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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5 21:33:55

부산진성

파일:정부상징.svg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
<colbgcolor=#315288> 부산진성
釜山鎭城 | Busanjinseong Fortress
파일:부산진성_220906.jpg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구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24,198㎡
지정연도 1972년 6월 26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링크 공식 홈페이지

1. 개요2. 역사3. 위치 및 구조4. 정공단
4.1. 충장공정발전망비
5. 자성대왜성
5.1. 외곽부(外郭部) ・ 외성(外城)
5.1.1. 금루관5.1.2. 부산진성 서문 성곽우주석5.1.3. 교상각5.1.4. 진남문5.1.5. 진동문5.1.6. 구장루5.1.7. 공진관5.1.8. 영가대
5.2. 주곽부(主郭部) ・ 내성(內城)
5.2.1. 제남루5.2.2. 주해루 ・ 제3곽(三ノ郭)5.2.3. 제2곽(二ノ郭)5.2.4. 제1곽(一ノ郭)
5.2.4.1. 천수대5.2.4.2. 승가정5.2.4.3. 천장군 기념비
5.2.5. 최영 장군 사당
6. 가치7. 교통8. 외부 링크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부산광역시 동구에 위치했던 조선시대 수군진 성곽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가장 먼저 침공한 장소로 유명하며, 도시화와 매립으로 성곽이 거의 소실된 지금까지도 부산진구 동구의 지명 곳곳에 이름을 남기고 있어 부산광역시 주민들은 진(鎭)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 대일(對日) 외교와 국방의 최전선에 서 있던 곳으로 여타 수군진보다도 그 위상이 높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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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e34cc_6cd9e92b89bb40a689b5c9509b6913ee_mv2.jpg
『해동제국기』「동래부산포지도」 『부산진순절도』, 변박, 1760
부산포 지역은 예로부터 지리적으로 일본 대마도와 통하기 가장 좋은 포구였다. 이에 따라 일본인과의 교류가 잦았으며, 왜구의 피해에 가장 먼저 노출되는 지역이기도 했다. 이에 1397년(태조 6) 동래현 지역에 동래진(東萊鎭)을 설치했고, 1402년(태종 6) 부산포에 왜구가 쳐들어와 수군천호 김만보 등 11명을 살상하는 등 침략이 끊이지 않자 조선 정부는 1407년 교린책의 일환으로 부산포와 내이포를 개방해 일본인들이 왕래하며 무역하는 것을 허락했다. 1421년(세종 3) 부산진에 경상좌도 도안무처치사영(都按撫處置使營)를 두었고 1426년에는 울산의 염포까지 포함하여 삼포(三浦)를 개방하는 계해약조가 성립되면서 도안무처치사를 도만호(都萬戶)로 개편했는데, 그 휘하에 11개의 만호영을 거느렸으며 33척의 병선과 1,799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수군진의 규모와 위상이 커지는 것을 알 수 있다.

1459년(세조 5) 도안무처치사영은 보안을 위해 울산 개운포로 이전하지만, 1466년 진관 체제가 정비되면서 부산진에는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1]가 이끄는 거진(巨鎭)이 다시금 설치되었다. 1483년(성종 14) 부산진 첨사 설순조(薛順祖)가 부산진을 거진에서 주진(主鎭)으로 승격시켜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대신 기존에 종3품이던 부산진 첨사직을 정3품 당상관으로 승격시켰다. 또한 고조되는 일본인들과의 마찰을 고려해 연해지방에 있던 수군진에 성곽을 쌓았는데 1490년 8월 목책으로 되어 있던 부산진의 성곽도 석성으로 보강하면서 조선전기 부산진성이 되었다. 1510년 삼포왜란과 1544년 사량진왜변이 발발하자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는 경색 국면에 접어들었고, 결국 1592년 5월 23일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리는 부산진 전투가 터지며 이튿날 부산진성은 함락, 당시 부산진 첨사 정발을 포함한 거의 전 병력이 전사하고 말았다.

