. 사마웅이 처형된 뒤 팽성왕으로 봉해졌으며,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임명되고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으며, 뒤에 대종정(大宗正), 비서감(秘書監)을 역임하였다.

사마굉은 병을 앓고 있어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상소를 올릴 때는 이를 공경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문을 닫고 겸양하면서 인장과 관모를 돌려준 뒤 《두문부(杜門賦)》를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냈다. 이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전임되고 대종사(大宗師)를 겸임하였다.

하지만 사마굉은 갈수록 병이 심해져서 방종무도해졌는데, 군사를 약탈하거나 속관들을 해치거나 악담을 퍼부을 때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이 없었다. 또한 수레에 올라 궁궐의 남문까지 뛰어들여 태극전(太極殿) 앞까지 이르기도 했다. 결국 어사중승(御史中丞) 차관(車灌)이 사마굉을 면직시키고 사마굉의 봉국을 엄중히 방비해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차관의 주청에 따라 사마굉은 면직되었다.

342년에 훙서하여 산기상시(散騎常侍),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추증되었다.

사마굉은 슬하에 사마현(司馬玄)과 사마준(司馬俊)이 있었다. 사마현이 훙서한 뒤 아들인 사마홍지(司馬弘之)가 작위를 이었고 산기상시를 역임하다가 389년에 훙서하였다. 이후 팽성국은 사마소지(司馬邵之), 사마숭지(司馬崇之)로 이어졌다가 사마숭지의 아들 사마집지(司馬緝之)의 대에 이르러 420년 유송이 들어서면서 폐지되었다.

사마준은 자가 도도(道度)로 고밀왕 사마략의 양자로 입적했으며, 산기상시를 역임했다가 371년 훙서하여 공(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뒤에 사마준의 아들 사마순지(司馬純之)가 작위를 이었고 임천내사, 사농경, 소부경을 역임하다가 412년 훙서하여 경(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사마순지의 아들 사마회지(司馬恢之)가 작위를 이었다가 420년 유송이 들어서면서 고밀국은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