부산진에 이어 동래부까지 함락시킨 일본군은 한양으로 진격하는 동시에 곧바로 부산진성을 허물고 후방 본진으로 사용할 부산포성을 쌓는다. 부산진성이 위치했던 증산(甑山) 정상에 본성(本城)을 쌓고는 산비탈 전체를 활용해 진영을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증산 동쪽 범일천 하구에 솟아 있는 해발 36m의 구릉을 중심으로 데지로(出城)를 쌓아 쌍성(雙城) 구조를 갖추었다. 본성과 데지로는 어머니와 자식 같다고 해서 모성(母城)과 자성(子城)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서 자성대(子城臺)라는 지명이 유래되었고 부산포왜성의 데지로는 지금도 자성대왜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자리는 삼포왜란 당시 부산포왜관이 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파일:img1.saro.jpg
『사로승구도』, 변박, 1748
파일:KYKH006_0000_0003.jpg
『1872년 지방지도』 「부산진지도」
파일:부산진성 전경 1.jpg
19세기 말의 부산진성
임진왜란이 끝난 뒤, 기존의 부산진성은 부산포성을 조성하면서 훼손되었기 때문에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기에 왜성의 성곽을 그대로 이용해 조선후기 부산진성으로 삼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산꼭대기에 위치한 본성은 구조상 조선 측에서 운용하던 성곽 체계와 매우 이질적이었던 데다 면적도 좁아 활용하지 못한 듯하고, 넓게 둘러친 외곽이 존재했던 자성대왜성에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1607년(선조 40) 조선왕조실록에는 두모포왜관의 신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新造倭館入接房屋, 已盡完了, 宴享大廳, 今方竪柱。 而或者疑不造於舊基, 恐致失懽而生怨, 臣之所見不然。自前倭館與釜山, 非在一城中者也。 平時釜山在西邊; 倭館在東邊五里許, 今則釜山鎭, 就倭子所築之城, 移設於倭館舊基之傍, 卽東邊也。今造倭館, 又在於西邊五里許, 與釜山相距遠近, 與平時一樣, 基之新舊, 非所當論, 渠何敢生怨?
새로 짓는 왜관의 서로 붙은 가옥들은 이미 다 [건설이] 완료되었고, 연향대청(宴享大廳)은 지금 기둥을 세우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옛터에다 짓지 않아서 혹시 왜의 환심(歡心)을 잃어 원망이 생길까 두렵다고 의심하지만 신의 소견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왜관과 부산은 한 성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평시에는 부산[진]은 서쪽에 있고 왜관은 동쪽 5리쯤 되는 곳에 있었는데, 지금의 부산진은 왜인(倭人)이 쌓은 성으로 나아가, 왜관의 옛터 옆으로 옮겨진 것이니 바로 동쪽입니다. 이번에 짓는 왜관도 서쪽 5리쯤 되는 곳에 있어서 부산과의 거리가 평시와 일반이니 옛터이냐, 새터이냐는 논할 바가 아닌데 저들이 어찌 감히 원망하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선조실록 1607년 6월 20일자 기사
즉 부산포왜관과 조선전기 부산진성의 위치를 서로 뒤바꾼 것이 두모포왜관과 조선후기 부산진성의 관계이고[2], 부산진성은 곧 자성대왜성을 그대로 취해 운용하였다는 의미이다. 부산진은 조선후기에도 줄곧 첨사진의 지위로서 조선의 남쪽 국경을 지켰고, 두모포왜관 및 후대에 이설된 초량왜관과 연계하여 개항기까지도 중요한 군사 요충지로서 기능했다. 특히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향할 때 부산진에서 출항했기 때문에 중국과의 국경도시였던 의주읍성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파일:1000012740.webp
오늘날 자성대공원의 모습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으로 삼도수군통제영과 각 도의 병영·수영·진영·진보가 폐지될 당시 부산진도 함께 혁파되었다. 이후 초량동을 중심으로 발전한 부산의 근대를 거치며 부산진성은 점점 허물어져 갔다. 1901년에서 1905년 사이 경부선이, 1909년에 부산궤도가 부설되면서 서측 체성이 없어졌고, 조선방직과 시가지가 들어서면서 1940년대에 들어서면 이미 가장자리의 성곽은 말끔히 없어진 채 구릉지에 자리한 왜성의 중심부만이 보존되었다. 1944년 조선총독부는 고시 제14호를 통해 이 중심부를 자성대공원으로 규정했고 지금까지도 도심 속 공원으로 남아 있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주도 아래 부산진성은 부산진지성이라는 이름으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부산진성 서문 성곽우주석은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고 1974년 정화공사를 거쳐 동문, 서문, 장대를 재건했다. 그런데 문화재 명칭이 여러모로 생뚱맞은 이름이어서 오랜 시간 지적이 이어졌다.[3] 2020년에 지정문화재 명칭변경 고시를 통해 부산진지성이라는 이름이 부산진성으로 환원되었다. 2021년부터 래추고주민협의체가 부산진성이름바꾸기 100회차 릴레이캠페인을 진행했으며 2021년 7월 7일 부산시가 이에 호응하여 자성대공원 명칭변경을 추진한다고 보도자료를 배부했다. 2022년에 고증을 거쳐 동문의 건춘문(建春門) 현판이 진동문(鎭東門)으로, 장대에 걸려 있던 진남대(進南臺)라는 현판은 승가정(勝嘉亭)으로 환원되었다. 2023년에는 국가지명위원회에서 개정고시를 발표해 자성대공원도 부산진성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에 이른다.

3. 위치 및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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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란도』[4]에 묘사된 조선전기 부산진성
조선전기 부산진성은 현재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지역으로, 동래현의 남쪽 21리 지점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산포왜성이 있는 증산의 가파른 동남측 사면을 방형으로 두르고 있었던 성곽으로 추측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관방조(關防條)는 부산진성이 둘레 1,689척, 높이 13척의 견고한 성으로 상주하는 왜호(倭戶)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부산포(釜山浦)에 인접하여 해수(海水)가 남문(南門) 부근까지 와 닿았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정발을 기리는 정공단(鄭公壇) 일대가 옛 부산진성 터라고 추정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미 파괴된 데다 현재는 시가지가 들어서 있어 남은 흔적이 전무하다.
파일:그림131.png
『동래부사접왜사도』에 묘사된 조선후기 부산진성
조선후기 부산진성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지역으로, 『대동지지』는 둘레 5,356척(尺), 『영남진지』 「부산진지(釜山鎭誌)」 성첩(城堞) 조는 1,108보(步)[6,648척], 성가퀴 487토(吐)로 기록하고 있다. 현대 단위로 환산하면 약 2.25km의 대규모 수군진이었다. 현재의 성남초등학교 서측 부터 부산진시장, 조방 남부, 조선통신사역사관까지의 범위인데, 마찬가지로 지속된 도시화로 외곽부 성벽은 남은 흔적이 거의 없으며 유일하게 조선통신사역사관 측면 암벽에서 짧은 체성부 구간이 발굴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콘크리트 개건 복원품인 서문과 동문이 자성대공원 양측에 있으나 원래의 부산진성 체성과는 연관이 없고, 오로지 서문 양측 축대를 이루던 우주석(隅柱石)만이 남아 그 흔적을 전한다.

여러 점의 회화나 사진자료를 대조해 봤을 때 대개 자성대왜성의 최외곽 석축을 그대로 수군진의 성벽으로 삼았고, 성문과 여장을 조선식으로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왜성의 외곽부에는 수군진에 소속된 군졸과 주민들의 거주지, 화약고, 시장, 객사 등이 들어서 있었고 주곽부에는 동헌 관아와 군창 등이 존재했다. 성곽의 서문 밖에도 영가대, 굴강 및 부속 관아들이 배치되어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 정공단

파일:정부상징.svg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0호
<colbgcolor=#315288> 정공단
鄭公壇 | Jeonggongdan Alter
파일:20210916_142204.jpg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구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제사유적 / 제사터
면적 1,503.2㎡
지정연도 1972년 6월 26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링크 공식 홈페이지
파일:1000012847.jpg
1952년 정공단 내삼문 전경
파일:20210916_142911.jpg
정공단 전경
[clearfix]
부산진 전투에서 분전 끝에 순절한 충장공 정발 장군과 그와 함께 순국한 인물들을 기리기 위해서 비석을 세워 모신 제단이다. 1766년에 부산진 첨사 이광국(李光國)이 옛 부산진성의 남문 터[5]에 제단을 쌓았고, 이후 부산 첨사들은 부산진성이 함락된 날인 음력 4월 14일[6]이 되면 제사를 지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수군첨절제사 제도가 폐지된 후에는 지역 주민들이 중심이 된 향사계(享祀稧)에서 제사를 올렸다. 1907년 순종황제가 남쪽 지방을 순시할 때 지방민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하사금을 내려 단을 유지케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제단이 폐쇄되고 유물과 비품도 몰수당했으나 광복 후 향사계가 재조직되고 옛 비석을 되찾았다. 1948년 제단을 새로 조성하면서 뒤쪽으로 별단을 쌓아 옛 비석을 안치했고, 2009년 옛 비석은 땅에 묻고 제단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사단법인 정공단보존회에서 매년 음력 4월 14일에 제향을 주관하고 있다.

평삼문 형식의 외삼문을 들어가면 좌측에 충장공정발전망비가, 우측에 역대 부산진 첨사들의 영세불망비가 옮겨져 있다. 계단을 올라 솟을삼문 형식의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공단이 나온다. 단의 중앙에는 정발장군의 비를 세우고, 서쪽에는 정발의 막료였던 이정헌(李庭憲), 동쪽에는 첩 애향(愛香), 남쪽에는 여러 군민들을 모시고 있으며, 남쪽 층계 밑에는 노비 용월(龍月)의 단이 마련되어 있다.

4.1. 충장공정발전망비

파일:정부상징.svg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0호
<colbgcolor=#315288> 충장공 정발 전망비
忠壯公鄭撥戰亡碑 | Stele of Jeong Bal
파일:20210916_142312.jpg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구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 1기
지정연도 2015년 10월 7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링크 공식 홈페이지
파일:1952년 부산 동구 좌천동 정공단의 정발장군 전망비에서 기념 촬영을 한 미군.jpg
1952년 비석 옆에서 기념 촬영을 한 미군
[clearfix]
1761년 경상좌수사 박재하(朴載河)가 정발의 공덕을 추모하려고 영가대에 세운 비석이다. 1910년대에 부산 전차 노선을 부설하면서 영가대가 헐리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비의 앞면에는 忠壯公鄭撥戰亡碑(충장공정발전망비)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임진왜란 당시 정발 장군의 행적과 비를 세운 과정이 새겨져 있다. 좌측면에는 비석을 세운 날, 우측면에는 박재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부산포 지역과 부산진이 국방의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려 주는 좋은 자료이며, 구름 사이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듯한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이수(螭首)의 조각 기법이 뛰어나 조각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5. 자성대왜성

왜성
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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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生浦倭城
임랑포왜성
林浪浦倭城
기장왜성 | 죽성리왜성
機張倭城 | 竹城里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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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萊倭城 | 東萊邑城
부산포왜성 | 증산왜성
釜山浦倭城 | 甑山倭城
자성대왜성 | 부산진성
子城臺倭城 | 釜山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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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왜성
龜浦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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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골포왜성
安骨浦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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熊川倭城
명동왜성
明洞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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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眞浦倭城
장문포왜성
長門逋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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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왜성
順天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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栗浦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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塔浦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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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馬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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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멸실된 왜성}}}
<colcolor=#fff> 자성대왜성
[ruby(子, ruby=チャ)][ruby(城, ruby=ソン)][ruby(台, ruby=デ)][ruby(倭城, ruby=わじょう)] | Jaseongdae Japanese Fortress
파일:1000012741.jpg
<colbgcolor=#BE0529> 이칭 소서성(小西城)
환산성(丸山城)
만공대(萬公臺)
형태 왜성
면적 약 24,198㎡
건설 1592년 (선조 25년)
아사노 나가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폐성 1598년 (선조 31년)
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파일:부산진성 전경 2.jpg
자성대왜성을 재활용한 부산진성의 원경
파일:스크린샷 2025-01-02 192151.png
자성대왜성 추정 구조도
[clearfix]
자성대왜성은 부산포왜성의 데지로(出城)로, 전형적인 윤곽식 평산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범일천 하구에 솟은 구릉지 위에 혼마루를 두고, 반시계 방향 나선형으로 부곽을 배치했다. 구루와의 개념이 없었던 조선에서는 주로 주곽부와 외곽부를 이분하여 외성과 내성으로 인식했고, 지금도 이런 인식은 계승되고 있다. 왜성을 이루고 있는 구루와의 수는 4개 혹은 5개를 상정할 수 있는데, 주곽부의 3개 구루와를 내성, 나머지를 외성으로 구분했다. 주곽부는 주로 내탁 기단이 많으며, 최외곽부에서 수군진성을 이루던 성벽은 남측과 서측, 동남측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협축식으로 되어 있었고 출입구가 4곳이었다. 외성벽의 바깥에는 서측 체성을 따라 길게 해자가 나 있었고, 나머지 삼면은 바다 및 하천과 접했으며 동남측은 암반 절벽 위를 타고 성벽이 뻗어 있어 방어에 유리한 요해지(要害地)였다. 하술할 부산진성의 세부 구조는 공간적으로 자성대왜성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므로, 내성 및 외성 등 조선식 성곽에 통용되는 개념보다는 왜성의 용어를 위주로 서술한다.

5.1. 외곽부(外郭部) ・ 외성(外城)

5.1.1. 금루관

파일:7da500a0-a067-4613-af52-dca606855e1e_size4.jpg
1880년대에 촬영된 금루관 #
파일:2726566_AVf.jpg
금루관 정면 #
파일:부산진성_금루관_220906.jpg
1970년대 콘크리트로 개건된 금루관
부산 동구 범일동 1564-2
부산진성의 주출입구 역할을 했던 것은 서문인 금루관(金壘關)이었다. 자성대왜성이었을 당시에는 육지를 향하는 유일한 고구치(虎口)이자 오오테구치(大手口)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성이었다면 목조 문을 설치했을 출입구 사이를 조선식 성돌로 메꾸어 성문을 설치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옛 사진을 보면 성문 양측의 성돌과 바깥쪽 체성 성돌의 형태와 축조기법이 확연하게 구별된다. 일본식 이시가키로 판단되는 체성 위에 조선식의 여장을 둘러 총안을 낸 이색적인 형태이다. 금루관은 쇠와 같이 굳센 보루의 관문 정도로 해석할 수 있으며, 전면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었다.

본래 부산진시장 골목길에서 철길 위를 건너가는 육교로 이어지는 도로 측면에 위치했으나, 1916년의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부산궤도가 부설되면서 서측 성곽이 대부분 헐린 1909년 이미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부산진성공원의 서측에 대강 모습을 재현한 기념물이 세워져 있는데, 19세기의 사진과 비교하면 알 수 있지만 대략적인 형태 이외에는 실제 금루관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5.1.2. 부산진성 서문 성곽우주석

파일:정부상징.svg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9호
<colbgcolor=#315288> 부산진성 서문성곽우주석
釜山鎭城 西門城廓隅柱石
Cornerstones at the West Gate of Busanjinseong Fortress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구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수량 2점
지정연도 1972년 6월 26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링크 공식 홈페이지

파일:남요인후.jpg
파일:서문쇄약.jpg
남요인후(南徼咽喉) 서문쇄약(西門鎖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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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석(隅柱石)은 집이나 성의 모퉁이 경계에 세운 돌기둥을 말한다. 금루관의 좌우 모퉁이에 경사지게 세웠고, 다테이시즈미(縦石積み) 기법으로 세워진 왜성의 입석(立石)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돌 위에는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왜적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새긴 글귀가 있는데, 동쪽 돌기둥에 남요인후(南徼咽喉)[7]가, 서쪽 돌기둥에 서문쇄약(西門鎖鑰)[8]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국토의 남쪽에 있는 부산이 국방의 요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임을 알리는 문구로 임진왜란 이후 국방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특히 조선전기 부산진이 부산포왜관을 통제했듯 조선후기 부산진은 초량왜관을 통제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금루관이 헐린 뒤 매립지에 세워진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보관되어 있다가 1974년 부산진성 정화사업 때 현 위치로 이전해 개건 서문 양측에 배치되어 있다.

5.1.3. 교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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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상각이 있었던 위치('하나패션' 간판 건물)
부산 동구 범일동 260-3
금루관 남쪽에 있었던 암문이다. 문을 나서면 바로 앞에 부산진성의 해자가 흐르고 그 위에 영가대와 통하는 수교(水橋)를 놓아 건너다니게 하였기에 교상각(橋上閣)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추정한다. 옛 사진을 보면 문 앞으로 키 큰 나무들이 도열해 있어 모습을 알기 어려우나, 조선시대의 회화자료에서는 석재 홍예문으로 된 성문이라기보다 나무로 된 쪽문처럼 그려지고 있다. 즉 교상각은 개거문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고, 왜성일 때부터도 출입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교상각 남측으로는 특이하게도 성벽이 돌출되어 해안가 방향을 막고 있었으며, 서남측의 영가대까지 이어졌다. 교상각 문 안쪽에는 부산진성의 화약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담으로, 그 위치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기존의 회화자료는 교상각을 일관되게 금루관 남측에 표현하고 있는 데 반해 최근의 부산진성 이름찾기 캠페인에서 제시하는 암문의 위치는 부산진성 동북쪽 모퉁이다. 기록상에 교상각 이외의 암문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 왜 이런 현상이 생겼는지는 의문이다.

5.1.4. 진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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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문이 있었던 위치
부산 동구 범일동 264-1
진남문(鎭南門)은 남쪽 해변의 모래사장으로 바로 통하던 문으로, 현재 성남초등학교 뒷면에 위치하고 있었다. 부산진의 장시(場市)[9]가 열렸던 서문 내부의 중심가와 丁자 모양 길로 이어졌고, 이 문으로 나가면 코앞에 바다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유사시의 통로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는 좁디좁은 골목길에 둘러싸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당시 성문 밖을 나가 ㄴ자로 꺾어 동문과 통하게 한 옛길은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5.1.5. 진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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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건된 부산진성 진동문 진동문의 원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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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문 터 서측에 일부 남아있는 성벽의 흔적
부산 동구 범일동 326-1
진동문(鎭東門)은 부산진성의 동남측에 솟은 암벽 옆의 좁은 공간에 위치했던 문이다. 자성대왜성의 카라메테구치(搦手口)에 해당하고, 성문의 형태는 평문(平入り)인 외곽부의 나머지 4개소 출입구와는 달리 어긋문(喰違い) 형식을 띠고 있었다. 안쪽에는 초량왜관과의 교역에서 대금으로 지불하는 공작미를 보관하기 위해 부창(釜倉)을 두었는데, 이는 동래부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성문 바로 바깥에 이 쌀을 초량왜관으로 수상하기 위한 왜미선창(倭米船倉)이 있었으며 해변가를 따라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1916년 지도까지만 해도 남아있다가 이후 자성대공원 주변에 도로와 시가지를 정비하면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는 현재 조선통신사박물관 바로 앞인데, 1974년 정화사업 당시 서측 약 20m 지점에 개건되었다. 금루관과 마찬가지로 원형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며[10] 이름도 건춘문(建春門)이라는 생뚱맞은 현판을 달아 비판을 받았다. 현재 현판은 진동문으로 환원된 상태이다.

진동문 바로 앞에 들어선 조선통신사역사박물관 건설 부지에서 성문과 이어져 있었을 부산진성 외곽부의 성곽이 발굴되었다. 그 형태는 전형적인 왜성의 건축 양식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며 수 차례 삭평과 재축조를 반복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현재는 개건 영가대 바로 옆에 산책로 축대처럼 되어 있는데, 보존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현재까지 유일하게 잔존하는 외성의 체성이다.

5.1.6. 구장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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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루가 있었던 위치('통영숯불바다장어' 간판 건물 앞)
부산 동구 범일동 626-2
북문은 현재의 부산 조방타운 일대에 위치했고, 이름은 구장루(龜藏樓)였다. 부산진성 5개 출입구 중 가장 알려진 정보가 적은 곳으로, 범일천 방면을 향하고 있었으며 문현동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 있었다. 거북 구(龜) 자를 쓰는 것으로 보아 북쪽이라는 방위 및 현무와 관련이 있는 이름으로 보인다.

5.1.7. 공진관

파일:1910년대 부산 동구 범일동 자성대와 부산진 객사.jpg
공진관 좌측면
파일:1155.jpg
부산진성 내성 구역에서 내려다본 공진관 우측면과 백일당 배면 #
파일:부산객사.jpg
공진관 정면 #
부산 동구 범일동 290-1
부산진성의 객사는 공진관(拱辰館)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다. 조선통신사가 오가는 지착지이고, 초량왜관의 인사와 일본 사신을 제일 처음 맞이하는 국경의 보루였던 부산진성의 특성상 거기에 딸린 객사도 일종의 외교 관사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 위용이 동래부 지방의 객사 중에서는 대단했다고 한다. 일본 사신의 숙배례(肅拜禮)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일반적인 객사와 같이 솟을지붕으로 된 본관과 동서익헌으로 이루어져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각종 사료를 종합해 보면 외삼문과 내삼문이 딸려 있었다. 동측에 부산진의 사정(射亭)인 관덕정(觀德亭)[11]이 있었고, 그보다 더 동측의 구장루로 통하는 길 건너편에는 별포군관청이 있었으며 이름은 백일당(百一堂)이었다. 위치는 대강 부산진시장과 남문시장 사이이다.

5.1.8. 영가대

파일:img1.영가대1.jpg
부산궤도 철도 건너편에서 본 영가대 (1905)
파일:스크린샷 2025-01-03 195206.png
영가대와 부산진성 남측 돌출 체성 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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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대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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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조선통신사역사관에 개건된 영가대
파일:search.pstatic123.jpg
2020년 조성된 영가대 본터
부산 동구 범일동 254-8
영가대(永嘉臺)는 부산진성 서측 외부 선창의 곁에 솟아 있던 작은 언덕 위에 망루(望樓)를 겸해 세운 정자로, 해당 위치는 현재 크게 확장된 경부선 철도 한가운데가 되어 있다. 1614년 경상도 순찰사 권반(權盼)이 부산진의 선창을 만들었을 때, 파낸 흙이 언덕을 이루자 그곳에 망루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부산진성에서 부자연스럽게 돌출된 성곽이 해안가를 막으며 영가대까지 이어졌던 것을 볼 때, 임진왜란 당시 자성대왜성으로 쓰였을 당시부터도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가 뻗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세울 때는 이름이 없었으나, 1624년 일본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부산에 파견된 선위사 이민구(李敏求)가 권반의 본향인 안동의 옛 지명 영가(永嘉)를 따서 명명했다.

영가대 앞의 선착장은 20세기 초 경부선을 부설할 때 매축되었고, 영가대는 부산궤도를 놓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1917년 부산의 일본 거류민단장을 지낸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에게 팔려 그의 별장 능풍장(陵風莊)으로 옮겨진 후 흔적이 사라졌다. 1951년 10월 15일 영가대 기념비를 세웠다.[12] 2002년 12월에는 부산광역시 동구청에 의해 영가대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고, 2003년 9월 25일 조선통신사 역사관 경내에 영가대를 개건했으나 원형과는 전혀 다른 일반적인 조선시대 누각 형태로 조성되었다. 2020년에 영가대 본터로 명명된 경부선 철도 곁에 소형 영가대 모형을 만들어 작은 쉼터와 같이 조성해 현재에 이른다.

그 형태는 회화자료마다 상이하다. 18세기 초 정선이 그린 「동래부사접왜사도」에서는 정면 5칸의 합각지붕 형태를 띠고 있지만, 1748년에 그린 이성린의 「사로승구도」에서는 작은 창문이 있고 사방이 막혀 있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형태를 띠고 있다. 1770년에 그린 김윤겸의 「영가대」에서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사방이 트여 있다. 『부진 제영(釜鎭題詠)』의 「영가대기」에 '창과 벽이 무너지고 단청이 흐려졌다'라는 구절이 있어, 적어도 1748년까지는 창과 벽이 있는 형태였다가 1770년경에 창과 벽이 없어진 형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20세기 초에 찍힌 사진자료에는 팔작지붕의 측면 3칸 누각으로 되어 있다. 200년이라는 기간 안에 중건을 수 차례 거친 결과물로 보인다.

조선통신사를 비롯한 역대 대일(對日) 사신들이 무사 항해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해신제당(海神祭堂), 통신사 일행의 승선(乘船) 연습과 같은 행사의 개최지, 휴식의 공간 등의 역할을 겸했으며 조선통신사의 출발과 귀환의 상징적인 지점이 되기도 했다. 북송의 문인 왕우칭(王禹偁)의 소죽루(小竹樓)에 비견되었고, 밀양 영남루 영천의 조양각(朝陽閣)보다 뛰어난 경관으로 평가받았으며 시인 묵객들에게 인기가 많아 영가대 팔경(永嘉臺八景)[13]이 존재할 정도였다. 역대 동래부사들이 여러 차례 영가대에 대한 한시를 남겼고, 통신사 사행원들 역시 해신제를 지내고 출국하며 시를 많이 썼다. 또한 1719년 통신사 제술관 신유한(申維翰)이 집필한 『해유록(海游錄)』에는 영가대 해신제의 모습이 오늘날 그대로 재현 가능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해신에게 올리는 제문, 제주(祭主)가 자신의 존재를 밝힘과 동시에 해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제주고신(祭主告神), 해신의 덕을 찬양하는 송신(頌神), 제의 목적 고지와 해신의 가호 기원, 흠향 및 축원 등 제문의 구성과 내용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5.2. 주곽부(主郭部) ・ 내성(內城)

5.2.1. 제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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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루관 위에서 바라본 주곽부와 우측의 제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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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남긴 제남루 안쪽 스케치 (189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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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남루가 있었던 위치
부산 동구 범일동 321-19
부산진성의 주곽부 구역으로 들어서는 주출입구로, 어긋문(喰違い) 방식의 왜성 고구치 사이에 개거식 누문(樓門)을 세워 부산진 동헌으로 들어가는 원문(轅門)으로 삼았다. 『영남진지』는 원문의 이름을 제남루(濟南樓)로 기록하고 있으나, 각종 사진자료와 외국인들이 방문 후 남긴 기록을 보면 원문 정면에 제남루라는 현판이 따로 걸려 있지는 않았고 대신 뒷면에 수항루(受降樓)라는 현판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원문의 다른 이름인 폐문루(閉門樓)로도 불렸고, 그 형식은 여느 고을 관아의 원문과 비슷하게 3칸 규모의 중층누문이었다. 바로 남측에 붙은 외곽부 체성에는 임진왜란 시절 타몬야구라(多門櫓)가 올라섰을 것으로 보이는 역ㄱ자 축대가 존재했다.

5.2.2. 주해루 ・ 제3곽(三ノ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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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촬영된 주해루
부산 동구 범일동 321-10
부산진성 관아의 동헌(東軒)은 다른 아사와 구별되어 주곽부 이시가키 안쪽의 제3곽(三の郭)에 있었다. 제남루를 들어선 뒤 ㄱ자로 꺾어 내삼문을 들어가면 있었는데, 그 위치는 현재 부산진성 서문이 개건되어 있는 부지의 약간 북쪽에 해당한다. 『영남진지』는 동헌 이름을 검소루(劒嘯樓)로 기록하고 있고 호준(虎蹲), 완대헌(緩帶軒) 편액이 함께 걸려 있었다고 전하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사진 및 기록을 살펴보면 어느샌가 당호가 주해루(籌海樓) 함벽당(涵碧堂)으로 바뀌었고, 그 규모도 『영남진지』에 실린 8칸보다 증축되어 있다. 내삼문 바깥에는 길게 관청들이 줄지어 서 있어 그 위세가 경상좌수영보다도 번듯했다고 한다. 부속 건물로는 내아와 양무당(養武堂)이 있었다.

5.2.3. 제2곽(二ノ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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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자성대 서북측에서 올려다본 주곽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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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고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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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루 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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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곽 이시가키 축조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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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
주해루의 동측 구릉지 위에 있는 최중심부는 조선식으로 개조되지 않아 왜성의 형태를 그대로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자성대왜성이라 하면 으레 이 구역을 일컫는다. 현재 부산진성공원 경내에 분포하는 왜성 주요부에는 총 2곳의 곽(郭)이 잔존한다. 하단의 제2곽은 북측과 서남측에 어긋문식 고구치가 1곳씩 있어 외곽부 및 제3곽과 통한다. 곽의 서북측 모서리에 야구라다이(櫓台, 망루 기단)가 조금 높이 솟아 있었지만, 공원화하는 과정에서 삭평한 상태다. 북측 고구치 바깥으로 현대식 축대가 추가로 배치되어 체육공원처럼 기능하고 있으며, 이곳을 기점으로 조성해 놓은 부산진성 둘레길을 걷다 보면 높이 약 4~5m에 달하는 제2곽의 이시가키를 아래쪽에서 볼 수 있다. 또한, 둘레길 서측 주택가로 이어지는 비탈에 제3곽과 연결되던 노보리이시가키가 일부 남아있다.

5.2.4. 제1곽(一ノ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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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고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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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 고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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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곽 이시가키 축조 상태
자성대왜성의 심장부인 제1곽은 곧 부산진성공원 정상이다. 서북측의 천수대 곁으로 난 북측 고구치와 반대편의 남측 고구치는 마스가타(枡形) 방식으로 되어 있고, 현재는 정상부로 통하는 계단이 올라가 있다. 비교적 넓은 제1곽 정상부에는 육상 트랙과 족구장 등이 설치되었다. 자성대왜성의 흔적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이며 조선후기에는 자성대(子城臺), 만공대(萬公臺) 등으로 불렸다. 해발 36m의 가파른 구릉지 위에 자리잡고 있어 부산포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는 입지였지만, 현재는 공원 내 나무가 우거지기도 했고 원래 바다였던 곳이 매립된 상태라 보이지 않는다.
5.2.4.1. 천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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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대 서측 축대와 개축 흔적
제1곽의 서북측에 돌출된 형태로 천수 기단이 존재했으나 현재는 제2곽의 망대와 같이 삭평되어 내부에서는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고, 다만 제2곽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왜성 특유의 곡선형 축대가 매우 양호하게 남아있어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천수대 서남측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자성대왜성을 여러 차례 개축한 증거로 Y자의 선형 흔적이 선명하게 잔존한다.
5.2.4.2. 승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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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개건된 승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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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대(鎭南臺) 현판이 걸린 정면
승가정은 부산의 자성(子城)에 있다. 산이 마치 엎어놓은 가마와 같다 하여 부산(釜山)이라 한다. 그 지형을 따라 돌을 쌓은 것이 성의 형상과 같기 때문에 자성이라 한다. 그 위는 평평하고 시원하여 수천인이 앉을 만하며 바다와 산의 승경이 다 모이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마땅히 정자나 대(臺)처럼 올라가서 경치를 바라볼 만한 곳이 있을 법하나 아직도 이것들이 없는 것은 아마도 기다림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임인년에 부산진 수군첨절제사로서 이곳에 부임하여 작은 정자를 지었다. 기와를 덮고 여섯 모퉁이에 기둥을 세웠으며 각 면마다 둥근 난간에 단청을 올렸으니 이로부터 자성이 갑절이나 광채를 더할 수 있었다.

부산에는 본래 영가대(永嘉臺)가 있어 이름을 온 나라에 떨쳤는데, 내 정자가 마침 만들어져 승가(勝嘉)라 이름하였으나 이는 영가대(永嘉臺)보다 낫게 되기를 힘쓰려 함은 아니다. 승가(勝嘉)의 뜻은 좋은 땅으로 인해 아름다운 정자를 짓는다는 데 있다. 영가대는 물가에 있고 승가정은 산의 꼭대기에 있다. 이쪽보다 나은 것이 있고 저쪽보다 못한 것이 있는 것은 황학루(黃鶴樓)와 봉황대(鳳凰臺)의 그것과 같다. 비록 이백(李白)과 최호(崔顥)의 문장으로서도 능히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것이니, 내가 어찌 감히 옛사람이 선편(先鞭)을 잡은 것에 대해 승부를 다투려 하겠는가? 아, 이 곳은 곧 옛날의 전장이다. 옛날에 용사(龍蛇)의 난이 있었을 때에 명나라의 장수가 공을 비석에 새겼는데 세월이 점차 멀어지니 귀두(龜頭)는 깎여 떨어져 나가고 글자의 흔적은 인몰(湮沒)되어 지나가면서 보는 사람마다 발걸음을 멈칫하면서 탄식해 마지 않았다. 그런데 옛날의 무너진 대가 이제 와서는 명구(名區)가 되었으니 이는 흥하고 폐함에 때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 정자에 오르면 평평하고 대해(大海)를 굽어보고 대마도를 바로 바라볼 수 있으며, 꽃 피는 아침과 달 뜨는 저녁에 술을 들고 칼에 기대고 있노라면 매양 강개(慷慨)하여 옛날을 생각하는 정을 금할 수 없으며, 산수의 뛰어남과 풍물의 아름다움이 여섯 기둥의 주련에 갖추어져 있다. 나는 무인(武人)인지라 글로써 울릴 수 없어, 진경(眞境)을 그려내는 것에 이르러서는 후세인을 기다리려 한다. 만약에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나를 이어 그것을 고쳐 지을 것이며, 또한 내가 승지(勝地)로 해서 가정(嘉亭)을 지은 뜻을 알 것이다.
『영남진지』에 실린 이희봉의 글
승가정(勝嘉亭)은 1842년 자성대왜성 꼭대기에 부산진 첨사 이희봉(李熙鳳)이 처음 지은 육우정(六友亭)이다. 각 방향마다 6개의 주련을 걸어 놓았다고 한다.[16] 장대(將臺)를 겸했는데, 자성대의 입지가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있고 임진왜란 당시부터도 천수가 올라갔던 것을 감안할 때 충분히 장대가 들어설 만한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특이하게도 육각 정자 형태를 하고 있던 것은 장대 이전에 자성대가 부산진의 경승지로서 인식되었기에 조경을 고려한 결과물인 듯하다. 승가정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부산진성 주변이 개발되면서 사라졌다. 1974년 정화사업 당시 자성대의 정상에 장대 모양의 구조물을 개건하고 진남대라는 현판을 달았다. 부산진성 진남문에서 이름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형태와 현판 모두 고증에 맞지 않는다. 2022년 9월 진남대 안내판은 승가정으로 교체되었으며 현판도 이에 맞추어 새로 달 예정이다.
5.2.4.3. 천장군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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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전면부 비석 후면부
승가정의 동측면에는 명나라 장수 천만리(千萬里)를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정식 명칭은 천만리영양천공비(千萬里潁陽千公碑). 본래 이 자리에 있던 공덕비가 일제강점기에 자성대공원을 조성하던 중 철거되자 1947년 3월 영양 천씨 문중에서 자성대에 새로 세운 비석이고, 하나의 돌에 이수(螭首)와 비신(碑身)을 함께 묶었으며 자연스럽게 이수 문양을 새겨 넣었다. 그 아래에 양 191×29㎝, 음 161×44.5㎝의 크기로 제액과 유기(遺記)를 새겼다. 비의 크기는 높이 264㎝, 너비 99㎝, 두께 31㎝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총독장 화산군 영양 천공지비(摠督將花山君潁陽千公之碑)라고 쓰여 있고 뒷면의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이름은 만리이고, 호는 사암(思庵)이며, 시호는 충장(忠莊)공이다. 시조는 중국 판도승상 암(岩)의 □대 후손이다. 임진왜란 때 총독으로 5군을 이끌고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로서 명을 받아 동쪽으로 와서 조선을 구원하였다.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이겨서 평양에 머물렀으며, 그 공로로 자헌대부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개선해 돌아오던 날에 온 나라의 관민들이 공덕을 길이 추모하여 부산 자성대에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묻혀 버렸으며, 이끼가 끼고 글자가 부서졌다. 뜻하지 않게 몇 년 전에는 일본군들이 비석을 철거하였으니, 아! 우리 후손들은 슬픔을 이길 수 없어 옛날을 추모하여 새롭게 비석을 세운다.

단기 사천이백팔십 년 정해 삼월 삼일 경진 기준 기열 봉의 형식 명와 영화 기조 상경 응진 치만 윤억 유홍 민섭
公諱萬里 號思庵 諡忠莊公 肇祖中華版圖丞相公 諱岩□代孫也 去壬辰 以摠督 將五軍 帥調兵 領糧使 奉命東征 來救朝鮮 三戰三捷 仍留箕城 策勳資憲大夫 奉朝賀 封花山君 凱還之日 擧國官民 永慕功德 立石于釜山子城坮 歲久湮沒 苔蝕篆泐 不意前年 枉被倭兵拔去 嗟我後孫輩 不勝憾愴 追古增新 檀紀 四千二百八十年 丁亥 三月三日 慶鎭 琪準 基烈 鳳儀 亨植 明窩 英華 基祚 尙卿 應鎭 致萬 潤億 有洪 敏燮

5.2.5. 최영 장군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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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정면
제1곽의 외부 동측의 경사면에는 조그마한 최영 장군 사당이 있다. 왜군을 격퇴한 최영의 공적을 기리고 지역 수호신으로 삼아 제사를 드리는 장소로 실존 인물이 민간신앙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도 매년 단오에 제례를 올린다. 본래 당집과도 같은 1칸의 작은 사당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벽돌과 시멘트로 만든 조적식 건물에 기와만 올린 형태다. 내부에는 무민공최영장군비(武愍公崔瑩將軍碑) 앞에 최영의 초상이 놓여 있고, 국태민안(國泰民安) 충효위국(忠孝爲國)이라는 글귀의 족자를 걸어 놓았다.

6. 가치

부산진성은 조선의 남쪽 국경선을 이루던 수군진으로서 대일 외교의 변천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곳이다. 자성대왜성을 그대로 성곽으로 삼으며 일본의 성과 조선의 수군진성이 결합된 희귀한 양식을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예시는 전국에 서생포왜성과 더불어 유이한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왜성 구역은 여러 차례 개축된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16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한일 축성술의 발전 양상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또한 조선통신사의 기착점으로서 기능하면서 수많은 문학작품이 태어나는 원동력을 제공했고 근대에 형성된 매축지 마을과 조선방직, 부산항 등과 인접해 있어 이 지역의 중심이 동래에서 부산포로 옮겨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7. 교통

지하철로 갈 경우 범일역에 내려 2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그러나 부산진성공원 자체가 지하철과는 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500m가 넘는 거리를 생으로 걸어가야 한다. 버스를 탈 경우 부산진시장 정류장에 내리면 그나마 거리가 절반 정도 줄어들어 편하다. 이쪽 방향에서 접근하면 대개 부산진성공원의 북문이나 개건 서문 쪽으로 통하고, 동문 및 조선통신사역사관으로 가려면 부산진성공원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편하다. 서면에서 부산역까지 이어지는 중심가도 옆에 위치하므로 한낮에 간다면 가는 길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모습을 볼 수 있다.

8. 외부 링크

9. 관련 문서


[1] 줄여서 첨사(僉使)라고 부른다. [2] 실제로는 두모포왜관이 조선전기 부산진성보다 조금 더 서남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비정한다. 대신 후대의 지도를 보면 과거 부산진이 있었던 자리에는 개운포진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3] 지성(支城)은 곧 본성에 딸린 작은 보루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자성대공원 자리에 위치했던 부산진은 지성이 아닌 본영이었으며 조선전기의 부산진으로 소급해도 지성을 둔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부산포왜성과 자성대왜성 사이의 관계를 부산진성에 적용된 것으로 착각하면서 벌어진 일로 추정된다. [4] 1834년 동래부 화사 이시눌이 그린 그림으로, 후대의 상상화이다. [5] 혹은 서문 터라고도 한다. [6] 임진왜란 2일차에 해당하는 날짜이기도 하다. [7] 남쪽 국경(南徼, 즉 부산진)은 나라의 목구멍(咽喉)과 같은 중요한 곳이라는 의미이다. [8] 금루관(西門)은 나라를 지키는 자물쇠(鎖鑰)와 같다는 의미이다. [9] 현재의 부산진시장으로 계승된다. [10] 금루관은 사진이라도 남았지만 진동문은 사진조차 없어 오로지 상상만으로 그냥 조선식 성문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11] 반구정(反求亭)이라는 현판도 달려 있었다. [12] 그 위치는 성남초등학교 뒤와 부산진시장 뒤 중 한 곳으로 추정한다. [13] 1618년 중양절에 이수(李璲)가 지은 칠언절구 한시 8수로, 『부진제영(釜鎭題詠)』에 기재되어 있다. 「영도로 돌아오는 배(影島歸帆)」, 「창포로 내려앉는 기러기(倉浦落雁)」, 「동향사(東向寺)의 새벽 종소리(蠻寺曉鐘)」, 「구봉의 저녁 봉홧불(龜峰夕燧)」, 「강선대 위를 흐르는 구름(降仙流雲)」, 「승학산의 짙은 아지랑이(勝鶴暗嵐)」, 「수정산의 석양(水晶返照)」, 「황령산의 비 갠 날 떠 있는 달빛(荒嶺霽月)」 등이다. [14] 『Korea and her Neighbors』, 「Gate of Old Fusan」 [15] 가장 위의 것이 제1곽의 천수 기단, 중간 것이 제2곽의 망루 기단, 가장 아래의 것이 제3곽의 체성이다. [16] '구봉(龜峰)의 저녁 연기각 푸르게 엉기는 것', '크고 작은 섬들에 아침해가 붉게 비치는 것', '강선대(降仙臺)의 높은 자라등', '절영도(絶影島)에 신기루(蜃氣樓)가 일어나는 것', '석추(石楸)에 파도가 울고 흰 물거품을 뿜는 것', 금용산(金湧山) 멧부리가 푸른 하늘에 깍아지른 듯 솟아 있는 것'.